진리코드로 문화읽기 | 이순신 장군의 리더쉽과 병법

[칼럼]

한재욱 / 본부도장

들어가는 말



지난 호에는 충효忠孝의 관점에서 이순신 장군의 생애를 살펴보았다. 이번 호는 두 번째 글로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과 병법’에 대해서 정리해 보려 한다. 김한민 감독의 〈명량〉⋅〈한산 : 용의 출현〉⋅〈노량 : 죽음의 바다〉 등 3부작 영화가 종결된 이 시점에, 이순신의 리더십과 전략을 알아보기 위해 부산 MBC에서 제작한 〈부산포해전〉 다큐 1, 2부, 그리고 상생방송의 〈다시 보는 충무공 이순신〉 프로그램의 핵심을 간추린다.

순천향대 제8대 이순신연구소장을 지냈던 임원빈 교수는 이순신 장군이 리더로서 세 가지를 갖추고 있다고 보았다. ‘첫째 실력, 둘째 역사의식, 셋째 고결한 인격’이 그것이다. 리더십에 있어서는 조직을 성장⋅발전시키고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실력과 역량이 중요하고, 시대적 사회 현상에 제대로 부합하고 참여할 수 있는 가치 지향의 역사의식이 있어야 하며, 자기 자신보다는 조직 공동체와 백성을 위해 살아가는 고결한 인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쉬운 승리에서 승리하는 자


임 교수는 이순신의 장계나 일기에 나온 내용들을 분석해 보고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을 발견했다고 한다. 명량해전 정도에서만 우리 함선의 수가 열세였지, 나머지 해전에서는 대부분 우리 함선 수가 많았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가 그동안 알던 장군을 보는 관점이 잘못돼도 크게 잘못됐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이순신이 위대한 것은 언제나 열세한 상황에서 우세한 적을 만나 싸워 이겼기 때문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인위적으로 우세한 상황을 조성해서 분산된 열세의 적과 싸워 이겼기 때문이다. - 임원빈 교수


무협지의 주인공들은 늘 신출귀몰해서 일당백 노릇을 한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역사적 실존 인물로 임진왜란 7년 전쟁을 치른 분이고 모든 해전海戰을 승리로 이끌었는데, 언제나 불가능할 것 같은 열세한 상황에서 우세한 적을 만나 싸워 이겼다는 것은 매우 왜곡된 이미지라는 것이다. 1대 10으로 싸워 이긴 장수와 10대 1로 싸워 이긴 장수 중 누가 위대한 장수인가? 우리는 소설 속에나 등장하는 일당백의 리더를 요구하고 있는 건 아닐까? 결론부터 말하면 이순신 장군은 환상적인 장수가 아니란 것이다. 『손자병법孫子兵法』 〈군형軍形〉 편에서는 훌륭한 장수의 조건을 이렇게 말한다.

고지소위선전자 승어이승자야 고선전자지승야 무지명 무용공
古之所謂善戰者 勝於易勝者也 故善戰者之勝也 無智名 無勇功
옛날에 이른바 싸움을 잘하는 자는 쉬운 승리에서 승리하는 자이다. 고로 싸움을 진짜 잘하는 자의 승리는 지혜롭다는 이름도 없고 용맹스럽다는 공도 없다.


진짜 싸움을 잘하는 자는 쉬운 승리에서 승리하는 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손자병법에는 진짜 싸움을 잘하는 승리는 지혜롭다는 이름도 용맹스럽다는 공도 없다고 했다. 그래서 누군가는 “10대 1의 상황이면 나도 이기겠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군의 승리는 기록이 증명해 준다. 이순신은 언제나 열세한 상황에서 우세한 적을 만나 판타지fantasy처럼 싸워 이긴 분이 아니고 어떤 상황에서도 인위적으로 우세한 상황을 조성해서 싸우신 분이다.

1. 이순신의 리더십 – 최고의 전문가가 되라(장군은 병법의 대가)
장군은 7년여 전쟁 기간 동안 어떤 전쟁 승리의 원칙을 적용시켜서 승리했을까?
임원빈 교수의 저서 『이순신 병법을 논하다』에서는 그것을 일곱 가지로 분석했다.

이순신의 병법을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이겨 놓고 싸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국가 간의 전쟁은 힘이 강한 나라가 이긴다는 것이 당연한 이치지만, 범위를 좁혀 구체적인 전투 국면에서 승리하려면 열세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우세한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이순신은 어떤 상황에서도 사전에 이길 수 있는 우세한 상황을 만들어 놓고 싸워서 승리한 분이다. 이것이 위대한 리더로서의 진짜 실력이라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일곱 가지 분석 중 겹칠 수 있는 내용을 빼고 다섯 가지를 살펴본다.

#1) 통합된 세력으로 분산된 열세의 적을 공격하라#
당시 일본의 함선은 전체 500~1,500척隻으로 평균 700~800척이 된다. 임진년 중후반 우리 조선의 함선 세력은 거북선과 판옥선을 합쳐 70~80척밖에 안 됐다. 아무리 조선의 함선이 무기 체계에서 앞서 있다 하더라도 넓은 바다에서 700척과 70척, 정확히 열 배의 차이로 싸운다면 우리가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 그런데 실제 전투 국면에서는 우리의 배가 훨씬 많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우리는 장군의 리더십으로 통합된 반면, 일본 수군의 함대 세력은 분산되어 노략질을 하다가 통합되어 움직이는 조선 수군을 만나서 차례로 깨진 것이다. 이순신은 언제나 가용 가능한 전 함선 세력, 즉 전라좌수영과 전라우수영, 경상우수영 등 삼도 수군이 함께 움직인다. 임진왜란 첫해에 있었던 네 번의 출동, 열여섯 번의 크고 작은 해전이 남긴 데이터를 살펴보자.

1차 출동에서 함선의 척 수를 비교해 보면, 옥포玉浦해전에서는 91 대 32로 우리가 세 배 많다. 합포合浦해전은 91 대 5, 적진포赤珍浦해전은 91 대 13이다. 우리 군의 피해는 전무하다. 전체적으로는 일본 함대의 수가 훨씬 많은데 막상 해전이 벌어지는 국면에 가면 우리가 더 많은 것이다. 임원빈 교수는 “리더는 이런 상황을 만들어야 되는 겁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포인트이다.

2차 출동 과정 중 사천泗川해전에는 거북선이 처음으로 참전했다. 이 사천해전은 26 대 13이었고, 당포唐浦해전은 26 대 21로 맞서 최초로 비슷한 숫자를 기록했다. 그런데 당포해전의 결과를 보면 우리 함선은 단 한 척도 손상이 없고 일본 함선은 스물한 척이 모두 격파되었다. 전투 함선 한 척당 전투 역량 측면에서 일본 함선보다 훨씬 질적 우위에 있다는 걸 보여 준다.

제3차 출동 때인 한산閑山해전에서는 우리가 58척, 일본 함선은 73척으로 전투함 숫자에 있어 우리가 적은 최초의 대결이었다. 그런데 전투 결과는 우리 쪽이 단 한 척의 손상도 없는 반면, 일본 함대는 73척 가운데 59척이 격파 및 나포가 되었다. 거의 전멸한 것이다. 그런데 일본 측 기록을 보면 한산해전 때 동원된 조선 함대의 함선 척 수는 거북선 3척, 판옥선 55척이고 여기에 전투함은 아니지만 지원선 50척이 있다. 그래서 총동원된 척수는 108척이다. 역시 척 수 측면에서 열세가 아니다.

제4차 출동에 대해 임 교수는 유쾌, 상쾌, 통쾌한 해전이라고 말한다. 가용한 모든 조선 수군의 함대가 일본군 침략의 본거지인 부산포釜山浦를 향해 나아갔다. 166척의 함선이 바다에 떠서 장관을 이뤘을 것이다. 중간에 만난 일본군은 166척을 보고 도망가기에 바빴고, 조선 수군은 이들을 깨뜨리며(35척) 전진하였다. 그리고 도착한 부산포에는 470여 척이 정박해 있었다. 일본군은 바다에 나오지 못한 채 포구에 배를 정박해 놓고서 육지에 진지를 구축해 포와 총을 쏘며 대항하였다. 조선 수군은 배를 타고 들락날락하며 공격을 하고 일본군은 고정된 육지에 올라가서 공격을 하니 사실 우리가 굉장히 불리한 해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수군은 일본 전함 백여 척을 깨뜨리는 전과를 올렸다.

#2) 적의 지휘선이나 주력함에 화력을 집중하라#
이순신은 해전이 벌어지면 적의 지휘선을 식별한 다음 거북선을 투입시켜 개전 초기에 지휘선을 격파하고 지휘관을 사살하였다. 그리고 물에 떨어진 지휘관을 꺼내 목을 쳐서 효시梟示를 했다. 개전 초기에 지휘선이 격파되고 지휘관이 사살되면 지휘 체계가 마비되고 사기가 땅에 떨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일제히 전진해 함포 포격전을 벌였다. 이때 거북선이 큰 역할을 한 것이다.

또한 한산해전 때 이순신 장군은 학익진鶴翼陣을 썼다. 학익진은 학이 날개를 편 듯이 함선의 대오를 배치하는 것으로, 전진해 오는 선두 2~3척에 총통을 집중해 사격을 하는 것이다. 한산해전 때 보여진 학익진은 근대 함포전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일본군의 해전 전술은 ‘등선백병전술登船白兵戰術’로, 원거리에서 활이나 조총을 쏘다가 가까이 와서는 배에 올라 칼싸움을 벌이는 형태였다. 그렇게 하려면 적의 함선에 무조건 붙어야 하는 게 기본이었다.

학익진은 그걸 기다리고 있다가 날개처럼 함대를 편다. 왼쪽에 세 척, 오른쪽에 세 척 해서 여섯 척만 있다 하더라도 각 8문의 포가 있다 하면 48문(6×8)이 되고, 이를 활용해 선두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2~3척에 화력을 집중하면 일시에 격파가 된다.

#3) 유리한 장소와 시간을 주도적으로 선택하라#
해전에서 내가 지금 주도권을 잡고 있는지, 주도권을 뺏겼는지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지금 싸우고 있는 이 장소가 내가 선택한 장소에서 싸우는가 아니면 적이 선택한 장소에서 싸우는가 이걸 판별하면 내가 주도권을 잡았다, 주도권을 뺏겼다는 걸 알 수 있다는 겁니다. - 임원빈 교수


임진왜란 해전에서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는 해전이 한산閑山⋅명량鳴梁⋅노량露梁해전이다. 그런데 이 중요한 세 해전에서 장소를 택한 분이 이순신이다. 이순신은 원하는 장소에서 싸웠다. 그렇게 되면 아군의 전투력은 극대화되고 적군의 전투력은 극소화된다.

한산해전을 살펴보면 전투가 벌어지기 전날 저녁에 일본 수군은 견내량見乃梁에, 조선 수군은 당포唐浦에 머물렀다. 김천손이라는 백성이 견내량에 있는 일본 함대의 정보를 전해 줬고 이순신은 이미 승리를 확신했다. 이순신이 고민한 것은 승패가 아니라 배에 타고 있는 일본 병사들을 어떻게 하면 다 죽일 수 있을까 하는 문제였다. 일본군은 불리하면 배를 정박하고 육지로 도망가기 때문에 배만 깨뜨려서는 충분한 손실을 주지 못한다.

때문에 이순신은 견내량으로부터 넓은 바다로 유인을 해낸다. 판옥선 5~6척을 투입해 약을 올려서 왜군을 한산도 앞 넓은 바다로 끌어냈다. 왜군 함대가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자 판옥선들이 삽시간에 방향을 바꿨다. 대기하고 있던 함선들이 학의 날개처럼 학익진을 펼치며 왜선을 포위하고 대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전의를 잃은 일본군은 한산도로 도망가는데, 당시 한산도는 무인도여서 도망가 봐야 그냥 두어도 굶어 죽는다는 생각까지 하고 작전을 세운 것이었다.

이 한산해전은 사실 조선 수군과 일본 정예 수군과의 한판 승부였다. 한산해전에 나선 일본 수군 지휘관이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인데 가장 훈련이 잘된 정예 수군 부대였다. 이 부대가 한산도에서 무너졌다. 정예의 적군을 맞아 작전대로 원하는 장소에서 전멸시킨 것이다.

#4) 지형의 이점을 십분 활용하라#

넓은 바다에서 싸웠던 한산과 비교해 13척을 가지고 133척, 실제로는 300여 척과 싸워야 하는 명량에서는 지형을 이용했다. 여러 명을 한 명이 상대하려면 좁은 골목길로 가야 한다. 명량해전 승리 요인의 1번은 골목길 전략이다.

회룡포에서 십여 척을 수습해서 작전상 후퇴를 하는데 뒤에는 300여 척의 일본 함대가 추적하고 있었다. 칠천량漆川梁해전에서 전멸당했는데 조선 수군이 아직도 있는지 궁금한 일본군은 정찰대를 편성해 공격해 왔다. 어란포於蘭浦와 진도 벽파진碧波津에서 공격을 받으며 작전상 후퇴를 하고 있는 이순신의 고민은 어디서 싸워야 승산이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한 사나이가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 『난중일기亂中日記』 정유년 9월 15일


이는 이순신이 명량해전 발발 하루 전날 휘하 지휘관 참모들에게 말한 내용이다. ‘일부당경一夫當逕 족구천부足懼千夫’라는 병법 전략이 바로 골목길 논리이다. 명량 물목은 200미터의 폭이 되지만 실제 배가 통과할 수 있는 곳은 150미터밖에 안 된다. 133척이 명량의 물목에 들어오는데 이순신은 명량의 물목 바깥에서 틀어막은 것이다.

133 대 13은 10 대 1이다. 그런데 명량의 물목이 좁기 때문에 133척이 한꺼번에 오지 못하고 5~6열 종대로밖에 올 수 없었다. 그 앞을 13척이 틀어막고 있으면 전체적으로는 133 대 13으로 우리가 10 대 1의 열세지만, 전투가 벌어지는 맨 앞에는 13 대 5 또는 13 대 6으로 수적數的인 측면에서도 우리가 불리할 게 없는 상황이 된다. 이것이 명량해전 승리 요인의 1번이다.

명량의 좁은 물목은 13척밖에 안 되는 조선 수군에게는 가장 유리한 장소이고, 300여 척이나 되는 일본 수군에게는 가장 불리한 장소이다. 아무리 열세한 상황에서도 실제 싸우는 구체적인 국면에서는 우세한 상황을 만들어 이기는 것이 병법이다.

한산도閑山島의 지형적 이점利點도 마찬가지다. 일본군이 보급을 위해 남해를 통과하여야 하는데 제일 먼저 맞닥뜨리는 섬이 거제도巨濟島이다. 거제도를 통과하려면 안쪽 견내량 쪽으로 가는 내해가 있고, 옥포조선소 쪽으로 돌아 나가는 외해 해로가 있다. 한산도는 거제도 바로 뒤에서 양쪽 길목을 막을 수 있는 최고의 지리적인 이점이 있었다. 이순신은 한산도에 조선 수군의 전진 기지인 통제영統制營을 설치하고 남해의 바닷길을 막음으로써 곡창인 호남이 보존되었고 그로 인해 조선은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경제적인 토대를 마련했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은 물자가 있어야 한다. 결국은 국력이 군사력이다.

명량해전과 관련된 숨은 이야기
증산도 『도전道典』 3편 95장에는 영재 교육의 대도에 관한 성구가 있다.

하루는 김형렬 성도가 상제님께 여쭈기를 “율곡栗谷이 이순신李舜臣에게는 ‘두보杜甫의 시를 천 번 읽으라.’고 권하여 ‘독룡毒龍이 숨어 있는 곳에 물이 곧 맑네.’라는 구절을 스스로 깨닫게 하였을 뿐이요, 임란壬亂에 쓸 일인 것을 일러 주지 아니하였습니다.”라고 하니, 상제님께서 “나도 그들과 같은 영재英才가 있으면 역시 그와 같이 가르칠 것이니라.” 하셨다.
율곡 이이李珥와 이순신 장군은 같은 덕수 이씨이며 19촌 숙질간叔姪間으로, 장군이 나이가 어리지만 항렬이 높다. 이율곡은 임진왜란을 예견해 10만 양병을 주장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순신을 찾아가 두보의 시를 알려 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두보의 시 원문은 ‘독룡잠처수변청毒龍潛處水便淸’으로 되어 있다. 충무공이 이 구절에서 영감을 얻어 울돌목의 명량해전을 대첩으로 이끌었다고 한다.


#5) 정확한 정보가 아니면 함부로 움직이지 마라#
우리는 통합된 상태이지만 적은 분산된 상태에서 해전이 벌어지려면 나는 적을 알되 적은 나를 몰라야 한다. 이순신의 정보 수집 체계를 살펴보자.


탐망선探望船은 조선 수군의 정찰선이다. 1593년 전투함이 96척인데 정보를 수집하는 탐망선이 106척이다. 전선 수보다 많은 탐망선이 쫙 깔려서 정보를 수집하며 일본 수군과 지상군의 활동 상황을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1597년 명량해전 당시 전선이 13척에 불과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전선 수의 세 배에 가까운 탐망선이 운영됐다. 회령포에서부터 후퇴하며 뒤에 32척의 정보선을 깔아 놓고 육지에도 육상 정찰 부대를 파견했다.

그래서 조선 수군은 후퇴를 하면서도 일본군의 상황을 손바닥 보듯 알고 있었다. 얼마나 정확한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는지 확인해 볼 사례가 있다. 명량해전 이틀 전에 정보를 수집하는 탐망군관 임준영이 ‘명량 입구인 어란포에 적선 200여 척 가운데 55척 선발대가 도착했다.’는 보고를 하였다. 이순신은 즉시 전라우수영 쪽에 있는 백성들에게 빨리 도망가라는 지시를 하고, 진도에 있던 우리 수군도 명량의 물목을 빠져나가서 전라우수영으로 옮긴다. 그리고 진을 옮긴 이튿날 정확하게 일본 수군이 쳐들어왔다. 이를 보면 당시 커뮤니케이션 체계와 정보 수집이 얼마나 정확했는지, 그리고 그것을 작전에 얼마만큼 효과적으로 활용했는지를 알 수 있다.

2. 이순신의 리더십 - 소통이 경쟁력이다
합리적, 감성적 의사소통은 리더와 구성원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는 지름길이다. 조선은 신분 차별 사회로 지금보다 훨씬 권위주의적이고 종적인 사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군은 대화와 소통이 일상화되어 있는 분이었다. 일기 내용을 살펴보자.

식후에는 충청 수사 정걸과 이홍명과 광양현감 어영담이 와서 종일토록 군사 일을 이야기하였다. - 『난중일기亂中日記』 계사년 6월 4일

아침 후에 우수사(이억기)와 함께 적을 토벌할 것을 의논하는 참에 가리포도 오고 경상도 우수사도 와서 의논했다. - 『난중일기亂中日記』 계사년 6월 25일

늦게 우수사, 경상수사 및 두 조방장, 충청 우후, 경상 우후, 가리포, 평산포 등 열아홉 장수들과 함께 모여 이야기했다. - 『난중일기亂中日記』 계사년 8월 15일


늘 지휘관 참모들과 전술을 토의하고 같이 상의하는데 이것이 위기 상황에 빛을 발휘하였다. 사람은 천성적으로 의리, 명분, 이치, 진리에 부합하는 것을 좋아하고 따른다. 또한 감성적 공감이 이루어지면 하나밖에 없는 목숨도 내어놓는다. 이순신의 리더십은 성과 창출에만 작용한 것이 아니라 소통에서도 막힘이 없었다.

3. 이순신의 리더십 – 가치 의식 / 역사의식을 지녀라
영화 〈한산 : 용의 출현〉에서 항왜降倭 준사俊沙가 묻는다. “도대체 이 전쟁은 무엇입니까?” 이순신은 이렇게 답한다. “의와 불의의 싸움이지.” 이순신에게 있어서 임진왜란은 어떤 의미의 전쟁인가? 바로 ‘정의正義의 전쟁’이다. 수천 년 동안 조선에 은혜를 입어 온 일본이 침략을 해서 백성을 도륙하고 임금이 있는 도성을 침탈하는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만행을 보고 이순신은 하늘에 맹세를 한다. ‘정의가 승리한다는 것을 반드시 보여 줘야 한다, 단 한 척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겠다.’는 맹세였다. 마지막 노량해전은 치르지 않아도 되는 해전이었는지도 모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죽고 철군 명령이 내려지자 다른 전선에서는 왜군의 퇴로를 다 열어 주었다. 그런데 이순신한테 봉쇄당한 순천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부대만 못 돌아가고 있었다. 명나라 장수들은 모두 다 뇌물을 받고 풀어 주려고 했다.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陳璘도 뇌물을 받고 마음이 흔들렸다. 이에 이순신은 “도독 당신은 여기에 왜 왔는가? 명나라를 정벌할 테니 길을 빌려 달라는 명분하에 벌어진 전쟁이 임진왜란이고, 명나라 황제에 반역한 반역자들을 토벌하러 온 정벌군 대장이 뇌물을 받고 길을 열어 준다는 게 말이 되는가.”라며 설득하였고 결국 진린은 이순신의 논리에 승복을 했다. 또한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이 뇌물을 먹고 싸우지 않으니 “나는 차라리 순천의 귀신이 될망정 의리상 적을 놓아 보낼 수 없다.”라며 일갈하기도 했다.

결국 조명 연합 함대가 의기투합해서 벌인 해전이 노량해전이고 여기서 장군은 순국殉國하셨다. 노량해전은 마지막 해전이기도 하지만 이순신에게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이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 하는 역사의식과 가치를 배울 수 있는 전쟁이다.

4. 이순신의 리더십 – 인격이 리더십이다


이순신 주변에는 사람들이 모여든다. 원균 주변에는 사람들이 흩어진다. 왜 그런 것일까? 고결한 인격人格 때문이다. 인격의 정의를 간단히 얘기하면 뭐가 될까? 임진왜란에서 생각해 보면 ‘언제나 백성과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 그것이 인격이다. 평소에 자신보다는 항상 나라와 백성과 임금을 생각하는 이순신의 마음에 감복을 받아서 전문성을 가진 기라성 같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리고 각자의 역할을 다한다.

거북선은 나대용羅大用이 만들었고, 정보를 가져오는 사람, 보급을 책임진 사람, 판옥선 만드는 사람, 무기 체계 만드는 사람 등등이 각각 자기 역할을 다했기 때문에 그것이 시너지synergy가 된 것이다. 이 중심에 이순신의 고결한 인격이 있었다. 지휘관 참모뿐만이 아니라 이순신 주변에는 의병, 승병, 백성들이 모여든다. 이순신의 고결한 인격이 조선 민관군民官軍의 전투력을 통합시키는 중심에 있었다.

이순신은 세 번의 파직罷職과 두 번의 백의종군白衣從軍을 당했지만, 결국은 필요한 때 다시 살아나서 필요한 시기에 필요한 직책을 부여받아 가지고 있는 역량을 120퍼센트 다 발휘하고 돌아가신 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순신은 행운아라 볼 수 있다. 역사에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지만, 그중 어떤 사람은 이런 기회를 부여받고 어떤 사람은 부여받지 못한다. 이순신 뒤에는 엄청난 백back이 있었다. 이순신을 뒤에서 지원하고 받쳐 준 후원자들은 학연, 혈연, 지연으로 연결된 백이 아니다. 이순신을 도와준 류성룡柳成龍, 이원익李元翼, 이항복李恒福 등은 충효의 철학으로 무장하고 문과 무과 시험을 통과해 들어온 건전한 조선의 관료들이다.

저는 이것을 이순신 생태계라고 말합니다. 이순신이 시련의 관료 생활을 했지만, 그럼에도 필요한 시기에 필요한 직책을 부여받아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주변에 장군을 아끼고 사랑하고 도와주는 건전한 조선의 관료 생태계가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진 사회가 되려면 이순신 생태계가 조성이 돼야 합니다. - 임원빈 교수


결론 : 서명을 일심으로 쓰신 이순신 장군


장군은 ‘일심一心’이란 글을 수결手決(서명)로 쓰셨다. 『난중일기』에는 장군이 일심이라는 수결을 만들기 위해 연습한 흔적이 있다. 이순신 장군이 일심을 자신의 수결로 사용하였던 이유는 오직 한마음으로 나라와 백성에 충성을 다하려는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상제님께서는 “너희들은 오직 정의正義와 일심一心에 힘써 만세의 큰 복을 구하라.”(도전道典 2:43:3)라고 하셨다. 장군이 보여준 일심은 가을개벽 천지성공 시대를 맞은 우리 일꾼들에게 꼭 필요한 성공의 관건이 될 것이다. ◎


무신 치우천황께 제를 올린 이순신 장군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에 전쟁 중 둑제纛祭를 세 차례 거행하였다고 기록했다. 조선 시대에는 ‘둑제’를 지냈는데, 옛부터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서 군신軍神 치우蚩尤를 상징하는 깃발에 제사를 올리는 의식이다. 치우의 머리를 형상화한 둑기纛旗는 소의 꼬리나 검은 비단으로 만들어 ‘대조기大早旗’라고 불렀다.

조선은 둑제를 국가 제사인 소사小祀의 하나로 정비하고 전국에 둑소纛所를 마련하여 매년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냈다. 서울의 뚝섬에는 원래 둑제를 지내던 둑신사纛神祠가 있었는데, ‘뚝섬’이라는 이름은 이 둑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둑신사에는 치우와 헌원의 싸움인 탁록대전涿鹿大戰을 그린 높이 6자, 폭 36자의 벽화가 있었고 일제 말기까지 존속했으나 분실되었다고 한다.

치우천황蚩尤天皇은 황제헌원黃帝軒轅을 굴복시키고 서방 한족에게 동방의 신교와 천자 문화를 전해 준 대제왕으로서 병법兵法의 비조鼻祖이다. 주周나라 혁명의 일등 공신이며 병법의 중시조라 불리는 동이족의 재상 강태공姜太公도 제나라에 왕으로 분봉된 뒤 팔신께 제사를 올리면서 치우천황을 병주兵主로 모셨다.

치우천황께 제를 올리고 전쟁에 나갔고 조선 수군이 둑기, 즉 치우기를 걸었던 것을 보면 이순신 장군의 병법과 승리의 근원은 치우천황으로부터 왔다고 할 수 있다. 팔괘가 그려져 있는 둑기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깃발은 칠성이 그려진 초요기招搖旗(칠성기)이다. 또한 지금 태극기太極旗의 원형도 바로 치우기, 둑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