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코드로 문화읽기 |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에서 만나는 새로운 페러다임(2), 참여하는 우주

[칼럼]

들어가는 말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 책은 지난 1979년 3월 번역 초판이 나오자마자 난해한 주제를 다룬 책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단기간에 1만여 부가 팔렸다. 이는 당시로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초판에 13쇄를 기록한 이후, 1989년에 2판을 찍어 10쇄, 그리고 1994년에는 내용을 추가해 증보판으로 5쇄를 기록했다.

1980년대 초반,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이 책을 읽지 않고는 대화에 끼일 수가 없을 정도의 필독서로 자리를 잡았다. 서양 사상이나 과학에 주눅이 들었던 동양 사상이 서양인의 손에 의해 새롭게 주목받는 계기가 되었다.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이 이렇게 인기를 끈 이유는 동양인 자신들조차 푸대접해 왔던 동양 사상의 위상을 재조명, 현대 물리학의 이론 체계와 유사성을 밝혀 새로운 세계관을 열어 주는 이론을 담았기 때문”이라고 이 책의 역자인 김용정 박사는 밝힌다.

절대공간⋅절대시간⋅인과율만을 고집했던 오만한 고전물리학을 산산조각 내고 새로운 세계관을 열어 놓은 현대 물리학의 이론 체계가 이미 고대 동양 사상에 점철돼 있다는 저자의 주장은 서양인은 물론 동양인에게도 큰 충격파가 아닐 수 없었다. 현대 물리학의 거장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동양을 향하고 있었고, 이는 ‘신과학新科學(New Science) 운동’으로 확산되었으며, 유기체적 전일적 세계관은 ‘녹색綠色 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번 호는 두 번째 글로서 ‘참여’라는 주제로 이 책의 핵심 내용을 뽑아 보았다. 이 책 3부에는 이와 관련된 많은 표현들이 있다.

만물의 통일성


카프라는 동양적 세계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모든 사물과 사건들의 통일성과 공동의 상호 관계에 대한 깨달음, 곧 세계의 모든 현상을 기본적인 전일성全一性의 현시顯示(깨우쳐 보여 줌)로서 체험하는 것(책 146쪽)’이라고 했다. 전일성은 하나의 전체로서 완전히 통일을 이루고 있는 성질을 말한다. 모든 것들이 이 우주 전체의 상호 의존적이며 불가분의 부분들로서, ‘동일한 궁극적 실재의 다른 현현顯現’으로서 이해된다는 것이다. 현현은 영어의 Epiphany인데 이 말은 그리스어에서 온 것으로 ‘귀한 것이 나타난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렇게 동양의 전통들은 그 자신을 만물에서 나타내며, 만물은 그의 부분적이면서 궁극적이고도 불가분의 본질을 지닌 실재에 관해 끝없이 언급한다. 작가는 그 개념을 힌두교에서는 범梵으로, 불교에서는 법신法身⋅진여眞如(모든 개념과 범주를 초월)로, 도교에서는 도道로 생각했음을 밝혔다.

분할은 분별하고 범주화하는 우리의 지성이 궁리해 낸 하나의 추상이며, 개별적 사물들과 사건들이라는 우리의 추상적 개념을 자연의 실상이라고 믿는 것은 망상이라고 정리한다. 우주의 근본적인 전일성은 동양에 있어 신비적 체험의 중심적 특성일 뿐만 아니라 서양 현대 물리학의 가장 중요한 발견 중의 하나이다.

아원자 물리학의 다양한 모델들을 연구해 감에 따라 그것들이 물질의 구성 요소들과 그에 관련된 근본적 현상들이 모두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상호 관계적이고, 상호 의존적이라는, 그리고 그것들이 고립된 실체들로서가 아니라 단지 전체의 완전한 부분들로서만 이해될 수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 책 148쪽

※아원자 입자亞原子 粒子(영어: subatomic particle)는 중성자, 양성자, 전자처럼 원자보다 작은 입자를 의미한다.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


이 책에서 다룬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은 너무 옛날식 표현이 많아 이해가 오히려 어려울 수 있다. 그래서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 책의 핵심 내용과 부산대 김상욱 물리교육과 교수의 강연들을 토대로 필자가 새로 정리해 보겠다.

결정론決定論(Determinism)은 과거의 원인이 미래의 결과가 되며, 이 세상의 모든 사건은 이미 정해진 곳에서 정해진 때에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다는 이론이다. 결정론에 따르면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운동은 이미 그 전부터 결정되어 있으며, 어떤 법칙에 따라 합리적으로 움직인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Sir Isaac Newton과 라플라스Pierre-Simon Laplace 등은 결정론을 지지했다. 라플라스는 “우주의 모든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안다면 우주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20세기 접어들면서 양자역학量子力學(Quantum Mechanics)이 나오고 미시 세계에서 결정론이 통하지 않게 된다. 거시 세계의 물리량은 만유인력의 법칙이 통하여 고정적이고 예측이 가능한데, 미시 세계는 너무나 작기 때문에 양자역학이 지배하는 예측 불가의 세계이다.

예컨대 입자 a의 위치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입자 b로 입자 a를 때려야 한다. 광자가 입자 a를 때려 우리 눈에 반사되어 들어와야 비로소 관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시 세계의 물질은 너무나 작기 때문에 입자 a를 입자 b로 때린다면 입자 a의 속도가 변하게 된다. 반대로 입자 a의 속도를 측정한다고 할 때 관측하기 위해서는 입자 c로 입자 a를 때려야 한다. 입자 c로 입자 a를 때리는 순간 입자 a의 속도는 바뀌게 되므로 입자 a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알아내는 일은 불가능하다. 속도를 측정하면 위치가 변하고 위치를 측정하면 속도가 변하기 때문이다.


결정론에 따르면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운동은 이미 그 전부터 결정되어 있으며, 어떤 법칙에 따라 합리적으로 움직인다.
“우주의 모든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안다면 우주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 라플라스


이러한 불확정성은 유명한 ‘이중 슬릿 실험’(Double-slit experiment)에서 더 선명해진다. 현대 과학은 전자가 입자라는 것을 여러 가지 실험으로 알고 있었다. 전자를 쏘아서 바람개비도 돌려 봤고, 질량도 재 봤다. 그런데 전자를 위아래로 긴 두 개의 구멍(이중 슬릿)을 지나가도록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 문제에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구멍의 뒤에 벽을 설치하면 부딪친 위치에 두 개의 줄이 보일 것이다. 공(입자粒子, particle)을 던지든 총을 쏘든 사과를 던지든 두 개의 줄이 나타난다. 그런데 여기에 소리(파동波動, wave)를 통과시키면 파동은 두 개의 구멍을 동시에 지날 수 있고, 두 개의 구멍을 지난 다음에는 두 구멍 각각을 중심으로 다시 퍼지기 시작해서, 서로 간섭을 하여 복잡한 무늬를 만든다. 그래서 벽면의 스크린에는 줄이 여러 개 보이게 된다.

입자를 두 개의 구멍으로 보내면 줄이 둘만 나오지만, 파동을 보내면 여러 개의 줄이 나온다. 그런데 분명히 입자로 알고 있던 소립자 전자를 던졌더니 마치 소리를 보낸 것처럼 스크린에 여러 개의 무늬로 나타났다. 이것이 양자역학의 핵심 질문이다. 분명 하나씩 쏠 수도 있고 질량도 가진 입자인 전자가 파동과 같이 행동한다. 입자인 전자가 파동성을 갖는다. 이런 두 성질을 다 가진 것을 이중성二重性(duality)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세상의 모든 물질은 입자성과 파동성을 함께 지닌다는 것을 알아냈다.

재밌는 것은 파동인지 입자인지를 알려고 관측을 해 보면, 이중성 가운데에 한 개의 성질만을 보여 줄 수 있다. 두 성질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실험은 절대 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닐스 보어Niels Bohr라는 물리학자가 이야기한 상보성相補性(complementarity)이다. 우주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고 관측할 때 변화가 일어난다. 전자가 진행할 때에는 파동이다. 두 개의 구멍은 동시에 파동으로 지나가고, 마지막 스크린에 부딪히는 순간 이 전자는 입자로 변화된다.

코펜하겐 해석의 출발점은 물리적 세계를 관찰되는 체계(‘대상’)와 관찰하는 체계로 나누는 것이다. 관찰되는 체계는 원자, 아원자적 소립자, 원자적 작용 등등이 될 수 있다. 관찰하는 체계는 실험 장치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 사람이나 몇 명의 관찰자를 포함한 것이다. 그 두 체계가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진다고 하는 사실로부터 이제 커다란 어려움이 발생한다. - 150쪽


코펜하겐 해석(Copenhagen interpretation)은 양자역학에 대한 정통 해석으로, 닐스 보어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 등에 의해 제시되었다. 그 논의가 이루어진 장소였던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따온 이름이다. 20세기 전반에 걸쳐 가장 영향력이 컸던 과학 해석으로 꼽힌다.

측정이 대상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위치나 운동량 같은 기본 물리량을 아는 것이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측정을 하면 대상의 상태에 불연속적인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를 붕괴崩壞(collapse)라고 부른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과 슈뢰딩거Erwin Schrödinger 같은 양자과학자들은 동의하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된다.

이 사진은 1927년 10월 개최된 제5차 솔베이 회의(Solvay Conference) 때 찍힌 것이다. 솔베이 회의는 국제 솔베이 협회가 개최하는 세계적인 물리학 및 화학 학회 회의로 3년마다 열린다. 5차 회의 사진은 코펜하겐 해석 논쟁에 관련된 최고의 천재들이 모여 찍은 것인데, 인류 역사상 다시 없을 정모(정기 모임)라고 불린다. 사진의 인물 전원이 과학사에 굵직한 업적들을 남겼으며, 절반 이상인 17명이 노벨상 수상자이고 홍일점인 마리 퀴리Marie Curie는 심지어 복수 분야 수상이라는 위업을 달성한 사람이다. 이 인물들의 노벨상 수상 메달 개수는 18개다. 그런데 이 천재들이 모여서 나눈 결론이 동양의 진리 체계를 닮아 있었다.


양자역학은 내가 보지 않았을 때에는 여기 뭐가 있는지도 이야기를 하면 안 됩니다. 내가 보는 순간(관측) 여기 이 물체는 검은색으로 바뀐 겁니다. 그 전에는 무슨 색인지 모릅니다. 측정 전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이에 대해서 아인슈타인은 일침을 날립니다.
“그렇다면 내가 달을 보는 순간 달이 그 위치에 놓이는 거니까, 내가 달을 보지 않으면 달은 거기에 없는 것인가?”
내가 보지 않았지만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봤다면 달이 거기 있어도 되는 걸까요? 근데 나는 아직 안 봤거든요. 그러면 언제부터 달이 거기 있게 된 것이죠? 첫 번째 호모사피엔스가 달을 봤을 때 거기에 생긴 건가요? 그 전까지는 존재하지도 않았다가 인간이 달을 봤을 때 생겼다면 그건 너무 인간 중심적인 생각이잖아요.
그렇다면 눈을 가진 어떤 생명체가 처음 달을 본 순간 달이 생긴 걸까요? 옛날 삼엽충이 달을 봤을 때 달이 생긴 건가요? 아니면 아예 지구가 없었으면, 만에 하나라도 지구에 생명체가 나오지 않았다면 이 세상에 달은 없는 건가요? - 『과학하고 앉아있네』 3권 57쪽, 김상욱 교수


과학은 물질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데, 이런 내용은 마치 우주의 본질이 마음이라고 하는 유심론唯心論의 극치처럼 들린다. 사람이 보았기 때문에 거기에 달이 생겨났다니.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유진 위그너Eugene Wiegner는 “양자역학은 마치 지능을 가진 생명체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건 정말 이상한 일이다.”라는 이야기까지 한다. 인간의 관측 이전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 세계의 웬만한 천재라는 사람들이 다 모여 벌인 이 토론에서 닐스 보어는 쏟아지는 모든 공격을 막아 냈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은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를 받아들이고, 그것 때문에 확률이 나온다고 믿게 되었다.

관찰과 정의


양자론의 수학적 체계는 무수히 성공적인 실험을 거쳐 와 모든 원자 현상에 일관성 있고 정확한 기술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편 언어적 해석, 즉 양자론의 형이상학은 훨씬 덜 견고한 기반 위에 서 있다. 사실상 40년이 넘도록 물리학자들은 명백한 형이상학적 모델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 149쪽


“양자역학을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천재라 불린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도 이렇게 말했다. 이런 물리학의 내용은 마치 깨달은 자만이 알아듣는 선문답禪問答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수학적으로는 설명이 되는데 언어적으론 설명이 어렵다는 뜻이다. 언어도단言語道斷, 말할 길이 끊어지다는 뜻으로 궁극의 진리인 도道는 심오하고 오묘하여 말이나 문자로 표현할 수 없다는 내용과 상통한다.

우리의 언어와 사고의 패턴은 이런 3차원의 세계에서 계발돼 온 것이기 때문에 상대성 물리학의 4차원적 실재를 다루기에는 극히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반면에 동양의 신비가들은 고차원의 실재를 직접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깊은 명상의 경지에서 그들은 일상적 삶의 3차원 세계를 초월할 수 있는데, 이때 모든 다원적인 것이 하나의 유기적 전체 속으로 통합되는 전혀 다른 실재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 167쪽


저자는 아원자적 입자들이 일정한 시간에 확실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려는 경향’을 나타내며 사건들은 확실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하려는 경향’을 보인다고 했다. 서로의 상호 작용으로서만이 그 존재감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수리물리학자 헨리 스탭Henry Stapp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관찰되는 체계는, 관찰되기 위해서는 상호 작용을 하나, 정의되기 위해서는 따로 떼어질 것을 요구한다.”

이 말은 우주의 본질적인 상호 연결성을 드러내 준다. 이는 세계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최소 단위로 분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물질을 뚫고 들어감에 따라 우리는 그것이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데모크리토스나 뉴턴적 의미에서의 기본적 구성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양자론은 우리로 하여금 우주를 물리적 대상들의 집합으로서가 아니라 통일된 전체의 여러 가지 부분들 사이에 있는 복잡한 관계망으로 보게 한다. 현대 물리학으로부터 도출되는 상호 연결된 우주적 망網이라는 상像(image)은 동양에서 자연에 대한 신비적 체험을 전달하는 데 널리 쓰여 왔다. 힌두교에서 브라만(범梵)은 우주적 망을 통일시켜 주는 망사網絲로서 모든 존재의 궁극적 기반이라고 했고, 대승불교의 주요 경전인 화엄경에서는 이 세계를 완벽한 상호 관계의 망으로 그리고 있다.

자연과학은 자연을 단순히 기술하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과 우리 자신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 작용의 일부다.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질문 방식에 따라 도출된 자연이다. - 159쪽


이것은 양자역학의 주요 선구자였던 하이젠베르크의 말이다. 저자는 아원자 이하를 측정할 때 그 종국점은 언제나 관찰자의 의식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나의 관찰, 나의 선택에 의해 판타지에 등장할 것 같은 개념이 도출된다.

양자역학에서는 ‘양자중첩量子重疊(Quantum superposition)’이라 부르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무한한 가지 수의 조합으로 구성되는 다중우주나 평행우주가 존재할 수 있지만, 우리가 관찰자로서 ‘의식적으로’ 개입하는 순간에 단 하나인 ‘나만의’ 우주가 결정된다. 관찰함으로써 사건이 결정된다는 말은 달리 표현하면 내가 보는 순간 그 우주가 창조된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관찰이 곧 창조라는 놀라운 문장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프린스턴 대학의 공학과 교수인 로버트 잔Robert Jahn과 시카고 대학의 발달심리학자인 브렌다 던Brenda Dunne이 공동으로 추진한 ‘프린스턴 공학 이례 연구(Princeton Engineering Anomalies Research: 일명 PEAR프로젝트)’라는 유명한 실험이 있다. 엄정하게 설계된 이른바 ‘무작위 사건 생성기(Random Event Generator, REG)’에 의해서 진행된 이 실험에서는 확률이 정확히 50:50인 무작위 사건에서도 실험 참가자의 의도에 의하여 일반적 확률 통계로는 설명할 수 없는 편향적 결과가 도출된다는 것이다.

비유를 하자면 동전의 앞뒷면이 나오는 횟수를 측정하는 실험에서 실험 참가자가 특정 면(앞면 혹은 뒷면)을 의도적으로 의식하면서 실험을 진행할 때 그 결과가 실험 참가자의 의도에 영향을 받는다는 내용이다.
다수의 주류 과학자들이 수긍하기를 꺼리는 이 같은 실험 결과가 시사하는 바는 가장 깊은 차원에서 현실은 우리 각자에 의해, 우리의 관심을 통해서만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마음과 물질의 가장 깊은 차원에서 우리 각자는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주장이다.

우주 만물은 생명이 있다. 생명이란 것은 느낌을 가지고 있다. 산은 산의 기운으로 느낌의 덩어리다. 하늘은 하늘대로 하늘의 감성, 느낌의 덩어리로 돼 있다. 사람은 사람의 기운이 있다. 그걸 느낌이라고 한다. 화이트 헤드 같은 철학자가 이런 얘기를 한다. 우주 만유라는 것은 왜 존재하냐? 나에게 자기를 느껴 달라고 한다는 거다. 저기 산이 있어. 저 산은 왜 있는 거냐? “나를 느껴 주세요. 나의 실상을 좀 봐 주세요.” 이러고 있다는 것이다. 안방에 난초가 이렇게 있다고 하면 난초가 나한테 뭐라고 하는 거냐. “나를 좀 느껴 주세요” - 2013.01.07 종도사님 도훈


종도사님의 이 말씀처럼 모든 존재가 서로를 느끼며 상호 작용함으로써 존재하는 내용을 담은 책이 최근에 나왔다. 2023년 12월에 출간된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라는 책은 세계적인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Carlo Rovelli가 썼다. 여기엔 돌멩이 하나에도 신성이 있다고 말하는 동양의 지혜와 같은 말들로 가득 차 있다.

“돌멩이 하나도 광활한 세계다. 확률과 상호 작용이 요동치며 이글거리는 양자들의 은하계다. 세계는 끊임없이 상호 작용하고 있다. 전혀 상호 작용을 하지 않는 대상,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런 ‘관계론적’ 해석을 바탕으로 한 양자론은 바로 우주 만유가 서로를 느끼는 ‘네트워크’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라는 책 제목처럼, 우주를 느끼고 있는 내가 없으면 그 우주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물론, 내가 없다고 해서 이 대우주가 사라지진 않겠지만 본인에게는 그럴 수 있겠다.)


우리가 관찰자로서 ‘의식적으로’ 개입하는 순간에 단 하나인 ‘나만의’ 우주가 결정된다.
관찰함으로써 사건이 결정된다는 말은 내가 보는 순간 그 우주가 창조된다는 의미다.


참여하는 우주


원자 물리학에서 과학자는 초연한 객관적 관찰자의 역할을 할 수 없고, 단지 관찰되는 대상의 속성에 그가 영향을 미치는 정도만큼 자신이 관찰하는 바로 그 세계에 개입하게 된다.

존 휠러는 이렇게 말한다. “관찰자라는 낡은 말은 지워 없애 버리고 그 자리에 ‘참여자’라는 새로운 말을 집어넣어야 한다. 좀 이상한 의미지만, 우주는 참여하는 우주다.” ‘관찰 대신에 참여’라는 생각은 현대 물리학에서는 겨우 최근에야 공식화되었다. 신비적 견식이란 단지 관찰에 의해서만 결코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자기의 존재 전부를 쏟아 넣는 전적인 참여에 의해서만 얻어진다. - 160쪽


관찰자를 넘어선 참여자의 개념에 대해 책에서는 “동양적 세계관에 있어서는 결정적인 것이며, 동양의 신비가들은 나아가 깊은 명상 속에서 관찰자와 관찰되는 대상의 구별이 완전히 무너지고 주체와 객체가 통일되고 차별이 없는 전체에로 용해되는 단계까지 도달”(160쪽)한다고 했다. 이런 표현은 책의 내용이지만, 우리 일꾼들에게는 마치 ‘참된 진짜의 마음’으로 사무친 수행과 적극적인 행동을 해야 한다는 독려처럼 들리기도 한다.

자연과 나의 관계에서 바로 나의 주관적인 생각, 의식, 판단, 이런 것이 자연에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자연의 저 바닥 세계를 관측해서 보려고 하면 ‘나의 생각에 따라서 자연이 나에게 감응을 하는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관찰자와 객관적인 자연 세계는 그것이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음양 일체, 주객 일체로서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가 되어 상호 작용을 한다. 모든 관찰자라는 것은 동시에 자연의 참여자다. 그래서 이 우주라는 것은 관찰자와 자연 대상이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우주 만유 모두가 참여하는 우주다.

참여하는 우주! 과학자는 관찰자가 아니라, 이 자연의 변화 속에 함께 참여하는 자로서의 존재 의미를 갖는다. 관찰자라고 하는 말 자체는 이미 낡은 언어다. - 2003.01.07 종도사님 도훈


여름 우주에서 가을 우주로 세계관이 바뀌는 지금, 상제님께서 인존人尊 하나님으로서 이 우주를 재구성하는 증산도 문화권에 바로 이런 세계관이 나오게 된다. 인간은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 참여자이고, 이 온 우주라는 건 참여하는 우주(participating universe)다.

천지생인 용인 불참어천지용인지시 하가왈인생호
天地生人하여 用人하나니 不參於天地用人之時면 何可曰人生乎아
천지가 사람을 낳아 사람을 쓰나니 천지에서 사람을 쓰는 이 때에 참예하지 못하면 어찌 그것을 인생이라 할 수 있겠느냐! (증산도 도전道典 2:23:3)


상제님께서는 “천지는 일월이 없으면 빈 껍데기요 일월은 지극한 사람이 없으면 빈 그림자다.”(도전道典 6:9:4)라고 하셨다. 천지일월天地日月은 오직 인간 농사를 지어 인간 열매를 추수하기 위해 둥글어 가는 것이다. 인간은 하늘 기운과 땅 기운을 받아 태어난 천지의 열매다. 그리고 지금은 그 열매를 완성시키는 가을개벽기로, 인간이 가장 보람 있는 큰일을 할 수 있는 때다.

이 도전 말씀은 천지가 사람을 낳아 선천 오만 년을 길러 왔고, 이제 비로소 인류 구원의 사업에 사람을 쓰는 때가 되었는데, 천지에서 사람을 쓰는 이 때에 참여하지 않는 인간을 어찌 인간이라 할 수 있겠느냐는 말씀이다. 본래의 존재 가치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현대 물리학의 정점에서 나온 세계관과 일치한다. 지금은 천지에서 사람을 내어 사람을 가장 크게 쓰는 때이다. ‘자기 존재의 전부를 쏟아 넣는 전적인 참여’라는 존 휠러John Wheeler의 말처럼, 천지에서 가을 천지의 인종 씨를 추리는 추수 일꾼으로 인간을 뽑아 쓰는 이 시기는 모두가 적극 나서서 참여할 때인 것이다. ◎

인간은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 참여자이고, 이 온 우주라는 건 참여하는 우주(participating universe)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