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vs 팔레스타인 갈등의 역사, 다시 불붙는 잔혹한 보복전쟁

[지구촌개벽뉴스]

이스라엘 vs 팔레스타인 갈등의 역사


다시 불붙는 잔혹한 보복전쟁



2014년 ‘50일 전쟁’의 피해 규모 넘어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이자 화학자 ‘바이츠만’
평화를 향해 내딛은 한 걸음 〈오슬로협정〉



2023년 이팔전쟁


2014년에 발발한 ‘50일 전쟁’(제3차 가자 전쟁) 이후 9년 만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전쟁이 다시 불붙었다. 현지 시간 10월 7일 오전 6시 30분쯤부터 이스라엘 남부에 수백 발의 로켓이 떨어졌다.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Gaza Strip)를 통치하는 무장 정파 하마스Hamas는 성명을 통해 포격의 배후를 자처하면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범죄를 끝장내기로 결정했다.”라며, “책임을 지지 않는 그들의 광란은 이제 끝났다.”라고 말했다. 하마스는 이어 “‘알 아크사 홍수’(Al-Aqsa flood) 작전을 선언한다.”라며 “첫 20분간 사격을 통해 5천 발 이상의 로켓포를 쐈다.”라고 주장했다. 알 아크사는 예루살렘에 있는 이슬람 3대 성지이자, 유대교 성지이기도 하다. 지난 4월엔 경찰이 사원을 찾은 팔레스타인 주민을 체포하면서 폭력 사태가 벌어졌다. 이런 통제와 폭력 등 이스라엘 측의 탄압이 쌓이고 쌓였다는 게 하마스가 내세운 표면적인 명분이다.

이에 베냐민 네타냐후Benjamin Netanyahu 이스라엘 총리는 8일 “악의 도시에서 하마스가 있는 모든 곳, 하마스가 숨어 있는 모든 곳, 활동하는 모든 곳을 폐허로 만들 것”이라며 강력한 보복 공격을 경고했다. 아이작 헤르조그Isaac Herzog 이스라엘 대통령은 12일 “하마스의 척추(등뼈)가 부러질 때까지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근거지인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 대대적인 공습을 계속하며 지상군을 투입해 작전을 확대하고 있다. 분쟁이 시작된 지 닷새 만인 11일 전체 사망자가 2,100명을 넘어 2014년 ‘50일 전쟁’ 때의 피해 규모를 넘어서고 있다.

2014년 ‘50일 전쟁’
지난 2014년 이스라엘 10대 3명이 숨지면서 시작된 이른바 ‘50일 전쟁’에서 SNS에 퍼진 한 장의 사진이 사람들에게 충격을 줬다. 바로 ‘스데롯 시네마Sderot cinema’라는 별칭이 붙은 사진이다. 사진 속에서 밝은 표정의 이스라엘 스데롯 마을 주민들은 삼삼오오 언덕에 의자를 놓고 앉아 먼발치에서 반짝이는 풍경을 구경하고 있다. 여름밤의 불꽃놀이가 아니다. 반짝이는 불빛은 가자 지구에 퍼부어지는 이스라엘군 폭격의 섬광이다. 팔레스타인계 무장단체 하마스의 포탄 위협에 불안해하던 주민들은 그 광경에서 나름의 통쾌함을 느낀 것이다. 동시에 이 장면은 지배국의 국민들이 사실상 무차별적인 폭격으로 민간인들이 학살당하는 현장에 환호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2014년 7월, 이스라엘 스데롯 마을 주민들이 언덕에서 가자 지구에 쏟아지는 폭격을 웃으며 바라보고 있다. 이 사진은 현장을 취재하던 기자가 실시간으로 트위터에 올려 큰 반향을 일으켰다. (출처 : 트위터 캡처)

당시 이스라엘군은 낮은 콘크리트 건물과 좁은 골목이 난립한 가자 지구 동부 슈자이야 지역으로 밀고 들어갔고, 하마스는 자동포와 대전차 미사일, 로켓 추진 수류탄으로 집중포화에 나섰다. 하마스는 고장으로 멈춰 선 이스라엘 장갑차에 대전차 미사일을 발사해 7명의 이스라엘 병사를 죽였다. 이에 이스라엘 포병 대대는 600발의 포탄을 발사했고, 그다음 날 이스라엘군 전투기는 그 지역에 1톤 폭탄 100발을 투하했다. 한 팔레스타인 주민은 당시 AP 통신에 “지옥의 문이 열렸고, 파편이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라고 말했다.

‘50일 전쟁’은 결국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무기한 휴전에 합의하면서 끝났다. 팔레스타인 사망자가 2,143명에 이르는 등 팔레스타인이 일방적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하마스는 가자 지구 봉쇄 해제와 관련해 큰 소득을 얻지 못해 가자 지구 현실은 사실상 원점으로 돌아갔다. 당시 이스라엘 총리는 베냐민 네타냐후 현 총리였다. 이스라엘과 하마스는 2021년에도 전투를 벌였으나 가자 지구에서의 지상전은 없었다.

하마스가 전쟁을 벌인 이유


이스라엘 정부는 23일 텔아비브Tel Aviv의 군사기지에서 취재진 200명을 대상으로 43분 분량의 영상을 상영했다. 영상에는 하마스가 복부에 피를 흘린 채 몸부림치는 한 남성의 목을 농기구로 베려고 반복적으로 시도하는 끔찍한 장면이 찍혔다. 동남아시아계로 보이는 이 남성은 농촌의 외국인 노동자로 보인다고 이스라엘 현지 매체인 〈타임스 오브 이스라엘〉(The Times of Israel)은 전했다. 또 다른 영상에는 머리가 심하게 훼손된 채 일부가 불탄 여성의 시신이 자신의 가족인지 확인하려는 한 이스라엘 여성의 모습이 담겼다. 사망한 여성은 속옷이 벗겨지고 겉옷은 허리까지 들어 올려져 있었다. 미키 에델스타인 이스라엘군 소장은 상영이 끝난 뒤 취재진에게 강간 피해의 증거를 확보했다고 밝혔다.

하마스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잔인하고 무모한 공격을 감행했던 것일까. 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는 비교적 온건파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 : Palestinian National Authority)가 통치하는 요르단강 서안 지구(West Bank)와 무장세력 하마스가 지배하는 가자 지구(Gaza Strip) 두 곳이다. 그중 가자 지구는 세종시만한 면적(360㎢)에 인구 230만 명이 넘는 밀집 지역이다. 이스라엘이 둘레에 분리 장벽을 세우면서 ‘지상 최대의 지붕 없는 감옥’이라고도 불린다. 생필품은 물론 전력 공급도 통제되어 이곳은 극심한 경제난을 겪고 있다.

그런데 최근 중동에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지난 2020년 이슬람권 국가인 바레인, 모로코 아랍에미리트와 아브라함협정(Abraham Accords)을 맺고 관계를 정상화했으며, 최근에는 미국의 중재로 사우디아라비아와 관계 개선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입지가 좁아진 하마스가 제동을 걸려는 의도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스라엘과 사우디의 화해가 못마땅한 이란의 배후설이 나오는 이유기도 하다.

피상적 측면에서 볼 때 하마스는 이스라엘에 맞서 투쟁을 벌이는 무장단체이지만, 동시에 자신들의 근거지에서 일정한 영향력과 세력을 유지 확대함으로써 생명력을 존속시켜 나가는 정치단체이기도 하다. 이 점에 주목해 본다면, 그간 자신들을 지원해 왔던 사우디아라비아 등 아랍권 국가들의 대對이스라엘 평화 무드가 하마스 입장에서는 정치적 입지의 축소 약화로 이어질 수 있어 결코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니다. 따라서 그들이 무모할 정도로 공격적인 행동을 보이는 이유는 이스라엘과의 극단적 대립을 조장하여 교전과 공방이 확대되는 만큼 팔레스타인인들의 보복 심리와 결속도 함께 확산되는 상황이 이어질 것이고, 그 결과로 하마스는 반사적인 정치⋅경제적 실리를 취할 여지가 높기 때문이다. 불가피하게 전쟁을 택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이는 이스라엘 네타냐후 측도 사실은 이번 전쟁을 내부 정치의 갈등 국면을 전환시킬 기회로 삼고 있어 하마스와 서로 ‘적대적 공생 관계’에 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 바이츠만


1906년 32세의 젊은 유대인 과학자 하임 바이츠만Chaim Weizmann은 나이가 26세나 많은 전 영국 수상 아서 밸푸어Arthur Balfour에게 이렇게 말했다. “누가 선생께 런던 대신 파리를 준다면 받으시겠습니까?” 벨푸어는 웃으며 답했다. “하이츠만 박사, 우리에겐 이미 런던이 있소.” 바이츠만이 바로 반박했다. “그렇지요. 한데 우리에게는 예루살렘이 있었죠. 런던이 늪지대였을 때 말입니다.” 이상의 대화가 진행된 시기는 1906년이다. 수상 자리에서 물러난 벨푸어와 바이츠만의 만남은 역사를 바꿨다.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 하임 아즈리엘 바이츠만Chaim Azriel Weizmann (출처 : 위키백과)

하임 바이츠만, 그는 화학자이자 열렬한 시오니즘* 운동가이며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이다. 영국은 1차 세계대전 중 독일 잠수함의 봉쇄로 화약 원료인 칠레초석(Chile saltpeter) 수입이 끊겨 탄약과 폭탄 부족에 직면했다. 폭탄 제조에 필수적인 아세톤을 나무에서 추출하는 방법이 있었지만 생산량이 워낙 소량인데다 영국은 늘 목재가 귀한 나라였다. 바이츠만은 녹말에서 아세톤을 뽑아내 고성능 탄약 원료를 생산하는 기술을 찾아 벨푸어가 전쟁 장관으로 재임하던 영국 정부에 넘겼다. 영국을 위기에서 구한 것이다. 이러한 바이츠만의 공로가 1917년 영국의 이스라엘 건국 지원 약속인 벨푸어선언(Balfour Declaration)으로 이어졌다.

*시오니즘Zionism : 고대 유대인들이 고국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한 유대민족주의 운동. (출처 : 두산백과)


하나의 땅에 두 민족


일각에선 이번 분쟁으로 1993년 미국 등의 중재로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자치권을 인정한 오슬로협정 이전으로 상황이 악화할 수 있다는 관측마저 나오고 있다. 여기서 오슬로협정이란 무엇일까. 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왜 이렇게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스라엘 건국과 함께 시작된 갈등은 어떻게 흘러왔는가.

1917년 영국 외무장관 밸푸어는 독일 제국에 대항할 유대인 공동체가 생기길 바라며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을 위한 민족국가를 수립하는 데 동의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영국의 위임 통치령이 됐던 팔레스타인의 주민 90%는 아랍인이었다. 두 번의 세계대전 사이에 시온주의 운동을 추진하고 히틀러의 홀로코스트를 피하려는 수많은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으로 모여들면서 유대인 인구가 10%에서 30%로 늘어나게 됐다. 이때부터 아랍인과 유대인이 충돌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밸푸어 선언 2년 전인 1915년, 이집트 주재 영국 고등판무관 A.H.맥마흔McMahon이 아랍의 정치 지도자 후세인 빈 알리Hussein bin Ali에게 “오스만 제국에 대항해 싸우면 아랍의 독립을 지지하겠다.”는 약속(맥마흔선언)을 했다는 점이었다. 인구의 90%가 아랍인인 땅에 유대 국가의 건설을 약속한 것만으로도 후폭풍이 클 수밖에 없었는데, 유대인과 아랍인에게 모순되는 두 개의 약속까지 했던 것이다. 영국은 2002년에야 ‘밸푸어 선언이 명예롭지 못한 결정’이었다며 사과했다.

독립 국가 수립을 둘러싸고 혼란이 이어지자 아랍인들은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고 유대인들은 영국에 테러를 가했다. 양쪽으로부터 거센 반발에 직면한 영국은 팔레스타인 문제에서 손을 뗐다. 1945년 이후 팔레스타인을 관할하던 UN(국제연합)은 1948년 5월 14일, 팔레스타인 분할안에 근거해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한다.

이에 아랍인들은 “유대인들에게 우리 땅을 주는 건 받아들일 수 없다.”며 강하게 반발했고, 이스라엘을 향해 전쟁을 선포했다. 이것이 제1차 중동전쟁이다. 아랍연맹과 이스라엘이 맞붙은 이 전쟁은 이스라엘에게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그러나 아랍연맹 사이의 심각한 파벌 다툼과 혼란스러운 지휘 체계는 이스라엘의 ‘기적’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면적의 약 78%를 차지하게 된다. 기존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던 70만여 명의 아랍인들은 졸지에 난민이 돼 가자 지구⋅서안 지구로 향하거나 주변 이슬람 국가로 망명해야 했다.

이어진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에서는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 요르단강 서안 지구, 동예루살렘, 시리아 골란고원, 이집트 시나이반도 등 나머지 팔레스타인 지역마저 점령했다. 이후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 서안 지구 등을 자국 영토로 만들기 위해 대규모로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했다. 이러자 주거지에서 쫓겨나 난민으로 전락할 위기에 놓인 아랍인들은 강력한 저항에 나섰고, 이런 배경에서 결성된 것이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이다.

PLO는 자치정부 수립을 목표로 계속 이스라엘과 무력 투쟁을 벌였다. 특히 1969년 PLO 의장으로 선출된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는 항공기 납치, 뮌헨올림픽 이스라엘 선수단 살해, 자살 폭탄 테러 등 서방국가에 대한 무차별 테러를 통해 팔레스타인 문제를 국제적 이슈로 이끌어 냈다. 그러나 한편으로 지나치게 강경한 방식은 국제사회의 비판 대상이 됐고, 아라파트는 PLO를 인정받는 대신 이스라엘 이외의 국제 테러에 개입하지 않는 온건 노선으로 돌아서게 된다.

라빈 총리가 남긴 평화의 씨앗, 오슬로협정


이후에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반목을 계속했지만, 아라파트의 온건 노선은 평화의 씨앗을 남겼다. 1988년 아라파트는 독립을 선언하면서 ‘2국가 공존 방식’의 국가 건설에 착수했다.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기로 한 것이다. 대부분의 팔레스타인 독립운동 세력이 동참했고, 세계적인 지지와 승인도 이어졌다. 이스라엘에서도 계속되는 전쟁에 진절머리를 내는 여론이 높아지면서, 1992년 이스라엘 총선에서는 ‘온건파’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을 당수로 하는 노동당이 승리, 권력을 잡게 된다.

라빈 총리와 아라파트 PLO 의장은 1993년 빌 클린턴Bill Clinton 미국 대통령 중재로 오슬로협정(Oslo Accords)을 체결했다. 오슬로협정에는 엄청난 상징성이 있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서로를 대화 상대로 인정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이 협정으로 팔레스타인은 요르단강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를 영토로 하는 자치정부를 구성했다. 중동에서의 평화 무드를 만든 오슬로협정으로 라빈 총리와 아라파트 PLO 의장, 이스라엘 외무장관 시몬 페레스Shimon Peres는 1994년 12월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오슬로협정이 체결되고 얼마 되지 않은 1995년 11월 4일, 라빈 총리는 유대인 극단주의자의 손에 암살됐다. 팔레스타인에서도 1988년 아라파트의 독립 방식에 동의하지 않았던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향해 자살 폭탄 테러를 벌이는 일이 발생했다. ‘약속의 땅’을 무도한 팔레스타인에게 조금도 내줄 수 없다는 이스라엘의 극단파와, ‘침략자’ 이스라엘을 지도에서 지워 버리겠다는 하마스의 대립은 평화 협상의 판을 깼다.

평화는 그냥 오지 않는다


“27년간 군인으로 조국을 위해 복무한 저는
이제 죽음도, 부상도, 피 흘림도, 고통도 없는 전투에 나섭니다.
이 평화를 위한 전투야말로
우리 모두가 기쁘게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전투입니다.”
〈오슬로협정 이후 이스라엘 이츠하크 라빈 총리 미 의회 연설의 일부〉


라빈 총리의 말처럼 평화는 그냥 오지 않는다. 평화도 전쟁처럼 적극적인 노력과 용기가 필요하다. 나를 아프게 하는 이물질을 조개가 적극적으로 끌어안아 진주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갈등하는 민족이 서로를 껴안아 이스라엘이 세계의 화약고에서 진주 같은 평화의 상징이 되기를 바란다. (이강희 객원기자 / 본부도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