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 |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乙巳勒約’
[사진으로보는역사]
사실은 순간순간 놓치기 쉽다. 기억으로 붙잡아도 망각의 강으로 스러져간다. 사진은 사실을 붙잡아 두는 훌륭한 도구다. 포착된 사진들은 찰나를 역사로 만들어 준다. 사진 속에서 진실을 찾아보자!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일본 사람으로 하여금 조선에 와서 천고역신(千古逆神)을 거느려 역사케 하느니라. 조선 개국 후로 벼슬하는 자들이 모두 정씨(鄭氏)를 사모하였나니 이는 곧 두 마음이라. 남의 신하로서 두 마음을 두면 이는 곧 적신(賊臣)이니, 그러므로 모든 역신(逆神)들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들도 두 마음을 품었으면서 어찌 역신을 그다지 학대하느냐.’ 하니 이로 인하여 저들이 일본 사람을 대하면 죄지은 자와 같이 두려워서 벌벌 떠느니라.” 하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일본 사람이 뭐 한다고 해도 조선 사람 가운데 조조 간신이 있어서 그놈들이 좌지우지하지, 일본 사람이 이 조선에 대해 무엇을 아느냐? 조선놈이 다 시켜서 그러는 것이다. 조선 사람이 들어서 죽고 산다.” 하시니라. (도전 5편 52장)
을사조약乙巳條約 혹은 제2차 한일협약은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의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제국의 주한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 権助)에 의해 체결된 조약이다. 체결 당시 정식 명칭은 한일협상조약韓日協商條約이다. 을사년에 체결되어 을사협약乙巳協約, 을사5조약乙巳五條約, 또는 불평등 조약임을 강조하는 목적으로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불리기도 한다.
러일전쟁 중에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여 우리의 재정·외교의 실권을 박탈한 일제는 1905년 7월 27일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The Katsura-Taft Agreement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을 그들의 보호국으로 한다는 묵인을 받았다.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9월 5일에는 러시아와의 포츠머스 강화조약Treaty of Portsmouth으로 우리의 주권을 침해할 수 있는 공식적 보장을 받게 된다.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으로 삼으려 한다는 설이 유포되어 조야가 경계를 하고 있는 가운데 일본의 특명전권대사 자격으로 1905년 11월 9일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伊藤博文)가 서울에 오게 된다. 다음 날 고종을 배알하고 “짐이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사를 특파하오니 대사의 지휘를 따라 조처하소서.”라는 내용의 천왕의 친서를 내밀며 1차 위협을 가하였다. 이어서 15일에 다시 고종에게 한일협약안을 제시하면서 조약 체결을 강압적으로 요구했다. 이 무렵, 무장한 일본군이 경계를 선 가운데 쉴 새 없이 시내를 시위행진하고 궁궐 안에까지 거리낌 없이 드나들며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러나 고종은 조약 승인을 거부하였다. 이에 일본은 전략을 바꾸어 조정 대신들을 상대로 위협·매수에 나섰다. 이러한 회유와 강압 끝에 다수의 지지를 얻게 된 이토는 마침내 11월 17일 경운궁에서 어전회의를 열도록 했다. 그러나 회의는 침통한 공기만 감돌았을 뿐 아무런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어전회의가 5시간이 지나도록 결론에 이르지 않자 초조해진 이토는 일본 헌병 수십 명의 호위를 받으며 궐내로 들어가 노골적으로 위협과 공갈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직접 메모 용지에 연필을 들고 대신들에게 가부可否를 따져 물었다. 결국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만이 무조건 불가不可를 썼고,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은 책임을 고종에게 전가하면서 찬의贊意를 표시하였다. 이날 밤 이토는 조약 체결에 찬성하는 대신들과 다시 회의를 열고 자필로 약간의 수정을 가한 뒤 위협적인 분위기 속에서 조약을 승인받았다. 이 조약에 찬의한 5명을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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