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고대사자료8. 수성현은 진장성 안쪽 당산시로 추정되며, 낙랑과 갈석도 수양제 침략경로의 고구려 땅 | 글쓴이 | 이태수 | 날짜 | 2023-02-02 |
한국고대사의 단편적 자료들⑧ 수성현은 진장성 안쪽 당산시로 추정되며, 낙랑과 갈석도 수양제 침략경로에 있는 고구려 땅이었다.
한국의 고대역사 기록은 매우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다. 일반인이 알기 어려우므로 이를 이해하기 쉽고 또 활용하기도 쉽도록 이들 고대 역사의 단편적인 기록에 대한 자료를 모아서 소개하고자 한다. 이 자료들이 널리 활용되고 퍼뜨려져서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다는 왜색식민사학자들의 잘못된 주장이 반드시 폐기되고 대륙에 위치해 있던 한사군의 바른 위치가 반드시 밝혀지기를 바란다.
○ 사기(史記)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는 갈석산(碣石山)을 경계로 진장성이 시작되고 진장성의 시작인 수성현(遂城縣)은 즉 진장성 안쪽임을 나타낸다.
『사기(史記)』 『하본기(夏本紀)』에는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에 말하기를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는데, 진나라 장성(長城)의 시발점이다(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 有碣石山 長城起所)”라고 기록되어 있다.
태강지리지의 주석에“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다. 장성이 이곳에서 시작된다. 지금 장성이 남아있고, 동쪽에는 요수(遼水: 난하)가 흘러서 고구려의 옛터가 지금도 남아 있는데 그곳으로 들어간다(碣石山 在漢樂浪郡 遂城縣 長城起於此山 今捻長城 東載遼水 而入高麗遺址猶存)”고 하였다. 태강연간은 AD 280-289년 사이 서진 무제 때의 연호이다.
AD 801년 편찬된『통전(通典)』에 다음과 같이 갈석산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노룡은 한나라 비여현(肥如縣)으로 갈석산이 있다. 바닷가에 우뚝 솟아 있어 그 이름을 얻었다. 진 태강지지(晉太康地志)에 말하기를 진나라가 쌓은 장성이 갈석에서 일어났다고 하였는데, 지금 고구려의 옛 지경에 있으며, 이 갈석이 아니다(盧龍肥如縣 有碣石山 碣然而立在海旁故名地 晉太康地志云 秦築長城 所起自碣石 在今高麗舊界 非此碣石也).”
***참고: 『통전』이 편찬된 AD 801년은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략한 영양왕 22년(AD 611) 보다 약 190년 후이므로 이 때의 갈석이 진장성의 기점이며, 또 옛날 고구려 땅이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秦築長城 所起自碣石 在今高麗舊界 非此碣石也).”.
또 『통전』 변방에는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다. 장성이 이 산에서 일어났다. 지금 그 장성이 남아있고, 동쪽으로 요수(遼水: 난하)를 끊고 고구려 옛땅으로 들어간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상서』에 ‘갈석을 오른쪽으로 끼고 황하(?)로 들어간다‘는 문구를 살펴보면 우갈석은 황하(?)가 바다 근처에 다다르는 곳으로 지금의 북평군 남쪽 20여 리에 있다. 이곳은 곧 고구려 땅에 있는 좌갈석(左碣石)이다. 『안상서』에 이르기를 ’갈석을 오른쪽에 끼고 황하로 들어간다는 말은 우갈석이 황하 근처의 바다에 다다르는 곳으로 지금 북평군 남쪽 20리에 있다. 이곳은 곧 고구려의 땅 안에 좌갈석이다(碣石山在樂浪郡遂城縣 長城起於此山 今捻長城東截遼水而入高麗遺址猶存 按尙書云 夾右碣石入於河 右碣石卽河赴海處 在今北平郡南二十里 卽高麗中爲左碣石)
***참고: 태강지리지에 진장성이 낙랑군 수성현에 있는 갈석산에서 시작된다고 하였으므로 낙랑군 수성현은 진장성 안쪽의 진나라 땅으로 보아야 하며, 지금의 하북성 당산시로 비정된다. 또 낙랑군에 수성현이 있었는데, 낙랑군의 낙랑은 수양제의 고구려 침략경로 중 좌12군의 12번째 침략경로에 있었고, 우익대장군 우중문이 낙랑을 통하여 고구려를 침략했으며, 고구려 땅에 낙랑이 있었다. 낙랑 역시 진나라 때는 진장성 안에 있었을 것이며, 고구려는 진장성 안쪽에 있는 낙랑을 점령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통전에 갈석산은 북평군 남쪽 20리에 있고 AD 801년 당시 옛 고구려 땅에 속한 갈석산이라고 하였는데, 수양제(재위 604-618)가 고구려를 침략하기 전, “고구려가 발해와 갈석 지간을 점령해 있다(崇取勃碣之間)”고 자복했던 점에 비추어 여수전쟁(麗隨戰爭) 당시 고구려 땅에 갈석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또 수양제의 우무후장군 조효재는 갈석도로 나오고, 탁군태수 최홍승은 수성도로 진격한 것에 비추어 갈석과 수성이 모두 고구려 땅임을 확인할 수 있다.
또 갈석산에는 진시황(秦始皇)을 비롯한 9명의 황제가 올라서 9등황제산(九登皇帝山)으로도 불린다.
진나라 장성을 축조한 진시황, 진시황의 아들 진호해, 고조선 침략하기 전의 한무제(漢武帝)를 비롯하여 고구려를 침략하기 전의 수양제(隋煬帝)와 당태종(唐太宗)이 모두 이 산에 올라 전의(戰意)를 불태웠다고 한다. 서기 207년 위(魏)나라의 조조(曹操)는 유성(柳城)을 정벌하고 돌아가는 길에 갈석산에 올라 “동쪽 갈석산에 임하여 푸른 바다를 바라보노라(東臨碣石 以觀滄海)”라는 시를 남겼다.
당나라 때 인물인 두우(杜佑)가 편찬한 의례서의 일종인 ‘통전(通典)’에서 두우는 자신이 살던 당시에 존재하던 노룡현(盧龍縣)이란 곳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노룡현은) 한나라 때의 비여현(肥如縣)이다. 갈석산(碣石山)이 있고, 바닷가에 우뚝 솟아 있으므로 이런 이름을 얻었다. 진나라 때의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가 말하는 것과 같이 진(秦)나라의 장성(長城)이 시작된 곳이다.
현재의 갈석산(碣石山)은 지금 중국의 하북성 산해관과 진황도시 및 남쪽 당산시의 중간에 위치한 산으로 남북 길이 24km, 동서 길이 20km, 총면적 480㎢에 달한다. 높이 695.1m이며 전술한 바와 같이 진시황을 비롯한 9명의 황제가 이 산에 올라 9등 황제산이라고도 한다.
*** 참고: 낙랑(樂浪) 수성현(遂城縣)은 이 만리장성이 시작된 진황도시 및 당산시 부근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필자의 견해로 낙랑군 수성현을 만리장성의 안쪽으로 본다면 하북성 당산시 부근에 낙랑군 수성현이 위치해 있었을 것이다.
이병도가 황해도 수안(遂安)을 중국의 수성현이라고 주장한 것은 참으로 맹랑한 소리이다. 이는 이병도가 한사군 대륙 존재설을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부정하면서 한반도 내 한사군설을 주장하기 위해 맹랑한 주장을 했기 때문이다.
○갈석산(碣石山)의 위치에 대한 다른 주장들
◉수성현 황해도 수안설
이병도는 한사군의 대륙 존재설에 대해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부정하면서 중국의 수성현(遂成縣)을 황해도 수안(遂安)과 앞글자 “수(遂)“자가 같아서 수성(遂成)이 황해도 수안이라고 왜곡 비정하여 갈석산 만리장성 시발점을 황해도 수안이라는 해괴한 주장을 하였다.
이병도는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에서
”수성현(遂成縣)···자세하지 아니하나, 지금 황해도 북단에 있는 수안(遂安)에 비정하고 싶다. 수안에는 승람산천조에 요동산이란 산명이 보이고, 관방조에 후대 소축(後代所築)의 성이지만, 방원진의 동서행성의 석성(고산자의 대동지지에는 이를 패강장성의 유지라고 하였다)이 있고, 또 진지의 이 수성현조에는 --- 맹랑한 설이지만 ---「진축장성지소기(秦築長城之所起)」라는 기재도 있다.“고 하면서 중국의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으로 끌어들인 자이다.
이병도 뿐 아니라, 일본인 이나바 이와기치(稻葉岩吉)은 일제 강점기 『사학잡지』에 『진장성동단급왕험성고(秦長城東端及王險城考)』라는 논고에서 ”낙랑군 수성현은 곧 지금의 수안이며, 진나라 장성의 동쪽 끝은 지금의 황해도 수안의 경계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주장은 일본인 이와기치가 평양 일대를 낙랑군으로 왜곡하기 위해서 해괴한 주장을 한 것이지만 그의 제자인 이병도가 이를 다시 주장해서 오늘날 낙랑 평양설의 뒷받침이 되고 있다.
***참고: 참으로 이병도나 이바나 이와기치의 맹랑한 황해도 수성현 설은 반드시 매도되고 폐기되어야 하며, 이들의 한반도 내 한사군설도 반드시 매도되고 폐기되어야 한다.
◉수성현 갈석산의 중국 보정시 갈석산(백석산) 설
그러나 『사고전서 사료로 보는 한사군 낙랑』이라는 저서를 낸 심백강씨는 18세기 중국 청나라 건륭제가 편찬한 공식 역사서인 『사고전서』 책자에서 낙랑에 대한 기록을 검토한 결과, 낙랑은 하북성(河北省: 허베이성) 보정시를 포함하여 갈석산(백석산), 천진시(天津市), 노룡(盧龍: 진황도시 노룡) 등을 포함한 지역이 낙랑군의 위치라고 주장했다. 심백강은 패수(浿水) 역시 지금 북경 북부를 흐르는 조하(潮河: 潮白河)를 북송(北宋) 대 이후 세 기록에서 조선하(朝鮮河)라고 기록했던 것을 근거로 패수가 지금의 조하로 추정했다.
김봉렬씨의 『고조선으로 가는 길』이란 책자에서도 진나라 장성이 시작된 갈석산은 현재 중국의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白石山: 높이 2096m)이 갈석산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봉렬씨는 중국 북송(960-1127) 시대 편찬된 국방서인 『무경총요』에 그 위치가 잘 나타나 있는데,
“광신군의 치소는 수성현이다. 춘추전국 시기 무수현의 땅이다. 진나라 장성이 일어난 곳이라 하여 수성이란 이름이 붙었다. 본조(송나라)가 군(軍)을 세웠다. 동쪽에는 안숙군이 있고, 군에서 20리 서쪽에 장성이 있다(廣信軍治遂城縣 戰國時武遂縣 秦長城所起因名遂城 本朝建軍 東至安肅軍二十里 西至長城)”이라고 하였는데, 이곳은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이고, 그곳에는 수성(遂城)이란 지명이 지금도 남아있다고 하였다.
〇수양제 침략경로에 갈석(碣石)과 수성(遂城) 및 낙랑(樂浪)이 있어서 갈석과 수성 및 낙랑은 고구려의 변경 땅이었다.
영양왕 22년(AD 611) 수양제는 조명을 내리기를 “고구려는 무리가 혼미하고 불공하여 발해와 갈석 사이를 점령해 있고(崇聚勃碣之間), 요동 예맥의 땅을 잠식했으며...글안의 무리와 해변을 지키는 수나라의 사병을 죽이고, 또 말갈의 항복자와 요서를 침범하였다....
나는 풍속을 살피러 유주와 삭주에 순행을 왔으니 이에 고구려의 죄를 물으려 다시 올 수 없다. 이에 친히 6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한다....
좌12군(左十二軍)은 1) 누방, 2) 장잠, 3) 명해, 4) 개마, 5) 건안, 6) 남소, 7) 요동, 8) 현도(玄菟), 9) 부여, 10) 조선, 11) 옥저(沃沮), 12) 낙랑(樂浪) 등의 길(道)로 나아가고,
우십이군(右十二軍)은 1) 점선, 2) 함자, 3) 혼미, 4) 임둔(臨屯), 5) 후성, 6) 제해, 7) 답돈, 8) 숙신, 9) 갈석, 10) 동이, 11) 대방(帶方), 12) 양평 등의 길(道)로 나아가 계속 진군하여 평양에 총 집합하라.“고 하였다.
이후 수양제가 113만 3800명으로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이때 좌익위대장군 우문술은 부여도로 나오고, 우익위대장군 우중문은 낙랑도로 나오고 좌효위대장군 형원항은 요동도로 나오고, 우익위대장군 설세웅은 옥저도로 나오고, 우둔위장군 신세웅은 현도도로 나오고, 우어위장근 장근은 양평도로 나오고, 우무후장군 조효재는 갈석도로 나오고, 탁군태수 최홍승은 수성도로 나오고 검교우어위호분낭장 위문승은 증지도로 나와 모두 압록수(鴨淥水) 서쪽에 모였다.
***참고: 위의 수양제 평양성을 향한 고구려 침략경로에는 우익위대장군 우중문이 낙랑도로 나왔다고 했는데, 이는 좌12군 12번째에 낙랑이 있었으며, 우무후장군 조효재가 갈석도로 나왔다고 했는데, 갈석은 우12군 9번째의 침략경로이며, 탁군태수 최홍승은 수성도로 나왔다고 했는데, 수성도는 갈석산이 위치한 지역이다. 침략경로에 있던 이들 낙랑, 갈석, 수성은 모두 수나라의 땅이 아닌 고구려의 땅이었다.
***참고: 수양제의 침략(AD 611년) 당시 그 경로에 있는 낙랑과 갈석과 수성은 고구려 변경지대의 땅이었으며, 이를 고려하면 갈석산이 현재 중국의 하북성 산해관과 진황도시 및 남쪽 당산시의 중간에 위치한 갈석산(碣石山)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참고: 필자의 견해로 이병도나 일본인 이나바 이와기치(稻葉岩吉)의 황해도 수안 수성현(遂城縣)설은 한국고대사를 왜곡하기 위한 해괴한 주장이어서 반드시 타파되어야 할 주장이다.
또 현재 중국의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白石山: 높이 2096m)을 갈석산이라고 주장하는 점에 대해서는 고대사 연구자들의 더 깊은 연구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진시황의 진장성 축조는 BC 216년이었고, 수양제의 고구려 침략은 AD 611년이어서 800여 년 후의 일이므로 진시황 때의 갈석산과 수양제 때의 갈석산이 다른지 여부는 검토가 필요하다.
다만 진시황은 BC 216년 진장성을 축조하였고, 수양제는 AD 611년 고구려를 침략하여 800여 년의 기간이 경과 되었지만, 수양제 침략 당시(AD 611년)의 갈석산이나 낙랑군 수성현은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시 및 당산시 사이에 있는 갈석산으로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당시 이들 지역은 모두 고구려의 땅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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