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고대사자룍6. 진개의 고조선 침략에 대한 삼국지 위서의 다른 기록 글쓴이 이태수 날짜 2023-01-31

한국고대사의 단편적 자료들진개의 조선 침략에 대한 삼국지 위서의 다른 기록

 

한국의 고대역사 기록은 매우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다. 일반인이 알기 어려우므로 이를 이해하기 쉽고 또 활용하기도 쉽도록 이들 고대 역사의 단편적인 기록에 대한 자료를 모아서 소개하고자 한다. 이 자료들이 널리 활용되고 퍼뜨려져서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다는 왜색식민사학자들의 잘못된 주장이 반드시 폐기되고 대륙에 위치해 있던 한사군의 바른 위치가 반드시 밝혀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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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개의 조선 침략에 대한 전술한 사기 흉노열전(史記卷一百十, 匈奴列傳第五十)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그 후 연나라에 현명한 장수 진개(BC 311-279)가 있어 호(: 고조선)에 볼모로 갔는데 호가 매우 신임했다. 돌아와 동호를 습격해 격파하니 동호가 1천여 리를 물러났다. 형가와 함께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던 진무양이 진개의 손자이다. 연나라 또한 장성을 쌓았는데 조양에서 양평까지이다.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군을 설치하여 호를 막았다. 연나라는 또 장성을 쌓았는데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까지 이다.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군을 두어서 동호의 침략을 막았다.

(其後燕有賢將秦開爲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走東胡東胡卻千餘里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開之孫也燕亦築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참고: 진개가 볼모(인질)로 가 있던 나라를 호()라고 기록했는데, 이를 동호(東胡)라고도 하며, 후술할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에서는 조선후(朝鮮侯)가 자칭 왕이라고 하였고, 진개가 이 조선을 침략하였다고 하였다.

 

***참고: 전술한 바와 같이 연장성의 동단 양평(襄平)後漢書 李賢에 의하면 양평은 요동의 속현으로 금 평주 노룡현 서남에 있다고 하였다. 후한서』「원소유포열전(袁紹劉表列傳)의 주석에서도 양평은 현으로 요동군에 속해있다. 그 성이 지금의 평주 노룡현 서남에 있다(襄平縣 屬遼東郡 故城在今平州盧龍縣西南)라고 하였다. 노룡현은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이며, 이보다 서남쪽에 있는 양평(襄平)이란 곳은 하북성 당산시(唐山市) 부근으로 추정할 수 있다.

 

***참고: 진개의 침략 이전에는 고조선의 땅이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군을 포함하고, 조양과 양평도 고조선의 땅이었다. 예를 들어서 베링해(갈석산)을 경계로 알라스카(양평 또는 낙랑 수성현)가 미국 땅이라고 하면, 알라스카(양평 또는 낙랑 수성현)가 소련 땅이 아닌 미국 땅이 분명한 것과 같다.

 

삼국지 위서(三國志卷三十, 魏書三十, 烏丸鮮卑東夷傳 第三十, )에는 다음과 같이 사마천의 사기와 다른 기록을 하고 있다.

 

옛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는 주나라가 쇠약해지자, 연나라가 스스로 높여 왕이라 칭하고 동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 조선후도 역시 스스로 왕호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역격하여 주 왕실을 받들려 하였는데, 그의 대부 예가 간하므로 중지하였다.

 

그리하여 예를 서쪽에 파견하여 연나라를 설득하게 하니, 연나라도 전쟁을 멈추고 침공하지 않았다. 그 뒤에 자손이 점점 교만하고 포악해지자, 연나라는 장군 진개를 파견하여 (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고 2천여 리의 땅을 빼앗아 만번한에 이르는 지역을 경계로 삼았다. 마침내 조선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魏略曰: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不攻. 後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 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

 

***위서에서는 진개가 빼앗은 땅은 동호(東胡)가 아닌 조선이라고 기록했는데, 빼앗은 땅은 2천여리로 차이가 있다. 이는 앞서 사기를 쓴 사마천(BC 145-67?)이 진개(BC 311-279)보다 약 140년 후 사람인 반면, 위서를 쓴 진수(陳壽: 233-297)가 사기(BC 108-91)는 진개보다 510여년 후의 서진(西晉) 때 사람이므로 사마천의 사기가 신빙성이 있다. 또 진수의 시기는 당시 서진이 한무제가 점령한 한사군의 땅까지 진나라가 계속 점령하고 있던 때이므로 이 땅이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일부 학자들은 2천여 리라고 한 것은 동서, 남북의 천리를 합한 면적으로 보기도 한다.

 

***연나라가 조선과 국경을 맞댄 만번한은 요동군에 문현과 번한현이 있었는데, 신채호는 개평(蓋平) 지역을 번한현으로 보고 그 부근의 서쪽으로 비정하였다. 만번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번한(眞番: 진번)과 조선은 후에 한사군의 진번과 낙랑군이 설치된 지역이며, 식민사학자 이병도가 주장하는 황해도가 아니라, 수양제의 침략경로인 고구려의 변경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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