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고대사자료39. 고조선과 한사군 위치는 명백히 밝혀져야 한다. 낙랑은 북경에서 난하서쪽까이다 글쓴이 이태수 날짜 2023-02-21

고대사자료 39. 고조선과 한사군 낙랑, 진번, 임둔, 현도의 위치는 명백히 밝혀야 한다

한국의 고대역사 기록은 매우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다. 일반인이 알기 어려우므로 이를 이해하기 쉽고 또 활용하기도 쉽도록 이들 고대 역사의 단편적인 기록에 대한 자료를 모아서 소개하고자 한다. 이 자료들이 널리 활용되고 퍼뜨려져서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다는 XXX나 왜색식민사학자들의 잘못된 주장이 반드시 폐기되고, 대륙에 위치해 있던 한사군의 바른 위치가 반드시 밝혀지기를 바란다.

 

한사군 이전의 고조선

고조선은 4,356년 전(BC 2333)에 건국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이 시기는 홍산문화 후기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홍산문화의 연대기를 보면,

기원전 3000~ 기원전 2000년 동석병용시대(銅石倂用時代) 소하연 문화 유적 小河沿 文化 내몽골 츠펑 시 아오한 기 소하연 유역의 소하연 문화유적이 고조선의 성립시기와 일치한다. 이 시기는 중국보다 1000년 이상 앞서 고조선에서 신석기 문화를 넘어 동기(銅器)를 사용한 시기로 넘어간 것이다.

 

https://cafe.daum.net/buddhistforest/3EFj/1060

https://cafe.daum.net/buddhistforest/3EFj/1062

당시 고조선은 지금의 북경지역을 포함한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 등의 지역까지 그 관할 구역에 있었고, 중국의 연나라보다 훨씬 강성하여 중국의 연나라에서는 고조선에 왕족으로 추정되는 진개를 인질로 보내 평화를 구걸하고 있었다.

 

또 고조선의 후국인 고죽국은 요령성 객좌현에서 고조선 당시의 동제푸(銅製品) 유물이 다량 발굴되었는데, 그 당시 고조선의 제후국 고죽국의 동 제품은 중국보다 1000년 이상 앞선 기술이었다. 당시 고죽국의 영토는 북경 부근을 포함하여 요령성과 발해만에 걸여 있었으며, 이 지역 역시 고조선의 영토이었다.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9110601031512000001

 

그러나 약소국 연나라가 강대국 고조선에 인질로 보냈던 진개가 연나라로 돌아간 이후 고조선을 침략하여 어양, 우북평, 요서 및 요동까지 빼앗았다. 진개는 고조선에서 빼앗은 땅에 연장성을 쌓았는데, 1세기 후 진시황이 연나라를 정복하고 연장성을 연결하여 만리장성을 쌓았다. 만리장성은 갈석산이 있는 진황도시 산해관에서 북경의 팔달령을 지나 서쪽으로 이어지고 있으므로, 진개가 빼앗은 땅이 이 만리장성 안에 있었고, 이 만리장성 안에 어양, 우북평, 요서 및 요동이 존재한 것은 아닌지? 사학자들의 연구가 필요하다. 필자의 견해로 당시 어양, 우북평, 요서 및 요동은 모두 진장성 서쪽에 이치해 있었을 것으로 비정하고 있다. 고조선의 유물인 명도전이나 고인돌이 모두 어양, 우북평, 요서 및 요동을 포함한 지역까지 펼쳐저 있음은 이를 증명하는 것이다.

 

https://cafe.daum.net/buddhistforest/3EFj/1055

https://cafe.daum.net/buddhistforest/3EFj/1052

 

진시황 당시 진시황이 쌓은 만리장성, 즉 갈석산이 있는 진황도시의 산해관에서 시작되어 북경의 팔달령을 지나 서쪽으로 이어진 만리장성의 동쪽은 그 경계가 고조선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진시황은 자기들의 영토가 만리장성을 경계로 하여 그 서쪽의 지역이 진시황의 영토이고, 동쪽은 조선의 요동이 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https://cafe.daum.net/buddhistforest/3EFj/1078

 

진나라가 망하고 후에 한나라 무제 때 위만이 고조선으로 망명하였다. 위만은 고조선의 준왕(準王)에게 번병(藩屛)이 되기를 청하여 고조선의 서쪽 변경을 수비하는 일을 맡았고, 준왕의 신임을 얻어서 박사에 임명되었으며 100리의 땅을 받는 한편, (천자가 제후에게 주는 上圓下方)도 하사받았다. 이를 보면 당시 준왕(準王)은 천자의 지위에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사기(史記)에는 위만이 망명하여 고조선의 변방을 지키는 자가 되었다고 하였으므로, 사기를 쓴 사마천도 위만조선 이전의 고조선을 분명히 인정하고 있다. 다만 사마천은 그의 기록에 진번조선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위만은 사기에서 연나라 사람이라고 하였지만, 그가 조선옷을 입고 상투를 튼 사람이라는 사기(史記)의 기록은 진개가 침략하기 이전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이 모두 조선땅이었고, 이로부터 100여년 후 위만이 조선에 왔으므로 위만은 이전 조선 고토에 살던 조선인으로 보아야 한다. 또 그가 건넌 패수는 한나라 초기 조백하를 이르는 것이며, xxx이병도가 말하는 청천강이 결코 아니다. 한나라 초기 북경을 지나 흐르는 패수, 조백하의 동쪽은 한나라의 통치가 되지 않는 공터로 보인다. 또 조선현은 이병도가 말하는 낙랑군의 주현 평양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 노룡현의 동쪽에 있었다는 괄리지 기록이 있다.

https://cafe.daum.net/buddhistforest/3EFj/1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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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에서 망명한 위만이 처음 터를 잡은 곳은 만리장성 안쪽 북경 부근의 상하운장으로 추정되며, 이곳에서 진번조선의 외방을 지키는 벼슬을 얻은 위만은 연나라, 제나라의 망명자들까지 끌어모으면서 세력을 키워 진번조선을 침탈하고 위만조선을 세우게 된 것이다.

https://cafe.daum.net/buddhistforest/3EFj/1096

 

이후 위만의 손자 우거때 한무제는 위만을 침략하게 된 것이다.

https://cafe.daum.net/buddhistforest/3EFj/1095

 

당시의 낙랑군조선현은 이병도란놈이 주장하는 평양이 아니고, 낙랑군조선현 왕검성은 지금의 진황도시 부근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왕검성은 한 곳이 아니고 여러 곳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으며, 신채호는 왕검성이 개평 부근에 있었다고 하였다.

https://cafe.daum.net/buddhistforest/3EFj/1098

한사군에 대한 설명 요약

한나라 무제는 고조선을 침략한 후 BC 108-107년 고조선 옛 땅에 낙랑, 진번, 임둔, 현도의 4군 설치하고 관리를 직접 파견해 다스렸다. 한사군은 토착세력의 지속적 저항을 받자 한은 25년 후인 BC 82년에 진번과 임둔의 2군을 폐했고 현도군도 위축되었다.

 

이에 한은 한사군 설치 25년 후인 BC 82년에 4군 가운데 진번과 임둔의 2군을 폐하고 진번의 속현들은 낙랑군에, 임둔의 속현들은 현도군에 속하여 관할받도록 했다.

 

결국 313년에는 낙랑군이, 314년에는 대방군이 고구려에 멸망함으로써 한반도 내의 중국 군현은 소멸되었다.

 

따라서 수현(首縣)인 조선현(朝鮮縣: 괄리지에 노룡현 동쪽에 있었다고 기록됨. 식민사학자들의 평양이 아니다)을 비롯해 염한현·패수현(浿水:현재의 조백하 부근 지역으로 비정됨점제현(점제: 수양제의 우12군 첫 번째 침략경로이며, 평안도 평강이 아니다) ·수성현(遂成: 갈석산에 수성현이 있었으며, 이병도의 수안이 아니다증지현(增地사망현(駟望둔유현(屯有: 후에 대방이 설치된 지역으로 수양제 침략경로에 있었으며, 이병도가 주장하는 황해도가 아니다누방현(鏤方: 수양제의 좌12군 첫 번째 침략경로이며, 수경 기록은 요서에 있었고, 한반도가 아니다혼미현(渾彌탄열현(呑列) 11현으로 출발했던 낙랑군은 진번군(眞蕃郡: 낙랑군과 인접해 있어 낙랑군에 통합되었으며, 난하 서쪽으로 비정된다)의 속현 15개를 추가로 관할하게 되어 외형상 군세(郡勢)가 크게 증대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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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진번군의 속현들을 낙랑군에 통합한 것을 보면 낙랑군과 진번군은 인접헤 있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또 임둔군의 속현들을 현도군에 통합한 것을 보면 임둔군은 현도군과 인접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참고: 낙랑군은 고대사자료 7. 8. 등에서 누차 설명한 바와 같이 진황도시, 당산시 및 북경의 만리장성인 팔달령 부근 지역을 포함한 위치에 있었으며, 그 동쪽은 요수(遼水: 현재의 난하)까지 포함되었을 것으로 비정된다. 현도는 당태종의 이세적 군대가 요수(遼水: 지금의 난하)를 건너 바로 진격한 곳이 바로 현도(玄菟)이며, 난하와 요동성의 중간에 현도가 있었으므로 임둔군도 난하 동쪽인 이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비정할 수 있다.

 

***참고: 낙랑군에 속하였다는 점제현은 일본인이나 왜색사학자 이병도가 말하는 평안도 평강군이 아니라, 수양제의 고구려 침략경로 우12군 첫번째에 위치한 수나라와 고구려 변경지역의 고구려 땅이었다. 점제현이 수양제의 고구려 침략경로인 점을 보면 점제현은 최초 한사군에 속해 있었지만, 당시에는 고구려에 속한 땅이었다. 한국사학자들은 왜놈들이 쉽게 찾아낸 점제현의 위치를 지금이라도 바로 찾아내어 우리나라 역사를 바로 잡아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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