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고대사자료68. 고구려 태조왕과 미천왕이 빼앗은 안평은 형수시안평이며, 단동이 아니다 글쓴이 이태수 날짜 2023-03-05

고대사68. 고구려 태조왕과 미천왕이 빼앗은 안평현(安平縣)은 하북성 형수시에 있는 안평현이며, 단동(丹東)이 아니다.

 

한국의 고대역사 기록은 매우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다. 일반인이 알기 어려우므로 이를 이해하기 쉽고 또 활용하기도 쉽도록 이들 고대 역사의 단편적인 기록에 대한 자료를 모아서 소개하고자 한다. 이 자료들이 널리 활용되고 퍼뜨려져서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다는 XXX나 왜색식민사학자들의 잘못된 주장이 반드시 폐기되고, 대륙에 위치해 있던 한사군의 바른 위치가 반드시 밝혀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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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현은 중국 하북성 형수시에 있는 현()으로 춘추전국시대 조나라의 안평읍에 속했으며, ()나라 때 안평현(安平縣)이 설치되어 고구려 6대 태조대왕이 한()나라에 속한 요동의 서쪽 안평현을 습격한 기록이 있고, 15대 미천왕은 요동의 서쪽에 있는 안평현을 빼앗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된 분명한 사실은 중국 하북성 형수시 안평현이 요동의 서쪽 안평현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왜놈들이나 왜놈들을 추종하는 식민사학자들, XXX 들이 주장하는 압록강 하구 단동(丹東)이 안평(安平: 西安平)이란 지금까지의 잘못된 기록은 반드시 폐기되고 요동의 서쪽 안평현(遼東西 安平)의 위치는 하북성 형수시 안평현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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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백과의 안평현 설명은 다음과 같다.

안핑현

[Anping, 安平縣(안평현)]

 

요약중국 허베이성[河北省] 헝수이[衡水]에 있는 현().

위치 : 중국 허베이성 헝수이 북서부

 

면적() : 495.4

 

중국 허베이성 헝수이[衡水] 북서부의 화베이평원[華北平原] 중부에 위치한다. 스자좡[石家庄]까지의 거리는 91.2km이다. () 인민정부가 안핑진[安平鎭]에 있다.

 

전국(戰國)시대에는 조()나라 안핑읍[安平邑]에 속하였으며, ()나라 때 안핑현[安平縣]이 설치되었다. 공업으로 기계·화학·전자·건축자재·방직 등이 발달하였고, 농산물로 밀·옥수수·수수·잡곡·면화·땅콩 등을 산출한다.

 

주요 교통로로 바오헝공로[保衡公路:保定~衡水정라오공로[正饒公路:正定~饒陽]가 지나며, 교육기관으로 중학교 22개와 직업중학교 1개가 있다. 문화유적으로 동한(東漢)시대의 샤오간성구묘[孝感聖姑廟]와 채색벽화 한묘[漢墓]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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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의 서쪽 안평(遼東西安平)은 중국 하북성 형수시 안평현이벼, 안평을 서안평이라 하면서 지금의 단동(丹東)이라는 한국사 통설은 폐기되어야 한다.

 

https://cafe.daum.net/buddhistforest/3EFj/982

 

우리나라 대학교용 한국사 교재를 보면 서안평의 위치를 단동으로 표시가 되어 있으며, 이것이 한국사학자들의 통설이다. 그러나 서안평이 단동이라는 주장은 잘못된 학설로서 반드시 폐기되어야 하고 수정되어야 한다.

 

서안평에 대한 기록은 고구려 제6대 태조왕(太祖王) 94(AD 147)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秋八月 王遣將 襲漢遼東西 安平縣 殺大方令 掠得樂浪太守妻子>

 

(태조왕 94년 가을 8월에 왕이 장수를 보내서 한의 요동 서쪽에 있는 안평현을 습격하고 대방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와 아들을 빼앗아 왔다)

 

위의 글을 보면 요동서안평현(遼東西安平)은 한나라에 속했던 요동의 서쪽 안평현이라고 해석해야 하며, 이같이 해석하면 그 위치는 바로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형수시(衡水市) 안평현(安平縣)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요동에 서안평(西安平)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요동의 서쪽에 있는 안평현인 것이다.

 

한국의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단동(丹東)은 요동의 서쪽이 결코 아니다. 요동의 서쪽에 있는 안평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서안평(西安平)이란 해괴한 명칭을 만들어 압록강 하류 지역에 위치를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왜놈들이나 왜놈들의 주장을 추종하는 XXX들이 단동(丹東)을 예전에 안동(安東)이라 하였고, 서안평(西安平)에 안()자가 들어간 지명이 압록강 하류에 있는 안동(安東)이라는 것을 이용하여 서안평의 위치를 추정하고 비정하였기 때문이다.

 

서안평에 대해서는 15대 미천왕의 기록에도 나타나고 있다.

<三年 秋九月 王率兵三萬 侵玄菟郡 虜擭八千人 移之平壤, 十二年 秋八月 遣將襲取 遼東西 安平>

 

(15대 미천왕 3(AD 302) 9월에 왕은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침범하여 8,000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 12(AD 311)에 장수를 보내어 요동의 서안평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여기서 나타난 서안평은 역시 요동의 서안평이거나 요동의 서쪽 안평현(安平縣)이어서 15대 미천왕은 3(AD 302) 9월에 현도군(玄菟郡)을 침범하여 8천명을 사로잡아 평양(平壤)으로 옮겼다고 했는데, 현도군은 지금의 난하(灤河)인 요수(遼水) 동쪽에 붙어 있던 땅이고(*삼국사기 보장왕조 이세적의 침입 참조), 평양(平壤)은 왜놈들이나 식민사학자들이 말하는 지금의 평양이 아니고, 지금의 난하인 요수(遼水) 부근에 있던 옛날 고조선 왕검성 평양(王儉城平壤)인 것이다.

 

왜놈들이나 식민사학자들이 말하는 평양 낙랑의 멸망한 해인 AD 314년 보다 12년 전에 미천왕이 8천명을 사로잡아 지금의 평양으로 옮겼다고 한다면, 이런 주장은 가당치도 않은 주장ㅇ다. 12(AD 311) 8월 장수를 보내 요동의 서쪽 안평현을 빼앗았다(十二年 秋八月 遣將襲取 遼東西 安平)는 것도 분명한 기록이어서 여기에 기록된 안평은 서안평(西安平)이 아니라, 지금 하북성 형수시 안평현을 일컬어서 요동의 서쪽 안평(遣將襲取 遼東西 安平)이라 한 것이 분명하다.

 

왜놈들이나 왜놈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XXX들이 주장하는 단동(丹東)과는 2천리나 떨어진 요동지역이며, 결코 단동이 될 수 없다.

 

XXX 이병도와 그 무리들이 낙랑은 평양에 있었고 AD 314년 고구려에게 망했다고 했는데, 이보다 12년 전에 현도에서 사로잡은 8,000명을 평양으로 옮겼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평양성은 지금의 평양이 아닌 요동에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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