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고대사자료19. 신지비사의 글은 달문단군때 서효사의 일부이다 | 글쓴이 | 이태수 | 날짜 | 2023-02-11 |
한국고대사 단편적 자료들⑲ 신지비사의 글은 달문단군 때 신지가 지은 민족 대서사시 서효사의 일부이다.
한국의 고대역사 기록은 매우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다. 일반인이 알기 어려우므로 이를 이해하기 쉽고 또 활용하기도 쉽도록 이들 고대 역사의 단편적인 기록에 대한 자료를 모아서 소개하고자 한다. 이 자료들이 널리 활용되고 퍼뜨려져서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다는 왜색식민사학자들의 잘못된 주장이 반드시 폐기되고, 대륙에 위치해 있던 한사군의 바른 위치가 반드시 밝혀지기를 바란다.
신지비사의 글은 달문단군 때 신지가 지은 민족의 대서사시 서효사의 일부이었다.
〇신지비사(神誌祕史)의 조선 삼경(三京)에 대한 기록
신지(神誌)는 고조선 때 부족의 군장(君長)을 이르던 말이라고 하며, 『환단고기』(桓檀古記 107, 111, 117p)를 보면 2세 단군인 부루단군(BC 2240∼2182) 때 신지 귀기(貴己)가 칠회력(七回歷)과 구정도(丘井圖)를 만들어 바쳤다는 기록이 있고, 3세 단군인 가륵단군(加勒檀君: BC 2183-BC 2138년) 때 신지(神誌) 벼슬을 하는 고설(高契)에게 명하여 『배달유기(倍達留記)를 편찬케 하였다. 6세 단군인 달문(達文)단군은 신지(神誌) 발리(發理)에게 서효사(誓效詞)를 짓게 하였다. 신채호는 ‘신지’를 수석대신(首席大臣)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므로 신지비사(神誌祕詞)는 신지가 지은 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조 태종(太宗)이 유학을 중심으로 삼고, 그 밖의 일체를 배척하여 이단(異端)으로 간주되는 서책들을 모두 불살라 버렸는데, <신지(神誌)>도 그 때 불태워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지의 내용 중 <고려사(高麗史)> 숙종(숙종: AD 1095∼1105) 때의 김위제전(金謂磾傳)에 기록되어 있다.
김위제(金謂磾)는 숙종 1년(1096)에 위위승동정(衛尉丞同正)에 올랐다. 신라 말에 도선(道詵)이라는 승려가 당나라로 가서 승려 일행(一行)에게 풍수지리를 배우고 돌아와 비기(秘記)를 지어 후세에 전하였다. 김위제가 도선의 술법을 공부한 후, 남경 천도를 청하며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도선기』에는 ‘고려 땅에 세 곳의 수도가 있으니, 송악(松嶽)이 중경(中京), 목멱양(木覓壤)이 남경(南京), 평양이 서경(西京)이다. 11⋅12⋅1⋅2월은 중경에서, 3~6월은 남경에서, 7~10월은 서경에서 지내면 36개국이 와서 조공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또 ‘나라를 세운 지 160여 년 후에 목멱양에 도읍한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이 바로 새 수도를 돌아보시고 그곳으로 옮기실 때라고 봅니다....(중략)....
또 『신지비사(神誌秘詞) 』에 이르기를
“(조선)은 마치 저울대, 저울추 및 저울판(접시)과 같은데, 저울대는 부소량(扶疎樑)이고, 저울추는 오덕지(五德地)이며, 저울판은 백아강(百牙岡)에 해당한다. 조공하고 항복한 나라가 70국이다. 그 덕에 의지하여 단군의 정신을 지켜나갔다. 우두머리와 말미가 같은 위치에서 균형을 이루니 나라가 흥성하고 태평을 이루었다. 그러나 만약 이들 삼경(三京) 중 하나라도 폐한다면 왕업은 쇠하여 기울어질 것입니다. 이는 저울을 가지고 3경을 비유한 것입니다. ”저울 접시는 머리요, 저울추는 꼬리이며, 저울대는 균형을 잡는 곳입니다.
(又神誌祕詞曰 與秤錘 極器 秤幹扶疎樑 錘者五德地 極器百牙岡 朝降七十國 賴德護神精 首尾均平位 興邦保太平 若廢三諭地 王業有衰傾 此以秤諭三京也 錘者尾也 秤幹者 提綱之處也)“
송악을 부소라고 하여 저울대에 비유했으며, 서경은 백아강이라고 하여 저울머리에 비유하고, 삼각산의 남쪽은 오덕을 갖춘 곳으로 저울추에 비유한 것입니다....(중략)
지금 우리나라에는 중경(開京)과 서경(平壤)은 있으나 남경(南京)이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삼각산 남쪽, 목면산 북쪽의 평지(漢陽: 지금의 서울)에 도성을 건설하고 때를 맞추어 순행하시고 머무시기 바랍니다. 이 문제는 진실로 나라의 흥망과 성쇠에 관련되는 일이기 때문에 신은 감히 배척 받을 것을 무릅쓰고 삼가 기록하여 올립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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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김위제는 삼경을 평양과 개성과 한양으로 말하고 있으나, 신채호는 ”김위제전에 소개된 내용이 10줄에 불과한 너무 짧은 내용이어서 우리나라의 고대사 연구에 큰 아쉬움이 있다고 하면서 만약 전부가 다 남아 있다면 우리의 고사(故事) 연구에 얼마나 큰 힘이 되겠는가?(박기봉 옮김. 신채호 조선상고사 36p)” 라고 한탄하였다.
또 신채호는 “대단군의 삼경(三京) 중, 그 하나는 지금의 하얼빈이니, 고사(古史)에 부소가(扶蘇岬) 혹은 비서갑(非西岬) 혹은 아사달(阿斯達)로 기록된 곳이며, 두 번째는 지금의 요령성 해성(海城)᠂개평(蓋平) 등지로서 고사에 오덕지(五德地) 혹은 오비지(五備旨) 혹은 안지홀(安地忽) 혹은 안시성(安市城)으로 기록된 곳이며, 세 번째는 지금의 평양(平壤)이니, 고사에 백아강(伯牙岡), 혹은 낙랑(樂浪), 혹은 평원(平原) 혹은 평양으로 기록되어 있는 곳이다”라고 말하여 하얼빈과, 개평과 평양을 삼경(三京)이라 주장하였다.
그러나 『환단고기(桓檀古記)』를 역주한 안경전은 부소량(扶疎樑:소밀랑)은 하얼빈으로, 백아강은 평양이라 하여 신채호와 같은 곳으로 기록했으나, 오덕지(五德地) 안덕향(安德鄕)은 하북성의 당산 탕지보라고 하여 오덕지의 위치에 차이가 있다. 이는 고조선의 왕검성(王儉城)에 대한 고증(考證)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철저한 연구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 고조선의 삼경 중 서쪽 지방의 삼경은 고문헌에 험독(險瀆) 등으로 기록되었는데, 험독의 위치 비정을 신채호는 개평(蓋平) 지방으로 안경전은 당산 탕지보로 비정한 것으로 본다. 또는 고조선의 왕검성 위치가 탕지보에서 개평으로 변동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참고: 신채호는 “김위제전에 소개된 내용이 10줄에 불과한 너무 짧은 내용이어서 우리나라의 고대사 연구에 큰 아쉬움이 있다고 하면서 만약 전부가 다 남아 있다면 우리의 고사(故事) 연구에 얼마나 큰 힘이 되겠는가?(박기봉 옮김. 신채호 조선상고사 36p)” 라고 하였는데, 김위제전에 소개된 신지(神誌)의 글은 6세 단군인 달문(達文: BC 2083∼2047년)단군은 신지(神誌) 발리(發理)에게 서효사(誓效詞)를 짓게 하였다고 하였다. 신지가 대신임을 볼 수 있다.
〇김위제 신지비사의 글은 달문단군 때 지은 서효사(誓效詞)의 일부분이다.
신채호가 “불과 10줄의 글만 남아서 우리 고대사의 연구에 큰 어려움이 있고, 만약 전부가 다 남아 있다면 우리의 고사(故事) 연구에 얼마나 큰 힘이 되겠는가?”라고 안타까워 했던 김위제가 인용한 신지(神誌)의 글이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 달문단군(達文檀君) 조에 ‘서효사(誓效詞)’로 남아있다. 6세 달문단군(BC 2083∼2047년)께서는 재위 35년 임자(BC 2047년)에 여러 왕(諸汗)을 상춘(常春: 長春, 이곳에 구월산이 있다)에 모아 구월산(九月山)에서 삼신(三神)께 제사 지낼 때 신지(神誌) 발리(發理)로 하여금 서효사(誓效詞)를 짓게 하시니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서효사(誓效詞)>
“아침 햇빛 먼저 받는 이땅에(朝光先受地)
삼신께서 밝게 세상에 임하셨고(三神赫世臨)
환인천제 먼저 법을 내셔서(桓因出象先)
덕을 심음이 크고도 깊사옵니다.(樹德宏且深)
모든 신들이 의논하여 환웅을 보내셔서(諸神議遣雄)
환인천제의 조칙을 받들어 처음으로 나라를 여셨습니다(承詔始開天)
치우천황 청구에서 일어나(蚩尤起靑丘)
만고에 무용을 떨치셔서(萬古振武聲)
회수와 태산이 모두 천황께 귀순하니(淮岱皆歸王)
천하의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었습니다(天下莫能侵)
단군왕검 하늘의 명을 받으시니(王儉受大命)
기쁨의 소리 구환에 울려퍼졌습니다(懽聲動九桓)
물고기 물 만난 듯 백성들이 소생하고(魚水民其蘇)
풀잎에 부는 바람처럼 덕화가 새로워졌습니다(草風德化新)
원한 맺힌 자 원한을 먼저 풀어주고(怨者先解怨)
병든 자 먼저 낫게 하셨습니다(病者先去病)
일심으로 인과 효를 행하시니(一心存仁孝)
사해에 광명이 넘칩니다(四海盡光明)
진한이 나라 안을 안정시키니(眞韓鎭國中)
정치의 도는 모두 새로워졌습니다(治道含惟新)
모한(마한)은 왼쪽을 지키고(慕韓保其左)
번한은 남쪽을 제압하옵니다(番韓控其南)
깎아지른 바위가 사방 벽으로 둘러쌌는데(嶄岩圍四壁)
거룩하신 임금께서 새서울에 행차하셨습니다(聖主行新京)
삼한의 형세가 저울대, 저울추, 저울판 같으니(與秤錘極器)
저울판은 백아강이요(極器百牙岡)
저울대는 소밀랑이요(秤幹疎密浪: 扶疎樑)
저울추는 안덕향이니(錘者安德鄕: 五德地)
머리와 꼬리가 서로 균형을 이루니(首尾均平位)
그 덕에 힘입어 삼신정기 보호합니다(賴德護神精)
나라를 흥성케 하여 태평세월 보전하니(興邦保太平)
일흔 나라가 조공하여 복종하였습니다(朝降七十國)
길이 삼한의 경계를 보전해야(永保三韓義)*
왕업이 흥하고 번성할 것입니다(王業有興隆)*
나라의 흥망을 말하지 말지니(興廢莫爲說)
천신님을 섬기는데 정성을 다하겠습니다(誠在事天神)”
〇 서효사(誓效詞)와 김위제의 신지비사(神誌祕詞) 차이
서효사(誓效詞)에는 앞구절에서 환인천제와 환웅천왕, 치우천왕에 대해 찬양하였고, 이어서 단군왕검에 대한 찬양을 하였으며, 중간 구절에서는 진한과 모한(마한) 및 번한의 정립(鼎立)을 설명하였고, 맨 뒷 구절에서 김위제가 설명하는 ‘신지비사(神誌秘詞)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단제 신채호가 안타까워 한 생략된 구절이 서효사에 모두 들어 있는 것이며, 신채호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환호했을 것이다.
서효사의 뒷구절에 기록된 내용과 김위제의 신지비사(神誌祕詞)에 소개된 내용을 거의 일치하는데, 서효사에서는
“길이 삼한의 경계를 보전해야 왕업이 흥하고 번성할 것입니다(永保三韓義 王業有興隆)”라고 한 것을 김위제의 신지비사에서는 “만약 이들 삼경 중 하나라도 폐한다면 왕업이 쇠하고 기울어질 것입니다(若廢三諭地 王業有衰傾)”라고 하여 달리 표현하였다. 이는 서효사의 문맥으로 볼 때 서효사의 글이 맞는 것이지만, 아마도 김위제는 남경(南京: 漢陽)의 설치를 강력히 주장하기 위하여 일부의 구절을 바꾼 것으로 본다.
〇서효사의 글은 현대에도 귀감이 될 명문으로 보인다.
서효사(誓效詞)는 『환단고기의 단군세기』 6세 달문(達文)단군께서 신지(神誌) 발리(發理)에게 명하여 짓게 한 노래인데, 우리 한민족의 뿌리를 노래한 대서사시(大敍事詩)이다. 현대인이 글을 짓더라도 이보다 더 잘 짓기가 어려운 글이다.
앞 구절에서 환인천제와 환웅천왕, 치우천왕과 단군왕검에 대한 찬양을 하였고, 중간 구절에서는 진한과 모한(마한) 및 번한의 정립(鼎立)을 설명하였으며, 뒷 구절에서 당시 조선을 구성하고 있던 진한(眞韓: 辰韓), 모한(慕韓: 馬韓) 및 번한(番韓: 弁韓)이 함께 균형을 이루어 태평성세가 이루어지고, 왕업이 흥왕할 것을 노래하고 있다.
지금의 애국가(愛國歌)보다도 더 뜻이 깊고 심오한 논리로 보인다. 서효사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더 깊은 연구를 하고 그 바른 정신이 선양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〇『환단고기』 서효사(誓效詞) 기록에 대한 평가
우리나라의 고대사인 삼한(三韓)과 조선(朝鮮)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나 제왕운기 등에 극히 단편적인 내용만 전해저 오고 있다. 삼한과 조선에 대한 기록이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그러나 당시의 주(周)나라나 춘추전국시대 또는 진한(秦漢)시대나 그 이후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인들은 그들의 동북쪽에 있는 삼한(三韓)이나 조선(朝鮮)에 대해서 심히 모욕적인 칭호를 사용해 왔다.
동쪽의 오랑케라는 뜻의 동이(東夷)를 비롯하여, 산의 오랑케 또는 산의 도적들이라는 뜻의 산융(山戎), 더럽고 무서운 짐승들이라는 뜻의 예맥(濊貊) 등이 화하족(華夏族: 漢族)이 우리나라를 부르던 칭호이었다. 그러므로 중국인이 기록한 동쪽 조선(朝鮮)에 대한 기록은 그들의 입맛에 맞도록 변조하고 왜곡하고, 비하했던 것이 사실이다.
심한 사례는 우리의 조상이신 치우천왕(蚩尤天王)에 대해서 중국인들은 황제헌원을 극찬하면서 치우천왕을 짐승이라고 말도 되지 않는 말로 비하하였다.
“치우는 형제가 81명으로 짐승의 몸을 하고 사람의 말을 하였다. 머리가 구리같이 단단하고 이마는 철같이 강하였으며, 모래를 먹었다. 오구장(五丘杖)과 칼(刀)과 갈라진 창(戟)과 한꺼번에 많은 화살을 쏘는 활(太弩)를 만들어 천하에 그 위세를 떨쳤다. 치우는 옛날 천자의 호칭(古天子之號)이다(司馬遷史記曰 諸侯咸來賓從 而蚩尤 最爲暴 天下莫能伐 軒轅 攝政 蚩尤有兄弟八十一人 竝獸身人語 銅頭鐵額 食沙 造五丘杖 刀戟太弩 威振天下 蚩尤 古天子之號也)
그러나 환단고기에서는
”치우천왕이 삭도(산동성 염치현 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켜 회수와 태산 사이의 땅(淮垈之間)을 점령하셨다. 헌후(軒候: 헌원)가 왕이라고 칭하자(立), 바로 탁록(涿鹿)의 들로 진격하여 헌원을 사로잡고 신하로 삼으셨다(擒軒轅而臣之)“라고 하여 치우천왕의 위대한 업적을 기록하고 있다.
고려 때 <김위제전>에 기록된 신지비사(神誌祕詞)의 내용이 중요한 부분이 다 없어진 일 부분에 불과했지만, 『환단고기(桓檀古記)』는 그 내용이 6세 달문단군께서 신지에게 명하여 지으신 “서효사(誓效詞)”의 일 부분임을 분명히 밝혀 주고 있다.
『환단고기』는 우리나라 고조선의 역사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역사를 가르치는 사람이나, 역사를 배우는 사람이나 또는 일반인들도 우리의 조상 역사를 바로 볼 수 있는 『환단고기』를 꼭 읽어보시고 민족의 바른 역사와 바른 정신을 가지실 수 있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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