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고대사자료13. 고죽국은 고조선의 후국이었다. 신용하교수와 환단고기의 글 | 글쓴이 | 이태수 | 날짜 | 2023-02-07 |
한국고대사 단편적 자료들⑬ 고죽국을 조선의 후국이라고 한 신용하교수님 글과 환단고기의 고죽국
한국의 고대역사 기록은 매우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다. 일반인이 알기 어려우므로 이를 이해하기 쉽고 또 활용하기도 쉽도록 이들 고대 역사의 단편적인 기록에 대한 자료를 모아서 소개하고자 한다. 이 자료들이 널리 활용되고 퍼뜨려져서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다는 왜색식민사학자들의 잘못된 주장이 반드시 폐기되고, 대륙에 위치해 있던 한사군의 바른 위치가 반드시 밝혀지기를 바란다.
2회에 걸처 조선의 후국인 고죽국을 설명하였는데, 고죽국을 중국의 후국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 신용하교수님의 “고조선 연방 고죽국”에 대한 글을 인용 소개한다. 고죽국의 유물은 요령성 객좌현에서 대량 발굴되었으며, 그 지역은 북경부근과 발해 및 난하지역을 포함한 지역이다.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9110601031512000001
고죽국은 고조선의 후국이라고 한 신용하교수의 글과 환단고기 고죽국 기록
■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⑨ 새로 찾은 고조선 연방 고죽국
BC 21세기 건국해 조양~천진 이르던 고조선의 후국 … 공자도 도덕·예의 있는 ‘군자국’ 칭송
‘아사달’문양 청동화폐로 상업·무역 발달 … BC 3세기초 燕의 장수 진개 침공 받고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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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에 중국 요령성 객좌현 고산(孤山) 북동촌(北洞村) 산기술 제1호 매장지 구덩이에서 상(商)나라 후기 수도 은허(殷墟)에서 발굴된 청동기보다 시기도 앞서고 더욱 선진한 청동예기 6점이 발굴됐다. 그중에 청동·술단지 제기 하나에 ‘父丁孤竹亞微(부정고국아미)’라는 명문이 있어서 이 청동기들이 고죽국(孤竹國)의 청동기라는 사실이 증명됐다. 이어서 부근의 제2호 매장지에서 또 6점의 청동기가 출토됐다.
고죽국 청동기가 12점이나 발견되자, 중국 학계에서는 고죽국을 상(商=殷)의 제후국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일어났다. 이웃인 하북성(河北省) 당산(唐山)시 대성산(大城山) 유적에서 구멍 뚫린 자연동(紅銅·홍동) 장식물 2점이 1959년에 출토됐는데, 중국에서는 이것을 BC 2000년경의 중국 최초의 동기(銅器)로 설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중국의 가장 오래된 고문헌들이 ‘고죽국’을 중국의 조상국가가 아니라 ‘동이족’의 국가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에서 맨 처음 ‘고죽국’이 조선사람의 조상국가라고 주장한 학자는 성호 이익(李瀷)이다. 이익은 명나라 지리서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조선성(朝鮮城)이 북경에 가까운 영평부(永平府) 경내 있다는 글을 읽고, “고죽국은 영평부에 있었다. 고죽국 세 임금의 무덤과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묘(墓)도 그곳에 있다”고 했다.(‘성호사설’) 이익은 고죽국이 고조선 후국임을 잘 인지하여, “고죽의 옛터가 오늘의 요심(遼瀋)에 있으면서 북해(北海, 발해)의 바닷가로 일컬어지는 것이다. 단군(檀君)…시대에 이 고장은 조선(朝鮮)에 통합됐다”고 기술했다. 이어 신채호 선생이 중국 고문헌 ‘수문비고(修文備考)’에 “고죽국은 ‘조선종(朝鮮種)’”이라 하였고, “고죽은 9족(九族, 조선족의 별칭)의 하나”라고 했다.(‘조선상고문화사’)
청동기 그림 생략
▲ ‘孤竹亞微(고죽아미)’ 명문이 새겨진 객좌현 북동 1호 출토 고죽국 청동기(위). 객좌현 소파태구 출토 고죽국 청동예기(아래).
필자도 신채호 선생을 따라 추적해보았더니, 중세 중국학자들도 ‘고죽국’이 동이족 고조선 국가임을 알고 있었다. ‘일주서(逸周書)’ 왕회편에서는 ‘고죽’을 불령지, 불도하, 산융 등과 함께 들었는데, 공영달은 이들은 모두 동북이(東北夷)라고 했다.
북경대 도서관에 수장된 ‘황명수문비사(皇明修文備史)’의 ‘구변고(九邊考)’는 ‘고죽국을 조선과 함께 동이족’이라고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에 필자는 확신을 갖고 ‘고죽국’의 실체를 탐구하여 2013년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고죽국은 명칭부터 고조선의 후국이었다. 고대 중국에서 고죽국은 ‘孤竹’ 또는 ‘고주(孤廚)’로 표기했다. 고조선 호칭을 음차 기록한 것이다. ‘孤竹’이란 한자 명칭은 고조선이 왕족 지방통치자에게 붙이는 ‘고추가(古鄒加)’에서 나온 것으로서, ‘고추가가 다스리는 나라’의 의미로 성립된 것이었다. 고조선은 중요한 후국에 대해서는 ‘가(加)’ 가운데서도 ‘고추가’를 파견하거나, 또는 후국의 제후를 왕실 혼인을 통해 ‘고추가’의 최고 ‘가’ 칭호를 주었다. ‘古鄒’의 고중국어 방언(客話) 발음도 ‘Kutseu’이고, ‘孤竹’의 고중국어 방언 발음도 ‘Kutsu’이며, ‘孤廚’의 고중국 방언 발음도 ‘Kutshu’로서 거의 완전히 동일하다. ‘고추가’의 ‘고추’를 고중국에서 ‘孤竹’ 또는 ‘孤廚’ 등으로 달리 표기한 것은 원래의 고죽국 이름은 고조선 언어로 된 명칭이었고, 그 고조선 말 이름을 여러 가지 유사발음의 다른 한자를 선택해서 표기했기 때문이었다.
BC 7세기경 고죽국의 후왕은 ‘답리가(答里呵, 고대음 다리가·Tariga, Dariga)’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답리+가’로서, 이때의 ‘가’는 ‘고추가’인 것이다. 여기서 ‘고죽국’(Kutsu국) 명칭 그 자체가 고죽국은 고조선의 고추가가 통치하는 ‘후국’임을 나타낸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조선 후국 고죽국은 언제 설치되었을까? 고죽국은 고조선이 건국 후 난하를 건너서 고중국 관내 지역으로 진출하던 시기에 난하 양안에 설치되었던 고조선 최서변 후국의 하나였다. 고죽국의 설치시기는 BC 21세기경의 매우 이른 시기에 성립됐다. 중국 고문헌들은 하(夏)나라를 건국한 선주민 장수 헌원(軒轅)이 동이족 장수 치우(蚩尤, 고조선 이주민 장수)와 대결하여 탁록(탁鹿) 대결전에서 승리하여 하(夏)를 건국하고 국왕이 됐는데, 후에 중국인들이 헌원을 황제(黃帝)로 추존하여 중국 고대국가 건국 시조로 삼는다고 설명해 왔다.
‘탁록’은 난하를 건너 지금의 북경의 서쪽 120㎞ 지점에 있는 벌판이다. 지금의 하북성 탁록현에 속한다. 최근 중국의 고대사학자들은 헌원과 치우를 실재인물이며, ‘탁록벌 전투’도 사실로 인정한다. 중국은 하(夏)의 성립 시기를 BC 2070년(BC 21세기)으로 추정했고, 하왕조의 존속기간을 BC 2070년∼BC 1600년으로 추정했다. 하(夏)의 건국연대 BC 2070년대 설을 받아들인다면, 고죽국 설치는 하(夏)의 건국보다 약간 먼저였으니, 고조선의 고죽국 설치는 늦어도 BC 21세기경이 된다.
고죽국의 위치는? 당(唐) 시대의 ‘통전(通典)’ 북평군 평주조에서 “평주는 지금의 노룡현(盧龍縣)이다. 은(殷) 시대에는 고죽국이었다”고 기록했다. 또한 ‘통전’ 영주(營州)조에서는 “영주는 지금의 유성현이다. 은(殷) 시대에는 고죽국지(孤竹國地)였다”고 기록했다. 이것은 상·은(商·殷) 시대에 고죽국이 매우 강성하여 지금의 (북경 부근을 흐르는) 대릉하 유역 조양(朝陽) 지구도 영유했음을 기록한 것이었다.
중국 사회과학원이 편찬한 ‘중국역사지도집’에서는 ‘고죽국’을 난하 하류 유역에 표시했다. 그러므로 ‘고죽국’ 영역은 당(唐) 시대의 유주(幽州)·계주(계州)·평주(平州)·영주(營州)로 구성되어 있었다. 유주가 서쪽이고 영주가 동쪽이었다. 고죽국의 도읍은 난하의 동쪽 강변 노룡(盧龍)이었지만, 고죽국의 서변은 난하를 건너 서쪽으로 지금의 천진(天津)까지였다.
백랑수(지금의 대릉하) 유역과 지금의 조양(朝陽) 지역은 영주(營州) 지역이므로 고죽국의 통치를 받던 고죽국의 영지였다. 고죽국은 난하를 가운데 두고 그 동쪽은 ‘조양’과 서쪽은 ‘천진’까지에 걸친 고조선의 후국이었다. 즉 고조선 시기에 발해만 북쪽 해안에 고조선 후국 고죽국이 있었으며 중국인들은 고죽국과 고죽국 수도 ‘고죽성’을 ‘조선’이라고 인식했었고, 명나라 시대에는 영평부 소속 ‘조선성(朝鮮城)’으로 편제했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이 소위 ‘동북공정’을 시작한 전후부터 고죽국을 고중국의 상(商) 또는 연(燕)의 후국이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나오는데, 전혀 사실이 아닌 억설이다.
고죽국은 발해만 연안에 설치된 고조선의 후국으로서 고조선에서 파견된 고추가가 통치했다. 그 역사적 증거로는 BC 7세기 중엽에 고조선과 고중국이 국경 전쟁을 하게 됐는데, 중국 측 산동반도의 제(齊) 환공(桓公)은 노(魯)·연(燕)·진(晉) 등과 연합국을 편성했다. 이에 대항하여 고조선 측은 고죽(孤竹)이 중심이 되어 불리지(弗離支, 또는 영지·令支)·산융(山戎)·도하(屠何) 등이 고조선 연합군을 편성하여, 고중국(周, 齊, 燕…등) 연합군에 대항하여 고조선을 방어했다. 이때 고죽국은 고중국 연합군에 대항해 고조선의 중심세력이었음이 고중국 측 문헌 ‘관자(管子)’에 기록돼 있다. 이때 제의 환공에 대항해 싸운 고죽국 장군이 황화(黃花)였고, 고죽국 군주의 성씨는 묵(墨) 씨였으며, 호칭은 고조선 고추가인 답리가(고대발음 다리가)였다.
BC 3세기에 편찬됐다는 ‘산해경(山海經)’, 해내경에는 ‘조선(朝鮮)’이 나오는데, “동해의 안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는데, 조선과 천독이라고 한다”고 기록했다. 또 ‘산해경’ 해내북경에서도 “조선은 열양(列陽)의 동쪽에 있는데, 바다의 북쪽이고 산의 남쪽이다”고 서술했다. 여기서 중국의 동해를 황해로, 북해를 발해로 해석하면, ‘산해경’의 ‘조선’은 ‘통전’의 ‘고죽국’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즉 고중국에서는 ‘고죽국’을 ‘조선’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죽국은 어떠한 정치를 하던 고조선 후국이었는가? 고죽국은 매우 이른 시기에 율령을 제정하여 통치한 율령국가였다. ‘서경’에 고죽국 왕자 백이(伯夷)의 업적으로 “법령을 제정하여 백성들을 (자의적) 형벌로부터 막았음”을 든 것은 고죽국에서는 매우 일찍 ‘율령’에 의한 통치 행정이 시행되었음을 기록한 것이다.
고죽국에서는 청동기문화가 크게 발전했다. 현재 중국의 가장 오래된 황동(黃銅) 2점도 당산(唐山)에서 출토됐는데, 고죽국 청동기였다. 1973년에 고죽국 영토였던 요령성 객좌현 북동촌의 두 매장지에서 출토된 12개 청동기 가운데 한 예기(禮器)에는 “고죽국의 아미(亞微)”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서 고죽국의 청동기임을 알려주는데, 당시로서는 최고수준의 청동기였고 상(商)의 청동기의 원류가 된 것이었다.
고죽국에서는 청동기수공업과 함께 고조선지역과 고중국지역을 소통 교류하는 상업과 무역도 매우 발전했다. 상거래에는 청동 주조화폐로 ‘고죽명도전(孤竹明刀錢)’과 ‘명화폐(明化幣)’ ‘일화폐(一化幣)’가 사용됐다. 필자는 중국 산동반도 대문구문화유적에서 1979년 발견된 11점 토기 술잔의 문양이 고조선 민족을 상징하는 ‘아사달’ 문양임을 이미 밝힌 바 있다.
고죽국이 고조선 고죽국 청동 화폐에 ‘아사달’ 문양을 주조하여 조선화폐임을 표시한 것인데, 1928년에 일본학자들이 이 문양을 ‘명(明)’자로 잘못 해석하여 ‘명도전(明刀錢)’이라고 호칭하고 중국 학자들이 연(燕)나라 화폐로 잘못 분류해서 지금까지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소위 명도전과 명화폐 및 일화폐는 고죽국 화폐였다.
특히 이 중에서도 고죽국 ‘명도전’은 고조선 연방 전역과 고중국에서 고죽국의 왕성한 상업·무역에 병행하여 국제화페로 널리 사용됐다.
고죽국은 기본적으로 농경국가이면서도 목축을 병행하여 발전시켰으며, ‘말’을 대대적으로 사육하여 ‘기마문화’를 발전시켰다. 고죽국은 ‘기마문화’에 기반하여 기병부대를 창설해서 고조선 후국이 된 다른 기마유목민족들과 함께 때때로 연합군을 편성하여 작전했다. 고죽국은 고중국의 어느 한 후국이 고조선을 침노하게 할 때는 사전에 막아 방어해주는 서번(西藩)의 지위와 역할을 잘 수행했다.
고죽국은 이미 고대에 도덕과 예의가 확립된 선진적 문화국가였다. 일찍이 공자(孔子)는 고죽국을 예의와 도덕이 확립 발전된 ‘군자국’이라고 보았으며, 노(魯)나라에서 도덕이 바로 서지 못하면 구이(九夷)의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여기서 ‘구이’는 ‘고조선’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이기는 하지만, 구체적으로는 노나라에서 가장 가까운 ‘고죽국’을 가리킨 것이었다.
고죽국에서 성인에 버금하는 ‘백이’ ‘숙제’가 나와 역사에 영구히 기록된 것은 우연한 돌출이 아니라 고죽국의 확립 발전된 예의와 도덕에 기반한 것이었다. 사마천도 ‘사기(史記)’에서 ‘백이열전’을 쓰면서 고죽국이 효(孝)와 인(仁) 등 도덕과 예의가 확립된 나라임을 확인했다.
고죽국은 BC 3세기 초기에 연(燕)의 장수 진개(秦開)가 고조선을 침공하여 1000여 리의 땅을 빼앗을 때, 진개의 침공을 받고 멸망했다. 그 바로 뒤에 고조선 후국 동호(東胡)가 반격을 가하여 지금의 조양(朝陽) 지구 등(唐 시대의 營州지역)은 회복했으나, 고죽국의 본래 영지(唐 시대의 유주·계주·평주지역)는 회복하지 못했다. BC 206년경에는 산융이 동호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고죽국의 ‘영주지역’은 산융의 영지가 됐다. 연에 뒤이어 진(秦)의 시황(始皇)이 고죽국의 옛 영지 가운데 난하 하류 유역(당 시대의 평주 지역 일부)을 진나라 안으로 포함해 넣어 갈석산(碣石山) 부근에 이른바 ‘만리장성’을 수축했기 때문에, 산융의 기병부대도 고죽국의 ‘유주·계주·평주지역’을 회복하지 못했다. (문화일보 10월 8일자 17면 8 회 참조) 필자: 서울대 명예교수
■ 용어설명
고죽국(孤竹國) : 백이·숙제(伯夷·叔齊)로 잘 알려진 고죽국은 현재 중국에서 은(殷)나라의 제후국으로 기록돼 있지만, 많은 사료·유물은 고조선의 후국(侯國)임을 말하고 있다. 고죽국은 발해만 연안에 설치된 고조선의 후국으로서 고조선에서 파견된 고추가가 통치했다. BC 7세기 중엽 고조선과 고중국이 국경 전쟁을 할 때 중국 측 연합국에 대항하여 고조선 측은 고죽(孤竹)이 중심이 돼 연합군을 편성해 방어했다. 이는 고중국 측 문헌 ‘관자(管子)’에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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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桓檀古記)』와 고대 고죽국 위치에 대한 기록을 추가한다.
〇『환단고기』의 백이, 숙제 및 고죽국에 대한 기록
『환단고개』에는 “고조선의 21세 소태단군(BC 1337-BC 1285) 당시 은(殷)나라가 아니라, 조선의 후국(侯國)인 고죽국(孤竹國)의 왕자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왕위를 사양하고 달아나 동해 쪽 물가에 살면서 스스로 밭을 일구어 먹고 살았다”고 하여 고죽국이 고조선의 후국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시대 기록은 주 무왕 시대보다 다소 앞서고 있다(안경전역 환단고기 145p).
“고조선 22세 색불루(索弗婁)단군은 재위 20년(BC 1266년)에 이르러 후국(侯國)인 남국(藍國)이 자못 강성해져서 고죽국의 왕과 함께 모든 도적(중국 세력)을 쫓아 내셨다. 남쪽으로 수도를 옮겨 엄독홀에 머무르시니 그곳은 은(殷)나라의 국경과 가까운 곳이었다(안경전역 환단고기 145p).”
또 “36세 단군인 매륵(買勒)단군 52년(BC 653년) 임금께서 병력을 보내 수유국(須庾國) 군대와 더불어 연(燕)나라를 정벌하니 연나라가 제(齊)나라에 위급을 고했다. 제나라가 대거 고죽(孤竹)으로 처들어오다가 아군의 복병을 만나자 화친을 구걸하고 물러갔다(戊辰五十二年 (買勒)帝 遣兵 與須臾兵 伐燕 燕人 告急於齊 齊人 大擧入孤竹 遇我伏兵 戰不利 乞和而去)(안경전역 환단고기 161p).”
***참고: 환단고기에는 ‘소태단군’, 색불루단군‘ 및 매를단군’ 기에 고죽국이 고조선의 후국(侯國)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참고: 수유(須臾)는 기자(箕子)의 이름을 서여(胥餘) 또는 수유(須臾)라고 말했는데, 수유국은 기자의 후손이 세운 나라로 고조선의 후국(侯國)임을 보이고 있으며, 고죽국 역시 고조선의 후국(侯國)으로 환단고기는 기록하고 있는 것이며, 제나라 관자(管子)가 BC 664년 고죽을 죽였다는 것과 달리 이보다 10년 후인 BC 653년 고죽국에게 패한 후 화친하고 물러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〇고죽국의 위치
고죽국의 위치는? 당(唐) 시대의 ‘통전(通典)’ 북평군 평주조에서 “평주는 지금의 노룡현(盧龍縣)이다. 은(殷) 시대에는 고죽국이었다”고 기록했다. 또한 ‘통전’ 영주(營州)조에서는 “영주는 지금의 유성현(천진시 남쪽)이다. 은(殷:BC 1600∼1028년) 시대에는 고죽국지(孤竹國地)였다”고 기록했다. 이것은 상·은(商·殷) 시대에 고죽국이 매우 강성하여 지금의 천진 지역으로부터 대릉하 유역 조양(朝陽) 지구도 영유했음을 기록한 것이었다.
***참고: 영주(營州)는 지금의 천진시 남쪽인 유성현(柳城縣)이라고 했고, 또 이곳이 고죽국(孤竹國)의 옛 땅이며, 평주가 바로 이곳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참고: 낙랑군은 위만조선의 왕검성인 험독(險瀆)에 있었는데 이 험독은 요령성 반금시 반산현 지역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반산현은 지금의 반금시를 가르킨다.
험독현(險瀆縣)(중국고금지명대사전)은 “한나라가 설치했는데 후한은 그대로 했다. 응소가 조선왕 위만의 도읍이라고 했다. 물이 험해서 험독이라고 했다. 신찬은 왕험성이 낙랑군 패수 동쪽에 있다고 했다. 이것이 험독이다. 안사고는 신찬의 말이 맞다고 했다. 당시에 지금의 요녕성 반산현 경내의 해변가 땅이다.(漢置後漢因之. 應劭曰朝鮮王滿都也. 依水險故曰險瀆. 臣瓚曰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 此自是險瀆也. 師古曰瓚說是也. 當在今遼寧盤山縣境內濱海之地)“
***참고: 신찬이나 안사고가 말한 왕검성은 지금의 반산현(반산현)이 있는 반금시(盤錦市)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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