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B다시보기 | 한국의 성씨 - 11회 경주 정씨

[STB하이라이트]

지백호智伯虎는 진한 6촌의 하나인 자산 진지촌의 촌장입니다. 그는 신라의 박혁거세를 첫 번째 왕으로 추대한 인물이며, 우리나라 모든 정씨의 도시조가 됩니다. 이번 시간에는 이 정씨 중에서 대표적인 성씨인 경주 정씨와 동래 정씨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정씨의 유래와 본관


신라가 건국되기 전 진한 땅에 6촌이 있었는데 이 6촌의 촌장들이 함께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게 됩니다. 그리고 서기 32년, 유리 이사금 9년에 6촌이 6부로 개칭되면서 여섯 성씨가 탄생하게 되는데, 이때 자산 진지촌의 촌장 지백호는 정鄭씨 성을 사성賜姓받게 됩니다.

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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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큰 성씨인데, 중국에서 귀화한 ‘서산 정씨*’와 ‘낭야 정씨*’를 제외하면 모두 지백호智伯虎의 후손입니다. 정씨는 130여 개의 본관이 있으나 경주, 동래, 진주, 연일, 하동, 초계 정씨 등을 비롯해서 30여 본이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중 만 명 이상인 정씨는 14개 본입니다.
*정씨 : 215만여 명(2015년 기준)
*서산 정씨 : 송나라 멸망 후 고려로 건너와 서산에 정착
*낭야 정씨 : 명나라 때 산동성 낭야에서 조선으로 들어와 정착


※정씨 주요 본관
경주, 동래, 연일(영일⦁오천), 진주(진양), 하동, 초계, 광주, 나주, 봉화, 서산, 온양, 청주, 팔계, 해주

1. 경주 정씨


정씨는 우리나라에서 최씨에 이어 다섯 번째로 큰 성씨입니다. 이 정씨에서 가장 오래된 본관은 경주 정씨이며, 자산 진지촌의 촌장 지백호智伯虎를 시조로 모시고 있습니다. 경주 정씨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경주 정씨의 계통과 집성촌
2015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약 35만 명이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데 전체 정씨에서 16.3%를 차지합니다. 또한 경주 정씨는 크게 문헌공파文獻公派, 양경공파良景公派, 월성위파月城尉派, 평장공파平章公派 등 4개 파로 나눠지는데 다시 그 아래에 여러 파로 분파되어 있습니다.

※경주 정씨 16.3%, 동래 정씨 22%, 연일(영일, 오천) 정씨 18.3%, 진주(진양) 정씨 15.1%, 하동 정씨 8.7%, 초계 정씨 4.8%, 기타 14.8%

집성촌으로는 전라북도 진안군 상전면 월포리와 순창군 동계면 서호리, 경상북도 김천시 감문면 남곡리를 비롯해서 전국에 산재해 있습니다.

경주 정씨의 뿌리공원 조형물
“경주 정씨는 우리나라 정씨의 대종으로서 가장 오랜 유래를 지닌 씨족의 하나로 신라를 구성한 진한국 사로 6촌 중의 하나인 자산 진지촌 촌장인 지백호 공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 서기전 117년 경주 화산花山에 강림하여 부족 국가이던 사로의 여섯 고을 중 자산 진지촌을 다스렸으며 그 뒤 서기전 69년 3월 초하루 다른 다섯 촌장과 함께 ... 나정蘿井 곁에서 난생아卵生兒인 혁거세를 얻어 ... 서기전 57년 그를 왕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기 32년 봄에 그의 현손玄孫 대代 동충東沖에 와서 사로 육촌의 촌장들과 사성賜姓을 받을 때 본피부本彼部로 개칭되면서 낙랑후樂浪侯로 봉훈과 아울러 정씨鄭氏로 사성을 받았다.” - 대전 뿌리공원 경주 정씨 조형물 中


정씨의 시조, 지백호
우리나라 정씨의 도시조이면서 경주 정씨의 시조는 지백호입니다. 이 지백호는 어떤 인물인지 살펴보겠습니다.

①백운대
“백운대는 행정구역으로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에 위치하고 있고 백운대라는 것은 자연부락 단위의 이름을 의미합니다. 이곳에는 신라건국 공존사직 감문왕(지백호)께서 모셔져 있고, 옆에는 시림군 정년 장군과 중시조 정진후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백운대는 유네스코에 등재가 된 곳으로 국립공원 소속입니다. 신라 개국공신 여섯 명 중 오직 정씨만 묘가 남아 있습니다. 백운대에서의 묘제는 10월 초하룻날 정씨 후손들이 모여 거행하고 있습니다.” - 육부전 정가대표 부회장 정문탁


②시조 지백호
“경주 정씨의 시조 신라건국 공존사직 감문왕께서는 진한 6부의 촌장으로서 다섯 어른과 함께 모여 신라의 초대 임금인 박혁거세를 왕으로 만드신 분입니다. 경주 정씨의 본관은 중시조 정진후 이후부터 사용하였습니다. 지백호 할아버지의 후손은 전국에 약 200만 명 정도 됩니다.”
- 육부전 정가대표 부회장 정문탁


경주 정씨의 본관은 원래 계림, 월성 등으로 쓰이다가 지백호의 41세손인 문정공文正公 정진후鄭珍厚 대에 이르러 본관을 경주로 고쳐 부르게 되었고, 정진후를 중시조로 모시고 있습니다.

경주 정씨의 인물 ①정지운鄭之雲
조선 중기 인물로 성리학의 대가 ‘정지운’이 있습니다. 경기도 고양 출신인 그는 마음이 곧아 사람을 사귀는 데도 신중했으며, 벼슬에 천거되어도 사양하여 나가지 않았습니다. 오직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여 일찍이 독창적인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저술하는데 퇴계 이황의 감수를 받아 완성한 이 책은 천명과 인성의 관계를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해설을 붙인 것입니다. 천명도설은 간행되자마자 당대 선비들에게 최고의 필독서가 되었고 이후 이것은 조선 성리학의 전성기를 여는 계기가 됩니다.

경주 정씨의 인물 ②정발鄭撥
1592년 4월 14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왜의 제1군이 부산진성으로 밀려들었습니다. 임진왜란의 시작을 알리는 첫 전투가 벌어진 것입니다. 부산진성을 지킨 장수는 충장공忠壯公 정발鄭撥 첨사였습니다. 그는 1553년 경기도 연천군에서 출생하여 1577년 별시 무과에 급제하였는데, 임진왜란이 벌어지기 몇 달 전에 부산진 첨절제사로 부임하게 됩니다.

왜군 1만 8천여 명의 공격에 부산진성의 병력은 겨우 600명뿐이었고, 성안의 군민이 힘을 합쳐 분전했지만 중과부적이었습니다. 화살이 떨어지고 더는 버틸 수 없자 부하 장수들이 성을 빠져나가 구원병을 기다리자고 간청했습니다. 하지만 장군은 “나는 이 성의 귀신이 될 것이다. 또다시 성을 포기하자고 하는 자는 목을 베겠다.”고 하며 끝까지 항전할 것을 독려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공은 탄환에 맞아 절명하고 성은 함락되고 맙니다.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성은 함락되었지만, 성안의 군민이 전멸할 때까지 용맹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고 왜군은 적잖이 놀랐다고 합니다. 이런 사실은 휴전 중 강화교섭을 위해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황신이 왜장 평조신으로부터 정발의 무용을 극찬하는 회고담을 듣고 더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검은 군복을 입고 진두에 나서 군민을 지휘하는 장군의 용맹한 모습을 보고 왜병들은 그를 ‘흑의장군’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임진왜란의 첫 전투에서 순절한 정발 첨사는 후에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그의 충절을 기려 부산진성의 남문 자리에 세운 정공단鄭公壇과 동래구 안락동에 있는 충렬사에서 제향하고 있습니다.

2. 동래 정씨


우리나라 정씨에서 가장 큰집은 경주 정씨입니다. 하지만 정씨 중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본관은 동래 정씨입니다. 동래 정씨는 어떤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동래 정씨의 계통과 집성촌
지금의 부산 지역을 관향으로 하는 동래 정씨는 2015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47만여 명이 우리나라에 살고 있으며, 전체 정씨에서 22%를 차지해 정씨에서 가장 큰 성씨가 됩니다.

또한 계파를 보면 크게 교서랑공파校書郞公派, 첨사공파詹事公派, 호장공파戶長公派 등 세 개 파로 나눠지며, 다시 그 아래에 여러 파로 나뉘어 있습니다.

집성촌을 살펴보면 경상북도 고령군 덕곡면 반성리,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문양리와 박곡리를 비롯해 600년을 내려온 동래 정씨 집성촌인 서울 중랑구 망우동 양원리 등 전국에 산재해 있습니다.

동래 정씨의 시조, 정회문鄭繪文
동래 정씨는 도시조 지백호智白伯虎의 후예이나 워낙 연대가 오래되고 계대를 상세히 알 수 없어 동래에 세거하며 신라의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낸 정회문鄭繪文을 시조로 모시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회문 이후 또한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고려 초에 보윤호장甫尹戶長을 지낸 정지원鄭之遠을 1세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습니다.

동래 정씨는 오랫동안 동래에 세거하며 살아온 지방의 호족입니다. 그런데 2세 정문도鄭文道 이후에 정문도의 장남 정목鄭穆과 정목의 네 아들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에 진출하게 되면서 가세가 크게 일어나게 됩니다. 풍수지리에 의하면 화지산에 묻힌 정문도의 묘는 8대 명당 중 하나라고 합니다. 이 명당과 관련하여 전해 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동래 정씨의 명당 이야기
정문도의 아들 정목은 부친이 죽자 화지산에 장사 지낸다. 그런데 다음 날 동생과 같이 화지산에 가 보니 누군가 묘소를 파헤쳐 목관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형제는 다시 목관을 묻고 범인을 잡기 위해 몰래 숨어 감시를 하는데, 밤이 깊어 삼경에 이르자 난데없이 도깨비들이 나타나는 게 아닌가.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이따위 목관을 묻느냐? 적어도 금관金棺을 묻어야지!” 하며 도깨비들은 다시 묘를 파헤치고 사라졌다고 한다.

형제는 ‘금관을 어떻게 마련할까’ 하고 근심하고 있는데 한 백발노인이 나타나 “도깨비 눈에는 보릿짚이 금빛으로 보이니 보릿짚으로 목관을 싸면 다시는 묘를 파헤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는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날이 새자 형제는 보릿짚으로 목관을 싸서 묻고는 밤이 되기를 기다려 다시 묘소를 감시하는데, 이번에도 지난밤의 도깨비들이 나타나서 또 무덤을 파헤치더니 달빛에 비치는 보릿짚으로 싼 목관을 보고는 “금관이야. 이제 됐어. 어서 가자.”라고 하면서 행적을 감추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는 백발노인의 말대로 다시는 도깨비가 나타나 묘를 파헤치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동래 정씨는 조선조에 와서 더욱 번창하게 됩니다. 17명의 정승을 배출하면서 전주 이씨, 안동 김씨와 더불어 정승을 가장 많이 배출한 가문으로 이름을 떨칩니다. 동래 정씨 종문에는 어떤 인물들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동래 정씨의 인물 ①정서鄭敍
정서鄭敍는 고려 때의 인물입니다. 정서는 정문도의 증손자로 내시낭중이란 벼슬을 지냈으며 호는 과정瓜亭입니다. 정서의 아내가 고려 인종 왕비의 동생이기 때문에 인종과는 동서 사이가 됩니다. 정서는 인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다음 왕인 의종 때 그를 시기하는 자들로부터 모함을 받아 고향인 동래로 유배됩니다. 유배지에서 탄생한 유명한 노래가 바로 ‘정과정곡鄭瓜亭曲’입니다. 정과정곡은 한글로 전하는 고려가요 가운데 작가가 분명한 유일한 노래라고 하며, 고려는 물론 조선에까지 계속 궁중음악으로 불렸습니다.

동래에 유배를 온 그는 수영구 망미동 일대에서 오이 농사를 지으며 ‘과정’이란 정자를 짓고 약속한 왕의 부름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자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합니다. 정서와 그의 문학을 기려 연제구 연산동에는 ‘과정로’라는 길과 과정초등학교가 있으며 수영구 망미동에는 정과정곡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동래 정씨의 인물 ②정여립鄭汝立
조선조에서 동래 정씨가 승승장구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선조 때 일어난 기축옥사의 중심에 정여립鄭汝立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주에서 태어난 정여립은 무예나 활쏘기에 뛰어나고 학문에도 두루 능통했다고 합니다. 원래 정여립은 이이와 성혼의 각별한 후원과 촉망을 받는 서인의 인사였으나, 1584년 수찬이 된 뒤 동인 편으로 돌아섭니다. 이에 정철, 송익필을 비롯한 서인의 미움과 선조의 비판을 받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게 됩니다.

그는 진안 죽도에서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매달 활쏘기 대회를 열었는데, 그 세력은 전라도와 황해도를 중심으로 점점 커졌습니다. 대동계는 군사적 능력도 상당했다고 합니다. 1587년, 왜구가 전라도 손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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損竹島에 침입하자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에게 지원을 요청하는데, 이때 남언경은 관군만으로 왜구를 물리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대동계와 연합작전으로 왜구를 물리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 정여립과 대동계는 역모로 몰리게 됩니다. 3년 동안 무려 천여 명이 죽게 되는 ‘기축옥사己丑獄事’가 일어나는데, 이 사건은 조작됐다는 설이 있어 지금도 그에 대한 평가가 엇갈립니다.
*손죽도損竹島 : 지금의 여수시 삼산면 손죽리


정여립은 당시 왕조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천하는 공공의 물건(天下公物)”이며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랴(何事非君)” 하는 대단히 혁명적인 사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단재 신채호는 그를 동양 최초의 공화주의자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동래 정씨의 인물 ③정인보鄭寅普
일제강점기에 무너진 ‘민족의 얼’을 바로 세우기 위해 국학 진흥에 일생을 바친 인물이 위당 정인보鄭寅普입니다.

1893년 서울에서 출생한 정인보는 17세 때 평생 스승으로 모신 난곡蘭谷 이건방李建芳으로부터 양명학을 배워 학문과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1910년 망국 후 중국 상하이에 건너가 신채호, 박은식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고, 귀국 후 국내에서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펴다 여러 차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연희전문⋅이화여전 등에서 한국사와 국문학을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 얼을 환기시키는 한편 <동아일보> <시대일보>의 논설위원으로서 총독부의 정책을 비판하고 민족사관 정립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1935년부터는 ‘오천년간 조선의 얼’을 <동아일보>에 연재했으며, 1945년 마침내 광복이 되자 일제하의 식민정책을 깨끗이 씻어 버리고 국학을 부흥시키기 위해 국학대학을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 민족사를 모르는 국민에게 바른 국사를 알리기 위해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를 간행했습니다. 또한 그는 광복절 노래를 비롯해 4대 국경일 노래를 모두 작사한 인물이기도 하며, 1950년 6.25 전쟁 발발 후 납북되어 그해 함경도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집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정씨 중에서 뿌리가 되는 경주 정씨와 큰 본관인 동래 정씨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한국 성씨의 뿌리를 찾아 떠나는 시간, <한국의 성씨> 많은 시청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