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B다시보기 | 한국의 성씨 - 7회 경주 김씨

[STB하이라이트]

어느 날 한밤중, 경주 계림의 숲속에서 닭 울음 소리와 함께 황금 상자에서 사내아이가 나타납니다. 이 아이는 자라서 모든 신라계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됩니다. 이번 시간에는 신라계 김씨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성씨인 경주 김씨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성씨는 김金씨이며, 약 1,069만 명으로 국내 인구의 21.5%를 차지합니다. 5명 중 1명이 김씨일 정도로 상당히 많은 수입니다. 김씨는 크게 김알지의 신라계와 김수로왕의 가야계로 나누어집니다. 김알지로부터 시작되는 신라계 김씨는 경순왕 계열과 비경순왕 계열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신라계 김씨의 약 70% 이상이 경순왕 계열입니다.

경주 김씨의 계통과 분파


경순왕 계열에는 경주 김씨, 김녕 김씨, 안동 김씨, 의성 김씨 등이 있고, 비경순왕 계열에는 광산 김씨, 강릉 김씨, 선산 김씨가 대표적입니다. 그리고 신라계 김씨에서 분적한 성씨로는 감천 문씨, 강릉 왕씨, 곡산 연씨, 광주 이씨, 수성 최씨, 안동 권씨, 영양 남씨, 철원 궁씨, 태안 사씨 등 9개 성씨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경주 김씨는 어떤 성씨인지 살펴보겠습니다.

경주 김씨는 경상북도 경주를 본관으로 하고 있는 성씨로 대개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셋째 아들 김명종金鳴鍾과 넷째 아들 김은열金殷說의 후손으로 이루어진 성씨입니다. 또한, 경주慶州의 옛 지명이 월성月城이기 때문에 경주 김씨는 월성 김씨이기도 합니다. 2015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약 189만 명이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데, 신라계 김씨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큰 성씨입니다.

경주 김씨의 계파는 5개 파가 주종을 이루고 있는데, 또한 각각의 계파가 갈라져서 실제로는 상당수의 계파가 존재합니다. 5개 파를 살펴보면, 경순왕의 셋째 아들 김명종金鳴鍾의 후손을 영분공파永芬公派, 넷째 아들 김은열金殷說의 후손을 대안군파大安君派라 하고 경순왕 후예인 김순웅金順雄의 후손을 대장군파大將軍派, 김인관金仁琯의 후손을 태사공파太師公派, 김장유金將有의 후손을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라 합니다.

경주 김씨 시조始祖는 신라 대보大輔의 벼슬을 지내신 알지閼智 공公이시다. 공公은 서기 65년 봄 3월 밤에 지금의 경주시 교동 소재의 계림에서 탄강하셨다. 그 후 태자로 책봉하여 왕위에 오르시게 하였으나 극구 사양하시고, 재상宰相인 대보大輔의 벼슬을 제수除授받아 대보공大輔公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공의 7세손인 김미추金味鄒가 경주 김씨로는 첫 왕위에 오르시니 이분이 곧 신라 제13대 미추왕이시다. 신라 992년간 56왕 중 경주 김씨 38왕이 왕위에 올라 신라 천 년의 치세治世를 누렸다. 경주 김씨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을 중시조로 하여 본관을 경주로 득관得貫하였으며, 선조의 숭고한 애족애민 사상과 찬란한 신라 문화 창달의 예지睿智를 이어받아 국내 유수의 명문거족으로 크게 번성해 왔다.
- 대전 뿌리공원 성씨 조형물 글 中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


경주 김씨의 시조는 신라 대보공 김알지입니다. 김알지는 어떤 인물인지 살펴보겠습니다.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는 신라 왕궁터 월성이 있습니다. 지형이 초승달처럼 생겼다 하여 월성 또는 반월성으로도 부릅니다. 이 월성의 서쪽에 느티나무 우거진 작은 숲이 있는데, 김알지의 탄생 신화를 간직한 계림입니다.

“계림鷄林의 원래 이름은 시림始林입니다. 금궤 밑에서 흰 닭이 울고 있었다고 하여 닭 계鷄 자를 쓰게 되었습니다. 계림이라는 지명을 신라의 국호로 삼게 되었죠. 탈해왕이 그 금궤를 열어 보니 아이가 있어 궁중에 데려가 키웠습니다. 이 아이가 알에서 나왔다고 해서 알지라고 하였다는 것이 삼국유사의 기록입니다. 또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금씨 성을 내렸다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김알지의 7세손인 미추왕 때 신라 김씨 중 첫 번째 왕이 됐죠. 그 위에 선대가 없다 보니 김알지를 도시조로 모시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많이 알고 있다시피 김알지는 신라 김씨, 즉 경주 김씨의 시조입니다. 약 600여 관으로 분파되었고 그 전체의 시조가 김알지입니다.” - 김진우 한국성씨연구소장



가야의 김수로와 마찬가지로 신라의 ‘김알지’에게도 탄생 신화가 있습니다. 신라 김씨의 뿌리가 되는 김알지의 탄생 신화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탈해왕이 금성金城 서쪽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새벽에 신하를 보내 알아보게 하니 숲속에서 찬란한 빛이 밝게 빛나고 자줏紫朱빛 구름이 하늘에서 땅까지 드리워지고 구름 속으로 보이는 나뭇가지에는 황금 상자가 걸려 있는데 그 상자 속에서 빛이 나오고 나무 밑에서는 흰 닭이 울고 있었다. 왕이 숲으로 가 그 상자를 열어 보니 사내아이가 누워 있다가 곧장 일어났는데 그 아이의 자태와 용모가 범상치 아니하므로 왕이 “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내린 아들이 아니겠는가.”라고 기뻐하며 어가御駕에 태워 대궐로 돌아오는데 새와 짐승들이 서로 기뻐 춤을 추며 뒤를 따랐다.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니 그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성은 금궤에서 나왔다고 하여 김金이라 하였다.


그 후 김알지는 태자로 책봉되지만 극구 사양하여 왕위에는 오르지 않습니다. 대신 재상宰相인 대보大輔의 벼슬을 제수除授받게 되어 대보공大輔公이라고 부릅니다.

경주 김씨의 중시조, 경순왕


신라계 김씨의 70% 이상이 경순왕 계열이며, 모두 경순왕 이후에 분관되었기 때문에 경순왕의 위치가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경주 김씨에서는 경순왕을 중시조로 모시고 있습니다. 경주 김씨의 중시조이자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은 어떤 인물인지 살펴보겠습니다.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에 경순왕릉이 있습니다. 남방 한계선 가까이 낮은 야산에 있으며, 바로 앞에는 임진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경순왕과 마의태자의 대화 내용에 경순왕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 잘 나와 있습니다. 마의태자가 ‘나라의 운명은 천명에 있는 것인데 어찌 그 기운이 다하지도 않았는데 나라를 들어서 함부로 남에게 넘겨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경순왕에게 간언합니다. 그러자 경순왕은 ‘백성들의 뇌와 간을 땅에 바를 수 없다, 무모한 항쟁으로 인해 무고한 백성들이 비참해지는 일은 차마 못 하겠다’ 하시면서 고려에 나라를 평화적으로 넘겨준 경순왕의 마지막 선택을 우리는 올바르게 평가해야 될 것입니다. 경순왕이 이곳에 묻히게 된 이유는 나라가 어려워지고 지탱하기 힘들게 되자 화백회의를 통해 나라를 고려에 양도하게 됩니다. 속전에 의하면 경순왕이 훙거薨去했다는 비통한 소식을 전해 들은 신라의 유민들은 장사진을 이루어 경순왕을 경주로 모셔 가려는 노력을 했습니다. 경순왕의 장례 행렬을 따라나서자 마치 송도가 텅 빌 정도였다고 합니다. 가는 곳마다 경순왕을 흠모하는 백성들이 구름 떼처럼 모여들자 고려의 집권자들이 긴급히 군신 회의를 열고 ‘왕구부거백리외王柩不車百里外’, 즉 왕의 시신은 100리 밖을 못 나간다고 하는 구실을 앞세워 왕의 대우를 보장받는 대신 운구가 임진강을 넘지 못하도록 해서 이곳에 묻히게 된 것입니다.” - 제정호 경순왕릉 문화해설사


서기 935년 신라가 망하고 고려에 투항한 신라의 경순왕은 고려 태조 왕건의 사위가 됩니다. 경순왕은 고려 수도 개경에서 왕건보다 35년을 더 살다가 눈을 감는데, 선조들이 묻힌 망국의 수도 경주로 향하던 그의 관은 임진강의 고랑포高浪浦를 건너지 못하게 됩니다. 신라 유민遺民들의 봉기를 우려한 고려 왕실이 ‘왕의 무덤은 수도에서 100리 밖에 두지 못한다’고 운구를 멈추게 한 것입니다. 경순왕은 결국 고랑포를 코앞에 두고 북쪽 언덕에 묻히게 됩니다.

오랜 세월 잊혔던 왕릉은 1746년 조선에 이르러 경주 김씨 후손들이 ‘김부대왕金傅大王’이 적힌 묘지석과 ‘경순왕敬順王’이 적힌 비석을 발견하게 되고, 이듬해 왕명을 받들어 이곳을 재정비하게 됩니다.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와중에 또다시 왕릉이 사라지게 되지만 다행히도 지난 1973년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됩니다. 당시 민통선 수색 중대장이던 여길도 대위가 총탄 자국이 선명한 ‘신라 경순왕지릉’이라고 적힌 비석을 풀 더미 속에서 찾아냅니다.

경순왕은 고려에 투항한 이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은 고려에서 경주 김씨의 위치가 결정되는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경순왕이 나라를 고려에 넘겨주자 태조 왕건은 경순왕 김부金傅를 정승政丞에 봉하고 극진한 대우를 합니다. 이는 물론 신라 세력을 회유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정략결혼을 통하여 한층 더 신라 세력을 포용하게 되는데, 왕건은 큰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김부와 혼인시키고, 김부는 백부 김억렴金億廉의 딸을 왕건의 후비(신성왕후神成王后)로 들여보냅니다. 경순왕 김부가 왕건의 사위가 된 것입니다.

또한 고려 5대 왕 경종은 김부의 사위가 되는데, 경종의 비 헌숙왕후獻肅王后는 김부의 딸입니다. 경종은 즉위하자 더욱 예를 갖춰 김부를 ‘상부尙父’라고 부르고 식읍을 1만 호로 늘립니다. 그리고 김부의 사촌인 신성왕후는 고려 8대 왕인 현종의 할머니입니다. 이후 고려 왕실이 현종의 후손에서 이어졌으므로 고려 왕실은 신라 왕실의 외손이 됩니다. 이처럼 신라 왕족은 고려 왕족과 혈연적으로 연결되어 고려의 지배 세력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경주 김씨는 고려조에서도 큰 세력을 형성하게 됩니다. 조선조에도 상당한 명문가로 이어져 내려왔으며, 현대까지도 최대 규모 성씨의 하나로 존재합니다.


신라의 마지막 왕자, 마의태자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할 때 마의태자는 이에 반대를 했습니다. 경순왕이 백관을 이끌고 고려의 수도 개경으로 향할 때 마의태자는 어디로 갔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신라 마지막 왕 김부金傅(경순왕)의 첫째 아들인 마의태자麻衣太子는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기로 결정할 때 적극적으로 반대했습니다. 그는 신라 천 년 사직을 경솔하게 넘겨줄 수 없다고 반대하다가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개골산皆骨山으로 들어가 마의를 입고 풀을 먹고 살다가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마의태자와 관련해서 또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강원도 인제로 가서 신라의 남은 충신들과 지사들을 규합해 고려에 저항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뒷받침해 주듯 강원도 인제에는 마의태자와 관련된 지명과 유적, 유물들이 적잖게 남아 있습니다. 마의태자를 의미하는 김부리金富里와 김부대왕각, 마의태자의 광복 운동을 암시하는 다물리多勿里, 갑옷을 입고 진을 친다는 갑둔리甲屯里 등 마의태자가 이곳에 와 머무르면서 신라를 재건하고자 군사를 모집해 길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인제에는 갑둔리와 김부리 두 곳에 마의태자와 관련 있는 유적이 있는데요. 김부리에는 대왕각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대왕각은 마의태자의 제사를 지내던 곳입니다. 대왕각의 현재 건물은 약 20년 전에 다시 중수된 것이고 원래 모습은 인제 산촌민속박물관에 있습니다. 약 60년 전부터 마을에서 제사를 지내던 곳이며, 김부대왕을 모셨던 사당이었습니다. 김부는 경순왕의 이름으로 김부대왕의 후손인 어느 누군가가 이곳에 살았으며, 또 구국 항변 운동을 했던 것으로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면 갑둔리로 불리는 마을은 갑둔리 3층 석탑과 5층 석탑이 있는 곳으로 갑둔甲屯이라는 의미가 갑옷을 둔 곳, 즉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는 곳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천 년 전에도 군인이 주둔했던 것처럼 현재도 이곳에 군사시설이 들어서 있는 것으로 보아 전설이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 한승윤 인제향토문화연구소


마의태자와 관련한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진이 세운 금나라의 시조가 마의태자 후손이란 이야기입니다. 금金나라의 정사正史인 『금사金史』 「세기世紀」를 보면 “금나라 시조의 이름은 함보函普인데, 처음에 고려에서 왔다(金之始祖諱函普, 初從高麗來).”고 하고, 『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옛날 평주(함경도 영흥)의 승려 금준今俊이 도망하여 여진으로 들어가 아지고촌에 살았는데 이 사람이 금나라의 선조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또한 청나라 때 만주족인 여진족이 자신들의 원류를 정리하기 위해 편찬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는 “신라 왕의 성 김씨가 수십 세 전해졌고 금金이 신라로부터 왔으니, 의심할 바 없이 그가 세운 나라의 이름도 마땅히 김씨 성을 취한 것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같은 기록으로 보면 금나라 시조 함보 또는 금준은 고려에서 넘어간 신라 김씨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강원도 인제에서 신라 부흥 운동을 펼치고 있던 마의태자 후손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경주 김씨의 인물들


①두문동 72현, 상촌 김자수
고려 말 인물로 두문동 72현 중의 한 사람인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가 있습니다. 그는 공민왕 때 문과에 장원급제를 하고 우왕 초에 정언正言(정6품)이 됩니다. 이때 왜구 토벌의 공으로 포상받은 경상도도순문사 조민수曺敏修는 왕에게 감사의 편지를 올리게 됩니다. 이에 우왕은 김자수에게 회답하는 교서를 지으라는 명을 내리지만 전날 김해, 대구에서 있었던 왜구와의 전투에서 조민수가 비겁하게 도망하여 많은 사졸을 죽게 한 사실을 들어 명을 받들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왕명을 거절한 죄로 전라도 돌산突山에 유배됩니다.

그 후 공양왕 때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충신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며 고향인 안동에 은둔하여 세상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태조 이성계가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고, 태종 이방원이 다시 부르자 지금의 태재고개인 경기도 광주廣州 추령秋嶺에 이르러 절명구를 남기고 자결하게 됩니다. 김자수는 죽기 전 자손들에게 자신을 추령에 묻고 묘비도 세우지 말라고 당부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무덤은 경기도 광주 추령에 있으며 당시 묻었던 묘비는 지금도 세우지 못하고 누워 있습니다.

절명사絶命詞

平生忠孝意(평생충효의) 今日有誰知(금일유수지) 一死吾有恨(일사오유한) 九原應有知(구원용유지)
평생토록 지킨 충효
오늘날 그 누가 알아주겠는가
한 번의 죽음 무엇을 한하랴마는
하늘은 마땅히 알아줌이 있으리라


②조선 시대 인물, 추사 김정희
추사체와 세한도로 잘 알려진 김정희金正喜는 시, 서, 화는 물론 금석고증학, 경학, 불교 등 다방면에 뛰어난 업적을 남긴 19세기 조선을 대표하는 석학이며 청나라에도 이름을 날린 글로벌 지식인입니다.


그는 조선 정조 때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는데, 영조가 지극히 사랑한 화순옹주和順翁主와 김한신金漢藎의 증손자입니다. 김정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백이 뛰어나서 일찍이 북학파北學派의 일인자인 박제가朴齊家의 눈에 띄어 어린 나이에 그의 제자가 됩니다. 24세 때 생부 김노경이 동지부사로 연경에 갈 때 함께 동행하는데, 그때의 경험이 그의 학문적 맥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다방면에 천재적 재능을 가진 추사는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형조참판에 이르렀으나 19세기 세도정치하에서 순탄치 않은 삶을 살게 됩니다. 55세에 제주도로 유배를 가서 9년을 살게 되는데, 여기에서 김정희는 서투른 듯하면서도 맑고 고아한 그만의 독창적인 추사체를 완성합니다. 그리고 국보 제180호인 「세한도歲寒圖」도 이때 그려집니다. 또한 그는 금석학의 대가이기도 한데, 북한산순수비北漢山巡狩碑와 문무왕비를 찾아내기도 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경상북도 경주를 관향으로 삼고 대보공 김알지를 시조로 모시고 있는 신라 김씨의 대표 성씨인 경주 김씨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한국 성씨의 뿌리를 찾아 떠나는 시간, <한국의 성씨> 많은 시청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