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B다시보기 | 한국의 성씨 - 5회 순흥 안씨

[STB하이라이트]
제국의 심장을 쏜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의사, 그의 총성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강력한 경고이자 조선을 깨우는 뜨거운 울림이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안중근 의사의 성씨이기도 한 순흥 안씨順興 安氏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17번째로 많은 성씨가 안씨입니다. 2015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약 68만 5천여 명이 우리나라에 살고 있고, 이 중 절반 가까이는 서울특별시와 경기도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안씨는 크게 순흥안씨, 죽산안씨, 광주안씨, 탐진안씨로 나뉘어 있고 그 이외에는 소수의 성씨가 다수 있습니다. 순흥 안씨는 어떤 성씨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순흥 안씨의 계통과 분파


순흥 안씨는 고려 신종 때 상호군으로 추봉된 안자미安子美를 시조로 하는 성씨로 지금의 경북 영주 순흥을 관향으로 합니다. 2015년 실시한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안씨의 75.9%가 순흥 안씨이며, 약 52만 명이 한국에 살고 있습니다.

또한 순흥 안씨의 계파系派를 살펴보면 시조인 안자미의 아들 3형제 중 첫째 안영유安永儒는 1파인 추밀공파樞密公派, 둘째 안영린安永麟은 2파인 별장공파別將公派, 셋째 안영화安永和는 3파인 교서공파校書公派, 이렇게 크게 세 개의 파로 나뉩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안영유의 후손으로 참찬공파參贊公派에서 판관공파判官公派까지 14개파, 안영린의 후손으로 안원공파安原公派에서 소의공파昭懿公派까지 4개파, 안영화의 후손으로 문정공파文貞公派에서 검교공파檢校公派까지 4개파 등 총 22개의 파로 나뉩니다.


순흥 안씨順興 安氏는 지금의 경북 영주 순흥을 관향으로 하는 성씨로 시조 공 안자미安子美 선조는 고려 신종神宗 때인 1200년경 순흥에 거주하였으며 상호군으로 추봉되었다. 아들 삼형제를 두었으니 장남은 부사공 안영유安永儒 차남은 별장공 안영린安永麟 삼남은 교서랑공 안영화安永和이다. 이 세 분의 후손이 22개파로 분파되었고 그 후에 많은 학자와 시호諡號를 받은 분이 33현賢 봉군封君 21현賢 문과급제文科及第 188명을 배출하였다. - 뿌리공원 『순흥 안씨 조형물』 中


순흥 안씨를 대표하는 문화유적


지난 1991년 문화체육부에서 영남 유일의 최초 ‘문화마을’로 선정된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는 추원단 이외에 사현정과 봉서루가 있습니다. 추원단追遠壇은 매년 음력 10월 1일이면 후손들이 모여 시조와 11분의 선조에게 제향을 지내는 곳입니다. 사현정四賢井은 이 마을에 대대로 살았던 밀직공密直公 안석安碩과 그의 세 아들이 이 우물의 물을 마시며 공부하여 4부자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고 하여 풍기군수 주세붕이 사현정四賢井이라는 비를 세우고 네 사람의 덕을 기리면서 유래합니다.

또한 봉황이 깃들어 산다는 뜻의 봉서루鳳棲樓는 영주의 대표적인 누각으로 순흥을 상징하는 누각입니다. 봉서루는 여말 선초 흥주興州(순흥)의 남정南亭으로 한양을 오르내리던 사람들의 배웅 장소로 널리 이용되었다고 합니다.


순흥 안씨의 역사적 인물_①안향


순흥 안씨는 시조 안자미의 증손인 안향安珦 이후 크게 일어나게 됩니다. 안향으로부터 11대에 걸쳐 과거에 급제하고 20명이 봉군封君되었으며, 17명에 달하는 대제학을 배출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조선조에서는 김金, 이李, 박朴씨 등과 함께 6대 성씨의 하나로 인정될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가문이 번성하게 된 데는 안향의 역할이 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안향은 어떤 인물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안향은 고려 충렬왕을 전후하여 활동한 대학자로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들여온 인물입니다. 그는 경상도 순흥부 평리촌에서 출생하였고, 호는 회헌晦軒, 시호는 문성입니다. 안향이 호를 회헌晦軒이라고 한 것은 성리학을 창시한 주희의 호 회암晦庵을 따라 그렇게 지었다고 합니다. 안향은 어릴 때부터 행동이 장중하여 함부로 말하거나 웃지 않았으며, 학문을 좋아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과거에 합격하기 전까지는 순흥부 북쪽에 있는 숙수사를 왕래하면서 학문을 연마하였고, 그가 태어난 곳의 근처에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그가 이곳에서 항상 벼루를 씻었다 하여 사람들은 이곳을 세연지라 부릅니다.

안향은 과거에 급제한 문신이지만 무인이었던 증조부 안자미를 닮아 소신 있고 강직한 인물이었다고 전합니다. 『고려사』 열전에 안향의 면모를 알 수 있는 내용이 나옵니다.

충렬왕 원년(1275년)에 상주판관으로 나갔는데, 당시 여자 무당 세 명이 요망한 귀신을 모셔 놓고 많은 사람들을 미혹시키고 있었다. 합주(경상남도 합천)로부터 군郡과 현縣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가는 곳마다 허공에서 나오는 듯한 사람 소리를 만들어 내는데 어찌나 큰지 마치 갈도喝道 소리
*
같았다.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달려가 뒤질세라 제사를 지냈는데, 수령까지도 합세했다. 그들이 상주에 오자 안향이 곤장으로 때리고 칼을 씌우니 무당이 귀신의 계시라며 재앙을 내릴 것이라고 겁을 주었다. 상주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했으나 안향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며칠 뒤에 무당이 용서를 빌기에 그제야 석방하니 그 요망한 사술이 사라지고 말았다. - 『고려사』열전 中

*
갈도 소리 : 높은 벼슬아치가 다닐 때, 행인들이 길을 비키도록 길을 인도하는 사람이 지르던 소리


안향은 성리학을 우리나라에 들여오는 데만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학교 재건과 인재 양성을 통해 고려의 위기를 극복하려 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이색, 정몽주, 정도전, 권근 등으로 이어져 조선 성리학과 조선 건국의 중요한 토대가 됩니다. 조선 성리학의 태두泰斗가 된 안향은 사후 주세붕에 의해 건립된 풍기 소수서원紹修書院과 장단 임강서원臨江書院, 곡성 회헌영당晦軒影堂에 제향되어 많은 이들이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습니다.

순흥 안씨의 역사적 인물_②안상


안상安瑺은 명종 때의 인물로 문관 출신이지만 또한 음악의 대가이기도 합니다. 친가와 외가에 음률을 아는 인물들이 많았으며, 친인척인 성현이 편찬한 『악학궤범樂學軌範』의 영향을 받아 1561(명종 16)년 장악원의 첨정僉正으로 음악 정을 맡았을 당시 『금합자보琴合字譜』를 편찬하게 됩니다.

지방에서도 대단히 모범적으로 수령직을 수행하였다고 하는 안상은, 풍속을 바꾸는 데는 악樂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는 『효경』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악보인 『금합자보琴合字譜』를 간행하는데, 서문에는 “외진 먼 시골에서 거문고에 뜻이 있어도 스승을 얻지 못하는 이가 이 악보를 얻어 보면 마치 스승이 곁에서 지시하여 주는 것 같고 하나도 어려운 것이 없다.”고 언급할 정도로 거문고의 기초를 담고 있으며, 조율법이나 손가락 쓰는 방법 등을 그림으로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합자보合字譜로 기록된 최초의 악보인 『금합자보琴合字譜』는 현재 보물 28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순흥 안씨의 역사적 인물_③안중근


만주 하얼빈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을 저격한 안중근安重根 의사는 우리나라가 식민지로 완전 전락한 그해 3월 26일 불꽃같은 짧은 생애를 마치고 향년 32세로 순국합니다.

진사를 지낸 아버지 안태훈과 어머니 조마리아 사이에 3남 1녀의 장남으로 태어난 안 의사는 수천 석지기의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으며, 어려서부터 한학漢學을 공부했고 성장하면서는 말타기와 활쏘기 등 무술에 더 열중하게 됩니다. 안 의사는 이때 이미 명사수로 이름을 날렸는데, 그는 화승총을 쏘아 20보나 떨어져 있는 동전을 맞힐 정도였다고 합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안 의사는 삼흥학교三興學校와 돈의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썼으나, 국운이 기울어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없다고 판단하여 1907년 연해주에 가서 의병 운동에 참가하게 됩니다.
의사는 연해주 일대의 한인촌을 유세하며 의병을 모집하여 1908년 봄 의병 부대를 조직합니다. 의사는 이 의병 부대를 이끌고 국내 진공 작전을 펼쳤지만 실패하고 맙니다. 고심하던 안 의사는 1909년 동지 11명과 단지동맹을 맺고 죽음으로써 구국 투쟁을 벌일 것을 맹세합니다. 그리고 그해 10월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이 만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하얼빈에서 의거를 하게 됩니다.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여한이 없겠노라.” (순국 직전에 남긴 마지막 유언)


증산도 안운산 태상종도사님


순흥 안씨의 현대 인물로는 증산도의 2변과 3변을 개창한 안운산安雲山 태상종도사太上宗道師님이 있습니다. 안운산 태상종도사님은 1922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유소 시절부터 보천교普天敎를 신앙하던 부친의 영향으로 증산 상제님의 진리를 접하게 됩니다. 1945년 8.15 해방을 맞아 태상종도사님은 혈혈단신으로 세상에 증산 상제님의 진리를 선포하고, 이때 전국을 누비며 초인적인 열정으로 수십만을 포교하여 증산도 제2변의 부흥을 엽니다. 하지만 1950년 6.25 전쟁이 터지면서 전쟁의 참화로 교단 운영이 어려운 상황이라 대휴계기大休契期를 선포하고, 장차 제3변 부흥의 중심이 되는 대전大田에 자리를 잡으시고, 1974년 안경전 현現 증산도 종도사님과 함께 증산도 제3변의 서막을 엽니다. 이후 안운산 태상종도사님은 『도전』 편찬, 태을궁 건축, 상생방송 개국 등 일꾼 양육과 증산도 세계화의 기틀을 놓으시고 2012년 등천登天하셨습니다. 

순흥 안씨 수난사


순흥 안씨는 조선조에 들어와서 6대 성씨의 하나로 인정될 정도로 번성한 가문이었지만 한편 큰 아픔의 역사도 가지고 있습니다. 순흥 안씨가 큰 피해를 입고 뿔뿔이 흩어지게 된 세 차례의 큰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정축지변과 신사무옥, 을사사화입니다. 그 시작은 조선의 제3대 왕 태종이 세종의 외척인 영의정 심온을 제거하면서 발단이 됩니다. 심온의 딸이며 세종의 정비인 소헌왕후는 순흥 안씨 소의공파 파조인 안천보의 외손녀이기 때문에 순흥 안씨 가문도 영향을 받게 됩니다.

- 정축지변
계유정난과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이 연이어서 일어나 수양대군은 자신의 전횡을 비판해 온 동생 금성대군을 경상도 순흥 땅으로 유배시키게 됩니다. 순흥은 금성대군의 어머니이며 세종의 정비인 소헌왕후의 외가 땅입니다. 1457년 단종이 순흥에서 가까운 영월 청령포로 유배를 오자 금성대군은 부사 이보흠李甫欽을 비롯해서 순흥 안씨인 품관 안순손安順孫·안처강安處强·안효우安孝友 등 많은 지지 세력과 함께 순흥의 단종 복위 운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나 뜻밖의 밀고로 사전에 발각되어 순흥은 역향逆鄕이 되어 쑥대밭이 됩니다. 이때 순흥에 살던 안씨들은 무참히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살육당하고 남은 자손들은 뿔뿔이 흩어집니다. 또한 순흥도호부 관아는 불타 버리고 220여 년간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되는데, 이 정축년의 변란은 순흥 안씨에게 가장 큰 상처를 준 최대 피해 사건입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단종 복위 운동을 이름하여 정축지변이라고 합니다. 금성대군이 순흥으로 유배를 왔었는데 금성대군과 영주 이씨 이보흠이 영월 청령포에 유배되어 있던 단종과 교감을 가지면서 복위 운동을 하다가 어느 시녀에게 발각이 됩니다. 이 시녀는 같은 관노였던 사람에게 몰래 경문을 빼돌리게 되고, 그 관노는 경문을 풍기 현감에게 바치게 되며, 풍기 현감은 세조에게 바치게 됩니다. 급기야 세조가 철기군을 끌고 와서 순흥부사였던 한명회의 육촌동생인 한명진과 함께 순흥 주민을 학살하게 됩니다. 그때 학살된 장소가 제월교인데 제월교 근교 10리 안에 있는 모든 순흥 주민들이 학살을 당하게 됩니다. 그때 그 피가 한 달여 이상 걸쳐서 약 10km 거리에 있는 마을까지 흐르게 되었고 이 마을이 피끝마을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 김진우 (사)뿌리문화 대표


- 신사무옥
그리고 20여 년 후, 1519년 중종 14년 기묘사화로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 세력들이 훈구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이 득세하자 안당安瑭의 아들 안처겸處謙은 이정숙李正淑, 권전權磌 등과 함께 이들이 사림士林을 해치고 왕의 총명을 흐리게 한다 하여 제거하기로 모의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누설되어 안처겸의 모친 장례식 때의 조객록吊客錄을 핑계 삼아 모반하는 인사들이라고 고변함으로써, 이 사건으로 순흥 안씨들이 또 한 번 큰 피해를 입고 많은 사람들이 처형됩니다.

- 을사사화
그리고 또 20여 년이 지난 후 1545년 명종 즉위년에 을사사화가 일어났을 때, 사관인 안명세安名世는 을사사화의 자세한 전말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시정기時政記
*
에 적었는데, ‘역적들의 편을 들어 사초史草를 바로 쓰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죽임을 당하게 되고,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또 많은 순흥 안씨들이 낙향하여 몸을 숨기게 됩니다.
*
시정기時政記 : 당대 정무 행정의 실상과 잘잘못을 기록한 1차적 역사 기록물로서 실록을 편찬하는 기본 자료


안씨의 기원


순흥, 죽산, 광주 안씨가 한 뿌리에서 나왔고, 또한 고성 이씨와 순흥 안씨는 동근同根 이성異姓의 한 집안이라고 합니다.

죽산 안씨의 대동보에 의하면 신라 애장왕哀莊王 8년, 중국 농서인隴西人인 이원李瑗은 동생 이황李璜과 같이 우리나라의 개성에 있는 송악산松嶽山 아래에 정착했다고 합니다. 이때 광주인廣州人이 그 성주城主를 죽이는 반란反亂을 일으키자 이원과 이황 형제가 이를 평정하게 됩니다. 이에 애장왕이 두 형제의 혁혁한 전공을 높이 치하하며 나라를 평안히 하였다 하여 안국지신安國之臣이라 말하고, 형인 이원에게 안씨安氏 성을 내리고 동생 이황에게는 본성本姓을 지키라고 하며 고성군固城君에 봉封했다고 합니다. 또한 이원瑗에게 지춘枝春, 엽춘葉春, 화춘花春이라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신라 경문왕景文王 4년 서기864 갑신년甲申年에 왜란이 일어나자 삼 형제가 출정하여 이를 평난平亂하게 됩니다. 이에 경문왕이 나라를 평안히 하였다고 기뻐하며 삼 형제를 가리켜 안국지신安國之臣이라 칭찬하고 이름을 바꾸어 주며 아울러 봉군하였는데,

첫째 지춘枝春을 방준邦俊으로 죽산군竹山君에 봉封하고,

둘째 엽춘葉春을 방걸邦傑로 광주군廣州君에 봉封하고,

셋째 화춘花春을 방협邦俠으로 죽성군竹城君에 봉封하니

이로부터 우리나라에 안씨安氏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의하면 순흥 안씨의 선조는 고성 이씨와 같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노자와 배달국 태호복희씨의 풍이족에서 기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시조의 유전자가 혈통을 통해서 자손에게 그대로 전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국 성씨의 뿌리를 찾아 떠나는 시간, <한국의 성씨> 많은 시청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