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손도의 손자 공손연은 사마의에게 패망하여 8,000여명이 몰살되었다

2021.08.31 | 조회 44

공손도의 손자 공손연은 사마의에게 패망하여 9,000여명이 몰살되었다.

 

공손씨는 공손연의 할아버지 공손도 때부터 대대로 요동 일대를 점거하고 있었다. 공손연의 아버지 공손강은 조조가 원소의 잔존세력을 소탕할 때 원희와 원상을 참수해 화평을 청했다.

 

221년에 아버지 공손강이 사망하자 나이가 어린 까닭으로 숙부 공손공이 뒤를 이었지만 228년에 공손공을 내쫓고 스스로 요동 지방의 군주로 군림했다. 이때 조예는 그에게 거기장군 자리를 하사했다.

 

232년 오의 손권이 연(燕)왕의 작위와 구석의 지위를 내려 우호관계를 맺으려고 장미와 허안 등을 사신으로 보냈다. 그러나 공손연은 사신이 가지고 온 보물을 탐내었고 무엇보다 애초에 손권과 관계를 맺을 생각이 없어서 두 사신들을 목베고 보물을 빼앗았다. 이렇게 손권의 뒤통수를 후려갈겼고 이 때 참수한 오나라 사신들의 목을 위나라에 진상해 낙랑공이란 작위를 수여받았다.[1] 그러나 위나라는 공손연에게 계속 의심을 품었고 결국 237년 관구검의 공격을 받았으나, 이를 격퇴했다.

 

위군을 격퇴해 낸 공손연은 스스로 연호를 소한(素漢)으로 하고 연왕을 자칭해 독립까지 선언하게 된다. 이때 말리는 가범과 윤직을 처형했는데, 공손연의 반란 소식이 위나라 조정에 알려지자 수도인 낙양에 인질로 가 있었던 그의 형 공손황은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런데 공손연은 238년 사마의가 이끄는 위나라의 군대[3]와 고구려 동천왕이 파견한 군대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공손연은 크게 두려워하며 살기 위해서 상국 왕건(王建)과 어사대부 유보(柳甫)를 보내 포위를 풀어줄 것과 면박(面縛)[4]하여 항복할 것을 청했다. 그러나 사마의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왕건과 유보의 목숨을 빼앗고는 곧바로 공손연에게 격문을 보냈다.

 

옛날 초나라(楚)와 정나라(鄭)는 열국이었으나, 정백[5]은 웃통을 벗고 양(羊)을 끌고 나와 초왕을 영접했다.[6] 나는 왕의 신하로 상공(上公)인데 왕건 등이 내게 포위를 풀고 물러나라고 하니 어찌 초나라와 정나라의 전례에 비기겠는가! 두 사람은 늙고 혼미하여 필시 말을 전하는데 실수가 있었을 터이므로 이미 죽였다. 만약 더 할 말이 있다면 젊고 명쾌하게 결단할 수 있는 자를 보내도록 하라.

 

이에 공손연은 시중 위연(衛演)을 보내 날짜를 정해 인질을 보낼 것이라고 청했다. 이때 사마의는 그 유명한 명언을 위연에게 말하며 거절한다.

 

군사로 맞설 때는 중요한 다섯 가지 원칙이 있다. 싸울 수 있을 때는 마땅히 싸워야 하고, 싸울 수 없을 때는 마땅히 지켜야 하고, 지킬 수 없을 때는 마땅히 달아나야 한다. 나머지 두 가지는 항복 아니면 죽음뿐이다. 너희들은 스스로 면박하려 하지 않으니 이는 죽음을 각오한 것일 터, 인질을 보낼 필요는 없다(軍事大要有五, 能戰當戰, 不能戰當守, 不能守當走, 餘二事惟有降與死耳. 汝不肯面縛, 此為決就死也, 不須送任).

 

이에 절망한 공손연은 남쪽의 포위를 공격하여 돌파하니 사마의는 추격하여 공손연과 그 아들 공손수를 잡아 참수했다.

 

그리고 사마의는 수도 양평성(襄平城)[7]에 들어간 후 두 개의 표식을 세워 젊은이와 늙은이를 구분했는데, 15세 이상 남자 7,000여 명을 모두 죽이고, 경관(京觀)[8]을 만들었다. 그리고 공경(公卿) 이하 관원을 모두 주살하고 장군 필성(畢盛) 등 2,000여 명을 죽였다. 그리고 이때 공손씨는 멸족되는 비운을 맞는다.

 

공손연이 황해도에 대방군을 설치했다는 헛소리는 하지 말아야 한다. 

 

공손연을 멸망시킨 사마의는 황해도에 대방군을 남겨둔 것이 아니다. 공손연 멸망 후에도 대방은 진나라까지 계속되었고, 진서에 나타난 대방군은

 

○晉書에 나타난 한사군은

낙랑군에 속한 1) 朝鮮조선, 2) 屯有둔유, 3) 渾彌혼미, 4) 遂城수성, 5)鏤方누방, 6) 駟望사망의 6개 현이 있었고

 

帶方대방군 소속의 현에는 1)列口열구, 2) 長岑장잠, 3) 提奚제해, 4) 含資함자. 5) 冥海명해, 6)呑列탄열 6개 현이 있었다.

 

수양제가 고구려 침략시 공격루트에 있던 고구려 지명으로

좌12군(左十二軍)은 1) 누방, 2) 장잠3) 명해, 4) 개마, 5) 건안, 6) 남소, 7) 요동, 8) 현도(玄菟), 9) 부여, 10) 조선, 11) 옥저(沃沮), 12) 낙랑(樂浪) 등의 길(道)로 나아가고,

 

우십이군(右十二軍)은 1) 점선, 2) 함자, 3) 혼미, 4) 임둔(臨屯), 5) 후성, 6) 제해, 7) 답돈, 8) 숙신, 9) 갈석, 10) 동이, 11) 대방(帶方), 12) 양평 등의 길(道)로 나아가 계속 진군하라고 하였는데,

 

우12군의 11번 대방을 비롯하여 2번 함자, 6번 제해좌 12군의 2번 장잠, 3번 명해 등 6개 군현이 포함되어 있어서 포함되지 않은 열구와 탄열도 같은 부근 지역이었고, 이들 지역은 황해도가 될 수 없다. 고구려에 속한 대륙에 대방군이 있었고 그 속현들도 대륙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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