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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전탐구]

    원전原典탐구 시리즈 | 원전原典 공부 동학 편 『용담유사』를 펼치다② - 안심가安心歌 -


    양섭용/ 본부 도장

    최수운 대성사는 빈천한 몸으로 태어나 온갖 시련과 고난을 겪었으나, 경신(1860)년 4월 5일 상제님으로부터 도통을 받고 장차 십이제국 괴질운수로 가을개벽이 닥칠 것을 깨달았습니다. 대성사는 가련한 동방 조선의 백성들에게 만고에 없는 상제님의 무극대도를 전해 주었는데 잘 알지도 못하는 세상 사람들이 ‘서학’이라 음해하더라고 「안심가」를 지어 노래했습니다.







    「안심가」 생각해 보기 Q and A


    1) 「안심가」는 언제 지었는가?
    「안심가」는 1860(경신庚申)년 4월 5일에 최수운 대성사가 득도한 이후 상제님으로부터 받은 도통을 가장 실감나게 표현한 점에서 초기에 쓴 글로 생각됩니다. 상제님 말씀대로 한 해 동안 무극대도를 닦고 수련한 다음 천주님을 위하는 글을 지어 포덕을 하니 오히려 친척들과 지역의 유생들이 ‘서학’이라 음해했다는 내용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교훈가」에서는 그런 문제로 관官의 지목을 받게 되어 정처定處 없이 길을 떠나 전라도 남원으로 피신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안심가」는 내용상 「교훈가」보다 앞선 시기에 지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포덕을 시작한 때는 1861년 6월 이후이고 경주를 떠난 것은 11월이므로 「안심가」는 그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2) 최수운 대성사가 호칭한 하늘님, 천주님, 상제님은 서로 다른 분인가?

    성경, 불경, 코란, 도장경 등의 경전을 보면 각 종교의 절대자를 부르는 고유한 호칭이 있습니다. 그분을 기독교에서는 하나님, 불교에서는 미륵부처님, 이슬람에서는 알라, 유교에서는 상제님, 도교에서는 옥황상제님이라 불러 왔습니다.

    최수운 대성사는 1860년 4월 5일 아무런 형체도 보이지 않는 허공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의 정체에 대해 신神적인 존재자의 출현을 직감했습니다. 그것은 내면의 목소리가 아닌 귓가에 또렷이 들려오는 신령스런 목소리였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누구이신지 몰랐지만 대성사는 문답을 나누고 그분을 ‘하늘님’, ‘천주님’, ‘상제님’, ‘아버지’ 등으로 다양하게 불렀습니다.

    그렇다면 왜 서로 다른 분으로 알고 있던 절대자를 동일한 존재자로 호칭을 혼용한 걸까요? 더욱이 1800년대 초 조선 정부의 잇따른 천주교 박해로 ‘천주天主’라는 호칭을 사용하면 동학이 천주학이라는 음해를 받게 될 것이 자명한데 말입니다. 이는 결국 조선 정부에 의해 최수운 대성사가 좌도난정左道亂正으로 참형斬刑을 받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대성사가 ‘천주天主’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 먼저 도올 김용옥은 1855(을묘乙卯)년에 금강산 유점사의 한 스님이 수운 대성사에게 전한 비서秘書를 『천주실의天主實義』로 보는 견해를 내놓았습니다. 『천주실의』를 통해 ‘천주天主’와 ‘상제上帝’가 동일한 존재임을 인식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서양의 천주와 동양의 상제를 동일한 분으로 깨달은 마테오 리치

    『천주실의』는 이태리 로마 예수회 출신인 마테오 리치Matteo Ricci(1552~1610) 신부가 저술한 것으로, 서양 선비와 중국 선비가 동서 문화의 하느님관을 주제로 질의응답을 주고받은 신학서입니다. 마테오 리치는 이태리 마체라타 시장의 장남으로 태어나 대학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학문과 근대 과학 지식을 정통으로 배웠습니다. 리치는 법관을 바란 아버지의 뜻과 달리 신神의 종이 되는 길을 선택하며 예수회에 입학했습니다. 예수회 사제로 수련을 거쳐 선교사로 파견된 리치 신부는 8만 리나 떨어진 만리타국에 와서 중국어를 익히고 관습과 문화를 습득하고 지식층과 교류하며 그리스도 복음을 전도하기 위해 명나라 천자인 만력제(신종神宗, 1563~1620)를 만나기까지 했습니다.

    『마테오리치』를 저술한 동경대 비교문화사의 세계적 석학인 히라가와 스케히로平川祐弘 교수는 마테오 리치를 ‘동서 문화를 처음으로 한 몸에 갖춘 최초의 세계인’으로 평했습니다. 리치 신부는 서양인 최초로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원문으로 익혔습니다. 동료 신부들에게 사서를 강독해 주었고 라틴어로 번역해 유럽에 소개했습니다. 동시에 세계 지도와 서양의 과학 문명을 중국에 전해 동서양의 문화계, 예술계, 사상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유교의 상제관과 기독교 신학을 접목시킨 『천주실의』는 동아시아 지식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주자학에 매몰된 동아시아 사상계의 지각판을 뒤흔들며 공자로 돌아갈 것을 천명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명明 말엽부터 청淸 초 시기에 실증적 고전 연구로 돌아가려는 새로운 학풍인 고증학이 태동했습니다. 『천주실의』는 조선에도 소개되어 천주학이 18세기 조선 땅에 자생적으로 뿌리내리는 데 많은 기여를 하였습니다.

    1552년 리치 신부가 태어났을 때는 아직 미켈란젤로가 살아 있을 때였고 그 시기야말로 인문주의가 개화한 르네상스 시대였습니다. 곧 원전原典으로 돌아가 원문을 충실하게 읽는 해석학이 진보한 시기였습니다. 리치 신부는 자오칭에서 전도한 젊은 청년을 다시 만나 그가 예배를 올린 제단에 목판으로 ‘천주天主’를 적어 모신 사건에서 알음귀가 열려 서구 문화권의 아버지 하느님인 신神(Deus)을 ‘천주’라는 말로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유교의 경서를 깊이 연구하며 ‘천주’라는 표현이 쓰인 용례를 찾아냈습니다. 나아가 ‘상제上帝’가 인격신이며 자연신으로서 푸른 하늘이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 게다가 옛 경전을 보니 상제와 천주는 단지 이름만 다를 뿐 한 분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치 내 아버지를 우리말로는 ‘아버지’로 중국말로는 ‘父:빠아’, 일본말로는 ‘お父さん:오또상’, 영어권에서는 ‘Father:파더’라고 부르듯 서로의 언어와 문화와 역사가 달라 호칭만 차이가 날 뿐 내내 같은 분이라는 것입니다.

    리치 신부는 자신이 믿던 하느님(Deus)이 바로 원시 유교에서 인격신 하느님으로 받들어 왔던 ‘상제上帝’와 동일한 분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천주실의』에서 ‘서양의 하느님이 곧 중국에서 말하는 상제님이다(吾國天主卽華言上帝)’라고 밝혔습니다. 이는 동서의 신관을 최초로 통일시킨 위대한 깨달음이자 통찰입니다. 리치 신부는 ‘Deus’와 ‘천주’와 ‘상제’를 동일한 분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동기가 분명했습니다. 동양 사회로 하여금 서양의 하느님을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지상천국의 꿈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더욱이 처음에는 동양 문화권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신神에 대한 개념이 없는 사회로 생각해 그런 관념을 전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고전에서 상제님을 발견함으로써 동양을 서양과 같은 고등한 문명사회로 보고 편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리치 신부는 다른 서양인들과 달리 서구 문명이 동양보다 우월하다는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마테오 리치 대성사는 지상천국을 건설하기 위해 명나라에 건너와 동서 문화를 통일시켰고 천상의 주인이신 아버지 천주님이 지상에 강세하실 수 있도록 우주의 십자가를 그린 분입니다.

    동학이 서학의 천주를 수용한 까닭은?

    그럼 과연 최수운 대성사도 천주님과 상제님을 동일한 분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동기가 있었을까요? 도통을 하기 전까지는 그런 동기를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포덕문」에서 최수운 대성사는 서양 사람들이 천주님의 뜻을 위하므로 부귀를 취하지 않는다면서 힘으로 중국을 짓밟고 집어삼키려는 행동을 보고 의문을 품었습니다. 이에 대해 「논학문」에서 “서양 사람은 말이 앞뒤가 다르고 글에는 옳고 그름이 없으며 천주님을 위하는 단서도 전혀 없더라. 다만 제 자신을 위해 빌 따름이다. 몸으로 천주님의 지기至氣를 받아 내리지 못하고 교리에는 천주님의 말씀이 없으니 형식만 있고 실체는 없더라. 천주님을 생각하는 것 같지만 주문도 없으니 도道는 허무에 가까우며 천주님을 아는 가르침이 아니니라.”(西人은 言無次第하고 書無皂白而頓無爲天主之端이요 只祝自爲身之謀라 身無氣化之神이요 學無天主之敎하니 有形無迹이요 如思無呪라 道近虛無요 學非天主니)고 하며 서학을 비판했습니다. 「안심가」에서도 ‘소위 서학 하는 사람 암만 봐도 명인없네 서학이라 이름하고 내 몸 발천 하렸던가’ 하여 서학과 거리를 두었습니다.

    물론 대성사가 서학의 한계를 꿰뚫어 보면서도 ‘천주’를 수차례 언급한 점에서 『천주실의』를 본 것으로 추론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천도교 측은 1855년 금강산 유점사의 한 스님으로부터 받은 천서天書를 『천주실의』로 보는 도올과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도원기서』에서는 천서를 유학도 도학도 아닌 책이라고 했습니다. 『천주실의』는 천주님과 상제님을 이야기하며 원시 유교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무신론인 불교의 영향을 받아 주자학의 이기론으로 변질된 송대 유학을 비판하며 초기 유학으로 돌아갈 것을 강조했습니다. 더욱이 리치 신부 이후 로마 가톨릭과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서양의 하느님인 ‘신(God)’을 ‘상제上帝’라는 용어로 번역하는 문제는 논쟁을 불러왔습니다. 결국 『천주실의』 재판再版부터는 ‘천주’로만 표기하고 ‘상제’라는 말은 사용이 금지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대성사는 어떻게 해서 천주와 상제를 동일한 분으로 인식한 것일까요?

    1860년 4월 5일 상제님으로부터 직접 도통을 받은 최수운 대성사는 ‘세상 사람들이 나를 상제라 이르나니 너는 어찌 상제를 모르느냐’(世人이 謂我上帝어늘 汝不知上帝야아), ‘…너는 내 아들이다. 나를 아버지로 부르라’(上帝又曰 汝吾子爲我乎父也), ‘내 주문을 받아 나를 위하도록 가르치라’(受我呪文하야 敎人爲我則) 하신 말씀에서 상제님이 직접 밝혀 주신 공식 호칭 ‘상제’와 시천주 주문의 ‘천주’를 동일한 분으로 확신했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해 보입니다. 동학은 인류의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을 하나로 통일해 가을우주를 여는 서신사명으로 오신 상제님의 무극대도입니다. 따라서 천주, 상제, 하늘님, 아버지, 미륵불, 옥황상제 등의 호칭은 억조창생이 동귀일체同歸一體를 하듯 각자 서로 다른 분이 아닌 한 분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류 문명을 추수하시러 오신 상제님의 천명을 받은 대성사는 동학을 창도해 아버지의 나라를 세우려 한 서학의 꿈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시천주侍天主의 가르침으로 온 인류가 장차 인간으로 강세하실 아버지 하느님을 모실 수 있는 무극대도를 닦은 분입니다.

    3) 상제님께서 칭찬하신 최순운 대성사의 성경신誠敬信
    상제님은 “수운의 하늘을 모시는 가르침이 지극히 밝고 정성스러웠느니라”(道典 5:233:13), “최수운이 성경신이 지극하기에 내가 천강서天降書를 내려 대도를 열게 하였더니”(道典 4:9: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855년 3월 봄 낮잠을 자는데 꿈인지 생시인지 한 선사禪師로부터 천서를 받았습니다. 책을 전해 준 신비한 인물은 자신을 금강산 유점사에서 불서佛書나 읽은 사람으로 소개하며 백일 정성 공부를 드렸는데 마지막 날 홀연히 기도를 올리던 탑 앞에 책 한 권이 놓여 있어 사방팔방을 다니며 박식하다는 사람을 찾아가 책을 보였으나 정확한 뜻을 알지 못했다고 찾아온 까닭을 밝혔습니다.

    을묘천서乙卯天書를 『천주실의』로 보는 문제와 관련해 리치 신부 당대에 이미 명나라 유학자들에게 널리 읽혔고 1600년대부터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도 널리 읽혔습니다. 18세기 남인 실학을 대표하는 성호 이익이 『천주실의』를 읽고 ‘천주실의발天主實義跋’이라는 독후감을 남겼을 만큼 『천주실의』는 대중적으로 읽히는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천서를 받아 살펴본 최수운 대성사도 유교나 불교의 도리로도 이치가 풀리지 않았다고 할 만큼 어려운 책이라고 한 점에서도 『천주실의』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천서를 전하고 홀연히 사라져 버린 신인神人으로부터 책을 받은 이후 깊이 연구하고 그 이치를 꿰뚫어 보니 ‘기도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대성사의 공부법에 큰 변화가 나타났고 1860년에 이르기까지 천주님을 지극히 받들었습니다.

    轉至丙辰仲夏之節(천지병진중하지절)에 謹奉幣帛與一箇僧(근봉폐백여일개승)하고 入于梁山通道天聖山(입우양산통도천성산)하야
    結築三層壇(결축삼층단)하고 計爲四十九日而(계위사십구일이)하야
    祀願心所恒念與天主降靈(사원심소항념여천주강령)을 只望有命敎矣(지망유명교의)러라
    - 『도원기서』


    최수운 대성사는 1856(병진丙辰)년 5월 양산梁山 천성산天聖山에 올라 삼단으로 제단을 쌓고 폐백을 올린 다음, 49일 동안 한결같이 천주님이 강령하시어 천명과 신교를 내려 주길 지극정성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숙부의 별세로 47일 만에 기도를 중단했습니다. 해가 바뀌어 1857(정사丁巳)년 7월 천성산 적멸굴寂滅窟에서 105일 기도를 새로 올렸습니다. 그리고 1859(기미己未)년 10월 울산에서 경주 용담으로 돌아와 수행을 지속했습니다. 1860년 2월 입춘시를 짓고 자호字號와 이름을 고친 다음 집중 기도를 드리던 가운데, 마침내 음력 4월 5일 아버지 상제님으로부터 도통을 받았습니다.

    동학 입도를 위한 49일 정성공부

    최수운 대성사의 49일, 105일 기도는 동학의 기본 공부법이 되었습니다. 『도원기서』에 이와 관련된 기록이 있습니다. 해월 최시형 선생이 도피하던 중, 태백산 적조암에서 일행 세 사람과 더불어 49일 동안 날마다 시천주 주문을 2~3만 독씩 읽었다고 합니다. 수행을 마치고 돌아온 날 밤, 해월 선생은 상서로운 봉황 여덟 마리가 내려와 앉는 꿈을 꾸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이처럼 수운 대성사의 수행법은 동학 신도들에게 천주님을 모시는 공부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상제님을 모신 성도들 가운데 동학을 한 분들의 수행과 기도에 대한 내용은 『도전道典』에서 다음과 같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상제님께서 성도들에게 하늘의 일을 말씀하시니 형렬이 항상 마음속으로 ‘한울님 뵙기를 원하옵니다.’ 하고 소원하는지라 (道典 2:39:1)

    * 공우 또한 동학 신도로서 마침 49일 동안 기도하는 중이더라. (道典 3:183:7)

    * 원래 공우는 동학 신도의 통례와 같이 ‘대성사응감(大神師應感)’이라는 식고를 하지 않고, 항상 “하느님 뵈어지이다.” 하고 발원하였는데 (道典 3:200:9)

    * 일찍이 경학이 석 달 동안 시천주주(侍天主呪) 수련을 하던 중 꿈에 천상에 올라가 옥황상제(玉皇上帝)를 뵈온 일이 있었는데 (道典 3:174:4)

    * 공신이 돌아오는 길에 친구와 함께 태인 관왕묘에 가서 ‘참 선생님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 하고 지성으로 기도를 올리거늘 … 엿새째에 이르러 비로소 잡귀가 사라지고 관운장(關雲長)이 나타나 “향남방(向南方)하라.” 하고 사라지니라. (道典 3:202:13~15)


    상제님을 따르기 전 동학을 한 성도들이 상제님을 섬기는 신교문화의 기도와 수행법을 통해 상제님과의 인연을 닦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원래 예수교 전도사로 수십 명을 포교하고 다시 동학을 열렬히 믿은 박공우 성도는 평소에 ‘하느님 뵈어지이다’라는 식고를 오랫동안 해 왔고 49일 정성기도 중에 상제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천지조화를 뜻대로 쓰시는 상제님을 보며 하느님이심을 확신하였습니다.

    『도전』 말씀을 살펴보면, 태모님과 김형렬, 안필성, 김경학, 차경석, 박공우, 문공신, 신경수, 전태일, 박장근 등의 성도들이 동학을 믿었습니다. 상제님을 모시기 이전부터 동학을 하며 시천주주를 읽은 분들 가운데, 김경학 성도는 가장 놀라운 체험을 하신 분입니다. 상제님을 모시기에 앞서 석 달 동안 시천주주侍天主呪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김경학 성도가 천상에 올라가서 뵌 분이 옥황상제님이신 것을 스스로 깨달은 것은 가장 신비로운 일입니다. 동학의 역사에서 최수운 대성사 이후 유일하게 상제님을 직접 친견한 분입니다. 이것은 진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시천주주를 읽고 천상 옥경의 상제님을 친견한 김경학 성도

    김경학 성도는 태인 지역 대부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1860년) 자라면서 학문에 열중하였고 동학 접주인 셋째 형 경은景恩을 따라 동학을 신앙했습니다. 그리고 백암리에서 훈장을 하던 중 47세에 상제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유가의 경서는 물론,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그리고 『대선생주문집』, 나아가 『천주실의』까지 보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유가 경서를 섭렵하며 상제님을 사상적으로 받아들였고 석 달간 시천주주를 읽으며 영적 체험을 통해 확고한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보입니다.

    김경학 성도가 행한 도체道體 포교는 상제님에 대한 강렬한 체험과 사상 신앙이 근본이 되었습니다. 태인 새울에 살면서 대농大農에 금광을 운영한 최창조 성도에게 도道를 전할 때, ‘그분은 참으로 하느님이신 게 틀림이 없네’라며 ‘상제님의 신성하심’을 일깨워 주며 상제님 말씀대로 천금을 바치고 입도하게 만들었습니다. 최창조 성도는 상제님을 모시고 태인 읍내를 지날 때, 죽을병에 걸린 아홉 살 난 아들을 안고 길가에서 슬피 우는 여인에게 다가가 치유법을 일러 주며 “우리 선생님은 하늘님이오. 시답잖게 듣지 말고 꼭 하시오.”라며 확신을 심어 주었습니다. 며칠 후 그 여인의 남편이 아이와 함께 와서 이바지를 바치며 아이의 병을 고치고 생활 형편도 나아져서 ‘이 덕이 뉘 덕인고! 하늘님 덕이라’고 하였다며 사례를 하였습니다. 이렇게 그 남편도 상제님을 하늘님으로 믿는 모습을 지켜본 성도들 또한 더욱더 상제님을 하느님이라고 믿고 따르게 되었습니다.

    일찍이 상제님께서는 “학교는 장차 이 학교가 크리라. 내 세상에는 새 학교를 세울 것이니라.”(道典 6:61:4~7)라고 하시며 김경학金京學 성도에게 대학교大學校 도수를 붙이셨습니다. 상제님의 후천 대학교는 무엇을 배우는 곳일까요? 바로 그 ‘학學’은 9천 년 신교문화의 원 주인이신 삼신상제님을 모시고 따르는 시천주주侍天主呪 열석 자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김경학 성도는 오직 상제님에 대한 믿음과 체험을 바탕으로 진리를 전했고 의통도체를 조직하였습니다. 천상에서 상제님 대학교의 총장으로서 삼신일체 상제님을 모시는 삼랑三郞, 곧 삼시랑三侍郞을 양성하는 도수를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김경학 성도의 이름에 있는 ‘학學’은 인간으로 오시는 아버지 천주님을 모시는 동학東學의 ‘학學’과 같습니다.

    4) 최수운 대성사가 전한 개벽 소식은 무엇인가?
    동학의 핵심 메시지는 ‘개벽開闢’입니다. 개벽이라는 말은 『용담유사』에서만 언급되고 『동경대전』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용담유사』의 「안심가」와 「용담가」 그리고 「몽중노소문답가」에 개벽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개벽은 열 개開 자, 열 벽闢 자, 한마디로 ‘열어젖힌다’는 뜻입니다. 본래 말은 천지개벽天地開闢, 천개지벽天開地闢, 벽천개지闢天開地 곧 새 하늘 새 땅을 열어젖힌다는 뜻입니다. 천지의 질서가 바뀐다 것을 말합니다. 안경전 종도사님의 말씀에 따르면 서양에서는 개벽을 기후변화, 전쟁, 전염병 같은 현상론에 더 비중을 두고 종말론으로 해석하지만, 동양은 현상보다 본질에 더 접근해 우주론의 시각에서 대자연의 질서가 근본적으로 전환된다는 점에서 서로 온도 차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용담가」에서는 ‘개벽 후 오만 년에’, ‘나도 또한 개벽 이후 노이무공 하다가서’라며 상제님 말씀을 인용해 5만 년 전, 현생 인류가 출현한 선천개벽의 의미로 이야기했습니다. 「안심가」와 「몽중노소문답가」에서는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개벽 아닐런가’라고 하여 장차 괴질이 창궐하고 온 세상이 다시 개벽될 것이라 했습니다. 이 말에는 후천개벽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개벽은 수운 대성사가 상제님의 가르침을 받아 동학에서 처음 선포했고 선천과 후천이라는 말은 일부 김항 대성사가 정역에서 처음 밝혔습니다. 그리고 선천개벽과 후천개벽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인간으로 강세하신 상제님께서 처음 쓰신 언어입니다. 무엇보다 최수운 대성사가 인류 근현대사의 출발점에서 처음 선언한 개벽은 인간 세상에 성령으로 임어하신 상제님으로부터 천명과 신교로 받은 가르침이기 때문에 선천개벽과 후천개벽의 뜻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다시 개벽은 후천개벽

    「교훈가」에서 다가올 개벽 세상의 모습을 노래한 가사를 보면 최수운 대성사의 고향인 경주 마을은 그때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할 무인지경無人之境이 될 것이라 했습니다. 「권학가」에는 ‘아동방 삼년괴질 죽을 염려 있을소냐’, ‘아동방 연년괴질 인물상해 아닐런가’라 하여 가을개벽기에 조선은 3년 동안 괴질이 휘몰아칠 것이니 천주님을 지극히 모시는 시천주 신앙으로 대비하라고 경계하였습니다. 상제님께서 만고명장이라고 평한 전명숙 장군도 아동방 3년 괴질이 우리 눈앞에 있으니 천주님을 잘 모시고 마음을 닦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東學書中云 三年怪疾이 在前한니 敬天守心하여사 免한다 하여나니다.)고 했습니다.

    『용담유사』에서는 괴질운수와 다시개벽을 앞으로 닥칠 미래적 사건으로 노래했습니다. 따라서 『동경대전』 「포덕문」에서 “是故로 我國은 惡疾이 滿世하야 民無四時之安하니 是亦傷害之數也요 西洋은 戰勝功取하야 無事不成而天下盡滅이면 亦不無脣亡之歎이라 輔國安民이 計將安出고”라는 내용은 전후 문맥으로 볼 때 앞으로 다가올 사건을 뜻합니다. 물론 이 내용은 당시 서구 열강이 청나라를 침략한 사건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포덕문」에서 천상문답 사건 직전 1860(庚申)년에 이르러서 서양이 청나라에 쳐들어와 천주당을 세우고 부귀를 취한 내용이 이미 언급되었기 때문에 같은 내용을 다시 언급한 것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앞으로 닥칠 개벽 실제 상황에서 세 벌 개벽의 문제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비록 『동경대전』에서 ‘개벽’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절제되었지만 “장차 동방 조선에 악질이 꽉 들어차서 백성들이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을 것이니 상해傷害의 운수요 서양이 거리낌 없이 전쟁을 일으켜 온 천하가 다 멸망하게 되면 조선에도 그 영향이 미칠 것이니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지킬 수 있는 계책은 무엇인가.”라고 하여 개벽 담론이 계시啓示, 암시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5) 동학 신도들은 왜 안심가를 잘못 해석해 난을 일으켰는가?
    “동학(東學) 신도들이 안심가(安心歌)를 잘못 해석하여 난을 지었느니라.”(道典 5:4:1)라고 하신 상제님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요? 「안심가」는 ‘도통과 개벽’이라는 두 개의 스토리 라인을 갖고 있습니다.

    먼저 「안심가」는 최수운 대성사가 상제님으로부터 받은 도통 체험 수기라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일종의 입도 수기이며 태을주 체험 수기와도 같습니다. 따라서 동학 신도들이 잘못 해석할 수 있는 내용은 바로 상제님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상제님을 제대로 인식한 것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를 동학혁명의 직접적 원인으로 연결을 짓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동학 신도들이 스토리 라인의 두 번째 주제인 ‘개벽’을 잘못 이해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가련하다 가련하다 아국운수 가련하다 전세임진 몇해런고 이백사십 아닐런가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개벽 아닐런가’라고 앞으로 닥칠 후천개벽 실제 상황에서 동방 조선의 운명이 너무도 절망적인 것을 걱정하며 이때의 참상을 임진왜란에 비유했습니다.

    임진왜란 때 오성鰲城과 한음漢陰 같은 걸출한 인재들이 나와 나라를 지킬 수 있었지만, 김덕령金德齡 같은 만고충신을 음해해 죽여 버림으로써 석 달이면 끝날 전쟁을 8년이나 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장차 ‘십이제국 괴질운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이며 인류를 구원하실 분은 누구인가 하는 이 문제에 대해 상제님이 대성사에게 무극대도를 내려서 괴질운수를 극복하게 하셨으니 근심 걱정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 알지도 못 하는 세상 사람들이 동학을 천주학이라 음해하는데 사실이 아니니 그런 말에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심가」에서 임진왜란 때 쳐들어온 ‘개 같은 왜적 놈들’ 따위를 하늘님 조화 받아 하루아침에 물리칠 만큼 십이제국 괴질운수를 이겨 낼 수 있는 조화를 받았다는 것과 영남 유생들이 서학으로 음해한 것에 대한 답답함을 토로한 내용이 원래의 의도와 달리 흘러갔습니다. 1892~1893년 사이에 최수운 대성사의 신원 회복을 위해 시작된 공주-삼례-광화문-보은 집회 운동이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오버랩이 되면서 동학군들은 척양척왜斥洋斥倭를 기치旗幟로 내걸었습니다. 서학에 대한 반감은 척양으로, 임진왜란을 일으킨 ‘개 같은 왜적 놈’에 대한 분노는 척왜로 번져 마침내 갑오동학혁명으로 불타올랐습니다.

    결국, 동학 신도들이 「안심가」에서 아버지 상제님의 무극대도를 닦아 다시 개벽을 대비하라는 핵심 주제를 놓치고 일본을 향한 지엽적인 분노에 휩쓸려 난을 일으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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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06월 홈 | 기사목록 | 되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