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06월 홈 | 기사목록 | 되돌아가기

    [역사X파일]

    대한사관의 진실 | 학문적 양심이 없는 망설 - 그들은 왜 환단고기를 두려워하는가?(4)


    우리 역사학에는 세 가지 병독病毒이 있다. 바로 왜독·중독·양독의 삼독三毒이다. 그러나 이 삼독보다 더 치명적인 것이 우리들 자신의 사대주의事大主義 정신이었다. 유교 성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주의 세계 질서에 안착하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 기자의 후손임을 자처했고, 우리의 역사를 수거하고 감추어 버렸다.

    일제는 여기에 더해 우리를 영원히 저들의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의 사서를 멸절시키려 했다. 오랜 기간 축적된 역사 파괴의 결론이 ‘단군신화’라는 용어이다. 『환단고기』에 대해 부정을 위한 부정의 논리를 펼치는 일부 강단사학자들의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알아보자.

    일곱째, 환단고기 내용의 문제


    사물事物은 보는 관점에 따라 달리 보이는 법이다. 하물며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사물에 접근했을 때는 사물의 진실이 왜곡될 여지가 많다. 그리하여 학문의 세계에서 중도中道를 견지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중도는 자신의 의도와 진실, 상식, 법칙 사이의 조화로운 균형이다. 그 의도가 너무 앞서나가거나 의도에 불순한 목적이 섞인다면 학문은 중도를 잃고 저급한 정치政治, 선전 행위로 전락되어 버린다. 일부 강단사학자들의 『환단고기』 비판에는 중도는커녕 일말의 학자적 양심도 보이지 않는다. 이들은 『환단고기』를 깎아내리고 자신의 학문권력을 지키기 위해 일제 침략자의 편에 서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온 국민을 속이는 사기행각이요, 민족반역의 길이다.

    『환단고기』에는 과거 일본, 독일에서 유행한 ‘확장적 민족주의’의 모습이 보인다. 이는 국제화 시대에 역행하는 것이 아닌가?
    反論
    『환단고기』 의 핵심 사상 중의 하나가 홍익인간
    1)
    이다.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역사 뿌리문화를 찾으려는 것이다. 물론 왜곡된 역사도 바로잡아야 한다. 그리고 지금 외국에 나가 보면 국적이 한국이었다고 다 한국인일까? 대부분 정체성을 상실해서 왜 한국인인지를 모르고 있다. 유대인들은 나라가 없었지만 역사교육을 통해 국민이 단결하여 없던 나라도 만들어 냈다. 올바른 뿌리 역사가 아니면 모두 분열하여 나라는 사라지고 만다.

    민족의 정체성, 우리는 어떤 민족이고 어떤 사상과 문화를 가지고 있던 나라인지에 대해서 그 어떤 책보다도 명확하게 제시하는 책이 또한 『환단고기』이다. 본래의 맛, 본래 문화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이다. 이것이 과도한 민족주의가 되어 세계화를 해치게 될까? 전 세계 모든 국가가 그들의 뿌리를 바로 찾고 각 문화권의 특색을 살릴 때 그리고 그것들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진정한 세계의 발전이 있게 된다.
    1) 홍익이라는 것은 민족주의 차원도 초월했습니다. 중국의 중화사관은 자기가 세계를 지배해야 되는 세계의 중심이고, 일본의 황국사관은 일본의 천황이 세계를 지배하는 민족주의입니다. 둘 다 독선 배타성을 다분히 가지고 있는 배타적 민족주의이지만, 우리 홍익사상, 이 『환단고기』에 기초한 여러 가지 역사적인 사실들을 연구해 보면 이야말로 세계 최고의 세계주의적인 평화사상이라고 확신합니다. - 『아시아이상주의 저자 이홍범 박사 강연자료집』, 2013.12.8. 27쪽.


    동북공정을 주도한 학자 가운데 하나인 유자민劉子敏은 대한민국 역사학계의 고조선에 대한 주장이 비학술적이라 비판하였는데, 그 논거로 『환단고기』를 들고 있다. 『환단고기』가 오히려 동북공정에 도움을 주고 있는 아이러니가 지적되기도 한다?
    反論
    어이없는 주장이다. 이제 동북공정을 주장하는 중국 학자의 말조차 신성시하는 위서론자들의 난센스다. 『환단고기』가 아니면 중국은 동북공정을 진행하는 데 문제가 될 게 없다. 왜냐하면 대한민국 학계는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었다는 한사군 한반도설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 고구려를 자기네 지방정권이었다고 주장하는 핵심 논리가 바로 한사군의 유민遺民이 만든 나라가 고구려라는 점이다.
    2)


    『환단고기』만이 동북공정을 막을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환단고기』에는 단군조선 2,000여 년의 역사를 밝혀 주는 유일한 책이다. 단군조선의 성립과 변천, 그리고 멸망의 과정을 소상하게 밝혀 주고, 특히 단군조선과 중국 고대 왕조인 당요, 우순, 하우씨, 그리고 상나라, 주나라와 얽힌 국제 사건을 밝혀 준다. 고대 중국은 단군조선을 문화의 조국, 천자국으로 모시던 지방정권이었다. 한사군에 대해서도 전혀 다른 역사 사실을 전해 주고 있다.

    癸酉十三年(계유십삼년)이라 漢劉徹(한유철)이 寇平那(구평나)하야
    滅右渠(멸우거)러니 仍欲易置四郡(잉욕역치사군)하야 盛以兵(성이병)으로
    四侵(사침)이라.
    於是(어시)에 高豆莫汗(고두막한)이 倡義起兵(창의기병)하야
    所至(지소)에 連破漢寇(연파한구)할새 遺民(유민)이 四應(사응)하야
    以助戰(이조전)하니 軍報大振(군보대진)하니라.
    재위 13년 계유(단기 2226, BCE 108)년에 한漢나라 유철劉徹(무제)이 평나平那를 침범하여 우거를 멸하더니 그곳에 4군四郡을 설치하려고 군대를 크게 일으켜 사방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고두막한이 구국의 의병을 일으켜 이르는 곳마다 한나라 도적을 격파하였다. 이때 유민이 사방에서 호응하여 전쟁을 지원하니 군세를 크게 떨쳤다. (『환단고기』 「북부여기」)


    『환단고기』에는 우리 고대사에서 가장 숨겨졌던 영웅 고두막한高豆莫汗이 등장한다. 중국인들이 최고의 제왕 중의 하나로 꼽는 한 무제를 패퇴시킨 분이 바로 이분이다. 「북부여기」에 따르면 한사군은 한 무제의 희망 사항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들은 부끄러운 과거를 숨기기 위해 한사군을 역사 사실로 기정사실화했다. 일제 식민사학자들과 우리의 강단사학자들은 여기서 한술 더 떠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 평양 땅으로 옮겨 버렸다.

    山上帝元年(산상제원년)에 遣弟罽須(견제계수)하사 攻破公孫度(공파공손탁)하시고 伐玄菟樂浪(벌현도낙랑)하사 滅之(멸지)하시니 遼東(요동)이 悉平(실평)하니라
    고구려 (10세) 산상제 원년(단기 2530, CE 197년), 아우 계수罽須를 보내어 공손탁公孫度을 쳐부수고, 현도와 낙랑을 쳐서 멸함으로써 요동이 모두 평정되었다. (「고구려국본기」)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에서는 197년에 현도와 낙랑을 쳐서 멸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현도와 낙랑의 위치는 어디일까? 그곳이 평나인데 바로 우거의 도읍이 있었던 곳이다. 곧 번한의 수도였던 왕험성이자 지금의 창려 지역이다. 이것은 중국 측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사기史記』 『하본기夏本紀』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에는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는데 (만리)장성의 기점이다(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라는 기록이 있다. 갈석산이 있는 낙랑군 수성현이 만리장성의 동쪽 기점이란 뜻이다. 낙랑군 수성현의 위치를 현재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주류 사학은 물론 한국의 주류 사학까지 황해도 수안遂安으로 비정한다. 하지만 낙랑군의 중심지 수성현이 갈석산 근처에 있었으니 당연히 낙랑군 역시 그 일대에 위치했을 것이다. 따라서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주장은 ‘땅을 떠서 옮기는 귀신같은 재주’(신채호)이다. 종합해 보면 한사군은 한무제의 희망 사항으로 출발했고, 존재를 인정한다 해도 4군이 아닌 2군을 인정할 수 있다. 그 위치도 지금의 갈석산이 있는 하북성이다.

    동북공정은 이러한 역사 진실을 뒤집어엎으려는 역사사기극이다. 『환단고기』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가장 장애가 되는 책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환단고기』를 부정해야 동북공정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강단사학에서 동북공정을 방관하고 있고, 오히려 동북공정을 지지하는 핵심 논리를 제공하고 있는 실정이다.
    2) Jiang makes no bones about his position that the Gaogouli/Koguryo Kingdom was Chinese. It was ‘‘an ancient local regime of our country whose people were mainly ethnic Han migrants,’’ he writes. He adds, ‘‘Because of geography, their economy and culture could not keep pace with the interior. Gradually, they became indigenized and the central plains dynasties came to see them as Yi and Di tribes.’’(Congressional Research Service. DECEMBER 11, 2012)
    지앙(창춘 사범대학 동북아시아 연구소)은 고구려가 중국의 땅이었다는 사실을 개의치 않고 말한다. 그는 “주로 한나라 이주민에 의해 건설된 지방정권이었다.”라고 썼다. 왜냐하면 지정학적으로 그들의 경제와 문화는 그들 내부에 의해서 발전될 수 없었다.(한나라에 의해 유입된 경제 문화로 발전했다.) 점차적으로 그들은(이주민) 토착화되고, 동이족으로 보게 되었다. (미의회 조사국, 2012.12.11.)


    배달국 14대 자오지환웅 치우천황은 우리 민족과 관련 없는 사람이다. 묘족의 조상으로 모셔지고 있는 분이다?
    反論
    중국의 많은 기록은 치우가 동이東夷인 구려九黎의 천자天子라 하고 있다. 『상서전』 에는 ‘구려국의 임금을 치우라 한다.’ 『사기집해』 에 응소는 ‘치우는 옛날 천자의 호칭이다’라고 하였다. 『사기색은』 에서 공안국은 ‘구려의 임금 호칭을 치우라고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사마천의 『사기』 에서는 황제헌원이 치우를 제압했다고 나오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환단고기』에 의하면 치우천황은 황제헌원을 굴복시켰다고 전하고 있다. 『삼국유사』 의 「고기古記」에서 환웅은 세 명의 신하로 풍백風伯, 우사雨師, 그리고 운사雲師를 두었다. 『산해경』 에서 치우는 그의 수하로 풍백과 우사를 부린다고 하였으며, 『춘추좌전』 소공17년 조와 심지어 『사기』 에서도 황제는 운사라고 하였다. 결론은 치우가 천왕이고, 황제가 그의 신하이다.
    3)


    치우천왕은 황제헌원을 굴복시키고 서방 한족에게 동방의 신교와 천자문화를 전해 준 대제왕으로서 병법의 비조이다. 『사기』 「봉선서」에 팔신은 천주天主, 지주地主, 병주兵主, 양주陽主, 음주陰主, 월주月主, 일주日主, 사시주四時主를 말한다고 되어 있다. 천주는 천지만물의 조상인 삼신상제님을, 병주는 병가의 원原시조인 치우천왕을 뜻한다.

    주周나라 혁명의 일등 공신이며 병법의 중시조인 동이족의 재상 강태공姜太公도 제나라에 왕으로 분봉된 뒤 팔신께 제사를 올리면서 치우천왕을 병주兵主로 모셨다. 이후 진秦·한漢대에 이르기까지 동이족과 한족은 10월에 치우천왕의 능陵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그때마다 붉은 기운이 뻗쳐올랐으며, 그 붉은 기운을 치우기蚩尤旗라 불렀다.

    조선 시대에는 ‘둑제’를 지냈는데, 고대로부터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서 군신軍神 치우를 상징하는 깃발에 제사를 올리는 의식이다. 치우의 머리를 형상화한 둑기는 소의 꼬리나 검은 비단으로 만들어 ‘대조기大早旗’라고 불렀다. 조선은 둑제를 국가 제사인 소사小祀의 하나로 정비하고 전국에 둑소를 마련하여 매년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냈다.

    둑제는 서울과 각 지방의 병영·수영에서 각각 시행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 에 전쟁 중 둑제를 세 차례 거행하였다고 기록했다. 서울의 뚝섬에는 원래 둑제를 지내던 둑신사가 있었는데, ‘뚝섬’이라는 이름은 이 둑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둑신사에는 높이 6자, 폭 36자의 벽화가 있었는데, 치우와 헌원과의 싸움인 탁록전을 그린 그림으로 일제 말기까지 있었으나 분실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묘족은 『회남자』 권11 제속훈에 있는 “머리채를 삼끈으로 묶은 상투쟁이로서 마치 싹이 돋은 듯하여 묘苗라 했다.”라는 구절과 『산해경』 권17 대황북경에 나오는 “서북해 밖 흑수 북쪽에 날개 달린 사람(鳥夷系)이 있으니 이름하여 묘민苗民이다.”란 기록에 비추어 보면 이夷족이면서 머리에 상투를 튼 민족이다. 그리고 왕동령王桐齡의 『중국민족사』 에는 “삼묘족三苗族의 나라를 구려九黎라 하고 구려의 임금을 치우라 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즉, 묘족은 우리와 공통의 조상을 가진 민족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오히려 묘족이 있던 영역까지 배달국의 영역이었다고 추정해 볼 수도 있고, 『환단고기』에 의하면 이러한 모든 추정들이 사실임이 밝혀진다.

    『인류원한의 뿌리 단주』 (이재석, 2008)에는 묘족이 남쪽으로 옮겨 가게 된 배경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 나온다. 중국 역사서에 따르면 치우가 탁록대전에서 황제에게 패한 후 묘족 대부분이 남쪽 장강과 회수 유역으로 이동하여 삼묘를 형성했고, 다시 요·순·우 등에 의해 쫓겨난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산해경』 에는 양자강 이남의 동정호와 팽려호 일대에는 구려九黎의 후예인 ‘유묘有苗’ 혹은 ‘삼묘三苗’라고 불리는 부족이 있었는데 단주(요임금의 아들)와 사이가 매우 가까웠다. 마침 요임금이 순에게 제위를 넘겨준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승복하지 않고 있던 삼묘의 족장은 단주가 오자 곧바로 세력을 연합하여 요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요의 군대는 단주와 삼묘의 연합군을 궤멸시켰고, 이 싸움에서 삼묘의 족장이 피살당하고 단주도 전사하였다는 것이다.
    3) 박병섭, 2011, 『사기』 오제본기와 그의 전거( 『대대례기』 「제계성」 , 『공자가어』 「오제덕」 , 『춘추」 , 『국어」 , 『상서』 ) 사이의 비교분석-천왕, 치우와 그의 신하 운사, 황제(1)- , 선도문화 제11권 168쪽.


    『환단고기』 신봉자들은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활을 잘 쏘는 동방 민족, 동이東夷라고 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동이는 후한 때 만들어진 최초의 한자사전, 『설문해자』 에 나온다. 이夷가 동이를 뜻하게 된 것은 전국시대 중기 이후이다?
    反論
    역사시대 이전 동이족과 한족이 처음 접촉한 때, 상대방의 특징을 상형화하여 그림글자가 나타났다. 그 후에 문명이 더욱 진화하면서 종족의 호칭으로 표현해 낸 한자 형태가 『설문해자』 의 이夷다. 즉 설문해자의 자형字形이 나오기 훨씬 전부터 동이의 습속을 표현한 갑골甲骨에 이미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우리는 자신을 결코 동이東夷라고 부른 적이 없다. 광명光明처럼 환한 민족, 하늘의 아들인 밝은 민족이라 칭하였기에 구환九桓, 박달 등이라 하였다. 그 후 주나라 시대에 화하족이라 자처한 그들은 자신들이 거주하고 있던 땅을 중원이라고 규정하면서, 동쪽에 있던 외족外族을 동이東夷, 서쪽에 있으면 서이西夷(후에는 창을 잘 사용한 흉포한 무리라 하여 서융西戎으로 바꾸어 부른다), 북쪽에 있으면 북적北狄(狄도 밝은 이들이란 뜻이다)이라 불렀다. 이들은 모두 사실상 이족夷族이었다. 따라서 화하족華夏族과 접촉하면서 우리를 표현하기 시작한 ‘이夷’라는 명칭이 나오기 전에도 우리 민족은 우리 나름의 존재 형태와 생활 풍습을 가지고 그곳에 존재하였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인류문명의 뿌리 동이』 (김선주, 2009)에는 동이 명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한 무제 때 사마천은 중국 최초의 정사인 『사기』 를 저술하면서 동이의 역사를 뿌리부터 왜곡하였다. 『설문해자』 의 내용대로 동이는 춘추전국 시대까지는 동방의 큰 활을 쓰는 어진 민족으로 우러러보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한 무제 중심으로 기록된 『사기』 에는 동쪽에 있는 오랑캐라는 개념으로 기록이 되기 시작했다. 즉 자신들이 중심에 있고, 그 변방에 있는 나라들을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 등 오랑캐 명칭으로 왜곡한 것이다. 특히 『후한서』 「동이열전」 서문에서는 한나라 이전에 쓰던 명칭과 오랑캐의 명칭을 구분하지 않고 써서 더욱 혼란을 초래하였다.

    『환단고기』 에는 3세 가륵단군 때 가림토 문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가림토가 일본의 신대 문자가 되고, 세종대왕 한글 창제의 기초가 되었다고 한다. 가림토는 존재하지 않은 문자다?
    反論
    길림시 송호상 교수는 “동이민족 논설 중 일부"에서 ‘가림토 문자를 찾아서’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산동성山東省 환대桓臺시에서 발굴된 가림토加臨土 문자(옛 한글)는 조선의 한글이 세종대왕의 발명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으며 지하 6미터 깊이에서 발굴된 녹각에 새겨진 <ㅅ ㅈ × ㅜ> 등의 가림토 문자는 C14 측정 결과 거금 3,850년 전의 것으로 확인하였으니 『환단고기』의 ‘가림토 문자가 4,000년 전에 있었다’고 하는 내용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문자는 한글과 똑같으며 지금도 인도의 구자라트 지역에서 사용하고 있다. 한국, 인도, 수메르가 서로 교류하였으니 이때 이후에 가림토가 전해졌을 것인데 인도에서 쓰는 가림토가 언제 전해졌는지 또 일본의 아히루 신대 문자에는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는 앞으로 좀 더 연구해야 한다.

    세종실록 25년 12월 조에 “......기자방고전(其字倣古篆)”이라고 하여 “그 글자는 옛 전자를 모방했다.”라고 하였으나 전자篆字에서는 한글 원형을 모두 찾기가 어렵다.

    일본 사학자 고쿄 기요히코吾鄕淸彦는 그의 저서 『일본신대문자神代文字: 대마도에서 발견』 에서 “아히루 문자와 한글이 친자親子 관계에 있다.”는 것을 논하면서 “아히루 문자는 실크로드계의 문자”라 기술하고 있다. 또한 “그런고로 가림다加臨多 문자 즉 원시 한글이 고조선에서 창작된 문자인 이상 한글계의 아히루 문자가 대마도에서 발견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고쿄 기요히코의 연구는 한자 이전에 문자가 우리나라에 통용되고 있었음을 알려 주고 있으며 세종대왕의 한글이 백지 상태에서 이룩된 것이 아니고 소위 한글의 전신인 원시 한글이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가장 오랜된 삼국유사 판본에는 ‘석유환국’ 부분의 국 자만 이라고 나와 있고, 그 뒤에는 일반적인 나라 국國이 또 나온다. 뒤에는 정자인 국國 자가 나오는데, 왜 굳이 석유환국昔有桓國 부분만 의 약자로 쓴 것인가. 애초에 가 因 자의 이체자異體字가 아닌가?
    反論
    이에 대해서는 『고조선 사라진 역사』 (성삼제, 2006)에 잘 서술되어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인 1904년 동경제국대학에서 발행한 『삼국유사』 에는 석유환국昔有桓國이라고 되어 있다. 그것은 2년 전 동경제대 사학과에서 기존에 있던 삼국유사 판본을 교정하여 발간한 것이다. 그래서 실수로 석유환국이라고 했을 확률은 적다.

    그런데 두 책 모두 사학과 대학원 과정 교재로 사용된 책인데, 이마니시 류는 그 책을 활용하지 않고 본인이 소장하고 있던 ‘임신가필본’을 축소해서 영인했다. 그것이 1921년 교토대학에서 발행한 『삼국유사』 인데, 당시 임신가필본(정덕본을 가필한 판본)은 덧칠한 티가 나고, 석유환인昔有桓因으로 되어 있다. 때문에 당시 최남선 선생 등은 석유환국을 석유환인으로 조작하려고 하는 의도가 보인다며 이마니시 류가 조작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강단사학에서는 조작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을 하고 있다. 삼국유사는 정덕본(조선 중종 임신년에 제작해서 임신본이라고도 하며 목판본이다)과 그보다 오래된 석남본(필사본)이 있는데, 더 오래된 석남본에서 환인의 약자로 보이는 글자()가 쓰여 있다는 것이다. 고려대에서 소장하고 있는 정덕본에는 囯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위서론자들은 정덕본보다 오래된 고판본인 석남본에 석유환국 부분에 라고 표기되어 있어서, 이것을 빌미로, 자는 因의 약자라며, 원래 환인이었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원래 목판본은 잘못해서 오탈자가 생기면 안 되므로 더욱 신중히 해서 실수가 적은 게 특징인 판본이다. 오래된 것이 석남본이라 할지라도 후에 나온 정덕본이 오히려 원본에 가까울 수 있다는 결론이다.

    게다가 고판본인 석남본의 석유환국 부분에 라고 적혀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하정룡, 이근식 공저인 <삼국유사 교감연구>에서는 분명히 이 나라 국國의 약자라고 했다. 게다가 고려대장경에는 자가 세 번 등장한다. 그리고 영어 번역도 함께 나오는데, 因은 cause, reason, by, because(of)라고 되어 있고, 口+土는 erect, proud, upright, bald라고 되어 있다. 단순히 를 因의 이체자로 보기 어려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물론 자와 因자가 같은지는 더 검토가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석유환인이든 석유환국이든 모두 역사 사실에 부합한다. 환국이라는 나라가 실재했다면 당연히 그 통치자인 환인의 존재도 성립하게 된다.

    환국, 배달국의 존재에 대한 역사 기록은 숱하게 존재한다. 한민족은 상고시대부터 환국, 배달, 조선으로부터 나라가 이어져 왔다는 분명한 국통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에 저항했던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환국, 배달, 단군조선을 우리의 뿌리 국가로 인식했다. 지금의 대한민국의 초석을 놓았던 상해 임시정부에서도 환국, 배달, 단군을 계승했다는 확고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민족은 처음 환국이 창립된 이래 단군 부여 삼한 삼국 고려 조선 및 대한민국을 거쳐 5천 년의 국가 주권은 한민족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한국 강토에 근거해 서로 물려주면서 큰 난리를 겪어도 우뚝하게 독립하였고 민족의 광채를 보전하며 백 번 전쟁에 분발하여 시종일관하였고 전 국가의 인격을 보전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3.1절 선언문 1942.3.1.)


    일본의 글자 조작질은 실제 역사를 신화로 돌리기 위한 사전 포석이었다. 이후 그들은 ‘단군신화’라는 프레임을 만들어 배달국, 환국도 함께 신화 속으로 날려 버렸다.

    ‘단군 이야기는 몽고 침입 시기에 국난 극복의 목적으로 일연 스님이 만들었다’는 주장은 망설에 가깝다. 일부 강단사학자들의 주장에는 학문적 양심이 없다. 침략자를 옹호하는, 원수에게 영혼을 파는 얼빠진 행위도 비일비재하다.

    사마천 『사기』 에는 환국, 배달에 대한 기록이 없다. 대종교에서 1909년에 배달이라는 나라 이름도 지어낸 것이다?
    反論
    중국 역사가들이 역사를 기록하는 세 가지 고유 필법을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고 한다. 중국에 영광스러운 일은 한껏 부풀려 쓰면서 수치스러운 일은 감춘다, 중국은 높이면서 주변 나라는 깎아내린다, 중국사는 상세히 쓰면서 이민족 역사는 간략하게 적는다, 표면적으로는 대의명분을 밝혀 세우는 역사 서술법이지만, 사실은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중화주의에 충실한 필법이다.

    자신들의 역사가 동이족에서 비롯되었다는 역사 콤플렉스를 이 춘추필법으로 덮으려 한 것이다. 사마천 이하 역대 중국의 사가들이 춘추필법에 의거하여 역사를 기록한 결과, 동북아 문명의 주체였던 한민족 역사는 중국 변방 오랑캐 족속의 하잘것없는 역사로 왜곡되고 말았다. 중국 역사 기록에도 ‘청구靑丘’의 기록은 등장한다. 청구는 동방의 나라라는 뜻으로, 치우천황께서 영토를 광대하게 넓히신 이후 옮기신 두 번째 수도의 이름이다. 배달이란 단어가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청구’를 통해 배달의 존재를 알 수 있다.

    또한 1920년대 발견된 홍산문화는 배달국으로서만 해석이 가능하다. 국가 형성의 기본 조건을 갖추고 있는 홍산문화를 설명하는 문헌이 다른 어떤 사서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고고학적 유물이 시간이 흐를수록 드러나며 『환단고기』를 점점 입증해 주고 있는 상황이다. 『삼국유사』 에는 요임금 시대에 단군조선이 건국되었다고 한다. 어떤 조직 체계가 없이 왕이 어느 순간 새롭게 나오는 게 아니다. 조직론적으로 보면, 앞선 국가 세력이 반드시 존재했다는 것이다. 또한 환국에 대한 명칭은 우리나라 다양한 고전에 많이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배달은 신시神市라는 명칭으로 많이 언급된다. (『환단고기』 역주본 해제 150쪽 참조)

    『환단고기』 에 365일 5시간 48분 46초를 1년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런 분초의 단위는 서양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反論
    환국의 중기 시대 이후라 할 수 있는, BCE 5000년경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유럽의 거석 문명, BCE 3500년경 지중해의 크레타섬에서 시작된 미노스 문명 등 고대 유럽 문명을 연구한 서양 학자들은, 고대인들이 지구가 1년 동안 자전하는 횟수가 365회인지 366회인지를 놓고 논쟁할 정도로 세밀한 천문 관측 기술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아냈다.
    4)


    作曆(작력)하사 以三百六十五日五時四十八分四十六秒(이삼백육십오일오시사십팔분사십육초)로 爲一年也(위일년야)하시니 此乃三神一軆上尊之遺法也(차내삼신일체상존지유법야)니라.
    (환웅천황이) 책력을 지어 365일 5시간 48분 46초를 1년으로 삼으셨다. 이것이 바로 삼신과 하나 되어 천상에 계시는 상제님[三神一體上尊]께서 남겨 주신 법도이다. ( 『환단고기』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위 내용으로 볼 때 배달국 시대에도 깨달음(上尊之遺法)을 바탕으로 한 천문학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고대인들은 또한 달과 태양의 크기도 측정하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도량형도 만들었다. 그들이 사용한 관측 단위는 지금과 다르지만, 그들이 잰 수치는 현대 천문학의 관측 결과와 거의 동일하게 나온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거석 유적지인 영국 스톤헨지의 거석들은 달과 태양이 지나가는 열두 곳의 주요 위치에 맞추어 정렬되어 있다. 이 사실은 고대인의 놀라운 천문 기술을 눈으로 확인시켜 준다. 태고 시대 인류는 신의 계시를 받아 내려 하늘과 직접 소통하며 천지광명 속에서 무병장수하는 삶을 추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연 탐구를 바탕으로 놀라운 수준의 과학 문명에 도달하였던 것이다. (『환단고기』 역주본 해제, 상생출판, 2012)
    4) 미노스인들은 원의 각도를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360도가 아니라 366도로 생각하였다. 영국의 거석문화에서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지구가 1년 동안 366번 조금 넘게 자전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1년의 길이는 365와 4분의 1일이지만, 실제로 지구가 그 시간 동안 자전하는 횟수는 366번이 조금 넘는다(크리스토퍼 나이트·앨런 버틀러, 『1세대 문명』, 30쪽). 지구가 공전 방향으로 자전하기 때문에 생긴 이 차이를 이미 수천 년 전에 고대인이 정확히 간파한 것이다.


    월간개벽. All rights reserved.

    2021년 06월 홈 | 기사목록 | 되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