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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인물탐구]

    창세역사 성인열전 | 신교神敎를 바탕으로 세워진 천 년 왕국 신라의 역대 제왕


    이해영 / 객원기자

    * 사로斯盧(신라)의 첫 임금은 선도산仙桃山 성모聖母의 아들이다. 옛적에 부여 황실의 딸 파소婆蘇가 지아비 없이 잉태하여 남의 의심을 사게 되었다. 이에 눈수嫩水에서 도망하여 동옥저에 이르렀다가 또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한辰韓의 나을촌에 이르렀다. 그때에 소벌도리라는 자가 이 소식을 듣고 가서 아이를 집에 데려다 길렀다. 나이 13세가 되자 뛰어나게 총명하고 숙성하여 성덕이 있었다. 이에 진한 6부가 함께 받들어 거세간巨世干이 되었다. 서라벌에 도읍을 세워 나라 이름을 진한辰韓이라 하였고, 사로라고도 하였다. ( 『태백일사』 「고구려본기」)


    천 년 제국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거세간



    고대 왕국 신라新羅는 서기전 57년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 거서간을 시조로 하여 서기 935년 경순왕까지 56세 992년간 존속했습니다. 이 박혁거세는 난생사화卵生史話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박혁거세는 기원전 69년에 태어났다고 합니다.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의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蘿井 옆의 숲에서 웬 말이 꿇어앉아 울고 있었습니다. 다가가서 보자 말은 홀연히 사라져 보이지 않고 큰 알만 하나 남아 있었고, 이 알에서 바로 혁거세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 알이 마치 박 같다고 하여 성을 박朴이라 하였는데, 이는 ‘밝다, 광명하다’에서 그 뜻을 취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5년 뒤, 용이 알영의 우물에 나타나 옆구리에서 여자아이를 낳으니, 곧 박혁거세의 부인이 되는 알영閼英입니다. 이 부분은 『삼국사기』에서 전하는 부분이고, 『삼국유사』에 오면 혁거세가 담겨 있던 알이 자주색이고, 알영의 몸매와 얼굴이 매우 아름다웠지만, 입술이 닭의 부리 같아 월성月城의 북천北川으로 데려가 씻겼더니, 그 부리가 떨어져 나갔다고 합니다.

    난생사화의 비밀
    사실 유전학적으로 알에서 사람이 태어날 수는 없습니다. 이런 난생사화卵生史話는 동북아시아 북방 민족 중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신라의 ‘박혁거세’, ‘석탈해’,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 그리고 다루지는 않았지만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 가야의 ‘김수로왕’ 등이 이런 난생사화의 주인공입니다. 이 난생사화는 동이족 공통의 개국사화開國史話이기도 합니다.

    동이족 상商나라(殷나라)의 시조 설契의 어머니 간적簡狄이 제곡帝嚳의 둘째 부인이 되어 세 사람이 목욕을 하러 갔는데, 현조玄鳥가 알을 떨어뜨려서 간적이 이를 삼키고 잉태해 설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베트남의 첫 왕국인 문랑국文郞國(BCE 2879~BCE 258)도 비슷한 난생사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난생사화는 천손天孫사화와 함께 자신들의 시조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인식의 산물입니다. 삼족오처럼 새를 하늘과 지상을 연결하는 신물로 보는 의식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박혁거세의 진짜 혈통은 과연 누구일까요? 누가 박혁거세의 알을 낳은 것일까요?

    박혁거세의 어머니 파소

    『삼국사기』를 대표 집필한 김부식이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겪은 일 하나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적혀 있습니다. 고려 예종 11년인 1116년, 김부식은 서기의 역할로 사신의 일행이 되어 송나라에 갔습니다. 이를 접대한 송나라 관반학사館伴學士 왕보王黼가 우신관佑神館에 있는 여신의 상을 보여 주면서, “이이는 고려의 신이며, 옛날 어느 제왕가의 딸이 남편 없이 임신해 사람의 의심을 받게 되자, 곧 바다를 건너 진한에 도착해 아들을 낳았는데, 곧 해동의 첫 임금이다. 제왕의 따님은 지선地仙이 되어 길이 선도산仙桃山에 있었다 하는데, 이것이 그 상像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삼국유사』에서는 선도산 신모가 바로 이분이며, 중국 황실의 딸로 이름은 사소娑蘇이고 어려서 신선의 술법을 익혀 동쪽 나라에 와서 살더니, 오래도록 돌아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요?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본기’에서 그 진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즉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어머니는 파소婆蘇입니다. 사娑와 파婆는 자형이 비슷하여 아마 오기誤記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한 무제가 우거를 무너뜨리고서 동북아 대천자가 되려고 했을 때, 북부여에서 갑자기 구국의 영웅이 튀어나옵니다. 앞서 살펴본 고두막한高豆莫汗입니다. 고두막한은 단군조선의 마지막 47세 고열가단군의 후손이라고도 합니다. 파소는 이 고두막한의 따님입니다. 고두막한은 4세 해우루단군을 압박하여 후기 북부여의 시조가 되어 북부여의 5세 단군이 됩니다. 그분은 호를 스스로 동명왕東明王이라 하였습니다. 즉 고두막한이 한나라 무제를 물리치고 나라를 구했지만, 동시에 북부여 왕조를 장악해 버렸습니다. 이때 북부여 왕조의 어떤 제왕의 아들하고 고두막한의 딸 파소가 연애를 해서 임신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 왕실에서 “왕통을 뺏겼는데 네가 이럴 수 있느냐” 하는 상황이 되니 거기에서 살 수가 없어 남쪽으로 내려오지 않았을까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일설에는 박혁거세의 아버지가 혹시 사로斯盧가 아니냐 하는 추정도 있습니다. 고주몽이 시조 할아버지인 해모수 단군의 고향을 따서 나라를 고구려라 했듯이, 아마도 박혁거세 어머니가 사랑한 왕자님의 이름이 사로여서 진한에서 수도를 서라벌徐羅伐로 하고, 나라 이름을 사로로 바꾸지 않았는가 하는 추정도 해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신라를 건국한 주체 세력은 단군조선의 진한 유민遺民 또는 북부여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경주 서북쪽에 위치한 선도산은 신라인에게는 더없이 신성한 산으로 존숭되었습니다. 선도산 정상 바로 밑 경주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는 지금도 선도성모仙桃聖母의 유적지와 함께 성모의 위패를 모신 성모사聖母祠가 있습니다. 신라 시대에 창건되었다는 성모사에서는 지금도 매년 음력 3월 10일 박혁거세의 후손들이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홍사한은鴻史桓殷』에서 전하는 박혁거세 혈통의 비밀



    위나라 제7세 왕인 안리왕 10년에 공자의 7세손인 공자순孔子順이 서문을 쓴 것으로 전해지는 『홍사한은鴻史桓殷』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후 대진국 대야발이 서문을 쓰고, 조선 시대 강릉에서 태어난 최면길崔勉吉이라는 이가 1691년 신묘년에 이 책을 초抄했다고 합니다. 이 책은 최면길의 서문과 공자순의 서문, 발해 대야발의 서문이 같이 실려 있습니다.

    이 책은 우리 상고사에서 주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단군왕검의 어머니는 웅녀가 아닌 ‘열유列兪의 딸 교웅蟜熊’으로, 단군왕검의 부인은 비서갑 하백의 따님인 ‘태원太源’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단군왕검의 고향이 천평天坪 즉 지금의 중국 연길시 국자가國子街(현 局子街)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박혁거세의 혈통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습니다. 즉 박혁거세는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의 딸 파소의 아들로 나옵니다. 이 파소가 아성산阿城山에 이르러 ‘선도마仙桃馬’를 얻어서 말을 타고 오상현五祥縣에 이르러 태백선주太白仙主 박원달朴元達을 만나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고 합니다. 천평에서 임신한 몸으로 배를 타고 해류를 따라 남으로 향해 양산촌에 이르자 산기가 있어 나정 숲 사이에서 혁거세를 낳게 되었습니다. 혁거세는 신라 6촌장의 우두머리인 소벌도리의 후원으로 13세에 등극하여 61년간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박혁거세 치세 동안 나라의 창고는 가득 차고 백성은 서로 존경하고 겸양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신라의 의미


    신라의 1세 박혁거세는 서라벌徐羅伐, 진한辰韓, 사로斯盧, 시림始林 등의 국호를 사용하였습니다. 이후 4세 석탈해 이사금 때에 시림에서 계림雞林으로 바꾸었습니다. 이 한자식 표기는 모두 ᄉᆞᄅᆞ의 다른 표기로 신라의 국호 ᄉᆞᄅᆞ는 ‘새로운 빛이 온 누리에 퍼지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최춘태, 「국호 신라에 대한 연구」, 2013). 이후 15세인 기림 이사금 때인 307년에 신라라는 국호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22세인 지증왕 때(503년) 지금까지의 여러 국호를 ‘신라新羅’로 통일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414년에 만든 광개토태왕 비문에 신라라는 명칭이 나옵니다. 신라의 뜻은 ‘덕업일신德業一新 망라사방網羅四方’입니다. 여기에는 ‘덕업이 새로운 나라, 밝은 햇살, 천지의 광명이 온 천하를 덮으소서‘라는 기도의 뜻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신교를 모체로 유불선을 통합한 신라의 제왕들


    신라는 신교를 모체로 해서, 유교와 불교 그리고 도교를 함께 융합하여 천 년 역사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이를 잘 보여 주는 게 신라 최고 문장가인 고운 최치원崔致遠이 쓴 「난랑비서문鸞郎碑序文」입니다. 여기에서 “국유현묘지도國有玄妙之道하니 왈풍류曰風流”라고 했습니다. 즉 나라에는 아주 현묘한, 지극히 신령스러운 도가 있는데, 예로부터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풍류라 한다는 것입니다.

    본래 동방 문화, 즉 단군조선의 문화 본성은 풍류도風流道라는 것입니다. 신도神道를 열어 인간의 밝은 본성을 회복하는, 신명과 하나가 되는 도, 만물과 하나로 화해하는 신명의 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신교문화의 전통에 따라 중심 세력인 6촌장이 박혁거세를 왕으로 모시고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2세 남해왕은 석탈해를 사위로 삼고, 중국 호칭인 왕 대신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이라는 호칭을 썼는데, 이 호칭은 전부 우두머리, 광명을 상징합니다.

    그 뒤를 이은 13세 미추왕은 김알지의 6세 후손으로 김씨로 왕이 된 최초의 인물입니다. 이후 17세 내물왕 때 김씨 왕위가 세습되었습니다. 23세인 법흥왕 때에는 이차돈異次頓의 순교 사건이 있습니다. 신라는 불교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3세기 초에 고구려 사람 아도阿道 승려가 내려왔지만, 신교의 우주광명 전통 사상과 새로운 불교 혁신 세력 사이에 끊임없는 충돌과 갈등과 대화가 있었습니다. 마침내 이차돈이 희생자로서 순교하고, 그 이후부터 불법을 국가 경영 정신의 근본으로 삼아 호국불교護國佛敎로 만들어 나갔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꼭 석가모니만을 중심으로 섬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미추왕 2년인 263년 아도화상은 자기 어머니 고도녕高道寧의 명을 받아서 신라로 왔습니다. 고도녕은 유명한 승려와 연애를 해서 아들을 뒀는데, 그 아들을 5세 때 출가를 시켰습니다. 그게 바로 아도화상입니다. 아들에게 “동국의 불법을 크게 흥왕하게 하는 성군이 나오니 거기에 가서 불교의 개조가 돼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도는 신라로 오게 된 것입니다. 신라로 온 아도는 공주님의 병을 고쳐 주고 신임을 받아, 절을 짓고 불교를 일으키려 했습니다. 그래서 지은 절이 바로 흥륜사興輪寺입니다. 흥륜사는 지금의 경주공업고등학교 자리에 있었는데 그곳이 신라 최초의 절터입니다. 그런데 이곳은 원형 불교, 즉 신교의 소도성지였던 천경림天鏡林이었습니다. 이를 『삼국유사』 「흥법」과 「탑상」 등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즉 우주광명 전통 신교문화의 성지, 천신 기도터인 소도蘇塗에 신라의 유력한 절들이 세워졌습니다.

    또한 신라 불교는 단순히 석가불을 중심으로 한 불교가 아닙니다. 신라의 유명한 화랑문화를 보면 화랑은 각자가 ‘미륵불의 화신’이라고 생각하여 미륵의 심법으로 미륵의 이상 낙원을 건설하는 주인공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도화상이 세운 신라 최초의 절 흥륜사에는 미륵부처님을 모셨습니다. 이는 『삼국유사』 「제 3권 미륵선화 미시랑 진자사」와 「탑상」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경주 흥륜사 승려 진자가 기도한 대상은 미륵부처님입니다. 신라 천 년 불교문화의 근본을 세우고, 삼국을 통일하는 역사의 추동력은 바로 화랑과 더불어 ‘미래에 이 세계를 근본적으로 혁신하고 개벽을 하는 도솔천 천주님 미륵불이 이 땅에 오신다, 미륵불이 이 땅에 오신다’는 믿음에서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라의 삼국통일 대의 제왕들과 그 한계


    27세인 선덕여왕 때 신라는 통일의 기반을 실제로 닦아 나갔습니다. 외적으로는 백제 무왕과 의자왕의 침입에 시달렸지만, 내적으로 김춘추와 가야계 김유신의 연합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처음에 자기들의 개인적 원한으로 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치고자 했습니다.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과 딸 고타소랑이 대야성 전투에서 백제의 윤충에게 죽게 됩니다. 김춘추는 사람이 지나가도 모를 정도로 넋을 놓고 하루 종일 울었다고 합니다.

    『환단고기』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김춘추는 고구려에 가서 연개소문을 만났는데, 연개소문은 ‘우리가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서 함께 다스리자’고 했는데, 김춘추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이후 김춘추는 당나라에 자기 둘째 아들 김인문을 보내 당과 외교를 책임지게 했습니다. 당 태종과 당 고종의 신임을 깊게 받은 김인문이 후에 죽어서 그 시신이 돌아오자 왕이 예로써 제를 지냈다고 합니다.

    신라는 진덕여왕 때부터 왕과 벼슬아치가 당나라 관복을 입고, 당 고종의 연호인 영휘永徽를 사용하였습니다. 김춘추는 대당 사대事大 이후 당 율령에 기초한 율령 체제를 확립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김춘추는 화랑도가 자발적으로 국가에 충성하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왕이 인재를 체계적으로 직접 뽑고, 기르고, 씀으로써 국력을 진작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제도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유학에 입각한 당나라의 국학國學을 수용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손자 대인 신문왕 2년에는 국학을 설치하고 관료 선발 부서인 위화부位和府에 장관 2명을 배치하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신라는 급속히 당나라 중심의 사대주의 역사의식으로 흘러가게 되었습니다. 김춘추는 29세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하고 660년 백제를 멸망시켰습니다.

    김유신은 가야의 왕손으로, 15세 때 용화향도龍華香徒란 화랑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용화龍華는 미륵불의 세상을 말합니다. 큰 뜻을 품은 김유신은 신인神人을 통해 기도하면서 하늘의 인증을 받았다고 합니다. 일설에 그는 천상 33천의 천신天神 중 한 사람으로 지상에 내려왔다고도 합니다. 김유신은 전생이 고구려의 유명한 점쟁이 추남이었는데, 억울하게 죽임을 당해 후에 대장이 되어 고구려를 멸망시키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합니다.

    이후 김춘추의 아들인 30세 문무왕 때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나라와 결전을 통해 부족하나마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왜 신라는 당나라를 끌어들여서 형제 국가인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을까요? 우선 수나라와 당나라는 선비족이 세운 국가이고, 신라 김씨 왕족은 바로 훈족, 흉노족이었습니다. 이처럼 신라는 북방 유목문화와 친연성親緣性이 있기 때문에 대화가 급속히 잘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동방 천자국을 지향한 당나라와 국가 이권에 상응하는 여러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우선 외세인 당나라를 끌어들여 형제 국가를 멸망시켰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특히나 본래 큰집인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이를 계승한 대진국(발해)과는 반 적대적 관계를 형성하여 북쪽과 남쪽 두 개 나라로 다시 대치한 미완의 통일이었기에 민족사적으로는 큰 아쉬움을 가지게 합니다. 이후 56세 경순왕 때 신라는 고려 왕건에게 항복해 나라를 바치면서 왕조가 마무리 되었습니다.

    <참고문헌>
    *환단고기 북콘서트 경주 편(2016.06.12, 경주화백컨벤션센터 대회의실)
    『역주본 환단고기』(안경전, 상생출판, 2012)
    『이덕일의 한국통사』(이덕일, 다산북스, 2019)
    『홍사한은』(반재원, 한배달, 2017)



    신라의 화랑과 세속오계의 원형
    신라 하면 떠오르는 인물들은 역시 화랑花郞입니다. 신라가 국력을 가장 강력하게 결집하고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 집단이 화랑으로, 그것은 이들 조직이 체계적이고 강력한 계율을 바탕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화랑의 원형은 배달의 제세핵랑, 단군조선의 국자랑 또는 천지화랑天指花郞, 그리고 북부여의 천왕랑입니다. 초기에는 원화源花라고 하여 남모와 준정이라는 두 아가씨가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런데 준정이 남모에게 술을 먹여서 강물에 빠뜨려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10대의 젊은 소년 중에 인간성이 좋고 용기와 의리가 있는 자를 추천받아 진흥대제 37년인 576년에 제도화, 조직화한 것이 화랑입니다. 그 책임자를 풍월주風月主라고 하였습니다.

    화랑이 삼신상제님을 수호하는 종교적인 집단과 더불어 군사적인 집단으로 성장해 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했던 요인은 세속오계世俗五戒라는 원광법사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원광圓光은 우주광명이라는 뜻으로 원광법사가 중국에 유학을 했는데, 학문이 얼마나 방대한지 유학에도 도통하였고 모든 외교 문서를 관장하였습니다. 이 원광법사에게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이라는 두 화랑이 찾아와 “우리는 속세의 사람인데 사군자와 교유하는 데 필요한 심신 수양의 계를 알려 주십시오”라고 청하자 원광법사가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불계로는 보살계가 있어 이를 십계로 삼고 있으나, 지금 세속에 오계가 있으니”라고 하면서 계율을 내려 줍니다. 즉 이미 전해 오는 오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유명한 세속오계가 바로 임금을 섬기되 충으로(事君以忠), 부모를 섬기되 효로(事親以孝), 친구를 사귀되 믿음으로 하라(交友以信), 그리고 살아 있는 것을 죽일 때에는 가림이 있어야 한다(殺生有擇)는 것과 싸움에 나아가서는 물러섬이 없어야 한다(臨戰無退)는 것입니다. 충忠, 효孝, 신信, 의義, 용勇으로 대변되는 이 세속오계는 유가에서 온 것이 아니라 신교 경당문화에서 내려왔습니다. 『환단고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도가 건립된 곳에는 모두 계율을 두었는데, 충忠, 효孝, 신信, 의義, 용勇이라는 오상의 도(五常之道)가 그것이다. 소도 곁에는 반드시 경당扃堂을 세워 미혼 자제로 하여금 사물事物을 익히게 하였는데, 대개 독서, 활쏘기, 말달리기, 예절, 가악歌樂, 권박(검술을 겸함)으로 육예六藝의 종류였다.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


    화랑 문화의 원형은 군인 문화가 아닙니다. 위에서 보이듯 문무를 겸전한 지도자들을 양육하는 소도·경당 문화가 바탕이 되었습니다. 환국, 배달과 이후의 낭가 사상, 즉 우주광명 인간의 도의 정신을 가진 완전한 인간들이 되고자 했던 인물들의 원형문화 정신이 근저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화랑의 전통은 다시 고려 시대의 선인仙人 또는 재가화상在家和尙으로, 윤관이 여진족을 정벌하여 동북 9성을 구축하려고 했을 때 별무반 중 항마군降魔軍으로, 대몽항쟁 때의 삼별초로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그 뒤 조선 시대에는 의병과 선비 정신으로, 대일 항쟁기에는 독립군과 광복군으로, 그리고 지금은 태을랑太乙郞과 삼랑三郎으로 한민족의 의식 속에 깊이 잠재되어 민족과 인류의 위기 때마다 유감없이 표출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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