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망친 재일 동포의 애환을 닮은 대서사시 파친코

[이 책만은 꼭]

작품 특징


원문은 영어로 되어 있어서 다시 한글로 번역해야 하는 수고로움은 있다. 하지만 매끄러운 번역과 특히 사투리 부분을 자연스럽게 번역한 부분에서 역자의 고충을 읽을 수 있다. 이 작품은 날카로운 분석력과 함께 감정에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담백하게 그려 내고 있다. 더불어 빠르게 몰입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 작품은 애플 TV에서 8부작 드라마로 제작되는데, 미국 이민 가족을 다룬 영화 <미나리>에 출연한 윤여정(선자 역), 정은채(경희 역), 이민호(고한수 역) 등의 배우들이 캐스팅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한류 열풍의 중심 문화 콘텐츠가 되리라 기대해 본다.

책 내용 돌아보기(줄거리)


1세대, 김양진, 김훈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도발적인 문구로 시작된 이 작품은 1910년 경술국치부터 1989년까지 4대에 걸친 재일 한국인의 이야기이다. 가난한 집의 막내딸 김양진은 돈을 받고 언청이에 절름발이인 김훈에게 시집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2세대, 김선자, 고한수, 백이삭, 백요셉, 경희
“여자의 인생은 고생길”이라는 말을 반복하면서도 그러한 인생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양진은 훈이와 함께 하숙집을 운영해 나가며 불평 한 마디 하지 않는다. 장애인과 산다는 멸시에도 굴하지 않고 온갖 궂은일을 다 하면서 유일한 자식이자 정상인으로 태어난 딸 선자를 묵묵히 키워 나간다. 부모의 살뜰한 보살핌과 사랑을 받고 자란 선자는 안타깝게도 엄마 나이 또래의 제주도 출신 생선 중매상 고한수의 유혹에 넘어가 그의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

하지만 고한수는 이미 결혼한 상태로, 그의 첩이 될 수 없어 결별을 택한 선자는 깊은 절망에 빠지게 된다. 그렇지만 하숙집에 손님으로 와 있던 온화한 목사 청년 백이삭과 결혼하여, 이삭의 형 요셉 부부가 사는 일본 오사카로 향한다. 요셉의 부인 경희는 불임으로 아이를 갖지 못하였지만 동서인 선자의 자식은 물론이고 동서의 늙은 어머니인 양진까지 보살핀다. 그리고 한때는 다정하고 책임감이 강했으나 원자폭탄 투하로 발생한 불의의 사고로 폐인이 된 남편 요셉을 돌봐야 하는 운명도 한 마디 불평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3세대, 백노아와 백모자수
일본 오사카에서 고한수의 핏줄인 아들 (백)노아가 태어나고, 이삭의 핏줄인 동생 백모자수(모세의 일본식 발음)가 태어난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노아는 모든 면에서 이삭을 닮았고, 모자수는 이삭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을 보이며 성장한다. 가난과 차별로 힘들게 살던 중 이삭은 신사 참배 문제로 교도소에 갇히고 고문의 후유증으로 죽게 된다.

남편을 잃은 선자는 온갖 차별과 냉대 속에서 김치와 설탕과자 노점상 등으로 가난을 견디며 두 아이를 키운다. 자신의 어머니를 닮은 선자를 사랑한 고한수는 선자가 일본에 도착한 이후부터 선자를 감시하며 남모르게 도움을 준다. 모자수와 노아는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 성을 가지고 있지만, 일본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조선인이라며 무시를 당하게 된다.

이에 두 아이는 현실을 다르게 받아들인다. 노아는 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환경을 극복하고자 공부에 파고들고, 심지어는 일본인이 되고 싶다는 자신만의 비밀을 간직하고 살아간다. 마침내 일본의 일류 대학인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지만, 자신의 후원자 한수가 야쿠자이자 자신의 친부임을 알고 나락으로 떨어진다. 노아는 탈출구라 믿었던 교육을 받았지만, 자신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만다.

반면 모자수는 조선계 일본인에 대한 경멸과 괄시에 폭력적으로 대응한다. 급기야는 학교를 그만두고 파친코 게임장에서 일하며, 본인 입으로는 ‘나쁜 조선인’이 됐다고 하지만, 범죄나 부정적인 거래를 피하고 정직하게 파친코를 운영해 나가 큰 부자가 된다. 하지만 부자가 되면 더 이상 차별받지 않을 거라는 모자수의 생각은 착각이었다. 모자수가 정직하게 파친코를 운영하든, 얼마나 많은 돈을 벌든 그를 바라보는 일본인들의 시선은 ‘더럽고 폭력적인 조선인 야쿠자’에 불과하였다. 그래서 모자수는 자신의 아들 솔로몬만은 그러한 차별을 받지 않기를 바라며 외국인 학교에 보내 미국 경영대학까지 졸업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4세대 백솔로몬
하지만 재일 외국인 백솔로몬은 아버지도 자신도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한국 국적을 갖고 살아가면서, 3년마다 지문을 찍고 외국인등록증을 갱신해야 하는 현실을 마주한다. 백솔로몬은 영국 회사 트래비스에 입사하지만, 일본인 상사 가즈의 배신으로 부당해고를 당하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백솔로몬은 자신이 차별받는 재일 외국인 신세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그 현실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안고 살아 나가고자 결심한다. 그래서 아버지 백모자수를 찾아가서 파친코에서 일하겠다고 한다. 백솔로몬은 다른 사람들의 경멸 어린 시선이나 차별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이 작품의 마지막에서 김선자는 남편 백이삭의 무덤을 찾아가고, 아들 백노아의 열쇠고리 사진을 그 아래 파묻어 놓고 일어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이 책에서 가장 기구하다고 할 수 있는 여성인 동서 경희가 기다리는 일상으로. 대한민국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이 유엔총회에서 말한 “삶은 계속 되니까. 함께 살아내자”는 메시지처럼.

주제로 읽어 보는 본문


이 작품의 주인공은 여성들이다. 남성은 보조적인 역할일 뿐이고, 생활을 이어 나가는 것도 작중 내용을 이끄는 것도 여성들이다. 작품의 주된 무대는 부산 영도와 일본 오사카 지역이다.

1. 여자의 운명은 고생길을 걷는 것인가?
여성 작가이기 때문인지 여성 시점으로 보는 공감과 연대가 잘 드러나 있다. 그리고 여자의 고단한 삶과 그로 인해 발생되는 원한을 말하고 있다. 증산 상제님은 “이때는 해원시대라. 몇천 년 동안 깊이깊이 갇혀 남자의 완롱(玩弄)거리와 사역(使役)거리에 지나지 못하던 여자의 원을 풀어 정음정양(正陰正陽)으로 건곤을 짓게 하려니와 이 뒤로는 예법을 다시 꾸며 여자의 말을 듣지 않고는 함부로 남자의 권리를 행치 못하게 하리라.”(증산도 도전 4:59:1~3)고 하셨다.

잘못된 위정자들의 대부분이 남자였다. 이에 대한 최대의 피해자는 국민이고, 여성들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도 국민이나 여성이 당하는 고난에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지만 그대로 강한 생명력으로 주도적인 삶을 살아간 이들 또한 여성이었고, 어머니였다.

선자가 일어나서 텔레비전을 껐다. 선자는 찻물을 끓이려고 부엌으로 가고 싶었다. “고생길이지.” 양진이 큰 소리로 말했다. “여자의 운명은 고생길을 걷는 거지.” “네 고생길이죠.” 경희가 고생이라는 말을 반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자는 평생 동안 다른 여자들한테서 여자는 고생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여자는 어린 소녀로, 아내로, 엄마로 고생하다가 죽는다는 소리였다. 고생이라. 선자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신물이 났다. 그 외에는 다른 게 없단 말인가? 선자는 노아에게 더 나은 삶을 선사해 주기 위해서 고생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아들에게 자신이 물처럼 들이마셨던 수치를 견뎌 내도록 가르쳤어야 했을까? 결국 노아는 자신의 출생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아들에게 고생이 닥칠 거라고 말해 주지 않는 게 엄마들의 잘못일까? (2권 278 ~ 279쪽)


2. 차별의 상징 오사카의 조선인 마을 이카이노(猪飼野, 돼지를 키우는 동네)와 마늘 자식의 비애
지금은 바뀌었지만, 오사카의 코리아타운인 츠루하시(鶴橋)의 옛 지명이 이카이노이다. 바로 돼지를 키우는 마을이라는 뜻이면서 판잣집에서 냄새나는 돼지와 함께 사는 조선인들을 비하하는 의미도 담겨 있다. 그래서 파친코가 가난과 범죄의 상징이라면, 이카이노는 일제강점기 억압받는 조선인들에 대한 일제의 횡포와 불평등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카이노는 일종의 잘못 만들어진 마을이었다. 초라하기 그지없는 판잣집들은 모두 똑같이 값싼 자재들로 엉성하게 지어져 있었다. ……. 집들은 거주자들이 값싼 자재나 주운 자재로 직접 지어 올려 오두막이나 텐트와 다를 바가 없었다. …… 넝마를 반쯤 걸친 아이들은 술에 취해 골목에서 잠든 남자를 무시한 채 술래잡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 선자는 요셉과 그의 아내가 얼마나 가난한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공장 감독이 이렇게 가난한 곳에서 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곳은 돼지들과 조선인들만 살 수 있는 곳이야.” 요셉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 고향 집 같지 않지?” …… “일본인들은 괜찮은 땅을 조선인들에게 임대해 주지 않아.” (1권 160쪽)


노아는 별다른 불평을 하지 않았지만 김치 냄새 때문에 누구보다 더 큰 고통을 받고 있었다. 원래도 다른 조선 학생들처럼 놀림을 받고 괴롭힘을 당했지만, 이제는 옷에서 항상 양파와 고추, 마늘, 새우젓 냄새가 났기 때문에 선생님도 노아를 교실 뒤쪽에 앉혔다. 그곳은 집에서 돼지를 키우는 조선 아이들이 앉는 자리였다. 집에서 돼지와 함께 사는 아이들은 학교에서 돼지라고 놀림을 받았다. 일본 이름이 노부오인 노아는 돼지 아이들과 함께 앉았고, 마늘 자식이라고 놀림을 받았다. (1권 254쪽)


3. 나는 누구인가? - 창씨개명
일제강점기 말엽 일제는 우리 성명姓名을 일본식인 씨명氏名으로 바꾸게 하였다. 여기서 성은 출신 종족명이고, 씨는 그 사람 혹은 그 사람의 조상이 영유했던 분봉지를 의미한다. 우리나 중국은 이런 개념이 통합되었지만, 일본은 이를 구분하였다. 일본에서 성은 그들의 왕이 내려 주는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일본 사람은 성이 없고 씨만 존재한 것이다. 우리와는 그 개념이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그런데 일제는 조선을 완전 합병한다는 취지로 말하지만, 실제로는 확대되는 전쟁에 조선의 청년들을 동원하고자 하는 의도가 강했다. 그리고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희석시켜, 독립에 대한 의지를 약화시키려 하였다. 그리고 창씨개명을 거부한 이들에게는 교육도 직장도 없게 하는 불이익 조치를 내렸다. 일본은 우리의 국권과 영토를 빼앗고, 인명을 살상하고, 역사를 뿌리째 뽑고, 왜곡 날조했다. 여기에 더해 우리의 성씨를 말살하여 정체성을 없애려고 하였다.

식민 정부의 강요로 조선인들은 이름을 적어도 두세 개는 가지고 있었다. 고향에서 선자는 자신의 신분증에 적힌 일본 이름, 그러니까 가네다 준코라는 이름을 쓸 일이 거의 없었다. 학교에 다니지도 않았고, 공적인 업무를 볼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선자는 김씨 성을 갖고 태어났지만, 여자가 남편의 성을 따라가는 일본에서 선자의 이름은 백선자였고, 보쿠 선자로 번역되었다. 신분증에 적혀 있던 이름도 반도 준코로 바뀌었다. 조선인들이 일본식 성을 골라야 했을 때 이삭의 아버지는 조선어로 반대라는 말과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반도라는 성을 택했다. 그렇게 해서 일본의 창씨개명 정책을 조롱했던 것이다. 경희는 그 모든 이름들이 머지않아 정상으로 돌아갈 거라고 확신했다. (1권 198 ~ 199쪽)


4.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 - 원폭 투하와 희생자들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는 원자폭탄 ‘리틀 보이’가 투하되었다. 모든 것을 무無로 되돌리는 엄청난 폭발의 현장은 일본인뿐 아니라 많은 조선인들도 희생시켰다. 그 뒤 8월 9일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이어 일본은 항복하였다. 히로시마의 원자폭탄 투하 지점은 전략 전술적인 여러 가지 요소를 감안해 태전천太田川 위의 상생교相生橋로 정해졌다고 한다. 미국이 상생을 뜻을 알고, 가장 상극적인 사건이 모두를 살리는 일이라는 취지로 목표 지점을 삼았을지는 의문이다. 두 번의 원자폭탄 투하로 약 15만 명가량이 죽고, 방사능 피폭에 의해 35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 작가는 개인의 가족사 중간중간에 역사적인 사건들을 집어넣어, 역사의 큰 수레바퀴에 우리의 삶이 어떻게 뒤틀릴 수 있는지 보여 준다.

경희가 천천히 들것을 향해 다가갔다. 경희는 요셉의 화상 입은 모습을 보자마자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폭탄 투하에 관한 끔찍한 소식을 들었지만 경희는 요셉이 살아 있다고 믿었고, 자신에게 소식도 알리지 않고 죽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 경희가 여전히 요셉에게 시선을 돌리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요셉의 입과 뺨은 동물에게 잡아 뜯긴 것처럼 반쯤 사라지고 없었다. 요셉은 가족을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던 사람이었고, 가족을 위해 돈을 벌러 나갔기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한 것이었다. (1권 334 ~ 335쪽)


5. 역사의 미아, 재일 조선인 - 경계인의 삶
재일 교포들은 정당한 세금과 사회보험료를 내고 4대에 걸쳐 살고 있지만, 참정권이 없다. 소설에서 백솔로몬과 결혼한 후 일본에서 살려고 했으나, 포기하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재미 교포인 연인 피비는 국적을 구분하는 일본의 행태에 대해서 분개한다. 그리고 백모자수의 두 번째 부인인 일본인 아내 에스코조차도 14살 아들 솔로몬이 외국인등록증을 발급받기 위해서는 지문을 날인하고, 등록증을 목에 걸고 다녀야 함에 분개한다. 지금은 재류카드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외국인등록증은 조선 출신 재일 한인들이 한반도의 남과 북은 물론이고 일본으로부터도 배제당해 어느 쪽 국민도 아닌, 난민임을 의미한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에 비로소 ‘한국’이라는 국적이 생겨났다. 하지만, 일본에 귀화하지 않은 재일 교포 중에는 ‘조선인’으로 불리기를 원하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분단된 조국이 아닌 본래 한민족 그대로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본에 사는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여행을 할 수 없었다. 아무런 문제없이 재입국 가능한 일본인 여권을 구하려면 일본 국민이 되어야 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모자수가 아는 사람 중에 일본 국민이 되려는 사람도 없었다. 그게 아니면 민단을 통해서 남한 여권을 구해 여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한민국과 연관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가난에 시달리는 그 나라는 독재자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니까. 북한과 연관된 조선인들은 어디에도 갈 수 없었다. 물론 몇몇 사람은 북한으로 여행을 갈 수 있었지만 말이다. 북한으로 돌아간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었지만 일본에는 남한보다 북한과 연관된 국적을 소지한 조선인들이 아직 더 많이 있었다. (2권 165쪽 ~ 166쪽)

“잘 들어,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이 나라는 변하지 않아. 나 같은 조선인들은 이 나라를 떠날 수도 없어. 우리가 어디로 가겠어? 고국으로 돌아간 조선인들도 달라진 게 없어. 서울에서는 나 같은 사람들을 일본인 새끼라고 불러. 일본에서는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아무리 근사하게 차려입어도 더러운 조선인 소리를 듣고, 대체 우리 보고 어떡하라는 거야? 북한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굶어 죽거나 공포에 떨고 있어.” (2권 220쪽, 모자수가 하루키에게 하는 말)


6. 일명 ‘언청이’와 ‘파친코’에 담긴 의미는?
유전병인 입술갈림증, 즉 ‘언청이’는 격동의 우리 근대사 속에서 한국인이면 누구나 숙명적으로 지니고 태어나게 되는 피할 수 없는 기형적인 삶의 상징처럼 보인다. 즉 입술이 갈라지면 발음이 새기 때문에 말을 잘 하지 못하는데, 이 또한 일제 강점으로 인해 국제 사회에서 자신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한국인이 겪어 온 운명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선자의 아버지 김훈은 신체적 불구지만, 심성이 착하고 부인 양진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긴 인물로 우리 한민족의 어진 심성과 아버지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책 제목인 ‘파친코’는 운명을 알 수 없는 도박이라는 점에서 재일 동포들의 삶을 상징한다. 뜻밖의 횡재를 할 수도 있지만, 일시에 모든 것을 잃고 파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파친코 운영은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안겨 줄 수 있으나 폭력 조직인 야쿠자와의 연관성 때문에 폭력적 이미지가 강하다. 차별과 학대로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없는 재일 동포들은 이 파친코 사업에 뛰어들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파친코는 돈과 권력과 신분 상승을 가져다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몸이 불편했던 아버지는 자기보다 더 가난하게 자란 엄마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겼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적에는 하숙집 사람들에게 식사를 준비해 주고 난 후, 세 식구가 나지막한 상 앞에 앉아 다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아버지는 여자들보다 먼저 먹을 수 있었지만 늘 함께 먹겠다고 했고, 다른 집 남자들처럼 상을 따로 차려 주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엄마가 자기만큼 고기와 생선을 먹고 있는지 확인했다. 더운 여름에는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수박을 먹여 주겠다고 수박 밭을 일구었고, 매년 겨울이 돌아오면 가족들이 입을 외투 안에 채워 넣으라고 깨끗한 솜도 잊지 않고 사 두었다. 아버지는 혹시라도 솜이 부족하면 자기 옷에는 솜을 새로 채워 넣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니한테는 세상에서 젤 상냥한 아부지가 있다 아이가.” 엄마는 종종 이렇게 말했고, 선자는 부잣집 아이가 자기 아버지의 수북하게 쌓인 쌀 포대들과 금반지를 자랑스러워하는 것처럼 아버지의 사랑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1권 117쪽)

장로교회 목사였던 아버지는 하나님의 의도를 믿었지만, 모자수는 인생이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불확실성에 기대하는 파친코 게임과 같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희망의 여지가 남아 있는 게임에 손님들이 빠지는 이유를 모자수는 이해할 수 있었다. (2권 95쪽)

“조선인들에게는 일반적인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아. 너희 아버지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파친코를 선택한 게 분명해 ……. 어이, 컬럼비아 대학생 청년, 사실 너도 고용해 줄지 의심스러워. 일본의 많은 곳에서는 아직도 조선인들을 교사와 경찰, 간호사로 고용하지 않아. 넌 돈을 많이 버는 데도 도쿄에서 방을 빌릴 수도 없잖아. 빌어먹을 1989년!” (솔로몬의 상사 가즈가 솔로몬에게 하는 말 중에서, 2권 327쪽)


이 책을 읽은 감상


이 책을 읽고 나면 한동안 마음이 먹먹해질 것이다. 재일 교포뿐 아니라 해외에 있는 동포들의 고되고 힘든 삶이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잘못된 위정자들의 역사는 일반 사람들의 삶을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도움 주지 않는 게 현실이었다. 이것을 시대를 잘못 타고난 팔자나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 버리기에는 그들의 상처가 심히 깊다. 그래도 그들은 꿋꿋이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있다.

우리는 이들의 삶과 역사를 읽고 이해하는 한편으로, 분노하고 성찰하는 기회도 가져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전쟁 범죄와 차별 등의 문제에 대해 반성과 사과를 하지 않는 자들의 불의함에 대해서도 엄중히 따져 물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소장해 두고 읽으며 많은 이들과 공감하고 인식을 함께할 가치가 있는 책이다.

저자 소개 | 이민진
제2의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의 저자)이라고 불리는 이민진은 함경남도 원산 출신의 아버지와 부산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징병을 피해 남쪽으로 홀로 내려오고 그 뒤 분단으로 가족을 보지 못한 전쟁 피난자였다. 어머니는 고아들을 돌보는 선교사의 딸이었다. 1970년대 중반 작가가 7살 때 서울을 떠나 뉴욕에 정착하였다. 미국식 이름 대신 한국 이름을 고수하였다. 자신의 또 다른 저서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의 주인공 케이시 한처럼 뉴욕 퀸스에서 이민 생활을 시작했다. ‘쥐가 나오는 방 한 칸짜리 아파트에서 다섯 식구와 함께 살았던’ 가난한 기억을 가진 이민진은 휴일 없이 일하는 부모의 뒷바라지를 받으며 성장하였다. 명문 예일대 역사학과를 나오고 조지타운대 로스쿨을 졸업한 뒤 2년간 기업 변호사로 활약한 그의 삶은 한인 이민 사회의 성공 모델이다.

건강이 나빠져 변호사 일을 그만두고 고교 시절부터 재능을 보였던 글 쓰는 일을 시작하였다. 미국인으로 살고 있는 이민진의 소설적 뿌리는 이민을 토양으로 뻗어 나갔다. 일본계 미국인 남편을 만나 재일 교포에 대한 차별적 호칭인#‘자이니치’에 대해서 좀 더 잘 알게 되었다. 일본계 미국인인 남편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는 것 자체도 한 편의 드라마라고 볼 수 있다. 작가가 1989년부터 구상하여 30년의 시간을 들여 만들어진 『파친코』는 그의 삶을 다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는 한 강연에서 엘리트 역사가들은 이들을 조명해 주지 않았지만, 이들의 안타까운 삶을 알리는 것이 역사학도의 소명이라고 밝히고 또 다른 강연에서는 “나는 우리 한국인이 영웅적이고 비극적이며, 로맨틱하고, 오랜 고통을 겪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 한국인이 강력하다고 믿는다. 이 책은 너를 위해, 우리를 위해 썼다”고 밝히며 청중의 심금을 울리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