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칼럼 | 하나의 중국과 소수민족 정책(2)

[칼럼]

김선주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소수민족 정책의 역사적 배경


중국의 역사는 다수민족인 한족漢族과 소수의 이민족異民族 사이에 벌어진 지배와 통치의 교체사라고 볼 수 있다.

현재 소수민족 상태로 생활하고 있는 민족의 대부분은 원래 중국의 주변 민족이었고, 하夏·상商·주周 시기에 한족의 중국은 황하黃河 지역만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족의 세력이 팽창되어 감에 따라서 주변 민족과의 충돌은 불가피하였고, 이에 따라 중국 대륙의 역사는 한족과 주변 민족 간의 끊임없는 갈등으로 점철되었다.

중국은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유구하고 광활한 영토를 소유한 나라이면서, 12억이 넘는 인구를 가진 다민족 국가라는 특성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 찾아보기 드문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특성은 구체적으로 중국 한족의 소수 이민족 정책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1949년 10월 1일 건국을 선포한 중화인민공화국은 소련의 지원을 받은 몽골 공산당에 의해 독립된 외몽골과 국민당의 통치를 받는 대만을 제외한 과거 청조淸朝의 영토를 대부분 계승하였고, 이에 따라 중화인민공화국은 이 영토에 속하는 광범한 소수민족을 어떻게 통합할 것인가의 문제에 직면하였다.

이에 중국은 단 하나의 중국이라는 통일 정책을 시행하고, 정권의 안정과 영토의 안정을 꾀하기 위하여 국내적으로는 분열의 소지가 많은 소수민족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전통적으로 중국은 소수민족이 많이 거주하는 변방 지역에 대해서 지배권을 주장하기는 하였지만 직접적인 방식보다는 상징적이거나 간접적인 방식에 의해 이들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청조의 붕괴 이후 근대국가의 건설을 지향하는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은 모두 이들 지역에 대한 보다 직접적인 지배를 선호하며 강한 중앙집권적 지향을 보였다.

이는 근대화를 위해서 정치, 경제, 사회적 통합을 강화시킬 필요에 의한 것일 뿐만 아니라 서구 열강의 아시아 진출과 같은 국제 환경 변화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소수민족 정책의 변천 과정


중국과 소수민족의 관계는 입장의 뚜렷한 변화를 기준으로 볼 때 총 네 가지의 시기로 구별할 수 있다.

① 1949~1959년
② 1959~1966년
③ 1966~1976년
④ 1979~현재이다.

첫 번째 시기인 1949~1959년 시기는 중국 공산당 내부의 불안정성이 존재하면서 소수민족 정책에 대해서는 구체적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중국 공산당의 소수민족 정책은 “선언적 특징과 부분적 실시”라는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각 소수민족의 상황에 따라 정책이 결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신新중국이 들어선 이후 소수민족은 새로운 통치의 대상으로 등장하였으며 이들의 주요 거주 지역에 대한 영토적 통합을 완성하고 중앙정부에 대한 구심력을 강화하는 것이 민족 정책의 목표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 공산당 초기에 결의한 대로 소수민족에게 자결권을 인정하고 그들의 분리를 승인하는 것은 중국의 국가 이익이나 정책 목표와 상치되는 것이었다. 때문에 중국 지도부는 기존에 주장되어 왔던 자결권과 연방공화국 구상을 대신할 새로운 민족 정책이 필요했으며 그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민족구역자치民族區域自治’의 실시라 할 수 있다.

민족구역자치는 이전까지 표방되던 민족자결권의 인정과 연방제 국가 수립에 비하면 소수민족의 권리가 상당히 후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일차적으로 구역자치 제도를 통해 분리 독립의 가능성을 제한하면서도 소수민족들이 독립국가 건설을 요구하지 않는 이상 그들의 정체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특히 언어, 문자, 종교, 풍습 등 문화 부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민족 간부 교육에 있어서도 매우 적극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언어·문자 사업의 경우 중국 정부는 소수민족 고유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 자유를 보장하였으며, 문자 사업에 있어서도 문자가 없거나 불완전한 민족의 경우 민족 문자를 갖도록 하는 문자 창조·개혁 사업을 전국적으로 실시하였다.

두 번째 시기인 1959~1966년 시기의 경우에는 정책 측면에서 급격한 변화를 보였다. 민족보다는 계급투쟁적인 입장을 더욱 강조하였고 소수민족의 특성과는 관계없이 획일적인 정책에 머물렀다.

이 시기 민족 정책의 기본적 논리는 민족 문제의 본질은 계급 문제라고 하는 원칙이었으며 투쟁의 형태를 통하여 현존하고 있는 민족 문제를 해결하려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반란 민족 집단에 대해 무력 진압을 수행하는 한편 행정 단위를 개별 민족 지역으로 확대, 정리하여 원활한 민족 관계의 조정을 위해 힘썼다.

이와 함께 전 민족 집단에 대한 사회주의 교육의 확대를 통하여 민족 통합과 단결을 빙자한 대륙의 통일화를 도모하려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1966~1976년, 즉 문화혁명文化革命 시기에는 다시 한번 건국 초기의 유연한 소수민족 정책이 무산되고 한족을 중심으로 한 일률적인 기준이 적용된다.

즉 대한족주의大漢族主義에 입각한 애국주의를 주창한다. 구체적으로 소수민족의 전통적 문화를 효과적으로 파괴하였고, 지방 민족주의를 탄압함으로써 이후 중국의 정책이 보다 효율적으로 시행될 수 있었다.

이는 문화대혁명의 10년 동안으로 민족자치제의 폐지로 요약되며, 이 시기에 중국은 민족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것은 각 민족 내부에 반동 세력이 잔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민족 문제의 해결은 계급투쟁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이데올로기에 입각하였다.

4인방의 주도하에 지방 민족주의의 청산이라는 명목으로 민족 문화, 습관, 민족 언어와 문자, 민족 대학 등을 모두 폐지하고 모든 소수민족 지구를 하나의 기준 아래 표준화시키고 동질화시키면서 민족 차이를 부정하고 강압적인 민족 동화, 급속한 한족으로의 동화를 추진하였다. 그 결과 소수민족 주민의 대부분이 심한 박해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1979년 개혁改革·개방開放 이후에는 실용주의實用主義라는 대전제에 맞춰 소수민족 정책의 근본적인 목적과 방식이 점진적인 화합으로 변화한다. 하지만 개혁 개방은 중국 연안 지역에 급속한 경제 발전을 추구하면서도 소수민족이 대부분 살고 있는 내부 지역에는 그 효과가 미치지 못함으로써 극심한 지역 격차를 보였다.

이 당시는 모택동毛澤東 사후에 등장한 등소평 정권이 실용주의 노선을 기반으로 사회주의 현대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4개 현대화 노선을 추진한 시기였다. 그로 인해 중국 내에서는 체제의 개편 작업이 대대적으로 시행되었다.

이와 같은 국내 정치 환경의 변화는 소수민족 지구에 대한 관심과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키게 되었다. 기존의 급진적이고 배타적인 동화 정책으로부터 점진적으로 융화되는 정책으로 제도화하려는 방향을 모색하게 되었고, 특히 중소분쟁中蘇紛爭 이후 안보 영역의 중요성 증대와 소수민족 지구의 경제적 가치의 증대는 소수민족 정책의 제도화를 추진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러한 중국의 소수민족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정책의 전환은 모택동 사망 1년 전에 채택된 1975년의 헌법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다. 이 헌법에 반영된 소수민족 정책에 대한 입장은 문화대혁명 이전의 내용으로 복원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렇듯 중국은 각 민족이 공동으로 이룩하고, 동시에 여러 가지 민족 문화가 융합됨으로써 오늘의 찬란한 중국 문화를 이루었다. 하지만 정치, 경제적으로 민족 간에 많은 격차가 발생하면서 여러 가지 점에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소수민족은 전체 인구의 약 8%에 불과하지만 대부분 변방 지역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국가의 안보라는 외적 측면과 국가적 통일이란 내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작용을 하고 있으므로 중국 정부도 공화국 성립 초기부터 많은 배려와 정책적 고려를 하고 있다.

소수민족 정책의 지향점은 ‘하나의 중국’


중국 정부가 추진하는 소수민족 정책의 기본적 인식 바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중국 정부의 소수민족에 대한 기본 방침은 사회 안정이다. 내적으로 국가 사회의 진보와 경제의 발전, 그리고 국가적 통일을 이루는 데에 소수민족 지역의 안정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기본 인식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중화인민공화국 초기부터 당정 최고 지도자들은 이에 대한 언급을 계속해 왔으며, 정책적으로도 가능하면 소수민족 사회의 안정에 방해가 되는 일체의 요인을 제거하고 안정에 도움이 되는 각종 우대 정책을 채택한다는 방침이다.

둘째, 소수민족 사회의 안정을 위해 중국 정부가 내세운 구호는 민족 대단결이다. 민족 평등과 자치의 권리를 매우 중요하게 주장하는 소수민족의 민족적 이익은 경제적 이익을 획득하는 데 있으므로, 이를 위한 여러 가지 우대 정책을 통해 소수민족들로 하여금 심리적 안정을 얻도록 하여 민족의 대단결을 유도한다는 정책이다.

아울러 민족 대단결을 위해서는 내적인 동요의 진정과 외적 자극의 차단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이에 따라 최근 일부 소수민족 사이에 유행하는 범이슬람주의와 범투르크주의에 대해 중국 정부는 이를 민족 분열 음모로 규정하고 강력한 통제를 실시하고 있으며, 한편으론 민족의 종교, 자유, 민주, 인권을 최대한 보장하고 각종 경제적 혜택을 부여함으로써, 당근과 채찍의 두 가지 수단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

셋째, 민족 단결을 통해 중국 전체의 발전과 이에 기초한 소수민족 사회의 성장을 촉진한다는 방침이다. 소수민족들은 흩어져 살지만 한 소수민족 사회의 진보와 발전은 연쇄반응을 일으켜 다른 소수민족 지역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낙후한 지역에 대한 집중 지원과 성장력 제고는 중국 정부가 추구하는 개혁 개방과 실질적인 연관 관계를 맺는다. 또한 소수민족은 외국과의 교류에 유리한 지정학적 조건을 갖추고 있으므로 중국 정부는 경제 방면에서 이들의 대외 교류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그 예로 재중 교포와 한국과의 관계를 말할 수 있으며, 20여 개 민족이 동일 민족의 국가들과 국경을 나란히 하면서 실제로 그 나라들과 굳건한 경제 관계를 맺고 있다.

넷째, 중국 정부는 소수민족의 경제 성장 방향을 중국의 기본 방향인 시장경제를 수용한 사회주의의 길로 상정한다.

소수이지만 어떤 민족의 지역은 아직도 수렵 경제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어떤 민족은 유목민족 경제 유형을 보유하고 있고, 어떤 민족은 농업 경제 유형에 처해 있다.

중국 정부는 이들을 사회주의 개혁 개방의 길로 이끌기 위하여 경제 방식의 변천을 꾀하고 있는데, 이 방침에 순응하여 빨리 변신하는 민족일수록 시대에 앞장서 갈 것이다.

다섯째, 중국 정부는 소수민족의 독특한 전통문화와 습속, 민족의식, 종교 등을 그대로 유지시켜 한편으로 다양한 문화유산의 정립과 상품화를 꾀하고, 한편으로 민족 단결의 도모와 사회 안정의 유지를 꾀한다.

이렇게 중국은 각 민족의 화합과 단결에 기초한 중화민족론을 표방하고, 중국의 헌법 또한 이런 취지에서 민족 차별로 인한 갈등의 해소와 민족 분리주의에 따른 소요를 불식하는 것이 민족 정책의 핵심임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제도적인 보장에도 불구하고 중국 내 소수민족이 거주하는 지역들은 단지 명목상의 자치지역일 뿐이다.

자신들의 이름을 딴 자치지역에서 살고 있는 소수민족들은 지방정부와 당 조직에 많은 대표들을 두고 있지만, 한족이 일반적으로 최종적인 통제를 하고 있으며 다양한 통제 전략을 수립하여 소수민족들을 규제하는 등 한족 중심주의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또한 소수민족에게는 계획 출산의 완화, 명문 대학 진학의 배분, 취직상의 혜택 등의 우대 조치를 취하기도 하지만 소수민족이 중앙 정계에 진출할 수 있는 확률은 대단히 희박한 실정이다.

결론적으로 중국 정부의 소수민족 정책이 외형적으로 그들이 표방하는 것과 같이 소수민족의 결집이나 민족의 정체성 확립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기보다는, ‘하나의 중국’을 겨냥한 한족의 제한적인 배려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김선주金善珠
필자약력 : 臺灣 國立臺灣大學 사학과 歷史學硏究所 졸업(文學博士)
중국 고대법제사 전공.
주요 논저로는 「秦律의 형성과 발전」, 「秦始皇의 법령통일에 대하여」, 「중국신화상에 나타난 여성상 - 娥皇과 女英을 중심으로」, 『인류문명의 뿌리 東夷』, 『홍산문화』 등이 있고, 역저로는 『중국법제사』 등이 있다.
현재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인문사회과학부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