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과 무극대도 | 주역 쉰여덟 번째 기쁨으로써 백성들에게 솔선하는 중택태괘 ䷹

[기고]

못 속에 기쁨이 담겨 있으니


위아래로 거듭[重]하여 연못[澤]을 뜻하는 태괘[兌,☱]가 있는 것을 중택태괘重澤兌卦(䷹)라 합니다. 위아래로 연못이 거듭 있는 중택태괘는 기뻐한다는 태괘兌卦(☱)가 상하로 있는 중복괘입니다. 왜 태兌 자가 ‘기뻐하다(說)’의 뜻일까요? ‘兌=八(사람이 입을 벌려 웃으니 입김이 나누어지는 모양으로 기뻐하며 웃는 모습)+口(사람의 입)+儿(사람의 다리)’로서 여러 한자와 뜻이 합성된 회의會意문자이기 때문입니다.

커다란 연못(澤)에는 하루살이도 있고 개구리, 뱀, 물고기와 여러 풀들도 있듯이 온갖 생명체를 다 포용하여 키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못 택澤 자가 들어간 ‘혜택惠澤’, ‘덕택德澤’, ‘은택恩澤’ 등은 자연이나 제도나 사람이 베풀어 준 은혜나 도움을 뜻합니다. 이처럼 ‘택澤’은 만유의 생명수를 공급하여 삶의 원동력이 되므로 생의 기쁨을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괘상卦象을 봐도 태상절(兌上絶,☱)은 물이 가득 찬 연못에 맨 위에 있는 상효上爻가 벌어져서 바람에 출렁거리는 모습으로, 음효(⚋) 하나가 두 개의 양효(⚊) 위에서 입을 벌리고 웃으며 기뻐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태괘는 사람으로는 바람에 뒹구는 나뭇잎만 봐도 깔깔거리며 웃는 소녀少女와 막내딸을 상징합니다. 방위로는 서쪽, 계절로는 결실기인 가을철에 해당하며 후천後天을 상징합니다.

☯ 괘사
兌(태)는 亨(형)하니 利貞(이정)이니라
兌는 형통하니 바르게 함이 이로우니라.


☞ 태는 형통하니 바르게 함이 이로우니라(兌亨利貞): 사람은 기분이 좋으면 말이 많아지고 소리 내어 웃으며 기뻐하는데 모든 것이 입(口)과 관련이 있습니다. 태괘(☱)는 위에 있는 음 하나가 아래 두 양을 기쁘게 해 주므로 형통한 것이죠. 하지만 기쁘고 형통한 것도 남에게 피해나 고통을 주면서 느끼는 기쁨과 형통이라면 이롭지 못한 것입니다. 진정한 기쁨이란 나만이 즐기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즐기는 여민락與民樂의 마음이라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주역본의周易本義에서는 “태는 기뻐함이라. 한 음이 두 양의 위로 나아가니 기쁨이 외면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 상象은 못[澤]이 되니 만물을 기쁘게 하는 모습을 취하였고, 감수坎水가 아래로 흐르는 것을 막은 상을 취하였다. 태괘의 체가 강剛이 가운데 있고 유순한 것이 밖에 있으니, 강건함이 가운데 있기 때문에 기뻐하고 형통하며, 유순함이 밖에 있기 때문에 정貞함이 이로운 것이다. 기뻐함은 형통할 도道가 있으나 망령되이 기뻐함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그 점占이 이와 같은 것이다. 또 유순함이 밖에 있기 때문에 기뻐하고 형통함이 되고, 강건함이 가운데 있기 때문에 정貞함이 이로우니 또한 한뜻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공영달孔穎達의 소疏에서도 “태는 기뻐함이라. 「설괘전」에 이르길 ‘만물을 기쁘게 하는 것은 못[澤]보다 더 기쁜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태괘는 못을 형상한 괘이다. 고로 태兌로 괘의 이름을 삼은 것이다. 못은 만물을 적셔 주어 자라게 하니 만물이 모두 기뻐하는 것이다. 이를 인사에 적용하면 인군이 은혜를 가지고 백성을 길러 주어서 백성들이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는 것과 같다. 은혜를 베풀어 백성들이 기뻐함은 형통함이 되는 까닭이다. 기쁨으로써 남을 기쁘게 하면 아첨과 간사함에 빠질까 두려워 그 이로움은 정정貞正함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는 형통하니 정貞함이 이롭다.”라고 풀이하였습니다.

택국澤國이 되어라


☯ 단사
彖曰(단왈) 兌(태)는 說也(열야)이니 剛中而柔外(강중이유외)하여 說以利貞(열이이정)이니라
단전에 이르길 “태는 기뻐함이니 강건함이 가운데에 있고 유순함이 밖에 있어 기뻐하되 바르게 함이 이로우니라.

是以順乎天而應乎人(시이순호천이응호인)하여 說以先民(열이선민)하면 民忘其勞(민망기로)하고
이로써 하늘에 순하고 사람에게 응하여, 기쁨으로써 백성에게 솔선하면 백성들은 수고로움도 잊으며

說以犯難(열이범난)하며 民忘其死(민망기사)하나니 說之大民勸矣哉(열지대민권의재)라
기쁨으로써 어려움을 범하면 백성들은 그 죽음을 잊나니, 기쁨이 크므로 백성들이 권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

☞ 태는 기뻐함이니 강건함이 가운데에 있고 유순함이 밖에 있어 기뻐하되 바르게 함이 이로우니라(兌說也剛中而柔外說以利貞): 태괘는 음효(⚋) 하나가 두 개 양효(⚊) 위에서 입을 벌리고 웃으며 기뻐하는 모습입니다. ‘강한 것이 가운데에 있다(剛中)’는 것은 하괘에서는 구이가, 상괘에서는 구오가 각각 중을 얻어 강중剛中하다는 뜻이며, ‘유순함이 밖에 있다(柔外)’는 것은 하괘의 바깥(육삼)과 상괘의 바깥(상육)은 음효로 유순하다는 것입니다. 기쁨도 강유剛柔가 조화된 중도를 지켜 가며 해야지 벗어나면서까지 기쁨을 즐긴다면 그것은 방종으로 이롭지 못한 것입니다.

☞ 이로써 하늘에 순하고 사람에게 응하여 기쁨으로써 백성들에게 솔선하면 수고로움도 잊으며(是以順乎天而應乎人說以先民民忘其勞): 이렇게 기뻐하는 뜻이 위로는 하늘의 순리와 아래로는 사람들에게 부응해서 기쁨을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강剛한 덕과 유순함으로 다스리니 강하면서도 기쁨을 잃지 않습니다. 인심은 혜택으로써 남을 기쁘게 하면 아래로 사람에 응하는 것입니다.

기쁨으로써 백성을 어루만져 주고 나서 그들로 하여금 일을 따르게 하면 백성들은 힘을 다하여 그 일을 따르는 수고로움을 잊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치도 백성들이 기뻐하는 것을 먼저 베풀어 줘야 어떤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고 헌신할 것입니다.

증산도 대도 진리를 전해 주신 태상종도사님께서는 상생의 마음으로 하나 된 새 문화를 열어 가는 일꾼이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에 대하여 “사람은 커다란 못, 택국澤國이 되어야 한다. 못 택澤 자에 나라 국國 자를 써 택국이라 하는 것은 거기에 좋고 그르고 모든 것을 다 수용을 한다. 천 가지, 만 가지를 수용하기 때문에 택국이라 한다. 사람이 큰 태평양 바다는 못 될지언정 하다못해 커다란 못은 돼야 할 것 아닌가.”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 기쁨으로써 어려움을 범하면 백성들은 그 죽음을 잊나니 기쁨이 크므로 백성들이 권하느니라(說以犯難民志其死說之大民勸矣哉): 어려운 난국에 처하더라도 위정자들이 백성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줄 수 있는 정치를 펼친다면 그들은 목숨까지도 초개처럼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백성들에게 기쁨을 준다는 것이 단순히 즐기며 노는 유희가 아니라 정치를 하는 데 있어 중요하며 백성들에게 권장할 만한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상제님께서도 일꾼을 쓰는 대도로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 용병의 요체는 예를 숭상하고 녹을 중히 여김에 있나니 예를 숭상하면 의로운 일꾼(義士)이 들어오고 녹을 중히 여기면 뜻있는 일꾼(志士)은 죽음을 가볍게 여기느니라. (8:61:2)


벗과 더불어 익히느니라


☯ 대상

象曰(상왈) 離澤(이택)이 兌(태)니 君子(군자) 以(이)하여 朋友講習(붕우강습)하느니라
대상전에 이르길 “못 (두 개가) 걸려 있는 것이 태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 벗과 더불어 강습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택離澤은 태괘의 위아래 두 개 연못(澤)이 서로 붙어(離) 있는 것을 말하며 친한 벗끼리 모여 앉아 함께 글을 읽고 공부하는 것을 말합니다. 옛날에는 공부하는 서당을 ‘이택離澤’이라고 불렀습니다. 따라서 군자가 중택태의 괘상을 보고 위아래 입들이 모여, 즉 학우들과 어울려서 성현들의 가르침을 소리 내어 따라 읽으며 공부하는 서당을 만들었습니다.

☯ 육효사
初九(초구)는 和兌(화태)니 吉(길)하니라
초구는 화합하는 태니 길하니라.

象曰(상왈) 和兌之吉(화태지길)은 行未疑也(행미의야)라
소상전에 이르길 “화합하는 태가 길하다는 것은 행동하는 데 의심하지 않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초구는 양강陽剛이지만 양효가 양 자리에 있어 바른 자리이고, 응하는 구사九四하고 같은 양효이고 가장 낮은 데 있어 자신을 낮추어 화목하게 지내는 태兌라서 길하다고 합니다. 또한 사사로운 마음 없이 자신을 낮춰서 화합하려는 이런 초구의 행동은 어딜 봐도 의심할 바가 없다고 소상전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九二(구이)는 孚兌(부태)니 吉(길)하고 悔亡(희망)하니라
구이는 미더운 기쁨이니 길하고 뉘우침이 없느니라.

象曰(상왈) 孚兌之吉(부태지길)은 信志也(신지야)이니라
소상전에 이르길 “미더운 태가 길하다는 것은 뜻을 믿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 미더운 기쁨이니 길하고 뉘우침이 없느니라(孚兌吉悔亡): 구이는 하괘에서 중심을 잡고 있습니다만 바로 곁에 예쁜 여자(六三)가 있어 마음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이는 양으로써 강剛하고 하괘의 가운데(中)에 있으므로 강중剛中한 덕을 가지고 있어 미더운 기쁨[孚兌]이라 하였습니다.

이처럼 강중한 구이 군자가 육삼과 같은 소인이 곁에 있다 하더라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은 화이부동和而不同의 덕성을 가지고 있어 길하고 후회할 일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소상전에서도 구이가 미덥고 강중한 덕을 갖추고 있으므로 육삼 같은 소인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자신감이 있다고 합니다.

六三(육삼)은 來兌(내태)니 凶(흉)하니라
육삼은 아래로 내려와서 기뻐하니 흉하니라.

象曰(상왈) 來兌之凶(내태지흥)은 位不當也(위부당야)니라
소상전에 이르길 “아래로 내려와서 기뻐하는 것이 흉하다는 것은 자리가 마땅치 않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주역에서 래來(오는 것)는 상효에서 하효로 내려오는 것을 의미하며, 왕往(가는 것)은 하효에서 상효로 올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내태來兌’는 위에 있는 여자(육삼)가 아래에 있는 두 남자(초구와 구이)에 내려와 추파를 던지는 것으로 흉한 일이죠. 또한 육삼은 음이 양 자리에 있어 제자리도 아니어서 부당하며 중中도 못 얻었고 상육과도 서로 음양이 되지 않습니다.

헤아려야 하는 기쁨으로


九四(구사)는 商兌未寜(상태미녕)이니 介疾(개질)이면 有喜(유희)니라
구사는 헤아려야 하는 기쁨으로 편안하지 않으니 (어떤 것이) 병이 될 것인지 잘 분별하면 기쁨이 있으리라.

象曰(상왈) 九四之喜(구사지희)는 有慶也(유경야)라
소상전에 이르길 “구사의 기쁨이란 경사가 있다는 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구사는 하괘에서 상괘로 건너온 자리로 불안하며 양이 음 자리에 있어 제자리도 아닙니다. 신하 자리에 있는 구사는 위에 있는 군왕(구오)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아래에 있는 예쁜 여인(육삼)을 따를 것인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사랑을 위해 왕관을 벗어던진 에드워드 8세와 심프슨 부인이 만든 세기의 로맨스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즉 공도公道를 생각하여 주군主君을 따라야 할지, 아니면 사욕을 채우고자 미인을 품을 것인지에 대해 심적으로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잘 분별해서 어떤 것이 병이 되고 약이 될 것인지, 또는 어떤 것이 슬픔이 되고 기쁨이 될 것인지 잘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구사는 소인(육삼)을 따르지 않고 군왕(구오)을 따르는 바른 길을 걸어감으로써 기뻐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구사의 기쁨은 정도正道를 잘 지킴으로써 군왕에게 경사를 받게 되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깎는 데 미더우면


九五(구오)는 孚于剝(부우박)이면 有厲(유려)리라
구오는 깎는 데 미더우면 위태로움이 있느니라.

象曰(상왈) 孚于剝(부우박)은 位正當也(위정당야)라
소상전에 이르길 “깎는 데 미더움은 자리가 바르고 마땅함이라.”고 하였습니다.


☞ 깎는 데 미더우면 위태로움이 있느니라(孚于剝有厲): 구오는 가운데 있고 양효가 양 자리에 위치하므로 중정中正한 자리에 있습니다. 중택태괘에서는 초구의 ‘화태和兌’, 구이의 ‘부태孚兌’, 육삼의 ‘내태來兌’, 구사의 ‘상태商兌’, 상육의 ‘인태引兌’까지 모두 ‘태兌’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구오만은 기쁘다는 ‘태兌’를 쓰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바로 위에 있는 상육 때문입니다. 구오 자신도 양강陽剛한 군왕으로 중정의 자리에 있습니다만 노회老獪한 소인(상육)이 구오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기 때문에 깎아 먹는 것(孚于剝)으로 말하였습니다. ‘부우박孚于剝’이란 상육(소인)이 구오를 깎아 먹으려 하지만 그나마 구오가 중정한 자리에서 중심을 잡고 있기에 믿음으로써 잘 지켜 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구오는 상육을 조심해서 경계하지 않는다면 위태로울 수 있다[厲]고 경계사를 붙였습니다. 이렇게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군왕의 자리에 있고 중정하기에 가능한 것이죠. 그리고 구오와 구이 효사에 똑같이 ‘미덥다(孚)’라는 표현을 쓴 것은 내‧외괘에서 중中을 얻어서 그런 것이며, 두 효사 모두 ‘뉘우침[悔]’이나 ‘위태로움[厲]’이라는 경계사를 붙인 것은 각각 육삼과 상육이라는 소인이 곁에 있어서 마음이 해이해지면 낭패를 당할까 봐 그런 것입니다.

☞ 깎는 데 미더움은 자리가 바르고 마땅함이라(孚于剝位正當也): 깎여지고 어려워지는 상황에서도 굳센 믿음이 있기에 난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중정하고 미더운 마음이 있기에 구오나 구이 모두 위험으로부터 슬기롭게 극복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上六(상육)은 引兌(인태)라
상육은 이끌어서 기뻐함이라.

象曰(상왈) 上六引兌(상육인태)는 未光也(미광야)라
소상전에 이르길 “상육이 이끌어서 기뻐함이란 빛나지 못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상육은 태괘의 극성한 자리로 기쁨을 넘어 더 강한 쾌락을 추구하려 하고 있습니다. 상육은 뭇 양효(사내)들을 유혹하고 있는데, 군왕(구오)에게까지 추파를 던지며 수작을 부리고 있는 상황입니다(引兌). 그나마 중정한 구오가 바로 밑에 딱 버티고 있어서 상육이 흉한 짓은 할 수가 없습니다. 상육은 태괘의 가장 윗자리에 있는 음으로 이끌고 나가는 자리이며 양陽은 밝음[光], 음陰은 어두움[暗]으로 보는데, 이는 마치 중지곤괘에 나오는 선미후득先迷後得(앞서면 미혹되고 나중에 하면 얻는다)과 비슷합니다. 음이 앞장서서 설쳐 대는 모양새는 결코 빛날 일이 아닌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