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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간방艮方으로 귀화歸化해 온 성씨들


    한국에서 열 쌍 중 한 쌍은 외국인과 결혼한다는 국제결혼의 시대다. 한민족의 역사에서 외국인들의 귀화歸化는 언제부터 시작되었고, 또 유명한 귀화인들은 어떤 사람들이 있었을까? 우리 역사에서 귀화인은 국가의 필요성으로 적극적인 귀화 정책을 시행해서 생긴 경우와 국제 정세의 변동으로 우리나라로 유입된 경우로 구분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귀화인을 수용함으로써 우리는 문화의 다양성과 포용성을 바탕으로 공존을 지향할 수 있었다.

    전통적 의미에서의 귀화


    전통 동양 왕조 국가에서 귀화歸化의 의미는 형식상 왕의 어진 정치에 감화되어 그 백성이 된다는 뜻으로 향화向化 또는  왕화王化라고도 한다. 그리고 현대적 의미에서의 귀화는 다른 나라의 국적을 얻어 그 나라의 국민이 되는 일을 지칭한다. 1948년 국적법이 제정된 이후 2019년 말까지 귀화 허가 또는 국적회복 허가를 받아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은 253,336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2020년 6월 말 현재 우리나라의 등록 외국인은 총 1,220,228명이 된다.

    상고 시대부터 한반도는 주변 국가로부터 전쟁이나 자연재해, 국가적인 귀화 정책 혹은 자발적인 이동으로 인한 많은 이주자가 정착하게 되었다. 『우리 역사를 바꾼 귀화 성씨』(박기현 저, 역사의 아침, 2007년)에 따르면 현재 국내에 있는 성씨 중 약 46%가 귀화 성씨이며 인구로는 전체 인구의 20%에 해당하는 숫자라고 한다.

    사국시대四國時代 이전以前


    우리 역사를 보면 오래전 북방민이 한반도에 정착해 역사를 개척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삼국사기』에서도 “이보다 먼저 조선의 유민들이 산과 계곡에 흩어져 살았는데 이들이 진한의 육촌을 이루었고, 이들을 일러 진한 육부라 했다(先是 朝鮮遺民 分居山谷之問 爲六村…是爲辰韓六部)”라는 기록이 있다. 조선의 유민遺民이라면 고조선(단군조선)의 유민을 말한다. 『환단고기』 「단군세기」에 따르면 기원전 238년에 단군조선의 마지막 47세 고열가단군이 자리를 내놓고 은둔하셨기 때문에, 신라 건국(BCE 68) 약 180년 전부터 단군조선의 유민들이 신라 땅으로 이주하여 살았던 것이다. 『우리 역사를 바꾼 귀화 성씨』에서는 최초의 한반도 귀화 사건을 중국의 은나라가 망한 후 ‘기자箕子’가 고조선에 망명한 사건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 가운데 하나인 청주淸州 한韓씨의 시조가 바로 ‘기자’이다. 「청주한씨세보淸州韓氏世譜」에 따르면 기자조선의 마지막 준왕의 후손 중에 우성友誠·우평友平·우량友諒 삼 형제가 각각 고구려와 백제, 신라로 귀의해 우성은 행주幸州 기奇씨, 우량은 상당上黨 한韓씨, 우평은 북원北元 선우鮮于씨가 되었다고 한다.

    사국시대四國時代


    가야사 최초의 국제결혼이라고 할 수 있는 금관가야의 인도 출신 허許황후나 중국 출신인 유리왕의 아내 치희雉姬도 엄밀히 말하자면 귀화인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따르면, 허황옥許黃玉은 인도 아요디아의 공주로, 서기 48년에 오빠 장유화상 및 수행원들과 배를 타고 가락국에 와서 김수로왕의 왕후가 되었다. 이듬해 태자 거등왕居登王을 낳고, 이후 아들 10명을 낳았다.

    해주海州 오吳씨 같은 경우도 신라 초기에 넘어왔다. 또한 아직까지 학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지만, 실제로 많은 학자들은 문무왕릉비 비문을 인용해, 신라 김씨 왕조의 조상을 북방 훈족으로 보고 있다. 신라 시대에는 대략 40여 개의 성씨가 귀화했다.

    고구려 시대 귀화인들은 『한민족대성보韓民族大姓譜』(안영도, 한국문화연구소, 1997)」에 등재된 당나라의 팔학사八學士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영양왕嬰陽王은 여덣 명의 당나라 선진 학자들을 초대했다고 한다. 8학사 귀화설은 정사에는 기록이 없고 함께 왔다는 남양南陽 홍洪씨나 해평海平 길吉씨, 남양南陽 방房씨, 의령宜寧 옥玉씨 등의 족보에서 들어온 연대나 지역을 제각기 다르게 적고 있어 정확한 사실을 확인할 길은 없다. 백제 부흥운동의 구심점이었고 명장으로 당나라에서 이름을 날리던 흑치상지黑齒常之의 둘째 사위, 순珣장군에 관해 2006년 11월 18일 연합뉴스는 그의 성씨가 ‘모노노베物部’일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박기현 씨는 통일신라 시대 서역과의 교역이 빈번했다는 증거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란 설화를 들고 있다. 이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의 내용 중 하나이며 또한 그리스의 마케도니아 왕국 때부터 전해져 오는 이야기로 유럽과 페르시아 지역에서도 널리 퍼진 이야기다. 동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우리나라에 퍼져 있다. 바로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신라 경문왕景文王 이야기다. 이것은 그리스나 서역의 문화, 설화가 실크로드를 거쳐서 여기까지 들어온 증거라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교류가 있었다면 사람이 들어왔을 것이고, 그 대표적인 귀화인이 처용處容이다. 처용 탈은 보편적인 한국인의 모습과 다른 양상으로 제작되었다. 코가 낮고 광대뼈가 튀어나와 있는 한국인과는 달리 처용 탈은 툭 튀어나온 주먹코에 눈은 크고 쌍꺼풀이 짙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학자들은 처용을 실크로드의 동방 종착지에 도착한 아랍 상인과 연관 지어 생각하고 있다. 중세 아랍 문헌의 기록에는 당시 남해를 통해 아랍-무슬림들이 신라에 내왕하고 정착까지 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신라 고지에서도 서역풍의 무인석과 토용 같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그 외 평해平海 구丘씨, 남양南陽 제갈諸葛씨, 온양溫陽 방方씨, 영양英陽 김金씨 등도 신라 시대에 당나라로부터 넘어왔다.

    고려시대高麗時代


    고려는 적극적인 귀화 정책을 펼쳤다. 특히 고려 정부는 이들 귀화인에 대한 특전을 마련했는데 먼저 학자나 우두머리 출신의 귀화인들에게 관직을 수여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서기 956년 후주後周의 사신 설문우를 따라 고려에 왔다가 눌러앉은 쌍기雙冀가 있다. 고려는 귀화인을 통해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한편 새로운 인력을 국방력이나 농업 생산력 증진에 이용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이같은 적극적인 귀화 정책에 힘입어, 송나라가 멸망할 12세기 중엽부터 많은 유민들이 고려에 들어온다. 그때 넘어온 사람 중에 배천白川 조趙씨, 거창居昌 신愼씨, 그리고 담양潭陽 국鞠씨, 현풍玄風 곽郭씨, 달성達城 하夏씨의 선조들이 있다. 그리고 13세기에 고려로 귀화한 베트남인 이용상李龍祥은 몽골군과 싸운 공로를 인정받아 화산花山 이李씨의 시조가 되었다.

    더불어 30여 년 동안 항전했던 고려를 굴복시킨 원나라는 고려 왕실의 혈통을 바꾸기 위해 고려 왕자를 원에서 교육시키고, 원나라 공주와 결혼시킨다. 당시 고려 왕과 결혼하는 원나라 공주들을 따라, 많은 원나라 신하들이 고려에 넘어온다. 충렬왕의 비인 제국대장공주를 배종하고 들어온 신하들은 곡산谷山 연延씨, 연안延安 인印씨, 덕수德水 장張씨 등이 있다. 그 밖에 공민왕과 결혼한 노국대장공주를 따라 들어온 공소孔紹는 곡부曲阜 공孔씨의 시조, 변안렬邉安烈은 원주原州 변邉씨의 시조가 되었고, 더불어 청주淸州 양楊씨, 하남河南 정程씨, 문경聞慶 전錢씨 등 많은 배종 신하들이 있었다. 그리고 여말 선초의 문신으로 설장수偰長壽는 위구르족 출신의 귀화인으로 1396년(태조 5) 태조 이성계에게 계림을 관향으로 삼도록 사성되었다. 그는 신장 위구르 투루판 지역에 있는 실크로드의 교역 도시 고창高昌에서 태어났으며, 경주 설씨의 실질적인 시조이다.

    조선시대朝鮮時代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의 귀화
    조선 초기에는 여진족에 대한 귀화 정책이 적극 실시되었다. 이성계과 의형제를 맺었던 여진족의 이지란李之蘭이 1천 명 정도의 부하를 거느리고 와서 조선을 창업하는 데 일등 공신이 되면서 청해青海 이李씨의 시조가 된다. 16세기 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많은 일본군과 명明나라군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귀화하게 된다. 정유재란 때 명군을 인솔하고 들어온 상곡上谷 마麻씨의 시조 마귀麻貴 제독이 있다. 그 밖에 절강浙江 팽彭씨, 소주蘇州 가賈씨, 농서隴西 이李씨, 광동廣東 진陳씨 등도 선조가 명나라 지원군의 일원이었다. 이렇게 지원군으로 들어왔다가 조선에 정착한 사람들의 후손들이 4백 년의 뿌리를 더듬어 한데 모인 단체가 있다. 바로 ‘명의회明義會’다. 명말明末 청초淸初의 혼란기에 조선에 망명해 한국인이 된 중국계 귀화 성씨의 후예들이 서로 간의 친목과 조상 공경을 위한 모임을 조직한 것이다.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좌선봉장으로 군사 3,000명을 인솔하고 한반도로 들어왔다 귀화한 일본 장수가 있다. 원래 이름이 사야가沙也可인 김충선金忠善은 의병 및 조선군 장수로서 모두 78회의 전투를 치르면서 조선에 조총 제작 기술을 전수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우록友鹿 김씨(사성賜姓 김해 김씨)의 시조가 된다.

    구의사九義士 종친회
    병자호란 이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 수도 심양에 인질로 갇혀 있었다. 그때 명나라의 대신 9명도 인질로 있으면서, 조선 왕자와 친하게 지냈다. 1644년, 명을 멸망시키고 수도를 북경으로 옮긴 대청 제국은 조선 왕자를 놓아준다. 이때 9명의 대신도 풀려났지만 망국 신세에 갈 데가 없어 조선 한양에 가서 살기로 작심하였다. 조선 왕자 또한 쾌히 받아 주어 9명의 대신은 서울에 정착했다. 그 후손들의 조직이 바로 ‘구의사九義士 종친회’다. 낭야瑯琊 정鄭씨, 임구臨朐 풍馮씨, 통주通州 양楊씨, 제남濟南 왕王씨 등이 그들이다. 반면 조선 후기에 나타나는 귀화의 기록은 유구국流球國이라 불렸던 오키나와나 청나라, 왜에서 표류해 온 사람들 정도다. 이는 청나라가 중원을 지배하면서부터 조선과 청의 경계가 명확했기 때문에 중간에 여진이나 여타 다른 부족들을 정책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전혀 없었고, 청나라에서도 오히려 돌려보내라고 요구해, 귀화 자체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 시대에는 고려 시대에 비해 귀화인 수가 전반적으로 줄어들었다.

    귀화는 간도수艮度數의 섭리로 봐야


    현대적 의미로 대한민국 첫 귀화자는 1957년 2월 8일 당시 대만 국적을 갖고 있던 손일승 씨다. 이후 우리나라에 귀화한 사람들은 귀화한 뒤에 본래 이름을 버리고 몽골 김씨, 길림 사씨, 태국 태씨, 대마도 윤씨 등 아예 새로운 성과 본을 창출하는 사례들이 나타나고 있다. 또 필리핀과 방글라데시, 베트남 등에서도 수많은 인력이 들어오면서 골라낙콘치타, 누그엔 티수안, 남캉캉마 등의 외국계 성씨가 한국 호적에 등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서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이와 같은 귀화의 역사가 단순히 그때그때의 국제 역학 관계에 의해 우연히 발생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역사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동방의 간방艮方(한반도)은 가을개벽의 구심점이자 동방 문명의 근원 핵 자리요 개벽의 숨구멍이다. 북방에서 역사 문명의 씨를 뿌린 한민족이 구원의 성지 간방艮方에서 역사 문명 대통일의 성업(간도수艮度數)을 이루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귀화는 가문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으로 간도수 주인공의 대열에 합류하는 가장 축복스럽고 영광된 일이라 할 수 있다.

    [출처]
    『역주본 환단고기』(안경전, 상생출판, 2012)
    『개벽실제상황』(안경전, 상생출판, 2006)
    『우리 역사를 바꾼 귀화 성씨』(박기현, 역사의 아침, 2007년)
    『한국의 귀화 성씨:성씨로 본 우리 민족의 구성』(김정호, 지식산업사, 2003년)논문「고려말의 귀화와 이슬람의 한반도 등장」〈연합뉴스〉 2011년 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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