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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X파일]

    대한사관의 진실 | 환단고기 위서론의 허구 - 그들은 왜 환단고기를 두려워하는가?


    최근 한류 문화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K-POP, K-드라마, K-CINEMA를 필두로 해서 이제는 한식, 한복 등의 K-CULTURE가 일본, 동남아를 비롯하여 유럽, 아메리카 대륙의 곳곳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 이렇게 한류에 빠진 세계의 젊은이들은 한국의 진면모, 즉 한국의 역사, 철학, 영성문화를 알고 싶어 한다.

    하지만 21세기 대한민국은 자신의 고유한 역사와 문화를 잃어버렸다. 게다가 중국과 일본에 의한 역사 왜곡과 문화 침탈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올바른 뿌리 역사와 한국 문화의 원형을 밝혀 주는 환단고기의 가치는 지대하다.

    본지에서는 환단고기를 수용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 강단사학계의 논리를 파헤쳐 보고, 환단고기가 가지고 있는 사서로서의 가치를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첫째, 환단고기 출간 과정의 문제


    『환단고기桓檀古記』는 계연수 선생이 전해져 내려오는 4권의 책을 한데 묶어 1911년에 발간한 책이다. 이후 계연수의 제자였던 이유립 선생에 의해 1983년 재출간되면서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 환단고기의 발간 초기에 서지학적書誌學的 접근에 따른 문제 제기가 있었다. 하지만 환단고기에 대한 최근의 시비는 학문적 접근에서 이탈하여 다분히 편향적이고 악의적이다. 환단고기는 이유립이 1970년대에 창작한 책이라는 음모론적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유립 본인이 『환단고기』를 고쳐 가며 창작하였던 흔적이 발견된다?
    反論
    <자유自由
    *1)
    >라는 잡지에 연재된 역사 관련 기고를 모두 합하여 편집한 것이 『환단고기』이므로 『환단고기』는 최근에 이유립이 저술한 것이라고 위서론자들은 주장한다. 그런데 사실은 이유립 선생이 『환단고기』라는 책을 가지고 있었고 그 책의 내용을 <자유>에 나누어서 게재하였다고 이해하는 것이 순리이다.
    *1) 박창암朴蒼巖(1901~2003, 육군 준장으로 예편)이 1968년에 창간한 잡지


    1966년 고등학교 1학년 때 이유립 선생을 만나 환단고기를 배우기 시작한 현 단단학회 회장 양종현(1948~ )은 “(대전 은행동의) 좁은 방에서 스승님과 무릎을 맞대고 앉아 환단고기 초간본을 글자 하나하나 짚어 가며 읽은 기억이 생생하다.”라고 증언하였다. 양종현은 종이의 질과 색깔, 책 표지 상태까지 말하였는데 책을 묶은 끈이 떨어져서 여러 번 고쳐 매고 풀로 붙였던 사실도 기억하였다. 이 같은 양종현의 증언은 계연수가 편찬한 환단고기 원본이 분명이 존재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또한 위서론자들은 1965년도에 발간된 잡지 <커발한>에는 『환단유기桓檀留記』라는 제목으로 『환단고기』가 소개되었다는 것을 이유로 『환단고기』가 위작僞作되던 과정의 증거라고 언급한다.

    그러나 『환단유기桓檀留記』는 환단의 역사를 담은 유념해야 할, 유의해야 할 역사서라는 뜻이다. 『환단고기』가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이전에 가제假題를 붙여서 소개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어떤 위서론자는 <자유自由>(1976)에 기고된 『환단고기』의 내용과 1979년에 발간된 내용이 다르다는 점을 근거로 『환단고기』는 점진적으로 수정·보완되어 1979년에 완성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형기 필사본의 영인본에 있는 오탈자를 바로잡은 것을 근거로 위작 운운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더구나 그 방대한 내용과 시대적 정합성, 그리고 중국 사서와의 비교로 밝혀진 내용의 진실성 등을 고려할 때 어느 한 사람이 『환단고기』를 지어낸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임채우는 『환단고기』에 나타난 곰과 범(웅족과 호족)에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면서 『환단고기』의 각 권에서 서로 다른 의미와 기록이 보이는 점을 들어 『환단고기』가 한 사람의 저서가 아님을 반증한다고 주장한다. 즉 창작한 것이라면 그 내용에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것이다.

    또한 『환단고기』 편찬 과정에 의문을 품는다면, 계연수 편집본(1911), 오형기 필사본(1949), 오형기 필사본에 대한 영인본(1979), 1976년 이유립의 원본 분실, 오형기 필사본의 오탈자를 바로잡은 배달의숙본(1983) 등의 과정을 모두 부정해야 한다. 더구나 『환단고기』 초간본으로 역사 공부를 하였다는 양종현의 진술 또한 거짓이라 말해야 하는데, 만약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위서론을 위해 한 인격체의 경험적 사실을 매도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일들을 허구적 사실이라고 몰아붙이면서, 1979년에 저술된 위작 역사서라는 주장만 되풀이하는 것은 오히려 한민족의 정통 역사서에 대한 위서조작설이 아닌가? (출처: 『환단고기』 역주본, 상생출판, 2012)

    1911년에 편집된 책이 1979년에 출간되기까지 60년이 넘게 소요된 설득력 있는 이유를 제시하지 못한다?
    反論
    1911년은 일제 강점기가 시작된 직후였다. 또한 일제에 의해 사서 수거령이 내려진 해였다. 후대 사람들한테 한민족사의 뿌리 역사와 혼이 담긴 『환단고기』가 전해져야 되는데, 자칫 잘못하면 일제에 의해서 빼앗길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계연수 선생은 “다음 경신년(1980)에 공개하라”고 했던 것이다. 한편 계연수가 60년 뒤에 공개하라는 말을 이유립이 단학회 5대 회장인 이용담으로부터 전해 받았을 수 있다. 또한 이승만, 박정희 정권 시대에는 언론·출판이 통제되던 시기였다. 1980년이 넘어서야 경제적 여유를 바탕으로 역사, 문화에 관한 관심이 일어났고, 또 출판이 자유로워지면서 민족 사서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계연수의 전언은 이러한 역사의 대세를 꿰뚫고 나온 지언至言일 터이다. 이유립은 이러한 스승의 가르침을 지키고 『환단고기』가 인정받을 수 있는 때를 기다려 온 것이다.

    그러나 출간 과정은 참고 사항이므로 이것이 『환단고기』를 위서라고 단정하는 데 단서가 될 수는 없다. 책 내용을 진지하게 검토하는 문제는 슬쩍 넘어가고 위서로 몰고 가기 위한 시선 흐리기 말장난에 불과하다. 진위 문제는 책 자체를 가지고 얘기할 문제다.

    저자인 계연수는 과연 실존 인물인지도 의심된다?
    反論
    위서론자들은 심지어 ‘계연수가 수안 계씨 족보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계연수를 가공인물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수안 계씨 종친회에 의하면, 북한 출신 종친 중 족보에서 누락된 사람은 부지기수이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느라 후손이 끊긴 데다가 증언자도 없어 족보에 오르지 못한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계연수를 유령 인물로 단정하는 것은 역사적 상황을 두루 고려하지 않고 단편적인 사실 하나를 내세워 진실을 왜곡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계연수가 실존 인물이었음은 그 제자인 이유립의 증언과 여러 문헌에서 입증되고 있다.

    계연수가 실존 인물임을 증명하는 문헌으로는 그의 생애가 간략히 소개되어 있는 『해동인물지海東人物志』(1969)와 그가 『천부경』을 입수하여 세상에 널리 알린 경위가 서술되어 있는 『정신철학통편精神哲學通編』(1920) 등이 있다.(출처: 『환단고기』 역주본, 상생출판, 2012) 『정신철학통편』의 저자 전병훈이 천부경을 언급하면서 그 출처를 계연수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는 것은 계연수가 단군 신앙 계열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1917년에 단군교에 의해서 공개된 〈천부경〉의 전래 내력에 따르면 계연수는 1916년 이전까지 〈천부경〉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계연수가 1911년에 썼다는 『환단고기』에는 〈천부경〉이 실려 있어 1920년대 계연수의 행적과 전혀 다르다?
    反論
    계연수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 이기, 나철 등과 함께 이기가 소장하고 있던 『태백일사』의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 등의 상고 사서를 주석하고 교열 작업에 들어갔다. 이기가 절명하자 계연수는 이기의 유언을 받들어 묘향산 단굴암에 들어가 1911년에 『환단고기』를 편찬하였다. 그때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 실려 있는 ‘천부경’이 어딘가에 새겨져 있을 것을 확신하고, 1916년 묘향산 석벽에 ‘천부경’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여 탁본하게 된 것이다.

    1916년에 탁본한 ‘천부경’과 1911년에 편찬한 ‘천부경’은 별개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천부경’은 계연수가 1916년에 묘향산 석벽에서 탁본하기 전에 이미 오래전부터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또한 ‘천부경’은 이기가 소장하고 있던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 이미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출처: 『환단고기』 역주본, 상생출판, 2012)

    천부경은 환단고기 이외에도 다른 경로인 노사 기정진의 학맥으로도 전해 내려왔다. 또 일설에는 계연수가 천부경을 널리 알리기 위해 묘향산 탁본설을 퍼트렸다는 말이 전해진다. 따라서 천부경이 1916년 이전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아니다.

    『환단고기』는 1979년에 지어진 책이다?
    反論
    현재까지 알려진 『환단고기』 판본은 1911년 계연수가 간행한 초간본(30권), 1949년 오형기가 필사한 오형기본, 1979년 이 필사본을 조병윤이 광오이해사에서 영인·발간한 광오이해사본, 1983년 이유립이 오형기 필사본을 교정하여 발간한 배달의숙본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초간본은 1976년 이유립이 분실하였다. 지금 세상에 나와 있는 『환단고기』는 광오이해사본과 배달의숙본이다. 1980~1990년대에 나온 한글 번역서 『환단고기』는 대부분 광오이해사본을 저본으로 하였고, 2000년 이후에는 배달의숙본을 저본으로 한 번역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유립이 분실하였다는 원본이 보존되고 있다면 『환단고기』 위서 논쟁은 애초부터 성립될 수 없었을 것이다.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은 『환단고기』가 이유립의 창작이라고 주장한다. 이유립이 1979년(광오이해사본 출간 연도) 이전부터 월간지 『자유』(1976년부터 기고 시작)에 기고해 오던 글을 모아 『환단고기』를 간행한 것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광오이해사본은 오형기의 필사본을 영인한 것이고, 오형기 필사본은 이유립의 소장본을 필사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필사본(1949)이 만들어졌고, 그 후 영인본(1979)이 나올 수 있었다. 따라서 위서론자들의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

    『환단고기』 원본 분실에 대해 제자 양종현 씨는 가장 설득력 있는 증언을 들려주었다. 이유립 선생이 1976년 의정부에 거주할 당시, 백내장 수술을 하기 위해 친척이 운영하는 안과가 있던 군산에 5일간 머무른 적이 있었다. 집세를 5개월 정도 밀린 상태에서 집을 비운 사이 집주인이 야반도주한 줄 알고 책을 모두 팔아 버려 이때 초간본도 함께 분실되었다는 것이다.

    이유립 선생이 초간본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조병윤이 1979년 이유립의 허락 없이 교정이 안 된 오형기필사본을 자신을 단단학회 대표로 하여 광오이해사에서 100부를 출간하였다. 이로 인해 조병윤은 파문당하고 이유립은 『환단고기』가 이미 세상에 나갔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하며 그해 10월 광오이해사본을 교정한 새로운 판본을 만들었으나 출판비가 없어 미루다가 1983년도에 배달의숙본을 발간한다.

    당시 『환단고기』 내용을 암송하고 있었고, 이미 『환단고기』를 번역하여 주해註解해 두었던 원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교정한 후에 발간한 것이다. 하지만 위서론자들은 이유립 선생이 『환단고기』 내용을 암송하여 재발간했다는 사실을 빌미로 꼬투리를 잡아 『환단고기』를 창작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암송하여 창작했다는 비판은 원본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곧 『환단고기』 원본이 있기 때문에 암송 창작이란 비판도 가능한 것이다. 한마디로 위서론자들은 『환단고기』를 어떻게든 위서로 규정하기 위해 앞뒤가 안 맞는 주장에 그들 스스로 확인하지 않은 이 사람 저 사람의 일부 얘기만을 확대 해석하여 인격 모독까지 저지르는 수준 이하의 행태를 보이고 있다.

    환단고기 출간에 자금을 지원한 오동진 장군의 저서에 환단고기가 언급되지 않고 있다?
    反論
    오동진 장군은 홍범도 장군과 함께 『환단고기』 발간에 자금을 제공한 분이므로 『환단고기』를 당연히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오동진 장군은 독립운동으로 전쟁 중이었고, 바쁜 와중이었기 때문에 기록을 남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계연수 선생이 일제에 의해 수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이유립 선생에게 『환단고기』를 경신년에 출간하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일부 인사들만 비밀리에 간직했을 가능성도 있다.

    둘째, 이유립 선생에 대한 문제?


    이유립은 고성 이씨 가문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부친의 영향으로 역사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3세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단학회가 주관하는 배달의숙에서 계연수, 최시흥 등의 강의를 들었다. 해방 후 환단고기 책을 들고 월남하여 대전에 정착했다. 평생을 배고픔과 멸시 속에서도 역사 광복의 제단에 온전히 인생을 바친 우리 국사학의 아버지시다.

    이유립은 커발한 개천각교 교주였고 환단고기는 그 종교의 경전이다?
    反論
    커발한 개천각은 환웅, 단군왕검, 고주몽, 치우, 광개토대왕, 세종대왕 등 국조國祖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1969년에 이유립이 마리산에 만든 일종의 사당祠堂이다. 위서론자들은 조상님께 지내는 제사를 확대 해석하여 종교라고 거짓 주장을 하는 것이다.

    커발한 개천각이 건립된 후 있었던 일이다. 단단학회 조영주 선생과 많은 회원들은 단군 계통의 신흥종교에도 개방하여 재정에 도움이 되게 하자고 건의하였다. 이유립 선생은 결코 동의하지 않았는데 후에 회원들에 의해 개천각이 개방되자, 이유립 선생은 동가식서가숙하던 어려운 때에도 객客같이 대영절과 개천절에만 참석해서 행사를 주재하고 개천각 정수관에는 계시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단단학회 부회장을 지낸 조영주 선생의 증언이다.

    커발한 개천각은 종교 건물이 아닐뿐더러, ‘개천각교’도 존재하지 않았다. 위서론자들이 개천각을 종교적인 목적으로 지었다 하며 개천각교라 운운하는 것일 뿐이다. 만약 종교 단체였다면 타 신흥종교가 개천각에서 행사하는 것을 회원들이 허락할 리가 없다. 단단학회가 종교와는 무관했기 때문에 단군 계열 종교들의 참배를 허락하자고 회원들이 건의할 수 있었다.

    또한 위서론자들은 이유립을 태백교 교주라고 날조하여 비난한다. 하지만 태백교는 우리 민족이 예전부터 신앙해 오던 삼신상제님을 받드는 것이지 불교나 기독교와 같은 종단을 형성한 조직 신앙이 아니다. 오로지 『환단고기』를 폄훼하기 위해 꼬투리를 잡고 고인의 인격을 모독하는, 악의에 찬 무책임한 발언들일 뿐이다.

    동아일보 1931년 3월 2일자에는 삼육사 동인 일동이 투고한 ‘삭주 삼육사 창립’ 기사가 기재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이유립이 철저히 일제에 순응하겠다는 의지가 만발한 내용이다?
    反論
    일제 식민 통치의 시대적 상황으로 보아 1931년 당시는 어떤 단체든지 조선인이 모여 회합을 할 때는 반드시 주재소에 신고해야 되는 무렵이다. 그야말로 서슬 시퍼렇게 감시 통제가 날을 세우고 있을 때다. 당연히 신고해야만 되는 절차를 신고하는 과정일 뿐이다. 이유립을 친일파로 모는 조잡스러운 행태는 선전 선동으로밖에 볼 수 없다. 이유립은 학교를 마친 뒤 한동안 만주 일대를 유력하다가 1930년 고향에 돌아와서 해학 이기의 신교육 종지를 실천할 목적으로 삼육사三育社를 조직, 위원장이 되어 농촌 자력 진흥, 청소년 자유 교양, 국제 동향의 비판, 회람 잡지 발행 등을 실시하다가, 일제로부터 강제해산을 당하면서 한때 천마산에 입산하였다.

    이유립은 1933년 친일단체인 조선유학회에 가입했다?
    反論
    한 인물을 평가하고 그 행적을 조사하려면 넓은 안목과 식견을 갖고 다양한 자료와 그 당시의 면밀한 정세 판단 및 상황 분석에 기반하여, 냉정한 자세와 객관적인 입장으로 분석 조사해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미리 단정해 둔 초점에 맞추어 좁고 편협한 방법으로 그저 입맛에 맞는 사료들만 찢어다가 짜 맞추는 태도는 이미 그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우고 있는 것이다.

    이유립이 장성하여 그동안 보여 주던 고루한 유교에 반기를 들고 장차 민족주의를 창도하려 할 때 부친 이관집은 이렇게 말해 주었다. “너의 뜻이 옳다면 이는 힘써 해 나갈 일이리라. 그러나 향촌鄕村과 사람들의 의식에 깃든 유교를 업고 나가면 세歲를 얻기가 수월할 것이요 새로이 민족정신을 주창하여 나가는 일은 실로 큰 고난을 맞이하게 되리라.”

    그의 사상적 편린의 핵심은 “구체적으로 민족아를 발견하여 이기적인 개인주의를 극복하는 가운데 마침내 민족 공동체의 삶을 올바르게 구현하자.”는 신념 체계로 요약된다. 이러한 정신은 그 후에 보인 행적에서도 그대로 잘 나타나고 있다. 단군교의 교주가 조선유학회와 손을 잡을 때 두말없이 참여한 행동과 그가 창간호에 쓴 격문檄文의 내용에 고스란히 이런 사상과 의지가 담겨 있음을 본다.

    이유립은 안순환이 세운 녹동서원의 명교학원 1기생으로 입교하였다. 단군전을 지어 단군의 영정을 모시고 단군교를 표방했으나 수업 내용은 모두 유학적 내용이었다고 한다.

    1937년 중일전쟁이 벌어진 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적극적으로 친일에 나섰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인데, 그 시기에 동아일보의 지국장을 지낸 자가 바로 이유립이다?
    反論
    이유립은 <조선유교회>에 자리하던 단군교에 대한 일제의 노골적인 간섭이 심해지면서 폐쇄 위기에 몰리자 낙망하여 그곳을 떠났다. 그때 마침 <동아일보>의 필화 사건으로 인한 정간 조치가 풀려 민족주의자로 이름이 높았던 백관수가 사장으로 취임했다. 그리하여 1938년 1월 21일부로 삭주 지국이 개설되어 이유립이 지국장으로 임명된다. 그리고 불과 4개월여가 지나 5월 1일에 <동아일보> 삭주 지국장 자리를 떠난다. 바로 <동아일보>에서도 차츰 친일적 색채가 농후해지면서 ‘황국신민으로서 충성을 바치는 듯한 논조’들에 실망을 느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런 까닭으로 겨우 4개월 남짓 재직하다가 돌연 5월 1일에 사표를 던진 시점이 위에 제시한 <동아일보>의 망언들이 집중적으로 실리기 시작하는 시기와 맞물려 있다. 때문에 당연하게 그만둔 절차가 본인의 의사에 의한 퇴직인 의원해직依願解職일 수밖에 없었다.

    신동아 2007년 9월호에 이유립 부인 신매녀는 해방 전후 시기에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증언이 있었다. 즉, 이유립 부인도 환단고기를 본 적은 없었다는 말이 아닌가?
    反論
    신매녀 씨는 글을 모르는 분이다. 『환단고기』는 한자로만 되어 있다. 신매녀 씨가 여러 다른 책들과 함께 있는 『환단고기』의 존재에 대해서 몰랐다는 것은 『환단고기』 원본이 없다는 주장에 대해 설득력 있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셋째, 지명과 인명 문제


    교각살우矯角殺牛, 지엽에 매달리다 큰 것을 놓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경전들은 처음부터 완전한 형태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수천 년의 세월에 걸쳐 후대의 뛰어난 인물들에 의해 보정, 교정 작업이 이루어졌다. 일부 강단사학자들은 환단고기의 부분적 내용을 트집 잡아 책 전체를 위서로 몰아간다. 환단고기는 위서라는 전제를 깔아 놓고 이를 증명하는 수단과 방법을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상춘常春’은 청나라 때 생긴 지명이다?
    反論
    상춘은 장춘長春과 같은 의미로, ‘늘 봄’을 뜻한다. 장춘은 원나라 순제 3년(1343)에 편찬되기 시작한 『요사遼史』와 『금사金史』에 여러 번 나오는 지명이다.

    ‘영고탑’은 청나라 시조 설화와 관련지어 청대 이후에 등장한 용어이다?
    反論
    대표적인 위서론자인 조인성은 『환단고기』에 자주 등장하는 영고탑은 청나라 시조 전설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영고탑이라는 지명은 청나라 이전에는 사용할 수 없으므로 위서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서는 『명실록明實錄』을 인용하여 명나라 초기에 영고탑로寧古塔路가 있었다고 전한다. 따라서 영고탑이라는 명칭은 적어도 명나라 초기(1368) 이전에 이미 사용되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영고탑을 단지 지명으로만 해석하려는 시도 자체가 무리이다.

    영고탑은 원래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리던 ‘영고迎鼓터’란 지역으로 북부여北夫餘 이후 황폐화되고 고구려, 대진국의 멸망으로 자체 역사 기록이 사라지면서 그 유래에 대해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어졌다. 다만 이름만 간신히 전해지다가 청나라 시조 전설과 맞물려 ‘영고탑寧古塔’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현재의 흑룡강성 영안시의 영고탑은 청나라 시조가 유래한 곳(요령성 신빈현)과는 다른 곳이다. (출처: 『환단고기』 역주본, 상생출판, 2012)

    중국 사서 『한서漢書』를 인용하면서 실제 사서에 없는 산동山東이라는 말을 가필하였는데, 실제 산동이라는 용어가 해당 지역을 가리키게 된 것은 명나라 때 이후이다?
    反論
    산동이라는 말이 『환단고기』에 처음 나오는 것은 『태백일사』이다.『한서』 「지리지」를 인용하면서 산동이라고 가필한 부분은 「신시본기」에 치우천황의 능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今據漢書地理志컨대 其陵이 在山東東平郡壽張縣闕鄕城中하니 高七丈이오 (『태백일사』 「신시본기」)


    『태백일사』는 조선 중종 때 이맥 선생이 쓴 것으로 동평군 수장현이 어딘지 잘 모르는 독자를 위해 산동을 써넣었을 가능성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안함安咸, 원로元老, 동중董仲 세 명이 황해도 해주 수양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삼성기』의 저자를 안함로, 원동중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反論
    위서론자들의 주장처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안함, 원로, 동중’이라는 인명이 있고, 『세조실록』에 ‘안함로원동중삼성기’라는 기록이 있다.『세조실록』에서는 ‘문태, 왕거인, 설업 등 세 사람이 쓴 책’이라는 구절처럼 이름을 나열할 때 몇 사람인지 혼동이 생길 여지가 있다면, 몇 사람이라고 명시하였다. 따라서 ‘안함로원동중삼성기’라는 기록은 『삼성기』의 저자가 안함로와 원동중이라는 것을 나타낸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위서론자들의 핵심 논점은 『환단고기』가 최근에 저술된 책이라는 것이며 위서라는 주장인데, 『세조실록』의 기록은『삼성기』가 그 당시에 이미 존재하였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 더욱이 다른 어떤 역사 기록보다 신뢰도가 높은 『세조실록』의 기록을 부정하고 70년이나 후에 쓰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을 근거로 하여 위서 운운하는 것은 결코 성립할 수 없다. (출처: 『환단고기』 역주본, 상생출판, 2012)

    더군다나 왕조 실록은 아무나 볼 수 없는 책이다. 그런데 이유립이 조선왕조실록을 구해 본 것은 1980년대 중반 현 한배달회장 박정학을 만나고서였다. 그렇다면 『환단고기』에 인용된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내용들은 어떻게 알았으며 이유립은 그 짧은 시간에 『환단고기』를 어떻게 위작할 수 있단 말인가?



    일제의 사서史書 수탈收奪
    백당 문정창文定昌(1899~1980) 선생은 『군국일본 조선강점 36년사』(박문당, 1967)에서 “일제는 조선을 강제 병탄한 1910년부터 1911년 말까지 약 1년간, 조선 초대 총독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1852~1919)의 주도로 불온서적을 수색한다며 군경을 동원, 마치 군사작전을 벌이듯 전국 각지에서 51종 20만 권의 사서를 강탈하거나 소각했다.”고 밝혔다.

    이뿐만이 아니다. 사료 수집 기간은 1910년 11월부터 ≪조선사≫ 완간 직전인 1937년까지 27년간 계속되었다.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단군조선 등 우리의 역사를 왜곡 말살하기 위해 마련한, 1938년 6월에 발행된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朝鮮史編修會事業槪要≫에서는 1923년부터 1937년까지 15년 동안 차입한 사료가 무려 4천9백50종이라고 밝히고 있다. 1910년 11월부터 1년 2개월 동안 수거된 서적이 51종에 20여만 권, 그 뒤 15년 동안 차입한 사료가 4천9백50종이다.

    일제는 단군조선 등 한국사 관련 사료 등을 수집 시 한반도는 물론 일본, 중국 및 만주에 있는 것도 수집하였다고 한다. 일본의 사학자이면서 평론가인 하라타사카에루(原田榮)의 저서 『역사와 현대』(1981년 4월 25일 발행)에 보면, “1923년 7월 조선총독부 조선사 편찬위원회 구로이타黑板 고문이 대마도에 사료 탐방을 하였을 때 한국과 관계가 있는 문서, 고기록 등이 다수 대주구 번주藩主 종백작가宗伯爵家에 있는 것을 알고, 고문서류 6만 6천469매, 고기록류 3천576책, 고지도 34매 등을 은폐 또는 분서焚書했다.”고 밝히고 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우리 서적을 압수하고 불태웠는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일제의 사서 수탈과 파괴는 식민지 지배 전 기간에 걸쳐 철저하고 지속적으로 자행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일제의 사서 수탈에 대해 ‘역사 관련 책과는 관련이 없고 그 효과가 미비했다’고 궤변을 늘어놓는 자들이 있다. 침략자들의 간교한 혓바닥에 놀아나 자기의 영혼조차 뺏긴 사람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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