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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인물탐구]

    창세역사 성인열전 | 북부여의 국통을 이은 고구려 시조, 고추모성제高鄒牟聖帝


    이해영 / 객원기자
    * 옛날을 생각건대 옛날 시조始祖 추모왕鄒牟王이 이 땅에 나라를 세웠으니(惟昔 始祖鄒牟王 之創基也)… - <광개토태왕비문> 제1면

    * 하박河泊의 손자요 해와 달의 아들이신 추모성왕鄒牟聖王께서는 북부여北夫餘에서 태어나셨다. 천하사방天下四方이 이 국군國郡이 가장 거룩함을 알지니(河泊之孫 日月之子 鄒牟聖王 元出北夫餘天下四方知此國郡最聖)…
    - 광개토태왕 때 북부여 수사守事인 모두루牟頭婁 묘지명


    아시천제지자我是天帝之子



    바람에 부드러운 기운이 서려 있고, 얼음이 녹으면서 봄이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말을 타고 강 언덕에 올라선 동부여군은 좁은 산곡 사이로 파고들어 가는 하얀색의 무리를 씁쓸한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부여군의 도하渡河를 견제하기 위해 강기슭에 포진한 추모의 병사들도 방패를 접고 철수를 시작하였습니다.

    추모 일행이 강에 막혀 꼼짝하지 못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동부여군은 그들이 배수진을 치거나 결사 항전을 하면 부여군의 피해가 클 것을 염려해 천천히 포위하며 접근했습니다. 그런데 추모는 사전에 강가의 주민을 포섭하여 도강渡江 준비를 해 두었고, 부여군이 꾸물거리는 사이에 강을 건너 버렸습니다. 자신은 상제님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라는 명분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징이 크게 울리고 깃발이 크게 흔들리면서, 부여군의 대형이 반원을 그리며 돌아서기 시작할 무렵, 강 건너편에서 화살 하나가 바람을 가르는 특이한 소리를 내며 날아왔습니다. 화살은 부여군 대장기에 꽂혔습니다. 부르르 떠는 화살 깃을 바라보며 동부여군은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끼며 강 건너편을 바라보았습니다. 강 건너에서 활을 쏜 장수가 말을 탄 채로 활을 머리 위로 흔들었습니다. 너희를 쏘아 맞출 수 있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다, 족함을 알기에 욕되지 않고, 그침을 알기에 위태롭지 않는다는 것인가?

    동부여군은 서둘러 추모의 활이 닿지 않는 곳으로 철군을 명했습니다. 이날의 사건이 동아시아를 격동의 시대로 밀어 넣는 시작이었음을, 동북아시아의 패자霸者 대고구려 제국의 시작이었음을 누가 알았을까? 그리고 해부루, 금와, 대소 3대의 동부여 역사도 고구려가 일으킨 운명의 파도에 쓰러지게 될 줄을 그 누가 알았을까?

    고추모, 고구려를 세우다



    동부여군의 맹렬한 추격을 받던 추모 일행은 극적으로 엄리대수掩利大水(또는 엄시수)를 건너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엄리대수는 차릉수岔陵水라고 하는데, 이는 만주 헤이룽장성을 횡단하여 흐르는 쑹화강을 말합니다. 엄리대수를 건너 졸본천卒本川에 이르러 새 나라를 열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고 하였습니다. 이 고구려를 다른 이름으로는 고려高麗라고도 불렀습니다. 이때가 단기 2276년 서기전 58년입니다. 훗날 고려의 태조 왕건은 이를 잇는다는 의미로 고려라는 국명을 사용하였고, 평양성이 함락된 뒤 대조영이 세운 대진국도 외교 문서에 고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영문 표기 C(K)OREA는 여기서 유래하였습니다.

    고구려 건국 연대에 대한 이견

    고구려의 건국 연대에 대해서 『삼국사기』 「동명성왕본기」에서는 서기전 37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건국 연대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은 소위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직접 만들어서, 고구려는 동명성왕이 아니라 2세기 태조왕 때 건국됐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05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의 한국 측 보고서에서는 고구려가 13대 서천왕 때에 건국되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의 주장을 다시 추종하는, 얼빠진 망국사학입니다.

    고구려 건국 연대에 대해서 중국 측 사서에는 고구려가 서기전 37년 이전부터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중국의 『신당서』에서 시어사侍御史 가언충賈言忠이 「고려비기高麗祕記」를 인용하여 고구려가 서기전 3세기부터 존재했다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당나라에 유학한 신라의 최치원도 ‘고구려 역년 900년 설’에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고추모와 해모수의 관계 그리고 고구려의 의미



    이에 대해서는 고추모성제의 가계를 살펴봐야 합니다. 추모는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단군의 4세손, 즉 고손자高孫子입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부자지간이 아닙니다. 이는 북부여의 역사를 통째로 잘라내 버린 큰 사건입니다.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단군의 아들 모수리는 북부여 2세 단군이 됩니다. 그리고 해모수의 둘째 아들 고진高辰은 위만과 싸워 공을 세워 고구려후高句麗候(고리군왕槀離郡王)가 됩니다. 해모수와 5세 고두막단군도 모두 이 고리국, 즉 고구려 출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추모는 자신의 원뿌리인 고구려를 나라 이름으로 삼은 것입니다. 이 고진의 손자가 옥저후沃沮侯 불리지弗離支입니다. 이 불리지가 일찍이 서압록을 지나다가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만나 기뻐하며 장가를 들었습니다. 하백은 원래 천신을 숭배하고 물을 다스리는 신이었습니다. 단군조선 때부터 왕비가 이 하백 집안에서 나왔습니다. 불리지와 유화 사이에서 아들이 탄생하니 바로 고추모였습니다. 때는 단기 2255년 기원전 79년 임인년 5월 5일, 한나라 왕 소제昭帝 불릉弗陵 원봉元鳳 2년의 일입니다.

    불리지가 일찍 세상을 뜨자, 유화 부인은 아들 추모를 데리고 웅심산으로 돌아갔습니다. 지금의 서란舒蘭입니다. 추모가 장성하여 사방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가섭원, 즉 동부여의 해부루왕이 도읍한 곳을 택해 살면서 관가에서 말 기르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관가의 미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이에 추모는 어머니의 뜻을 받들어 제 고향인 북부여로 찾아가기 위해 오이, 마리, 협보와 함께 도망하였는데, 이를 추적한 동부여 군대를 어머니 유화 부인의 세력인 하백의 도움으로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소서노와 혼인하다

    이때 북부여 6세 고무서단군에게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때 스스로를 천제의 아들(天帝子), 즉 해모수단군의 후손이라고 밝히는 추모를 범상치 않은 인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둘째 딸인 소서노와 혼인시켜 사위로 삼고, 대통을 물려주었습니다. 이때가 기원전 58년입니다. 고추모는 북부여의 7세 단군이 된 것입니다. 이후 나라 이름을 북부여에서 고구려로 바꾼 시점이 기원전 37년으로, 삼국사기는 바로 이때를 고구려의 기원으로 잡은 것입니다.

    천 년 제국 고구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고구려 역년이 900년이 되는 것일까요? 이는 고추모가 ‘고조부인 해모수단군을 태조로 하여 제사를 모셨다(祠解慕漱 爲太祖)’는 『삼성기 상』 기록에 그 결정적 해답의 실마리가 있습니다. 해모수가 북부여를 세운 때로 계산하면 고구려 역년은 900년이 약간 넘는 천 년 제국입니다. 고구려는 북부여의 연장선상에 있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북부여를 원原고구려라 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 멸망 후 대중상이 세운 대진국도 처음에는 나라 이름을 (후後)고구려라고 했습니다. 원고구려, 고구려, 후고구려로 이어지는 역사는 우리 국통맥을 잇는 결정적 요소입니다. 고구려에서 ‘구려(구리)’라는 명사 자체가 ‘나라’라는 의미가 있으므로 단어대로 해석하면 ‘고씨의 나라’ 또는 ‘높은 나라’라는 의미가 됩니다.

    신궁 고추모성제와 어머니 유화 부인


    고구려 건국 시조 고추모성제는 신궁神弓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추모가 일곱 살 때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여 속어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뜻하는 주몽을 이름으로 정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의 「동명왕편」에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주몽이 작별할 때 차마 떠나지 못하니 그 어미가 말하기를 “어미 걱정은 말아 다오” 하고는 오곡의 종자를 싸 주었다. 주몽은 생이별하는 마음으로 애를 끓이다가 그만 그 종자 씨앗을 잊어버렸다. 주몽이 큰 나무에서 쉬고 있는데 한 쌍의 비둘기가 날아왔다. 주몽이 말하기를 “이는 틀림없이 어머니가 사자를 시켜 보리 씨를 보내온 것이다.” 하고는 활을 당겨 쏘니 한 살에 다 떨어졌다. 목구멍을 열어 보리 씨를 꺼내고는 비둘기에 물을 뿌리자 다시 살아나서 날아갔다.

    이 부분에서는 유화 부인의 위상이 엿보입니다. 추모 이야기의 원본에서 묘사하는 유화 부인은 신모神母의 신통력을 지닌 여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하라於瑕羅 소서노召西奴


    고추모성제가 고구려를 건국하고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또 다른 인물은 어하라於瑕羅 소서노召西奴입니다. 어하라는 후에 소서노가 자신의 아들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백제를 건국하는 과정에서 고추모성제가 책봉한 왕의 호칭입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소서노는 북부여의 마지막 단군 6세 고무서의 둘째 따님으로 당찬 여걸이었습니다. 고추모 자신이 북부여의 시조인 해모수단군의 후손이고, 그 배우자인 소서노가 황실의 공주 출신이니, 당시 단군조선 이후 혼란한 열국 시대의 혼란상을 극복하는 데 큰 명분과 힘이 되었습니다. 북부여 황실의 정통성과 함께 막강한 재력으로 고구려를 창업하고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소서노는 이후 백제 건국 과정에서도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는 백제 건국 과정에서 자세하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동북아 대제국 고구려 건국과 도읍을 정한 일


    새로운 세력을 모으다.
    엄리대수를 건넌 추모 일행은 모둔곡毛屯谷에 이르렀습니다. 모둔은 여진어로 나무라는 뜻으로 모둔곡은 나무가 우거진 골짜기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모둔곡으로 추정하는 지역은 여러 곳이지만,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아내기가 어렵습니다.

    이곳에서 세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한 사람은 삼베옷을, 한 사람은 장삼長衫을, 또 한 사람은 물풀 옷을 입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각기 재사再思, 무골武骨, 묵거默居로, 실제로는 세 집단을 의인화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새로 합류한 집단의 거주지와 삶의 방식이 다르고, 문명 수준도 달랐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서로 고립된 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면서 수많은 다양성이 발현되는데 이는 커다란 자원이 될 수 있습니다. 이들을 통합하고 발전에 대한 에너지를 불어넣는 일은 지도자의 몫인데, 고추모는 이를 이룰 수 있었던 영웅이었습니다. 고추모는 재사에게는 극씨克氏를, 무골에게 중실씨仲室氏, 묵거에게는 소실씨少室氏를 내려 주며, ‘하늘의 명을 받아 나라의 기틀을 세우려는데, 때마침 어진 인물 세 명을 만났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들을 각기 재능을 헤아려 일을 맡기고 졸본천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였습니다.

    뛰어난 어머니 밑에서 자라난 고추모는 출중한 무예와 비상한 리더십, 고무서단군의 마음에 들 정도의 탁월한 인품과 여걸 소서노의 도움으로 여러 새로운 집단을 아우르며 대제국 고구려를 건국하고 그 초석을 다져 나갔습니다.

    송양松讓이 다스리는 비류국을 병합
    세력을 키워 가던 고구려는 비류수沸流水를 따라 올라가다 송양松讓이 다스리는 비류국과 만나게 됩니다. 추모를 만난 송양은 추모에게 자신의 속국이 되라고 합니다. 이에 격분한 추모는 활쏘기 시합을 해서 송양을 꺾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단순한 활쏘기만이 아니라, 복합적인 관계 속에서 고구려는 비류국을 병합하게 됩니다.

    이규보의 「동명왕편」을 보면 추모의 신하인 부분노扶芬奴가 비류국 궁궐의 오래된 북과 악기를 털어 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뒤에 어느 나라가 더 오래되었는가 하는 외교 분쟁과 군대를 동원한 포위 공격 등으로 비류국의 항복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추모는 항복한 송양을 후대하여 비류국의 통치권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다물도多勿都라고 하였습니다. 다물多勿은 고구려 말로 옛 땅을 회복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곳의 명칭으로 삼은 것입니다. 이때 성곽과 궁전을 지어 도읍으로서 면모를 세웠습니다. 이와 함께 연호를 다물多勿이라고 하였습니다. 이후 재위 22년인 단기 2297년 기원전 37년 갑신년에 평락平樂으로 연호를 고쳤습니다.

    행인국과 북옥저를 멸망시키다
    도읍을 정하고 든든한 근거지 요새를 확보한 뒤, 고추모성제는 본격적인 정복 전쟁에 나서게 됩니다. 건국 공신인 오이와 부분노가 그 선봉에 섰습니다. 이후 16년 동안 추모는 두 번의 중요한 전쟁을 성공시켰습니다.

    재위 6년인 기원전 32년 10월에 오이와 부분노로 하여금 태백산 동남쪽에 있던 행인국荇人國을 점령하였습니다. 그리고 평락 11년 갑오년인 단기 2307년, 기원전 27년 10월에는 부위염扶尉猒에게 명하여 서간도 일대에 있던 북옥저北沃沮를 정벌하여 멸하게 하고, 이듬해에 졸본에서 눌견으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눌견은 늘 봄이라는 이두식 표기로 지금의 상춘常春 주가성자朱家城子입니다. 고추모성제가 정복한 이 나라들은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거수국渠帥國들이었을 것입니다. 고추모성제는 서쪽에서 오는 한漢 제국에 맞서기 위해 이렇게 동남쪽으로 정복 방향을 잡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구려 기틀을 다지다
    이 두 번의 원정을 위해서 추모는 쉴 새 없이 일하고 준비해야 했을 것입니다. 전쟁의 승패는 물자와 그 보급에 있습니다. 지금처럼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던 당시 물자를 보급하는 일은 상당히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고 가는 과정에서 여러 촌락들을 설득하거나 무력으로 굴복시키며 나아가야 했을 것입니다.

    고추모성제는 두 차례의 정복 전쟁을 펼치며, 고구려의 기틀을 마련해 나갔습니다. 짧은 시간 동안 성제가 작은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정열적으로 움직였다는 사실에 박수를 보내야 할 것입니다.

    이 지역에 미리 자리 잡고 있던 송양이나 다른 소국들은 몇 대에 걸쳐 터전을 이루었지만, 현실에 안주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평화주의자로 더 이상의 도전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주변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대제국으로 성장한 한나라의 동진이 시작되어, 번조선이 무너지고 북부여가 일어나 이에 대항하는 전쟁의 시대였습니다. 동부여도 위기를 느끼고 확장과 변화를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불원간에 한나라 군대나 동부여 군대가 이 지역까지 밀어닥칠 것입니다.

    갑작스럽게 무리를 이끌고 뛰어든 젊은 명궁은 이 지역을 파괴한 것이 아니라, 잠든 그들을 깨웠습니다. 그리고 호랑이와 같은 맹렬한 활약으로 서쪽에서 다가오는 거대한 파도에 맞서 더 거대한 쓰나미와 같은 파도를 낳았습니다.

    붕어崩御, 그리고 만세萬世의 가르침


    기원전 19년 4월 부여에서 아들 유리가 고구려로 왔습니다. 추모가 동부여를 떠날 때 부인 예씨禮氏는 임신 중이었습니다. 모친 밑에서 자란 유리는 추모를 닮아 활을 잘 쏘았습니다. 유리는 추모가 남긴 유물인 부러진 검 조각을 찾게 됩니다. 이어 모친과 함께 옥지屋智, 구추句鄒, 도조都祖라는 세 명의 부하를 데리고 졸본으로 가서 추모를 만납니다. 이에 추모는 유리를 태자로 임명하였습니다.

    이는 기원전 24년 8월 고추모성제의 어머니인 유화 부인이 세상을 떠난 이후, 대소에 의해 부인 예씨와 유리 왕자가 생명의 위협을 느꼈거나, 그렇다고 판단한 고추모성제에 의해서 취해진 조치라고 생각됩니다. 또는 고추모성제가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 일부러 그들을 데려오도록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무튼 유리를 태자로 임명한 5개월 후, 만 40세라는 한창나이에 고추모성제는 붕어하게 됩니다. 고구려 건국과 발전에 헌신했던 소서노와 그 아들 비류와 온조를 남겨 두어 분란의 씨앗을 둔 채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백제 편에서 자세하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아버지를 용산龍山에 장사 지내고, 태자인 유리琉璃가 즉위하니 바로 2세 유리명열제琉璃明烈帝입니다.

    고추모성제는 붕어하기 이전에 다음과 같은 조칙을 내려 주었습니다. 이는 우주 진리의 대의를 논한 경전인 『대변경大辯經』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늘의 신(삼신)이 만인萬人을 한 모습으로 창조하고 삼진三眞을 고르게 부여하셨느니라. 이에 사람은 하늘을 대행하여 능히 이 세상에 서게 되었다. 하물며 우리나라의 선조는 북부여에서 태어나신 천제(상제님)의 아들[天帝之子]이 아니더냐!

    슬기로운 이는 마음을 비우고 고요하게 하여 계율을 잘 지켜 삿된 기운을 영원히 끊나니[永絶邪氣], 그 마음이 편안하고 태평하면 저절로 세상 사람과 더불어 매사에 올바르게 행동하게 되느니라. 군사를 쓰는 것은 침략을 막기 위함이며, 형벌의 집행은 죄악을 뿌리 뽑기 위함이니라. 그런고로 마음의 비움이 지극하면 고요함이 생겨나고, 고요함이 지극하면 지혜가 충만하고, 지혜가 지극하면 덕이 높아지느니라. 따라서 마음을 비워 가르침을 듣고, 고요한 마음으로 사리를 판단하고, 지혜로 만물을 다스리고, 덕으로 사람을 건지느니라.

    이것이 곧 신시배달 시대에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 인간의 마음을 연 교화의 방도이니, 천신을 위해 본성을 환히 밝히고, 뭇 창생을 위해 법을 세우고, 선왕을 위해 공덕을 완수하고, 천하만세를 위해 지혜와 생명을 함께 닦아[智生雙修] 교화를 이루느니라.


    고추모성제의 유훈을 읽다 보면 그 내용이 모든 종교 성자들의 가르침 못지않고, 어떻게 보면 그보다 더 근원적이기 때문에 놀랍기도 합니다. 유훈을 보면, 아주 심원한 깨달음의 도통 경계에서 전하는 우리 역사문화의 근본 주제가 들어 있습니다. 인간의 창조론에 대해서 내려 주신 첫 구절은, 세 가지 참된 것(性命精), 즉 조물주의 신성과 광명, 지혜가 모든 인간에게 고르게 다 부여되었다는 겁니다. 우리들 내면에는 우주 조물주의 삼신이 순도 100% 그대로 작동되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위대하며 이토록 숭고한 존재입니다. 읽을수록 마음속에 새겨 넣을 도언道言입니다. (〈환단고기 북콘서트〉 광주 편 참고)

    고추모성제에 대한 숭배


    고추모성제에 대한 숭배는 고려, 조선 때에도 이어졌는데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는 서경 장락궁에 ‘동명성제사東明聖帝祠’가 있어 임금이 직접 쓴 문서를 전달해 제사 지내고 매달 초하루 혹 보름에 제사 지냈다고 합니다. 조선 시대에는 단군, 기자와 함께 평양의 삼성三聖으로 모셔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당 전쟁 당시 고구려의 요동성이 당에게 공격을 받는 기록에서, 성안에는 추모의 창과 갑옷을 모시는 사당이 있고, 무녀가 있었다는 언급이 남아 있습니다. 영화 《안시성》에서는 양만춘이 추모가 사용하던 신궁神弓으로 당 태종의 눈을 맞추는 장면이 나왔는데, 아마도 고구려의 주요 지역에는 추모와 관련된 유물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대 고구려 사람들은 천제의 아들이자, 하백의 외손인 천손국天孫國이란 자부심이 대단히 컸습니다. 그래서 추모를 성스러운 대왕이란 의미로 성제聖帝라고 부르며 시조신으로 모셨습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인 유화 부인도 신묘神廟에 모시고 부여신으로 추앙하였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10월에 동맹東盟이라는 천제를 국동대혈國東大穴에서 모셨습니다. 여기서 혈은 동굴이라는 의미로 생명을 잉태하는 자궁을 상징합니다. 아마도 유화 부인을 지모신地母神이나 농경신으로 받들어 풍년을 기원하며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고구려는 상제님께 직접 천제를 지내는 동방 천자문화의 종주국이었습니다.

    <참고문헌>

    『역주본 환단고기』(안경전, 상생출판, 2012)
    『이것이 개벽이다 하』(안경전, 상생출판, 2014)
    『단숨에 읽는 한국사』(오정윤, 베이직 북스, 2013)


    고구려 최초 도읍지 졸본은 어디인가?
    현재 고추모성제가 세운 고구려 첫 도읍지에 대해서 『위서魏書』는 홀승골성紇升骨城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를 근거로 강단 사학계에서는 고구려의 최초 도읍지를 혼강渾江 유역 요령성 환인현桓仁縣에 있는 오녀산성五女山城으로 비정하고 있습니다. 혼강 유역 해발 800미터 오녀산 정상에 약 60만 제곱미터에 달하는 난공불락의 산성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철기와 도기, 화살촉, 갑편甲片 등이 다수 출토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고구려의 많은 유적들이 그렇듯이 정확한 연구나 유적 발굴을 통해 비정한 것은 아닙니다. 2세 유리명제 재위 21년인 서기 2년 국내성으로 천도하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는데, 이 국내성을 길림성 집안集安이라고 비정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 지역에서는 서기전 1세기에서 서기 1세기 무렵의 유물들이 출토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서 최초 도읍지는 지금 비정하는 오녀산성보다 더 서쪽에서 찾아야 하지 않느냐 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초기 고구려가 한나라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을 보면 타당성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정인보가 지은 『조선사연구』에서는 연해주의 수분하시綏芬河市가 있는 수분하 지역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쪽이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북부여기』에서 고무서단군이 졸본천에서 즉위하고, 다음 해에 영고탑으로 사냥을 가서 흰 노루를 잡았다고 했는데, 영고탑은 지금의 해림시로 수분하에서는 가깝지만 환인에서는 너무 멉니다. 사냥을 이렇게 먼 곳까지 오지는 않습니다.

    둘째, 『고구려국본기』에 연타발은 졸본 사람으로 남북 갈사를 왕래하며 큰 재산을 모았다고 했는데, 남갈사는 훈춘하 지역이고 북갈사는 오소리강 유역이므로 그 사이에 위치한 수분하가 졸본일 가능성이 큽니다.

    셋째, 고추모성제가 기원전 27년에 북옥저를 정벌하고 다음 해에 눌견으로 천도했는데, 눌견은 장춘 지방이고 그 남쪽에 환인현이 있으므로, 고추모가 등극하던 기원전 58년에는 환인현까지 아직 세력이 미치지 못했을 것입니다.

    넷째, 고추모성제께서 동부여를 떠나서 엄리대수를 건너고 모둔곡을 지났는데, 엄리대수는 쑹화강이고 모둔곡은 목단강 유역이므로 이곳과 가까이 있는 수분하시가 졸본일 가능성이 큽니다. 따라서 이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과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고구려 개국 공신들
    고추모성제가 고구려를 건국하는 데는 여러 공신들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여기서는 그들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이烏伊, 마리摩離
    동부여 사람들이 추모를 죽이려 할 때 추모가 어머니의 명을 받들어 오이, 마리, 협보 세 사람과 친구의 의를 맺고 함께 길을 떠났습니다. 이들은 차릉수, 즉 엄리대수에서 부여군의 추격을 따돌리고 고구려를 건국하였습니다.

    협보陜父
    협보는 고구려 2세 유리명열제가 사냥을 나가 5개월 동안 회궁하지 않자 대보大輔로서 직간하였습니다. 열제가 이를 듣지 않자 대동강 부근으로 달아나 지금의 평양 인근 마한산에 은거하였습니다. 이때 따라와서 사는 자가 수백여 가구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해 흉년이 들어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길에 가득하였습니다. 이에 협보는 장차 변란이 있을 줄 알고 무리를 꾀어 양식을 싸서 배를 타고 패수를 따라 내려왔습니다. 대동강 어귀의 진남포鎭南浦 지역인 해포海浦를 거쳐 항해하여 곧장 구야한국狗邪韓國에 이르니, 곧 가라해의 북쪽 해안이었습니다. 가라해伽羅海는 일본 규슈의 남서쪽 바다로 사가현佐賀縣 서북 해안에 있는 가라쓰唐津시는 대륙 교통의 요지입니다. 몇 달을 이곳에서 지내다가 아소산阿蘇山으로 옮겨 살았습니다. 협보는 이곳에 다파라국多婆羅國을 건국하였습니다. 다파라국은 고구려 열제烈帝의 통제를 받는, 일본에 세워진 고구려의 분국입니다.

    연타발延陀勃
    고추모성제가 고구려를 개국할 때 재정적으로 큰 공을 세운 사람이 졸본 사람 연타발입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연타발의 딸 소서노가 과부로서 고추모의 왕비가 된 것으로 잘못 인식하고, 왜곡해 기록하였습니다. 연타발은 남북 갈사 지역을 오가면서 이재理財를 잘하여 엄청난 돈을 모았고, 남몰래 추모를 도와 창업의 기틀을 마련하고 도읍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북갈사는 만주 우수리강 일대이고, 남갈사는 혼춘琿春 지방입니다.
    뒤에 무리를 이끌고 구려하九黎河로 옮겨 물고기와 소금을 사고팔아 이익을 얻었습니다. 구려하는 일명 고구려하로 지금의 대요하를 말합니다. 고추모성제가 북옥저를 칠 때 양곡 5천 석을 바쳐 군자금으로 사용하게 하였습니다.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지인 눌견으로 천도할 때 연타발은 먼저 양곡을 자원하여 바치고 떠도는 백성을 불러모아 어루만져 위로하며 임금의 일을 부지런히 도왔습니다. 그 공덕으로 좌원坐原에 봉토를 얻었습니다. 고추모성제 평락 13년인 기원전 25년 병신년 봄 3월에 그는 여든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부분노扶芬奴
    부분노는 고구려의 시조 고추모성제와 2대 유리명열제를 보좌하여 고구려 창업 초기 기틀을 다진 대표적 장수입니다. 고추모성제의 명령에 따라 군사를 이끌고 행인국을 쳐서 고구려의 영토로 만들었고, 유리명열제 때는 선비족을 토벌하여 속민으로 만들었습니다. 특히 선비족을 토벌할 때는 탁월한 지략으로 공을 세웠습니다.
    즉 고구려군이 약하다고 소문을 내고 일부러 유인하게 한 뒤, 자신은 정병을 거느리고 주변에 미리 매복하여, 고구려군을 우습게 여기고 성을 나온 선비족을 앞뒤로 협공하여 항복을 받아 냈습니다. 이를 통해 그가 단순히 무력만 자랑하는 용장이 아니라, 병법에도 통달한 지장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부분노 장군이 언제 어디에서 태어나고, 출신 부족이나 가계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삼국사기』에 겨우 두 차례 나오는 전공만으로도 초기 고구려가 부국강병을 바탕으로 성장하는 데 큰 공로를 세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염모冉牟와 모두루牟頭婁의 선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장수 중에 모두루牟頭婁가 있습니다. 현재 중국 지린성吉林省 집안시에 있는 모두루 무덤에는 묘지명墓誌銘이 있는데, 그중 일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추모왕(주몽)이 창업의 기초를 다질 때 대형大兄 염모冉牟의 선조는 왕을 따라 북부여로부터 고구려 도성에 와서 기업을 쌓았다. 노객奴客(모두루가 스스로를 낮춘 말)의 선조는 염모 선조의 가신으로 옛 주인을 따라와서 대대로 관은을 받았고 염모 가족의 배려를 받았다.


    이 비문의 번역에 의하면 염모는 평생 광개토태왕을 따라 종군해서 부여, 모용씨, 백제와의 전투에 참전했고, 광개토태왕이 붕어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 묘지명에 따르면, 고추모성제가 동부여를 탈출할 때 오이, 마리, 협보 외에 염모의 선조와 염모의 가신인 모두루의 선조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의 가족도 함께였습니다.

    염모의 선조는 지도자급 인물이며, 그는 모두루를 포함한 자신의 부하들과 대를 이어 주종 관계를 지속해 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이들이 종족적 결속력을 지닌 집단이었음을 알게 해 줍니다.

    여기서 더욱 중요한 사실은 모두루의 선조가 북부여에서부터 고추모성제를 수행했다는 기사입니다. 즉 이들은 유화 부인과 추모가 처음 이동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주종 관계를 맺은 집단으로 고구려 건국 세력의 핵심 중의 핵심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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