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의 인연, 상생방송으로 다시 잇다 외(유정숙, 김동현, 박가령)

[입도수기]

20년 전의 인연, 상생방송으로 다시 잇다


유정숙(여, 71) / 서울강북도장 / 150년 음력 12월 입도

대순에서 권한 책이 증산도와의 인연이 되고


입도 수기를 쓰면서 제가 걸어온 여정을 돌아봤습니다. 그동안 힘들었지만, 부끄럽지 않게 살기 위해 이를 악물고 최선을 다하며 살았습니다. 잘살지는 못했지만 잘살아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40년 전인 1981년 남편 사업이 도산되고 처음으로 3개월 된 둘째 아이와 오빠를 데리고 전셋집을 얻어 이사를 간 곳이 대순 신앙을 하던 사람의 집이었습니다. 집주인이 어느 날 대순진리회에 가 보자고 해서 따라간 곳이 중곡동에 있던 대순진리회 본부였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하던 저에겐 너무도 낯설었고 이상한 곳으로 느껴졌습니다. 절 같지 않은 절을 수없이 하던 여인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잘못 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인집에 온 선감이 책을 보라며 갖다 주던 서적들은 ‘부처님이 계신다면’, ‘한의 뿌리’, ‘춘산채지가’ 등의 비결 책들이었습니다.

그때 책이 좋게 보였던 것은 아마도 오늘의 증산도 입문으로 이끈 다리 역할을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사춘기 아들의 방황을 도장 교육에 맡기다


구로동에서 6개월을 살고 왕십리로 이사를 하면서 대순진리회와 인연을 끊었습니다. 친정은 기독교 신앙을 하고 있고, 시댁은 불교 신앙을 하는 전주 이씨 집안입니다. 종교적 문제로 갈등하며 살아야 하는 것도 어려웠고 불교와 기독교 어디에도 소속될 형편이 못 되었습니다. 종교적 소속감에서의 갈등 문제를 내려놓고서라도, 삶의 여전사가 되어 지내면서 허리가 구부정한 병을 얻었지만 아프다고 엄살을 부릴 형편도 못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를 보낸 큰아들이 늦게 찾아온 사춘기로 삐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 계열 학교에 다니는 큰아들이 성경 수업을 받은 날에는 제가 들으라는 듯 투덜대면서 수업 내용을 이야기했는데 듣기가 거북했습니다.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 신촌 로터리에 있는 홍익문고에서 『증산도의 진리』 책자 뒤에 있는 당시의 증산도 서울신촌도장 전화번호를 알아내 연락을 드렸습니다. 자식 교육을 위해 도장에 데려가서 교육을 받고 수행을 하게 하였습니다. 아들은 조금씩 마음을 잡아 갔습니다. 이후 아들은 대학에 진학했으며, 지금은 결혼을 하고 두 딸의 아버지가 되어 병원 원무과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 문제들을 해결해 줄 주인을 찾아서


저는 건강이 좋지 않아 병원에 다니게 되었고 그로 인해 가게를 접었습니다. 집에 있으면서 우울하고 무력해진 마음을 다스리며 여러 종교 채널을 보다가 만나게 된 방송이 상생방송이었습니다.

저는 아마도 이 길을 찾기 위해서 그동안 헤매었나 봅니다. 20년 전, 아들의 사춘기 방황을 잡아 보려고 증산도에 갔다 온 뒤 읽게 된 『증산도의 진리』, 『도전』, 『관통 증산도』, 생장염장CD 등의 내용을 방송을 통해 다시 듣게 되었습니다.

현실 사회문제, 문란한 성도덕과 패륜 문제, 곳곳에서 터지는 지진과 이상기후, 땅이 꺼지는 싱크홀 현상, 닭·오리·돼지 같은 가축들이 조류독감과 돼지 콜레라로 생매장되는 것, 코로나19의 변이·변종 바이러스, 몰락하는 경제 등등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먹을 것은 많은데 환경오염 때문에 먹자니 죽겠고, 그렇다고 안 먹으면 굶어 죽겠으니, 이미 지구는 병들었다고 느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고칠 방법을 지닌 주인을 찾아가자고 결심을 했습니다. 예전에 교육을 받으면서, 상제님의 천지공사로 상씨름 전에 소를 몰고 38선을 넘어 북으로 간 정주영 회장이 생각났습니다. 때가 오는 것을 보여 주는데도 손을 놓고 멍청하게 지냈던 제가 찾아간 곳이 증산도 서울강북도장입니다.

늦었지만 ‘지금이 시작이니 괜찮다, 괜찮다’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거북이 걸음으로 열심히 하자라는 마음으로 팔관법 공부를 했고, 매일은 아니지만 도장에 가서 21일 기도와 주문수행을 하였습니다. 『개벽 실제 상황』 책을 보고 짬짬이 <병란개벽 북콘서트> 유튜브 시청을 하며 정신없이 한 달을 보냈습니다.

늦깎이 신앙인이지만 입도식을 올릴 수 있도록 진리를 교육시켜 주신 서울강북도장의 남상현 포정님과 서호덕 포감님, 김대현 포감님께 감사함을 표합니다. 도장 안 벽면에 걸려 있는 현수막의 글귀 ‘판몰이 도수’에 참여할 수 있는 일꾼이 되도록 열심히 도공 수행을 하여 허리를 치유해서 꼿꼿이 만들겠습니다. 저도 살고 남도 살리는 일꾼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는 구도자가 되겠습니다. ◎

“너무 따뜻하고 편안해서 너희들에게 이야기한다”


김동현(남, 54) / 서울동대문도장 / 150년 음력 12월 입도

온갖 우여곡절을 겪었던 삶


저는 전남 진도에서 3남 3녀 중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취업해서 동두천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군 복무를 마치고서는 서울에서 간판업을 하였는데, 고생은 많이 했지만 성실하게 일하여 한동안 사업이 잘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호프집도 하면서 돈을 많이 벌었지만 임대차 문제로 힘든 일을 겪었고, 간판업과 크레인 사업에서 사고가 발생했으며, 형님이 사고로 돌아가시기도 했습니다. 가정에도 우환이 계속되었습니다. 아버님과 장인어른께서 암으로 돌아가시고. 동생도 3층에서 떨어져 병원에서 2년 동안 수발을 들어 주기도 했습니다. 또한 집에 불이 나서 재산을 다 날리고 오갈 데가 없어졌습니다. 애들은 친척 집에 보내고 차에서 거의 1년을 생활하며 일을 해야 했습니다.

직업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건설 회사에 찾아가서 월급 안 받을 테니 일만 배울 수 있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타일을 배우고 청소도 하면서 일을 배워 나갔지만 빚은 잔뜩 늘어나,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저녁에는 호프집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버텼습니다. 화물차 한 대 가지고 차에서 약 4년을 살았습니다. 그러다 2천만 원을 가지고 의정부로 이사 와서 가족들과 새로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따뜻한 증산도 도장


그렇게 건축 일을 하던 중, 상가를 짓는데 건축 현장에서 대순진리회와 관련된 사람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저에게 주문을 한번 해 보라고 권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무언가 어두운 느낌이 들었지만, 그때 주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업하면서 너무 많은 사고를 겪다 보니 기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때부터 혼자 밤에 주문을 읽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물을 떠놓고 자시子時에 기도를 했습니다. 다른 도시에 몇 달씩 일을 하러 갈 때도 매일 자시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고도 안 나고 차츰 일이 자리를 잡고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13년 정도 자시에 일어나 목욕재계하고 청수 올리고 1시간씩 주문을 읽었습니다.

‘사람 살릴 수 있게 큰 도량을 만들어 주십시오’, 이것이 제 기도였습니다. 수행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달라고 기도를 했는데, 얼마 있어서 포천에 땅을 사게 되었습니다. 3층짜리 집을 지어서 팔려고 했는데, 집은 팔리지 않고 모델하우스로 해서 고객들에게 여러 채 집을 지어 주었습니다. 다시 집을 부동산에 내놓았는데 거기서 채헌석 도생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집이 잘 팔리지 않아 고민하면서 채헌석 도생님과 대화하던 중 “이건 절이다. 절로 팔아 봐라.”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서 ‘여기서 사람이나 살려 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채 도생님이 “혹시 증산도 들어보셨어요? 실제 상제님 계신 곳이 증산도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채헌석 도생님을 따라 서울동대문도장을 방문했는데 맑고 투명한 첫 느낌이 아주 편안했습니다.

도장에 오니 기운 자체가 엄청나게 틀렸습니다. 저는 조금씩 느낄 수 있습니다. 교회나 절도 다녀 봤지만 불편함만 느꼈습니다. 증산도는 너무 편하고 따뜻한 느낌을 받아 그냥 가고 싶어졌습니다. 증산도 도장에 와서 제대로 수행하는 법을 배운 이후로는 자시에 시작해서 새벽 4시나 4시 반까지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새벽에 1~ 2시간 잠자고 출근하는데도 전혀 피곤하지 않습니다. 몸이 뜨거워지고 힘이 나서 시간만 되면 수행을 하였습니다.

지난주에는 주문지를 사 가서 애들한테 주었습니다. 아들 둘이 있는데 제 일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아이들도 깨끗이 씻고 청결한 마음으로 해 보라고 물 한 그릇 떠놓고 절하는 방법을 배운 그대로 시켰습니다. 주문을 같이 따라 합니다. 아내도 몇 번 가르쳐 주고 직원 한 명도 같이 하고 있습니다.

“너무 따뜻하고 편안해서 너희들에게 이야기한다. 증산도는 투명하고, 뜨겁고, 상제님이 계신다. 이걸 해야 한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모두들 “예 알겠습니다.” 하고 따라 하고 있습니다. 청수 모신 복록수도 먹게 하는데, 큰애는 몸이 안 좋아 복록수를 주면 잘 먹습니다. 저는 아이들한테 “포천에 와서 절하고 가라.”고 합니다. 증산도는 편하고 좋습니다. 포천 집 3층이 기도방이 되었습니다.

정말 많이 살리고 싶어요


술 접대, 스키, 골프 접대, JC, 로타리, 육성회, 활동은 물론이고 호프집 등을 오픈하면 화분이 500개씩 들어오곤 했지만 그건 다 깨졌습니다. 노래방도 가 주고 골프도 쳐 주고 해야 되는데 다 깨지더군요. 하지만 기도할 때는 영업 접대를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술도 안 먹고. 오직 기도만 했을 뿐인데 그 전보다 더 편하고 일을 해도 수익이 생깁니다.

증산도에 들어와서 너무 행복합니다. 제가 하는 일이 저 혼자 살고자 함이 아니고 가족들을 다 살리려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는 저를 위해서 빌지는 않습니다. 칠성경을 읽을 때 저는 아내의 간지를 넣어서 7번을 송주합니다. 가족을 위해, 가족을 살리고자 기도한 것입니다.

“너희들도 그렇게 하면 마음이 뿌듯할 거다”라고 아이들한테 이야기합니다. 그럴 수 있어서 저는 너무 행복합니다. 아이들이 믿음을 줄 때까지는 앞장서서 보여 줘야 합니다. 이전처럼 1시간 기도 수행을 하면 가족들이 따라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 시간을 하니까 따라옵니다. 진실하게 살고 올바른 이야기를 하니까 따라옵니다.

앞으로는 더 투명하고 떳떳하게 신앙을 할 것이고, 증산도 하면서 많이 발전했다고 이야기하며 사람들을 인도할 것입니다. 정말 살리고 싶습니다. 저를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잠을 조금밖에 안 자는데 어떻게 일을 하느냐며 믿지 않지만 제 얼굴은 더 좋아졌습니다.

저는 상생방송과 주문을 틀어 놓고 일을 합니다. 교회 다니는 친구가 힘들어하며 “나 좀 살려 달라.”고 하길래 “나는 증산도 다니고 있다. 참 좋더라. 언제 한번 가 보자. 기도 배우러 다니고 있어.”라면서 같이 한번 가자고 했습니다. 입도 후에는 사람들을 많이 인도하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

20년 만에 다시 만난 태을주


박가령(여, 23) / 김해장유도장 / 150년 음력 12월 입도

도장 가는 걸 더 좋아했던 아이


제가 태어나기 전 저희 조상님께서 셋째 이모 꿈에 나타나 증산도로 직접 인도해 주셔서 저희 일가 중 제일 먼저 이모가 상제님의 진리를 만나 신앙을 하였습니다. 이모는 가족들에게 상제님의 진리와 개벽에 대해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몇 년 뒤 제 아버지께서 어느 날 크고 반짝반짝 빛나는 미륵부처님 꿈을 꾸시고는 며칠 뒤 그것이 태몽이었다는 걸 아셨다고 합니다.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태몽과는 확연히 달랐고, 아버지께선 빛이 나는 미륵부처님이 나타나신 태몽은 그 어떤 꿈보다 더 값지고 감명 깊었다고 하셨답니다.

그래서 이모의 도움으로 저희 부모님 또한 입도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임신하고 나서 틈틈이 헤드셋을 배에 대고 태을주를 들려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를 시작으로, 어머니와 아버지가 가족 신앙을 하셨습니다. 직접 신단을 제작하시는 등 정성을 다해 상제님과 태모님, 조상님을 모시며 하루도 빠짐없이 열심히 수행을 하셨다고 합니다.

인간이 세상의 빛을 보고 태어나서 자장가를 듣게 되지만, 제가 어머니로부터 들은 자장가는 저에게는 세상의 흔한 자장가가 아닌 종도사님의 태을주였습니다. 태을주를 태교 음악처럼 접한 덕분에 어머니의 배 속에서부터 상제님의 보호를 받으며 태어나게 되었고 어머니는 갓난아기였던 저를 데리고 항상 도장에 나가셨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가 도장에서 여기저기 기어 다니다 포정님 품에 안겨 태을주를 듣기도 하고 집에서는 사부님의 음성이 담긴 태을주 테이프를 항상 틀어 놓아 듣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또래 친구들이 놀이터에서 흙장난을 하며 동요나 만화 주제곡을 흥얼거릴 때 저는 부모님 따라 도장에 가서 태을주를 듣고 따라 하는 그 시간들을 놀이터에서 노는 것만큼이나 즐거워했고, 누가 읽으라고 시키기도 전에 서툰 발음으로 좋아서 따라 읽었다고 합니다. 그런 시간들이 늘어나 태을주가 무의식적으로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유아 때 어머니를 따라서 증산도에 입문을 하였습니다. 주변에서는 저의 태몽에 상제님이 나타나신 것과 놀이터 가는 것보다 도장에 가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그리고 이제 갓 말문이 터진 2살 아이가 태을주를 읽는 것들을 보고서 늘 말했다고 합니다. “가령이는 상제님이 직접 데려다주신 상제님의 자식이다. 얘는 태생부터가 증산도를 해야 하는 아이다.”라고요.

한순간 엉망이 된 가정, 그리고 사회생활


그 누구보다 특별했던 생활을 하며 살았지만 어느 날부터 시작된 알 수 없는 아버지의 거친 행동으로 어머니와 저는 매일 공포에 떨며 살아야 했습니다. 작은 불씨가 순식간에 산을 뒤덮듯 저희 집은 한순간에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어머니께선 짐 하나 챙기지 못한 채 어린 저를 안고 오직 살기 위해 부리나케 도망쳐야 했습니다. 아버지의 거친 언행과 행동을 피해 집을 나온 어머니와 저는 부산에 있는 외가댁에서 조부모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활조차도 순탄치 못하였고 그 일로 인해 저는 성인 남자만 보면 경계를 하게 되었습니다. 조부모님과 어머니와의 사이도 꽤 좋지 않아 조부모님마저 저에게는 그저 두려운 존재같이 느껴졌습니다. 이런 생활환경 탓에 저는 어머니에게 점점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일을 하며 어린 저를 홀로 키우셨으므로 도장에 나가는 것은 물론이고 수행을 하는 것조차도 형편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어머니는 신앙을 계속 이어 나가지 못하셨고 저도 증산도에 대한 기억이 흐려져 갔습니다.

제가 15살이 되던 해 어머니가 재혼을 하셨지만 어머니가 새 이부동생을 임신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아버지의 거친 행동이 시작되어 몇 년 뒤 다시 이혼을 하셨습니다. 그 후로도 새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밤마다 가끔씩 찾아와 폭력을 쓸 때면 매일 밤잠을 설치며 어릴 적 악몽이 다시 시작되는 것 같아 많이 괴로웠습니다. 하지만 한평생 아버지도 없고 형제도 없는 제 곁에서 홀로 지켜 주신 어머니가 힘들어하시는 모습을 보는 것만큼 더 괴로운 건 없었습니다.

크게 힘이 되어 드리지는 못해도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드리려고 또래에 비해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제가 하는 일마다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사람에게도 치여서 수개월을 매일 밤 울다가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치져 버렸습니다.

학업을 마치고 사회에 첫발을 디딘 곳은 식품 회사였습니다. 인사총무팀에서 2년을 재직하면서 처음 접한 사회의 환경과 대우, 책임감에 대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주 짧지만 그 시간 동안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 어른과도 부담 없이 담소를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인간관계에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 후 백화점 스포츠 브랜드 매장으로 이직하면서 처음으로 어머니 곁을 떠나 독립을 하였고 이전 회사와 달리 좀 더 열린 환경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평소 의류에 관심이 많았던 저에게 판매직은 정말 잘 맞았습니다. 항상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고 최고가 되고 싶다는 욕심이 있어서, 부매니저로서 매장에 애착을 갖고 보이는 곳뿐 아니라 보이지 않은 곳에서도 꿋꿋이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매니저와 하루의 절반을 한 매장에서 함께 대화하며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교제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지는 남자 친구의 폭언 때문에 남는 것은 상처뿐이었습니다. 직장과 관련되어 헤어지지도 못하고 참고 버텼으나 정신은 더욱더 피폐해져 가고 힘들기만 했습니다. 저는 직장과 남자 친구를 정리하고 쉬면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새로운 시작을 하기 위해 다시 부산 생활을 정리하고 어머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시 찾은 증산도 진리


그렇게 모든 것을 정리하고 집에 돌아와 자기와의 힘든 싸움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어머니께서 20년 만에 증산도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저에겐 7살 이전의 기억들은 모두 잊히고 없었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그나마 머릿속에 남아 있는 건 증산도와 태을주였습니다. “훔치 훔치 태을천상원군 훔리치야도래 훔리함리사파하”라는 태을주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던 게 저도 어머니도 참 신기했습니다.

어머니와 증산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일주일이 지난 1월 19일 김해장유도장 김문규 포정님께서 저희 집에 방문해 주셨습니다. 처음 포정님을 뵈었지만 10년을 알고 지낸 분들보다 더 편안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어색하고 불편함 없이 오고 가는 대화가 참 즐겁다고 느끼면서 3시간이 넘도록 왜 수행을 해야 하는지와 수행 체험담 및 입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어릴 적 제가 읽었던 태을주며 도장에서의 이야기를 어머니께 듣고 나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상제님의 진리가 무엇이고 정확히 증산도가 어떠한 곳인지 포정님에게 듣는 이야기 한 소절 한 소절이 가슴에 와닿고 재미있었습니다.

그렇게 입도를 하기로 결심하고 1월 21일부터 외부에서 증산도 관련 교육을 들었는데, 입도를 정말 해야겠다는 확신이 자꾸만 들어서 23일 김해장유도장에 첫 방문을 했습니다.

나는 상제님 일을 하러 왔구나


그때의 제 마음은 어딘가 모르게 집에 온 것처럼 아주 편안했습니다. 태을주 수행법을 공부하고 40분 정도 수행을 하고 나니, 평소 냉장고처럼 차가웠던 손발이었는데 손바닥이 뜨거워지고 땀이 나 있는 걸 보고 정말 신기했습니다. 그 짧은 수행 시간에도 이렇게 몸이 변한다는 걸 실제로 느끼고 나니 정말 놀라웠습니다.

다음 날 처음으로 치성에 참석을 하고 포정님께 천지공사 교육을 받으며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너무 재미있게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다음 날도 도장을 방문해 신관 교육 후 처음으로 태을주 도공을 배우고 도공 수행을 하였는데 눈을 감고 있어도 눈앞이 환하게 흰빛이 크게 보이더니 시간은 금방 지나갔습니다.

며칠간 계속 도장을 방문해 기본 진리 교육을 받던 어느 날 수행을 마치고 나가기 위해 읍배를 올리고 고개를 들어 상제님 어진을 보았는데 그 순간 “어디서 많이 뵌 거 같은데, 낯익은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주일 동안 교육을 받으면서 뵈었다고 익숙해진 그런 기분이 아니라 정말 옛날부터 뵙던 분을 만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런 뒤 집에 와서 여태 수행한 것들과 내가 겪은 기분들, 태몽에서 상제님이 오신 것과 태을주를 기억하고 있는 일 등을 떠올렸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아 난 정말 상제님의 일을 하러 왔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상제님의 진리에 대한 공부를 정말 제대로 해서 진정한 상제님의 자식이자 일꾼이라는 걸 증명해 내고 싶다는 생각이 확 들었습니다.

입도하기로 약속한 하루 전의 일입니다. 헤어진 지 한 달이 다 된 옛 남자 친구에게서 연락이 다시 오는 등 인마가 끼는 걸 보고 “아, 진짜 내가 이걸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인 29일 입도치성을 마치고 읍배를 올리며 저는 다짐했습니다. 아직 많이 부족한 자손들임에도 불구하고 바른길로 인도해 주신 저희 조상님들께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몸이 아픈 어머니와 아직 어린 두 동생들 그리고 주위 사람들과 그 주위 사람들의 또 다른 지인들에게도 증산도와 상제님의 진리를 알리고, 끝없이 공부하며 태을주 수행을 하겠습니다.

곧 다가올 가을개벽을 맞아 온몸을 다 바쳐 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떳떳한 상제님의 자식이자 참된 일꾼이 되도록 이 순간부터 끈기를 가지고 열심히 실천하겠습니다. 보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