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02월 홈 | 기사목록 | 되돌아가기

    [한국의 성씨]

    대백제의 대성팔족大姓八族과 백제 강역


    역사 문헌을 보면 백제百濟에는 팔성八姓이 있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백제가 호남, 충청 지역에 국한된 소국가였다는 편견을 가지고는 백제 성姓의 역사를 추적할 수 없다. 우리는 ‘대륙백제大陸百濟’라는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여야 한다. 백제 팔성의 실종, 이것은 철저히 뒤틀리고 변질된 역사를 배워 온 우리들 역사 인식의 희생양이 아니었을까?


    백제百濟 대성팔족大姓八族


    중국 사서를 보면 백제에는 대성팔족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서』
    1)
    「돌궐전」과 『성해姓解·121·구부』에 “백제족의 팔성은 사沙씨, 협刕씨, 연燕씨, 해解씨, 진真씨, 국国씨, 목木씨, 묘苗씨”라는 문구가 있고 『만성통보萬姓統譜』
    2)
    와 『백가성고략』
    3)
    에 “사沙씨 계보는 사수沙随씨에서 나왔는데 백제가 원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백제의 팔족성八族姓을 언급한 자료로는 중국의 『북사北史』가 있다. 『북사』는 위魏나라부터 수隋나라까지의 역사를 다룬 사서史書다. 또 다른 역사서로는 『수서隋書』와 『신당서新唐書』, 『통전通典』이 있다. 『신당서』는 묘苗와 진眞의 성 대신에 정貞, 백䒤을 넣어 백제의 팔족성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중국 사서에 전하고 있는 대성팔족의 구성에 대한 기록은 책마다 조금씩 다르다. 

    『남제서南齊書』에서도 백제 성씨의 일단이 보인다. 그 책에서는 백제가 요서 지역은 물론 중국 동부 해안 지역에 진출해 그 지역을 지배했었다고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是歲(시세) 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위로우발기수십만공백제) 入其界(입기계)
    牟大遣將(모대견장) 沙法名(사법명) 贊首流(찬수류) 解禮昆(해례곤) 木干那(목간나)
    率衆襲擊虜軍(솔중습격로군) 大破之(대파지)
    이해(490년, 동성왕 12년)에 위나라 오랑캐가 또다시 기마병 수십만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그 국경에 들어가니, 모대牟大(백제 24대 동성왕)가 장군 사법명沙法名·찬수류贊首流·해례곤解禮昆·목간나木干那를 파견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오랑캐군을 기습,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무찔렀다.
    (『남제서南齊書』 권58 동남이전東南夷傳 동이 백제 편)


    1) 『당서』 - 중국 당의 역사서로서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가 있다. 당의 건국(618)에서 멸망(907)에 이르는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2) 『만성통보萬姓統譜』 - 명대明代의 능적지凌廸知가 편찬한 고금의 성씨에 관해 기록한 책으로 146권, 부附 14권으로 되어 있다.
    3) 『백가성고략』 - 청의 왕상王相이 찬술했다. 북송 초에 첸탕錢塘이 편찬한 백가성을 증보, 손질한 책이다. 중국 전통 몽학도서로 성씨 500여 개가 수록돼 있다.


    백제의 성이 없는 이유
    백제가 분명한 역사의 국가였기 때문에 이들 8대 성이 백제 멸망과 함께 모두 죽지 않은 이상 현재에도 그 후손이 남아 있어야 한다. 현재 대한민국에는 연燕씨가 1985년 조사에서 남한에 26가구, 10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國씨는 1930년 국세조사 당시 평남 강서군에 담양 국씨潭陽國氏 4가구와 함남 영흥군에 풍천 국씨豊川國氏 3가구, 함남 단천군에 전주 국씨全州國氏 1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985년에는 남한에 978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진眞씨 성을 가진 사람들은 서산 진씨西山眞氏 단본으로 1930년도 국세조사에서 함북 종성군에 유일하게 한 가구가 있었다. 2015년 조사에서는 그 숫자가 파악되지 않았다. 나머지 성씨들인 사沙씨, 협刕씨, 해解씨, 목木씨, 해解씨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현재 중국에 연씨燕氏는 26만 명(중국 성 순위 258위)이 살고 있고, 국國씨는 인원수 불명이다. 사沙씨는 49만 2천 명이 살고 있고, 원류지가 산동성과 하남성 여남군이라고 한다. 해解씨는 67만 6천 명(185위)이 살고 있고, 산서성 남부 운성시 해현을 원류 분포지로 하여 산서성 임분현 평양군平陽郡에 분포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다. 

    대만대 교수인 진첩선 씨의 ‘백제 8대 성씨에 대해’라는 자료를 보면 사서에는 백제의 멸망 당시 200여 개의 성城이 있었고 호수戶數는 76만 호로 되어 있다. 호당 인구수 5~7명으로 추산하면 백제의 인구는 380만 명에서 530만 명 정도로 추산이 된다. 이 중에서 8대 성씨가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작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1,300여 년이 지난 지금, 남한에 살고 있는 8대 성씨의 후손들이 거의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는 백제의 주요 강역이 한반도가 아니었음을 반증하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백제 8성에 대한 중국의 기록


    후한後漢 때의 『풍속통의風俗通義』와 『잠부론潛夫論』, 송宋 시대의 『백가성百家姓』 등을 근거로 1994년 중국의 진명원·왕종원 등이 북경출판사에서 편찬한 『중국성씨사전中國姓氏辭典』에는 백제 8대 성씨에 관한 기록들이 보인다. 그 내용을 중심으로 백제의 팔성八姓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부여夫餘씨
    부여씨는 『풍속통의風俗通義』에 처음으로 보이고, 『사기』 「화식전貨殖傳」에는 ‘한나라 시기에 북쪽의 오환烏桓, 부여夫餘 등이 그 족명을 성으로 삼았다’고 되어 있다. 『성씨고략姓氏考略』에 의하면 오흥군에 많이 분포하고 있다고 하는데 오흥군은 지금의 절강성 임안에서 강소성 의흥 일대를 말한다.

    목木씨
    부여씨와 마찬가지로 목씨 또한 오흥군吳興郡에 분포되어 있다고 한다. 오흥군은 지금의 절강성 호주湖州 일대의 지역으로서 중국 5대 호수 중의 하나인 태호太湖의 남쪽에 해당된다. 따라서 백제는 태호의 남쪽 즉 호남湖南에 살았기 때문에 현재 우리나라로 이주해 온 세력들에 의해서 지금의 전라도 지역을 호남으로 부르게 된 것 같다. 유명한 사람은 목간나木幹那장군, 목협만치木劦滿致 대신이 있다.

    목협만치는 백제 21대 개로왕蓋鹵王 때 인물이다. 그와 함께 조미걸치祖彌桀致란 대신의 기록도 나온다. 『삼국사기』에는 ‘목협과 조미는 다 두 글자의 성인데 중국의 『수서隋書』에는 목협을 두 가지 성으로 기록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가 없다’고 하였다. 『수서』에서는 협도 성이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면 그는 ‘목협’이라는 복성이 되는 것이다.

    사沙씨
    『군망백가성郡望百家姓』에서 여남군汝南郡에 나타난다고 되어 있고, 『성씨고략姓氏考略』에는 동완東莞, 여남汝南에 보인다고 되어 있는데, 동완군은 진晉 무제 태시泰始 원년(265년)에 설치되었으며 지금의 산동성 기수沂水, 영현營縣 일대이다. 여남군은 한나라 고제高帝 때 설치했으며, 지금의 하남성 중부 상찰현上察縣 및 안휘성徽省 회하淮河 이북 지역이다. 백제의 유명한 인물로는 사법명沙法名이 있다.

    해解씨
    『군망백가성』에 이르기를 평양군平陽郡에 분포되어 있다고 하는데 평양군은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임분현臨汾縣 서남이다. 백제의 유명한 인물로는 해례곤解禮昆이 있다.

    연燕씨
    원래 중국 범양范陽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주周나라 때 공자의 제자인 연급燕伋의 후손이 나라 이름을 성姓으로 삼은 것이 시초가 되었다. 『성씨고략姓氏考略』과 『군망백가성』에 의하면 상곡上谷, 범양范陽에 많이 분포하고 있는데 상곡군은 현 하북성 회래현懷來縣 동남이며 범양군은 현 하북성 탁현 및 북경시 창평현昌平縣, 방산현房山縣 일대를 말한다. 우리나라의 연씨燕氏는 백제의 8대 성姓으로 손꼽혔으며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성왕聖王 때 병관좌평兵官佐平을 지낸 연실燕實 등 연씨燕氏가 나오지만 시조 및 연원淵源은 알 수 없다. 본관은 정주定州 외에 영평永平·전주全州·평주平州(평산의 별호)·곡산谷山·덕원德原·장곡長谷 등이 문헌에 나타난다.

    진眞씨
    중국 상곡上谷에서 계출된 성씨이다. 『삼국사기』에는 백제 고이왕古爾王 때 내두좌평內頭佐平을 지낸 진가眞可라는 사람과 동성왕東城王 때 병관좌평兵官佐平에 오른 진로眞老, 삼근왕三斤王 때의 좌평佐平 진남眞男, 아신왕阿莘王 때의 병관좌평兵官佐平에 오른 진무眞武, 근초고왕近肖古王 때 조정좌평朝廷佐平을 역임한 진정眞淨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신라新羅 때도 진공眞功이 신문왕神文王 때 대아찬大阿飡을 지냈고, 진복眞福은 상대등上大等을 지냈다고 한다. 고려 때 와서는 925년(태조 8년) 견훤甄萱이 처남 진호眞虎를 고려에 볼모로 보낸 사실이 『삼국사기』에 나타나 있다. 백제의 진眞씨는 온조를 따라와 백제 건국에 기여한 공신의 집안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백제에서 진씨는 대대로 권신權臣의 자리를 많이 차지했다. 2대 다루왕 때는 진회眞會, 5대 초고왕 때는 진과眞果, 8대 고이왕 때는 진충眞忠·진물眞勿·진가眞可, 11대 비류왕 때는 진의眞義 등이 그들이다.

    국國씨
    『군망백가성』에 의하면 하비군에 보이는데 하비군은 현 강소성 서남부 지역이다. 우리나라 국씨國氏의 본관은 담양潭陽·풍천豊川·현풍玄風·영양英陽·김해金海·대명大明등이 문헌에 전해지고 있지만 시조와 연원에 대해서는 미상이다. 역사상의 인물로는 백제의 대신으로 611년(무왕 12년) 수隋나라에 들어가 공물을 바치고 고구려 정벌을 의논한 국지모國智牟, 고려 태조 때 원외랑員外郞 국현國鉉 등이 있는데 오늘날의 국씨와의 관계는 확실하지 않다.

    묘苗씨
    『군망백가성』에 의하면 동양군에 보이는데 동양군東陽郡은 지금의 강소성 금화金華 지역이다.

    협劦씨
    『성씨고략』에 의하면 협씨는 발해군渤海郡에 보이는데 발해군은 현 하북성, 요령성 발해만 일대를 말한다고 되어 있다.

    골骨씨
    『성씨고략』에 의하면 하남군에 보이는데 하남군은 지금의 하남성 낙양시 일대이다.

    복福씨
    백제 멸망 후 부흥운동을 이끌었던 무왕武王의 조카 복신福信으로 유명하다. 『군망백가성』에 이르기를 “복씨는 백제에서 나왔는데, 백제는 옛 국명이며 본래 부여扶餘에서 나왔다. 본시 마한의 제국 중의 하나이다. 전설에 의하면 후한 말기에 부여왕 위구대尉仇台의 후예이며 (백제) 초기에 백가제해百家濟海에서 그 이름을 얻게 되었다. 진晉대에 요서, 진평 2군이 있었다.”라고 되어 있다.

    위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건대 백제의 8대 성이 거처하던 지역이 산서성과 하북성 그리고 하남성과 산동성 강소성 절강성에 이르기까지 주로 옛 동이가 터전을 이루고 살던 지역하고 거의 일치하고 있다. 사서에서 보는 백제의 활동 지역과 백제의 성씨들이 분포한 지역 또한 일치하고 있다.

    일본의 팔색성八色姓


    대백제의 분국이었던 고대古代 일본에서도 백제의 팔족성과 유사한 ‘팔색성八色姓’이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4)
    에 나타나고 있다. 이 팔색성은 684년 일본의 천무천황天武天皇이 만들어서 사성賜姓한 것으로 고대 일본 세족世族들 성씨였다. 팔색성은 마히토眞人, 아소미朝臣, 쓰쿠네宿禰, 이미키忌村, 미치노시道師, 오미臣, 무라치連, 이나키稻置였다.
    4) 고대 일본의 왕경王京(수도) 및 주변 지역에 거주한 1,182씨의 본관, 사적, 조상의 유래 등을 실은 계보서다. 8세기 말 헤이안시대(794∼1185)를 연 간무桓武천황(일왕)의 명으로 편찬을 시작해 815년에 완성됐다.

     

    응신천황에서 비롯된 성씨
    팔색성 중에서 ‘마히토’는 15대 천황이었던 응신천황應神天皇에서 비롯한 성이다. 응신천황은 백제 비류계沸流系 성인 진眞이라는 성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앞에서 본 것처럼 진이라는 성은 백제 팔족성의 하나였다. 백제에서는 비류계 왕이 우優의 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왕이 아닌 후손들 사이에서는 바로 팔족성의 하나인 진眞 성을 갖고 있었다. 응신천황의 후손들은 여기서 유래한 ‘진인眞人’이라는 성을 사용했다. ‘진인’에는 ‘진씨 성을 가진 사람’이란 뜻이 들어 있을 것이다. 응신천황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그가 비류계 백제인으로 16대 진사왕辰斯王(385~392)을 제거하려다가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주장한다. 그때 많은 비류계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응신의 망명 연도는 CE 396년으로 보고 있는데 이때는 백제의 17대 아신왕阿莘王 재위 후였다. 아신왕은 진사왕의 형이었던 15대 침류왕枕流王의 장남이었다.

    백제 성과 신라 성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는 1,182개의 씨족을 황별皇別(천황가에서 분리), 신별神別(진무천황 이전의 씨족), 제번諸蕃(도래인계의 씨족)의 세 개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이들 성씨는 대부분 두 글자의 복성들이다. 백제 왕족의 후예가 일본에 건너와서 사용한 성이라고 언급한 성씨들의 기록도 있다. 즉 구다라百濟, 이시노石野, 미야하라宮原, 마쓰다沙田, 다카노高野, 나카노中野, 사카다坂田, 구니모토國本, 니이키新木, 사쿠라이櫻井, 야마구치山口, 히라다平田, 나가다長田 등이 백제인들의 성씨라 한다. 여기에는 신라 출신 도래인渡來人의 성씨도 있다. 나가오카長岡, 야마무라山村, 시미즈淸水, 다카오高尾, 다케하라竹原, 야마다山田, 도요하라豊原 등이 그것이다.

    당시 왕조 국가에서 그러했듯 서민층은 성을 가질 수 없었다. 왕족이나 권신權臣들만이 성을 갖는 게 상례였다. 혈족 표시가 아니라도 신분상의 한 징표로 또는 가문의 한 상징으로 성을 가졌다. 때문에 일본도 마찬가지로 왕족과 세족勢族들이 응당 외국의 관습을 본받아 그 같은 성을 취했을 것이다.

    소아만지는 목협만치 
    일본의 역사에 소아만지蘇我滿智라는 영웅이 나온다. 그의 성이 ‘소아蘇我’다. ‘소아’는 일본의 발음으로 ‘소가’다. ‘소가’는 일본 나라현奈良縣의 한 지역에 있는 지명地名에서 비롯한 성이라고 한다. 이 소아만지가 바로 앞에서 말한 백제의 ‘목협만치木劦滿致’라는 주장이 있다. 목협만치는 일명 목만치라고도 하는데, 일본으로 건너가서 성을 바꾸고 무사로 이름을 떨쳤다. 한 손에는 칼, 다른 한 손에는 불상을 들고 일본을 평정한 영웅이었다. ‘만지’라는 이름은 ‘만치’라는 본래의 이름에서 와음訛音으로 표기하게 된 것이다. 그의 손자 대에서는 일본 최초의 사찰인 법륭사法隆寺를 창건하였다. 법륭사는 후에 비조사飛鳥寺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이 사찰은 바로 ‘소가’ 씨족의 사찰이다. 일본 오사카 시내에 있는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창건한 성덕태자聖德太子도 ‘소가’의 성씨 사람이란 주장이 있다.

    일본 천황가의 성이 사라진 이유
    현 한국인에게 목木씨 성의 사람은 없다. 나머지 백제의 팔족성도 백제의 멸망과 함께 사라졌다. 일본의 팔색성도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 무렵에 사라졌다. 환무천황桓武天皇(782~806)이 수도를 교토京都로 옮기면서 황족의 성은 물론 팔색성을 없앴기 때문이다. 당시 지배 계층이던 팔색성의 귀족들 사이에 싸움이 빈번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체적인 무력까지 갖추고 천황의 통치를 위협했다.

    이를 틈타 다른 한편으로는 신흥 세력들이 기존의 팔색성 귀족 제거에 나섰다. 당시 신흥 세력들이란 팔색성의 사람들이 아닌 미나모토(源), 다히라(平), 후지하라(藤原) 등의 성씨를 사용하는 사람들이었다. 후지하라 가문이 집권했을 때는 천황의 율령제도律令制度마저 무너져 황족의 성씨조차 사라졌다고 한다. 일본 천황가의 성이 사라진 이유에 대해서는 다른 설명도 있다. 팔색성에 일본 열도 밖에서 들어온 이민족異民族의 성도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성은 일본의 천황이나 지배 계층이 하나의 혈통血統이 아닌 것을 보여 주기도 한다. 때문에 일본이라는 나라의 순수성과 정체성正體性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아예 성씨를 없애 버렸다는 것이다. 귀화인 천황도 있고 하여 천황가天皇家가 하나의 혈통이 아니라는 것에 부담이 컸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만세일계萬世一系라고 해서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핏줄로 천황의 자리가 계속 이어져 왔다고 주장하지만,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다. 고대사古代史는 불확실한 곳이 왜곡도 심하다. 하지만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황제나 왕들의 성씨와 왕조가 바뀐 것을 분명히 기록으로 남겨 놓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천황가의 성을 사라지게 하여 역성易姓의 기록을 없앤 일본과는 다른 것이다.


    [출처]
    『역주본 환단고기』(안경전, 상생출판, 2012)
    『역주본 신찬성씨록』(연민수, 동북아역사재단, 2020.11)
    《한배달》 1992년 6월호
    《주간현대》 글(신완순)
    《역사산책》 글(김정현)


    대륙백제와 22담로
    백제의 요서 경략 사실과 동성왕이 북위와 싸운 지역, 일곱 명의 태수를 임명한 지역 그리고 최치원이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 시에 강한 군사가 백만이어서 남으로는 오吳, 월越의 나라를 침입하였고, 북으로는 유주幽州, 연燕, 제齊, 노魯나라를 휘어잡아 중국의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고 말한 사실로 보아 백제가 대륙에 근거하고 있었음은 명확하다 할 것이다. (아래 내용은 STB 상생방송의 〈환단고기 북콘서트 백제 편〉을 참고하였습니다.)

    백제 요서와 대방고지
    그럼 백제가 진출한 요서와 대방고지는 어디일까? 『한서지리지』에 따르면 요서군은 유주에 속하는 군이고, 백이·숙제의 고죽성이 있는 영지현은 요서군에 속한 현이다. 또한 “『설문說文』에서 전하기를 수양산이 요서에 있다(說文云首陽山在遼西).”는 기록이 있는데 지금의 산서성 운성시 서부 영제永濟시에서 백이·숙제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바로 그 일대가 백제가 진출한 요서군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중국에서 삼국의 왕을 봉할 때 대방군공帶方郡公 백제왕,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 요동군공遼東郡公 고구려왕이라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른 말로 백제의 시국처를 대방고지帶方故地라고 했는데, 대방은 『한서지리지』에 따르면 유주의 낙랑군에 속했던 현이다.
    파괴된 한국사의 원형을 복구시키고 한국사의 진실을 오로지 드러내 주고 있는 『환단고기桓檀古記』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를 보면

    遼西地(요서지)에 有百濟所領曰遼西晉平(유백제소령왈요서진평)이오
    江南(강남)에 有越州(유월주)하니 其屬縣(기속현)은 一曰山陰(일왈산음)이오
    二曰山越(이왈산월)이오 三曰左越(삼왈좌월)이러니
    至文咨帝明治十一年十一月(지문자제명치십일년십일월)하야

    攻取越州(공취월주)하고 改署郡縣(개서군현)하니
    曰松江(왈송강)·會稽(회계)·吳城(오성)·左越(좌월)·山越(산월)·泉州(천주)오
    十二年(십이년)에 移新羅民於泉州(이신라민어천주)하야 以實之(이실지)라
    是歲(시세)에 以百濟不貢(이백제불공)으로 遣兵攻取遼西晉平等郡(견병공취요서진평든군)하니 百濟郡(백제군)이 廢(폐)하니라.

    요서 땅에 백제의 영지가 있었는데, 곧 요서遼西 ·진평晋平이고, 강남에는 월주越州가 있었으니, 여기에 소속된 현은 첫째 산음山陰, 둘째 산월山越, 셋째 좌월左越이다.

    (고구려 21세 문자제) 명치 11년(단기 2834, 501년) 11월에 이르러, 월주를 쳐서 취하고 군현의 이름을 바꾸어 송강松江·회계會稽·오성吳城·좌월·산월·천주泉州라 하였다.

    명치 12년(단기 2835, 502년)에 신라 백성을 천주로 옮겨 그곳을 채웠다. 이해에 백제가 조공을 바치지 아니하므로 군대를 보내어 요서·진평 등의 군郡을 쳐서 빼앗으니 백제군百濟郡이 없어지고 말았다.


    22담로의 위치
    『송서宋書』 「원가元嘉 27년(451년) 조」에, ‘서하西河(산서성 하동도 임분현) 태수에 백제가 풍야부馮野夫를 멋대로 임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가 그 땅을 점령하여 옛 땅을 복원했으니 그런 기록이 있게 된 것이다. 요서뿐만 아니라 나머지 지역에도 분봉지分封地가 있었고, 부용국附庸國을 거느렸다. 24세 동성왕(479~501)과 25세 무령왕(501~523) 때에는 이 담로檐魯와 같은 거점성據點城이 발달했는데, 이런 것이 중국 역사 기록에 있다.

    「양직공도梁職貢圖」
    5)
    에는 ‘국가를 통치하는 큰 성은 고마固麻라 한다. 읍邑을 담로라 하는데 이는 중국의 군현과 같으며 22담로가 있다(治所城曰固麻, 謂邑檐魯於中國郡縣, 有二十二檐魯)’고 했다. ‘읍邑을 담로라 하는데 중국의 군현과 같다’는 말은 『양서梁書』 「백제전」에도 나온다. 그러니까 동성왕과 무령왕 때,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중반까지 왕후王侯로 임명한 지방행정 군현 조직이 대륙 백제 땅에 있었다. 그 구체적인 호칭이 바로 담로檐魯이다.
    5) 중국 양나라 원제元帝 재위 연간 소역蕭繹이 백제 사신의 행차를 그린 문서로 백제사신도이다.


    위의 지도를 보게 되면 백제의 22담로가 있다. 광서성에도 담로가 있다. 그런데 담로는 오키나와 유구국에도 있고, 대만과 필리핀에도 있고, 인도네시아에서도 보인다.

    그런데 홍콩에서 수백 킬로 떨어진 광서성에 백제역, 백제 마을, 백제 행정구역이 지금 그대로 다 남아 있다. 지금 광서성 옆 광동성 같은 데에서는 ‘아빠담로’라는 말을 쓴다. 일본에는 담로도, 인도네시아 같은 데는 담수항, 저 위에 담수장, 말레이시아, 필리핀 같은 곳에도 담로문화가 있었다. 이처럼 대백제국은 중국의 동부와, 중부 일부 지역, 남부 지역, 그리고 동아시아 전체를 통관하는 대국이었다. 대백제는 삼신문화 통치 방식에 따라서 한반도보다 몇 배 더 큰 대륙에 우현왕右賢王을 두어 통치하고, 일본에는 좌현왕左賢王을 보내어 통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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