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B다시보기 | 역사대담 - 7회 한일 역사 화해의 길(1)

[STB하이라이트]

사회자: 김철수 중원대학교 종교문화학과 교수
대담자: 남창희 인하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지금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위안부와 강제징용, 역사문제를 넘어 경제보복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한일갈등을 극복하고 바람직한 미래를 열어갈 수 있을까요? 우리 역사의 참모습을 탐구하는 역사대담에서는 한일관계를 해결할 수 있는 해법을 국제정치학적 관점에서 찾아봅니다. [본지 2020년 7월호부터 계속]


Q 김철수 교수: 지난 시간에는 우리 문화를 중심으로 홍산문화와 일본문화가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셨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일본의 불신과 갈등의 골은 깊은 것 같습니다. 이런 심각한 상황까지 오게 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A 남창희 교수: 최근에 여러 악재들이 겹쳤던 것 같습니다. 일본의 주장에 의하면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일본 천왕 관련 발언부터 감정이 상하기 시작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한일 위안부 합의사항을 재검토한 것과 강제징용 피해자 손해배상에 대한 대법원 판결에 대한 한일 양국의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한 것이 양국의 관계 악화의 원인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최근의 벌어진 이런 일들만 가지고 한일관계 전체의 흐름을 이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있었던 감정의 응어리가 잠복해 있다가 사건들이 촉발제가 되어서 과거의 원한과 앙금이 끊임없이 재현된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한일 양국이 마주 앉아 고대사의 진실을 파헤쳐서 서로 마음을 풀 수 있는 화해의 프로세스가 있어야만 가장 근본적인 관계 정상화의 단초가 풀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본의 정한론자들과 신정한론자들은 늘 마음속에 2천 년 전의 임나일본부와 오늘 말씀을 나눌 660년과 663년 나당연합군의 침공에 의한 백제 멸망에 대한 가슴 아픈 기억을 안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Q 김철수 교수: 교수님께서는 한일갈등에 대한 문제를 현재 일어나는 현상에서뿐만 아니라 고대사에서도 실마리를 찾고 풀어가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방금 말씀해주신 백제 멸망은 야마토 왜와 밀접한 관련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백제가 멸망했을 때 부흥운동도 일어나게 되었고요. 하지만 결국에는 실패하게 되고 여기서 느끼는 백제인들과 야마토 왜인들의 심정은 상당히 처절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A 남창희 교수: 네 맞습니다. 야마토 왜는 3세기~5세기 초기까지의 왜를 통칭하고요. 후대는 백제계가 장악을 하게 되는데요. 660년 나당연합군의 총공세로 백제 사비성이 무너지고 백제가 멸망하고 다시 백제부흥운동이 시작됩니다. 한때는 나당연합군을 물리치고 백제부흥운동이 성공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지만 복신과 도침의 갈등을 비롯해서 여러 내부갈등으로 인해 완전한 멸망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강 하구에서 최후의 결전을 하게 됩니다. 일본이 국가 총동원령을 내리다시피 해서 2만 7천 명의 왜군과 약 1,000척의 군함을 보내 백제를 살리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나당연합군의 승리로 백제가 멸망하면서 한일 양국의 갈등이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Q 김철수 교수: 말씀하신 바와 같이 나당연합군의 침공에 맞서서 백제와 야마토 왜가 최후에 백강 전투를 하게 되지만 실패하면서 왜가 돌아가는 길에 수많은 성을 쌓게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게 되는데요. 일본열도에서의 새로운 나라 건설과정에서 살펴봐야 할 중요한 내용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A 남창희 교수: 역사답사를 겸해서 시청자분들에게 권해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대마도부터 시작해서 오사카만까지 가는 배가 있는데요. 이 배를 타고 가시면서 역사산책을 하면 재미있습니다. 이 루트를 따라서 623년부터 몇 년간 왜와 백제의 연합세력이 대대적인 방어시설을 구축하게 됩니다. 대마도의 아소만 입구에 카네다성이라고 있습니다. 높은 절벽 위에 쌓았습니다. 그리고 규슈의 오노산성, 기이성, 그리고 규슈 후방에 병참시설로 추정되는 기쿠치성을 쌓았습니다. 이렇게 탄탄하게 규슈지역을 군사요새화했습니다. 이런 요새화 작업의 맨끝은 오사카이고, 여기에 타카야스 산성을 쌓았습니다. 이 모든 산성이 백제식 산성인데요.

제가 이 산성들을 다니면서 받은 느낌은 당시 백제인들의 절박한 사수 의지와 공포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모든 산성의 축조는 백제인들이 지휘를 했는데요. 일본의 방어전략, 방어시설을 일사불란하게 특정 백제인들이 했다는 것은 일본 조정을 백제가 장악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닙니다. 일본이 어떤 나라였기에 백제를 죽기 살기로 도왔고, 백제와 일본은 어떤 관계였길래 일본 조정을 좌지우지했을까 하는 것을 제가 정치학이나 군사학적인 측면으로 생각해보면 백제와 왜의 관계는 일반적인 동맹의 수준을 넘었다고 봅니다. 일반적인 동맹관계로 본다면 동맹국이 망했을 때 연루의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되면 종종 동맹국을 배신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백제 때문에 왜가 망할 수도 있고, 백제 때문에 나당연합군의 침공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연루의 위험을 생각하지 않고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 백제를 도왔다는 것은 백제와 혈연관계가 있는 사람이 일본의 왕이었거나, 일본이 백제의 식민지였거나, 혹은 백제 왕이 일본을 통치하는 경우가 아니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국제관계적인 측면을 연구하지 않은 분들이 이런 점들을 놓치는 것을 보면 아쉽습니다. 백제가 멸망한 후에 일본으로 밀려들어간 백제 유민들의 절망적인 마음을 제가 쓴 책에 담담하게 적어놨는데요. 당시 백제인들의 마음은 피를 토하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Q 김철수 교수: 정치학, 군사학적인 부분으로 역사를 풀어가니 당시 한일관계의 이해가 더 잘 되는 것 같습니다. 백제의 여러 유민이 야마토 왜로 흘러들어가면서 야마토 왜에서는 나라를 건국하는 과정에서 역사서도 새로 만들게 되는데요. 교수님께서는 이런 과정 속에서 임나일본부설도 만들어지면서 결국 정한론까지 이어진다고 보시는 것 같습니다.
A 남창희 교수: 672년 일본에서 천지 천왕의 동생과 아들 사이에서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임신란이라고 부르는 내란이 일어나게 되는데요. 이 내란 이후 일본 조정이 한때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일본의 국가정체성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신라계와 백제계가 국가 노선을 두고 고민한 흔적들이 여기저기 보입니다. 당시 일본은 나당연합군의 침공이 임박했다고 봤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국비를 들여 전 지역에 방어선을 축조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본의 내부 분위기에서도 나당연합군에 대해 호의적인 신라계가 있었습니다. 이 두 세력이 공존했던 당시 상황에 대해 제가 생각을 해봤습니다.

전쟁에 지치고 나당연합군의 침공 가능성을 회피하기 위해서 고구려가 멸망하는 시점에 국가정체성을 정립하기 위한 대대적인 프로젝트를 벌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프로젝트는 우리는 대륙과 무관한 나라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런 대륙과 무관한 나라임을 선언하는 행위 자체가 서로 건드리지 말자는 일방적인 불가침 선언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행위들을 통해 다급한 안보위기를 모면함과 동시에 내부갈등의 씨앗을 중화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백제계가 신라계를 포섭하며 새로운 역사서를 쓰면서 우리끼리 그만 싸우고 대륙과 무관하게 새 출발을 하자고 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대륙과는 무관한 독립국가 ‘일본’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일본서기』가 독립선언서 같다고 느껴집니다. 그 독립선언서가 불행하게도 일본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거짓말이 섞인 독립선언서인 것입니다. 시대 정황적으로는 이해가 됩니다. 결국 백제 멸망 후에 왜는 약 20여 년의 시간 동안 완전한 국가건설을 위한 정체성을 새로 갖게 됩니다.

Q 김철수 교수: 『일본서기』가 쓰이면서 일본이 정체성을 새로 정립하기 위한 목적으로 임나일본부설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교수님께서는 한일관계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는 임나일본부설의 실체를 제대로 밝히고 제대로 풀어나가야 한다는 말씀이신 거죠?

A 남창희 교수: 일본이 관찬사서, 즉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쓰게 되는데요, 내용을 보면 분명 백제계가 쓴 것으로 보여집니다. 신라계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내용을 쓰면서 안 좋은 사건에 대해서도 기록이 되어 있는데 백제계에 대해서는 호의적으로 쓰여 있습니다. 일본사서의 내용 중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임나일본부’라고 하는 비수를 심어놓았다는 것입니다.

임나일본부설은 대담을 통해서 계속 말씀을 나누고 있는데요. 4세기와 6세기 사이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에 임나일본부라는 식민통치기관을 두고 백제와 신라를 마치 제후국처럼 부렸다는 이야기죠. 이 이야기가 17세기부터 일부 국학자들과 19세기 말에 요시다 쇼인과 같은 학자들에 의해 일본의 대외팽창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악용되면서 한일관계의 불행의 꽃을 피우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일본은 한반도 강제병합과 만주침략을 비롯해서 끝도 없이, 소위 대동아공영권이라고 하는 미화된 침략행위를 하게 되고요. 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일으키는 출발점에 일본서기를 비롯한 일본 역사서가 있습니다.

국제관계학에서 물질적인 조건, 국력의 차이, 제도의 유무를 통해 국제관계를 분석하는 것이 통례인데, 최근에는 ‘구성주의’라는 관점이 나왔는데요 이 ‘구성주의’ 관점은 관념과 신념, 정체성 등이 종속변수가 아니라 독립변수처럼 국제관계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정체성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변수가 국제관계를 고착시키거나 변화시키는 요인이 된다는 것에 주목한 것이 구성주의입니다. 일본서기에 심어놓은 가공의 스토리인 임나일본부설이 실제로 현상계에 드러나서 엄청난 전쟁을 일으키고 심지어 지금까지도 한일관계의 족쇄로 작용하고 있는 이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성주의적 관점을 끌어오지 않고서는 전체 모습을 보기 어렵다고 느꼈습니다.

Q 김철수 교수: 교수님께서는 한일 양국이 화해하는 길은 일본에서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의 해체와 함께 우리나라도 김부식의 사대모화사상 역사관의 해체를 해야 한다고 책에서 말씀을 해주셨는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A 남창희 교수: 일본의 양심 있는 학자들은 임나일본부설을 믿지 않고, 극히 일부의 극우 성향의 학자들만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임나일본부설을 일본 내부에서 공식적으로 부정하긴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김부식의 중국 중심의 사대모화사상을 해체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부식의 잘못된 역사관을 부정하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시민사회가 한목소리를 내고 역사정화운동을 하면 한일 간의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 수 있다고 봅니다. ‘구성주의’에서도 시민사회에서 정체성이 만들어지면 더 견고하고 오래갈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제가 책에서 김부식의 『삼국사기』까지 언급을 하게 되었습니다.

Q 김철수 교수: 한중연합에 대한 일본의 두려움을 교수님께서 말씀을 풀어주시니 일본의 경제보복과 같은 모습들이 이해가 되고 정리가 되는 것 같습니다. 기존의 역사적인 흐름과 지금 현재의 모습을 같이 비교해주시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됩니다. 교수님께서는 한국사회에 아직 사대사상이 많이 영향을 주고 있다고 보시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A 남창희 교수: 국제정치학자의 입장에서 우리 사학계를 보면 진영논리에 빠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소위 민족사학과 민족사학에 반대되는 주류사학 또는 식민사학이다라고 하는데요. 정치권의 진영논리보다 훨씬 양극화되어 있었습니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상대 학설을 유령 취급하는 것을 보면 두 진영의 역사관이 소통하기는 어려운 게 현실인데요. 이렇게 양극화된 역사학계 분열의 뿌리는 김부식의 삼국사기 편찬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김부식이 왜 삼국사기를 편찬했는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본서기』를 통해 대외전략적 차원에서 정체성의 재정립을 했었던 것처럼 김부식도 묘청의 난을 진압하고 『삼국사기』를 쓰게 됩니다. 묘청은 고구려에 정통성을 두고 역사관과 고토수복 의식이 강했던 반면에 김부식은 신라 중심으로 정통성을 두고 싶었기 때문에 두 세력이 충돌하게 됩니다. 이후 김부식 세력이 이기고 난 뒤에 고구려 정통성의 역사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세력을 없애기 위해 새로운 역사서를 편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통해 한국사의 국통맥과 정체성을 뿌리째 바꿔버리게 됩니다.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쓰기 전에 고려에 왔던 서긍이 지은 『선화봉사고려도경』이란 책을 보게 되면, 당대 고려사람들은 삼국이란 인식이 없었고, 고구려→발해→고려를 국통맥으로 인식했다고 나옵니다. 이런 고려의 역사의식을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통해 신라를 고구려와 대등한 나라인 것처럼 과장하여 쓴 것입니다. 광개토호태왕비를 보면 신라는 제후국이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이런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신라 중심의 역사관을 만들기 위해 역사를 왜곡한 것입니다. 이 역사왜곡은 단순히 기록에서만 역사를 왜곡한 것이 아니라 후대 왕조들의 대외 전략을 수립함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된 것입니다.

『삼국사기』로부터 시작된 사대모화사상으로 인해 ‘대외의존 심리’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1392년 공식적으로 조선이 사대외교를 시작하게 되고, 국제정세에 어두워지면서 임진왜란, 병자호란과 함께 경술국치를 당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됩니다. 잘못된 역사의식으로 인해 수백만 명이 고통 속에 삶을 살아오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걸 김부식의 잘못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김부식이 뿌린 사대모화 역사관이 결국은 망국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를 위해서, 또 국가의 안위와 올바른 국가전략, 자주적이면서도 능동적인 국제관계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라도 『삼국사기』에 심어진 대외의존 심리는 극복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