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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인물탐구]

    창세역사 성인열전 | 단군조선 제3왕조 단군 임금들의 업적 - 황혼에 진 노老대국, 조선


    이해영 / 객원기자

    *아, 슬프구나! 부여에 부여의 도가 없어진 후에 한나라 사람이 부여에 쳐들어왔고, 고려에 고려의 도가 없어진 후에 몽골이 고려에 쳐들어왔다. 만약 그 당시에 미리 제정되어, 부여에 부여의 도가 있었다면 한나라 사람은 한나라로 쫓겨 가고, 고려에 고려의 도가 있었다면 몽골인은 몽골로 쫓겨 갔을 것이다.

    신시에 나라를 연[神市開天] 이후로 국통이 있어, 나라는 이 국통으로 인하여 세워지고, 백성은 이 국통으로 인해 흥하였나니, 역사를 배움이 어찌 소중하지 않으리오? (행촌 이암의 「단군세기 서序」)


    단군조선 제3왕조 시대


    우화충의 난을 진압하다
    43세 물리단군 말엽에 우화충于和沖이 사냥꾼들을 모아 큰 반란을 벌였습니다. 그 와중에 물리단군은 붕어하였고, 백민성白民城 욕살인 구물이 병사 1만 명을 이끌고 진압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 외 다른 지역에서도 군사를 보내 힘을 보탰습니다. 지금의 압록강과 요하 지역의 18성이 모두 군사를 보내 원조하였습니다. 기원전 425년 3월에 홍수로 도성이 물에 잠기게 되면서 우화충 무리가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에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반란군을 평정하였으며, 드디어 우화충을 잡아 참수하였습니다.

    국호를 대부여大夫餘로 바꾸다

    이후 모든 장수의 추대를 받은 구물은 대영절大迎節인 3월 16일에 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 지내고 44세 단군으로 즉위하였습니다. 반란으로 폐허가 된 도성을 떠나 요령성 개원에 있는 장당경 아사달로 천도하니 단군조선 제3왕조의 시작이었습니다.

    구물단군은 국력 회복을 위해 국호를 대부여大夫餘로 바꾸었습니다. 우리말에서 부여는 ‘아침에 어둠이 걷히면서 먼동이 부옇게 밝아 오는 것’을 뜻합니다.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군기檀君紀」에 따르면, 초대 단군왕검이 부루태자 이외의 왕자인 부소와 부우 그리고 넷째 아들 부여를 서쪽 땅에 봉했는데, 구려句麗, 진번眞番, 부여 등이 그 나라라고 하였습니다. 제3왕조를 연 구물단군이 초대 단군 시절의 부여를 취하여 국호를 정한 데에는 단군조선 초기의 국력을 다시 회복하겠다는 국가 재건과 중흥의 의지 표명이 담겨 있다고 하겠습니다.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말한 단군의 수명 1,908세에는 대부여를 제외한 1세 단군에서 43세 단군까지의 역년 1908년의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몰락하는 단군조선, 44세 구물단군의 치적


    삼한에서 삼조선으로
    구물단군은 삼한을 삼조선三朝鮮으로 바꾸었습니다. 이로부터 삼조선이 비록 대단군을 받드는 제도는 그대로 유지하였지만 화전和戰의 권한, 즉 병권兵權은 이제 단군 한 분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단군조선은 우화충 반란 이후 국력이 급격하게 쇠미하였는데, 이렇게 된 실제적인 원인은 바로 병권의 분립에 있었습니다.

    즉 44세 구물단군 이전에는 진조선의 천왕인 대단군 한 분이 중앙집권적으로 삼한(삼조선)의 병권을 집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삼조선 체제로 바뀌어 삼조선이 각기 전쟁 수행 권한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병권 분립은 단군조선 체제가 약화되어 붕괴의 길을 걷는 큰 원인이 되었습니다. 병권 분립은 신교 삼신사상을 뿌리로 하는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를 붕괴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구물단군의 노력
    구물단군은 재위 이듬해 대영절을 맞아 친히 천제를 올려 삼신상제님의 보살핌을 간절히 서원하였습니다. 제도를 고치고 아홉 가지 맹세(九誓之盟)을 정하여 백성의 화합과 교화를 도모하였습니다. 하지만 대부여는 예전의 진한 또는 진조선과 같은 막강한 통치력을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삼한관경제가 완전히 붕괴되어 버렸습니다. 양 날개와 같은 두 조선의 부단군이 중앙의 쇠약해진 진조선의 대단군과 대등한 관계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때부터 단군조선은 급속하게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쇠락을 길을 걷는 46세 보을普乙단군


    후기로 가면서 단군조선은 점점 쇠락해져 갔습니다. 45세 여루단군 이후 단군조선과 국경을 접한 춘추전국시대의 연나라가 끊임없이 침입을 해 왔습니다. 번조선의 68세 왕인 해인解仁이 연나라 자객에게 시해를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서기전 323년에는 번조선 제후인 읍차邑借 기후箕詡가 병사를 이끌고 번조선 궁에 진입하여 스스로 번조선 왕이 되고, 사람을 보내 이를 윤허해 달라는 청을 올리자 단군은 어쩔 수 없어 이를 인정하였습니다. 이러한 사건은 나라 전체를 통제할 수 있는 단군의 영향력이 그만큼 줄어들었다는 반증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이 기후의 후손으로 6명의 왕이 나오는데, 이를 두고 ‘기자조선’이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이는 어불성설입니다. 번조선의 마지막에 기자 후손으로 추정되는 여섯 왕대가 나왔다고 해서 단군조선의 종통이 기자로 계승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보을단군의 보위를 찬탈하는 내란까지 발생하였습니다. 한개韓介가 수유須臾의 군사를 이끌고 궁궐을 점령, 스스로 임금의 자리에 올랐던 것입니다. 단군조선에는 4대 반란 사건이 있었습니다. 9세 아술단군 때의 우착, 22세 색불루단군 때의 신독, 43세 물리단군 때의 우화충 그리고 46세 보을단군 때 벌어진 한개의 반란입니다.

    보을단군에 닥친 이 위기의 순간에 상장군 고열가高列加가 의병을 일으켜 한개를 격파함으로써 반란은 진압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로부터 나라의 힘이 심히 미약해지고 살림살이가 넉넉지 못하게 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보을단군께서 붕어하셨습니다.

    조선의 멸망, 47세 고열가단군


    마지막 단군 고열가
    46세 보을단군 때 있었던 한개의 반란을 진압한 상장군 고열가는 43세 물리단군의 현손玄孫이었습니다. 반란을 다스린 공로가 있고, 백성의 사랑과 공경을 받았기 때문에 추대를 받아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고열가 단군은 백악산에 단군왕검의 사당을 세웠고, 이를 책임질 유사有司로 하여금 계절마다 제사를 지내게 하였습니다. 단군은 어질고 인자하였으나, 우유부단하여 명령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리하여 여러 장수가 자신의 용맹을 믿고 화란禍亂을 자주 일으켰습니다. 나라 살림은 쪼들리고 백성의 기운도 더욱 쇠약해져 갔습니다.

    제위帝位를 버리는 단군
    기원전 238년 3월 제천 행사를 행한 날 저녁, 고열가 단군은 오가五加와 더불어 의논하며 마지막 말씀을 하였습니다.

    “옛날 우리 성조들께서 처음으로 법도를 만들고 국통國統을 세워 후세에 전하셨노라. 덕을 심으심이 넓고도 멀리 미쳐 만세의 법이 되어 왔느니라. 그러나 이제 왕도가 쇠미하여 모든 왕[汗]이 세력을 다투고 있도다. 짐이 덕이 부족하고 나약하여 능히 다스릴 수 없고, 이들을 불러 무마시킬 방도도 없으므로 백성이 서로 헤어져 흩어지고 있느니라. 너희 오가는 현인을 택하여 단군으로 천거하라.” (단군세기)


    이에 옥문을 크게 열어 사형수 이하 모든 포로를 석방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단군께서 마침내 제위를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수도하여 선인仙人이 되었습니다. 이에 기원전 238년부터 기원전 232년의 6년 동안 오가五加가 국사를 공동으로 집행하는 과도기 공화정 시대가 열렸습니다.

    이렇게 단군조선은 시조 단군께서 조선을 연 이래 2,096년 만에 그 역사를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국통맥은 북부여北夫餘로



    고열가단군이 “나는 이제 그만 물러나겠다” 하고선 산으로 들어가기 1년 전인 단기 2095년(기원전 239년)에 우리 민족 국통맥에 있어 획기적인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바로 지금의 길림성 서란에 있는 웅심산熊心山에서 해모수가 북부여를 건국한 것입니다. 해모수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고리국 출신으로, 백악산 아사달을 점거하고 오가 부족장의 6년 공화정을 철폐하였습니다. 이에 백성들이 해모수를 단군으로 추대하였고, 이로써 단군조선을 계승한 정통 왕조 북부여北夫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단군조선의 멸망 과정에서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단군조선 2,096년은 단군조선의 중심 세력으로 만주에 있던 진한(진조선)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고열가단군은 퇴위하였지만, 단군조선 전체가 한꺼번에 문을 닫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서쪽의 번조선은 그 후 40여 년을 더 존속하다가 위만에게 찬탈당하였습니다. 위만정권은 뒤에 한 무제에게 멸망당하게 됩니다.

    북쪽에 북부여가 열리기 전부터 이미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는 땅이던 한반도의 막조선(옛 마한)에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기원전 195년에 번조선에 살던 대부호 최숭이 백성과 함께 진귀한 보물을 싣고 발해를 건너 막조선으로 넘어와 왕검성 지역에 낙랑국樂浪國을 세웠습니다. 최숭은 요서 지역에 있는 자신의 고향, 낙랑에서 이름을 따왔던 것입니다.
    이처럼 북부여가 세워진 후 만주의 진조선은 북부여에 흡수되고, 한반도의 막조선에는 낙랑국이 들어서고, 요서의 번조선은 망명객 도적 위만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단군조선 멸망의 이유


    단군조선은 신교의 삼신사상에 바탕을 둔 삼한관경제로 한민족의 고대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따라서 단군조선의 멸망 과정과 원인은 이와 관련된 사실에서 찾아야 합니다.

    단군조선 멸망의 해답은 6세 달문단군 때 신지 발리가 지은 「서효사誓效詞」(일명 신지비사神誌秘詞)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서효사」의 핵심 내용인 신교의 삼신사상에 기초하여 성립된 삼한관경제(진한, 마한, 변한)를 시행하고, 삼경제도(소밀랑, 백아강, 안덕향)의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단군조선은 한민족 역사상 최대의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이미 「서효사」에서 경계한 바와 같이 단군조선 말에 이르러 삼신사상이 쇠퇴하면서 삼한관경제가 와해되고, 단군조선도 종말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단재 신채호는 『독사신론讀史新論』에서 “삼신사상이 파탄나자 ‘삼한이 서로 진왕辰王이라 자칭’함으로써 단군조선의 삼한관경체제가 동시에 붕괴되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삼신사상에 기초한 삼한관경제를 무너뜨리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 사건이 바로 우화충의 역모 사건이었습니다.

    이로부터 파생된 여러 문제들로 인해 단군조선 말기에는 내부 분열과 대립, 삼신사상의 쇠퇴, 거듭되는 전란과 흉년, 급격한 사회 경제적 변화에 따른 내부 갈등이 복잡하게 얽힘으로써 쇠퇴의 길을 걸었고, 마침내 멸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단군조선을 전하고 있는 국내 사료의 문제점



    이상으로 단군조선의 역사와 역대 단군들의 치적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아마 지금까지 알던 조선의 역사와는 많이 다를 것이고, 간략하게 알던 단군조선 역사의 큰 맥을 잡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잘못 알게 된 단군조선의 역사와 관련하여 『삼국유사』를 비롯한 국내 사료의 문제점을 지적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환인천제의 환국과 환웅천황의 배달국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상고사가 단순히 환인, 환웅, 단군 3대로 이어진다는 역사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둘째는 단군왕검께서 나라를 세우시고 1,048년을 혼자 다스리다가 산신이 되었다는 신화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수도 이전에 따라 송화강 아사달 1,048년의 제1왕조 시대, 백악산 아사달 860년의 제2왕조 시대 그리고 장당경 아사달 188년의 제3왕조 시대로 구분되는 역년을 잘못 인식하고 있습니다.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이라는 틀에 갇혀서 국통맥을 잘못 잡고 있는 것입니다.

    고려 이후 모화사상慕華思想이 팽배하면서 중국 기록에 의한 ‘기자 동래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지금의 평양에 가공의 기자조선이 존재했다고 여길 뿐 아니라, 현재 요하 서쪽에 자리 잡고 있던 번조선 기준의 왕위를 찬탈한 위만정권을 단군조선의 정통사로 인식하는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모화사상에 빠진 유학자들이 스스로 민족의 뿌리 역사를 지워 버린 결과 한반도 내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기자조선과 위만정권이 이 땅에 자리 잡게 되었고, 결국 일본과 중국이 동방의 한국사와 고대 역사의 틀을 왜곡하는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습니다.

    <참고문헌>
    『역주본 환단고기』(안경전, 상생출판, 2012)
    『이것이 개벽이다 하』(안경전, 상생출판, 2014)


    서방 경략의 교두보이자 방파제인, 번조선의 역사

    초대 왕 치두남蚩頭男과 낭야琅邪
    중원 지역과 직접적으로 맞닿은 지역은 번조선 영역입니다. 단군조선 초기 중국은 국가의 존망이 달린 대홍수를 당하였습니다. 이전에 단군조선의 도움으로 보위에 오른 순舜은 9년 동안 계속된 물난리를 단군조선의 도움으로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단군왕검께서는 서방 한족을 제지하고자, 한족이 두려워하던 치우천황의 혈통인 치두남蚩頭男을 번한 왕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지금의 허베이성 개평 동북쪽에 있는 탕지보湯池堡에 수도를 세웠습니다. 이곳이 험독險瀆으로 왕검성王儉城이라고 칭하였습니다.

    치두남은 허베이성 난하 부근인 요수遼水 주변에 12성을 쌓았습니다. 치두남이 세상을 뜨자 아들 낭야琅邪가 즉위하였습니다. 즉위한 해에 가한성可汗城을 개축하였는데, 이를 낭야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이후 부루태자가 명을 받고 특사로 도산에 갈 때 도중에 낭야에 들러 반달 동안 머물며 백성의 사정을 묻고 들었습니다. 낭야왕은 태자의 명으로 경당을 크게 일으키고, 아울러 태산에서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렸습니다.

    15세 왕 소전少佺의 하나라 정벌
    중원 지역에 하夏나라를 세운 우禹임금은 부루태자가 금간옥첩을 전해 준 지금의 저장성 회계산인 도산塗山에 묻어 달라고 할 만큼 단군조선의 은덕을 잊지 못했습니다. 이후에도 하夏나라는 단군조선을 상국으로 모셨습니다. 그 후 폭군 걸왕桀王 때 상나라의 초대 임금인 탕이 하나라를 정벌하고자 할 때 단군조선의 허락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당시 13세 흘달단군은 처음에는 걸을 지원하였으나, 걸의 포악한 정치가 개선되지 않자 결국 탕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이때 번한의 15세 왕 소전은 기원전 1767년 갑오년에 장수 치운출蚩雲出을 보내 탕을 도와 걸을 정벌하게 하였습니다. 이듬해에는 묵태墨胎를 보내 탕임금의 즉위를 축하하였습니다. 묵태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던 고죽국孤竹國 임금의 성씨입니다. 백이伯夷·숙제叔齊의 고사로 잘 알려진 충절의 대명사 백이의 이름은 묵태윤墨胎允이고 숙제의 이름은 묵태지墨胎智입니다.

    색불루단군의 혁명이 가져온 번한의 변화
    이후 번한 28세 왕 해모라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세상을 떴습니다. 이에 진한의 소태단군은 우사雨師 소정小丁을 번한 왕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이는 늘 소정의 지모가 출중함을 꺼렸던 고등이 임금께 권하여 번한으로 보낸 것입니다. 이때 상나라 왕 무정武丁이 전쟁을 일으키자 고등이 상장上將 서여西余와 함께 격파하였습니다. 이때 서여는 군사를 번한의 수도 안덕향安德鄕에 주둔시켰는데, 자객을 보내 소정을 죽였습니다. 이후 색불루단군의 혁명이 성공을 거두게 되었고, 이에 대립하던 서우여徐于餘를 번조선 왕으로 임명하였습니다. 단군조선 제2왕조 시대를 연 22세 색불루단군이 기존의 ‘삼한’ 체제를 ‘삼조선’ 체제로 고쳤으므로, 서우여는 ‘번조선’을 다스리는 30세 왕으로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70세 번조선 왕이 된 수유 사람 기후
    번조선(번한)은 중원 지역과 인접해서 그런지 여러 정치적 변동이 많았습니다. 68세 해인解仁왕은 즉위한 해에 자객에게 살해되었습니다. 뒤를 이은 아들 수한水韓왕 때 연나라가 이틀 길을 하루에 달려 공격해서 수도인 험독까지 쳐들어왔습니다. 번한으로서는 가장 큰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이때 수유 사람[須臾人] 기후箕詡가 젊은 청년[子弟] 5천 명을 거느리고 와서 전쟁을 도왔고, 이어 진한과 번한의 군사가 함께 협공하여 연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습니다. 이에 연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고 인질을 보냈습니다. 이후 수한이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나니 기후가 명을 받들어 번조선의 왕이 되었습니다.

    번조선의 마지막 75세 왕 기준箕準
    기원전 232년 74세 왕 기비箕丕가 즉위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삼한관경제가 무너지고 천하가 혼란에 빠진 상태였습니다. 기비는 종실 사람 해모수解慕漱와 함께 새 나라를 열자는 약속을 하였고, 힘을 다해 해모수가 천왕이 되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로 하여금 능히 대권을 잡을 수 있게 한 사람은 오직 기비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들 기준 때에 떠돌이 도적 위만衛滿에게 속아 마침내 배를 타고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준왕은 황해를 건너 지금의 금강 하구 지역으로 피신하였습니다. 군산으로 왔다고도 하고 익산으로 왔다고도 합니다. 금강 하구에 있는 어래산御來山은 임금이 오신 산이라는 뜻으로 준왕의 도래 사건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단군조선 개국 이래 서방 진출의 교두보이자 외부 침략을 막는 방파제 구실을 하던 번조선은 이렇게 역사의 막을 내렸습니다.

    위만의 번조선 찬탈
    춘추전국 시대의 혼란을 피해 넘어온 한족 난민으로 번조선 땅은 혼란스러웠습니다. 그 난민 중 위만衛滿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한 고조 유방의 죽마고우이자 연나라 왕이었던 노관盧綰의 부하였습니다. 한 고조가 죽은 뒤 정권을 잡은 여태후의 공신 숙청을 피해 위만은 조선인으로 변장하고 부하 1천 명과 함께 번조선 준왕에게 투항하였습니다. 기원전 195년의 일입니다. 준왕은 위만을 받아 주었을 뿐 아니라, 박사博士로 임명하고 서쪽 변방인 상하운장을 지키는 장수로 임명하였습니다. 상하운장上下雲障은 지금의 난하 서쪽 지역에 위치한 국경 요새로, 난하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산해관 근처를 흐르는 강입니다.

    그런데 위만은 그곳에서 몰래 세력을 길러 이듬해에 한나라 군사가 열 길[十路]로 나누어 쳐들어온다고 거짓으로 고하고 왕검성을 방비한다는 핑계로 대군을 이끌고 물밀듯이 왕검성으로 들이닥쳤습니다. 이를 감당하지 못한 준왕은 도망하였고, 위만은 자신을 거두어 준 은인 준왕을 내쫓고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위만정권은 위만의 손자 대인 기원전 108년에 한나라 무제에게 멸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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