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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인물탐구]

    창세역사 성인열전 | 단군조선 제2왕조 단군들의 업적 - 혁명과 삼한관경제의 와해

    이해영 / 객원기자

    *아아! 정치는 그릇과 같고 사람은 도와 같으니 그릇이 도를 떠나서 어찌 존재할 수 있으며, 나라는 형체와 같고 역사는 혼과 같으니(國有形 史有魂), 형체가 그 혼을 잃고서 어찌 보존될 수 있겠는가. 도와 그릇을 함께 닦는 자도 나요, 형체와 혼을 함께 키워 나가는 자도 나이다. 그러므로 천하만사는 무엇보다 먼저 나를 아는 데 있다(先在知我). 그런즉 나를 알려고 할진대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겠는가? (행촌 이암의 「단군세기 서序」)


    혁명이 일어나다! 22세 색불루단군


    신시배달 이래 단군조선에 이르기까지 우리 동방 한민족은 삼신상제님을 신앙하는 신교를 바탕으로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을 바탕으로 제세이화, 홍익인간의 도 정치(道政)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무력은 그러한 도와 예에 어긋났을 때에만 부득이 대단군이 통솔하여 사용하였습니다. 때문에 중원에서는 단군조선을 ‘군자의 나라’라고 하였고, 공자도 중원에서 도의 정치가 실행되지 않자 ‘구이九夷의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조선이 건국한 이래 중반기에 접어드는 사이 중원은 요, 순, 우의 하나라를 거쳐 상나라 말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때 조선 역사에서 후대까지 큰 흔적을 남긴 혁명이 발생하였습니다.

    단군조선 우현왕 고등
    동북아의 천자 나라로서 발전을 거듭하던 단군조선은 21세 소태단군 말기 무렵, 개국 이후 첫 번째 국가 위기 상황을 맞이하였습니다. 국가 운영의 근간인 삼한관경제가 큰 타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상나라 22대 왕 무정武丁이 영토를 확장하려고 조선의 여러 제후국을 공격하자 개사원蓋斯原 지역의 지방장관(욕살褥薩) 고등高登이 군사를 이끌고 가서 이를 토벌하였습니다. 이때 고등은 대군을 장악하고 서북 지방을 경략하면서 세력이 더욱 강성해졌습니다. 공을 세운 고등은 자신을 우현왕으로 임명해 줄 것을 거듭 요청하였고, 결국 소태단군이 응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우현왕에 오른 고등이 죽자 손자인 색불루索弗婁가 그 자리를 세습하였습니다.

    최초의 쿠데타
    21세 소태단군은 순행 길에 옥좌를 이양할 의사를 밝히며 해성 욕살 서우여徐于餘에게 제위를 넘기고자 그를 불러 섭정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우현왕 색불루가 이러한 조치에 반대하고 나섰고,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아사달과 인접한 부여夫餘에 새 궁을 짓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소태단군은 어쩔 수 없이 국새를 색불루에게 넘겨주고 아사달에 은거하여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단군조선이 세워진 이래 처음 있는 쿠데타였습니다.

    이때 단군조선의 번한에 속한 작은 나라인 고죽국孤竹國의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우현왕 색불루가 단군의 자리를 무력으로 빼앗은 것이므로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왕자의 신분을 버리고 바닷가에서 밭을 일구며 살아갔습니다. 이를 두고 중국 문헌들은 고죽국을 은나라의 제후국이라 하는데 이는 명백한 왜곡입니다. 이 두 사람은 이후 주나라에 갔는데, 주나라 역시 무력으로 상(은)나라를 침공하자 산시성에 있는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고 살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색불루가 단군의 지위에 오르면서 서인으로 폐해진 서우여는 마한, 번한의 군대와 연합하여 강력히 저항하면서 삼한의 군대가 서로 맞서 싸우는 내전이 발발하였습니다. 사태가 심상치 않게 되자, 색불루단군은 서우여를 달래어 번한番韓의 왕으로 임명함으로써 내전은 가까스로 종결되었지만, 삼한관경제는 서서히 붕괴되어 갔습니다.

    천도와 삼조선 체제

    정권을 탈취한 22세 색불루단군은 길림성 장춘에 있던 백악산 아사달로 천도하여 단군조선의 제2왕조 시대를 열었습니다. 국정 쇄신을 위해서 기존의 진한, 번한, 마한의 삼한 체제를 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의 삼조선 체제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서우여를 번조선의 왕으로, 심복 여원흥黎元興을 막조선의 왕으로 삼았습니다. 이 삼조선 체제에서도 진조선의 단군이 병권을 가졌지만, 이미 예전의 삼한관경제처럼 강력하지는 않았습니다.

    색불루 단군의 서고문誓告文
    기원전 1285년 병신년 정월에 색불루단군이 녹산鹿山에서 즉위하였고, 음력 3월 16일 대영절大迎節을 맞이하여 몸과 마음을 재계하며 천제 지낼 장소를 청소하고, 희생犧牲과 폐백幣帛을 깨끗하게 준비하도록 하였습니다. 대영절은 일찍부터 이 땅의 영걸들이 강화도 마리산에 올라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지낸, 우리가 반드시 회복하여 계승 발전시켜야 할 위대한 문화유산입니다. 이때 향과 축문을 여원흥에게 내려 주어, 삼한의 대백두산 천단에서 제사를 봉행하게 하였습니다. 단군은 몸소 백악산 아사달에서 천제를 모셨습니다. 이때 백두산 서고문誓告文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소자 단군 색불루는 두 손 모아 머리를 조아려 절하나이다.

    천자의 수신修身이 백성에게 미침은 반드시 공경스럽게 하늘에 제사 지냄에서 비롯하나, 황상皇上(시조 단군)께서 삼신의 밝으신 천명을 받아 보은대덕으로 이미 삼한의 5만 리 강토와 더불어 다 함께 ‘홍익인간’의 큰 뜻을 누려 왔습니다. 그리하여 마한 여원흥을 보내 삼신일체 상제님의 제단에 제사를 올립니다. 상제님의 성신은 밝고 밝으시어 만유에 그 은혜를 베푸심이 빠뜨림이 없으십니다. 이에 심신을 깨끗이 재계하고 정성스럽게 제물을 바치오니 강림하여 흠향하시고 말없이 도우시어 반드시 새로 보위에 오른 임금의 건극建極을 보살펴 주옵소서!

    세세토록 삼한의 왕업을 천만 년 무궁토록 보존케 하옵시고, 매년 풍년이 들어 나라는 부강해지고 백성은 번영하게 하여 우리 성제聖帝(시조 단군)께서 품으셨던, #나를 비우고 만물을 살리는(空我存物)# 지극한 생각을 밝혀 주옵소서.
    (『환단고기』 「삼한관경본기」 ‘마한세가 하’)


    8조 금법

    색불루단군은 정권을 안정시키고자 8조 금법을 제정하였습니다. 8조 금법은 여덟 가지 죄와 그 죄에 대한 처벌을 정한 삼성조 시대 최초의 성문법입니다. 흔히 알려진 단군조선 시대의 금법禁法이 바로 이것입니다.

    형법과 같은 법규의 제정은 강력한 통치 체계를 갖춘 고대 국가로서의 면모를 보여 주기도 하지만, 사회 분위기와 경제 질서가 그만큼 어수선해졌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당시 단군조선은 신교 문화의 성소聖所인 소도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 의식이 약해지고 빈부 격차와 계급 분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23세 아홀阿忽단군, 25세 솔나率那단군


    23세 아홀阿忽단군
    색불루단군의 뒤를 이은 23세 아홀단군 때는 상나라가 서서히 몰락해 가면서 중원 지역은 혼란에 휩싸였습니다. 당시 상나라는 단군조선 때문에 행동에 일정한 제약을 받았고, 영토 확장 등의 모든 계획이 좌절되고 오히려 남은 땅마저 빼앗기는 등 국세가 쇠잔해져 갔습니다. 아홀단군은 아우 고불가固弗加에게 명하여 낙랑홀樂浪忽을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낙랑은 역사의 기원이 워낙 오래된 지명이며, 평평한 땅이라는 뜻으로 고유명사라기보다는 보통명사로 봐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이후 낙랑군과 낙랑국을 구분하기가 용이해질 것입니다. 이미 5,400년 전 우리 태극기 팔괘를 만드신 태호복희씨가 낙랑과 진의 땅을 거쳐 산둥성으로 진출했다는 기록이 「태백일사」에도 나와 있습니다. 낙랑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25세 솔나率那단군과 조작된 기자조선의 진실

    25세 솔나단군 때는 결국 중원 지역의 왕조가 교체됩니다. 즉 주나라 문왕과 그 아들 무왕이 상나라 마지막 왕 주왕紂王을 벌하고, 동이족 출신의 재상 강태공의 보필을 받아서 주나라를 세웠습니다.

    이때 은나라의 기자箕子가 허난성 서화西華에 옮겨 가 있으면서 인사조차 사절하였다는 기록이 단군 재위 37년인 정해년 기사에 나옵니다. 이후 기자는 산둥성 조현曹縣에 묻혔습니다. 이를 보면 중국에서 기자가 한반도에 건너와 왕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기자조선箕子朝鮮’은 완벽한 허구입니다. 즉,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를 멸한 뒤 은나라의 폭군 주왕에 의해 투옥되었던 기자를 석방하고 그를 조선의 왕으로 봉했다는 소설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서경』과 『사기』의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이 소위 기자조선인데, 이는 당시 정치·군사적 정황으로 미루어 보면 후대에 왜곡 날조된 기사입니다. 『서경』을 편찬한 공자가 생존할 당시 단군조선이 건재하고 있었습니다. 사마천이 살았던 전한 시대에는 단군조선의 삼한 가운데 진한이 북부여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중원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번조선도 엄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 문헌은 후대에 우리 고대사를 중국사에 흡수 동화시키기 위해 중화주의 천하 사상에 기초해 조작한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 단군들의 업적


    27세 두밀豆密단군
    27세 두밀단군 때까지 수밀이국, 양운국, 구다천국 등 환국 열두 나라에 속했던 나라들이 존속하였습니다. 이들 나라에서 모두 사신을 보내고 방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33세 감물甘勿단군
    33세 감물단군 때에는 영고탑 서문 밖 감물산 아래에 삼성사三聖祠를 세우고 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36세 매륵買勒단군

    36세 매륵단군 때에는 일본 창세 역사의 시조 왕이 나옵니다. 단군 재위 38년 갑인년인 기원전 667년 12월에 협야후陜野侯 배반명裵幋命을 보내어 해상의 적을 토벌하게 하였습니다. 규슈, 혼슈, 시코쿠 등을 삼도三島라 하는데, 지금의 일본열도입니다. 이곳을 평정한 것입니다. 일본을 정복한 배반명은 이곳에서 스스로 천왕이라고 칭(僭稱)하였습니다. 『일본서기』는 진무神武가 일본열도를 평정하고 기원전 660년에 천왕으로 등극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진무의 천왕 즉위 사건과 겨우 7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배반명의 천왕 참칭 사건, 이 두 가지는 동일한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43세 물리단군과 우화충의 역모 사건-2왕조 붕괴 사건


    43세 물리단군 때에 이르러 삼한관경제가 완전히 붕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바로 사냥꾼 우화충于和沖의 역모가 그것이었습니다.

    재위 36년인 을묘년 기원전 426년 길림성 서쪽 내몽골 서쪽으로 추정되는 융안隆安의 사냥꾼 우화충이 장군을 자칭하며 무리 수만 명을 모아 서북 36군을 함락시켰습니다. 군대를 보냈지만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일개 반란군조차 진압하지 못할 정도로 조선의 국력이 쇠약해진 것입니다. 그만큼 삼조선 간에 협력 체계도 와해된 상태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에 우화충은 도성을 포위하고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물리단군은 좌우 궁인과 더불어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배를 타고 내려가다가 해두海頭에 이르렀는데, 이곳에서 붕어하고 말았습니다. 이로써 단군조선 제2왕조는 막을 내렸습니다.

    제국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이때 우화충의 반란을 평정하기 위해 백민성白民城의 욕살 구물丘勿이 천명을 받들어 병사를 일으켜 장당경藏唐京을 점령하였습니다. 장당경은 후에 단군조선의 세 번째 도읍지가 되는 지금의 개원開原입니다. 이에 아홉 지역의 군사가 추종하고, 압록강과 요하 지역의 18개 성이 모두 군사를 보내 원조하여, 반란을 진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막조선(마한)의 33세 가리加利왕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전하였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상장군 구물이 마침내 사냥꾼 두목 우화충을 죽이고 도읍을 장당경으로 옮겼습니다. 가리의 손자인 전내典奈가 막조선을 계승하였으나 이때부터 국정은 쇠잔해져 갔습니다. 이후 기원전 366년 을묘년 막조선 마지막 왕인 전내의 손자 맹남孟男(36세)이 즉위하였습니다. 이때 수유須臾 사람 기후箕詡가 군사를 이끌고 번한에 들어가 웅거하고 스스로 번조선 왕이라 하였습니다. 연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같이 정벌하자고 하였으나 막조선이 응하지 않았다는 기록을 끝으로 막조선은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마지막 왕 맹남이 언제 물러났고, 실제 막조선의 마지막 날이 어떠했는지는 모릅니다. 이미 진조선의 고열가 대단군 이전에 막조선의 왕통 계승이 단절되고 각 부족 단위의 자치가 행해지며, 여러 나라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이런 막조선의 무주공산 시절은 기원전 195년 낙랑산의 부호 최숭이 위만의 침입이 예상되자, 백성들과 함께 마한의 평양으로 건너가서 그곳에 낙랑국(기원전 195년 ~ 기원전 37년)을 세우게 되면서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 낙랑국이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비극적 사랑이 담겨 있는 그 낙랑국입니다.

    <참고문헌>
    『역주본 환단고기』(안경전, 상생출판, 2012)
    『이것이 개벽이다 하』(안경전, 상생출판, 2014)



    세계 최고 수준의 청동기와 거석문화
    단군조선은 당대 최고의 청동기 문화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단군조선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홍산문화 지역인 요서의 하가점에서 청동기 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그중 단군조선의 대표 유물로 널리 알려진 비파형 청동검이 발견되었습니다. 악기 비파처럼 생긴 이 검은 요서, 요동, 만주, 중국의 허베이성, 산둥성, 그리고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이는 단군조선의 영역이 요서에서 한반도까지 걸쳐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좌입니다. 하가점 하층문화와 상층문화로 알려진 이 청동기 문화는 황하 유역이나 시베리아 지역의 문화보다 앞선 시기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강단 주류사학계는 이 홍산문화를 인정하지 않고 우리의 청동기 시대가 기껏해야 서기전 1,300년을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고 단정하듯 주장하고 있습니다.

    단군조선의 뛰어난 청동기 제작 기술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유물로 다뉴세문경多鈕細文鏡이 있습니다. 여러 꼭지 잔줄무늬 거울로 이 청동 거울 뒷면에는 머리카락 굵기에 불과한 1만 3천 개의 직선과 100여 개의 동심원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국보 141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최근에야 거의 흡사하게 복원했을 정도로 매우 뛰어난 청동 주조 기술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비파형동검과 다뉴세문경을 통해 보면 단군조선의 청동기 제작 기술은 단연 동북아 최고 수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단군조선은 거석 유적에 속하는 고인돌도 많이 남겼습니다. 고인돌은 원래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에 나타난 돌무덤 형식의 하나로, 전 세계에 약 6만여 기가 있습니다. 만주와 한반도에 특히 많이 남아 있는데, 한반도에만 4만여 기가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가히 고인돌 나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강화도 부근리 고인돌은 3의 구조로 되어 있는데, 이는 천부경 3수(천지인) 원리가 담겨 있습니다.

    고인돌에 사용된 판석의 무게는 적게는 10톤 미만에서 많게는 300톤에 달합니다. 이 거대한 판석을 떼어 옮기려면 수백 명의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고인돌을 세우는 일은 강력한 중앙 통치 체제를 갖춘 사회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고인돌은 단군조선 시대에 이미 중앙집권적인 국가가 출현해 있음을 보여 주는 확실한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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