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 바로알기 │ 한국사 왜곡의 결정적 사건 8가지 - 제 뿌리 역사를 부정하는 이 땅의 매국사학賣國史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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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시대의 아픔, 賣國奴와 賣國史學


일제 강점기를 겪으며 우리 사회에 매국노賣國奴와 매국사학賣國史學이라는 말이 생겼다. 매국노는 ‘나라를 팔아먹은 노예라는 뜻이고, 매국사학은 ‘자신의 모국母國인 조국을 배신해, 영토와 민족혼을 외세에 팔아먹은 역사학’을 말한다.

우리는 대한제국을 일본에 팔아먹은 이완용 등을 대표적인 매국노로 칭한다. 그런데 9천 년 대한의 역사 정신으로 볼 때 구한말 을사오적乙巳五賊에 버금가는 매국노가 매국사학자들이다. 그들은 개인의 출세와 안위를 위해 외세의 역사 왜곡에 동조하였다.

다행히 대한민국은 대한독립군과 이름 없는 민초의 혈성으로 매국노가 팔아먹은 나라를 되찾는 광복을 맞이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민은 광복 70년이 넘어선 지금까지도 매국사학자들이 묻어 버린 대한인의 뿌리가 무엇인지 아직 모르고 있다. 환웅의 배달국, 단군왕검의 삼조선 체계와 가르침(8강령)을 평생 접해 보지 못한 사람도 많다. 진정으로 대한인으로 성공하고 싶다면, 조상과 후손에게 떳떳한 대한인이 되고자 한다면 대한의 국통맥과 상고사 왜곡의 실체부터 깨쳐야 한다. 왜냐하면 뿌리 기운으로 열매를 맺는 것이 대자연의 섭리이자, 역사의 섭리이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대한의 세 가지 역사맥
앞서 살펴보았듯이 대한의 원형 역사책은 고구려가 망하면서 당나라 이적 장군에 의해 불태워졌고, 견훤의 후백제가 망하면서 신라와 백제의 역사 서적이 태워졌다. 이것이 대한의 원형 국통맥을 찾기가 어려운 이유다. 그러나 우리는 일제가 의도적으로 누락시킨 원래 대한의 바른 역사맥이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럼 고려 시대에 인식했던 세 가지 역사맥을 현존하는 기록 순서대로 간략히 검토해 보자.

우선 첫 번째 맥은 고려 충렬왕 재위 7~9년(1281~1283) 사이에 집필된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가 전하는 맥이며, 두 번째 맥은 충렬왕 13년인, 1287년(충렬왕13)에 이승휴의 『제왕운기』로 대표되는 유학자의 맥이다. 세 번째 맥은 고려 공민왕 때 행촌 이암을 필두로 한 삼인동맹이 전한 역사 맥이다. (이암, 이명, 범장 등 삼인三人이 경기도 양주 천보산天寶山에서 소전거사로부터 환단 시절부터 전해 내려온 신서神書를 얻어 각기 낭도郎徒정신으로 배달과 단군, 북부여, 고구려의 계승맥을 전했다.)

먼저 1, 2맥을 검토해 보면 두 서적(『삼국유사』, 『제왕운기』)은 공통적으로 지나支那족과 다른 동방의 독자적인 단군의 역사를 기술했지만 아쉽게도 후조선(기자조선)과 위만조선 그리고 한사군을 덧붙인 내용을 대한의 국통맥으로 잡았다. 그들은 불교와 유학이라는 외래사상에 경도되어 원형문화를 제대로 인식하고 볼 수 있는 안목이 부족했고, 불교와 유교식 소중화사관으로 주석을 달았다.

집필자의 사료 확보와 정신맥이야말로 역사 기술의 관건이 된다. 같은 내용도 기록자의 인식에 따라 다르게 기술된다. 이러한 이유로 『삼국유사』와 『제왕운기』는 9천 년 대한의 원형맥을 간직한 낭도郎徒 정신으로 기술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아마 두 기록자는 원형역사로 기술된 사료를 제대로 얻지 못했을 것이고, 자기 나름으로 들었던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위만조선을 기술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고려 말 제3의 맥이 전수되었다. 바로 서기 1363년 행촌 이암이 『단군세기』에서 전수한 대한의 국통맥이다. 행촌 선생은 고려 26대 충선왕 5년(1313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간 후 공민왕 11년인 1362년까지 만 50년 동안 관직에 봉직했다. 행촌 선생은 소전거사素佺居士를 통해 배달과 단군조선의 기록을 남긴 고서古書를 얻어 1362년 2월 강화도로 들어가 10월에 『단군세기』를 지었다.

한마디로 고려 공민왕 때 대학자이자 현 국무총리 격인 행촌 이암에 의해서 단군조선의 원맥과 북부여 해모수 단군으로 전수된 국통맥, 그리고 한 무제의 동방전쟁의 실상이 전수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일연 스님의 「고조선」 조 기록과 이승휴의 『제왕운기』 그리고 행촌 이암의 『단군세기』를 통해 종합적으로 대한의 원형맥의 숨결을 찾아야 한다.

小中華와 일제식민사관의 연장선에 불과한 현 國統脈
지금 자녀가 있다면 중·고등 한국사 교과서를 보라. 광복 70년을 지나 일제 식민사관을 극복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만든 교과서가 무엇을 전하고 있는지 읽어 봤으면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현 교과서는 ‘단군신화? - 기준왕(기자조선) - 위만·우거왕(위만조선) - 한사군(평양 낙랑군 표기)’를 뼈대로 하고 있다. 모든 교과서가 평양에 낙랑을 표기하고, 황해도에 대방을 비정한다. 대한의 모든 중·고등 교과서가 이 틀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고려와 조선 시대의 여러 가지 국통맥 중 자신들의 목적에 의해 선택한 것인데 아직도 이를 추종하고 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럼 일제가 만든 교과서와 21세기 현재 교과서와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한반도 북쪽은 지나족 식민지였고 남쪽은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그들의 논리에서 단지 임나일본부 하나가 빠졌을 뿐이다.

그런데 신채호, 윤내현, 이덕일, 문성재 등은 1차 사료를 분석해 기자와 위만이 온 땅은 한반도가 아님을 밝혔다. 그러나 강단講壇, 학교 교육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이병도를 머리로 한 매국사학이다. 과거 이 땅의 매국사학의 머리인 조선총독부 사학자들, 이병도의 일본 스승들은 멋대로 한반도 북부 평양에 낙랑을 비정했다. 그리고 순진한(?) 이병도는 일제가 왜곡, 날조한 평양 유물을 그대로 믿어 버렸다.

낙랑군에 관해 상고한 이병도의 「낙랑군고樂浪郡考」는 큰 문제를 파생시킨다. 조선인의 입장으로 그것도 서울대 교수의 글에서 ‘한사군의 낙랑은 평양 일대이고, 만리장성의 시작점은 황해도 수안이다’는 빌미를 남겼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의 유학자들이 ‘기자조선’을 신봉한 과오와 같다. 고려 숙종 때 유학자들은 송나라 사신의 기자 발언에 놀라 평양에 기자묘를 만들고, 단군보다도 기자에게 더 자주 제사를 올리게 된다. 동방 조선의 문명을 기자의 덕으로 칭송하며, 이 땅에 오지도 않은 기자를 대한의 국통 중심에 세우게 된다.

그런데 이병도는 조선 유학자보다 한 술 더 떠 만리장성이 황해도까지 오게 만들었다. 그리고 남북으로 분단된 한반도의 북쪽, 북한 땅을 전부 중국에 넘겨주는 잘못을 범한 것이다.

이병도는 새로운 학설을 통해 자기 학문을 자랑하고자 한 것인가? 횡설수설하며 쓴 글이 이렇게 큰 파장이 될 줄은 알고 있었을까? 이덕일 교수는 ‘이나바 이와기치稲葉岩吉가 낙랑군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으로 비정한 것을 해방 후에도 이병도가 그대로 추종하면서 남한 고대사학계에서 아직껏 정설로 떠받들고 있다’(『동아시아 고대사의 쟁점』 97쪽)고 안타까워했다.

매국사학의 두 뿌리, 中華史觀과 日帝 植民史觀


이 땅의 매국사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화사관과 일제 식민사관의 핵심을 잘 알아야 한다. 중국과 일본의 학자들은 수천 년간 단군조선을 철저히 무시해 왔다. 지나족은 단군조선의 국호를 지우려 했고, 단군조선으로부터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전수받은 우임금의 역사가 『서경』과 『오월춘추』에 살아 있음에도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라 왜곡했다.

또한 일본은 단군조선의 후예들이 개척한 나라임에도, 백제가 망한 후 제 조상의 고향 땅인 한반도로 쳐들어왔다. 일본 학자들은 환국과 배달 그리고 단군조선을 부정하려 했다. 일본인들의 단군에 대한 연구책자를 보면 ‘단군사화’를 ‘단군신화’라고 칭하며, 단군을 없는 역사로, 고려 때 만들어진 역사로 매도했다. 그런데 외세에 의한 역사왜곡보다도 더욱 심각한 것은 소중화小中華사관과 일제 식민사학에 물든 이 땅의 식민사학자들이다. 그들은 그들의 스승보다 한 수 더해 동북아의 종주인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도적 위만을 칭송하며 선진문명을 받아들인 영웅처럼 받들어 왔다.

대한민국은 일제 강점기라는 긴 어둠의 터널을 벗어나 광복했지만 대한의 뿌리의식을 부활시킨 독립군의 역사관을 중심에 세우지 못했다. 미군정기에도 일제에서 배운 학자들이 여전히 강단에 서게 되었다. 그들에 의해 미군정 시대의 교과서인 『국사교본國史敎本』이 1946년 5월 26일 발행되었다.

잘 알다시피 민주진영과 공산진영의 대치라는 한반도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친일 잔재를 청산하는 반민특위의 해체가 결정적 사건이 되었다. 그 결과 일제 식민사학은 매국사학으로 되살아났고, 서울대를 장악하며 당당히 제도권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된다. 그들의 머리가 이병도과 그의 제자 이기백이다. 이들을 통해 일제 식민사학의 변종인 매국사학賣國史學의 바이러스가 전파되었다.

이병도는 누구인가?


일제 식민사학 바이러스를 붓대에 묻혀 이 땅에 씨 뿌린 인물이 있다. 바로 강단사학에서 한국 국사학계의 태두泰斗로 숭상하는 이병도李秉道(1896~1989)다. 이병도의 본관은 황해도 우봉이고, 이완영의 조카로 경기도 용인 출신이다. 1912년 보성전문학교 법률학과에 입학해 3년 과정을 마쳤으며, 이어 1915년 일본 와세다대학에 진학하여 1919년 문학부 사학급사회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귀국해 약 7년간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지리·역사를 가르쳤다. 뒤이어 조선사편수회 촉탁(1925~1929)을 지냈다. 이병도는 강의와 연구를 계속 진행하며 역사 관련 논문을 사학잡지史學雜誌를 비롯한 여러 학술지에 발표했다. 1934년 한국인 학자들과 함께 진단학회震檀學會를 창립하고 『진단학보』를 간행했는데 이병도는 「삼한문제와 신고찰」을 발표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진단학회를 재건했고, 1946년 서울대학교가 개교될 때에는 사학과와 문리과대학 창설에 참여했다. 교수 활동을 하면서 정년퇴임까지 16년간 도서관장·박물관장 및 대학원장(1954~1961)을 지냈다. 1960년 4·19혁명으로 과도내각이 구성될 때 문교부 장관에 취임했고, 1962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추대되었다.

이병도는 1948년 『조선사대관』을 출간했고, 1954년 『국사대관』으로 증보하였다. 1959년에 진단학회가 편찬한 『한국사』의 고대 편을 저술했으며, 1976년에는 『한국고대사연구』를 간행하여 자신의 연구성과를 집대성한 책자를 발간했다. 1989년 사망했다.

이병도의 일본인 스승들
와세다대학은 1882년 개교한 도쿄에 있는 종합대학으로 일본을 대표하는 명문 사립대학 가운데 하나이다. 와세다대학 유학 시절(1915~1919) 이병도에 지대한 영향을 준 두 교수가 바로 ‘요시다 도고吉田東伍(1864~1918)와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1873~1961)’이다.

요시다 도고는 누구인가? 요시다 도고는 1893년 『일한고사단日韓古史斷』를 집필했고, 1895년에는 청일전쟁의 종군기자로 참가했다. 일본으로 돌아가 그의 대표작이 된 『대일본지명사전』을 1900년부터 1907년까지 출간했다. 1911년에 와세다대학 교수로 임용되어, 역사와 지리 등을 담당했고, 1915년 유학 온 이병도를 가르쳤다. 1918년 5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병도의 또 다른 스승이 쓰다 소키치다. 쓰다 소키치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사관을 미화시키기 위한 역사학, ‘일본 단일 민족상’을 창조하기 위한 역사학을 했다. 1902년 29세 때 지은 『일본사 교과서』를 보면 “우리 일본 민족은 커다란 가족이다. 황실은 우리의 종가이며 우리는 황실의 지류라 할 수 있다. 양자가 끈끈한 정으로 맺어진 것은 실로 국체의 정화이다.”라고 하였다. 쓰다는 황국사관皇國史觀을 정립하기 위해 힘썼고 일본 왕을 천황이라 높이고, ‘현인신現人神’으로 칭송한 극렬 천황주의자였다.

천황중심주의로 무장한 쓰다 소키치는 ‘일본제국이 침략하여 차지한 땅은 일본제국의 천황가에 해당하기 때문에 천황의 은혜를 입은 것’이라는 논리를 폈다. 그리고 쓰다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내용 중 허구로 유명한 ‘신공황후의 삼한정벌 설화’를 수용하여 일제의 대조선 침략 및 식민정책을 부추겼다. 이를 위해 그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만들어 『일본서기』를 앞세우는 역사관을 펼쳤다. 또한 고려의 국경선을 축소해 멋대로 비정했다.

한마디로 쓰다는 동방의 중심을 일본천황으로 삼고, 침략한 식민지를 일본제국의 역사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날조된 역사이론을 만들어 낸 대표적인 침략사학자였다. 이러한 쓰다가 길러 낸 한국인 식민사학자들이 바로 이병도(1896~1989), 손진태(1900~?), 이상백(1904~1966) 등이다.

또한 이병도는 조선사편수회 촉탁(1925~1929)을 하며 조선총독부 조선사 편찬위원(1922년)과 조선사편수회 수사관修史官(1925년)이었던 이나바 이와기치(1876~1940)의 영향도 받았다.

이병도는 그들의 손아귀에서 조선사를 파괴하기 위한 조선인으로 길러졌다. 실제로 이병도는 스승들이 자신을 잘 대우해 주고, 보살펴 줬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과연 이병도는 천황가를 칭송하는 일본 제국주의 학자들의 침략의도를 몰랐을까?

아무튼 이병도는 일제가 만든 역사조작을 실증사관으로 알고 배운 조선인 유학생이 되었다. 1919년 대한인들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는 때에 그는 일본인 스승들에게 논문을 올리며 와세다대를 졸업했다.

식민사학의 태두, 이병도의 대표적인 주장
이병도가 일본인 스승들의 발언을 그대로 인용하고, 새롭게 자신이 발굴한 몇 가지 지엽적인 자료를 덧붙여 기술한 발언을 살펴보자.

황해도 수안을 만리장성의 기점으로 삼다
(낙랑군) 수성현 (중략) 자세하지 아니하나, 지금 황해도 북단에 있는 수안遂安에 비정하고 싶다. 수안에는 승람 산천조에 요동산遼東山이란 산명이 보이고, 관방조에 후대 소축의 성이지만 방원진防垣鎭의 동서행성의 석성이 있고, 또 『진지晋志』의 수성현 조에는 - 맹랑한 설이지만 - ‘진대장성지소기秦代長城之所起’라는 기재도 있다.

이 진 장성설은 터무니없는 말이지만, 아마 당시에도 요동산이란 명칭과 어떠한 장성지長城址가 있어서 그러한 부회가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릇된 기사에도 어떠한 꼬투리가 있는 까닭이다. (「낙랑군고」, 『한국 고대사 연구』 148쪽)


이병도는 “진秦 장성의 동단은 지금의 조선 황해도 수안의 강역에서 기하여 (중략) 개원 동북 지역으로 나온다는 사실은 『한서』 「지리지」에 의해서 의심할 바 없다.(이나바 이와기치, 『진장성동단급왕험성고秦長城東端及王險城考』 1910년, 41쪽)”라는 스승 ‘이나바 이와기치의 발언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 「낙랑군고」를 낸 것이다.

대동강 남안 토성리 일대를 조선현의 중심지로 비정
낙랑군은 (중략) 그 수부首府(수현首縣)의 이름이 조선현인 만큼 지금의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고 있음에 대해서는 종래에 별로 이론이 없었다. 또 낙랑군이 한사군 중의 중추적인 구실을 하여 왔던 것도 사실이다. (「낙랑군고」 133쪽)

과연 일제 초기로부터 일인日人 조사단에 의해서 대동강 남안南岸인 (대동면) 토성리 일대가 낙랑군치인 동시에 조선현치朝鮮縣治 임이 그 유적·유물을 통하여 판명되었다. (중략) 낙랑의 유적과 유물은 다른 곳에서도 발견되지만, 특히 이 대동강 토성리를 중심으로 한 부근 일대에 집중된 감이 있다. 이로써 보더라도 이 일대가 낙랑군치인 조선현의 소재지였던 것은 재언을 요하지 않는다. (「낙랑군고」 140~142쪽)

“고조선의 중심 지역은 서북 해안 지대인 대동강 유역(평양)” (『조선사 대관』 20쪽)

“한나라 수군이 지금의 산동반도로부터 바다를 건너 열수(지금의 대동강)로 들어와 왕험성을 치다가 ······ 한은 위씨조선 땅에 본 주민의 국가를 말살하고 자국의 군현제를 실시하여 원原 조선에는 낙랑군”
(『조선사 대관』 30쪽)

“왕험성의 위치가 지금의 평양인 것을 알 수 있다.”
(「위씨조선흥망고」 『한국 고대사 연구』 91쪽)


이병도 발언 중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1차 사료에 없는 말을 일본인 스승 ‘이나바 이와기치’의 1910년 발언을 그대로 추종해 ‘수안현으로 비정하고 싶다’고 무책임하게 기술한 것이다.

둘째, 열수를 대동강으로, 고조선의 중심과 위만조선의 왕험성을 대동강 평양으로 비정한 것이다. 이는 ‘왕험성은 낙랑군에 있으며, 패수 동쪽에 있다’는 것과 위만조선의 도읍지였던 왕험성에 요동군 험독현을 세웠다는 『한서』 「지리지」 〈요동군〉 ‘험독현’의 기록을 무시한 것이다. 즉, 패수가 대동강이면 왕험성은 패수 동쪽에 있어야 한다는 1차 사료를 무시하고, 대동강 남단의 토성리를 치소治所로 비정하는 잘못을 범한 것이다. 그리고 우거왕이 한나라 대군에 1년을 버틸 만한 험한 지역이 없는데도 평양을 위만조선의 왕험성으로 비정했다.

셋째, 일제가 발굴한 유물만 믿고 1차 사료에 부합하지 않은 ‘대동강 남단 낙랑군 중심지(조선현치)설’을 편 것이다. 즉, 이병도는 ‘토성리 일대가 낙랑군치인 동시에 조선현치임이 유적·유물을 통하여 판명되었다’고 믿고, ‘이 일대가 낙랑군치인 조선현의 소재지였던 것은 재언을 요하지 않는다’라고 단정지었다.

이기백은 누구인가?


이기백(1924~2004)은 평안북도 정주군 출신으로 이병도의 후학이다.

이기백은 1941년 오산중학교를 졸업한 뒤 1942년 일본 와세다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하고, 1947년 서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다. 이기백은 이병도와 같이 와세다대학과 서울대 사학과를 나와 『국사신론』(1961), 『한국사신론』(1967), 『한국고대사론』(1975) 등을 집필했다.

이기백의 대표작인 『한국사신론』을 통해 그의 역사관이 어떤 문제점을 가졌는지 3가지만 살펴보자.

1)단군왕검의 건국을 믿을 수 없는 역사(신화)로 본다
고조선사회의 성장

청동기의 사용과 더불어 형성된 성읍국가를 기본으로 하고 각지에 정치적 사회가 탄생하였다. 북쪽 송화강 유역의 부여扶餘, 압록강 중류 지역의 예맥濊貊, 요하와 대동강 유역의 고조선古朝鮮, 동해안에 있는 함흥평야의 임둔臨屯, 황해도 지방의 진번眞番, 그리고 한강 이남의 진국辰國 등이 그러한 것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BC 4세기경에는 이미 중국에까지 그 존재가 알려질 정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도 청동기의 유물을 제일 많이 남기고 있는 요하와 대동강 유역에 자리 잡고 있던 고조선이 가장 선진적인 것이었다.

성읍국가로서의 고조선은 아사달阿斯達에 건국하였다고 한다. 아사달은 곧 훗날의 왕검성일 터이지만, 그 위치는 원래 대동강 유역의 평양이었던 것으로 전해져 왔다. 그런데 최근에는 요하 유역이었다고 주장하는 설도 대두하고 있으며, 혹은 처음 요하 유역에 있다가 뒤에 대동강 유역으로 옮겼다는 설도 나타나고 있다. 이 고조선 성읍국가는 아사달 일대의 평야를 지배하는 조그마한 정치적 사회였을 것이다. (이기백 저, 『한국사신론』 30~31쪽)


이기백은 청동기와 더불어 국가가 성립될 수 있다는 이유로 서기전 2333년 단군왕검의 건국은 믿을 수 없고, 한반도 북부의 소국이었을 뿐이라고 한다. 또한 ‘성읍국가’라는 용어를 통해 국가가 아닌 작은 성 정도의 소국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미 폐기됐어야 할 ‘청동기 국가 창건설’을 내세워 대한 상고사의 뿌리인 단군조선을 부정하기 위한 논리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단군조선이 신화가 아닌 사화임을 알 수 있는 부루 태자 도산회의 참석 등의 1차 기록은 무시했다. 서구식 틀을 세우기 위해 성읍국가라는 형식을 빌어와 단군조선을 한반도 평양 지역의 소국으로 축소시켰다. 그러나 이는 고인돌과 비파형 청동검 등의 표지 유물로도 거짓임이 판명된다.

2)위만조선을 칭송하고, 한사군의 중심을 평양 낙랑으로 비정
이기백은 1차 사료에도 없는 평양 한사군설을 추종해 ‘대동강 평양을 고조선의 중심지로, 평양을 낙랑군 치소’로 비정한다. 이는 일제가 식민사관을 심기 위해 조작한 유물을 그대로 믿었기 때문이다.

한의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그해(B.C. 108)에 위만조선의 판도 안에다 낙랑樂浪· 진번 · 임둔의 세 군郡을 두고, 그 다음 해(B.C. 107)에 예의 땅에 현도군玄菟郡을 두어 소위 한의 4군이 성립되었다. 그 위치는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의 고조선 지방, 진번군이 자비령 이남·한강 이북의 옛 진번 지방, 임둔군이 함남의 옛 임둔 지방, 현도군이 압록강 중류·동가강 유역의 예 지방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중략)

한의 군현이 그들의 식민정책을 수행한 중심지는 낙랑군이었다. 그 낙랑군에는 군태수 이하의 관리와 상인 등 한인이 와 살면서 일종의 식민도시를 건설하고 있었다. 그들의 생활상의 대략은 낙랑군치樂浪郡治로 생각되는 평양平壤 서남쪽 강 맞은편의 토성리 유적이 발굴 조사된 결과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사신론』 36~37쪽)


그리고 대륙백제를 무시하고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낙랑’을 상정한다. 대륙백제 강역이 분명히 나오는 지나족의 기록을 무시했다.

또 위만조선을 기술하며 사마천의 『사기』에도 없는 “이 B.C. 4세기경에는 중국의 철기문화를 받아들이게 되었으므로, 고조선은 더 한층 국가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고 생각된다.”( 『한국사신론』 31쪽)고 했다. 한마디로 위만조선과 한사군이 중국의 선진 철기문화를 전수받는 창구였다는 것이다. 이는 위만의 나라 찬탈과 한나라의 침략에 좋은 역사적 평가를 내리는 것이 아닌가.

3)쓰다 소키치의 ‘삼국사기 초기 불신론’을 추종
이기백은 대표적인 일제 식민사학자인 쓰다 소키치의 ‘『삼국사기』 초기 불신론’을 수용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초기기록을 무시했다. 일본의 역사책, 『일본서기』를 뼈대로 삼아 우리 역사를 바라본 것이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임나일본부설’을 한반도 남부에 넣기 위해 ‘『삼국사기』 초기 불신론’을 만들었지만, 이기백은 일본 스승의 뜻을 따라 그 의도를 알면서도 그대로 수용했다. 그리고 이기백은 왜곡된 국통맥을 바로 세우기는커녕 식민사학을 추종하면서 『한국사신론』의 첫머리에 ‘식민사학 척결’을 내세웠다.

결론적으로 말해 한국사를 대표한다고 자찬하는 이기백의 『한국사 신론』은 허울만 식민사학을 극복했다고 일갈할 뿐 식민사학 바이러스를 받은 이병도와 일본인 스승들의 역사학을 뼈대로 한 역사학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기백은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설’로 대한의 국통의 뼈대로 잡고 있다. 또한 ‘대동강 고조선, 대동강 위만조선, 대동강 한사군’으로 숨 돌릴 틈 없이 식민사학을 주입하고 있다.

문제는 이 책이 미국에까지 번역되어 대한의 상고사를 공부하려는 한류 팬들에게 읽힌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를 보며 대한의 역사를 잘못 알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한국은 옛날에는 중국어를 사용하다 한글이 창제된 후 한글을 사용한 나라로 알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한반도 북부는 중국의 식민지였다는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다. 실제로 대한사람의 원맥(배달-단군조선-북부여-고구려)의 역사를 전하려 해도 그들의 첫 순정은 이미 깨어졌고, 잘못된 역사관의 바이러스에 노출되어 지나족의 아류로 대한상고사를 보고 있다. 이 모든 것이 1차 사료를 멋대로 해석하고 비정한 이병도와 이기백에게서 비롯되었고, 일제 식민사학을 추종한 잘못된 안목이 가져온 참담한 결과이다.

매국사학을 넘어서야


해방 70년이 넘었지만 매국사학의 바이러스가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대한의 강단에서 아직도 증식하며, 변이를 거듭하고 있다. 지금 이 땅의 강단사학계는 이병도, 이기백을 추종하는 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들은 아직도 지나족과 일제가 굳혀 놓은 역사기록과 유물조작을 그대로 두고, 지엽적인 연구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는 교통사고로 척추와 목뼈가 뒤틀린 환자에게 손가락과 발톱을 수술해 주며 곧 회복된다는 거짓말을 하는 격이다.

소중화 사관과 일제 식민사관 그리고 매국사학자들이 정해 놓은 국통맥을 바로잡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일부 강단사학자들은 오랫동안 국가와 민족을 위한 연구가 아닌 제 나라와 민족의 역사를 삭감시키는 연구를 해 왔다. 제 조상의 뿌리 역사가 결국 신화이고, 우리가 지나족의 식민지였다는 엉터리 연구를 해서 무엇하겠는가? 하지만 그들의 철밥통은 굳건하다. 그들이 받는 월급은 이 강토와 역사, 나라를 지키라고 주는 국록國祿이자, 백성들의 혈세 아닌가.

우리 국민의 잘못도 있다. 그동안 국록을 먹으며 우리 역사를 잘 지켜줄 것으로 그들을 너무 믿은 것이다. 그들의 현란한 붓장난에 놀아난 것이다. 그래서 이제라도 대한의 미래를 위해서 이 세 가지를 기억하고 실천했으면 한다. 첫째, 그들이 대한독립군의 역사관을 버리고, 일제 식민사관을 추종함을 기억하자. 둘째, 독서를 하자. 이미 신채호 선생과 윤내현, 이덕일, 문성재 교수 등이 1차 사료를 통해 그들의 잘못된 점을 충분히 정리해 놓았다. 그리고 셋째, 대한의 원형역사인 제3의 맥을 바로 알자. 고려 말 행촌 이암 선생의 『단군세기』와 그 후손인 이맥의 『태백일사』를 통해 대한의 올바른 국통맥을 바로잡아야 한다. 상생방송 〈환단고기 북 콘서트〉를 통해 큰 맥을 잡고 깨어나야 한다. 이제 우리는 일제 식민사관의 변종 바이러스인 매국사학에서 벗어나야 한다. 깨어난 민초의 힘으로 ‘제 조상의 역사는 신화다. 대한인의 뿌리는 없다’는 얼빠진 매국사학을 멈춰 세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