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역사 성인열전 | 삼한관경제로 전성기를 누린 조선 제1왕조의 단군 임금님들

[역사인물탐구]

이해영 / 객원기자

세상에서 요순지치(堯舜之治)를 일러 왔으나 9년 홍수는 곧 창생의 눈물로 일어났나니 요는 천하를 무력으로 쳐서 얻었고, 형벌은 순으로부터 나왔느니라. (증산도 도전 4:30:3∼4)


대저 삼신일체三神一體(삼신과 하나됨)의 도는 ‘무한히 크고 원융무애하며 하나 되는 정신大圓一에 있으니, 조화신이 내 몸에 내려 나의 성품(性)이 되고, 교화신이 내려 삼신의 영원한 생명인 나의 목숨(命)이 되며, 치화신이 내려 나의 정기(精)가 된다. 그러므로 오직 사람이 만물 가운데 가장 고귀하고 존엄한 존재가 된다. (행촌 이암의 「단군세기 서序」)


檀君朝鮮 세 왕조 연대


단군조선의 역사는 총 2,096년으로 47분의 단군이 통치하였습니다. 초대 단군왕검은 개국시조로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리고, ‘아침 태양이 빛을 비추는 땅’인 아사달, 지금의 헤이룽장성 하얼빈에 도읍을 정하였습니다. 이를 쑹화강 아사달 시대로 제1왕조라고 합니다. 21세 소태단군까지 1,048년을 지속하였습니다. 그 후 22세 색불루단군은 이 쑹화강 아사달에서 남서쪽의 백악산 아사달, 지금의 길림성 장춘長春으로 천도하였습니다. 제2왕조 시대로 43세 물리단군 때까지 860년을 지속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44세 구물단군은 남쪽으로 더 내려와 지금의 요령성 개원시로 천도하였습니다. 장당경 아사달 시대로 국호가 ‘대부여大夫餘’로 바뀌어 약 188년간 지속되었습니다. 도읍지의 이동에 따라 세 왕조의 변천을 거친 고조선은 47분 단군이 2,096년 동안 다스렸습니다.

중국의 九年 洪水와 부루 태자의 활약


단군왕검 즉위 50년이 되던 기원전 2284년인 정사丁巳년에 동북아에 대홍수가 일어났습니다. 왕검께서는 풍백風伯인 팽우에게 물을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그 다음 해에 마리산에 참성단을 쌓고 천제를 올렸습니다. 단군조선의 홍수는 1년 만에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7년 후에 중국 본토에서 장장 9년 대홍수가 일어났습니다(기원전 2276년부터 2267년까지).

서양에서는 이보다 먼저 노아의 홍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기독교의 성서에 따르면 ‘40일 동안 밤낮 홍수가 계속되어 인류가 전멸당하고 노아의 가족만 살아남았다’고 하지만, 그때 지구촌 인류가 다 없어진 게 아닙니다. 인류는 노아의 홍수 이전에도 살았고, 노아 홍수가 일어나던 그 순간에도 지구촌 곳곳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태평성대로 알려진 것과 다르게 제위를 차지하기 위해 많은 사람을 죽인 요임금의 업보로 인해 그의 통치 말기에 큰 홍수가 일어났습니다. 처절한 원한을 맺고 죽은 이들의 피눈물이 모여서 발생한 것이죠. 이때 우의 아버지 곤鯤이 치수를 담당하는 책임자였는데, 치수에 실패를 하고 우산羽山에 귀양 가서 무참히 죽었습니다. 그 후 순임금 시절 우禹가 아버지를 계승해서 치수 담당관(司空)이 되었습니다. 우는 “삼과기문이불입三過其門而不入이라. ”즉 자기 집 앞을 세 번 지나면서도 집에 들러 처자를 보지 않고 홍수 다스리는 데만 전념했습니다. 그럼에도 홍수가 그치지 않고 국가의 존립마저 위태로운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에 중국은 동방 천자국의 단군왕검에게 구원을 요청하였습니다.

부루 태자, 五行治水法을 전수하다
우의 지극정성을 보았던 동방의 단군왕검은 전권 대사로 큰아들 부루 태자를 파견하였습니다. 부루 태자는 도산塗山에서 우에게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금간옥첩, 오행의 원리로 물을 다스리는 법)을 전수하였습니다. 이에 우는 오행치수법으로 9년 홍수를 다스렸습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과거까지는 물을 막는 방법 즉 제방을 쌓는 방식이었다면, 우는 아래로 흐르는 물의 본성에 따라 물길을 트는 방법을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우는 9년 홍수를 다스린 덕으로 민심을 얻어 중국 고대 3왕조 중 첫 번째인 하夏나라를 열었습니다. 도산에 파견된 부루 태자가 우에게 금간옥첩金簡玉牒을 전한 사실은 『오월춘추』, 『묵자』, 『역대신선통감』, 『세종실록』, 『응제시주』, 『동국여지승람』 등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상이 중국 9년 홍수를 다스린 일의 전말입니다.

사근동후肆覲東后의 본래 뜻
이때 부루 태자는 나라의 경계를 살펴 정하고, 오늘날 허베이성에 해당하는 유주幽州와 영주營州 두 주를 단군조선의 영토에 귀속시켰습니다. 그리고 회수와 태산 지역의 제후들을 평정하여 분조分朝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그 일을 순임금에게 맡겼습니다. 순임금도 단군조선의 제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단군조선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중국의 역사는 요순시대에서 더 이상 전개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부루 태자가 단군왕검의 명을 받고 특사로 도산에 갈 때, 도중에 낭야성瑯琊城(산동성 교남시膠南市에 있으며 단군조선에서 중국 왕조를 감독하던 감우소監虞所가 있던 곳)에 들러 반 달 동안 머무르며 백성의 사정을 살폈습니다. 이때 순임금이 치수에 대한 모든 일을 보고하였습니다. 이를 『서경』 「순전舜典」에서는 사근동후肆覲東后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에 대해서 대개는 ‘순임금이 동쪽의 제후를 만났다’라고 해석합니다. 하지만 이는 ‘제후인 순임금이 동방의 천자인 단군왕검을 알현하였다. 또는 그 전권 대사인 부루 태자를 알현하였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나 문구에도 맞습니다. 여기서 근覲은 『예기』 「곡례曲禮」에 따르면 제후들이 북쪽을 향해서 천자를 알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아爾雅의 주註에서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뵙는 것[下見上]’이라 풀이하고 있습니다.

국가 통치 헌법,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전수해 주다
부루 태자가 도산에서 사공 우에게 전해 준 치수 방법이 담긴 금간옥첩에는 홍범구주洪範九疇가 담겨 있습니다. 국가 통치 헌법 전문이 홍범구주로 그 첫 번째가 오행입니다. 오행 공부를 통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홍범 사상의 핵심은 아홉 범주 가운데 가장 중앙에 있는 황극皇極입니다. 여기에서 천자天子사상이 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단군왕검 자신이 황극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은 시황제始皇帝 이전까지는 왕이라고 칭할 뿐 황극, 황제를 칭하지 못했습니다. 훗날 남송의 주자朱子는 이 황극을 세상을 다스리는 실질적인 권한을 가진 천자天子로 인식하였습니다. 정치와 역사 현실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하였던 것입니다.

2세 부루단군의 업적


어아가를 지으심
초대 단군왕검 붕어 후, 맏아드님인 부루 태자가 뒤를 이어 2세 단군이 되셨습니다. 부루단군은 어아가於阿歌를 직접 작사 작곡하였습니다. ‘어아’는 기쁨과 흥에 겨워 내는 감탄사로 음악 이름이기도 합니다. 신시 개천 이래로 매년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나라에 큰 축제를 열어 모두 삼신상제님의 덕을 찬양하며 화합하였던 노래가 바로 어아가였습니다. 또한 어아가는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군사들이 전쟁할 때 불렀다고 합니다. 어아가에는 “어아 어아 우리 대조신(삼신상제님)의 크나큰 은덕이시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또한 “어아 어아여 아등이, 배달국 그 은혜를 백백천천 잊지 못하오리다.”라고 해서 이 배달국 환웅천황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소련少連과 대련大連의 삼년상 풍속의 시작
유가에서는 부모님의 상을 당하면 3년 동안 근심스럽게 지내며, 부모님 묘 곁을 지키는 삼년상三年喪을 치렀습니다. 그런데 이 풍속의 시작이 단군조선 시대 하늘이 내린 효자인 소련과 대련에게서 나왔습니다. 대련은 백두산 4대 신선 중 한 명이었습니다. 이들은 부친상을 당하자, 처음 3일 동안 태만怠慢하지 않았고, 3개월 동안 게으르지 않았고, 한 해가 다 지나도록 슬퍼하였으며, 3년 동안 근심으로 지냈다고 합니다. 이에 부루단군은 이들을 불러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공자는 이를 윤리의 시초라 칭송하고 이들을 성인이라 하였습니다. 3년간 거상居喪하는 상례喪禮는 신교를 종주로 하는 단군조선에서 나온 신교문화의 제사 풍속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업주가리 문화와 전계佺戒
해마다 정월이 되면 질그릇 단지에 쌀을 담아 뒤울안의 박달나무 말뚝 위에 올려놓고 짚으로 고깔을 만들어 씌우고 복을 비는 민간 풍속이 있습니다. 이때 쌀을 담는 단지를 ‘부루단지’라고 합니다. 바로 단군조선 부루단군과 관련이 있는 풍습입니다.

재위 58년 무술년(환기 5015, 신시개천 1715, 단기 151, BCE 2183년)에 부루단군이 붕어하였습니다. 이날 하늘에 일식이 있었고, 산짐승이 떼를 지어 산 위에서 울부짖고, 만백성이 목 놓아 통곡하였습니다. 후에 백성들이 제사를 지낼 때, 집안에 자리를 정하여 제단을 설치하고 항아리에 곡식을 담아 제단 위에 올려놓았는데, 이것을 부루단지扶婁壇地(또는 신주단지, 칠성단지)라 부르고, 업신業神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또한 전계佺戒라고도 칭합니다. 우주 광명 인간, 바로 홍익인간의 도를 깨친, 그것을 이룬 사람을 한 글자로, 전佺이라고 합니다. 전이란 온전한 사람, 우주 광명의 인간이 된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 밝은 우주광명의 인간이 되는 생활 지침을 전계라고 하는데, 이 전계를 지키는 것을 일생일대의 유일한 삶의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이 구도의 삶, 전계를 내 필생의 업[佺戒爲業]으로 삼는다는 풍속이 민족 대동의 축제 문화를 열었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보은 제천의 의식으로 업신 문화를 열었습니다.

업신은 업위신業位神 또는 사창신司倉神으로 재물과 복록을 내려 주는 재물의 신으로 업왕신業王神이라고도 합니다. 부루단지는 업주가리業主嘉利라고도 하는데 가리란 단으로 묶은 곡식이나 장작 따위를 차곡차곡 쌓은 더미를 말합니다. 토기에 곡식을 담아 단상에 두고 볏짚으로 노적가리처럼 주저리를 만들어 씌운 것을 말합니다. 10월이 되면 반드시 햇곡식을 갈아 담습니다. 이는 부루단군이 물을 다스리고, 농토를 정리한 덕을 기려 치성을 드린다는 뜻입니다. 부루단군은 도량형을 통일하였으며 삼베와 모시의 시장 가격을 어디서나 똑같게 하였습니다. 평상시에는 푸른 옷을 입게 하고 제천의식에는 흰옷을 즐겨 입게 하였습니다. 이로써 삼신문화가 부흥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었습니다.

3세 가륵嘉勒단군의 업적


신왕종전神王倧佺의 도
부루단군의 뒤를 이은 이는 가륵단군입니다. 가륵단군은 삼신을 수호하는 관직인 삼랑三郎 을보륵乙普勒에게 신왕종전神王宗佺의 도에 대해서 얘기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을보륵은

“신神은 천지조화의 기氣로부터 만물을 낳고 각기 타고난 성품[性]을 온전하게 하시니 신의 오묘한 조화를 백성이 모두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왕王은 덕과 의로써 세상을 다스려 각자 타고난 목숨[命]을 안전하게 해 주시니, 왕이 베푸는 것을 백성이 복종하여 따르는 것입니다. 종倧은 나라에서 선발한 스승이요 전佺은 백성이 천거한 스승이니, 모두 이레(7일)를 한 회로 하여 삼신께 나아가 맹세합니다. 천상의 상제님[天神] 을 대신하여 천하를 다스릴 때는, 도를 널리 펴서 백성을 이롭게 하여 한 사람도 자신의 타고난 성품을 잃지 않게 하며, 만왕萬王을 대신하여 인간을 다스릴 때는 ‘병을 없애고 원한을 풀어 주어[去病解怨] 비록 미물이라도 함부로 생명을 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옵니다.

백성으로 하여금 그릇된 마음을 고쳐 참되게 하고 삼칠일(21일)을 기약하여 ‘온전한 사람이 되는 계율’을 굳게 지키게 해야 하옵니다.”


라고 진언하였습니다.

이에 단군이 구환족에게 이 가르침을 베푸니, 백성이 모두 순종하고 삼신의 한마음으로 돌아가 교화되었습니다. 이러한 ‘신왕종전의 도’에 대해서 종도사님은 “제왕학帝王學의 법전이다. 왕도王道문화의 핵심 정수를 보여 주는 교과서와 같다.”고 정의해 주셨습니다.

한글의 시원 가림토와 최초의 역사책 배달유기



이후 지방마다 말이 서로 다르고, 마을에서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 많고 서로 문자를 이해하지 못하여, 가륵단군은 삼랑 을보륵에게 한글의 원형이 되는 가림토加臨土 38자를 창제하게 하였습니다. 배달국 시대에는 녹도문鹿圖文이라는 문자가 있었습니다. 형상의 뜻을 나타내는 진서眞書는 이를 말하는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즉 배달국 신시 시대 때부터 있던 문자를 이때 수정 보완하여 만든 것이 가림토 문자인데 이를 신전神篆이라고도 하였다고 전합니다. 이를 조선 시대 세종대왕이 필생의 사업으로 수정, 보완한 것이 훈민정음訓民正音 즉 우리의 한글입니다. 이 가림토 문자는 몽골, 만주, 서역 등 당시 단군조선의 영향력 아래 있던 여러 지역에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한글이 창제된 이후 이 기원에 대해서 여러 설이 있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가륵단군은 또한 신지 고설高契에게 명하여 지금은 현존하지 않으나 배달국 역사로 추정되는 『배달유기倍達留記』를 편찬하게 하였습니다.

흉노족의 시조와 일본의 기원
서양은 물론 지구촌 역사를 흔들어 놓은, 동북아 유목문화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기마 민족으로 훈족이 있었습니다. 훈족의 ‘훈’은 ‘한, 사람이다’란 뜻입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훈족을 폄하하기 위해서 ‘흉악한 노예 같은 위인들’이라는 뜻을 담아 ‘흉노匈奴’라고 불렀습니다.

가륵단군 6년 열양列陽 욕살 삭정索靖을 약수弱水 지방에 유배시켰다가 나중에 사면을 하고서 그곳(몽골 초원에서 북만주에 이르는 지역)의 제후에 봉했는데, 이 사람이 훈족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욕살은 큰 성을 다스리는 행정권과 군사권을 함께 관장하는 장관이고, 약수는 간쑤성 장액현張掖縣입니다.

가륵단군 재위 10년 무신년에 두지주의 예읍이 반란을 일으키니 임금께서 여수기余守己에게 명하여 그곳 추장 소시모리素尸毛犁의 목을 베게 하였고 그 땅을 소시모리라 불렀는데 이후 음이 변해서 소머리 나라[牛首國]가 되었습니다. 그 후손에 협야노挾野奴라는 인물이 있는데(36세 매륵단군 38년인 기원전 667년 협야후 배반명裵幋命), 바다를 건너가 삼도三島, 즉 지금의 일본을 점거하고 스스로 천왕이라 참칭僭稱하였습니다. 이 협야후 배반명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진무왕 즉 사노노미코토狹野尊입니다.

4세 오사구단군과 5세 구을단군 그리고 6세 달문단군


4세 오사구烏斯丘단군은 아우 오사달을 지금의 몽골 땅에 몽고리한蒙古里汗으로 임명하였습니다. 4,100년 전에 몽골의 시조 왕이 탄생한 것입니다. 5세 구을丘乙단군은 재위 16년에 친히 장당경에 순행하여 삼신단을 쌓고 환화桓花를 많이 심었다고 합니다. 이 환화가 무궁화냐 진달래냐 하는 여러 주장이 있습니다. 우가牛加 출신으로 대통을 이은 6세 달문達門단군 때는 신지神誌 발리發理로 하여금 한민족의 뿌리를 노래한 대서사시 서효사誓效詞를 짓게 하였습니다. 서효사에는 삼한관경제의 핵심이 잘 담겨 있습니다.

11세 도해단군과 13세 흘달단군 그리고 16세 위나단군


대시전을 지어 환웅천왕을 기림
11세 도해道奚단군은 재위 원년인 경인년(단기 443년, 기원전 1891년)에 12명산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을 택해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지내는 국선소도國仙蘇塗를 설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둘레에 박달나무를 많이 심고, 가장 큰 나무를 택하여 환웅상桓雄像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냈으며, 그 이름을 웅상雄常이라 하였습니다.

같은 해 10월에는 대시전大始殿을 지었습니다. 대시전! 이는 내가 동방의 유구한 역사, 그 문화 정신을 복원하겠다 하여 큰 대大 자, 비로소 시始 자를 썼습니다. 대시전은 환웅의 유상遺像을 받들어 모신 곳으로, 그 모습이 지극히 웅장하고 화려하였습니다. 후세에는 점차 충신, 열사도 함께 봉안하였습니다. 원래 대시전은 환웅전인데, 후에 불교의 부처가 들어오면서 환웅전이 대웅전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도해단군은 환국, 배달의 시조를 섬기는 문화를 크게 부흥시켰습니다.

천지인의 창조 정신과 목적을 밝힌 글, 염표문

도해단군 때 가장 중요한 일은 환국, 배달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천부경과 삼신문화에 대한 가르침, 삼신상제님의 천상 궁전 세계와 인간에 대한 가르침을 베푼 366자 삼일신고 등의 내용을 근거로 해서 환국, 배달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을 완성한 것입니다. 바로 염표문念標文입니다.

염표문은 문자 그대로 마음[念] 속에 지닌 큰 뜻을 드러낸[標] 글[文]입니다. 환웅천황이 환국의 마지막 환인천제로부터 전수받은 ‘재세이화, 홍익인간을 열여섯 글자로 정리한 것이 염표문의 시초입니다. 여기에 도해단군이 천지인의 창조 정신과 목적을 덧붙여 내려 준 한민족의 민족교육헌장이자 신교문화헌장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홍익인간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홍익인간은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뜻이긴 하지만 단순히 생활의 질을 높여 주는 것만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을 삼신의 가르침으로 일깨워서 천지의 뜻과 대이상을 실현하는 주체인 태일太一이 되게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태일의 삶을 살게 하는 것, 이것이 홍익인간의 궁극이요 참뜻입니다.

13세 흘달단군(일명 대음달)

13세 흘달屹達단군은 소도제천 행사를 크게 부흥시켰습니다. 소도를 많이 설치하고 천지화天指花를 심었는데, 이를 계승하여 신라에는 꽃을 머리에 꽂고 다니는 젊은이 집단인 화랑花郞이 있었습니다. 단군조선 때는 천지화랑天指花郞, 국자랑國子郞이라고 하였습니다.

재위 당시 중원의 상나라 탕왕이 하나라 마지막 왕인 걸왕桀王을 치자 걸왕이 구원을 청하였습니다. 이에 단군이 응하자, 탕왕이 군사를 되돌렸습니다. 그런데 이후 걸이 약속을 어기고 군사를 보내어 길을 막고 맹약을 깨뜨리려 했습니다. 이에 단군은 상나라에 군대를 지원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후한서』 「동이열전」에서는 모든 동이가 침범해 오니 탕이 혁명하여 걸왕을 쳐서 평정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16세 위나단군
16세 위나那尉단군 때에는 영고탑寧古塔에서 구환족의 모든 왕을 모이게 하여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지내고 환인천제, 환웅천황, 치우천황과 단군왕검을 배향하여 네 분 성조聖祖를 모시는 제사문화 전통을 세웠습니다. 부여의 영고제迎鼓祭라는 제천문화 풍속이 여기에서 온 것입니다. 이것은 단군왕검 이전부터 내려온 삼신상제님을 맞이하는 천제이자 축제이며 대동굿입니다. 당시 5일간 큰 연회를 베풀어 백성과 함께 불을 밝히고 밤을 새워 천부경을 노래하며 마당밟기를 하였다고 합니다.

소태단군과 제1왕조의 붕괴


21세 소태蘇台단군 때까지 단군조선은 중국 왕조와 문화 교류를 하였으며, 중국 역대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가 조공을 바친 사절을 교환한 기록이 여럿 있습니다. 그런데 소태단군 재위 49년 임진년에 개사원蓋斯原 욕살褥薩 고등高登이 지금의 중국 산시성 북쪽 내몽골의 음산陰山산맥 일대에 살던 족속인 귀방鬼方을 멸망시키면서 대군을 장악하고 서북 지역을 경략하며 세력을 키웠습니다. 이후 단군에게 사람을 보내어 우현왕右賢王이 되기를 주청하였습니다. 단군께서 꺼렸지만, 거듭 청하자 결국 윤허하게 되었습니다.

소태단군 재위 52년에 우현왕 고등이 훙서薨逝하고 손자 색불루索弗婁가 우현왕을 계승하였습니다. 그 뒤 단군께서 옥좌를 해성海城 욕살 서우여徐于餘에게 선양하려 하자, 우현왕 색불루가 극력 반대하였습니다. 이후 색불루는 좌우의 사람들과 사냥꾼 수천 명을 이끌고 백악산 아사달, 즉 지금의 만주 농안農安 일대에 있는 부여신궁夫餘神宮에서 단군으로 즉위하였습니다. 우리 역사상 기록된 최초의 정변政變이었습니다. 이에 단군께서 부득이 옥책玉冊과 국보國寶를 우현왕에게 전하고 아사달에 은거하여 그곳에서 최후를 마쳤습니다. 이로써 단군조선의 첫 번째 왕조는 막을 내리고 색불루단군에 의한 제2왕조 시대가 개막되었습니다.

<참고문헌>
『역주본 환단고기』(안경전, 상생출판, 2012)
『이것이 개벽이다 하』(안경전, 상생출판, 2014)



중국 고대 3왕조 하상주의 흥망을 좌우한 단군조선

단군조선은 요순시대를 이은 하夏·상商·주周의 건국과 흥망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夏나라의 창업자는 바로 회계산會稽山에서 부루 태자로부터 오행치수법이 적힌 금간옥첩을 받아 치수에 성공한 우임금입니다. 우임금은 조선의 은혜를 잊지 못해 죽을 때 회계산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현재 우임금의 왕릉은 회계산에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의 『오월춘추吳越春秋』에서는 단군조선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부루 태자를 현이玄夷 출신의 창수사자蒼水使者라고 왜곡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치 우가 정성이 지극해서 하늘에서 현몽해서 스스로 국난을 해결한 것처럼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라에서 상商나라로 중원 왕조가 교체될 때도 단군조선의 힘이 작용하였습니다. 단군조선의 13세 흘달단군은 처음에는 걸왕을 지원했으나, 걸왕의 폭정이 지속되자 결국 상나라의 탕왕을 지원하여 이기게 하였습니다. 상나라는 은殷나라라고도 하는데, 신교로 나라를 열고 국가를 경영하였습니다. 중요한 일이 있으면 하늘에 제를 올리고 길흉을 점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갑골문자입니다. 탕왕을 보좌한 개국공신 이윤은 11세 도해단군 때 국사國師인 유위자有爲子에게 신교의 대도 문명을 배워 상나라의 제도와 질서를 정립하였습니다.

초기에 상나라는 단군조선을 상국으로 모셨는데 12세 하단갑 때부터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조공도 바치지 않고, 심지어 단군조선의 변방을 침입하기까지 했습니다. 이에 조선의 21세 소태단군과 22세 색불루단군은 상나라를 정벌하였습니다. 전쟁을 할 때마다 패전을 거듭한 상나라는 결국 단군조선의 지원을 받은 주周나라에게 멸망을 당했습니다. 이때 주나라의 무왕을 도운 인물이 강태공입니다. 주나라는 창업 때부터 단군조선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이전 왕조와 같이 조선에 조공과 방물을 바쳐 예를 표했습니다. 주나라 4세 소왕昭王 하瑕는 단군조선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고, 32세 추밀단군 때에는 번조선에 방물方物을 바치기도 하였습니다.

단군조선과 중국의 관계를 간단히 정리하면 단군조선은 동북아의 천자국이었고, 하상주 중국 고대 3왕조는 모두 단군조선의 정치적 통제를 받은 제후국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