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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B하이라이트]

    STB다시보기 | 역사대담 3회 - 임나일본부설의 진실(1)


    사회자: 김철수 중원대학교 종교문화학과 교수
    대담자: 남창희 인하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지금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위안부 문제, 강제징용의 문제를 넘어서 경제보복까지 진행되고 있는데요. 어떻게 한일관계의 갈등을 극복하고 바람직한 미래를 열어갈 수 있을까요. 우리 역사의 참모습을 탐구하는 역사대담에서는 한일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해법을 국제정치학적 관점에서 찾아보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Q 김철수 교수: 지난 시간에는 한일 갈등의 원인을 푸는 데 있어서 역사적인 배경이 되는 정한론과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말씀을 나눴습니다.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중요 내용들을 다시 한번 말씀 부탁드립니다.

    A 남창희 교수: 임나일본부설은 일본학계에서도 공식적으로 폐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지를 남겨둔 부분이 있는데요, 그것은 ‘가야=임나’라는 내용입니다. 이 부분이 폐기된 임나일본부설의 망령을 계속 부르는 일종의 주문처럼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완전히 해부해보는 것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임나일본부설이라고 하면 시청자분들은 조금 생소하실 수도 있지만 일본 역사교과서에서는 아직도 임나일본부설이 나오고 있습니다. 일본의 제국주의 시절에는 신공황후와 같은 일본 역사왜곡의 핵심인물들의 초상이 그려진 화폐를 유통시키기도 했고, 고구려 백제 신라왕들이 신공황후에게 조공하는, 말도 안되는 삽화를 그려 역사를 조작했습니다. 당시에는 한민족에게 패배주의를 심어주어 항일의식을 마비시키는 도구로 임나일본부설을 활용했던 것입니다.

    임나일본부설은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 경남지역인 가야땅에 일본이 식민통치기관을 두고 지배를 했으며, 백제와 신라가 끊임없이 조공을 바치면서 야마토 왕권에 충성을 했다라는 가공의 이야기입니다. 이 가공의 이야기를 살펴보는 것이 지금 이 시대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 이유는 현재 일본의 아베정부 뒤에서 新정한론을 부추기는 일본회의라는 단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회의는 일본의 국수주의, 극우단체로써 모든 극우단체를 결집시키고 있습니다. 이 일본회의에 속했던 출판사 중의 하나가 역사왜곡의 내용으로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던 후쇼샤입니다. 이 일본회의라는 극우단체를 중심으로 임나일본부설이 진실이었다고 노골적으로 주장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임나일본부설은 지나간 과거의 학설이 아닌 현재 일본이 벌이는 역사왜곡의 화근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일관계의 진정한 화해를 위해서는 임나일본부설이라는 화근을 명쾌하게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김철수 교수: 말씀 감사합니다. 일본은 백제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데요. 백제는 국력이 강성했을 때는 고구려와 대항해서 싸울 정도였는데, ‘대륙백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A 남창희 교수: ‘대륙백제’에 대해서 꼭 말씀드리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중국 대학에 교수로 가있는 제자가 있는데요 이 제자의 박사학위 논문이 신라와 백제의 동맹 형성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국제관계 이론으로 당시 동맹의 사례들을 모두 추출해서 연구를 했었는데요. 연구를 하다보니 의도하지 않았던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습니다. 동맹의 형태 중에 ‘균형동맹’이 있고 ‘편승동맹’이 있습니다. 균형동맹은 강대국이 나타났을 때 다른 나라와 힘을 합쳐 강대국과 힘을 비슷하게 만드는 동맹이고, 편승동맹은 강대국의 세력에 동조하고 이용해서 이익을 거두는 동맹을 말합니다. 주로 강대국의 동맹전략이 균형동맹을 하고 약소국이 편승동맹을 선택하게 됩니다. 신라는 여러번 편승동맹을 선택했는데 백제는 일관되게 균형동맹을 고수했습니다. 즉 백제는 강대국의 동맹전략인 균형동맹을 했다는 것입니다. 백제가 균형동맹을 일관되게 고수했다는 것은 한반도 외에 다른 세력권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동맹전략을 선택할 수 있지 않았나 추정됩니다. 제자의 박사학위 연구가 이런 내용으로 발표되자 많은 언론사로부터 관심을 받고 인터뷰를 했었습니다. 또 제자도 연구를 하면서 중국 남조의 황제들이 중국 동북지방의 태수를 백제인에게 맡긴 것, 산동성에서 북위와 백제가 10만 기병으로 전쟁을 했다는 등의 역사내용이 이해가 안갔는데 백제 국력의 실체를 알고 나서 이런 중국 역사의 기록들이 이해가 되었다고 합니다.

    백제가 중국의 산동성이나 절강성, 요서쪽에 진출해서 식민지를 확보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고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백제를 한반도에 국한지어서 보면 큰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하지만 아직 주류사학계에서는 대륙백제에 대한 이야기와 일본을 백제 담로들이 지배했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나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우리나라가 강성했다고 하는 것이 통쾌해야 당연할 텐데 우리나라가 강성했다는 사실을 두려워하는 것은 “한국 고대사는 강성하면 안된다”는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의 태도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만약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의 “우리나라 학자들과 조선총독부가 한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같은 선상에 있다”는 얘기와 같이, 제가 느낀 점이 맞다면 너무 끔찍합니다.

    Q 김철수 교수: 교수님께서는 주로 국제관계를 연구하시니 고대사를 이해하는데 있어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백제와 야마토 왜와의 관계를 동맹의 형태로 말씀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A 남창희 교수: 백제는 야마토 왜를 후방에서 끊임없이 지원해주는 충직한 동맹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백제는 균형동맹을 이루는 데에 일본을 동원했다고 보여지고요. 백제가 막강한 국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근거가 야마토 왜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추가로 말씀드리고 싶은 부분은 제가 동남아시아와 백제 관계에 대해서 대만 국립대 교환교수 시절에 조사를 했었습니다. 우선 대만과 백제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동이열전』에서 백제 부분을 통해 대만의 일부가 백제의 영향권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요. 또 필리핀 국립박물관에서는 백제 양식의 굽다리 접시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점이 흥미로워서 박물관 학예사분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었는데요. 학예사분이 반가워하면서 굽다리 접시에 대해 자신도 궁금한 점이 있었다고 하면서 이 굽다리 접시는 필리핀 현지인들은 쓰지 않는 제사 때 사용하는 접시 같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부분은 이 백제 양식의 굽다리 접시가 필리핀과 베트남을 비롯해서 동남아시아 지역 해안가를 중심으로 발견되었다는 점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어쩌면 이 굽다리 접시의 발굴지역이 백제의 해외무역의 흔적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백제는 바다를 지배하는 해양력과 조선술이 발달해서 동아시아의 해양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본토의 영토는 작지만 해양무역과 항해술을 바탕으로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했던 네덜란드나 포트투갈처럼 백제도 영토는 작았지만 바다를 지배하면서 세계 곳곳에 광대한 무역 네트워크를 운영한 나라였다고 봅니다. 그래서 국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야마토 왜를 용병으로 쓸 수 있었고 당나라와도 대등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데 재밌는 점은 우리나라가 백제의 모델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가 무역대국이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와 FTA를 하지 않은 나라가 거의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백제의 모델을 살리면 무역대국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역사를 배우는 것은 미래를 준비하는 실마리가 됩니다.

    Q 김철수 교수: 바다를 지배하는 국가가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백제와 끈끈했던 야마토 왜가 왜 역사를 왜곡하면서까지 백제를 제후국으로 만들고, 임나일본부설까지 만들어낸 것일까요?

    A 남창희 교수: 제가 1990년대부터 30년간 일본의 역사를 연구하고 조사하면서도 이 점은 가장 미스터리한 퍼즐이자 의문점입니다. 왜 은혜를 준 백제를 제후국처럼 무시하고 비하했을까. 일본서기에 보면 백제로부터 선진문물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임나일본부설을 얘기하면서 백제가 일본한테 조공을 바쳤다는 얘기를 하고 있거든요. 이렇게 일본이 모순된 태도를 취하게 된 이유를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663년 백촌강 전투에서 백제 부흥군과 일본의 연합군이 나당연합군에 패배하고 나서 백제가 멸망하지 않습니까. 백제가 멸망하고 백제 유민들이 일본에 들어가서 살게 되면서 만들어낸 새로운 정체성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냈을까 하는 의문점이 들어 당시 국내 정치과정을 한번 조사해봤습니다. 일본에는 백제계만 있었던 게 아니라 신라계도 많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일본서기에 보면 백제계와 신라계가 치열한 권력 암투를 벌이는 내용들이 나옵니다. 일본 천지천황의 동생과 아들 사이에서 일어난 임신란도 그렇고 정말 치열하게 권력 쟁탈전을 벌이는데요. 백제계가 중심이 되어서 새로운 구도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신라계와 더 이상 출신지역의 갈등으로 서로 다투지 않기 위해 일본은 대륙과 무관함을 강조하는 천손강림 신화를 만들어내고 일본만의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낸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당시 역사서를 집필하는 세력들은 백제계가 대다수 였기에 신라에 대한 망국의 원한으로 신라는 적대적으로, 백제는 우호적으로 기술하게 됩니다.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나당연합군 침공에 대한 공포심으로 대륙과 단절을 선언하게 되었고, 백제와 신라계가 같은 울타리에서 살아야 하기에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것으로 해서 자신들의 본 뿌리를 부정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Q 김철수 교수: 일본이 한반도 남부지역에 임나일본부가 있었다는 주장을 하려면, 이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유물이나 유적이 나와야 할 것 같습니다.

    A 남창희 교수: 만일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유물이나 유적이 조금이라도 나왔다면 관련된 논문이 엄청 많았을 것입니다. 일제시대에 가야지역 고분들을 마구잡이로 발굴했음에도 불구하고 임나일본부설을 입증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나라 고분보다 일본의 고분들을 더 많이 보게 되었는데요. 두 나라의 고분을 비교해보면 우리나라는 일본보다 형태가 더 다양하고, 디자인도 더 세련되고 고분의 형태 시기도 앞섭니다. 이와 반면에 일본의 고분은 형태가 단순하고 우리나라 고분을 모방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제철기술이 일본보다는 가야가 더 우수했기 때문에 일본학자들의 입장에서도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유물이나 유적은 찾지 못했던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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