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역사 보천교

[이 책만은 꼭]

정리-채두병(상생문화연구소 연구위원)

본서의 구성


본서는 크게 제1부 ‘보천교란 무엇인가?’와 제2부 ‘보천교,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의 글들은 인터넷 신문 <한문화 타임즈>에 연재했던 글들을 수정·보완하고 여기에 몇 가지 주제(물산장려와 근대교육 등)를 더 보탠 것이다. 그래서 제1부는 대중적인 글쓰기의 형식으로 각주를 달지 않았고 비교적 쉽게 구성하였다. 때문에 보천교가 무엇인가? 그리고 보천교를 처음 접해 전체적인 흐름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1부만 정독해도 좋을 것이다. 1부의 총 소제목들은 20개로 구성되어 있으며 저자의 의도대로 독자들은 자신의 궁금한 부분을 찾아서 읽으면 답을 얻을 수 있다.

2부는 보천교에 전문적으로 관심을 갖는 사람들을 위해 관련 자료의 해제 형식으로 구성하였다. 보천교 연구를 위해서는 자료의 발굴과 선택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저자는 당시의 신문자료(그 당시의 신문들은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와 민간지였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그리고 시대일보가 대표적이었다), 조선총독부가 생성한 공문서와 각종 보고서들을 주제별, 연대기별로 자료화하였다. 이 책의 구성이나 내용들을 볼 때 저자가 독자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제1부를 통하여 독자들이 보천교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갖게 하는 것이고, 제2부를 통해서는 보다 전문적인 연구를 위한 자료 활용이다.

저자의 입장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저자는 일제 강점기 때 생겨났다가 사라진 보천교에 대하여 폄하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본서 11쪽에서 저자는 “아직도 보천교에 대해 다루고 싶은 부분이 많이 남아 있다. 특히 교의敎義에 관한 연구도 그중의 하나이다. 교의를 연구해야만 보천교 활동들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라고 언급하면서 앞으로 연구해야 할 과제를 남겨 놓고 있다.

3가지 질문들


이 부분에서 공감한다. 600만이라는 보천교인! 그 당시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이 거대한 종교집단이 생기게 된 동력은 과연 무엇이고 교주인 차경석의 사망과 함께 역사 속에서 자취만 남기고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보천교가 이 시대에 우리에게 전해 주는 가치는 무엇인가?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라는 의문은 아직도 남아 있다.

차경석은 누구인가?


먼저 보천교의 교주라 할 수 있는 차경석은 누구인가에 대해서 살펴보자. 저자는 제1부의 3에서 차경석이라는 인물을 개략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차경석은 1880년 6월 1일 정읍시 입암면에서 출생하였다.(그러나 현 일반학계에 따르면 전북 고창군 흥덕면 용단리, 일명 연리동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석京石은 자字이고(증산 상제님이 지어준 도호라는 설도 있다), 본명은 윤홍輪洪이며 호는 월곡月谷이었다. 그는 강증산 상제님이 세상을 떠난 1909년 이후 1910년대 일제 강점기의 무단통치하에서 증산의 교의를 계승하여 종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1920년대 전반기에는 자칭·타칭 600만 명이라는 신도를 확보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면서 보천교 교단을 성장시켰으나 식민권력의 집요한 공작으로 1925년경 이후로 교단의 변화·쇠퇴의 길을 걷다가 1936년 사망한 인물이다.

차경석의 아버지 차치구(1851∼1894)는 동학혁명 당시 동학군의 간부였으며 정읍 지역의 접주로 2차 봉기에는 동학군 5천을 이끌던 수령이었다. 그러다가 1894년 12월(차월곡은 15세) 흥덕현감 윤석진에게 체포되어 불의의 죽임을 당하였다. 차치구가 구체적으로 그 당시 어떤 영향력을 끼쳤는지, 전명숙과의 관계는 어떠했는지에 대한 자료 확보도 필요하다. 차경석은 부친의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동학운동을 계속하다가 그의 생애에서 뜻하지 않은 큰 전환점을 맞이한다. 그것은 강증산 상제님과의 만남이었다. 1907년 6월 16일 김제군 수류면 원평리 주막에서 우연히 강증산 상제님을 만나 제자가 되었다. 1909년 6월 24일 상제님의 어천 이후 상제님의 부인이며 자신의 이종누이인 고판례 수부님이 주도한 선도교(자체적인 교단의 이름이 아니라 당시 언론에서 지칭하는 교단 이름)의 지도자가 되었다가 독자적인 노선을 걷게 된다.

보천교의 특별한 조직


차경석이 걸어간 독자적인 노선에는 강증산 상제님의 가르침과 조직의 운영체제가 있었을 것이다. 차경석이 어떤 가르침과 신도적인 이적을 행했는지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그가 점진적으로 형성해 간 조직체제의 강점이 짧은 기간 동안에 보천교를 600만이라는 거대 교단으로 성장시킨 주요인으로 볼 수 있다. 제1부 소제목 5 ‘보천교의 치밀한 조직’(54쪽 이하)을 참고하면 보천교의 조직형태를 알 수 있다. 보천교의 조직은 1916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즉 24방주라는 간부 조직체를 만들었다. 그리고 3년 뒤인 1919년 음력 9월 24방주제를 60방주제로 확대 개편했다. 60방주제는 1920년 말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60방주 아래 육임과 대리 1명, 그 아래 12임, 팔임과 십오임으로 조직을 구성했다. 팔임이 되려면 40명을 모집해야 했다. 이러한 피라미드 형태의 조직 외에도 의결기관을 만들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보천교 의결기관은 교의회이다. 교의회는 강선회綱宣會와 보평회普評會의 2개로 이루어졌다. 소위 양원제로 구성되었다. 강선회는 방주, 정리, 정령, 선화사로 조직되며, 보평회는 136명의 평사원評事員으로 조직되었다. 보천교의 모든 교무는 교의회를 통과해야 했는데 현대사회의 의결기관인 국회와 동일한 기능을 하고 있었다. 상수의 원리에 따른 조직과 양원제 형태의 교의회라는 협의체를 통하여 식민지의 통제와 감시 체제에서 교세를 확장했다는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천자등극설


식민권력보고서에 따르면 차경석은 1917년 4월 24일 갑종 요시찰인要視察人(블랙리스트)으로 편입되었다. 그 이유는 국권 회복을 표방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제1부 소제목 12 ‘황석산 고천제와 천자등극설 유감’(106쪽 이하)에서 “흔히 보천교의 폭발적인 교세 성장의 배경에는 이른바 ‘천자등극설’이 자리했다고 한다.”라는 표현을 하지만 천자등극설이 차경석을 따르던 보천교 내부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근거는 전혀 없다고 밝힌다. 천자등극설은 1924년 갑자년과 1929년 기사년에 걸쳐 나타났다. 1924년 1월 12일 <동아일보> 기사에 보천교주 차경석이 갑자(1924년) 사월 초파일에 조선, 일본, 중국의 천자로 등극한다는 내용이 실렸다.

그러나 저자는 1923년 말부터 출간된 보천교의 기관지인 『보광』에 실린 기사에서 “천자등극설의 발단은 보천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조선민족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진인대망론”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1924년 『보광』 4권의 <갑자신년>이란 제하의 글에서도 갑자년 등극에 관한 언급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기사를 인용하고 있다. 언론이라는 매체의 공정성과 진위 여부는 항상 검증을 거쳐야만 하는 것이다. 저자는 공정하게도 천자등극설의 유언비어는 보천교를 와해시키려는 외부 세력이라는 것을 보천교의 기관지인 『보광』을 통해 입증하고 있다. 최소한 차경석은 자신이 천자가 되겠다는 의중을 공개적으로 발설했다는 자료는 찾아보기 어렵다.

시국대동단- 보천교가 지탄받고 쇠락의 길을 걷게 하다


그 당시 보천교가 친일적인 활동을 했다는 지탄을 받았고, 그런 사실 때문에 보천교는 한민족에게 부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빌미를 제공한 직접적인 사건이 바로 제1부 소제목 20 ‘보천교 간부들의 일본 방문과 시국대동단’(163쪽 이하) 사건이다. 아마 보천교를 친일단체로 볼 때 가장 많이 지적되는 부분이 시국대동단 관련 내용이다. 1924년 갑자년에 들어서면서 보천교의 고민이 많아졌다. 더구나 시대일보의 인수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보천교 교단의 입장에서는 식민권력의 시선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1924년 9월에 조선총독부의 4대 정무총감으로 시모오카 츄지가 새로 임명되었다. 보천교는 보천교의 취지를 설명하고 협조를 구하기 위해 문정삼文政三과 임경호林敬鎬를 일본으로 파견했다.

두 사람은 신임총감인 시모오카 츄지를 만나서 보천교의 취지와 방문한 사유를 말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를 이용하려는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시모오카 총감은 600만이라는 보천교를 자기편으로 만들면 그 공적을 인정받아 총독이 될 수 있었고, 보천교에서는 총독의 비호하에서 보천교의 활동을 양성화하려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시모오카 총감은 보천교가 확실한 종교가 되려면 별도의 기관을 설립할 것을 요구했다.

총감은 시국광구단時局匡求團 설립을 조직하라고 했는데, 차경석은 이에 대해 명칭만 시국대동단時局大同團으로 고치고 이후 대동아단결을 선전하는 친일 활동을 하였다. 시국대동단의 강연자들은 대체로 친일단체였던 각파유지연맹各波有志聯盟(일제 강점기의 친일 단체. 일본의 문화 통치에 발맞추어 관민 일치, 시정 개선, 대동단결, 사상 선도, 생활 안정의 강령을 내걸고 출범하였으며, 각계에서 이 단체의 어용성을 비난하였다.)의 인사들로 채워졌다. 결국 차경석은 1925년 5월, 서울에 직접 올라가 시모오카 정무 총감을 만나고 시국대동단을 발족한 지 6개월 만인 1925년 음력 6월에 전격 해체하였다.

이후 보천교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개선하지 못하고 내외부적인 공격으로 분열을 계속하면서 쇠락해 갔다. 오히려 총독부는 경찰력을 동원해 시시각각으로 보천교의 몰락에 더욱 가세하였다. 그러다 차경석이 사망(1936년)하자마자 보천교 등 유사종교 해산령이 곧바로 발표된다.

보천교와 독립운동 자금지원


“보천교는 독립운동에 한 푼도 기여한 적이 없다”는 비난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사실을 제공한다. 일제의 관동청경무국關東廳警務局은 1924년 11월 26일 일본외무성 아세아국과 조선경무국 등에 '김좌진金佐鎭 군자금 확보' 건을 보고한다.(秘 관기고수關機高授제32743호)

"최근 김좌진은 자금이 부족하여 부하를 해산하고 모든 활동이 불능한 상태가 되었으나 금년 봄 조선 내 보천교 교주 차경석이 2만여 엔의 군자금을 제공하여 김좌진이 이 돈으로 옛 부하들을 소집하여 무장대를 편성하여 동지들을 거느려 동령현東寧縣으로 들어왔다. 김좌진이 보천교를 배경으로 행동하는 그의 장래는 상당한 주의를 요한다."

이때 김좌진 장군이 보천교로부터 받은 금액이 2만여 엔이라고 했다. 그런데 11월의 다른 자료도 있다. 거기에는 “동녕부에 근거를 둔 김좌진은 9월 상순 태을교 본부(보천교) 교주 차경석으로부터 5만 원을 받아 동녕부에서 옛 부하를 소집하여 무력행동에 나섰다”고 기록하였다. 2만 원과 5만 원을 각각 별개의 사건으로 모두 7만 원이 제공된 것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현재 시가로 28억에 해당한다).

보천교가 연루된 항일항쟁(제주 법정사)


제주도 법정사의 항일항쟁을 저자는 식민권력의 보고서에 실린 내용을 인용하면서 다루고 있다. “차월곡(경석)은 1918년 제주도 서귀포시 중문 지역에 위치한 법정사 주지인 김연일을 만나 모의하여 그해 9월 19일 교도 30명을 법정사로 소집했다. 그리고 10월 6일 밤 제주도 도민 700여 명과 합세하여 제주성내를 향해서 행동을 개시했다. 가는 도중에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여 방화 전소시키고 일본인들을 살상하였다. 그때 여기에 참가했던 38명은 검거했지만 차월곡(차경석), 김연일 등의 간부는 수만 엔을 갖고 소재를 감추어 지금 행방이 불명하다.” 이 일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불교계의 항일운동으로 다루어져 왔다.

보천교에 대한 앞으로의 연구


차경석과 보천교. 600만이라는 보천교 신도. 보천교의 특별한 조직. 보천교의 독립운동 자금 지원. 보천교의 국지적인 항일운동. 차 천자의 황제등극설. 시국대동단 활동. 이러한 주제들이 전반적으로 다뤄진 책이 『숨겨진 역사 보천교』이다. 보천교에 대한 일반적인 내용들을 가능한 한 중립적인 입장에서 본 책이다. 저자가 언급했듯이 보천교의 어떤 교의가 일제 강점기하에서 신생 교단을 급성장하게 했는지는 더 다양한 자료와 증언들이 필요하다.

보천교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 기억에 남는 내용은 600만 명이라는 거대한 숫자이고 상당한 액수의 독립운동 자금 지원이었다. 그러면서도 뒤따르는 생각은 교주인 차경석의 죽음과 함께 보천교는 왜 흔적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을까이다. 일본이나 자국민의 탄압만이 그 답일까? 참진리의 부재인가? 보천교가 가지고 있었던 기복적인 요소 때문인가?


저자 소개
김철수 2020년 2월 상생출판에서 출판된 『숨겨진 역사 보천교』의 저자인 김철수 교수는 현재 중원대학교 종교문화학과 교수이다. 저자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일제강점기에 600만 명이라는 교세를 가졌던 보천교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을 밝혀야겠다는 취지로 이 책을 저술하였다. 보천교를 세운 차경석은 1936년 역사에서 사라지고 그를 추종하던 교도들도 순식간에 흩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세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저자는 원래 일본 고대사에 관심을 갖고, 한일 종교문화 비교 연구를 해 왔다. 그런 저자가 보천교에 대한 자료수집, 학술대회 등에 참석하면서 보천교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을 펼쳐 보겠다는 취지에서 이 책을 저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