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과 무극대도 | 칠성七星의 상징 주역 - 마흔여덟 번째, 수풍정괘 ䷯

[기고]

한태일(인천구월도장, 교무도군자)

파라 파라 깊이 파라


옛날에는 동네마다 우물이 한두 개씩 있어 사람들이 그 물을 길어다 식수와 생활용수로 썼습니다. 수풍정괘水風井卦(䷯)는 위는 물괘(水, ☵) 아래는 바람괘(風, ☶)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왜 위에 물이 있고 아래에 바람이 있는 수풍水風이 우물을 뜻하는 정井이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물의 구조를 보고 괘명卦名을 취했기 때문입니다.

우물 안을 들여다보면 땅을 깊이 파내고 그 속에 나무로 틀을 짜서 벽을 쌓아 샘물이 솟아 차오르면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먹었습니다. 아래 있는 손하절(☶, 風)은 ‘나무’로 우물 벽체를 쌓은 것을 나타내며, 위에 있는 감중련(☵, 水)은 우물에 차 있는 물을 나타내어 수풍정이라고 괘명을 지었던 것입니다. 우물의 물은 아무리 퍼 써도 줄어들지 않듯 영원한 생명력을 상징하며 또한 우물은 특정한 사람의 소유물이 아니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용물입니다. 그래서 우물(井)은 끊임없는 수행을 통한 득도의 과정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물을 파서 샘물이 나오기까지는 쉽지 않습니다. 이 구멍 저 구멍을 파서는 결코 물이 나올 수 없습니다. 오로지 한 구멍에 집중해서 온 힘을 다해 파야 드디어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우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상제님의 천하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마음 품지 말고 성경신을 다해 오로지 천하창생을 살려 내겠다는 새빨간 마음[丹心]을 가져야 우리 일은 됩니다. 태상종도사님께서는 늘상 “우리들이 가진 것은 정성밖에 없다. 정성이 바로 밑천이다”라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파라, 파라, 깊이 파라. 얕게 파면 다 죽는다. (증산도 도전 6:74:3)

너희들 공부는 성경신(誠敬信) 석 자 공부니라. (8:7:5)


우리들이 수풍정괘에서 눈여겨볼 대목이 있는데요. 바로 괘명인 ‘정井’ 자입니다. 주역 64괘 중에는 하느님과 관련된 어휘나 상징어가 나오는 괘가 몇 개 있는데 대략 중천건괘重天乾卦(䷀), 화풍정괘火風鼎卦(䷱), 풍수환괘風水渙卦(䷺), 그리고 수풍정괘水風井卦(䷯)입니다.

정괘井卦는 하느님의 괘


왜 수풍정괘가 하느님과 관련이 있느냐 하면 ‘정井’ 자에 그 힌트가 있습니다.

수천 년 전부터 동서양에서는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느님을 신앙해 왔습니다. 그래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 문명이 있었던 유적지에는 하느님의 숫자, 10(十)을 상징화한 다양한 십자가 문양의 유물들이 끊임없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그 한 예로 ‘원십자(✚)’ 문양이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원십자는 우주의 시공간 사정방四正方의 바른 마음, 도의 마음, 생명의 마음, 진리의 마음, 신성한 마음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원십자의 변형으로 우물 ‘정井’ 자 문양의 유물들도 존재합니다. 몇 가지 사례를 들면 6천 년 전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발굴된 정井 자 문양의 토기와 경주 호우총에서 출토된 광개토대왕의 명호가 새겨진 청동호우에 뚜렷하게 정井 자 문양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첨성대 위에도 정井 자 모양의 천정석天井石이 올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물 정井이란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 것일까요? 종도사님 말씀으로 정리해 보면 “정井은 인간과 신의 세계를 다스리는 우주 통치자가 계신 천상 북녘의 하늘 ‘칠성七星’을 상징합니다. 칠성은 인간이 몸을 받아 내리는 하나님이 계신 별입니다.” 천손족天孫族인 우리 한민족은 아주 오래전부터 칠성신앙을 해 왔습니다. 그래서 할머니들이 장독대에 정화수井華水를 떠다 놓고 칠성님에게 자손들의 무병장수를 빌던 모습을 자주 보아 왔습니다. 특히 우물가에서 비는 이유는 칠성이 비추는 우물[井]이 원래 하늘을 의미하며, 또 우물 자체에 북두칠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칠성과 정井은 깊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또한 종도사님께서는 “칠성은 무병장수와 부활의 생명 기운을 내려 주는 별이다. 구원의 일곱 천사인 육임 의통구호대(리더를 합하여 7명)는 칠성의 기운을 받아 가을 추살의 병목을 극복한다.(도전 5:366:5 측주)”고 밝혀주셨습니다.

나는 칠성(七星)이니라. (6:7:4)
북두칠성이 내 별이니라. (3:89:6)

상두(上斗)는 북두(北斗)니 칠성(七星)이니라. (6:56:6)


그렇습니다. 결론적으로 정井이란 칠성이며 천상의 북녘에 있는 칠성에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정괘井卦는 하느님의 괘’입니다.

그래서 ‘정읍井邑’이란 지명도 의미 있게 봐야 합니다. 정읍은 바로 ‘하느님(井)의 읍성邑城’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연유로 우주의 통치자 하느님께서도 이 지명地名에 감응하여 정읍(옛 지명 고부) 땅으로 강세하셨습니다.

또한 ‘우물(井)의 읍(邑)’이란 이름에 걸맞게 정읍에는 유명한 우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도전에도 나오는 정해井海 마을에 있는 ‘새암바다 우물’입니다. 도전 3편을 보면 태을주 조화 주문의 주인, 안내성安乃成 성도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천天 선생님’이신 상제님을 만났던 그 역사적 현장이 정읍 새재인데요. 그 새재라는 고개 바로 옆에 있는 마을이 일명 ‘새암바다’라 부르는 ‘정해井海 마을’로 이 마을에는 우물 정井 자 형태의 큰 샘이 있습니다(도전 3:191:2 측주. 사진 참조).

내성이 금산사에서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드디어 꿈에 그리던 ‘천 선생님’이신 상제님을 만나니라. 내성이 정해(井海)를 지나 정읍 새재를 넘으려는데 (중략) “선생님! 뵙겠습니다.” 하고 머리를 조아리니 (중략) 이리하여 내성은 그토록 애타게 찾아 헤매던 상제님을 만나니 이 때 내성의 나이 41세라. (3:191~192)


하느님의 읍, 정읍井邑은 인간으로 오신 천주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기 위해 혁명을 거사한 동학 혁명군들이 일제에 의해 무참히 무너진 이후 보천교 참동학 구도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던 독립운동의 고향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로써 정읍은 상제님께서 천지에 질정하신 삼변성도三變成道의 도수度數대로 첫 번째 보금자리, 정읍 대흥리에 터를 잡은 ‘보천교普天敎 700만 시대’를 열어 나가며 제1변 도운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보천교는 민족정신과 독립운동의 혈맥이었습니다. 상해 임시정부 설립 자금과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좌진 장군에게 독립 자금을 지원하는 등 대한민국을 있게 한 큰 주춧돌과 같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우물은 고치지 못하나니


다음은 정괘의 괘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井(정)은 改邑(개읍)호되 不改井(불개정)이니
无喪无得(무상무득)하며 往來(왕래) 井井(정정)하나니
정井이란 읍邑은 고치되 우물은 고치지 못하니
(우물은) 잃는 것도 없고 얻는 것도 없으며 가
고 오는 이가 정정井井하나니

汔至亦未繘井(흘지역미귤정)이니 羸其甁(이기병)이면 凶(흉)하니라
거의 이르러 또 (두레박줄이) 우물에 닿지 못함
이니 그 병(두레박)을 깨면 흉하니라


주역 64괘의 괘사들을 보면 천도사덕天道四德, 즉 ‘원元·형亨·이利·정貞’이라는 어휘가 나오는데 수풍정괘의 괘사에는 ‘원형이정’이라는 사덕四德이 단 한 글자도 없습니다. 그리고 특이하게 괘사에 괘명[井]이 5번씩이나 언급되고 있습니다. 또 정읍井邑이란 지명도 눈에 띕니다. 도읍이란 새 왕조의 개창, 혁명 등 정치적인 이유로 바뀔 뿐 아니라 도읍의 주인공 또한 새 사람으로 교체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물은 옮길 수도 없고, 새로 파기도 쉽지 않기 때문에 못 고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먹고사는 민생 문제는 백성들의 삶과 직결되기에 민생을 해치는 근본적인 정치, 제도, 법령은 신중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井 改邑 不改井).

그리고 우물물은 아무리 퍼내어도 줄어들거나 넘치지 않으니 선정을 펼치는 덕치德治나 훌륭한 인재를 양육하는 것이나 혹은 무궁한 조화를 쓰는 도통道通 또한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无喪无得). 아울러 우물은 오고 가는 사람들 누구나 마실 수 있으므로 주인이 따로 없는 것이지요. 정치에 빗대어 말하면 배부르고 등 따뜻한 정치를 펼친다면 나라님 덕택德澤으로 온 백성들이 태평성대를 누리는 것입니다. 혹은 도가 높아 조화를 부려 세상 사람들을 이롭게 해 줄 수도 있는 것이고요(往來 井井). 그런데 우물물을 떠 올리는 두레박줄이 짧아 수면에 안 닿거나, 또는 두레박을 깨뜨린다면 십년공부 도로 아미타불이 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상제님 진리의 눈으로 괘사를 해석해 보겠습니다. 사람은 아무 때나 태어나고 싶다고 태어나고, 또 죽고 싶다고 죽는 것이 아닙니다. 생사의 주관자이자 칠성님[井]이신 상제님의 은총으로 이 세상에 나올 때부터 “너는 천하를 위해 뭐 돼라. 너는 뭐 돼라 하고 타고난다.(8:9:7)”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사람으로 내려올 때는 전생의 기억을 지운다고 합니다.

천상에서 사람을 내보낼 때는 유리로 얼굴을 씌우느니라. 그래야 자기가 무슨 혼으로 있다가 태어난 줄을 모른다. 그것을 알고 나오면 뭔 일을 저지르느니라. (9:216:1~2)


이런 까닭에 사람은 자신의 신원身元과 본분을 망각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천상에서 내려올 때 창생을 구하겠다는 상제님과의 굳은 언약을 까먹은 채 세파에 휩쓸리다 꿈결 같은 인생을 허송세월합니다. 그러다가 생을 마감할 즈음에야 한탄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정신 바짝 차리고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상제님께서도 “사람이란 지혜가 있고 눈치가 빨라야 한다.(8:3:1)”고 말씀하셨습니다. 우주 정치를 주재하시는 하느님의 도는 무극대도라서 부족하거나 편협한 진리가 아닙니다. 우주가 생겨날 때부터 상제님의 대도는 온 우주에 충만해 있습니다. 그 호호탕탕한 상제님의 대도를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나눠 줘야 합니다. 아직도 세상에는 진리 갈급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기에 퍼내어도 퍼내어도 줄지 않는 우물물 같은 진리를 꼭 전해야 합니다.

태상종도사님께서도 “값없는 청풍淸風이요 임자 없는 명월明月이라. 시원한 바람 쐬는데 누가 바람 값 내라고 하는 사람 없고, 밝은 달구경을 한다고 해서 달 값 내라는 사람 없다. 상제님 진리는 천지의 공도公道가 돼서 청풍명월과 같은 것이다. 상제님 진리는 세상 사람 누구에게도 다 신앙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조금만 관심을 갖고 찾아보면 진리에 갈급증을 느끼는 인연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세상에는 상제님 진리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한 태상종도사님께서는 우리 일꾼들에게 “택국澤國이 되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커다란 못이 있으면 거기에는 하루살이도 있고, 송사리도 있고, 개구리도 있고, 뱀도 있고, 물고기도 있고, 여러 가지 풀도 다 있고, 별 게 다 있잖은가. 그래서 그걸 ‘택국澤國’이라고 한다. 만유의 생명체를 다 수용한다는 말이다. 사람이 암만 옹졸하다고 하더라도 커다란 연못 하나 턱은 돼야 될 것 아닌가!”


그리고 정괘 괘사의 교훈처럼 천하사 일꾼인 태을랑들은 샘을 파다가 도중에 포기하지 않고 물이 나올 때까지 불굴의 의지로 의통성업에 임해야 세상에 있는 영웅이란 영웅들을 다 잡아들일 수 있습니다.

유지자사경성(有志者事竟成)이라. 뜻 있는 자는 한 번 뜻을 세우면 평생을 한결같이 일관하여 필경에는 성취한다는 말이요. (8:104:2)



정井이란 궁窮하지 않음이라


다음은 단전을 보겠습니다.

彖曰(단왈) 巽乎水而上水(손호수이상수) 井(정)이니
井(정)은 養而不窮也(양이불궁야)하니라
단전에 이르길 물속에 나무를 넣어서 물을 퍼올리는 것이 정井이니 정井은 길러서 궁하지 아니함이라.

改邑不改井(개읍불개정)은 乃以剛中也(내이강중야)오
읍邑은 고치되 우물은 고치지 못한다는 것은
이에 강剛으로써 가운데 함이요

汔至亦未繘井(흘지역미귤정)은 未有功也(미유공야)오
羸其甁(이기병)은 是以凶也(시이흉야)라
거의 이르러 또 (두레박줄이) 우물에 닿지 못함은 공이 미치지 못함이요 그 병(두레박)을 깸은이로써 흉함이라.


우물은 땅속을 파서 물이 나오면 파낸 구멍에다 나무로 벽을 쌓아 올려서 만듭니다. 이 같은 우물의 형상을 본뜬 괘가 바로 수풍정괘입니다. 즉 우물 속에 담겨 있는 물(水, ☵)과 그 물을 가두고 있는 땅속의 침목(風, ☴, 오행으로 陰木)이 바로 정井입니다. 그리고 물은 두레박을 우물에 집어넣어 퍼 올려 먹습니다(巽乎水而上水). 물을 위로 퍼서 마신다는 것(上水)은 생명 활동의 핵심입니다. 물의 속성이란 아래로 흘러가는 것이기에 마시기 위해서는 물을 위로 길어(上水) 먹어야 하며 사람 또한 그렇습니다. 인체의 수분 함량은 70%에 달하여 건강한 몸을 유지하는 핵심은 아래에 있는 물 기운[水氣]을 얼마나 위로 끌어 올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즉 수승화강水昇火降이 건강의 요체입니다. 아래로 흘러가는 수기를 위로 끌어 올리고 위로 치솟는 화기는 아래로 내려야 수화水火 기운이 조화를 이루어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기 저장 주문인 태을주 수행만큼 좋은 수행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물물은 퍼내고 퍼내어도 줄지 않는 것처럼 학문도 연마하면 할수록 궁해지지 않고 인재를 길러 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井 養而不窮也). 주역에서도 생생지위역生生之謂易이라 하여 낳고 또 낳는 것을 일컬어 역이라고 하듯, 우주만물은 음양변화로 끊임없이 낳고 또 낳음으로써 무궁무진할 수 있습니다. 우주의 이법을 다스리시는 상제님의 무극대도 또한 생장염장의 원리로 무위이화인 것입니다. 읍邑은 고치되 우물은 고치지 못한다는 것은 아무리 개혁을 한다 하더라도 근본은 손을 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정괘에서는 구오는 강건함이 가운데 있으므로 중정中正하여 중심을 잡고 흔들리지 않는다(改邑不改井 乃以剛中也)고 하였습니다.

두레박줄이 짧아 수면에 닿지 않음은 고생해서 우물은 팠으나 그 샘물을 먹을 수 없으니 끝내 공을 세우지 못한 거나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汔至亦未繘井 未有功也). 특히 이 대목을 우리 천하사 태을랑들은 꼭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한 길만 더 파면 땅속에 있는 수맥에 닿아 물이 콸콸 흘러넘칠 텐데 바로 직전에 포기해 버려 십년공부 도로 아미타불은 되지 말아야 합니다(羸其甁 是以凶也). 12만 9천6백 년 만에 찾아오는 이번 가을개벽은 실로 인류의 생사가 걸려 있는 중차대한 일입니다. “천하창생의 생사生死가 다만 너희들 손에 매여 있다.(8:21:3)”고 하신 상제님의 간절한 절규를 우리 태을랑들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하루하루 생업에 종사하는 현실에서는 그리 녹록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 상제님께서는 실행의 중요성을 말씀하셨습니다.

‘도지근원(道之根源) 안다 해도 행(行)할 길이 최난(最難)이라.’ 하였나니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지 꿰지 못하면 보배가 되지 못하느니라. (8:103:5~6)


그리고 종도사님께서도 “이제는 행동하는 때다. 부富의 시대는 가고 행行의 시대가 왔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또한 의통개벽 실제상황, 파방군령을 발령하시면서 “오늘부터는 지난 100년 도운사의 천지의 꿈과 대이상을 성취하고 반드시 일을 성취해야 하는 마지막 시간대다.”(2020.6.21)라고 일꾼들에게 절박한 시간대임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우물을 본받아 위로하고 도와줘야


다음은 대상전을 보겠습니다.

象曰(상왈) 木上有水(목상유수) 井(정)이니 君子(군자) 以(이)하여 勞民勸相(노민권상)하나니라
대상전에 이르길 나무 위에 물이 있는 것이 우물(井)이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 백성을 위로하고 권장하며 돕느니라.


수풍정괘는 괘상 그대로 아래 손하절괘(☴,나무) 위에 감중련괘(☵,물)가 있는 것입니다. 군자는 이 같은 정괘의 괘상을 본받아 ‘수고스러움’, ‘위로’, ‘휴식’을 나타내는 물괘(☵)를 여기서는 ‘노민勞民’으로 표현하였고, ‘고무, 진작’, ‘권장’을 나타내는 바람괘(☴)를 여기서는 ‘권상勸相’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우물물이 동네 사람들의 식수를 공급하듯 위정자 또한 백성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책력과 땅의 후박을 보고 백성들의 농사일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수풍정괘의 육효사를 살펴보겠습니다.

初六(초육)은 井泥不食(정니불식)이라 舊井(구정)에 无禽(무금)이도다
초육은 우물이 진흙이라 먹지 못하니라. 옛 우물에 새가 없도다.

象曰(상왈) 井泥不食(정니불식)은 下也(하야)일새요 舊井无禽(구정무금)은 時舍也(시사야)라
소상전에 이르길 우물이 진흙이라 먹지 못한다는 것은 아래 때문이오. 옛 우물에 새가 없다는 것은 때가 버림이라.


초육은 정괘의 맨 아래 있는 효사爻辭로 우물로 볼 때는 진흙이 섞여 있는 질퍽한 우물 바닥에 해당합니다. 그러니 사람은 물론 새들조차 우물물을 먹지 못합니다(井泥不食). 이렇게 샘물이 나오지 않아 우물로서는 기능을 상실한 초육은 진흙탕의 옛 우물이기에 버려진 폐정廢井입니다. 세상사도 똑같습니다. 계속적으로 페달을 밟지 않으면 자전거가 넘어지듯 모든 것이 정체되면 썩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을 것 같은 우물이라도 샘물이 끊임없이 용출되어야 우물로서 기능을 다하는 것이지요. 천하창생을 구원하여 후천선경을 건설하는 우리 천하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묵은 기운이 채워져 있는 곳에서는 큰 운수를 감당키 어려운 까닭이니라. (5:416:6)


九二(구이)는 井谷(정곡)이라 射鮒(석부)고 甕幣漏(옹폐루)로다
구이는 우물이 골짜기라 붕어가 쏘고 독이 깨져서 물이 새도다.

象曰(상왈) 井谷射鮒(정곡석부)는 无與也(무여야)일새라
소상전에 이르길 우물이 골짜기라 붕어가 쏜다는 것은 더불어 함이 없기 때문이라.


구이는 우물에서 맨 밑 진흙탕 정도는 벗어나 찰랑거릴 정도의 물이 담겨 있는 우물로 사람이 먹을 정도는 아닙니다. 계곡에 고여 있는 물 정도로 붕어가 물장난할 규모입니다. 물 담은 독이 깨어져 버려 바닥에 물이 남아 있는 정도의 수량입니다(甕幣漏). 이 정도로 얕은 물이라서 아래 있는 초육과 응할 정도이지 원래 제대로 응해야 하는 구오와는 응하질 못해서 함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无與也).

九三(구삼)은 井渫不食(정설불식)하야 爲我心惻(위아심측)이오 可用汲(가용급)이니
王明(왕명)이면 幷受其福(병수기복)하리라
구삼은 우물을 깨끗하게 파냈는데도 (사람들이) 먹지 않아 내 마음이 슬프도다. 가히 물을 길어 쓸 만하니 왕이 밝은 분이라면 아울러 그 복을 받으리라.

象曰(상왈) 井渫不食(정설불식)은 行(행)을 惻也(측야)오
求王明(구왕명)은 受福也(수복야)라
소상전에 이르길 우물을 깨끗하게 파냈는데도 먹지 않는다는 것은 행함을 슬퍼함이오. 왕이 밝음을 구한다는 것은 복을 받는 것이라.


구삼 자리는 내괘에서 제일 높은 위치에 있어 전체 우물 깊이로 봐도 중간 정도로, 수량도 충분하고 바닥에 깔려 있던 진흙 등 불순물도 제거하여 이젠 먹을 만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우물물을 마시지 않아 마음이 슬프다는 것입니다(井渫不食 爲我心惻). 이를 인사人事로 보면 구삼은 어느 정도 학식과 경륜도 갖추고 있음에도 구오 군왕이 등용하지 않아 구삼 입장에서는 마음이 아픕니다만 결국에는 등용되어 큰 재목으로 쓰인다는 것입니다(可用汲). 이렇게 숨어 있는 유능한 인재를 알아보고 기용하는 현명한 군왕이라면 서로에게 득이 되고 축복이 된다는 것입니다(王明 幷受其福, 受福也).

상제님의 진리로 해석하면 구삼 자리는 선천에서 후천으로 넘어가는 변국기로 이제 세상이 무르익어 하느님의 진리로 창생들을 추수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뉴월 말복末伏의 열기에 목말라하는 창생들에게 상제님 진리의 샘물을 맘껏 떠먹을 수 있게 우물터까지 깔끔하게 정비를 다해 놓았습니다. 그럼에도 세상 사람들은 엉뚱한 곳에 가서 우물을 파고 있으니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조금만 관심을 갖고 찾아보면 바로 가까이에 새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신선하고 미네랄 풍부한 생명수를 놔두고 말입니다. 오죽하면 현하대세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눈뜬장님이나 진배없는 가엾은 창생들을 보고 전선필 성도가 이렇게까지 탄식을 했겠습니까.

동서객(東西客)을 하면서 세상사를 둘러보니 할 수 없이 제 것 자랑하느라고 장돌님이 되어 갖고 평생 직업 하는구나. 가련한 창생들아! (11:137:4~6)


그래서 우리 천하사 일꾼은 사람을 알아보는 지인지감知人知鑑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하늘이 세상에서 천심天心 가진 자를 구하는 때(8:20:1)”라서 그렇습니다. 의통 육임군 사령관인 태을랑들은 도를 전해 줄 때도 천하사에 순심을 바칠 의로운 일꾼을 가려 포교해야 하며, 곧 맞이할 가을개벽 실제 상황 때도 옳은 사람만을 판별하여 살려 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상제님의 천하사 대행자이신 일월(日月=明)의 두 분 대사부께서 천지도수에 맞추어 이를 인사로 집행하시기 때문입니다. 두 분 대인의 해와 달 같은 밝은 지혜로 창생들을 결실의 길로 인도해 주시어 천지의 대복大福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십니다(求王明 受福也).

六四(육사)는 井甃(정추)면 无咎(무구)리라
육사는 우물을 치면 허물이 없느니라.

象曰(상왈) 井甃无咎(정추무구)는 修井也(수정야)일새라
소상전에 이르길 우물을 치면 허물이 없다는것은 우물을 수리하였기 때문이라.


육사는 내괘에서 외괘로 건너온 자리입니다. 우물에 물도 어느 정도까지 찼고 바닥도 깨끗하게 쳐냈고 정비도 깔끔하게 해 놔서 이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사에 적용해 보면 신하의 자리에 있는 구사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잘 다스려서 위에 있는 구오(군왕)를 잘 보필할 수 있기에 허물이 없습니다. 상제님께서도 충성스런 신하가 갖추어야 할 마음 쓰는 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한 신하가 오직 정성스럽고 한결같을 뿐 다른 재주는 없으나 그 마음이 착하고 아름다워 포용함이 있는 듯하여 남이 가진 재주를 자기가 가진 것처럼 아끼고 남의 훌륭함과 통달함을 마음으로 좋아하되 비단 말뿐이 아니라면 이는 남을 포용하는 것이니라. 나의 자손과 백성을 보전할 것이니 또한 이롭다 할 것이니라. (8:63:2)


맑고 찬 샘물을 먹도다



九五(구오)는 井冽寒泉食(정렬한천식)이로다
구오는 우물이 맑고 찬 샘물을 먹도다.

象曰(상왈) 寒泉之食(한천지식)은 中正也(중정야)일새라
소상전에 이르길 찬 샘물을 먹는다 함은 가운데하고 바르기 때문이라.


구오는 가운데(中)하고 바르기(正) 때문에 중정하며 수풍정괘의 주효主爻입니다.

주역에서 대성괘, 즉 여섯 효(爻)에서 가장 바람직한 것은 가운데 있는 효(2효와 5효)로 양陽 자리에 양효陽爻가, 음陰 자리에 음효陰爻가 온 것을 중정中正이라고 합니다.

구오가 정괘의 주효이고 중정한 자리에 있다는 것은 우물로서는 모든 것을 갖춘 최상의 우물이라는 것입니다. 즉 미네랄이 풍부한 수질이며 물맛 그리고 이가 시릴 정도의 찬물 등입니다. 그래서 오백여 년 전 퇴계 선생은 도산 서당을 처음 지을 때 마당 한 곁에다 샘을 파고 그 이름을 바로 구오효에 나오는 ‘井冽寒泉食’에서 따온 “열정冽井(맑은 우물)”이라 지었습니다. 깨끗하고 맑은 찬 샘물을 마시면 정신이 번쩍 들 듯이 항상 깨어 있는 심법으로 학문과 심신을 닦으라고 가르침을 주신 것입니다.

구오 자리는 중정하므로 양적으로 물이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고, 질적으로 물맛도 좋습니다. 물이란 오행에서 1·6수水로 북방에 배속되어 차갑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물에서 태어나 물기운으로 살아가며 또 인체에서 70%가 수분이 차지하듯 물이란 참으로 중요합니다.

물 없이는 누구도 살아갈 수 없듯 후천 가을 세상으로 넘어갈 때도 1·6으로 상징되는 육임六任 의통구호대와 수기水氣 저장 주문인 태을주를 읽지 않고서는 단 한 사람도 가을개벽기를 건너갈 수 없습니다.

태을주(太乙呪)는 수기 저장 주문이니 병이 범치 못하느니라. 내가 이 세상 모든 약기운을 태을주에 붙여 놓았느니라. 약은 곧 태을주니라. (4:147:3~4)


上六(상육)은 井收勿幕(정수물막)고 有孚(유부)라 元吉(원길)이니라
상육은 우물을 거두어서 덮지 않고 믿음을 두느니라. 크게 길하니라.

象曰(상왈) 元吉在上(원길재상)이 大成也(대성야)라
소상전에 이르길 크게 길함이 위에 있다는 것은 크게 이루는 것이라.


주역 384효에서 맨 위에 있는 상효上爻는 끝자리라서 대부분 나쁘게 표현합니다. 그런데 수풍정괘 상효는 두레박을 맨 위까지 퍼 올려야 먹을 수 있기에 좋게 말하고 있습니다(마찬가지로 솥에 밥을 해 먹는 화풍정괘火風鼎卦도 맨 위까지 뜸이 들어야 먹을 수 있기에 맨 위 상구를 좋게 표현함). 그런데 그냥 길한 것도 아니고 한술 더 떠서 ‘크게 길하다’라는 ‘원길元吉’을 끝자리인 상육 효사에 쓴 것은 주역 64괘 중에서 정괘가 유일합니다.

우물은 누구든지 와서 마실 수 있는 공용물입니다. 태상종도사님 말씀처럼 “값없는 청풍淸風이요 임자 없는 명월明月”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와서 물을 먹으라고 뚜껑을 덮지 않았네요(井收勿幕). 이처럼 우물은 혼자만 먹는 사유물이 아니라 누구나 먹을 수 있는 공용물이란 것은 모두가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有孚). 사실 샘물은 자연의 일부인지라 따로 주인이 정해진 게 없습니다. 자연의 섭리는 무상무득无喪无得의 경지입니다. 자연이법대로 천지 살림을 주관하시는 상제님의 무극대도无極大道 또한 이와 같습니다.

따라서 하늘과 땅, 인간계와 신명계를 두루 통치하시는 온 우주의 하느님이신 상제님의 대도는 크게 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元吉). 하느님이 계신 별, 칠성을 상징하는 “정井”괘의 결론은 천상의 북녘 하늘에 있는 칠성의 주인 되시는 상제님을 신앙하면 지상의 사람들과 천상의 사람들 모두 궁극의 지선至善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元吉在上). 그것은 이 세상을 다녀간 어느 누구도 성공해 보지 못한 바로 ‘천지와 함께 성공하는 삶’, 즉 ‘천지성공天地成功’이기 때문입니다(大成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