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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X파일]

    우리역사 바로알기 │ 한국사 왜곡의 결정적 사건 8가지 - 공자의 춘추필법과 사마천의 동방 역사왜곡


    지난 호 사마천에 이어 공자의 삶과 혈통 그리고 역사 기술을 통해 어떻게 동방 배달과 조선의 역사가 잘못 기술되었는지 그 실상을 검토해 보자. 크게 ‘공자의 혈통과 천명의 뿌리’, 그리고 ‘공자가 어떻게 동방 조선 문화를 왜곡했는지’와 ‘동방 천자국 조선의 원위상’을 살펴보려 한다.
    [글 싣는 순서]
    1. 사마천의 사기 편찬과 동방 역사 왜곡
    2. 공자의 역사 왜곡과 유교사관
    3. 당나라 장수 이적의 평양성 함락과 사서 파괴
    4. 일본서기의 역사 왜곡 임나일본부
    5. 태종 이방원의 서효사 소각 사건
    6. 조선총독부의 사서 수거와 소각
    7. 금서룡의 ‘昔有桓國’ 파괴
    8. 2012년 여름 경기도교육청 자료집 사건




    공자의 혈통과 천명의 뿌리는 어디인가?


    공자는 누구인가?
    공자(BCE 551~BCE 479)는 서기전 551년(노魯나라 양공 22년) 오늘날 동이족의 강역인 중국의 산동성 곡부曲阜 동남쪽에서 하급 귀족 무사인 아버지 숙량흘叔梁紇과 어머니 안顔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구丘이고 자字는 중니仲尼이며, 영어로는 콘퓨셔스Confucius라고 한다.

    공자의 어머니 안징재顔徵在는 니구산에 기도해 공자를 얻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정상적인 혼인 관계로 맺어진 사이가 아니었다. 『사기색은』에서는 ‘야합’이란 표현을 쓰며 정상적인 혼인이 아니라 평했다. 『공자가어』를 보면, 공자의 부친 숙량흘이 이때 이미 시씨施氏를 부인으로 맞아 딸 아홉을 낳았다고 한다. 공자의 모친 안씨는 숙량흘의 후처인 셈이다.

    공자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17살 때 어머니를 여의였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모두 잃고 힘겹게 살았다. 19살 때 송나라 출신 여인과 혼인했고, 20살에 큰아들을 낳았지만 공자는 계季씨 가문 창고지기와 가축 사육 일을 맡으며 힘겹게 살았다. 그러나 어린 시절 제기를 가지고 놀던 공자는 주나라 관제와 예법을 꾸준히 공부했고 예禮 전문가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35살 때 노나라에서 내란이 일어나 소공이 이웃의 제나라로 망명하자 공자도 제나라로 떠났다가 2년 뒤 귀국했다. 공자가 48살 때 계손씨의 가신 양호가 정권을 잡자, 공자는 정치에서 물러나 본격적으로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3년 뒤 양호가 망명하면서 공자는 중도中都를 다스리는 책임을 맡았고 다시 사공司空 벼슬과 대사구大司寇 벼슬을 지냈다.

    서기전 500년 노나라 정공과 제나라 경공이 회담할 때 공자가 의례를 맡아 노나라가 빼앗긴 땅을 돌려받음으로써 공자의 명성이 드높아졌다. 이 시기가 공자의 정치 생활에서 최전성기였다. 그러나 공자는 계씨를 비롯한 삼환씨 세력을 타도하려다가 실패하고 한 무리의 제자들과 함께 고국을 떠났다(서기전 497년). 이후 공자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가 14년 만인 서기전 484년에 노나라로 돌아왔다. 그때 공자의 나이 68세였다.

    이후 공자는 노나라의 악樂을 정비하고 제자를 가르치며 문헌을 정리하는 데 전념했다. 그러나 이듬 해 외아들 공리孔鯉가 50세에 죽고, 다음해(서기전 482년, 공자 70세)에 가장 아끼는 제자 안연(40세)이 세상을 떠난다. 2년에 걸쳐 육신상의 아들과 정신적인 아들을 모두 잃은 셈이었다. 공자는 깊은 실의에 빠졌다. 『논어』 「선진」 편을 보면 ‘아, 하늘이 나를 버리셨구나, 하늘이 나를 버리셨구나’ 하며 온몸으로 흐느껴 우는 공자를 보게 된다. 이때 제자들이 말리자 공자는 ‘안연을 위해서 큰 소리로 울지 않는다면 대체 누구를 위해 통곡하겠느냐? 이 사람을 위해서는 울고 싶은 만큼 울게 내버려 두어라.’라고 했다.

    이렇게 애제자를 떠나보낸 공자는 서기전 481년(71세) 『춘추春秋』를 완성했다. 이때 공자는 “후세에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춘추春秋』 때문일 것이고, 비난하는 자가 있다면 역시 『춘추春秋』 때문일 것이다.”라며 기뻐했다.

    그러나 다음 해(72살)에 또 다른 제자 자로마저 위나라에서 일어난 정변에 휘말려 피살되었다. 이때 공자는 큰 병을 얻게 된다. 사마천은 ‘자로가 죽고 공자가 병이 들었다’(『사기』 「공자세가」)고 전하고 있다. 안연과 자로, 그리고 아들 공리까지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낸 공자는 서기전 479년 73살에 천명을 다하게 된다. 공자는 노나라 도성 북쪽 사수泗水 언덕에 묻혔다.

    공자의 간략한 일생
    1세 서기전 551년(노魯나라 양공 22년) 산둥성 곡부曲阜 동남쪽에서 숙량흘叔梁紇과 어머니 안顔씨 사이에서 태어남.
    3세 아버지 돌아가심.
    17세 어머니 돌아가심.
    19세 송나라 병관씨의 딸과 혼인함.
    20세 큰 아들 백어伯魚를 얻음.
    노나라 계季씨 가문 창고지기와 가축사육 일을 함.
    주나라 관제와 예법을 공부해 예禮 전문가로 유명해짐.
    35세 제나라에 갔다가 “『소악』을 듣고 3개월 동안 고기 맛을 몰랐다.”고 함.
    48세 계손씨의 가신 양호가 정권을 잡자 공자는 정치에서 물러나 본격적으로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함.
    51세 중도中都를 다스리는 책임을 맡았고 다시 사공司空 벼슬과 대사구大司寇 벼슬을 지냄.
    54세 공자는 계씨를 비롯한 삼환씨 세력을 타도하려다가 실패하고 한 무리의 제자들과 함께 고국(노나라)을 떠남.
    68세(서기전 484년) 노나라로 돌아옴. (14년간 천하를 주유함.)
    71세 『춘추春秋』를 완성함.
    73세 천명을 다함. 노나라 도성 북쪽 사수 언덕에 묻힘.

    공자의 혈통, 뿌리는 어디인가?
    그럼 공자 조상은 어떤 혈통과 사연이 있는지 잠시 살펴보자.

    『사기史記』와 『예기禮記』를 보면 공자의 혈통은 원래 서부 지나支那족이 아니라 동이족 은殷나라 후손임을 전한다.

    사마천의 『사기』에서 전하는 공자의 혈통
    天下無道久矣(천하무도구의) 莫能宗予(막능종여)
    천하에 도가 없어진 지 오래되었구나! 아무도 나의 도를 믿지 않는다.

    夏人殯於東階(하인빈어동계) 周人於西階(주인어서계) 殷人兩柱閒(은인양주간)
    하나라 사람들은 장례(초빈)를 치를 때 동쪽 계단에 모셨고, 주나라 사람들은 서쪽 계단에 모시고, 은나라 사람들은 두 기둥 사이에 모셨다.

    昨暮予夢坐奠兩柱之閒(작모여몽좌전양주지간) 予始殷人也(여시은인야)
    어젯밤에 나는 두 기둥 사이에 놓여 사람들의 제사를 받는 꿈을 꾸었다. 내 조상은 원래 은나라 사람이었다.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


    공자는 자신이 두 기둥 사이에 놓여 제사를 받는 꿈을 꾸고 자신의 뿌리를 자각하게 된다. 또 다른 기록인 『예기禮記』 「단궁檀弓」에서도 ‘구야은인야丘也殷人也’라고 했다. 즉 공자의 혈통은 은인殷人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공자는 죽기 전에 자신의 뿌리를 찾은 것이다. 공자는 중국의 서부에서 시작한 지나支那족이 연 주周나라 사람이 아니라 동이족의 혈통이 연 은殷나라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럼 은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탕왕이 폭정을 일삼은 주나라 걸왕을 물리치고 세운 나라다. 『상족의 기원과 건국』이라는 책을 보면, ‘상商, 또는 은殷 왕조는 동이족이 거주하는 황하 하류에 있던 오래된 부락에서 발전하였다. 문헌에 따르면 설契이 상족의 조상으로 되어 있다. 그의 모母는 간적簡狄인데, 유계有娀씨의 딸로 제곡(帝嚳, 오제의 셋째)의 둘째 비였다. 설은 순 때에 교육을 맡았다’라고 했다. 즉 순임금 때 동이족의 한 부류에서 은나라를 세운 탕왕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자가 칭송한 순舜임금도 동이족이다. 『맹자』는 ‘은나라 순임금은 동이족’이라 했다. 서부족인 지나족은 주周 왕조가 되어서야 동이족 문명의 자양분을 받아 독자적 국가를 형성한 것이다. 다시 말해 요순과 우임금이 세운 하나라, 그리고 탕왕이 세운 은나라까지 모두 배달동이 문화권에서 단군조선의 영향 하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기록들은 대체로 후대에 뒤집은 것이다.

    역사학자 이덕일 교수도 ‘공자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혼란을 느꼈던 부분은 아마도 은殷나라 유민의 후예라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내 인생의 논어, 그 사람 공자』, 9쪽)라고 하며, 공자도 자신의 혈통의 비밀을 알고 큰 혼란을 겪었음을 지적했다.

    공자의 혈통을 좀 더 살펴보자. 은나라 말기부터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까지 혈통은 어떻게 되는가? 공자의 아버지는 춘추시대 송나라 숙량흘叔梁紇이다. 숙량흘은 송나라 미자微子의 후예다. 『논어』에서 미자는 기자箕子, 비간比干과 더불어 은나라의 세 현인으로 칭송받았다고 전한다.

    그럼 미자는 누구인가?

    미자는 은나라 왕 을乙의 큰 아들이었지만 모친이 정후正后가 아니었기에 왕이 되지 못한 비운의 왕자였다. 은나라 마지막 왕권은 이복동생인 주왕紂王에게 돌아갔다.

    왕권을 잡은 주왕은 연못을 술로 채우고 고기를 나무마다 매달아 놓고 즐겼다는 ‘주지육림酒池肉林’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방탕했다고 전한다. 미자는 여러 차례 간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은나라를 떠나 봉지封地인 미微 땅으로 돌아갔다. 결국 서기전 1,046년 은나라 주왕은 신하였던 주周의 무왕武王에게 패해 자살하고 은나라가 멸망한다.

    이때 미자는 주나라 무왕에게 투항하여 은나라 종사만을 잇게 해 줄 것을 간청했다. 주 무왕이 죽고 성왕 때에 미자는 주나라 제후국인 송나라에 봉해졌고, 은나라의 전통을 계승하게 된다. 결국 『사기』의 기록대로라면 미자는 은나라 왕족의 후예이자 제후국인 송나라의 군주가 된다. 공자는 아마 부친의 혈통에 대한 강한 자긍심을 바탕으로 유년시절부터 예법을 배웠을 것이다.

    물론 공자도 처음에는 주나라 문화를 크게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후에 공자도 주나라 수도인 낙읍을 답사하고 나서야 비로소 “주나라는 이대(하·은나라)를 본보기로 삼았으니, 찬란하도다 그 문화여!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노라.”(『논어』 「팔일」)라고 하며 자기의식 속에서 화해하며 주나라 문화권에 동참하게 된다. 즉, 춘추시대를 살고 있던 공자는 혼란한 자신의 시대 이전의 안정적인 주나라의 문화를 찾아 편안한 도덕 세상이 되길 원했던 것이다. 물론 주나라에 망한 혈통의 뿌리의 고향인 상(은)나라의 예악문화를 되찾고, 나아가서는 그 원뿌리인 요순시대로 돌아가길 원했던 것이다.

    공자가 찾으려 한 천명의 뿌리는 어디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천자 문화의 뿌리이자 그 상징인 용봉문화의 뿌리인 동방 배달동이 문화였다. 동이는 ‘동’과 ‘이’가 합쳐진 말로 ‘동방의 뿌리 되는 민족, 동방의 어진 민족’을 뜻한다. 공자도 『논어』 「자한 편」에서 ‘어진 군자가 사는 나라’라 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결코 동이는 동방의 오랑캐로 얕잡아 불릴 호칭이 아니었다. 춘추사관으로 중앙의 중국이 바라본 동방의 오랑캐 문화가 아니었다. 『설문해자』를 보면 동이는 ‘동방지인야東方之人也 종대종궁從大從弓’이라 했다. 즉, 동방의 사람들은 큰 대大 자, 활 궁弓 자로 상징될 정도로 큰 활을 잘 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또 큰 대인, 깊고 단단한 뿌리, 근본이라는 뜻도 담겨 있다.

    알고 보면 구한말까지 우리 조상들이 중국을 부른 ‘지나支那’라는 호칭 그대로 그들의 뿌리인 황제헌원을 비롯하여 오제五帝로 꼽히는 소호, 전욱, 제곡, 요, 순과 그 뒤를 이은 하상주 3왕조의 개국조인 하나라 우, 상나라 탕, 주나라의 문왕과 무왕까지 모두 동이족 혈통이었다. 황제헌원은 환웅천황의 가르침을 받은 웅족의 후예였다. 이렇듯 지나족은 동방배달의 가지가 되는 혈통이었다. 한 형제였던 것이다.

    맹자가 밝힌 순舜임금의 출생과 혈통
    舜生於諸風(순생어제풍) 移於負荷(이어부하) 卒於鳴條(졸어명조) 諸風負荷鳴條(제풍부하명조)
    東夷之地(동이지지) 舜東夷之人也(순동이지인야)
    순임금은 제풍에서 태어나고 부하로 이사하시고 명조에서 돌아가셨는데, 제풍, 부하, 명조가 동이족의 땅이니 그는 동이 사람이다. (『맹자孟子』 「이루장구하離婁章句下」)


    특히 상(은)나라는 동이족이 세운 나라로 제도와 풍습이 당시 그들의 상국上國이던 단군조선의 것과 아주 유사했다. 따라서 공자가 추구한 원형 예법, 은나라의 뿌리 문화는 결국 동이족의 예법이었다. 그 실례로 공자가 칭송한 소련과 대련의 3년 상을 보면 알 수 있다.

    孔子曰(공자왈) 少連大連善居喪(소련대련선거상) 三日不怠(삼일불태) 三月不解(삼월불해)
    期悲哀(기비애) 三年憂(삼년우) 東夷之子也(동이지자야)
    공자는 “소련과 대련은 상례를 잘 치렀다. 사흘 동안 게으르지 않고 석 달 동안 해이하지 않으며 1년 동안 슬퍼하고 3년 동안 근심하였으니 동이의 자손이다.” (『예기禮記』 「잡기하雜記下)


    동방문화의 심장이자 천명문화의 출처는 화하족이 아닌 동이족 문화권이었다. 또 천자사상의 상징은 용봉, 중국인들이 높이 칭송하는 중화제일용과 중화제일봉이 모두 중국 문화의 담장 밖 동이족의 중심지였던 홍산유적에서 나왔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도 공자가 말한 예악의 고향은 동이인 것이 자명하다.

    지나支那의 선조들은 우리나라를 ‘태평지인太平之人’(중국 고대 백과사전 『이아』)이 사는 나라, 불사지국不死之國, 동방의 큰 활 쏘는 사람의 나라, 신선이 사는 나라, 어진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나라〔仁方〕등으로 불렀다. 또 후한 시대에 채옹蔡邕은 『독단獨斷』에서 동방 천자제도의 근원이 동이족에서 왔음을 전하였다.

    天子(천자) 夷狄之所稱(이적지소칭) 父天母地故(부천모지고) 稱天子(칭천자)
    천자는 동이족 임금의 호칭이다. 하늘을 아버지, 땅을 어머니로 섬기는 까닭에 하늘의 아들이라 한다. (채옹蔡邕 『독단獨斷』)


    한마디로 동방에는 하늘과 땅을 부모로 모신 천자의 나라였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이 봐도 동방 조선 문화는 매우 뛰어났다는 것이다. 『용봉문화원류』의 저자, 왕대유王大有는 배달 동이족의 제왕인 태호 복희와 염제 신농이 용봉龍鳳문화의 뿌리라 말한다. 한마디로 중국이 자랑하는 용봉문화의 원형은 동이족, 동방 조선의 문화라는 것이다. 용봉은 천지와 인간을 하나로 연결하는, 우주의 최고 통치자이신 상제님의 영물이자, 동방 제왕의 상징이었다.

    공자는 어떻게 동방 조선 문화를 왜곡했는가?


    그럼 공자는 어떻게 천자국 동방 조선의 역사를 왜곡, 배척했는가? 동방 조선의 후예들은 공자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 보자. 『단군세기』 서문에서 설說한 ‘잘한 것은 잘했다고 하고 못한 것은 못했다’고 평가하여 인물과 시대의 참모습을 진단해야 한다는 역사학의 정법에 비춰서 한번 생각해 보자.

    첫째, 공자는 요순과 주나라 문무왕의 법을 찾고자 했다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는 『중용』에서 “우리 할아버지 공자는 조술요순祖述堯舜하시고 헌의문무憲意文武하셨다.”라고 평했다. 즉 단군왕검과 동시대 동이족 출신인 요임금 순임금의 가르침, 그 문화 제도를 근본 모태로 삼고 주나라를 개창한 문왕과 그 아들 무왕의 법과 가르침(헌의憲意)을 본받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공자는 요순과 문무왕의 법을 찾고 그 핵심을 후세에 전하려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종도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공자는 자신의 가르침에 대하여 ‘조술요순祖述堯舜하시고 헌장문무憲章文武하시니라.’(「중용中庸」30장)라고 하여 ‘요임금과 순임금의 사상, 심통, 법통을 근본으로 하고 문왕과 무왕의 국가통치 제도를 본받았다’고 하였다. 이 요순임금의 국가 경영 지침서, 그것이 바로 부루 태자가 전한 홍범구주인 것이다. (2006년 6월 《월간개벽》)


    공자가 표본으로 삼은 요순 역사의 진실은 9년 홍수를 다스린 법도가 전해진 『홍범구주洪範九疇』 속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이에 공자가 밝히려 한 원형을 알려면 『서경』과 『홍범구주』를 동시에 살펴봐야 할 것이다. 짧은 지면 관계로 다 정리할 수는 없지만 결론은 단군왕검 시절 동방 조선 땅과 서방 지나 땅에는 대홍수가 있었고, 이때 치수법을 가진 종통 국가는 동방조선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지나支那의 『오월춘추』와 동방 조선의 『환단고기』 「태백일사」를 비교하면 대의를 파악할 수 있다. 공자가 살던 때에 노나라 남쪽에 오나라와 월나라가 있었다. 와신상담臥薪嘗膽으로 유명한 오나라와 월나라의 기록은 9년 홍수의 진실을 파악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禹乃東巡(우내동순)하야 登衡嶽(등형악)하고 血白馬以祭(혈백마이제)로대 不幸所求(불행소구)어늘
    우는 곧 동쪽으로 순행하여 형산(형악衡嶽)에 올라가 백마를 죽여 그 피로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나 신서는 발견하지 못했다.

    禹乃登山(우내등산)하야 仰天而嘯(앙천이소)러니 因夢見赤繡衣男子(인몽현적수의남자)하야 自稱玄夷蒼水使者(자칭현이창수사자)라
    그러자 우는 산꼭대기에 올라가 하늘을 바라보며 소리치다가 갑자기 잠이 들어, 꿈에 붉은색으로 수놓은 비단옷을 입은 남자(현이 창수사자)를 만났는데, 스스로 이렇게 말하였다.

    聞帝使文命於斯(문제사문명어사)하고 故來候之(고래후지)로다
    非厥歲月(비궐세월)이어늘 將告以期(장고이기)하리니 無爲戲吟(무위희음)하라 故倚歌覆釜之山(고의가복부지산)이로다 하고
    “나는 현이 창수사자인데, 듣자 하니 황제께서 그대를 이곳으로 보냈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노라. 지금은 아직 볼 때가 아니니 내가 그 때를 알려주려고 하노라. 내가 농담한다고 생각하지 말지니, 나는 본디 복부산覆釜山에서 곡에 따라 노래를 부르고 있노라.”

    東顧謂禹曰(동고위우왈) 欲得我山神書者(욕득아산신서자)면 齋於黃帝岩嶽之下(재어황제암악지하)하고
    三月庚子(삼월경자)에 登山發石(등산발석)하면 金簡之書存矣(금간지서존의)리라 하거늘
    현이 창수사자가 동쪽으로 고개를 돌려 우에게 말하였다. “우리 산신의 책을 얻으려면 모름지기 황제암악黃帝巖嶽 아래서 재계한 뒤에 3월 경자일에 다시 산꼭대기로 올라와 돌을 들춰 보면 금간金簡으로 된 책이 있으리라.”

    禹退又齋(우퇴우재)하고 三月庚子(삼월경자)에 登宛委山(등완위산)하야
    發金簡之書(발금간지서)하고 案金簡玉字(안금간옥자)하야 得通水之理(득통수지리)러라.
    우는 물러나서 다시 재계하고 3월 경자일에 완위산에 올라가 금간으로 된 책을 찾았는데, 금간에 쓰인 옥 글자를 살펴보고 물길을 소통시키는 이치를 알게 되었다. (『오월춘추(吳越春秋)』권6 「월왕무여외전(越王無余外傳」)

    及九年洪水(급구년홍수)하야 害及萬民故(해급만민고)로
    9년 동안 홍수가 일어나 그 재앙이 만민에게 미치므로

    檀君王儉(단군왕검)이 遣太子扶婁(견태자부루)하사 約與虞舜(역여우순)으로
    招會于塗山(초회우도산)하실새
    단군왕검께서 태자 부루를 보내 우나라 순임금舜과 약속하게 하시고, 도산 회의를 소집하셨다.

    舜(순)이 遣司空禹(견사공우)하야 受我五行治水之法(수아오행치수지법)하고
    而功乃成也(이공내성야)라
    순임금이 사공司空 우禹를 보내어 우리의 오행치수법五行治水之法을 받아 치수에 성공하였다.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


    그런데 두 기록을 비교해 보면, 분명 중국에 대홍수가 발생했고, 붕괴 직전의 왕조를 도운 창수사자를 만날 수 있다. 다시 말해 순임금의 명을 받고 치수 방안을 찾아 백마를 잡아 천제를 올리고도 방책을 얻지 못해 울부짖는 우禹 앞에 나타난 동방의 창수사자, 그의 도움 없이는 중원 왕조가 몰락할 위기에 처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지나支那는 동방 천자국 단군조선의 도움을 받은 것을 꿈으로 돌려놓았다. 이를 제대로 규명하지 않은 후대의 공자와 사마천을 비롯한 기록자들은 순임금이 동방 조선의 천자인 단군왕검과 부루 태자의 도움을 받았음을 의도적으로 누락시켰다. 이는 역사 기록자의 벗을 수 없는 멍에이자 원죄라 할 것이다.

    둘째, ‘술이부작’이라 했지만 동방 조선을 폄하한 잘못된 기록도 남겼다
    공자와 제자들의 기록인 『논어』를 보면 우리 스승님인 공자의 말씀은 한마디로 ‘술이부작述而不作 신이호고信而好古’라고 했다. 공자는 “정리해서 기록할 따름이지 새로운 것을 덧붙이고 만든 것이 아니며 옛것을 믿고 좋아했다.”는 말이다.

    여기서 핵심은 공자가 믿고 좋아한 그 과거의 것, 옛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는 앞서 살펴본, 요순의 도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요순의 도를 전해 준 단군조선의 도이다. 동방 천자국, 종주국의 천도를 배워 온 요순의 옛 가르침을 갈구한 것이다. 공자의 인仁 사상도, 동방 조선에 내려온 환국의 인仁사상, 경당扃堂의 오상지도五常之道에서 파생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논어』 11편, 「선진」을 보면 공자가 문화의 종주인 동방 조선의 역사를 왜곡한 구절을 만날 수 있다.

    子曰(자왈) 先進於禮樂(선진어예악)은 野人也(야인야)요
    後進於禮樂(후진어예악)은 君子也(군자야)라 하나니
    如用之(여용지)면 則吾從先進(즉오종선진)하리라
    공자가 말하였다. “예악문화의 선진은 야인이요, 예악문화의 후진은 군자라 하나니, 만약 쓴다면 나는 선진(종주국)의 예와 악을 따르리라.”
    (『논어』 「선진」)


    공자는 예악문화의 고향인 선진문화를 야인野人이라 칭하고, 후진 문화를 군자의 도라 칭했다. 그러면서도 ‘오종선진吾從先進’, 자신은 야인의 예악문화를 따르리라 했다. 이 구절에 대해 해석이 분분하다. 공자는 ‘순박한 문화를 높이고 싶다’, ‘먼저 나온 원형문화를 높인다. 나는 그 원형 예악을 따르고 싶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러나 공자는 자신의 뿌리인 은나라 문화, 그리고 그 이전의 우禹임금의 하夏나라와 요순堯舜의 역사를 제대로 복원해 내지 못했다. 나아가 요순문화의 핵심인 상제, 제천문화에 젖줄을 전해 준 배달과 단군조선의 문화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한마디로 선진은 야인이 아니라, 공자가 찾으려 한 동방 원형문화의 종주였던 단군조선 문화였다. 공자는 순임금과 우임금이 대홍수로부터 백성들을 구할 치수법을 전해 준 동방 조선의 선진문화를 야인으로 폄하한 것이다. 이것을 제대로 볼 필요가 있다.

    논어 공자와 그 제자들의 대화를 기록한 책, 공자의 제자들과 그 문인들이 공동 편찬한 것으로 추정한다.

    셋째, 춘추필법으로 동방 조선의 국호와 원 역사를 전하지 않았다
    역사 기록자의 필법은 큰 문제를 낳는다. 기록자의 의도에 따라 역사는 크게 휘둘리게 된다. 그런데 공자에서 비롯된 춘추필법은 표면적으로는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후세의 교훈을 주기 위함이라 주장한다. 정당한 역사 기록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중국 중심으로 주변의 모든 민족의 문화를 폄하하며 자신들만 문명국가이며, 주변 국가의 역사는 야만의 역사, 오랑캐의 역사로 규정한 큰 잘못을 저질렀다.

    이런 공자의 춘추필법에 따라 중국 사서는 중국에 영광스러운 일은 부풀리면서 중국에 수치스러운 일은 감추고〔위국휘치爲國諱恥〕, 중국은 높이면서 주변 나라는 깎아내리고〔존화양이尊華攘夷〕, 중국사는 상세히 쓰면서 이민족 역사는 간략하게 적어〔상내약외詳內略外〕왔다. 그 결과 동북아 문명의 주체였던 한민족의 역사는 중국 변방 오랑캐 족속의 하잘것없는 역사로 전락되고 말았다.

    가장 큰 문제는 사람들 사이에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고 별명이나 부르는 것은 예의가 아니듯이 국가 간의 정식 국호를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분명 공자가 살았던 시대는 단군조선의 말엽이었다. 그런데도 요순의 역사를 찾고, 단군조선의 영향권에 있었던 하·은·주를 찾은 공자가 동방 천자국 조선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역사의 준엄한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안운산 태상종도사님은 공자에 관해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다.

    공자가 본래 우리나라 사람이다. 공자 자신이 그랬다. ‘구야丘也 은인야殷人也라’(『예기』 단궁檀弓) 공자 이름이 구丘 아닌가. 자기 자신은 은나라 사람이라는 것이다.

    은나라는 우리 동이족이 세운 나라다. 그러면서도 그 사람이 본래 우리 역사를 왜곡했다. 우리 조상들도 그분을 믿고 살았기 때문에 나는 나쁘게 규정짓고 싶지 않다. 그러나 도성덕립道成德立이 되면 그때는 사실대로 평가가 될 게다. (2017년 12월 《월간개벽》)

    공자는 지금의 산동성 곡부 사람인데, 원래 우리나라 사람이다. 『가례家禮』라는 공자의 일기책이 있다. 거기에 보면, “구丘는 은인야殷人也라”라는 구절이 있다. ‘구는 은나라 사람’이란 뜻이다. 공자 이름이 구이고, 은나라는 바로 우리나라다. 그는 우리나라 사람이면서 우리나라를 배척해 버렸다. 참 묘한 사람이다. (1999년 11월 《증산도 문화소식》)


    공자는 유교의 창시자로, 동방 문화를 대표하는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우주의 법도로 뿌리를 찾아 가는 상제님의 원시반본原始反本의 도법으로 보면 하자가 있다는 말씀이다. 공자는 ‘우리나라 사람(은나라, 동이족 혈통)이면서도 우리나라(동방 조선)를 배척해 버렸다. 참 묘한 사람이다’, ‘그 사람이 본래 우리 역사를 왜곡했다’라고 하셨다.

    한마디로 공자는 천자문화의 고향, 하늘 가르침을 편 부루 태자가 9년 홍수 때 전한 경당扃堂문화의 원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하·상·주 3왕조의 문화 고향인 단군조선의 역사를 제대로 기록해 전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공자는 노년에 뗏목을 타고 동방 바다로 가고 싶어 했다. ‘군자가 살았던 구이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하며, 동방 조선의 선진문화를 동경했던 것이다.

    춘추필법#春秋筆法의 주요 내용
    위국휘치爲國諱恥 - 중국에 영광스러운 일은 부풀리면서 중국에 수치스러운 일은 감춘다
    존화양이尊華攘夷 - 중국은 높이면서 주변 나라는 깎아내린다
    상내약외詳內略外 - 중국사는 상세히 쓰면서 이민족 역사는 간략하게 적는다

    공자의 고백: ‘나는 뗏목을 타고 바다로 가고 싶다. 구이에 가서 살고 싶다’
    子曰(자왈) 道不行(도불행) 乘桴浮於海(승부부어해) 從我者其由與(종아자기유여)
    공자께서 “도가 행해지지 않아서 뗏목을 타고 바다로 나간다면 나를 따라갈 사람은 아마 유이리라.”라고 말씀하시자

    子路聞之喜(자로문지희) 子曰(자왈) 由也好勇過我(유야호용과아) 無所取材(무소취재)
    자로가 이 말을 듣고 기뻐하였다.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유는 용맹을 좋아함이 나를 능가하건만 뗏목 만들 목재를 구할 데가 없다.”
    (『논어』 「공야장」 )

    子欲居九夷(자욕거구이) 或曰(혹왈) 陋(루) 如之何(여지하) 子曰(자왈) 君子居之(군자거지) 何陋之有(하루지유)
    공자께서 여러 동쪽 오랑캐의 나라에 살고 싶어 하시자 어떤 사람이 “거기는 누추할 터인데 그것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가 살았는데 무슨 누추함이 있겠느냐?” (『논어』 「자한」)


    잘못된 중화사관에 의해 오랑캐가 되어 버린 동이東夷


    지금까지 2,500년 전 동방의 큰 성인 공자에 관해 큰 틀에서 살펴봤다. 공자는 역사의 큰 획을 남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성인이자 철인이다. 그러나 공자도 모든 것을 알지는 못했다. 실제로 『춘추』를 지은 후 공언한 것처럼 ‘『춘추』 때문에 알아주거나 비난받을 것’이라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제자들이 기록한 『논어』 때문에 기억되고 있다.

    또 『사기』에 따르면 공자는 진나라에 있을 때 멀리서 날아와 궁정에 떨어져 죽은 송골매에 막힌 화살이 부여국 동북쪽에 있는 숙신의 화살임을 단박에 알 정도로 해박했다. 그러나 태산이 있는 산동반도에 퍼진 동방의 원역사의 맥脈, 부루 태자가 전한 경당과 오상지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는지 누락시켰다. 결국 공자 때문에 천자국 동방조선 역사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제 공자 시대 이후 2,500년이 흘렀고, 그 사이 유교는 동방문화의 중심이 되어 한 시대를 굽이쳤다. 특히 조선 시대에 유교를 국교로 받아들이면서 조선의 선비들은 소중화를 자청했다. 단군보다는 이 땅에 오지도 않은 기자箕子를 칭송하며, 평양에 무덤까지 만들고 모셨다. 중국의 속국이 거의 되어 버린 것이다. 그 근원에 사마천과 공자가 있다. 공자와 사마천의 의도적인 누락으로 동방 원형문화는 감춰졌고, 유교가 통치 이념이 된 한나라 때에 이르러 조선은 동이, 오랑캐로 불리게 된 것이다. 『예기禮記』 「왕제王制」 편을 보면 지나족은 자신을 제외한 주변 국가를 동이東夷·남만南蠻·서융西戎·북적北狄라 칭하며, 본격적으로 오랑캐로 매도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중화사관을 충실히 따라서 작금에도 동이를 ‘동방의 야만인(the Eastern Barbarians)
    ’이라 번역한 역사서가 미국 학계에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보는 세계인들은 동방의 한민족을 중국보다 열등한 민족, 천자 나라 중국으로부터 문물을 수입한 제후 국가로 착각하게 된다. 잘못된 역사 왜곡의 실핏줄이 태평양 건너 미국 땅에서 온 세상으로 퍼지고 있다.

    註) ★The Korean confederated kingdoms all represent the joining together of a number of walled-town states, but the formative process did not adhere to a uniform chronology, since some developed earlier or more rapidly than others. the case of the samhan, as seen in the “Account of the Eastern Barbarians” in the Chinese source San-kuo chih, was perhaps a model of normal development. (『A New History of KOREA(韓國史新論)』, 29쪽)


    <참고문헌>
    『역주본 환단고기』(안경전, 상생출판, 2012)
    『이것이 개벽이다 하』(안경전, 상생출판, 2014)
    『한국사신론』(이기백, 일조각, 2008)
    《월간개벽》 (1999년 11월호, 2017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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