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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문화]

    궁궐에서 찾는 한문화코드 | 경희궁과 인간과 신이 만나는 신전, 종묘 정전正殿

    이해영 / 객원기자

    서울에는 조선 시대의 궁궐이 다섯 군데가 남아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운궁(덕수궁) 그리고 경희궁입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궁궐들은 많은 훼손을 당하였고, 지금은 복원 중에 있습니다. 하지만 경희궁은 그 훼손 정도가 심해서 원형을 찾기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문화재청에서는 경희궁 대신에 종묘를 궁궐의 범주에 넣어 함께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흔적만 남은 경희궁과 왕조 그 자체를 상징하는 종묘, 그중 정전正殿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왕기王氣가 서렸으나, 흔적만 남은 경희궁


    경희궁慶熙宮은 ‘경사스럽고 기쁘다’라는 뜻입니다. 원래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의 개인 집이었습니다. 풍수에 관심이 많았던 광해군은 이 집에 왕의 기운이 서렸다는 말을 듣고서, 정원군에게서 이 집을 빼앗고 그곳에 궁을 세웠습니다. 1617년에 짓기 시작하여 1623년에 완성된 궁궐입니다. 나중에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이 인조로 왕이 되었고, 이후 왕들은 다 인조의 후손들이니 왕기가 서린 곳은 맞는 것 같군요. 처음에 경덕궁慶德宮이라고 불렀다가 영조 36년인 1760년 경희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습니다. 경덕이란 호칭이 추존된 인조의 아버지 원종(정원군)의 시호 경덕敬德과 발음이 같다는 이유에서였지요. 경희궁은 창건 이후 인조부터 철종까지 10대에 걸친 왕들이 머물렀던 곳으로 창덕궁, 창경궁과 함께 조선 후기 궁궐로서 기능을 충실하게 해냈습니다.

    <#경희궁에 대한 애도#>>
    현재 우리는 안타깝게도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경희궁의 흔적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1차적으로 근대에 경복궁이 복원되면서 많은 전각들이 경복궁으로 이전하였습니다. 여기에 일제강점기 때 공립학교가 들어서면서 옛 모습을 없애 버렸고, 넓었던 궁터마저 여기저기 잘라 내서 다른 시설로 전용되고 말았습니다. 1980년 이곳에 있던 학교가 이전하면서, 그 자리에 몇 개의 전각이 복원되었지만, 궁터 한쪽에 서울 역사 박물관까지 들어서서 더욱 상황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그나마 정전과 그 주변을 복원해 놓아서 이곳이 과거에 왕과 왕실 가족들이 생활하던 곳이었다는 점을 일깨워 주고는 있지만, 몇 동의 건물만으로는 웅장했던 경희궁 본연의 모습이 되찾아질 리가 만무합니다. 정문도 본래 놓여 있던 자리에 세워지지 못하는 등 뒤죽박죽되어 버린 경희궁은 문화유산에 대한 우리들의 무관심과 무소견의 징표인 듯합니다.

    경희궁에 남아 있는 전각들


    경희궁은 왕이 태어날 기운이 있다는 풍수가의 말에 광해군이 집터를 빼앗아 궁을 지었다는 창건 동기도 평범하지 않거니와, 궁궐의 구성도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점이 적지 않습니다. 정문을 동쪽에 두고 정전은 동궁과 침전 편전을 다 지난 서쪽 끝 가장 깊숙한 곳에 둔 점 또한 독특합니다. 건물 사이 공간도 의도적으로 좌우 균형에서 벗어난 비대칭을 이루었습니다. 풍수가의 식견이 궁궐에 적극 반영된 결과로 짐작됩니다. 경희궁은 조선 궁궐이 갖는 다양한 면모를 보여 주는 사례이지만, 흔적만 남은 지금 많은 부분이 미지未知로 남아 있습니다.

    모습은 제 모습이나 자리는 엉뚱한 곳에 있는 흥화문興化門
    오늘날 경희궁 터에서 그나마 당시 목조 건축미와 옛 장인들의 체취를 느껴 볼 수 있는 건물은 광해군 때 지어진 그 건물 그대로인 흥화문뿐입니다. 백성에 대한 교화를 북돋운다는 뜻을 지닌 이곳에서 영조는 자주 백성들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흥화문은 일제가 학교를 세우고 궁내 수많은 전각들을 헐어 버리면서 정문으로서 위엄과 기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뒤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된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박문사博文祠를 지으면서 흥화문을 그 정문으로 옮겨 사용했습니다. 박문사는 광복과 더불어 폐사되었지만, 흥화문은 장충동 소재 신라호텔 영빈관 정문으로 사용되다 지금 위치로 이전 복원했습니다. 하지만 이곳도 원래 자리가 아닙니다. 원래 자리는 지금 서울 역사 박물관 앞에 남아 있는 금천교보다 훨씬 더 광화문 쪽에 동향으로 서 있었다고 합니다.

    새롭게 지어진 숭정전崇政殿
    경희궁의 정전은 다스림을 드높인다는 뜻의 숭정전입니다. 하지만 현재 숭정전 건물은 5차례에 걸친 발굴 조사 결과를 토대로 새롭게 완공된 신축 건물입니다. 원래 건물은 현재 동국대학교 교내에 있는 정각원正覺院 건물입니다. 복원할 즈음해서 이 건물을 본래 자리로 옮겨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목재가 낡았고, 불교 건물로서 성격이 굳어졌다는 이유로, 새 건물을 현 위치에 다시 지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숭정전이 과연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 숭정전인지는 의문입니다. 참고로 현재 조계사의 대웅전 건물도 본래 일제강점기 때 항일운동의 중심지였던 정읍 보천교普天敎의 십일전十一殿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숭정전은 2층 월대 위에 자리 잡고 있으며 창경궁 명정전처럼 단층 목조건물입니다. 월대와 계단의 장대석들 가운데 거무튀튀한 것이 몇 개 눈에 띄는데, 이것이 창건 당시의 석재들입니다. 숭정전 답도에는 봉황이 새겨져 있고, 천장에는 일곱 개의 발톱을 가진 황룡이 장식되어 있습니다. 역시 용과 봉황은 왕권의 상징입니다.

    기타 전각과 유적들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 북서쪽에는 신하들과 정사를 논하거나 경전을 강독하는 장소였던 자정전資政殿이 있습니다. 조선 시대 임금은 상황에 따라 궁을 옮겨 다녔는데, 지금까지 살던 궁을 비우게 되면 편전을 혼전魂殿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자정전 서쪽에는 태령전泰寧殿이 있습니다. 본래는 당堂이었다가 영조 당대에 영조의 어진을 모셔서 전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이미 승하한 임금의 어진을 모시는 경우는 있어도, 현재의 임금의 어진을 모시는 경우는 이때가 유일합니다. 영조 승하 후에는 혼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왕의 기운을 가진 서암瑞巖은 어느 곳에?
    태령전 뒤쪽에는 서암이라고 알려진 큼직한 바위가 있습니다. 그 밑에서 샘물이 솟아나 넓은 암반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수량은 많지 않지만 궐내에서 보는 자연 풍광이라 기분이 좋습니다. 서암은 「승정원일기」 기록에 따르면 승룡암升龍巖이라고도 하고, 속칭 왕암王巖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광해군은 왕암이라는 말을 듣고 여기에 궁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숙종 때 이름을 ‘서암’이라 고치고 어필로 ‘瑞巖’ 두 글자를 크게 써서 비석에 새겨 상서로움을 나타냈습니다. 그런데 현재 서암으로 알려진 큰 바위가 과연 그 서암인지는 의심이 갑니다. 왜냐하면 「승정원일기」나 「조선왕조실록」 그리고 「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에 따르면 서암은 덕유당德游堂 경내나 덕유당 서북쪽, 즉 사물헌四勿軒 권역에 있던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즉 자정전을 기준으로 보면 동북쪽에 서암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지금 태령전 뒤 바위가 서암이라면, 소개할 때 태령전 북쪽 또는 태령전 후원이라고 하면 되는데 굳이 덕유당을 언급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지요. 아마도 어떤 이유에 의해서 덕유당 권역의 서암이 자취를 감춘 것이라고 추측해 봅니다.

    경희궁을 나서며


    지리멸렬해진 경희궁은 바로잡아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이 밖에도 경희궁을 떠나 객지를 떠도는 전각이나 문들이 한두 개가 아닙니다. 특히 현재 사직단 뒤쪽으로 옮겨져 궁사들의 활을 쏘는 장소로 쓰이는 황학정도 그러하고, 회상전, 흥정당, 광선문 등은 일제강점기 때 경희궁을 무자비하게 훼철할 때 사찰이나 일반인들에게 팔아 버린 것들입니다.

    앞서 살펴본 창경궁과 경희궁을 보면서 많은 생각들을 해 보셨을 겁니다. 두 궁궐이 그 원형을 잃어버릴 정도로 훼손되고 사라진 이유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의 비문명적이고 야비한 우리 문화 말살 책략 때문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정부의 우리 문화에 대한 무관심과 근시안적인 문화재 정책이 한몫했음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다시 한번 씁쓸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종묘宗廟의 의미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임금과 왕비들의 혼을 모신 신전입니다. 궁궐이 삶을 영위하는 공간이라면, 종묘는 죽음의 공간이자 영혼을 위한 공간입니다. 세계 모든 민족은 제각기 고유한 형태의 신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공간은 한결같이 성스러운 건축적 표현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집트의 하트솁수트Hatshepsut 여왕의 장제전葬祭殿, 그리스의 파르테논Parthenon 신전, 로마의 판테온Pantheon, 중국의 천단天壇, 일본의 이세신궁伊勢神宮 등이 대표적이고, 여기에 어깨를 견주는 건물이 우리 조선의 종묘입니다.

    종묘의 유래
    종묘 제도 자체는 중국에서 유래하였습니다. 하지만, 중국의 종묘는 자금성 동쪽에 있는 태묘太廟입니다. 현재 노동인민문화궁 안에 있는데, 공원화되고 제사가 중단되어 제 기능을 상실하였습니다. 그래서 종묘 제도와 건축물과 제례 의식이 제대로 남아 있는 곳은 우리 종묘뿐입니다. 본래 우리나라는 상고 시절부터 전통적인 시조묘始祖廟 문화가 있었고, 하늘에 제사 지내는 천제 문화와 제사 문화의 본고향이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최고의 격식으로 조선의 정신을 담은 종묘
    종묘는 태조 이성계가 1392년 7월 17일 조선을 열고 수도를 한양으로 정할 때 가장 먼저 지은 건물입니다. 종묘부터 짓고 그 다음이 경복궁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선조가 임진왜란 때 피난을 갔다가 한양으로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재건한 건물도 종묘였습니다. 역대 임금들의 영혼이 모셔진 종묘는 말 그대로 국가 그 자체였습니다. 조선이란 나라의 문화를 한 건물로 요약하면 종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묘의 중요한 의미, 제사祭祀
    사람에게는 혼魂과 넋魄이 있어 혼은 하늘에 올라가 신神이 되어 제사를 받다가 4대가 지나면 영靈도 되고 혹 선仙도 되며 넋은 땅으로 돌아가 4대가 지나면 귀鬼가 되느니라. (도전 2:118:2~4)

    사람이 조상에게서 몸을 받은 은혜로 조상 제사를 지내는 것은 천지의 덕에 합하느니라. 지금 너희가 행하는 제사 범절은 묵은하늘이 그릇 지은 것이니 이제 진법眞法이 다시 나오리라. (도전 9:195:8~9)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임금들의 영혼을 모신 곳이기 때문에, 중심 기능은 제사입니다. 제사는 죽은 이와 산 자가 만나는 의식입니다. 그리고 제사는 뿌리를 찾는 행위입니다. 나는 어디에서 왔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인가 하는 본질적 물음을 제사를 통해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제사는 내 뿌리가 되는 조상을 통해 나와 가족 그리고 성씨 더 나아가 공동체의 역사를 확인하고 배우는 자리가 됩니다. 그들이 있기에 지금의 내가 있음을 알고, 조상의 업적을 기리며 그 정신을 존경하기도 합니다. 이런 제사의 정점에 국가 제사가 있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제사가 종묘와 사직에서 올리는 제사로 이를 대사大祀라고 하였습니다.

    종묘 정전 건물의 특징 1
    -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성장하다
    종묘의 핵심 건물은 정전입니다. 이 종묘 정전은 조금씩 계속해서 길어졌습니다. 마치 생물처럼 건물이 자라나 계속 커졌습니다. 지금 종묘 정전은 열아홉 칸짜리 건물입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일곱 칸짜리였습니다. 종묘는 왕조와 함께 탄생해 왕조의 역사가 길어지면서 함께 길어졌고, 왕조가 멸망하면서 성장을 멈췄습니다.

    건물이 길어진 이유는 왕조가 지속되면서 왕의 숫자가 늘어나고 그에 따라 왕의 위패를 모실 신실神室이 필요해졌기 때문입니다. 이때 조선에서는 불천지주不遷之主 제도를 적절히 활용하였습니다. 불천지주란 후대의 국왕과 신하들이 앞선 국왕의 공덕을 평가한 뒤 공덕이 높아 영원히 옮기지 않기로 결정한 신주를 말합니다. 이런 신주들이 정전에 계속 모셔졌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4대조를 모시기 위해 네 칸씩 늘려 나갔습니다. 광해군, 영조, 헌종 때 네 칸씩 늘어나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습니다. 헌종 대의 증축 이후 종묘의 정전과 영녕전은 더 이상의 증축이 없었습니다. 우연히도 영녕전의 마지막 제실에 영친왕 내외의 신위를 모시는 것을 마지막으로 정전과 영녕전의 제실이 정확히 채워져서 제실이 남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군과 광해군은 묘호를 받지 못해 종묘에 신위가 모셔지지 않았습니다. 묘호가 있는 것 자체가 종묘에 모셔져 있다는 증거입니다. 숙부인 세조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난 단종은 실재 재위한 국왕 중 정전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로 영녕전에 들어갔습니다.

    종묘의 건물이 늘어나는 데도 원칙이 있습니다. 종묘는 서쪽이 기준이 되어 동쪽으로 자라났습니다. 서쪽은 해가 지는 곳으로 성숙, 소멸, 죽음을 상징합니다. 해가 뜨는 동쪽은 새로운 생명을 뜻하는 방향입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나일강을 기준으로 모두 서쪽에 있습니다. 장차 왕이 될 세자는 떠오르는 태양으로 동궁에 삽니다. 그래서 종묘 서쪽 끝 기준이 되는 칸은 첫 임금인 태조 이성계의 신위가 있고 그 후손인 후대 왕들이 동쪽을 향해 순서대로 위패가 모셔졌습니다. 이렇게 의도적으로 연출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건물이 진화하며 역사의 흐름에 따라 증축한 경우는 조선이 유일합니다. 우리 종묘는 화려함이나 거대함을 추구하지 않고 세월 속에 쌓아 나간 전통의 무게가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게 한 특별한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묘 정전의 특징 2 - 공간의 미학
    종묘 정전의 공간에는 단순한 구조의 본건물과 담장과 대문, 제례를 지내기 위한 넓은 월대, 그리고 공신당과 칠사당밖에 없습니다. 종묘 정전은 100미터가 넘는 맞배지붕이 19개의 둥근 기둥에 의지하여 대지에 낮게 내려앉아 있습니다. 그 단순성에서 나오는 장중한 아름다움은 곧 공경하는 마음인 경敬의 건축적 표현입니다. 단순한 구조에 아주 간단한 치장으로 동서 양 끝에 짧은 월랑(행각行閣)으로 마감하여 건축적 완결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정전 건물은 보는 이를 품에 끌어안는 인상과 친근함을 주고 있습니다.

    모든 신전에는 본전의 권위를 위해서 대표적으로 회랑回廊을 둡니다. 하지만 종묘 정전과 영녕전 가장자리는 회랑 대신 담장이 정연하게 둘러싸고 있습니다. 이 담은 특별한 치장 없이 낮게 둘러 있으면서도 정전을 거룩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 담장 안에는 역대 임금의 공신을 모신 공신당功臣堂과 일곱 신을 모신 칠사당七祀堂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한 공간에 있지만, 이들 사이에는 엄격한 위계가 있어서 칠사당과 공신당은 월대 아래 별도의 작은 건물에 모셔져 있는데, 이 건물들로 인해서 정전 건물은 외롭지 않고 더욱 거룩해 보입니다.

    이 모든 것을 정전 앞 넓은 월대月臺가 아우릅니다. 월대! 이 공간은 비어 있으되 영혼으로 꽉 찬 공간 같은 곳입니다. 정전으로 들어서는 신문神門 앞에서 바라보면 보는 이의 가슴 높이에서 전개됩니다. 1미터 남짓하지만 이 지대는 그 사방이 주변 지면에서 올라선 세속을 떠난 공간이고, 주변이 울창한 수목으로 뒤덮여 있어, 대조적으로 완벽한 비움의 공간이 되기도 합니다. 제관이 제례를 올리기 위한 가운데 검은 전돌로 인도되는 신로神路가 정전 돌계단까지 이어져 깊이감을 더해 줍니다. 여기에 주변 네모난 박석은 건축가 승효상이 찬탄한 대로 마치 땅에 새겨진 지문처럼 보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 마음을 영혼의 세계로 인도해 줍니다. 그래서 종묘 정전 앞에 서면 누구나 경건함과 신비감을 갖게 됩니다.

    칠사당七祀堂과 일곱 신
    종묘 정전 남서쪽에는 칠사당이 있습니다. 칠사당은 궁중을 지키는 신명들입니다. 봄에 제사 지내며 수명과 선악을 살피는 사명지신司命之神, 출입을 주관하며 봄에 제사 지내는 사호지신司戶之神, 부엌과 음식을 주관하며 여름에 제사 지내는 사조지신司竈之神, 집을 말하는 당堂과 실室의 거처를 주관하며 중앙 토土에 해당하는 중류지신中霤之神, 가을에 제사 지내며 출입을 주관하는 국문지신國門之神, 옛날 제후 가운데 후손이 없는 자인 공려지신公厲之神이 있습니다. 이 신은 살벌殺罰을 주관하고 가을에 제사를 지내는데, 자식 없이 죽은 사람은 제사를 받지 못해 불만과 원한이 사무쳐 인간들에게 보복과 가해를 일삼기 때문에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도로에 통행하는 것을 주관하는 국행지신國行之神이 있습니다. 겨울에 제사를 지냅니다. 이러니 칠사 신명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세상을 잘 다스리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칠사당의 제사는 독립적으로 지내지 않고 종묘 제사를 지낼 때 함께 지냈습니다.

    종묘제례


    종묘에는 세계유산世界遺産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매년 봄 가을에 열리는 종묘대제입니다. 명맥만 유지되어 오던 종묘대제는 1969년 종묘제례보존회(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 의해 복원되어, 해마다 봉행되고 있습니다. 종묘는 제사를 지내는 공간입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제사가 대제大祭로 춘하추동 사시제와 동지 이후 세 번째 미일未日에 지내는 납제臘祭를 포함해서 다섯 번 지냅니다. 이를 통칭 오향대제五享大祭라고 합니다.

    제사 일정이 정해지면 신을 만날 준비를 합니다. 제사를 올리기 전 심신을 깨끗이 하고 금기를 범하는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이를 재계齋戒라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중요한 일을 앞두고는 목욕재계를 합니다. 이 기간에는 상喪이 났을 때 조문하지 않고, 문병도 가지 않고, 음악을 듣거나 형벌 관련 된 일을 처리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제사에 관한 일만 듣고 행하는 등 정성을 다합니다. 의례는 엄격한 절차에 의해서 진행됩니다.

    종묘제례악


    종묘제례악은 종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 기악(樂), 노래(歌), 춤(舞)을 갖추고 종묘제례 의식에 맞추어 연행하는 음악입니다. 악기의 연주에 맞추어 선왕의 공덕을 기리는 노래를 부르며 제례 의식을 위한 춤인 일무佾舞를 춥니다. 종묘제례악은 세종 때 제정된 보태평保太平과 정대업定大業에 연원을 두고 있습니다. 보태평은 선왕의 학문과 덕망을 기리고, 정대업은 군사상 공적을 세운 선왕들의 무공武功을 기리는 내용입니다.

    종묘제례악은 편종編鐘과 편경編磬, 방향方響과 같은 타악기의 선율과 함께 여기에 당피리, 대금, 해금, 아쟁 등 관현악기의 장식적인 선율이 더해집니다. 또한 장구, 징, 태평소, 절고節鼓, 진고晉鼓 등의 악기가 다양한 가락을 구사하고 노래가 중첩되면서 어떤 음악에서도 느끼기 어려운 중후함과 화려함을 줍니다. 특히 중간중간 울리는 박拍 소리는 종묘제례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켜 줍니다. 종묘제례악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약화되었다가, 광해군 때 복구되어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습니다.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 1호로 지정되었고, 2001년 종묘제례와 더불어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고, 2008년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선정되었습니다.

    사직단社稷壇
    사직은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국가의 안녕과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는 곳입니다. 종묘는 왕의 선조들을 모시는 곳으로 남성과 하늘의 수직적 관계 즉 양적인 원리를 대표합니다. 반면 사직은 일반 사람들의 생존 토대인 땅과 먹을거리를 관장하는 신을 받드는 곳으로 여성과 땅이라는 수평적 관계, 즉 음적인 원리를 대표합니다. 전통적으로 왕궁의 왼쪽에는 왕실 사당인 종묘를, 오른쪽에는 사직단을 배치하였습니다. 이를 좌묘우사左廟右社라고 합니다. 지금 지도로 보면 오른쪽이 되는 동쪽에 종묘를, 서쪽에 사직단을 둔다는 원칙입니다. 이 기준은 수도만이 아니라 지방 도시에도 적용됩니다. 그래서 서울 외에도 오래된 도시에 가면 사직동이라는 동네 이름이 여럿 있습니다. 왕궁을 상징하는 객사를 중심에 위치하고, 그와 함께 사직을 두었습니다. 한양의 사직단은 사단과 직단을 분리한 반면 지방의 사직단은 하나의 단을 공유하였습니다. 한양의 사직단에서는 토지와 농정을 주관한 후토씨后土氏와 후직씨后稷氏의 위판位版을 두고 같이 제사를 올렸습니다.

    국가 제사 체계 규정에서 조선은 사직이 최고의 제사 대상이었습니다. 본래는 하늘에 제사 지내는 환구圜丘와 땅에 제사 지내는 제단인 방택方澤이 있습니다. 지금도 베이징에 남아 있는 천단과 지단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지만 제후국을 자처한 조선에서는 국가 제사에서 환구와 방택이 제외되었기 때문에, 제사 체계 규정에서는 사직이 서열이 앞섰습니다. 그렇지만, 실질적인 운영이나 관심 측면에서는 효를 중시한 종묘 제사가 훨씬 더 중시되었습니다. 지금도 종묘와 종묘제례악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보존되고 있지만, 사직단은 알고 있는 이가 적을 정도이니 우리들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궁궐을 나서며


    지금까지 우리는 서울에 있는 조선의 궁궐을 살펴보았습니다. 문화는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빚어 쌓은 삶의 꼴이라고 합니다. 문화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축적되면서 변화해 갑니다. 옛것 위에 새것이 쌓임에 따라 옛것의 흔적은 희미해지지만, 그래도 사라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우리 곁에 있는 것들을 문화유산이라고 합니다. 이런 문화유산에는 당대의 이성과 지성, 과학기술과 정서와 미적 감각, 감성 등이 담겨 있어 새로운 문화유산의 바탕이 되어 줍니다.

    조선은 유교 국가입니다. 그래서 표면에는 성리학적 유학 질서를 바탕으로 궁궐을 조성했습니다. 하지만 그 심층에는 본래 9천 년간 우리 민족의 심성과 감성에 깊숙하게 쌓여 있던 문화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음양, 오행, 팔괘, 천원지방과 같은 자연 원리라든가, 용과 봉황으로 상징하는 천자문화 그리고 상제님께 천제를 올리던 본래의 천제문화와 신교문화가 남아 있음을 우리는 궁궐에서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 왕국은 민주공화국이 되었고, 주권은 임금에서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런 점에서 궁궐은 죽었습니다. 하지만 궁궐을 잘 보면 거기 살던 사람들의 활동이 보이고, 그 시대상이 보이며 우리 한韓 문화 비밀 코드가 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궁궐은 살아 있습니다. 그렇기에 단순히 문화유산으로 궁궐을 보기만 하지 말고 그 본질을 파악할 수 있게 관심을 가지고 읽어 냈으면 합니다. 이 작은 글이 그런 관심과 이해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9천 년 한韓민족 정통사서『환단고기』나 『증산도의 진리』를 참고하시면 궁궐 속 한韓 문화 코드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데 정말 큰 도움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참고문헌>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 상 하』 (홍순민, 눌와, 2017)
    『서울의 고궁산책』(허균, 새벽숲, 2010)
    『세상에서 가장 큰 집』(구본준, 한겨례출판, 2016)
    『궁궐, 그날의 역사』(황인희, 기파랑, 2015)
    『세계문화유산 종묘이야기』(지두환, 집문당, 2005)
    『세계유산 종묘』(문화재청 종묘관리소, 디자인 공방, 2009)
    『종묘제례악』(윤여림 등, 웅진주니어, 2018)
    『종묘와 사직』(강문식, 이현진 지음, 책과 함께, 2011)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9 서울편1』(유홍준, 창비,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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