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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B하이라이트]

    STB다시보기 | 대한독립운동사 _ 2회 3.1운동과 국내 독립운동

    강사 이성우 교수 (충남대 충청문화연구소 연구원)


    프로그램소개
    1910년의 경술국치, 그리고 1945년 8월 15일의 광복. 처절한 희생과 고통 속에서 치열하고 끈질긴 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하지만 독립운동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우리 교육의 현실.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3.1운동 및 국내 독립운동, 만주와 연해주에서 일어난 치열한 무장투쟁 그리고 독립운동가들의 역사정신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STB상생방송에서 기획 제작한 10부작 강의프로그램입니다.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며,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3.1운동이 한국사에서 갖는 역사적 의미가 상당히 큽니다. 1919년을 기준으로 독립운동의 방향이 바뀔 정도로 3.1운동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 강의는 3.1운동의 배경과 전개 과정, 역사적 의의 그리고 국내 독립운동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3.1운동의 배경


    3.1운동이 일어난 배경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국제 정세의 변화가 있습니다. 1910년대는 세계사적으로 큰 사건인 1차 세계대전이 있었습니다. 승전국과 패전국 사이의 전후 처리를 논의하기 위해 파리강화회의가 열렸는데요. 미국 대통령 윌슨이 강화 조건으로 민족자결주의를 얘기하게 됩니다. 민족자결주의는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국주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나라들은 그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것인데, 곧 독립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은 패전국의 경우이고, 승전국의 식민지는 예외입니다. 민족자결주의의 제창 의도는 패전국의 식민지를 독립시켜 영향력을 감소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일본은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 일원이었기 때문에 민족자결주의가 우리에게는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민족자결주의 내용을 접하고 고무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일제의 식민지 수탈정책입니다.

    일본은 무단통치라는 독특한 통치 방식을 쓰게 됩니다. 3.1운동 전까지 헌병과 경찰을 동원해서 억압적인 통치를 했습니다. 이 무단통치는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 지배 상황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아주 폭압적이고 억압적인 식민통치였습니다. 식민지 조선인은 총칼로 억압하면 순응하고 따라올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토지조사사업이라는 경제 정책을 썼는데요 일본이 식민 지배를 하면서 식민 지배 비용이라는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이 비용을 식민지인 조선에서 돈을 거둬 사용하는 계획을 세웠고, 그 당시 우리나라의 산업 구조의 대부분이 농업이라 확실하게 세금을 거둬들일 수 있는 부분이 토지세였기 때문에 토지조사사업이라는 명목으로 한일병탄 직후부터 1918년까지 우리나라의 토지를 조사한 것입니다.

    이 토지조사사업은 토지의 소유주를 명확히 하자는 것인데 이 정책의 결과로 국토의 50%가 일본인 토지로 바뀌게 됩니다. 일본이 아주 독특한 방법을 썼기 때문입니다. 신고주의 원칙을 통해, 미신고 토지는 모두 몰수하여 일본인들에게 무상으로 분배를 했습니다. 당시 일본이 시행하는 정책에 반감을 가지고 토지 신고를 안 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신고 주체를 개인으로 한정하여 국유지나 공동명의의 토지들은 모두 미신고 토지가 되기에 일본은 이 점을 노린 것입니다.

    3.1운동은 대다수의 민중이 전개한 만세운동입니다. 각각의 그 많은 민중들이 독립에 대한 의지가 없었다면 참여가 이뤄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민중들은 갑자기 땅을 뺏기게 되었고 독립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했던 것입니다.

    세 번째는 고종 황제의 승하입니다.

    고종 황제께서 1919년 1월 21일 아침 6시에 궁녀가 올린 식혜를 드시고 갑자기 승하하시게 됩니다. 고종 황제의 승하 관련하여 윤치호란 인물의 개인 일기에 적힌 기록을 보면,

    ① 건강하던 고종 황제가 식혜를 마신 뒤 30분도 되지 않아 승하하심
    ② 응급처치를 위해 바지를 찢어야 할 정도로 고종 황제의 팔다리가 1~2분 만에 엄청나게 부어오름
    ③ 목에서부터 복부까지 검은 줄이 길게 나 있음
    ④ 이가 모두 빠져 있고 혀는 닳아 없어짐
    ⑤ 식혜를 가져다준 2명의 궁녀는 이틀 뒤 의문사함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백성들은 고종황제께서 일본에 의해 독살 당했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네 번째는 2.8독립선언입니다.

    동경으로 유학 갔던 유학생들이 조선청년독립단이란 단체를 조직해서 약 200여 명이 1919년 2월 8일 동경 한복판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진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일본에 와 있던 각국 대사관과 공사관, 일본 정부에 독립선언서를 보냅니다. 제국주의 일본의 중심부에서 식민 지배를 받던 조선의 어린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을 한 것은 정말 대단한 겁니다. 그리고 이 소식이 국내로 전달이 됩니다. 2.8독립선언서를 보면 상당히 투쟁적입니다. 내용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정당한 방법으로 우리 겨레의 자유를 추구할 것이나 만일 이로써 성공치 못하면 우리 겨레는 생존의 권리를 위하여 온갖 자유행동을 취하여 최후의 일인까지 자유를 위해 뜨거운 피를 흘릴지니… 만약 일본이 우리 겨레의 정당한 요구에 불응한다면 우리 겨레는 일본에 대하여 영원한 혈전을 선언하리라…” - 2.8독립선언서

    3.1운동의 전개


    3.1운동은 종교계와 학생층인 두 그룹이 있습니다. 1910년대는 무단통치 시기라 폭압적인 환경에서 공식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계층은 종교계와 학생층이었습니다.

    이 두 그룹이 만세운동을 주도하게 되는데, 천도교가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화라는 3.1운동의 원칙을 만들게 됩니다. 종교계가 주도적이었기 때문에 비폭력성이란 원칙을 만들었는데요. 일본이 총을 쏘면서 진압하자 3월 말, 4월 말로 접어들면서 만세운동이 폭력성을 띠게 됩니다.

    학생층은 1월 말부터 준비를 하기 시작했는데요. 손병희 선생의 주도로 종교계와 학생층을 일원화하는 민족대연합전선이 구축됩니다.

    그리고 2월 11일에 독립선언서가 작성이 되고 2월 27일에 독립선언서 21,000장의 인쇄와 함께 민족대표 33인이 확정됩니다. 3.1운동 하루 전날인 2월 28일 손병희 집에서 최종 회의를 하게 되는데, 이날 2가지 사항을 결정하게 됩니다.

    ①체포되면 정정당당하게 독립 의지를 밝힌다.
    ②장소를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변경한다.


    3.1운동 장소를 하루 전날 탑골공원이 아닌 태화관이란 식당으로 바꾸다 보니 3월 1일 탑골공원에 모인 많은 군중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할 민족대표들을 기다리지만 오지 않았고, 약속한 시간에서 30분이 지난 2시 30분경 정재용이란 분의 독립선언서 낭독으로 3.1운동이 시작되게 됩니다.

    서울에서는 만세운동이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시작되었고 평양, 진남포를 비롯한 전국에서 5월 말까지 만세운동이 전개됩니다. 3.1운동의 특징을 보면 도시에서 농촌으로 확대가 되고 주로 장날에 만세운동이 이뤄졌습니다.

    박은식 선생님이 쓰신 독립운동지혈사를 보면 전국 211개 군 1,542회 2,023,908명 참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지역 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곳이 유관순 열사가 있던 천안의 아우내 장터입니다.

    이화학당 1학년에 다니던 유관순 열사가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여를 했는데 워낙 규모가 크다 보니 일본 당국이 서울의 모든 학교에 휴교령을 내립니다. 그래서 유관순 열사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고향인 병천으로 내려갑니다. 병천, 천안, 연기, 청주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만세운동을 기획하게 되고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납니다.

    이 만세운동에서 유관순 열사의 부모님이 모두 일본의 총탄에 돌아가시고 유관순 열사는 체포가 되는데요, 관할법원이 공주지방법원이라 공주에 투옥됩니다. 그리고 오빠 유우석도 공주영명학교 학생이었는데 영명학교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투옥됩니다.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시고 오빠와 동생이 모두 투옥되는 상황이 됩니다. 가족들이 모두 만세운동을 위해 희생된 참으로 대단한 집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재판 과정에서도 유관순 열사는 “제 나라 사람이 자기 나라를 되찾기 위해 정당한 일을 했는데 왜 총으로 죽이느냐! 죄를 진 것은 내가 아니라 너희들이다.”라고 당당하게 요구를 합니다.

    일본은 만세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을 폭도, 폭민으로 규정하고 2개 사단급 병력을 동원해서 학살, 살육, 방화를 자행합니다. 이로 인한 피해 규모를 박은식 선생은 순국한 분들이 약 7천5백 명, 부상 약 4만 5천 명, 체포 약 5만 명이라 기록했습니다.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았을 겁니다.

    3.1운동의 의의


    민중들이 다 같이 독립을 열망하고 독립의 열망을 표출한 것이 3.1운동입니다. 3.1운동은 우리 민족에게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해준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부분이 가장 큰 의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3.1운동을 전 세계 언론에서 보도하게 되는데요. 3.1운동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를 하면서 우리나라가 독립이 가능할 것이다라고 보도하여 전 세계에 우리의 독립 의지가 알려지게 됩니다.

    세 번째는 독립운동의 주체가 일반 대중으로 확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1910년대에 독립운동은, 새로운 왕이 통치하는 나라를 만들자는 복벽주의復壁主義와 백성들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만들자는 공화주의共和主義 계열로 나뉘어 진행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대다수 민중이 주도한 3.1운동을 계기로 복벽주의 중심의 독립운동은 쇠퇴를 하고 공화주의 중심의 독립운동이 대세가 됩니다. 그래서 1919년 4월에 상해에서 만들어지는 임시정부도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공화주의 사상을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가 세워지게 됩니다. 만약에 독립운동이 복벽주의 노선으로 계속되었다면 전제 군주제는 아니더라도 일본과 같은 입헌 군주제가 되었을 겁니다.

    네 번째는 3.1운동이 일제의 무단통치가 문화통치로 전화하는 계기가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제가 우리 민족에게 문화적인 혜택을 준 것은 아닙니다.

    다섯 번째는 3.1운동이 중국 베이징대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일 항쟁 운동인 중국의 5.4운동의 계기가 됩니다. 또 인도 간디의 비폭력 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3.1운동 이후의 국내 독립운동


    3.1운동 이후 1926년 6월 10일에 학생들이 주체가 된 6.10만세운동이 일어납니다. 순종 황제의 발인일인 인산일에 맞춰 일어난 만세운동인데요. 원래는 천도교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 그리고 학생들이 함께 준비한 운동이었는데 사전에 발각되어 지도층이 모두 체포가 되지만 학생들이 주체가 되어 만세운동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1929년 11월 3일에 일본 학생과 한국인 학생과의 충돌이 발단이 되어 광주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확대된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광주학생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정한 것입니다.

    3.1운동은 우리 독립운동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으로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건국 10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 3.1운동 100년이 함께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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