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에서 찾는 한문화코드 | 대한제국 중심에 선 경운궁慶運宮(덕수궁)과 원구단圜丘壇

[한문화]
이해영 / 객원기자

어느덧 조선의 궁궐 그 마지막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제 왕조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제국의 이상을 펼쳐 보려 했던 도심 속 궁궐 경운궁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경운궁은 흔히 우리가 덕수궁이라고 부르는 궁궐이죠. 여기에서는 본래 호칭인 경운궁으로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왕자의 집에서 궁궐이 되기까지


경운궁은 원래 세조世祖가 수양대군首陽大君 시절 살던 개인 집입니다. 세조의 장손으로 임금 자리에 오르지 못한 성종의 형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이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월산대군의 집으로 알려졌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까지 파천하였다가 이듬해에 한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이미 모든 궁궐은 불에 타 버려 임금이 거처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을 임시 행궁으로 삼고 이름을 시어소時御所라 하였습니다. 본래 이곳은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康氏의 정릉이 있었기 때문에 정릉동이라고 했습니다. 후에 태종은 정릉을 지금의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겨 버렸지만, 이곳은 선조 때까지 정릉동으로 불렸습니다. 그래서 이곳을 정릉동 행궁貞陵洞行宮이라고도 했습니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즉위하면서 이름을 경사스러운 운이 모인다라는 의미로 궁 이름을 경운궁慶運宮이라 하였습니다.

아관이어俄館移御와 경운궁


경운궁이 역사 속에 다시 등장한 시기는 조선왕조 말기인 고종 때였습니다. 1895년 을미년에 일본에 의해 명성황후가 살해되는 건청궁의 변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고종은 치밀한 사전 준비로 이듬해 2월에 세자와 함께 한 많은 경복궁을 떠나, 경운궁 근처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아관이어俄館移御였죠. 물론 굴욕적이라는 시각도 있지만, 당시는 왕조 사회였습니다. 국왕의 안위가 곧 국가의 안위로 직결되던 시절입니다. 고종이 자신을 압박하는 일본의 압력에 저항했던 방식으로 이해하는 게 타당하리라 봅니다. 이곳에서 일본의 감시를 벗어나고, 어느 정도 정국이 안정된 뒤인 1897년 정유년 고종은 경운궁으로 돌아와 주요 전각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원구단을 세우고, 잃어버렸던 천제天祭를 복원하면서 제국을 선포하고 새로운 도약을 꿈꾸게 됩니다.

제국의 법궁이 된 경운궁


원구단에서 상제님께 천제를 올리며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 경운궁은 우리의 근대 역사를 기억하는 궁궐이 되었습니다. 대한제국의 광무개혁 13년의 역사가 짙게 배어 있는 제국의 중심 궁궐이 되었습니다. 현재 서울 시내의 근간도 이때 이루어졌습니다. 이후 1907년 헤이그특사 사건으로 일본에 의해 강제로 고종이 퇴위당하고, 순종은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잠시 잊히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경운궁과 대한문은 1919년 고종 승하를 기점으로 일어난 삼일 만세 운동이나 1946년 해방 이후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 협상, 그리고 2016년 촛불 집회 등 근현대사에서 있었던 중요한 역사 변곡점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천제를 올리는 원구단의 지리적 위치와 역사
대한제국 시기 경운궁 주위를 둘러보기 전에 반드시 빼놓지 않고 가 보아야 할 곳이 바로 원구단圜丘壇입니다. 대한문 앞을 지나 서울 시청 앞 광장 큰길을 건너면 있는 웨스틴조선호텔 자리가 원구단이 있던 곳입니다. 이곳은 원래 태종의 둘째 딸인 경정공주의 집이 있던 곳이었기 때문에, 지명을 소공동小公洞이라고 불렀습니다. 고종은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이를 하늘에 계신 상제님께 고하기 위해 이 자리에 원구단을 세웠습니다. 연호를 건양建陽에서 광무光武로 고치고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大韓으로 바꾸었습니다. 이 터는 원래 조선 시대 왕실의 별궁 중 하나인 남별궁南別宮 자리였습니다.

원구단의 의미
원구단은 상제님을 위시하여 하늘과 땅, 별과 천지 만물에 깃든 신령의 신위를 모시고 천제를 모시는 곳입니다. 이후에도 고종은 황제의 자격으로 동지나 새해 첫날에 원구단에서 천제를 올렸습니다. 이 근처에는 조선 초에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제단인 남단南壇이 있었다고 합니다. 남방토룡단南方土龍壇의 준말인 남단은 환단桓檀 또는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으로 불렸다가 1463년에 중단되었습니다. 바로 이 천제가 원구단에서 부활한 것입니다.

원구단의 구조
1897년 정유년 음력 9월 17일 고종은 원구단에 나아가 천제를 올리고 황제에 즉위하였습니다. 지금은 사라진 원구단은 3층으로 둥글게 쌓은 제단이고 중앙의 윗부분에는 금색으로 칠한 원추형 지붕이 있었다고 합니다.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에 의해 천제를 지내는 곳인 원구단은 둥글게 만들었고, 땅에 제사 지내는 사직단은 네모나게 만들었습니다. 황제의 즉위식에 날짜를 맞추기 위해 왕실 최고의 도편수인 심의석을 비롯한 1천여 명의 숙련된 일꾼들이 한 달 동안 쉼 없이 일하여 완공했다고 합니다. 원구단은 1층의 지름이 140미터나 되는 엄청난 규모의 구조물이었습니다.

원구단에서 모신 신위神位
원구단 가장 상단에는 하늘의 신위인 호천상제昊天上帝와 땅의 신위인 황지지皇地祇 신위판神位版을 모시고 그 아래 단에는 순서대로 주천성신周天星辰, 풍운뇌우風雲雷雨, 오악오진사해사독五嶽五鎭四海四瀆의 신패神牌를 모셨습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하늘과 땅 그리고 하늘의 별과 기상과 산과 바다와 강 등 자연의 모든 신들을 두루 모신 것입니다. 천제를 모신 원구단은 경운궁과 대한제국의 정신적 출발지가 되는 셈입니다.

원구단의 수난
그러나 일본은 1913년 굳이 원구단을 헐어 버리고 구덩이를 파서 분수를 만들었고, 그 옆으로 총독부 철도호텔을 지었습니다.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 등을 넣어 창경원으로 만들며 대한 황실을 욕보인 것과 궤를 같이합니다. 해방이 된 이후에도 원구단은 복원되지 못했습니다. 1968년에 지금의 웨스틴조선호텔 건물이 지어졌습니다. 원구단 흔적은 없어졌고, 이를 기억하는 이도 별로 없게 되었습니다.

원구단의 흔적, 황궁우皇穹宇
원구단을 짓고 2년이 지난 1899년 황궁우가 지어졌습니다. 황제가 원구단에서 천제를 지낼 때 신위를 임시로 모셔 두기도 하는 보조적인 공간이었습니다. 화강암 기단에 세워진 3층 팔각정 황궁우는 상제님의 위패를 모신 건물로 기단 주변은 서수瑞獸가 지키고 있고 팔각형 건물 내부는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습니다. 3층에는 각 면에 세 개씩의 창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겉은 3층이지만, 내부는 2층으로 구성되었고, 내부 공간은 하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는 건물의 외부 회랑을 덮고 있는 지붕 처마가 실은 차양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팔각형으로 구성된 매우 높은 내부 천장에는 목각으로 여덟 개의 발톱을 가진 황룡이 새겨져 있습니다.

석고石鼓와 석문石門
황궁우 서편에 있는 북 모양의 돌 석고石鼓는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여 만들었습니다.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사용하는 악기를 형상화하였고, 북의 몸통에는 용무늬가 조각되어 있는데, 당시 조각 중 최고 걸작으로 평가됩니다. 원래 석고는 임금의 치적을 칭송하는 글을 새겨 전하려고 만든 일종의 비석입니다. 현재 롯데호텔 자리에 석고각을 세우고 그 안에 두려 했으나, 그 해 콜레라가 크게 번져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글도 새기지 못한 채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황궁우 앞 웨스틴조선호텔 사이에는 벽돌로 지은 문이 있습니다. 홍예문 형식으로 된 세 개의 석조 대문으로 원구단으로 통하는 문이었습니다. 해체되어 없어졌다고 알려졌는데 2007년 서울 우이동 그린파크호텔 터에서 발견되어 2009년 12월에 복원 공사가 마무리된 결과 지금의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대한제국과 천제문화의 부활


대한의 의미
원구단에서 황제에 즉위한 고종은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하였습니다. 1897년 10월 11일 조 고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고종이 국호를 제안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지금 나라의 이름을 대한大韓이라고 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고 또한 매번 일찍이 보건대 여러 나라의 문헌에는 조선朝鮮이라고 하지 않고 한韓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전에 이미 ‘한’으로 될 징표가 있어 오늘이 있기를 기다린 것이 세상에 공포하지 않아도 세상에서는 모두 다 ‘대한’이라는 이름을 알 것이다.

지금까지 대한은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三韓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보다 더 큰 뜻이 있습니다. 여기서 삼한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 밝혀 주었듯이 만주, 요서, 한반도에 걸쳐 광대하게 뻗어 있었던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삼한시대를 의미합니다. 단군조선의 이 통치 강역을 대륙삼한大陸三韓, 북삼한北三韓이라고 합니다. 뒤에 단군조선이 망하면서 그 유민들이 한반도 이남으로 대거 이주하여 소규모로 재건한 한반도 이남의 삼한을 남삼한南三韓이라고 합니다. 흔히 국사 교과서에서 삼한이라고 하면 이 남삼한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본다면 삼한은 너무나 협소한 개념이 됩니다. 고종은 단군조선 시대의 천제문화를 부활하면서 이 대륙삼한까지도 하나로 아우르는 제국을 꿈꾸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은 무슨 뜻일까요? 『환단고기』 「소도경전본훈」에서는 “한韓은 즉황야卽皇也오 황皇은 즉대야卽大也오 대大는 즉일야卽一也라.”고 했습니다. 한은 바로 황(임금)이다. 왕이다. 크다. 또는 하나다. 중심이다. 밝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큰 대大 자를 붙인 대한은 밝은 하늘, 밝은 땅에 사는 밝은 사람의 나라라는 의미입니다. 본래 광명을 사랑하는 우리 민족다운 국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종이 부활시킨 신교의 꽃, 천제문화
고종이 원구단을 세우며 천제문화天祭文化를 부활시킨 일은 역사적인 대사건입니다. 1897년 10월 13일 고종실록 기록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짐이 부덕하여 마침 어려운 때를 당하였는데 상제님께서 권고하여 위태로움을 편안함으로 바꾸고 독립하는 기초를 창건하여 스스로 주장하는 권리를 행하라 하시니 황제의 칭호를 추존코자 하매 천지에 제사를 고하고 황제의 자리에 나아감에 국호를 정하여 가로되 대한이라 하고 이해로써 광무 원년을 삼고 이에 역대 고사를 상고하여 따로 큰 제사를 행한다.

이는 고종의 즉위 칙어입니다. 여기서 고종은 천제문화와 상제님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천제문화의 의미
천제는 상제님께 폐백을 바쳐 나라의 부강과 백성의 번영을 기원하며 상제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국가 행사였습니다. 천제를 올린 뒤에 모든 사람들은 다 함께 어울려 음주와 가무 등 풍류를 즐겼습니다. 천제는 신바람 나는 한 마당의 어울림 문화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천제문화가 조선 초기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그러다 명明나라에서 천제는 천자가 올리는 것이라며, 조선에서 천제를 거행하는 일을 금지해 버렸습니다. 다만 기우제나 별을 향해 올리는 초제醮祭로 격하되어 거행되었습니다. 이렇게 사라진 천제문화가 고종 때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다시 부활한 것입니다.

고종이 지향했던 나라는?


그렇다면 고종이 지향했던 나라는 현실적으로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일반적인 제국의 의미인 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많은 식민지를 거느린 나라, 침략적인 성격을 지닌 국가는 아니라는 겁니다. 고종의 제국 선포는 외세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난 주권국가로서의 의지였을 뿐, 식민지 쟁취를 전제로 한 침략 국가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당시 조선은 이웃한 여러 제국들의 세력 균형을 통해, 자주독립을 지키는 게 가장 절박했습니다. 고종이 지향했던 모델은 고대국가 특히, 단군조선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원구단을 다시 짓고 천제문화를 복원한 것이고, 여기에 환국에서부터 단군조선 시대까지 이어져 온 국가 통치 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을 지향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홍익인간은 인간 완성과 평화의 상생 이념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다른 하나는 세계 질서의 절대 강자로 부상한 서양을 모델로 한 부국강병과 근대국가 수립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가졌습니다. 고종은 개항을 통해 서양의 발달된 물질 문물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부국을 위해 식산흥업殖産興業 정책을 도입하였고, 강병책으로 원수부를 신설하고 군대에 대한 통제권을 황제에게 집중시켰습니다.

경운궁의 입지와 터는 왜 여느 궁궐과는 다를까요?


경운궁은 입지는 물론 공간 구성이 다른 궁궐과는 많이 다릅니다. 일단 다른 궁궐처럼 산을 등지고, 완만한 남사면에 궁궐 전각이 앉혀 있는 다른 궁궐에 비해 야트막한 언덕은 있지만 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 않으며, 궁궐 주변 경계도 단정치 않고 들쭉날쭉합니다. 그 이유는 도심 속 궁궐이기 때문입니다. 경복궁이나 창덕궁 등은 한양 조성과 함께 터가 정해졌기 때문에 궁궐이 먼저 자리를 잡고 궁궐 형세에 따라 주변이 정리되었습니다. 반면 경운궁은 조선 개국 후 500여 년이 흐른 뒤에 이미 도시가 형성된 뒤 궁역을 확장하였기 때문에 지리적 조건이 기존 궁궐과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경운궁의 입지와 건축은 당시 시대적 상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당시 현저한 국력의 차이를 갖고 있던 조선은 일본의 침략에 홀로 대응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서구 열강의 도움을 얻기에 용이한 정동貞洞 지역을 선택하는 일은 현실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궁궐 조성에는 많은 땅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동 일대 정부가 소유한 땅 이외에 각국 공사관의 협조를 얻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영국이나 미국 공사관의 협조는 얻지 못하였습니다. 대신 그 주변에 있던 선교사 주택을 매입하고, 남쪽에 있는 독일 공사관의 협조를 얻어서 지금 남아 있는 규모의 3배 정도 되는 궁역으로 확장하였습니다.

근대 영욕榮辱의 역사를 지켜본 대한문


1897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올 즈음 경운궁은 중층 규모의 중화전과 중화문으로 이루어진 정전 구역과 남쪽 정문인 인화문仁化門을 비롯하여 동쪽에 대안문大安門, 북쪽에 생양문生陽門, 서쪽에 평성문平成門 등의 사대문을 갖춘 웅장하고 짜임새 있는 궁궐 모습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904년 경운궁 대화재로 모습은 크게 달라져 버렸습니다. 중건 과정에서 정문이 변경되는 대사건이 발생합니다.

#경운궁 정문이 된 대한문#
현재 경운궁의 정문은 동문인 대한문大漢門입니다. 원래 정문은 남쪽으로 난 인화문仁化門이었습니다. 하지만 인화문 앞으로 물길이 있었고, 길 자체가 좁았습니다. 이와 같은 인화문의 입지는 자연스럽게 대안문의 건설로 이어졌습니다. 그 후 대안문 앞쪽에 큰길이 생겨 경운궁 동쪽이 도시의 새로운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원구단이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대안문이 실질적인 정문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1906년에 수리하면서 이름을 대한문으로 바꾸었고, 건극문建極門으로 이름을 바꾸었던 인화문은 일제 강점기 때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현재 대한문은 원래 위치보다 뒤쪽으로 물러나 있습니다. 원래는 현재의 앞길 도로 중간쯤에 있었습니다.

대한문인가 대안문인가?


대한문의 원래 이름은 대안문大安門입니다.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한다는 뜻에서 붙여졌다고 알려졌습니다. 대한제국 광무 9년인 1906년 4월 25일 경운궁 대안문 수리를 길일인 음력 4월 12일에 시작하겠다는 보고에 고종은 대한문으로 고치되 아뢴 대로 거행하라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5월 17일 수리를 마치고 다시 상량을 하였습니다.

대한문 상량문으로 본 대한문의 뜻
『경운궁중건도감의궤』에는 이근명이 짓고 윤용구가 쓴 대한문 상량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한양은 띠를 두른 형세를 지니고 있으며 우리 한방韓邦의 문호門戶의 땅이다. 열수洌水(한강)가 남쪽으로 지나가고, 태악太岳(삼각산, 지금의 북한산)이 북쪽에 우뚝하니 얼마나 아름다운가. (중략) 황제는 천명을 받아 유신維新을 도모하여 법전인 중화전中和殿에 나아가시고 다시 대한정문大韓正門을 세우셨다. 대한大漢은 소한霄漢과 운한雲漢의 뜻을 취한 것이니 덕이 호창에 합하고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나온다.


내용을 보면 대한제국의 수도로서 한양의 산하가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경운궁이 그 궁궐로서 법전인 중화전을 갖추고 그 정문으로 대한문을 갖춤으로써 궁궐 제도를 완비한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소한이나 운한은 모두 하늘을 의미합니다. 그리니 결국 대한은 ‘큰 하늘’이라는 의미이고, 대한문 앞에 있는 원구단과 함께 본다면 상제님께서 계신 큰 하늘로 통하는 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안문에 얽힌 속설
그렇다고는 하지만 대한문의 한자가 좀 이상합니다. 대한大韓이 아니고 대한大漢이기 때문이죠. 우리 국호도 아니고, 이에 대해서는 여러 억측들이 있어 왔습니다.

1903년 『코리아 리뷰』지에 따르면 어느 젊은 무녀가 대안문 용마루에 연결시킨 밧줄을 타고 내려와 ‘대안대왕大安大王 강천降天이시다’라고 외치며 임금을 대령시키라고 호통을 친 일이 있어 불길한 징조로 여겼다고 합니다. 또 안安 자에 여자를 상징하는 글자가 있는데, 당시 대한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의 애첩이자 밀정인 배정자가 이 문을 통해 드나들며 공작을 펼쳐서 이를 꺼려하여 이름을 변경하려 했다고 합니다.

대한문에 대한 민중의 여론
어찌하였든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여기엔 여러 부정적 의견들이 있습니다. 한漢이라는 글자에는 하늘이란 뜻보다는 ‘부랑배, 악한, 괴한, 도둑’이라는 조롱의 뜻이 더 일반적입니다. 그리고 ‘한나라, 물의 이름’ 등의 뜻이 있습니다. 당시는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었고, 이미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된 상황이었습니다.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을 제치고 대한제국의 정사를 좌지우지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사실상 조선의 국권이 일본으로 넘어간 상황에서, 일제가 조선의 얼과 궁궐의 신성함을 무너뜨리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비록 대한문 상량문에서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해도 나라의 국운이 기운 상황에서 민중들은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경운궁이 나라를 잃은 대한제국의 정궁이었기에 그 영욕의 세월을 그대로 받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좀 더 구체적인 경운궁의 모습은 다음 호에 계속해서 이어 가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문헌>
『증산도의 진리』 (안경전, 상생출판, 2014)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 상하』 (홍순민, 눌와, 2017)
『서울의 고궁산책』(허균, 새벽숲, 2010)
『궁궐, 그날의 역사』(황인희, 기파랑, 2015)
『덕수궁』(안창모, 동녘, 2009)
『왕실의 천지제사』(김문식 등, 돌베개,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