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작 황금의 제국 - 2부 황금, 욕망의 지배자

[STB하이라이트]
1부 골드 오디세이
2부 황금, 욕망의 지배자
3부 황금의 귀환


2부 황금, 욕망의 지배자


황금의 욕망, 미다스


50여 년 전 터키 고르디온에서 세상을 놀라게 한 고분이 발견됐다. 무덤의 주인공은 그리스신화 속의 미다스. 기원전 8세기에 이 땅을 지배했던 프리기아의 왕. 역사와 신화를 이어주는 것은 욕망이었다.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신에게 미다스의 욕망이 답했다. 손이 닿는 곳마다 찬란한 금이 쏟아지게 하소서! 그러나 욕망의 댓가는 참혹했다. 황금은 먹고 마시고 사랑하는 기쁨을 앗아갔고 금이 늘어날수록 고통은 깊어갔다. 미다스가 살 수 있는 방법은 가장 원했던 황금을 버리는 길. 흐르는 강물에 욕망을 씻어내고서야 미다스는 황금의 저주에서 풀려났고 강은 사금을 실어나르게 됐다.

황금과 욕망에 관한 유명한 신화. 하지만 미다스의 이야기는 신화로만 그치지 않았다. 축복인 동시에 저주인 황금의 마력은 인류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재등장한다. 미다스처럼 손을 뻗는 대로 금을 쥐고 싶은 욕망은 세상 모든 권력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인간의 권력을 불멸의 황금에 새기고 싶었던 것일까? 역대 왕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의 초상이 새겨진 금화를 발행하는 것이었다. 황금주화가 왕을 선전하는 수단이었다면 금괴는 권력을 유지하는 비결. 왕이 비축한 막대한 금괴는 전쟁을 일으킬 수도 전쟁을 막을 수도 있는 도구였다. 황금으로 잠재적인 침략자를 매수하고 동맹국에 금을 공물로 바쳤다. 그리고 병사들에게는 황금으로 월급을 지급했다.

십자군 전쟁의 실체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 이 한마디로 시작된 십자군 전쟁. 그것은 종교전쟁이었고 탐욕의 전쟁이었다. 무슬림이 황금주화를 삼켰다는 소문이 돌자 십자군은 무슬림의 배를 갈랐다. 신의 이름으로 이교도를 살육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황금을 약탈했다. 200년에 걸친 여덟 번의 전쟁. 유럽에서는 성스러운 원정이었고 이슬람에서는 악마의 침략이었다.

황금 욕망의 역사, 포르투갈


이성을 잃게 만드는 황금의 마력. 피로 얼룩진 욕망의 역사는 15세기로 이어진다. 15세기 유럽에서는 귀금속 기근 현상이 오랫동안 지속됐다. 금이 없어서 주화를 만들어내기도 힘든 상황. 런던 조폐국은 10년간 황금주화 생산을 중단했고, 금을 향한 타는 듯한 갈증은 사람들을 바다로 내몰았다.

황금은 인류역사상 가장 추악한 광기와 약탈의 서막을 열었다. 세계 대발견의 선두에 선 것은 포르투갈. 상류사회가 파산하고 정치적으로도 불안한 상황. 새로운 부를 찾는 이들은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바다는 포르투갈의 한계이자 현실이고 꿈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소망 앞에 항해의 왕자 엔히크가 등장한다. 지금도 포르투갈의 영웅으로 기억되는 엔히크.

그는 바다를 이용해 국력을 키우고자 했다. 1415년 아프리카 세우타를 점령한다. 세우타는 유럽에서 사용하는 금의 최대 공급처. 세우타 구석구석을 파괴하면서 포르투갈은 해상무역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유라시아의 장거리 수송은 거의 낙타에 의해 이루어졌다. 하지만 낙타수송에는 한계가 많았다. 물 부족과 한낮의 더위, 그리고 밤의 추위. 이 모두가 극복하기 힘든 약점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고민을 해결해 줄 존재가 나타났다.

해결사는 바다의 배였다. 하루에 낙타가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은 8시간 정도. 하지만 24시간 이동하는 배는 2배 먼 거리를 갈 수 있었다. 배는 인력과 효율성에 있어서도 월등했다. 시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운송혁명으로 세계가 교류하는 속도가 빨라졌다. 배는 운송의 역사만 바꾼 것이 아니었다.

항해술을 발전시킨 포르투갈은 대항해시대를 열고 해상제국으로 우뚝섰다. 리스본 항구에서는 탐험가들을 위한 미사가 열렸고 탐험가들은 신의 이름으로 배에 올랐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에 최초의 유럽 식민지를 건설한다. 지니고 있던 모든 황금을 약탈당한 원주민들은 노예가 되어 어두운 광산에서 금을 캐거나 배에 실려 유럽 각국으로 팔려갔다.

아프리카 원주민이 착취당하는 사이 포르투갈은 눈부신 성장을 한다. 항해자들이 약탈해온 황금으로 성당을 세우고 신대륙에서 본 이국적인 풍경은 마누엘 양식이라는 새로운 문화로 탄생한다. 폭력과 욕망을 수출한 댓가로 포르투갈은 막대한 부와 권력을 얻은 것이다.

황금 욕망의 역사, 스페인


베네치아의 상인 마르코 폴로. 그가 남긴 책 한 권은 유럽사회를 뒤흔들어 놓는다. 동방견문록. 수많은 사람들이 책 내용을 필사했고 동방견문록은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는 책이 되었다. 책 속의 동양은 어디에나 황금이 널려있는 지상낙원. 책을 읽은 사람들은 황금 낙원으로 달려가고 싶은 열망에 빠졌다.

그리고 그중에 콜롬버스가 있었다. 1492년 8월의 새벽, 3척의 배가 스페인 해변에서 출발한다. 배의 선장은 콜롬버스. 그의 또다른 이름은 황금광이었다.

“콜롬버스는 경제적인 이익을 통해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의 연구에 의하면 낮은 신분 출신이었던 콜롬버스는 신분상승의 열망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콜롬버스를 둘러싼 모든 환경과 행동은 신분상승이라는 목표와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콜롬버스에게 황금은 신분상승을 보장해줄 특별한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꼰풀루덴서, 미드리드국립대학 역사학 교수

황금을 향한 콜럼버스의 야망은 항해일기에 담겨있다. 가장 많이 쓴 단어는 황금. 무려 139번의 기록을 남겼다. 출발 7개월 뒤 금을 들고 귀국한 콜럼버스는 최고의 화젯거리였다. 그의 성공에 자극을 받은 사람들이 앞다퉈 배를 띄우기 시작했다. 황금의 추종자들. 그 강렬한 탐욕이 아즈텍과 잉카를 덮친다.

“신대륙을 찾는 다양한 목적이 있었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이유는 부의 획득이었습니다. 아메리카는 당시 스페인 사람들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환상과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황금으로 된 도시를 찾아왔다는 점만 보더라도 스페인 사람들이 환상을 품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스페인 사람들이 아즈텍을 정복한 가장 큰 원인은 이곳에 황금보물이 있을 거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카를로스 곤잘레스, 템플로 마요르 박물관장


잉카와 아즈텍의 멸망


1532년, 피사로와 스페인 사람들은 험준한 안데스 산맥을 넘어 황금의 제국에 들어섰다. 당시 잉카는 높은 생산성과 세련된 예술을 간직한 제국. 그러나 총과 대포로 무장한 침략자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몸값을 요구하는 피사로에게 왕은 방을 황금으로 가득 채워 바쳤지만 결국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잉카의 황금예술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수천 년 역사를 지닌 예술품들은 불가마 속에 들어가 금괴가 되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한 달 내내 녹인 금은 무려 7톤에 이른다.

“황금에만 관심이 있었던 스페인 사람들은 망설임 없이 황금 유물을 모두 녹여서 금괴로 만들었습니다. 계급이 낮은 병사들은 금을 갑옷에 숨겨 훔쳐가거나, 금을 녹여서 갑옷을 만들었습니다. 이 모든 약탈은 스페인 사람들의 황금을 향한 끝없는 욕망에서 초래된 것입니다. -아브람 게레로, 칸톤 박물관장


스페인의 약탈로 무너진 제국은 잉카만이 아니었다. 1521년, 아즈텍이 사라진다. 스페인의 코르테스 일행은 눈에 띄는 모든 금을 약탈하고 금을 가져오지 못한 자는 죽였다.

“유명한 일화에 따르면 코르테스는 아즈텍의 마지막 왕이 되고자 했던 과우테목 왕자의 다리를 불로 지지도록 명령합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선대 왕인 목테수마가 숨겨 둔 보물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코르테스는 그런 보물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지만 이런 일을 저질렀습니다. 이 또한 스페인 사람들이 이곳에 엄청난 금이 있을 거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카를로스 곤잘레스, 템플로 마요르 박물관장


또르데시야스 조약


황금광들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스페인의 약탈과 살인은 아즈텍 제국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황금의 제국 잉카와 아즈텍은 황금의 저주 속에 묻혔다. 아즈텍과 잉카의 희생으로 인해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세계 최강의 국가로 거듭났다. 이 두 국가의 위세와 오만은 이 ‘또르데시야스 조약서’에 남아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국왕이 맺은 ‘또르데시야스 조약’. 아프리카와 브라질은 포르투갈, 신대륙은 스페인이 지배하기로 한 약속이다. 그렇게 세상을 절반씩 나눠 가진 두 나라는 신세계에서 가져온 부로 최전성기를 누린다. 스페인의 왕들이 떠받들고 있는 콜럼버스의 관. 그가 가져온 변치 않는 황금처럼 콜롬버스 역시 영원불멸의 이름으로 남아있다.

“16세기에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져온 귀금속이 전체 수입의 약80%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금이 19%, 진주가 1%였습니다. 1531년부터 1660년 사이에 측정된 자료에 의하면 아메리카에서 약 15만 5천kg의 금이 스페인 세비야로 들어왔고, 은은 약 1700만kg이 들어왔습니다.” -이사벨 고메스, 까를로스3세 대학 언론학 교수


대항해시대의 여파는 스페인 전역에 미쳤다. 수천년에 걸쳐 만들어진 잉카와 아즈텍의 황금유산은 순식간에 녹여져 스페인의 영광을 장식하는 보물이 되었다. 신대륙에서 쏟아져 들어온 황금으로 스페인에서는 금 세공기술이 발달한다. 무자비하게 약탈하고 살육해 얻은 피의 제물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전성시대를 연 것이다.

황금 욕망의 역사, 유럽의 해적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작위를 받은 영국의 영웅 프랜시스 드레이크. 그는 해적이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신대륙의 금을 독점하자 다른 국가들은 해적 행위를 정책으로 삼는다. 공격 대상은 금을 실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선박.

“프랑스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창출된 부가 고스란히 포르투갈과 스페인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신대륙 약탈에 관여한 국가들이 모두 큰돈을 벌자 프랑스뿐 아니라 영국도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국가의 내부적인 문제가 해결되자 네덜란드도 신대륙의 귀금속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꼰풀루덴서, 마드리드국립대학 역사학 교수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는 해적질을 할 수 있는 약탈 면허증을 발급하고 민간 선박이 적국의 배를 약탈하도록 부추긴다. 이는 정부와 해적 모두에게 남는 장사였다. 정부는 가만히 앉아서 적국에 타격을 입히고 금을 챙겼다. 그리고 해적들은 금을 얻는 동시에 명예와 권력을 얻었다.

“유럽의 모든 국가가 신대륙에서 얻을 수 있는 부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해상약탈에 대한 관심도 점차 높아졌습니다. 금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왕에게 약탈권한을 승인받고 국영 해적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적국의 선박을 공격하고 재산을 갈취할 수 있었는데, 승인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일반 해적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꼰풀루덴서, 마드리드국립대학 역사학 교수


신세계에서 채굴된 금은 스페인과 포르투갈 침략자들의 차지가 됐고 그것은 다시 바다에 숨어 기다리는 해적들의 먹잇감이 되었다. 황금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뺏고 빼앗기는 전쟁은 오래도록 계속 되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15세기 이전까지 서로 떨어져 별개의 세계로 존재하던 대륙들은 15세기부터 바닷길을 통해 빠른 속도로 연결된다. 세계사의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온 이 흐름은 아시아까지 이어지게 된다. 동아시아의 최고의 세계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1402년에 만들어진 이 지도는 아프리카와 유럽, 아라비아 지역까지 표현되어 있어 15세기에 제작된 세계지도 중 가장 뛰어난 지도로 평가받고 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조선, 중국, 일본 아랍의 지도문명이 합쳐진 세계 문화교류의 산물이다. 당시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렀던 이 지도를 콜럼버스가 봤다면 세계 역사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황금 욕망의 역사, 동아시아


해상 패권을 장악한 건 결국 유럽이지만 아시아도 항해술에서 오랜 역사와 기술력을 갖추고 있었다. 명나라의 환관 겸 전략가였던 정화는 1405년부터 7차례에 걸쳐 인도양을 탐험한다. 배 200척에 승선인원만 2만 명. 87년 뒤에 콜럼버스 선반보다 60배 이상 큰 규모였다. 그러나 중국은 스스로 세계의 바다에서 물러났고 이후 600년간 강대국의 지위를 상실한다. 중국의 해상 후퇴와 유럽의 해상 팽창은 세계사에 큰 변화 흐름을 가져오게 된다. 유럽이 세계의 바다를 다스리는 주최가 된 것이다.

유럽이 금을 찾아 신대륙을 향해 달려가는 동안 일본에서는 금광과 은광 개발이 한창이었다. 당시 일본은 세계 2위의 은 수출국. 일본 이와미 은산은 아시아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유명했다. 이곳의 은을 얻기 위해 유럽에서 오기도 했다.

“유럽의 지도, 특히 포르투갈의 지도에 표시돼 있다는 것은 이와미가 매우 중요한 곳이란 뜻입니다. 특히 대항해시대에도 이곳이 중요한 곳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와미 은산은 일본에서 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중요한 은의 산지였습니다.” -토시로 나카무라, 이와미 자료관 사학자


일본의 은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조선의 기술력 때문이었다. ‘회치법’이라 불리는 은 추출기술은 16세기 초에 조선이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이 혁신적인 기술 덕분에 일본의 은 생산은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실제로 17세기초에 이와미 은산에서는 연간 40톤의 은을 생산했다고 합니다. 당시 일본이나 동아시아를 제외한 전 세계의 은 생산량은 450~600톤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와미 은산의 은 생산량은 상당히 많은 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시푸미 나카노, 이와미 자료관 관장


일본은 은을 수출하고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 금을 수입했다. 그런데 17세기 후반 일본정부가 은의 해외수출을 금지한다. 은을 수출할 수 없게 되자 대마도 조선 루트를 통해 거래가 이뤄지기 시작한다. 조선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귀금속 중개 역할을 한다. 은은 세계를 연결하는 무역풍이자 일본내 권력판도를 바꾸는 중요한 보물이었다.

“다이묘는 은산을 자신의 지배하에 두고 은 생산을 통제하면서 권력을 확대할 수 있었습니다. 은산이 있으면 다른 지역보다 여러모로 유리했습니다. 그리고 전국시대부터 통일권력이 등장하면서 변화가 나타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은산에 주목하고 은산을 자신의 통치하에 두고자 노력한 권력자였습니다.” -무라이 쇼스케, 도쿄대 역사학 교수


조선의 회치법 덕분에 생산량이 증가한 일본의 은은 결국 조선을 침략하는 임진왜란의 전쟁비용으로 쓰이게 된다.

유럽의 황금 쟁탈전


아시아에서 은산을 둘러싼 쟁탈전이 벌어지는 사이 유럽에서도 황금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한창이었다. 프랑스와 영국의 전쟁은 몸값전쟁이자 황금전쟁이었다. 가장 비싼 몸값의 주인공은 프랑스이 장 2세. 금 10톤과 프랑스 영토의 3분의 1을 영국에 주고 풀려났다.

반면 가장 쉽게 금을 얻은 사람은 영국의 에드워드 4세. 프랑스 침략을 포기하는 대신 막대한 양의 금화를 받았다. 14세기와 15세기 금이 부족하던 유럽에서 몸값으로 인한 금의 이동은 큰 변화를 몰고 왔다. 몸값이 치러질 때마다 물가와 경기가 변하게 된다.

역사상 가장 많은 전리품을 챙긴 사람 중 한 사람은 히틀러다. 그에게 2차 세계대전은 황금전쟁이었다. 나치의 보물창고에서는 8,000개가 넘는 금괴가 쏟아졌고 금제품 60상자가 나왔다.

연금술사, 뉴턴


천재과학자 뉴턴. 우리가 아는 그의 모습은 물리학자, 수학자 그리고 천문학자이다. 하지만 그에겐 또 다른 얼굴이 있었다. 뉴턴은 영국의 조폐국장을 맡은 정치인이었고 연금술의 신봉자였다.

“뉴턴의 300번째 생일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존 케인스는 뉴턴을 위대한 과학자로 생각하기보다는 바빌론과 아시리아의 마지막 후계자, 즉 마지막 연금술사로 간주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뉴턴을 근대과학자로 볼 수도 있지만, 또한 연금술의 전통을 이어받은 후계자로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패트리샤 파라, 캠브리지대학 과학사 교수


근대과학의 상징, 뉴턴. 연금술에 관한 100만자가 넘는 원고를 남긴 그는 마지막 연금술사였다. 뉴턴은 1669년 말부터 연금술 실험을 시작했고 그 후 30년간 연금술에 온 정열을 쏟아부었다.

“뉴턴은 캠브리지 대학에 있는 동안 거의 모든 시간을 연금술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뉴턴은 런던 조폐국으로 간 이후에도 여전히 다른 연금술사들과 교류했습니다. 그는 17세기 말부터 자신의 모든 일생 동안 지속적으로 연금술 연구를 하게 됩니다.” -로버트 일리페, 서섹스대학 과학사 교수


무엇이 과학자 뉴턴을 연금술에 빠지게 했을까. 연금술은 인간의 욕망과 가장 깊이 닿아 있는 분야이다. 뉴턴도 욕망을 지닌 인간 중에 한 명이었다. 연금술을 통해 불로장생을 얻고 황금을 만드는 것은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꿈이었다.

“연금술사는 여러 가지 방면의 일들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처럼 사람들 앞에서 행세했습니다. 의사처럼 병을 치료해줄 약을 만들어주겠다고 사람들에게 약속하고 돈을 벌기도 했습니다. 특히 연금술사들은 금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며 사람들을 부자로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패트리샤 파라, 캠브리지대학 과학사 교수


연금술과 과학의 발달


유럽의 연금술이 전해진 건 중세시대. 체코 프라하는 연금술의 중심지였다. 이곳에서 불을 때며 연금술사들은 평범한 금속이 금으로 변하는 순간을 고대했다. 금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에 국왕은 연금술에 후원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연금술에 매혹됐다.

“연금술에 대한 관심은 특히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초의 대표적인 현상이었습니다. 이 당시 루돌프 2세 시절에 프라하성에서는 연금술의 전성기가 열렸습니다. 1612년 황제가 사망한 후 체코 왕국과 프라하성에서 연금술은 점차 쇠퇴했습니다. 18세기에 이르러서는 화학을 비롯한 순수과학이 발달하게 되었는데 연금술이 이에 기초가 되었습니다.” -프란티섹 카틀레츠, 프라하성 학예사

19세기 화학적인 방법으로 금을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연금술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인류 공통의 꿈이었다. 불멸의 전설이 된 연금술은 인류역사상 가장 뛰어난 지성인들까지 사로잡았다.

황금 욕망의 역사, 골드러시


황금을 향한 환상과 욕망은 19세기 거센 광풍으로 나타난다. 금을 둘러싸고 벌어진 영광과 파멸의 드라마, 그 시작은 1848년 어느 날이었다.

1839년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에 정착한 농부 존 서터의 꿈은 이민자들을 모아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1848년 1월 황금이 발견되면서 서터의 행복은 끝이 난다. 황금 발견을 비밀에 부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문은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인근 지역은 들끓기 시작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골드러시가 시작된 순간이었고 서터의 꿈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당시 완전히 자제력을 잃은 서터는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쳤습니다. 서터는 자신의 농장에서 발견된 황금으로 일확천금의 꿈을 이룰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악착같이 달려드는 사람들 손에 자신의 농장을 헐값에 팔아 넘기고 말았습니다.” -케네스 엔 오웬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석좌교수


황금 앞에서는 법도, 정의도, 양심도 없었다. 서터의 농장은 불법체류자들의 차지가 되었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이 벌떼같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서터가 키우는 농장의 가축들을 잡아먹고 농경지를 훼손했다.

1849년 포크 대통령이 금 발견 사실을 언급한 뒤부터 골드러시는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농부들은 경작하던 땅을 버렸고, 노동자들은 돌리던 기계를 멈췄다. 1853년까지 캘리포니아로 몰려든 사람은 10만여 명. 이 중에는 2만 5천 명의 프랑스인과 2만 명의 중국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캘리포니아에 지속적으로 인구가 유입되었는데 10년마다 치러진 연방 인구조사에 의하면 1850년 이후 캘리포니아는 미국에서 유일하게 인구증가를 나타낸 주였습니다. 1850년 이후 10년 동안 캘리포니아가 미국의 전체 인구증가를 주도한 것입니다.” -케네스 엔 오웬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석좌교수


골드러시 이전까지 금은 권력자의 것이었지만 이곳에서는 발견자의 몫이었다. 이 사실이 사람들을 자극했다. 대륙을 건너온 사람들은 모래와 자갈 사이에 숨어 있는 사금에 운명을 걸었고 반짝이는 사금은 서부개척의 원동력이 되었다. 1853년 캘리포니아의 금 생산량은 95톤에 달한다. 채굴된 금은 기차와 증기선을 타고 금고와 은행으로 운반되었다.

“금은 경제 전반으로 흘러 들어가면서 경제발전에 추진력을 제공합니다. 제일 먼저 상업과 교육이 확대되었는데 이는 경제 전체에 인플레이션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그와 동시에 골드러시는 중산층의 자산 및 사업소유권 확대에도 도움을 줬습니다. 이런 경제적 효과는 미국뿐만 아니라 해외의 세계 각지에도 여파가 갔습니다.” -케네스 엔 오웬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석좌교수


19세기의 골드러시는 갑작스러운 폭발 그 이상이었다. 캘리포니아에 이어 이번에는 남아프리카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1886년 금맥이 발견된 남아프리카에는 일주일에 2,000명의 이민자들이 몰려들었다. 새로 발견된 금이 홍수처럼 쏟아지면서 세계경제가 황금을 중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1850년부터 1900년 사이, 약 50년 동안 역사상 가장 많은 금을 발견하고 생산하게 됩니다. 골드러시 이전까지 소규모였던 금의 생산량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양으로 늘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금본위제[#(※)
는 중국을 제외한 주요 국가들에서만 시행되다가 마침내 대부분의 나라들로 확대됩니다.” -티모시 그린 『금의 시대』 저자#]

골드러시의 비극


금을 쫒아 대륙을 넘어온 사람들은 처음에는 강물 속을 헤집고 다녔다. 하지만 값비싼 장비를 갖춘 사람들이 금 채굴꾼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결국 이민자들은 광산노동자로 전락했다. 누구나 빛나는 황금을 안고 금의환향하는 날을 기다렸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을 만져보지도 못한 채 과로로 죽어갔다.

“먼저 인적 측면에서 보자면 골드러시의 부작용은 막대한 인명 손실과 질병이었습니다. 북부 캘리포니아 원주민의 대폭적인 인구감소는 가장 큰 희생이었습니다. 그리고 금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인종 전쟁을 방불케 하는 갈등이 빚어졌습니다. 첫 상대는 원주민이었고 다음은 이전부터 이곳에 살고 있었거나 골드러시 때 이주해 온 멕시코인들이었습니다.” -케네스 엔 오웬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석좌교수


십자군전쟁 이래로 역사상 가장 많은 인구이동을 불러온 골드러시. 무려 600년을 사이에 둔 인구이동이었지만 두 가지 대이동 모두 원인은 같았다. 바로 황금이었다.

11세기의 십자군전쟁과 15세기의 대항해시대, 그리고 19세기의 골드러시. 사람들의 욕망은 언제나 금을 쫒아왔고 그 결과는 늘 피로 물든 역사로 남았다. 금을 향한 욕망은 떨어져 있던 세계를 하나로 연결했다. 서로의 존재도 모른 채 떨어져 살던 사람들을 황금 앞에서 뺏고 빼앗기는 관계로 만나게 했다.

사람을 파멸시키고 제국을 멸망시킨 황금의 위력. 다시 인류의 욕망 한가운데 선 황금. 그 욕망의 지배자는 당신이 될 것인가 아니면 황금이 될 것인가.


※금본위제: 화폐단위의 가치와 금의 일정량의 가치가 등가관계를 유지하는 본위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