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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B하이라이트]

    산의 부활 3부작

    <산의 부활>은 사람과 함께 살아온 우리나라 산의 인문학적 가치를 조명한 최초의 다큐멘터리입니다. 한반도의 70%를 차지하는 산, 우리 산에 깃든 역사와 문화를 조명함으로써 한국 산의 아름다움 이면에 숨겨진 역사적 가치를 살펴봅니다.

    1부 산의 나라, 산의 민족


    한반도 전역 첩첩이 들어찬 우리 산. 너무나 익숙했기에 잘 몰랐던 우리 산의 이야기를 찾아서 산의 나라, 대한민국으로 들어가 봅니다.
    우리 역사의 첫 페이지 그 무대는 산이었습니다. 환웅이 내려온 곳도 태백산이었고, 마지막 단군의 마지막 거처도 산이었습니다.
    고조선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고대국가들이 산에서 출발했습니다. 해모수는 웅심산에, 신라 박혁거세는 양산에, 가야 김수로왕은 구지봉에서, 모두 산에서 출발했습니다.

    “우리가 ‘신이 내려오신다’ 그러잖아요. 신은 높은 데에 있는 거예요. 그럼 어디가 높으냐, 산이 제일 높죠. 그럼 산만 있느냐 산에 있는 한 그루 나무가 제일 높은 거예요. 그래서 그 나무를 타고 하늘에서 신이 내려오시는 거예요. 그러면 그 나무는 신과 인간을 만나게 해 주는 다리 역할을, 중개자 역할을 하는 거죠. 그러면서 동시에 신체가 되는 거거든요.” - 황루시, 민속학자, 관동대 교수 -


    그렇게 산은 하늘과 만나는 신성한 곳이자 민족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시조 단군이 그랬듯 언제고 돌아갈 마음의 고향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애국가 이야기>


    우리 대한민국의 애국가에는 첫 소절과 후렴구 모두 산을 노래합니다. 연이어 2절에서도 ‘남산 위에 저 소나무~’와 같이 산이 나옵니다.

    “애국가라는 것은 사실은 국가의, 한 나라의 민족 정체성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지표라고 할 수 있는데, ‘역시 한국은 산에 대한 생각과 관념이 굉장히 긴밀하게 짙게 나타나는구나’ 이런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국가에 산이 등장하는 사례는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가까운 일본만 해도 일왕에 대한 예찬을 하고 중국도 인민들의 진군에 대한 내용이 있는데, 한국은 이렇게 산의 정체성과 지향성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경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최원석, 한국문화역사지리학회장, 경상대 교수 -


    그렇다면 북한의 국가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애국가라는 이름을 가진 남북한의 국가는 쌍둥이처럼 닮아 있습니다.

    “북한 애국가에도 산이 등장하는데 거기에 산이 포함된 것은 결국 북한도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을 비롯한 신성한 산을 숭상하면서 산의 정기를 받으려 했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


    <교가에 나오는 산 이야기>


    이 땅 한반도에서 우리가 사는 곳은 산기슭 혹은 산과 산 사이입니다. 마을은 언제나 산에 기대어 자리를 잡았고 사람들은 산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며 살았습니다. 그럼 산이 없는 곳에서는 어땠을까요? 한반도에서 지평선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인 김제평야입니다.

    김제의 작은 초등학교를 찾았습니다. 어릴 적 우리가 불렀던 교가에는 어김없이 산이 등장했습니다. 그 정기를 받아 큰 인물이 되라는 뜻이었죠. 그런데 산이 없는 김제의 교가에도 산이 들어갑니다. 교가 가사에 있는 ‘조종산’은 평야 위에 조심스레 솟아오른 작은 언덕입니다. 사실 조종산이란 그 지역에서 신성시되는 크고 영험한 산을 의미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백두산인데요, 김제 사람들한테는 이 작은 조종산이 백두산만큼 중요하게 생각되나 봅니다.

    “조종산은 사실 아주 작은 언덕입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그 산으로 인해서 우리 마을의 정기를 받고 그 정기에서 마을을 유지해 나가는 힘이 나온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 양보경, 대한지리학회 회장, 성신여대 교수 -


    <강릉단오제의 산신제>


    이런 지극한 산 사랑의 전통은 우리의 피를 타고 흘러 쉼 없이 이어져 왔습니다. 한반도의 동과 서를 잇는 관문, 대관령 깊은 골짜기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강릉단오제를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단오는 음력 5월 5일 모내기를 마치고 풍년을 기원하는 우리 민족 4대 명절 중에 하나입니다. 강릉단오제는 단오 전후 한 달간 열리는 축제로 대관령 지역에서 천 년이 넘게 전승되어 왔는데요, 일제 강점기나 한국전쟁 중에도 이어져 지역 사람들의 구심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강릉단오제를 맞아 대관령 산신제가 열립니다.

    “강릉단오제에서는 대관령 산신제를 제일 먼저 지내요. 먼저 산신에게 허락을 받고 ‘이런 걸 합니다’ 하고 고하는 거예요.” - 황루시, 민속학자, 관동대 교수 -


    “강릉 사람들에게는 이 ‘대관령’이라는 지역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동안 강릉 사람들은 한양과 소통하기 위해서 이 대관령을 넘나들었습니다. 그래서 대관령을 지키는 신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대관령 지역은 강릉 사람들에게 물도 나눠 주고 주민들에게 혜택을 주잖아요. 또 한편으로 보면 여기에는 호랑이도 살아서 대단히 무서운 곳이기도 합니다.”
    - 김동찬, 강릉단오제위원회 상임이사 -

    “칠성七星, 즉 하늘이 제일 높고 그 다음이 산이에요. 우리 인간들은 이 기를 받으면 산의 기를 받잖아요. 자손들의 명이 짧으면 산신님 전에 이름도 올리고 산신제를 지내고 산신굿을 하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 빈순애, 강릉단오굿 예능보유자 -


    나라는 생기고 또 사라져도 산천은 그 자리에 있는 법입니다.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나라는 망하나 오직 산천은 그대로 있다. 두보杜甫, 「춘망春望」)

    <산과 함께한 전통문화>


    산이라는 실제 장소를 이상 세계로 탈바꿈시킨 이 산 사랑은 우리 전통문화 안에 다채롭게 녹아 있습니다.

    “ ‘한국의 70%가 산이다’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실은 산지 혹은 산악 국가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그 의미는 단순히 산이 물리적 환경으로 70% 비율을 가지고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문화, 역사, 주거, 생활사, 정신까지도 다 산이라는 프리즘에서 스펙트럼으로 다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문화나 역사나 심지어 우리 마음속에는 더 크게 자리 잡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최원석, 한국문화역사지리학회장, 경상대 교수 -


    우리의 삶은 산을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산이 내어놓은 길을 따라 촌락이 만들어졌고 나라의 수도나 지방 도시, 마을을 막론하고 산에 기대어 자리를 잡았습니다. 민간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그 태를 산에 묻었습니다. 죽은 육신도 산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무덤을 산의 처소라고 해서 산소라고 합니다. 한민족의 삶이란 산의 정기를 타고 태어나서 산에 기대어 살다가 산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아기를 못 낳는 분이 있으면 삼신을 타 온다고 이야기하거든요. 삼신을 가장 많이 타 오는 곳이 어디냐면, 산이에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산을 생각할 때 그냥 단순한 산이 아니라 산에 생명의 근원이 있다고 생각을 한 거라고 볼 수 있죠.”
    - 황루시, 민속학자, 관동대 교수 -


    <풍수의 핵심, 산>


    생명의 기운이 있는 산. 사람들은 산의 좋은 기운이 머무는 곳에 살면 좋은 일이 찾아오리라 믿었습니다. 풍수의 탄생입니다. 명당은 산수의 형세와 방위 등을 종합해 보았을 때 땅의 생기가 모이는 곳입니다. 풍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장풍득수, 바람을 막고 물을 얻는 것입니다. 바람을 막는 것도 산이요, 물의 근원도 산이기에 풍수의 핵심은 산이었습니다.

    산의 모양과 배치를 기준으로 도읍과 궁궐터를 정하고 집터와 묏자리를 정했습니다. 산은 사람들의 삶에서 중요한 지표였습니다.

    “중국의 경우에는 풍수가 일반인이 접근할 수 있는 학문이 아니었습니다. 풍수는 황제만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에 ‘황제학’이라고 얘기를 했었습니다.” - 박정해, 풍수학자, 한양대 교수 -

    “한국처럼 풍수적 실천과 활용이 전 계층으로, 전국적으로 된 데가 없어요. 그러니까 왕부터 서민까지 조선 후기에 와서는 아주 일반화돼서 다 인식을 하고 있거든요.”
    - 최원석, 한국문화역사지리학회장, 경상대 교수 -


    <산의 맥을 끊은 일본의 만행1>


    지천이 산인데다 산이 있는 곳엔 응당 물이 있기 마련이니 풍수는 중국보다 우리나라에서 더욱 꽃을 피웠습니다. 산도, 물도 풍부하니 명당도 많았습니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고 명당 중에 하나로 꼽히는 봉화 달실마을입니다. 산이 마을 뒤편을 포근히 감싸고 앞으론 물이 휘감아 도니 배산임수로 절경입니다. 달실마을은 안동 권씨 집성촌입니다. 500여 년 전 충재冲齋 권벌權橃(1478~1548년)이 자리를 잡은 후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오면서 70여 명의 과거 급제자가 배출되었습니다.

    “이중환의 『택리지』라는 책에 보면 질병이나 전쟁을 피해 갈 수 있는 네 곳 중에 한 곳(영남 4대 길지)이라고 정해 놓았습니다. 근데 실제로 보면 예전에는 전쟁이 다 피해 갔어요. 그래서 저희 집안의 유물 중에는 임진왜란 이전의 문서가 굉장히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또 옛날에는 역병이 돌면 오래된 책들을 많이 태웠어요. 예전 문서가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은 그만큼 병이 안 들었다는 의미도 있고요. 여기 산을 보면 마치 센 바람을 막아 주는 포근한 이불의 역할. 그다음에 닭의 날개, 알을 품었을 때 닭의 날개 형상을 취하고 있습니다.”
    - 권용철, 충재 권벌 19대 종손 -

    “금계, 닭은 벼슬이 있죠. 그건 (닭) 벼슬이지만 나라 벼슬과 같은 거로 봅니다. 그러면 여기에 살면 나중에 ‘큰 국가의 관리가 될 것이다’라는 의미가 하나 있고, 닭은 알을 많이 낳습니다. 그러면 다산을 상징하죠.”
    - 김두규, 풍수학자, 우석대 교수 -


    하지만 웬일인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풍수가 훼손되었다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달실마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요.

    “닭과 가장 상극인 동물이 지네입니다. 지네가 마디마디 이어 가잖아요. 기차도 마디마디 이어 가잖아요. 그래서 일본 사람들이 이 동네를 망하게 하려고 닭 목에다가 기차 굴을 뚫어 버렸어요. 사람도 목을 수술해 버리면, 목을 잘라 버리면 완전히 즉사할 것 아닙니까.”
    - 권율, 봉화군 문화관광해설사 -


    일제가 이쪽으로 기찻길을 낸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고 합니다. 마을 닭산의 목을 자르기 위해 그랬다는 겁니다.

    “구한말에 경상북도 북부 지역 11개 시, 군 초대 의병 대장이 이 동네 출신입니다. 권 세 자 연 자, 저한텐 증조할아버지가 돼요. 그리고 그 어른 생질(조카)은 상해 김구 선생 임시정부 시절 때 초대 국무령 안동 석주 이상룡 선생입니다. 이러니까 자연적으로 이 동네에서 독립유공자가 12분이 나왔어요.” - 권율, 봉화군 문화관광해설사 -


    독립운동의 기운을 꺾기 위해 산의 맥을 끊었다는 건데요 그런데 기찻길이 놓이고부터 실제로 이 마을 출신 공직자가 뚝 끊어졌다고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참 억울함을 당했어요. 그리고 해방 이후에 과거 급제가 막 쏟아지던 마을이었는데 딱 부장판사 한 사람이 나왔어요. 그래서 기찻길을 돌려 달라고 한때는 우리가 시위도 하고 그랬어요.” - 권율, 봉화군 문화관광해설사 -


    <산의 맥을 끊은 일본의 만행2>


    낙남 정맥 끝자락에 솟아 있는 구지봉은 김해 김씨의 시조 김수로왕이 내려온 곳입니다. 서기 42년 사람들이 이 언덕에서 구지가를 부르며 하늘에서 내려온 수로왕을 맞이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가야는 멸망했지만 구지봉은 신성한 공간으로 여겨졌습니다. 구지봉은 거북이의 머리요 수로왕릉이 있는 곳은 몸통입니다. 구지봉 옆에는 ‘순지’라고 하는 연못이 있는데요, 거북이가 물을 마시러 들어가는 형국이라 길지 중에 길지라 합니다. 그 덕분일까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성씨가 김해 김씨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구지봉은 위에서 보면 이어져 있지만 그 아래로 차가 하루에도 수천 번 관통하며 지나가고 있습니다. 거북의 목이 터널이 된 겁니다.

    “일제가 우리 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해서 구지봉 목을 쳐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죠.”
    - 송원영, 김해시 문화재과 학예연구사 -


    신작로를 낸다는 명분으로 거북의 목이 잘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지맥이 끊어져서 큰 인물이 나지 않는다는 얘기가 돌았습니다. 사람들은 그 영향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너무도 소중히 여겨 왔던 산이기에 맥이 잘렸을 때의 충격과 두려움은 더욱 컸을지도 모릅니다.

    <실록에 기록된 산>


    산을 잘 지켜야 복이 온다는 믿음은 임금님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조선의 임금들은 산지 관리에 힘썼습니다.

    백악산 단에 제사를 지내다. - 테조실록 8권 -
    남산을 목멱대왕에 봉한다. - 태조실록 11권 -
    백악의 성황신에게 녹봉을 주었다. - 태조실록 11권 -
    백악산의 돌은 채취하지 마라. - 세종실록 51권 -
    삼각산 내맥과 승문원 산맥의 형세를 보다. - 세종실록 61권 -
    백악에서 큰 돌이 떨어졌다. - 연산군일기 29권 -
    다섯 명산에 지성으로 기도를 아뢰다.
    - 고종실록 21권 -
    “한양 도성은 백악이라는 주산이 있고 또 조산인 북한산이 있고 그 조산이 백두산에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능선과 연결된다고 보아 거기를 보호해야 된다고 생각했던 거거든요. 결국은 산이 이 땅을 지켜 주고 한성 수도를 지켜 주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 양보경, 대한지리학회 회장, 성신여대 교수 -

    “백두대간은 우리나라 국토의 척추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가장 귀하게 여겼죠. 백두산의 모든 산의 기운이 산 능선을 타고 전달되기 때문에 그 통로 백두대간에 상처가 나면 안 된다고 생각을 했던 것이죠.” - 박정해, 풍수학자, 한양대 교수 -


    <나쁜 풍수를 이겨낸 비보裨補 문화>


    무릇 좋은 풍수가 있다면 나쁜 풍수도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풍수적으로 좋지 않은 땅이 있을 때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우리 선조는 좋은 풍수를 만들어 내는 편을 선택했습니다. 자연 지형의 단점을 보완하고 더 좋은 땅을 만들기 위해 고려 초 도선국사가 제시한 비보풍수입니다. 비보는 어떤 지형이나 산세가 풍수적으로 부족하면 이를 보완한다는 뜻입니다.

    ‘조산造山’은 비보의 대표적인 예인데요. 조산은 ‘산을 만든다’는 뜻으로 주로 풍수적 지세를 보완하기 위해 만들었으며, 전국적으로 수천 개가 만들어졌습니다. 풍수적으로 산이 필요한 지형에 숲을 조성하거나 마을 앞에 크게 자라는 당산나무를 심어 산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양양 조산리는 산이 필요해서 산을 만든 대표적인 마을입니다.

    “우리 마을에서는 설악산에서 바다까지 그 맥이 이어져야지만 잘 산다, 또 인물이 난다고 고려 시대 고승이 그렇게 얘기를 해서 조산을 했습니다. 폭이 한 500m, 길이가 약 2km 되는 송림이란 말이에요. 나무가 서 있다는 것은 하나의 산으로 상징하는데 인재가 많이 나게 하려고 송림을 애지중지 기르는 거니까 소나무에 대한 애착이 워낙 많았죠. 여기 사는 주민들은 공동체로서 이것을 외부 사람들이 아무도 베어 가지 못하게 애를 써 가면서 가꿔 왔어요.” - 최용회, 강원도 양양군 -


    실제 산을 만들거나 나무를 심는 게 여의치 않을 때는 돌탑을 만들거나 돌기둥을 세워서 산처럼 여겼습니다. 평야에서는 지명에 산을 넣어서 실제 산을 대신하기도 했습니다.

    “비보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정신 사상적인, 물질적인, 문화적인 비보가 있을 수 있는데 그중에는 ‘민속놀이’라는 비보 형태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또 실제로 그런 형태의 비보 사례가 많이 있습니다.” - 최원석, 한국문화역사지리학회장, 경상대 교수 -

    “비보 문화는 좋지 않은 조건을 가진 땅이라 할지라도 그곳에 나무를 심거나 돌탑을 세우거나 해서 그 땅을 더 활용할 수 있게 하고 그곳을 복 받는 땅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 우리 선조들의 아주 진실한 마음이었습니다.” - 신정일, 문화사학자 -


    2부 산의 죽음과 비극


    <일제가 파견한 지리학자 고토 분지로의 산맥 이론>


    20세기 초 한반도는 그야말로 풍전등화, 대한제국의 국운은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로웠습니다. 나라가 밑뿌리째 흔들리던 그때 어떤 것도 일제의 손아귀를 피해 갈 수 없었습니다. 수천 년 쌓아 온 전통 지식은 비과학이라는 오명을 쓰고 버려졌습니다. 우리 산에 관한 연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산지는 종래 그 구조의 검사가 정확치 못하여 산맥의 논論이 태반 오차를 면치 못하고 있으므로 이 책은 일본의 전문 대가인 야쓰 쇼에이의 지리를 채용하여 산맥을 개정하노라
    - 고등소학대한지지(1908) 서문 중 -


    당시 지리 교과서 고등소학대한지지 서문에서 야쓰 쇼에이의 ‘지리를 채용한다’는 것은 그의 스승 고토 분지로가 제시한 ‘산맥 이론’이었습니다.

    “고토 분지로를 위시한 일본인 학자들이 우리나라 지리 인식 체계를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태백산맥, 소백산맥, 노령산맥, 차령산맥과 같은 산맥 개념들이거든요.” - 조석필, 「태백산맥은 없다」 저자 -


    우리 산의 대명사로 여겨지던 태백산맥은 일본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가 붙인 이름이었습니다. 그는 14개월간 6000㎞를 오가며 한반도의 지질을 면밀히 조사했습니다. 그는 왜 우리 땅을 알려고 했을까요.

    “일제가 1876년 강화도수호조약 이후에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작업은 조선의 지리, 지형에 대한 파악이었습니다. 그래서 비밀 장교들을 파견해서 당시 조선의 지도를 그리는 것에 굉장히 심혈을 기울였고 뿐만 아니라 땅속의 지질적인 측면에도 관심을 가졌고요. 그렇게 해야 그 속에 어떤 광물자원이 있는지 지하자원이 있는지를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양보경, 대한지리학회 회장, 성신여대 교수 -


    고토 분지로. 그는 일제가 파견한 지리학자였습니다. 산의 지도, 광물자원의 분포도 등 그의 연구물들은 고스란히 일제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목적은 국권을 빼앗고 자원을 수탈하는 것. 이 땅에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를 면밀히 알아내서 더 잘 이용하기 위한 연구였습니다.

    그는 지도를 연구하여 산맥 체계를 만들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태백산맥, 차령산맥, 노령산맥과 같은 이름들은 100여 년 전 고토 분지로가 지은 이름들입니다.

    중생대 말에서 신생대 말에 융기한 편마암, 화강암 산지는 태백산맥, 신생대에 융기한 편마암 산지는 소백산맥이라 불리게 된 것입니다. 지질 기준을 연결한 산맥은 실제 지형과 크게 달랐습니다. 지질이 형성되고 수만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이미 땅의 형세가 변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땅이 있는데 땅속에 전화선이 묻혀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경계를 느낍니까? 못 느끼거든요. 담장이 있어야지 우리가 경계를 느끼는 겁니다. 일제 강점기에 도입된 산맥 개념은 땅속의 지질구조를 바탕으로 해서 그려졌거든요. 실제와는 맞지 않죠.” - 조석필, 「태백산맥은 없다」 저자 -


    서구 지리학을 토대로 했지만 그 안에는 민족의 정신을 꺾으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습니다. 산맥 체계하에서 백두산은 낭림산맥의 변두리로 전락했고, 신성시되던 산들도 무참히 깎여 나갔습니다. 이 같은 일제의 만행에 분노하고 행동에 나선 사람은 소년 최남선이었습니다. 최남선은 우리나라를 유약한 토끼에 비유한 고토 분지로의 토끼 그림에 반박해 포효하는 호랑이 형상의 한반도를 그렸습니다. 그는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나라를 지켜 내기 위해선 민족의 정신을 일깨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출판이었습니다.

    <민족의식 고양을 위해 노력했던 최남선의 『산경표』 재간행>


    “‘조선광문회’라는 것을 조직했는데 그때 최남선의 나이가 10대였어요. 10대 청년이었죠. 스무 살이 채 되기 전의 나이였습니다.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이 한국의 중요한 고적들을 새로 찍고 필사본으로 돌아다니는 것들을 활자로 만들어 내는 일이었습니다. 민족의식을 고양할 수 있는 책들이 가장 먼저 간행의 대상이 됐습니다. 『산경표』도 그 일환이었습니다.” - 서영채,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교수 -


    18세기 지리서 『산경표』는 한반도의 산줄기 체계를 족보 형태로 정리한 책으로 1913년에 다시 발간되어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이 『산경표』는 우리나라의 산줄기가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나는지를 기록한 표입니다. 산경표가 말하는 우리 산의 출발점은 백두산입니다.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이르는 거대한 기둥 줄기를 이름하여 백두대간이라 불렀습니다. 여기서 가지가 뻗어 나와 한 개의 정간, 13개의 정맥으로 나뉘고 정맥에서 잔가지가 나와 지맥이 되어 전국으로 뻗어 갑니다.

    백두대간은 한반도에 흐르는 모든 물줄기를 동과 서로 나누고 정맥은 지역의 물줄기를 나눕니다. 정맥과 정맥 사이 골짜기로 하나의 권역이 만들어지고 그 곳에 물줄기가 흐릅니다. 이 때문에 정맥의 이름은 강을 중심으로 붙여졌습니다. 가령 한강 북쪽 산줄기가 한북정맥이라면 남쪽 산줄기는 한남정맥이 되는 것입니다. 『산경표』는 산과 물, 사람의 유기적 관계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전통 지리 인식 체계 중에 가장 중요한 측면은 자연을 생명체로 보는 인식입니다. 백두산이 머리가 되고 백두대간이 등뼈가 되고 정간과 정맥은 골격, 뼈가 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천이 혈맥과 같고요. 평야가 근육 그리고 심지어 산에 있는 나무는 인체의 털과 같다는 표현이 김정호 선생의 글에서도 보입니다. 자연을 사람과 거의 동일시되는, 사람과 함께하는 그런 생명체로서 인식했던 것입니다.” - 양보경, 대한지리학회 회장, 성신여대 교수 -


    <『산경표』와 『대동여지도』에 정립된 우리 전통 지리 인식>


    그래서 『산경표』는 산들의 위계를 족보처럼 표현을 했습니다. 백두산이 시조 할아버지라면 지리산은 123세손, 맨 마지막 광양의 백운산은 171세손입니다. 우리나라의 산들은 모두 백두산의 자손인 셈이죠.
    놀라운 것은 『산경표』에 표현된 산줄기 체계를 그림으로 옮기면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인데요.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산봉우리는 모두 3천여 개. 특히 모든 산줄기의 시작점인 백두산은 유난히 크고 웅장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또 그로부터 뻗어 내린 백두대간은 다른 산줄기에 비해 굵고 힘 있게 그려져 있습니다.

    『산경표』와 『대동여지도』에 정립된 우리 전통 지리 인식인 백두대간. 그것은 걸출한 몇 사람이 이룩한 성과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 쌓아 온 지리 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립한 이론이었습니다.

    “백두대간은 우리가 사는 모든 생활과 인문 지리를 제대로 반영하는 산줄기입니다. 우리가 산줄기의 구획된 경계 안에서 동일한 언어를 쓸 수도 있고, 풍습도 있을 수 있고, 집 구조도 있을 수 있고, 기후도 있을 수 있거든요. 고구려 백제 신라의 국경선이 왜 그렇게 됐는지를 이해하는 것. 이런 것들이 전부 백두대간을 경계로 해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 조석필, 「태백산맥은 없다」 저자 -


    <산맥 이론으로 왜곡된 백두대간>


    산과 함께한 우리 민족의 역사가 반영된 백두대간. 최남선은 『산경표』를 재발간함으로써 백두대간을 재조명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민족의식의 회복으로 이어지리라 믿었죠. 하지만 시간이 가며 그 믿음은 흐려져 갔고, 최남선 자신조차 변절의 길을 걷고 맙니다.

    그 결과 고토 분지로의 산맥 이론이 우리 지리 체계의 정설로 자리 잡았고 그렇게 우리 산줄기의 이름 백두대간을 잃어버렸습니다. 70여 년간 백두대간은 역사 속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습니다.

    <일제의 국토 유린, 산림 수탈>


    그 무렵 우리 산에는 또 하나의 거대한 재앙이 닥칩니다.

    “일제는 자원 조사라는 명목하에 전국의 산림자원을 조사했어요. 그래서 가장 목재가 많은 압록강 두만강 변 잣나무 원시림을 마구 벌채해서 뗏목의 형태로 끄집어내서 일본 관동군의 만주 건설에 썼습니다.” - 이경준, 서울대 수목진단센터 교수 -


    일제는 기다렸다는 듯이 전국 산지를 헤집었습니다. 산림 철도를 만들어 아름드리 나무를 베어 가져갔습니다. 금수강산이란 말이 무색하게 우리 산림은 급속도로 파괴됐습니다.

    “지금처럼 나무를 심고 육성해서 벌채를 하게 되면 이렇게까지 큰 수입을 얻을 수 없었겠죠. 그 당시에는 압록강 두만강 지역의 우량한 천연림을 벌채만 하면 소득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연간 64%의 흑자를 내면서 조선총독부의 재정을 확보하는 데에 우리나라 북부 지역의 숲이 희생되었던 것입니다.” - 배재수, 국립산림과학원 임업연구관 -


    일제 강점기 35년간 빼앗긴 산림자원은 5억㎥, 현재 경제 가치로 50조 원이 넘습니다. 나무를 베기만 하고 심지 않았던 조선총독부의 무책임한 벌목으로 우리 산림은 빠르게 황폐화되었습니다. 한양의 주산으로 소중히 지켜지던 백악산마저 벌겋게 속살을 드러냈습니다.

    “산이 황폐하면 홍수, 가뭄, 논밭의 매몰, 물 부족, 식량 부족 등으로 인간이 궁핍해지고 이로 인해서 민족문화가 말살될 정도에 이르기 때문에 산이 살아야 사람이 사는 것입니다.”
    - 이경준, 서울대 수목진단센터 교수 -


    3부 산의 부활을 위하여


    <우리 선조의 산행 문화>


    우리 민족에게는 확고하고 오랜 전통 산행 문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갖은 수난을 겪으며 상당 부분이 단절됐고 기록 또한 소실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가 우리 역사에 남긴 가장 큰 문제점 또는 영향은 전통의 단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산지에 대한 인식은 산의 품속에 들어가는 것이었거든요. 그래서 등산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고 가장 많이 썼던 용어는 입산入山입니다. ‘산에 들어간다’라는 표현을 우리 선조들은 썼습니다.” - 양보경, 대한지리학회 회장, 성신여대 교수 -


    우리 선조에게 산행이란 하늘의 신을, 또 산에 묻힌 조상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남명 조식과 산천재>


    조선의 선비들에게도 산은 특별한 공간이었습니다. 선비들은 저마다 산에서 보낸 시간을 글로 남겼습니다. 그들의 유산기는 발견된 것만 600여 편입니다. 조선의 선비들은 산에서 무엇을 얻으려 했을까요.

    지리산 입구 덕산마을에 있는 산천재는 남명 조식이 머물던 곳입니다. 71세로 생을 마치기까지 10년간 여기서 후학을 길렀습니다. 이곳에서 당대의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탄생했습니다.

    남명은 지리산을 사랑했습니다.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도 지리산 천왕봉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매일같이 천왕봉을 보며 천왕봉을 담고 천왕봉처럼 살려 했습니다.

    「제덕산계정주題德山溪亭柱」 덕산 개울의 정자 기둥에 적다
    “천 석 무게의 종을 한번 보게나. 크게 두드리지 않으면 소리도 나지 않으리. 그러나 어찌 두류산(지리산)만 하겠는가. 하늘이 울려도 소리나지 않으리.” - 남명 조식 -


    하늘이 울려도 소리내지 않고 장대하게 우뚝 서 있는 천왕봉처럼 남명은 선비의 기개를 지키고자 했습니다.

    “남명과 지리산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습니다. 남명은 거의 지리산에서 살다시피 하죠. ‘지리산은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 산이다’ ‘어머니와 같은 산’이라고 했습니다. 남명은 처사로 살며 평생 벼슬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 지리산에 있으면서 변함없이 살아왔던 올바른 길을 지켜 가고, 선인들의 좋은 말씀과 행적을 잘 배우고 쌓아서 올바른 선비로 살기를 원했습니다.”
    - 나종면, 산동사범대 교수 -


    천왕봉의 굳건함을 닮은 남명의 정신은 후학에게 이어졌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홍의장군 곽재우를 비롯한 3대 의병은 모두 남명의 문인이었습니다. 경상도에서 유난히 의병 활동이 활발했던 것은 남명의 영향이었습니다.

    <조선 선비들의 산의 의미>


    남명을 비롯한 조선의 선비들에게 산이란 단순한 지형지물이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부모였고, 스승이었으며 삶의 철학을 정립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끝내 돌아갈 마지막 안식처였습니다. 이들은 산 정상에 오르기보다는 산의 품속에 들어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사상을 정립했습니다.

    선인들의 산행이 우리에게 전하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산을 정복의 대상이나 건강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뿌리이자 스승으로 여겼던 그들. 전통 산행의 태도와 가치관을 되살리는 것은 우리 산행 문화 발전을 위한 훌륭한 양분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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