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열전 | 테미스토클레스와 살라미스 해전

[역사인물탐구]

살라미스Salamis 해전은 칼레 해전(1588년 영국 대對 스페인 무적함대), 트라팔가르 해전(1805년 영국 넬슨 대對 나폴레옹의 프랑스 연합군), 한산도 해전(1592년 이순신의 조선 수군 대對 일본 수군)과 더불어 세계 4대 해전으로 알려져 있다.

살라미스 해전 이전까지 전체 전투를 해전에서 결정지은 적은 없었다. 절대적인 병력의 열세와 결정적인 전함의 우수함 없이 그리스 해군이 페르시아 해군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라는 뛰어난 전략가와 그의 뜻대로 배를 자유자재로 움직여 준 이름 없는 미천한 노잡이들 때문이었다. 이 글은 바로 그들의 이야기이다.



그리스의 구원자, 테미스토클레스


테미스토클레스는 BCE 524년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네오클레스로 아테네 하층 귀족 가문 출신이고, 어머니는 트라키아 출신이었다. 그는 서민 지구에서 민사 변호사로 활약하면서 중하층민의 민심부터 사로잡은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다.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평판을 잘 활용할 줄 아는 영리한 인물로 현재의 변화를 보고 미래를 예측할 줄 알았다. 그는 활달한 정치적 지도자로 사교적이고 열정적이고 성급한 기질의 소유자였으며 날카로운 판단력과 대단한 포부를 지녔다고 한다. 성공하기 위해 뇌물을 주고, 거짓말도 하고 속임수를 쓰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져 교양이 부족하다는 비난도 있다.

1차 페르시아 전쟁, 마라톤 전투



BCE 490년 초 여름쯤 페르시아의 대군을 실은 600척의 함선이 그리스를 침공하였다. 페르시아군은 아테네에서 약 40킬로미터 떨어진 마라톤 평원에 상륙하였다. 아테네에서 마라톤까지는 도보로 8시간 정도 거리였다.

밀티아데스의 ‘학익진鶴翼陣’ 전법
그리스군 사령관 밀티아데스는 대치한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최선의 승리를 얻을 전술을 생각해 냈다. 즉 중앙을 8열에서 4열로 얇게 배치하고 진형을 길게 배치하였다. 전열의 양쪽 날개는 두텁게 하면서 대열의 전방과 후미에 가장 강한 부대를 배치하였다. 중앙이 버티고 있는 사이 좌우익에서 적을 포위 섬멸하는 양익 포위 전술, 이른바 ‘학익진’ 전법을 구사하였다. 이는 고대 명장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모두 구사했던 전법으로 그들은 모두 기병을 활용했다. 단지 밀티아데스는 보병으로 그 작전을 수행한 점이 다를 뿐이다. 밀티아데스는 페르시아군 활의 사정거리를 측정해 200미터가 한계임을 간파했다. 그래서 사정거리 밖에서는 무리하지 않게 빠른 걸음으로 전진하다가 사정거리에 들어서는 순간 전력 질주하여 방패를 머리 위로 올려 화살을 막으며 적과의 거리를 좁혀 나갔다. 그렇게 근접해서는 두 배가량 긴 칼과 창으로 페르시아군을 공격하였다.

고대 올림픽 경기로 단련된 아테네 병사들
올림피아에서 개최된 고대 올림픽 종목 가운데 중무장을 하고 경기장을 몇 바퀴 도는 경기가 있었다. 아테네군은 바로 이 경기를 마라톤 전투에서 병사들에게 요구했다. 올림픽에 참가하려면 반드시 10개월 동안 훈련을 거쳐야 하고, 올림피아에서 30일 동안 훈련을 해야 할 정도로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단련해 왔었다. 이렇게 단련된 병사들이 바로 아테네군이었던 것이다.

승리의 관건, 중앙을 지켜라!
이런 밀티아데스의 작전이 성공하려면 중앙에서 적은 병력으로 적의 집중 공격을 버텨 주어야 했다. 버티는 가운데 조금씩 후퇴하면서 양옆의 아테네 주력군이 포위 섬멸하게 해 주는 데에 집중했다. 만약 중앙이 뚫리면 이 모든 작전은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이다. 매우 중요한 임무를 밀티아데스는 40세인 아리스티데스와 34세인 테미스토클레스에게 맡겼고, 훗날 아테네 정계의 맞수가 되는 이 둘은 그 임무와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백병전에서 그리스 중장보병을 당해 낼 군대는 없었다. 정신력에서도 페르시아군은 속주에서 강제로 징집된 병사들인 반면, 아테네 병사들은 조국과 가족 그리고 자유를 위해 나온 시민이었다. 적에게 고향과 가족의 생명을 내주느니 이곳에서 죽음을 택하겠다는 강인한 의지로 전투에 임했다. 마라톤 전투는 밀티아데스가 생각한 그대로 시작되었고, 그대로 진행되었으며, 그렇게 끝이 났다.

마라톤 전투의 의의
마라톤 평원에서 벌어진 전투는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아테네는 그리스 도시국가 중 최강국으로 부상했다. 천하무적 페르시아군이 패배할 수 있다는 점이 처음으로 증명되었고, 제국 곳곳에서 반란이 이어졌다. 이를 진압하고 재정비하는 데 페르시아는 10년의 시간을 허비해야만 했다.

혜안으로 향후 승리를 준비하다
마라톤 전투 승리의 주역이기도 한 테미스토클레스는 승리에 도취하지 않았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이제까지는 전초전에 불과하며 더 큰 전쟁이 닥치리라 예상했다. 그래서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대비책을 고심한 끝에 페르시아군이 상륙하기 전에 바다에서 싸우는 전략을 생각했다. 그는 국유 광산인 라우리온에서 때마침 발견된 은광을 통해 나오는 막대한 수익을 군선 건조에 집중하는 방식을 택했다. 여러 방해 세력들을 설득하고 이겨 낸 끝에 결국에는 200척의 군선과 4만 명에 달하는 노잡이를 보유하고 피레에프스 항구에 요새를 건설하는 데 성공했다.

2차 페르시아 전쟁, 살라미스 해전


아테네 함락되다
BCE 480년, 페르시아 제국의 왕 크세르크세스가 친히 이끄는 페르시아의 대군은 다시 그리스 원정에 나섰다. 페르시아 해군은 폭풍과 그리스 해군의 저항으로 고전한 반면, 페르시아 육군은 영화 ‘300’의 배경이 된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스파르타를 위시한 그리스 연합군을 궤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아르테미시온에서 페르시아 해군과 일진일퇴를 벌인 테미스토클레스는 전투의 결과를 보고받았다. 테르모필레를 돌파한 페르시아 군대의 남하를 막을 방법은 없었다. 이제 승부는 바다 위에서 내야 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그리스 연합해군을 살라미스Salamis만灣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육지에서 맞서 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아 아테네 시내에 사는 사람들을 강제적으로 이동시켜 시내를 텅 비게 만들었다.

불타는 아테네를 보며 친 배수진
아테네에 무혈 입성한 크세르크세스는 아테네 수호신인 아테나 신전을 비롯한 모든 신전에 불을 지르라고 명령했다. 아크로폴리스 언덕 전체가 불타오르는 모습을 아테네 시민들은 배 갑판 위에서 지켜보았다. 이제 배수진뿐이다. 아군까지 궁지에 몰아넣은 테미스토클레스는 더 강수를 두었다. 전투를 앞두고 갑론을박하며 서로 분열되어 있던 그리스 연합수군을 역사적인 해전으로 끌어들였다. 그리스가 겁을 먹고 도망가니 가는 길을 막기만 하면 페르시아가 승리할 거라고 정보를 흘린 것이다. 탁상공론만 하던 그리스 연합군 수뇌부 앞에 페르시아 해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를 찌르는 전략으로 맞서다
결전을 앞두고 테미스토클레스는 모든 지휘권을 하나로 하여 일사불란하게 명령을 내렸다. 우선 코린토스의 배 40척을 만 서쪽으로 돌려 그곳에서 배후를 습격하려는 이집트 배 100척과 대결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그러면서 그리스 함대를 우익과 좌익으로 나누었고 최정예 부대인 아테네 해군을 좌익에 배치하였다. 그는 자신이 지휘하는 배 200척으로 페르시아 해군의 주력 부대인 좌익 페니키아 배 300척을 포위하고 섬멸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아테네 해군은 가장 복잡하고 대담하게 움직여야 했다. 자신의 주력으로 적의 주력을 궤멸시키는 이 작전은 전투를 지켜볼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에게 큰 충격을 주게 될 것이었다. 그와 함께 정적政敵인 아리스티데스에게 살라미스 섬과 아테네 본토 사이에 있는 프시탈리아 섬을 점령하게 하였다. 페르시아 해군의 좌익과 우익이 이 섬 양쪽으로 갈라져 좁은 살라미스만 내로 들어와야 했기 때문이었다.

서양의 명량 해전, 살라미스 해전
개전
마침내 BCE 480년 9월 23일 아침 해를 오른쪽으로 등진 채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페르시아 해군 800척이 북상하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프시탈리아 섬에서 우익과 좌익으로 나뉘었다. 페르시아 해군은 프시탈리아를 통과할 무렵에 전투가 시작되리라 예상했었다. 하지만 그리스 해군 우익이 섬 앞에서 방향을 바꿔 살라미스만 안쪽으로 향했다. 페르시아 해군 우익은 그리스 함대가 도망친다고 생각해 그 뒤를 쫓았다. 그리스 해군 좌익도 앞선 우익처럼 살라미스만 안으로 유인했지만, 이후 우익은 크게 선회하여 살라미스만 안으로 유인한 적을 포위하였다.

충각 전법으로 페르시아 배를 격멸시키다
빠르게 선회하는 아테네 배는 움직일 수 없는 적선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가면서 배 자체의 무게를 활용해 계속 격돌을 시도하였다. 많은 수의 배가 좁은 해협으로 들어오면서 페니키아 배는 아군 배와 부딪혀 침몰하는 경우가 많았고, 해협을 가득 메운 목선의 파편들로 페르시아 해군의 추가 진입이 불가능했다. 충각 전법 후 백병전에서는 그리스 중장 보병들이 대활약을 펼쳤다.

살라미스 해전의 결과
그리스 해군의 완승이었다. 페르시아 쪽은 침몰하거나 불에 탄 배의 수가 300에서 400척인데 반해 그리스 쪽은 침몰하거나 심한 손상을 입고 아군 배에 끌려 귀향한 배의 수가 40척이었다. 그리스 쪽 사령관은 전원 무사한데 반해 페르시아 쪽은 총사령관인 왕의 동생이 전사하였다.

이후 페르시아군은 퇴각하였고, 이듬해 벌어진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그리스는 승리하였다. 그 주역인 아테네는 그리스 제일의 해군 국가가 되었고, 해외 무역과 식민 도시를 개척하는 등 번영을 구가하였다. 그 바탕에는 바로 지략가 테미스토클레스와 무명의 노잡이들이 바친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테미스토클레스의 죽음
테미스토클레스는 BCE 459년 6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는데, 이에는 많은 이야기가 전한다. 병으로 죽었다고 전하지만 투키디데스는 그가 자살했다고 한다.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침략하려 할 때 그를 지휘관으로 임명하려고 하자, 조국에 대한 충성심과 자신을 받아 주고 벼슬을 준 페르시아 왕에 대한 보은 사이에서 갈등하며 독약을 마셨다는 것이다. 이는 테미스토클레스가 살라미스 해전 이후 스파르타에 맞서는 정책을 펼치다가 점차 세력을 잃어 도편 추방을 당하였는데, 추방 중 페르시아와 내통하고 있다는 모함으로 사형 선고를 받자 소아시아로 탈출해 페르시아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밑에서 벼슬을 하며 여생을 보냈기 때문에 나온 얘기다.

비록 인생의 말년이 영예롭지는 않았지만, 테미스토클레스는 조국을 위기에서 구하고 아테네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게 한 뛰어난 지도자로 영원히 기억될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정리 – 이해영 객원기자)



최초의 동서양 대전, 페르시아 전쟁
페르시아 제국의 발흥
페르시아Persia는 키루스 대왕이 BCE 539년 바빌로니아를 정복하면서 짧은 시간에 발흥한 나라로, 현재의 이란 지역을 근거지로 하여 중동과 터키를 비롯하여 북아프리카 지역과 인더스 유역까지 그 세력을 떨친 대제국이었다. 전성기에는 중앙아시아와 발칸 반도 일대까지 영유하였다. 쿠데타로 왕위에 오른 다리우스 1세(재위 BC 522~BC 486)는 제국의 수도를 페르세폴리스로 정하였고 다민족 국가인 페르시아를 관료제와 역참제를 통해 통치하였다. 종교적으로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되 이교도에게 개종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페르시아 전쟁 발발 원인
다리우스 1세는 서쪽으로 눈을 돌려 수사에서 사르디스까지 ‘왕의 길’이라는 도로를 개통하였다. BCE 499년 고대 그리스의 문화와 문명이 발생한 이오니아의 참주僭主(tyrant)인 아리스타고라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아테네는 지원군을 보내 페르시아의 사령부인 사르디스를 불태우고 성소聖所를 파괴했다. 이에 극도로 분노한 다리우스 1세는 반란을 진압하고 그리스의 여러 도시 국가에게 항복을 권유하였다. 바로 ‘흙과 물’을 요구한 것이다. 아테네 등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자, 그는 아테네를 응징하고 더 나아가 그리스 본토를 장악할 야심으로 침공을 결정하였다.

20여 년 전쟁의 개막
BCE 492년 있었던 페르시아의 침입은 바다와 육지에서 동시에 나아가는 수륙병진책이었다. 하지만 원정군은 아토스 곶에서 심한 폭풍을 만나 함선이 파괴되는 바람에 회항하고 말았다. 정작 당사자인 그리스는 그 상황을 몰랐기에 이를 페르시아 침공에서 제외하는 시각도 있다. BCE 490년 페르시아의 1차 침공이 시작되어 장장 20여 년에 걸친 페르시아 전쟁이 개막되었다. 거대한 면처럼 단단한 집합체인 페르시아 제국과 느슨한 점들로 연결된 허술한 집합체인 그리스 제국諸國 간의 대결이 시작된 것이다.

아테네 필승 아이템, 중장보병의 팔랑크스 대형
완전 무장한 아테네의 중장보병을 ‘호플리테스’라고 한다. 중장보병이 8열로 서서 오른손에 창을 왼손에 방패를 들고 왼팔 팔꿈치로 옆 병사의 자세를 받쳐 줌과 동시에 방패로 함께 보호하며 방어력이 탁월한 밀집 대형을 갖추니 이른바 ‘팔랑크스’ 대형이었다. 팔랑크스는 철옹성과 같아서 어떤 군대도 격파하기 힘들다. 서로의 몸을 밀착시킴으로써 강한 연대감 속에 적을 향해 오직 전진만 할 뿐이다. 옆의 전우에 대한 철저한 신뢰감과 더불어 자신의 위치를 철저히 고수하면 되었다.

올림픽의 꽃, 마라톤 경기 기원의 진실
올림픽 마라톤 경기의 기원과 관련하여 흔히 알려지기로는 마라톤 전투의 승리를 전달한 전령이 아테네로 뛰어가 승전 소식을 전하고 죽음을 맞이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실제 아테네로 뛰어간 것은 아테네 중장 보병군이었다. 스파르타에 지원 요청을 위해 페이디페데스라는 전령이 이틀간 240㎞를 뛰어간 일이 모티프가 되어 쿠베르탱 남작이 창시하였다. 페르시아의 후신인 이란은 이 마라톤 경기 개최 및 참여를 금지하고 있다.

스파르타 전사들의 힘, 테르모필레 전투
육상에서의 중대한 임무를 맡은 인물은 60세의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였다. 근처에 온천이 있어서 ‘뜨거운 큰 문’이라는 뜻을 지닌 테르모필레에 먼저 다다른 것은 스파르타군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 연합군 1만 명이었다. 그 앞에 25만의 병력으로 포진한 크세르크세스는 그리스에 항복을 권고했다.

다음 날 8월 18일 아침 양측은 격돌했다. 치열한 전투 결과 양으로 압도하는 페르시아군은 2만 명에 이르는 전사자를 내고 패퇴하였다.

하지만 이 협곡의 반대편 출구로 향하는 샛길을 에피알테스라는 배신자의 제보로 페르시아군이 알게 되었다. 이 샛길은 포키스 부대 소수만이 방어했다. 페르시아의 불사의 부대는 포키스군을 아예 무시한 채 테르모필레 뒤쪽으로 향했다. 그리스 진영은 심하게 동요하였고, 이에 레오니다스는 대부분의 지휘관과 병사들을 떠나게 했다. 남은 병사는 지휘관급 정예병인 스파르타 300명, 테스피아이 700명, 테베 400명으로 모두 1,400명이었다. 스파르타인에게 있어서 살아서 돌아오는 패배는 없었다.

이제 페르시아군 18만 명과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졌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스파르타군 300명으로 그들은 왕을 중심으로 원형 수비 진형을 짜며 끝까지 저항하였다. 치열했던 전투는 스파르타군의 마지막 병사가 전사하면서 끝났다. 레오니다스 왕과 스파르타군의 분전으로 아테네는 페르시아군의 약탈로부터 이주할 시간을 벌었고, 그리스 연합군과 함대가 남쪽으로 철수할 시간도 벌었다.

살라미스 해전의 숨은 주역, 아테네 해군
양군의 삼단 노선의 특징과 전법
아테네 해군은 창설된 지 3년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군함들은 급조된 것이었다. 그래서 군함이 페르시아 전선보다 꼭 우수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아테네 군함은 기동성 향상을 위해 170개에 달하는 노를 3단으로 배치한 삼단 노선 즉 트라이림이었다. 여기에 뾰족한 쇠붙이인 충각을 뱃머리에 달아 바람 방향과 상관없이 이동하여 적의 배를 들이받고, 장기인 중장 보병을 이용해 백병전을 활용하는 전법을 구사하였다. 반면 페르시아 군함은 백병전을 중요시하여 그리스보다 갑판이 높고 난간 등의 구조물을 설치하였다. 이로 인해서 상대적으로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최정예 아테네 노잡이들
아테네 해군의 조선造船 시스템이 정비되면서, 배의 개조와 수리가 전보다 용이하게 되었다. 배가 증가함에 따라 선원에 대한 수요도 늘어났고, 특히 노를 젓는 인원이 전보다 더 많이 필요했다. 페르시아는 노예들이 노를 저었다. 반면 아테네는 자유시민이 노를 저었다. 무엇보다 도시국가라 인구가 적었고, 적의 배에 접근한 뒤에는 노를 잡은 선원들도 칼을 잡고 병사가 되어 싸웠다. 그래서 당시 재산이 없었던 최하층 시민들이 노를 잡으면서 아테네 해군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이들에게 안정된 고용을 보장하였을 뿐 아니라, 국가 방위를 담당한다는 사명감까지 안겨 주었다. 이들은 배를 사령관의 지시대로 자유자재로 움직여 적선에 다가갈 수 있게 숙달된 노잡이일 뿐만 아니라, 유사시에는 강력한 보병의 역할도 함께 해 주어 전력에 큰 보탬이 된 승리의 숨은 주역들이었다.




<참고문헌>
『역사』 (헤로도토스 지음, 천병희 옮김, 숲, 2010)
『그리스인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 이경덕 옮김, 살림, 2017)
『전쟁 연대기 1』 (조셉 커민스, 김지원 옮김, 니케북스, 2013)
『서양 고대 전쟁사 박물관』 (존 워리, 임웅 옮김, 르네상스, 2014)
『세계 4대 해전』 (윤지강, 느낌이 있는 책, 2007)
『하룻밤에 읽는 세계사』 (미야자키 마사카츠, 이영주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2018)
『최진기의 끝내주는 전쟁사 특강 2』 (최진기, 문학동네, 2014)
『살라미스 해전』 (베리 스트라우스 지음, 이순호 옮김, 갈라파고스, 2006)
『세상의 모든 혁신은 전쟁에서 탄생했다』 (임용한, 교보문고, 2014)
『세상의 모든 전략은 전쟁에서 탄생했다』 (임용한, 교보문고, 2012)
『파란만장 세계사 10대사건 전말기』 (심현정, 느낌이 있는 책, 2017)
『전쟁 세계사』 (김성남, 뜨인돌출판사,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