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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한국의 성씨 | 부夫씨

    제주 부夫씨


    시조는 부을나, 중시조 부언경
    부夫씨는 탐라耽羅 개국 설화에 등장하는 부을나夫乙那로부터 시작한다. 제주도 한라산 북쪽 기슭에 있는 모흥혈毛興穴에서 솟아나왔다는 삼신인三神人 중의 한 분이 부을나이다. 그 이후 삼성인(고高·양梁·부夫)이 제주의 세 지역에 정착하여 9백 년 동안 탐라耽羅를 분할 통치하다가 인심이 고씨에게 모아져서 고씨가 임금이 되어 탐라국耽羅國(혹은 탁라乇羅)을 세웠다고 한다(BCE 2337년경). 부을나 이후 문호가 열리게 된 부씨는 #부계량夫繼良#이 신라 무열왕 때 안무사安撫使(백성을 잘 보살펴 나라의 시책에 따르게 하는 임시 벼슬)로 신라를 예방하여 외교를 트고 신라왕으로부터 왕자작王子爵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앞서 백제가 군사를 일으켜 탐라를 침공하고자 할 때, 그는 사신으로 백제로 건너가 왕을 설득하고 중상작仲常爵을 받앗다는 기록도 있다. 그는 백제와 신라를 오가며 등거리외교等距離外交를 펴서 탐라국을 보존케 한 셈이다.

    삼국 시대나 고려 때의 부씨 상계는 실전失傳되어 정확한 세계를 밝힐 수 없다. 조선조 초기 인물인 부일성은 이성계의 스승이었던 정암靜菴 변남룡卞南龍을 사사師事했던 인물로 그 행적이 조계草溪 변씨卞氏 족보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부씨는 보다 그 연대와 행장行狀에 관한 기록이 확실한 조선 초의 부언경夫彦景을 중시조로 삼아 세보世譜가 편찬되었다. 이후 후손 부삼로夫三老가 나왔는데 부삼로는 유염有廉과 유성有成 등 두 아들을 두었다. #이 중에서 동생인 유성이 육지로 건너가 경기도 양주, 연천 지방에 부씨의 못자리를 잡았다. 그는 부씨 역사상 최초로 육지에 뿌리를 내린 인물이다.# 그 집성촌이 군사 분계선 북쪽에 위치하여 친족 일부가 이북에 살고 있다.

    한편 삼신인의 서차序次에 대해서는 아직 통일된 의견이 없다. 「탐라지耽羅誌 고적조古蹟條」와 「고려사」에서는 ‘장왈長曰 양을나良乙那 차왈次曰 고을나高乙那, 삼왈三曰 부을나夫乙那였다’고 하였고 「영주지瀛州誌」 등에는 ‘장왈長曰 고高’라 하여 역사서마다 달리 기록하고 있다.

    대대로 탐라를 지키는 무관武官 가문


    제주 6파六派
    탐라는 고려 때부터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동부와 서부 해안에 방호소를 두었는데, 그 하나를 별방진別坊鎭이라 했다. 부유염夫有廉은 세종조에 어모장군禦侮將軍(조선 시대 서반西班 무관武官에게 주던 정삼품正三品)이 되어 별방진에 부임, 제주 동부 지역을 지키는 방위 사령관이 되었다. 그 후 그의 아들 부세영 등 10명이 어모장군에 오르고, 11명의 절충장군折衝將軍(조선 시대 정삼품正三品 무관武官, 어모장군의 상위 자리)이 탄생했다. 이렇듯 부씨는 전통적으로 탐라를 방어하는 무관의 가문으로 성장해 왔다. 어모장군 부세영夫世榮은 각恪, 협協, 열悅, 신愼, 핍偪, 홍弘 등 6명의 아들을 낳아 무성한 숲을 이루었다. 이들 형제가 ‘제주 육파六派’의 파조派祖들이다. 무장의 핏줄 탓인지 부씨 문중에는 가끔 기골이 장대한 장사壯士가 나왔다고 한다. ‘부대각夫大脚’ 전설의 주인공 부시흥夫時興과 해상에서 해적 떼를 만나자 무서운 힘을 발휘하여 해적들의 물건을 도로 빼앗아 돌아왔다는 설화가 전해오는 부시웅夫時雄이 그들이다. 그 뒤를 이은 또 한 사람의 역사力士로 부도일夫道一이 있었는데 그 또한 ‘영주오호瀛州五虎’라 하여 많은 일화를 남겼다.

    주요 인물들
    부종인夫宗仁은 제주 본향을 지키는 제주 6파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다. 그는 정조 18년 문과에 급제, 대정大靜·자인慈仁 현감縣監, 선략장군宣略將軍, 충무방어사忠武防禦使 등의 외직을 거쳐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예조정랑禮曹正郎,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역임하였고 서기 1810년에는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이르렀다. 그는 대정현大靜縣에 부임한 후 이 고장에 유배되었던 동계桐溪 정람鄭藍의 유허비를 대정성大靜城 문안에 건립하고 송죽사松竹祠를 세워 인근 지방의 유생들에게 높은 학문을 강의하는 데 힘쓰기도 하였다. 나이 51세에 세상을 떠났으나 여러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도 청렴결백하여 정조로부터 어의御衣를 하사받았다.

    부용손夫龍孫은 일찍이 경기도 양주에 건너가 기반을 굳힌 부유성夫有成의 맥을 이은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영조조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거쳐 벼슬이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올랐다. 이 밖에 조선의 인물로는 청백리 부사민夫士敏, 부용백夫龍伯, 부영봉夫永奉 등이 있다. 원래 제주도 원주민이었던 고高씨, 양梁씨가 대성으로 번창한 데 비해 부씨가 희성의 위치에 놓이게 된 것은 육지 진출이 늦어진 데다가 씨족들 대부분이 제주도를 고수하면서 방위 임무를 맡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은 고씨, 양씨가 뒤에 여러 관향으로 분적한 데 비해, 부씨의 본관은 제주뿐이라는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일제에 항거한 근대 인물로는 부생종夫生鍾, 부병준夫丙準 등이 있다. 부생종은 일찌기 일본으로 건너가 상급 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민족 차별 대우에 격분,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해 1931년 애국 동지의 죽음을 추모하는 애도비를 건립하고 궐기하다 일제의 관헌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1933년 김일준, 부병준과 함께 독립 비밀 결사인 「농민조합」과 「향동회鄕洞會」 및 「민풍진흥회民風振興會」를 조직했다. 그는 다시 부병준과 함께 독서회에 가담, 부녀자들에게 우리글을 가르치고 민족 항쟁사를 통한 구국 운동을 펴다 일정에 재차 체포되었다. 그는 체포 후 혹독한 고문으로 1936년 6월 목포수용소에서 28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 부병준과 함께 건국 공로 대통령 표창이 추서됐다.


    장군암과 부대각 전설
    제주도 북제주군 하도리 마을은 부씨 집성촌이다. 입향조는 조선 초 어모장군을 지냈던 부유염이다. 그가 제주 동부 지역의 수비대장이 되어 이 마을에 정착한 이후 후손들이 인근 세화리, 평벌리, 시흥리, 오조리, 한동리, 상도리 일대에 흩어져 살며 부씨 집성촌을 이루었다. 하도리에는 입향조 부유염의 묘가 자리 잡고 잇다. 묫자리에 서서 바다를 보면 해변에 솟아 있는 식산봉食山峰이 눈앞에 다가선다. 그 너머로 우뚝 솟은 것이 유명한 일출봉日出峯이다. 식산봉은 마치 바다 위에 두둥실 떠 있는 섬처럼 보인다. 이 식산봉 정상에는 유난히 큰 바위 하나가 있다. 이 바위가 장군석이다. 부유염의 묘지에 서면 이 장군석이 일직선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예부터 주민들은 부씨 집안에서 천하를 호령할 대장군이 나올 것이라고 믿었다. 부유염의 후손 부시흥夫時興은 조선조 인조 4년(1626) 아버지 부경필夫景弼과 어머니 숙인淑人 김해 김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무가武家의 혈통을 이어받아 힘이 장사였으므로 세칭 부대각夫大脚이라 하였다. 일찍 무과에 급제하여 숙종 4년(1678)에 벼슬이 겸사복장兼司僕將에 올랐으며 훗날 조정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 만호萬戶(고려·조선 시대 외침 방어를 목적으로 설치된 만호부의 관직, 다스리는 민호의 수에 따라 만호, 천호, 백호 등으로 불리었다)를 제수하였다. 그런데 당시 제주 목사는 부대각의 6대조인 부유염의 묘가 성산읍 오조리 식산봉 정상에 있는 장군석을 정면으로 비추어 훗날에 희세稀世의 대장군이 태어난다는 전설을 알고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부씨 집안에서 대장군이 나온다면 탐라의 자치권을 위해 조정에 반기를 들고 민란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고 생각했다. 목사는 군사를 보내어 장군석의 머리를 잘라 없애도록 명령했다. 명령을 받은 군사가 마침내 장군석을 자르니 붉은 피가 솟았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장군석을 자르고 난 뒤 그는 사람들이 경외하는 부대각을 제거하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마침내 부대각이 경관직京官職을 그만두고 ‘명월만호明月萬戶’가 되어 귀임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제주 목사는 부대각이 배를 타고 제주에 건너올 때 암계暗計를 써서 수장水葬시켜 버렸다. 부대각의 칙지勅旨를 가진 종자從者의 배가 먼저 도착하고 부대각이 탄 배가 오기를 기다렸으나 끝내 행방이 묘연하였으므로 훗날 그 애석한 사연과 그의 위적을 기리어 평대리 해변 ‘베드린개’에 비를 세워 추모하였다고 한다. 제주도 문화공보 담당관실에서 발간한 〈제주도濟州道 전설지傳說誌〉에는 이들에 관한 애달픈 전설이 실려 있다. 오늘날 부씨 노인들은 “만약 그때 장군석을 끊지 않았더라면 부씨 집안에서는 대장군이 끊임없이 태어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때문에 뛰어난 장군은 나지 않고 몇 대에 한 사람씩 부대각 같은 장사만 나왔다.”고 전하고 있다.

    〈참고자료〉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
    〈참고사이트〉
    성씨 정보(http://www.surname.info)
    뿌리를 찾아서(http://www.rootsinfo.co.kr)
    통계청 홈페이지
    위키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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