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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인물탐구]

    명장열전 |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한조를 부흥시킨 후한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와 이십팔장二十八將

    *28장에 붙인 의통 공사

    대흥리에 계실 때 하루는 성도들에게 이르시기를 “스물여덟 명을 가리라.” 하시어 28장將을 정하시고 각기 주머니 한 개씩을 주시니 주머니 속에는 칙서勅書가 들어 있거늘 그 가운데 왕량신장王梁神將에게 내리는 칙서를 보니 이러하니라.


    장 령將 令
    입수불익入水不溺하고 입화불멸入火不滅하여
    수륙만리水陸萬里에 거평안래평안去平安來平安하라
    장령이니라.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말고
    불에 들어가도 타지 말 것이며
    바다 건너 아무리 먼 곳이라도
    가거나 오거나 내내 평안하라.
    이 외에 다른 주머니에 들어 있는 칙령은 상제님의 명에 의하여 성도들이 보지 못하니라. (증산도 도전 5편 259장)


    *태을주를 쓰라

    또 칼 한 개와 붓 한 자루와 먹 한 개와 부채 한 개를 반석 위에 벌여 놓으시고 성도들로 하여금 뜻 가는 대로 들게 하시니 찬명贊明은 칼을 들고, 형렬亨烈은 부채를 들고, 자현自賢은 먹을 들고, 한공숙韓公淑은 붓을 드니라.

    이어 성도들을 약방 네 구석에 갈라 앉히시고 상제님께서 방 한가운데 서서 ‘이칠륙二七六 구오일九五一 사삼팔四三八’을 한 번 외우신 뒤에 성도 세 사람으로 하여금 종이를 지화紙貨와 같이 끊어서 벼룻집 속에 채워 넣게 하시고 한 사람이 한 조각을 집어내어 ‘등우鄧禹’를 부르고 다른 한 사람에게 전하며 그 종이 조각을 받은 사람도 또 등우를 부르고 다른 한 사람에게 전하며 다른 사람도 그와 같이 한 뒤에 세 사람이 함께 ‘청국지면淸國知面’이라 부르게 하시니라.

    또 이와 같이 하여 ‘마성馬成’을 부른 뒤에 세 사람이 ‘일본지면日本知面’이라 부르고 다시 그와 같이 하여 ‘오한吳漢’을 부른 뒤에 세 사람이 ‘조선지면朝鮮知面’이라 부르게 하시거늘 이와 같이 28장將과 24장將을 다 맡기기까지 종이 조각을 집으니 그 종이 조각 수효가 꼭 들어맞으니라.

    태일이 집에 돌아갔다가 며칠 후에 다시 와서 ‘그 뒤로는 마을에서 태을주를 읽지 않는다.’고 아뢰더라. 이후에 하루는 상제님께서 성도들에게 “태을주를 쓰라.” 하시며 일러 말씀하시기를 “태을주를 문 위에 붙이면 신병神兵이 지나다가 도가道家라 하여 침범하지 않고 물러가리라.” 하시니라. (증산도 도전 6편 112장)


    *(광무제는) 비록 몸은 대업을 이루었으나 삼가고 또 삼가기가 끝없었으므로, 능히 정치의 고갱이를 현명하고 신중하게 살필 수 있었고, 권력의 벼리를 손에 쥐고 거느릴 수 있었다. 또 때를 살피고 힘을 헤아렸으므로 일을 일으킬 때 지나침이 없었다. 공신들을 물러나게 하고 문관들을 나오게 했으며 활과 화살을 거두어들이고 말과 소를 흩어지게 했다. 비록 도가 아직 옛날에는 미치지 못했을지라도 이는 역시 창을 그치게(止戈) 한 무武 덕분이다.
    - 광무제에 대한 사관의 평가


    *광무제는 민간에서 성장해 진실과 거짓을 알았다. 농사의 어려움과 백성들의 괴로움을 알았다. 그러므로 천하가 평정되자, 안정에 힘썼다. 왕망의 번거롭고 촘촘한 법을 없애고, 한의 가벼운 법을 회복했다. 몸소 거친 명주를 입고, 색은 여러 가지를 쓰지 않았다.
    - 『한서漢書』「순리전循吏傳」서序


    ■ 후한(동한東漢) 광무제와 이십팔장 주요 연표
    ●BCE 33년 고구려 고주몽 성제 5년 5월 전한 원제 사망, 성제 즉위 왕봉이 대사마 대장군이 되어 외척으로 권력을 장악함
    ●BCE 8년 왕망王莽이 대사마가 됨
    ●BCE 6년 12월 광무제 유수劉秀 태어남.
    ●CE 3년 10월 고구려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 28장 중 2년에 등우鄧禹, 3년에 경감耿弇 출생
    ●5년 12월 왕망이 평제 독살, 광척후廣戚候 유영劉嬰을 황태자로 삼고, 자신을 ‘가황제’라 칭함
    ●8년 12월 왕망 황제의 지위에 오름 국호를 ‘신新’으로 정하고 제도를 변경하나 잇단 개혁 실패로 민생이 도탄에 빠짐
    ●18년 고구려 대무신열제 즉위, 번승 등(훗날 적미군)의 반란 발생
    ●22년 10월 유수 거병
    ●23년 2월 유현(경시제更始帝) 등극. 유수 곤양대전에서 왕망군 격파함. 경시제 이듬해 장안으로 천도, 10월 왕망 피살, 신 멸망
    ●25년 6월 유수, 황제로 즉위 광무제光武帝가 됨. 9월 적미군, 장안에서 경시제 군 격파, 경시제 피살. 광무제 낙양으로 도읍을 정함. 동한東漢 건국
    ●26년 28장 중 경단景丹 사망. 만수萬修, 유식劉植 사망으로 추정
    ●27년 1월 적미군 광무제에게 항복
    ●36년 광무제 공손술을 토벌하고 촉 평정하여 중원 대륙을 통일함
    ●39년 경지와 호적 조사 시작
    ●55년 고구려 후한에 대비하여 요서에 10성을 쌓음
    ●57년 2월 광무제 사망, 2세 명제明帝(유장劉莊) 즉위함

    들어가는 글


    외유내강外柔內剛이란 말이 있다. 겉으로는 부드럽지만, 속으로 강건함이 들어 있다는 뜻이다. 부드러움과 강건함은 양자가 음양처럼 잘 조화되면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게 이 세상 사는 처세의 기본이리라. 그렇지만 현실적으로는 겉으로 강경한 사람이 많고, 더 주목을 받기도 한다. 특히나 대부분 통치자들은 지나치게 강건하고 탐욕스럽고 거칠며 눈앞의 성공과 이익에만 급급한 면이 있다. 반면 부드러움은 나약하다는 이미지를 부르기 때문인지 경시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부드럽고 약한 것은 쉽게 부러지지 않고 모서리에 부딪혀도 깨지지 않으니 실은 약한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대처하는 유연함의 표현이다. 이런 유연한 도리를 바탕으로 천하를 얻고, 효과적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데 성공한 사례가 있다. 바로 오늘 살펴볼 후한의 시조 광무제 유수이다. 그리고 그를 도와 천하를 평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28장에 대해서도 살펴보기로 한다.

    신(新, 8∼23) 왕망(王莽, BCE 45∼23)의 개혁 실패와 천하대란


    전한의 멸망
    한고조 유방이 나라를 세운 후 한무제漢武帝가 국세를 크게 신장시켰다. 그러나 한무제 사후 한의 국운은 서서히 기울어져 갔다. 어린 왕자 영의 대에 일단 단절되어 20년 가까운 공백을 두다가 다시 광무제 유수의 손으로 재흥되었다. 두 왕조를 구별하기 위해 전자를 전한前漢, 후자를 후한後漢이라 한다. 전한은 중원의 서쪽 장안(지금의 시안西安)을 수도로 했지만, 후한은 동쪽의 낙양을 서울로 했기 때문에, 전자는 서한西漢, 후자는 동한東漢이라고도 부른다.

    이 전한과 후한의 이음매에 있는 공백을 메운 게 신新이라는 왕조로 그 창시자는 왕망王莽이다. 왕망은 기원후 8년에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나 23년에 반란군에 의해 살해당하였으므로 재위는 15년 남짓이었다.

    위선의 달인 왕망
    왕망은 외척 출신이다. 외척은 황후와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로 한대漢代뿐 아니라 역대 중국 왕조에서는 이 외척들이 농단하여 스스로 붕괴되는 역사가 많았다. 과거를 통해 교양 있는 선비들이 대거 조정에 들어오는 송대宋代이후부터는 외척의 전횡을 견제하는 관료집단이 형성되어, 외척 전횡에 의한 폐해는 적어졌다(반면 절대군주 옆에 있는 십상시 같은 환관에 의한 폐해가 심해졌다). 왕망은 이 외척 출신으로 황위까지 찬탈한 처음이자 마지막 인물이다.

    왕망王莽(BCE 45년 ∼ CE 25년 10월 6일)은 자字는 거군巨君이고 위군魏郡 원성元城 사람이다. 황제 즉위 전 작위는 안한공安漢公이고, 전한 10세 원제元帝의 황후인 효원황후 왕정군王政君의 조카로, 11세 성제成帝의 어머니 쪽 사촌형제였다. 이 왕씨 집안은 효원황후의 동생인 봉鳳이 대장군, 대사마, 상서尙書에 오르면서 정치 실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여, 이후 일가친척들이 고위직에 올라 10명의 후候와 5명의 대사마(재상)를 배출하였다. 또 투후 김일제의 증손자 김당金當의 어머니가 왕망의 어머니와 친자매였기에 왕망은 일찍부터 권력의 핵심부에 있었다.

    부친은 효원황후의 이복동생인 만曼이지만, 아버지와 형 왕영이 일찍 사망하여 왕망은 불우하게 자랐다. 그래서 왕망은 절개를 굽히고 공손하고 검소하게 처신했으며, 부지런히 학문을 넓히고 옷차림은 유생의 복장을 하였다고 한다. 또한 어머니와 과부가 된 형수를 시중들었다. 또 조카인 왕광王光을 양자를 삼아 친아들 이상으로 양육하는 등(뒤에 살해) 모범적인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모두 위선이었다.

    백부인 왕봉이 병이 들자, 달려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세수도 하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간호하여 왕봉의 인정을 받았다. 육친의 정이라 하기에는 너무나도 철저한 효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그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된다. 왕봉은 2개월 후 세상을 떠났는데, 임종 때 왕망의 등용을 유언하였다. 이후 왕망은 순조롭게 출세하였다. 작위가 높아질수록 더 저자세를 취하였다. 봉급을 모두 털어 빈객賓客들에게 뿌리면서 유력자들과 깊이 교제하였다.

    착실하게 권세의 자리를 굳혀 나가며 인기에 영합하였으나, 자신이 세운 평제平帝를 독살하였다. 2살짜리 유영을 제위에 올리려 하였으나, 유영은 끝내 황제 자리에 오르지 못한다. 왕망 자신이 가황제假皇帝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무공현武功縣에서 발견된 ‘황제가 되라’는 흰 돌에 새겨진 부명符命을 근거로, 선양禪讓이라는 형식을 빌려 제위에 올랐다. 국호를 신新이라 하였다. 당시 전국지새傳國之璽라는 옥새를 태황태후인 왕정군이 보관했다. 왕망이 태황태후에게 사자를 보내 옥새를 인도할 것을 강요하자, 태황태후는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저주하였다. 그리고 옥새를 내동댕이쳐서 훼손하였다고 한다. 13년에 왕망을 등용해 한의 명운을 끊게 한 태황태후는 고령으로 세상을 떠났다.

    왕망의 개혁 실패와 천하대란
    황제가 된 왕망은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유교 경전에 기초하여 주周의 정치 제도를 본떠서 이상적인 개혁정책을 폈다. 하지만 모두 실패로 끝나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그의 개혁정책은 토지정책, 경제정책, 대외정책 등으로 볼 수 있다.

    당시에 토지는 이미 한대漢代 중엽부터 호족들에게 집중화가 진행되어 빈부의 격차가 컸다. 한무제 시대부터 지적되어 개혁의 움직임이 있었으나, 한 왕조 지지 기반인 호족층이 대토지 소유자들이어서 섣불리 손을 댈 수 없었다. 이에 왕망은 천하의 농지를 왕전王田으로 노비를 사속私屬으로 이름을 고치고 매매를 금지하였다. 동시에 토지 소유에 엄격한 제한을 과하고 위반하는 자는 모두 귀양을 보내기로 했다. 하지만 현실은 위로부터 내려온 한 장의 법령으로는 고쳐지지 않았고, 위반자가 속출하였다. 후한 광무제도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했다. 다만 그 증상만 완화했을 뿐이다.

    다음은 화폐제도 개혁인데, 왕망 재위 기간 동안 3번이나 단행하였다. 이 역시 실패하였고, 위반자에 대해 엄벌로써 임했기 때문에 사회 불안은 가중되었다.

    나아가서 상공업을 국가가 직접 관리하였다. 소금, 철 등의 중요 물자를 국가 독점 사업으로 하고, 곡물과 포백布帛 등의 판매 가격을 통제 아래에 두었다. 이 정책은 상공업자의 폭리를 누르고 빈민을 구제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사람들을 참혹한 고생에 빠트렸다.

    마지막으로 대외정책 특히 흉노에 대한 정책이 실패로 돌아갔다. 한무제의 흉노 정벌 이후 북방과는 매우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왕망은 경망하게 쓸데없이 북방을 자극하였다. 흉노나 선비 등 주변 민족과 고구려 등의 국가 지도자의 칭호를 제멋대로 고쳤다. 특히 고구려 태왕의 칭호를 중화사상에 근거하는 모멸적인 명칭인 하구려후下句麗侯로 부르게 해 고구려와 충돌하였다. 주변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 악화는 이어졌고, 흉노를 토벌하고자 했지만 실패했다.

    이처럼 현실과 맞지 않은 개혁 정책과 빈번한 제도 변경으로 국정의 혼선과 오류가 중첩되었고, 기근饑饉이 겹치면서 민심의 이반을 불러왔다.

    <#왕망에 대한 평가#>
    [주1]

    왕망에 대해서 중국에서는 역사상 최초로 ‘찬탈簒奪’을 저지른 인물이라는 이유로 굉장히 비판적인 평가가 내려졌다. 왕망과 같은 시대의 역사가인 반고班固는 자신의 저서 『한서漢書』에서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그 간특姦慝함을 제멋대로 함으로써 찬탈의 화禍를 이루다.’

    ‘그 화패禍敗를 생각한다면 아직껏 왕망처럼 심한 자는 없었다’

    북송대 역사가 사마광은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왕망은 성격이 조급하고 요란해서 가만히 있지 못했다. 항상 무슨 일을 일으키고 만들었다. 걸핏하면 옛날을 그리워하고 시의時宜를 생각하지 않았다. 제도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관리들이 부정한 짓을 했다. 불평을 하다가 형을 당하는 자가 많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반드시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분명히 왕망은 국가 성립의 근간을 건드리는 개혁을 너무나 성급하게 시행하려 하였다. 현실을 도외시한 이상주의에 치우쳐 실정失政을 저질렀고, 그에 대한 책임으로 본인은 죽고 나라는 망했다. 하지만 가장 큰 괴로움을 당한 이들은 일반 백성들이었다. 당시 기록을 보면 ‘크게 굶주려서 사람이 서로 잡아먹었다’, ‘노약자는 길에서 죽고, 젊은이는 적중賊中으로 들어갔다’고 전하고 있다. 산 자가 죽은 자를 부러워할 정도였다고 한다. 생활의 조건을 모두 뺏긴 이들은 기의起義, 즉 농민 봉기를 일으켰다. 기의를 위해서는 명분이 필요했고, 자연스럽게 ‘한조 부흥’이라는 슬로건이 대두하게 되었다.

    부드러운 카리스마 광무제 유수(漢 世祖 光武帝 劉秀 BCE 6∼CE 57, 재위 25∼57)


    집금오執金吾를 부러워한 소년
    후한을 연 광무제 유수는 BCE 6년 12월 갑자일 밤에 지금의 후베이성湖北省 조양시棗陽市인 남양군南陽郡 채양현蔡陽縣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그해에 아버지 남돈령 유흠이 다스리던 지역에 줄기 하나에 이삭이 아홉 개 달린 상서로운 벼인 가화嘉禾가 나타났으므로 이름을 수秀라 하였다. 자는 문숙文叔이다. 일반적으로 동양에서 형제의 서열을 정할 때 쓰는 말이 백중숙계伯仲叔季인데 그의 자에서 엿보이듯 셋째임을 알 수 있다. 큰형 유연(劉縯, ?∼23년)은 자가 백승伯升이고, 둘째 형은 유중劉仲이었다. 한고조 유방의 9세손으로 키가 일곱 자 세 치(170cm 정도, 한나라 때 한 자는 0.231미터)로 수염과 눈썹이 아름다웠다. 입은 크고 코는 우뚝했으며, 이마 한가운데가 툭 튀어나왔다. 몹시 신중하고 차분한 성격으로, 성품이 부지런하며 농사일을 열심히 하는 성실하고 얌전한 청년이었다.

    큰형 유연은 활달하고 협객을 좋아하고 재주 있는 선비를 가까이하고 선천적으로 남 앞에 서는 지도자 유형의 인물이었다. 유연은 농사일에 관심을 두는 소심한 동생에게 ‘너는 고조의 형인 유희劉喜와 같은 놈’이라며 비웃었다. 어린 시절 유수의 희망은 소박하였다. 그 자신이 황제가 된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신新의 수도 장안에서 공부를 한 적이 있었다(천봉天鳳 연간 14∼19년). 그때 그는 집금오執金吾를 보고 저 정도 관직이면 좋겠다고 여겼다. 집금오는 궁 바깥에서 비상사태를 경계하는 일과 수재와 화재에 관련된 사무를 관장하는데 그 복색이 매우 화려하여 이를 추앙하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유수도 또래 젊은이와 비슷한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그래서 벼슬을 한다면 집금오요, 아내를 얻는다면 음려화陰麗華라 할 정도였다. 당시 유수는 좋은 벼슬자리에 미인으로 이름난 여인을 배우자로 삼고 싶다는, 일반적인 남성이 꿈꿀 만한 포부를 가진 그저 평범한 종실의 청년이었다. 음려화는 남양군 신야현 사람으로, 유수가 신야현에 갔을 때 음려화의 아름다움에 반했다. 경시 원년인 23년 6월에 유수는 완현 당성리當成里에서 19세 된 음려화를 아내를 맞으니 바로 후한 2세 명제明帝의 모후인 광렬음황후光烈陰皇后이다.

    형과 함께 거병하다
    왕망이 신 왕조를 세운지 10년도 되기 전 천하는 혼란에 빠졌다. 왕망 자신이 초래한 정치적 경제적 혼란으로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한의 부흥을 갈구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일어선 기의군은 대략 3개 집단이었다. 먼저 왕광王匡 등을 수령으로 하고 주로 남부 형주荊州의 굶주린 백성들로 구성된 녹림군綠林軍이 있었다. 이들은 지금의 후베이성 대홍산大洪山인 녹림산綠林山에 주둔하였기 때문에 녹림군으로 일컬었다. 흔히 화적이나 도적의 소굴을 녹림이란 말로 표현하는데 바로 여기서 유래하였다. 또한 번숭樊崇 등을 우두머리로 해 동부 산둥성山東省 일대 백성들로 구성된 집단은 적미군赤眉軍이라 했다. 이들은 적의 군사와 구별하기 위해 눈썹에 붉은 칠을 했기 때문에 적미군이라고 불렸다. 그 밖에 허베이 등 북방에서 봉기한 농민군으로 몇 가지 다양한 갈래가 있지만, 이들은 녹림군이나 적미군과는 달리 최후까지 연합된 세력을 구성하지는 못했다.

    이들 3개 집단 중 가장 세력이 강대하고 직접적으로 왕망 정권을 붕괴로 몰고 간 것은 녹림군이었다.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왕망은 토벌군을 보내기는 했다. 하지만 장비는 우수했지만, 전투 의욕은 부족했다. 잃을 것이라고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싸우고 숫자도 많은 녹림군을 이겨내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지황地皇 3년(22년) 겨울 녹림군 내 전염병이 퍼지면서 기세가 다소 누그러졌을 때 유수 형제는 고향인 용릉舂陵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유수의 형 유연은 포부가 남달랐다. 왕망의 궁정 쿠데타를 인정할 수 없었고, 한 왕실의 혈통에 대한 자부심과 강직한 성격도 한몫했을 것이다. 어린 나이(9세)에 고아가 된 유수에게 부모나 다름없는 형의 거병이었다. 유수도 동참하였다. 처음에는 생각처럼 병사가 잘 모이지 않았지만, 신중한 성격에 평판도 좋던 동생 유수가 합류하자 유수의 판단을 믿고 참가하는 사람이 늘어났다고 한다. 당시 유수 나이 28세. 8천 명의 군대를 모아 녹림군에게 사자를 보내 동맹을 맺고 그 일익을 구성했다. 이 부대를 용릉군舂陵軍이라 한다.

    녹림군은 크게 4개 계파가 있었는데, 본래부터 있었던 신시군新市軍의 왕광과 하강군下江軍 왕상王常의 주력부대와 뒤에 참가한 평림군平林軍의 진목陳牧 그리고 유연, 유수 형제의 용릉군이었다.

    녹림군은 왕망군에게 대패하여 유수의 누님 유원劉元과 둘째 형 유중劉仲을 비롯해 수십 명의 희생자를 냈다. 이 패전으로 내부에 동요가 일어났지만, 유연이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태세를 만회하여, 왕망군을 격파하면서 군세를 20만으로 늘렸다. 이에 각 계파를 통합한 통수부統帥部의 필요성을 통감하게 되었다. 유연은 전부터 그 필요성을 역설하며 자신이 최고 책임자가 될 것을 노리고 있었지만, 당시 다른 계파의 반대로 평림군 소속 유현劉玄이 황제로 추대되었다. 23년의 일로 이이가 경시제更始帝다. 유현은 패기가 없는 범상한 인물이었다. 다른 세력이 보았을 때는 녹녹하지 않은 유연보다는 유현이 상대하기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유연의 배경에는 호족과 부자가 있었다. 유연이 제위에 오르면 그들이 정권의 중추에 등용되고, 빈민 출신 녹림군 간부는 쫓겨날 우려가 있었다. 경시제 추대 이유의 내막이 이랬다. 실제 이 정권의 실권은 신시군 간부들이 장악하여 내부 알력이 심해졌다. 여기서 유연은 대사도大司徒, 유수는 태상太常과 편장군偏將軍을 겸했다. 유수의 위치는 말석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후 치러진 곤양대전에서 뛰어난 공적을 세워 그 위명을 천하에 떨치게 된다.

    소수의 군사로 대군을 물리쳐 승기를 잡은 곤양昆陽대전
    새롭게 체제를 갖춘 경시제군은 드디어 북정北征에 나섰다. 유연의 군대는 완宛을 포위하고, 다른 군대는 북상해서 곤양(현 허난성 섭현), 언郾, 정릉定陵 일대를 공략했다. 유수도 일단의 군단을 지도해 곤양에 입성했다.

    한편 왕망은 경시제의 대군이 북상하자 당황하였다. 이에 사촌 형제인 대사공大司空 왕읍王邑과 대사도 왕심王尋에게 백만 군사와 갑사甲士 42만 명을 주어 토벌하게 하였다. 이 병력의 규모는 전투병이 42만이고, 보급 부대를 비롯한 예비 병력까지 합쳐서 100만 정도로 봐야 할 것이다. 왕망군은 5월에 곤양성을 포위하였다. 당시 곤양성 안에는 농민군이 8~9천 명 정도 있었는데, 태반이 창칼은 잡아 본 적이 없었다. 반면 왕망군은 많은 수의 군대에 키가 아주 컸던 거인 거무패巨無覇라는 장사 그리고 호랑이, 표범, 물소, 코끼리 등 여러 맹수 연합도 기세가 등등하였다.

    절체절명의 곤양성! 이때 유수는 분연히 일어나 싸울 것을 강조하였다. 전멸을 당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고비에 결단을 내린 것이다. 여기서 곤양성이 무너지면 다른 부대도 파멸할 것이다. 마음과 담력을 같이하여 공명을 떨쳐야지 어찌 처자나 재물을 지키는 작은 소리를 하느냐며 장수들을 꾸짖고 전투태세를 갖추게 하였다. 일단 곤양성 내에는 성국상공 왕봉, 정위대장군 왕상 등으로 군사를 배치해 지키게 하고, 밤에 표기대장군 종조宗佻, 오위장군 이질 등 13기騎의 결사대를 거느리고 남문으로 나갔다. 포위한 43만 명을 피해 주변에서 구원군을 데리고 오겠다는 계획이었다. 어쨌든 유수의 결사대는 탈출에 성공하였다. 유수 일행은 아군 진지를 뛰어다니며 구원군을 편성하였지만, 겁을 집어먹은 장수들이 약탈한 재화의 보전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유수는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적을 깨뜨리면 진귀한 보배는 만 배가 되고 큰 공을 세울 수 있지만, 진다면 목숨이 남아나지 않아서 어떻게 재물을 가질 것이냐며 설득한 끝에, 겨우 3천 명 정도를 징발할 수 있었다.

    유수는 스스로 보기步騎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선봉에서 왕망군을 급습하였다. 선두에서 수십 명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유수의 3천 병력은 43만 명의 왕망 군대를 향해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놀랍게도 이 돌파는 성공하였고, 유수군을 우습게 여긴 왕읍과 왕심은 직접 1만 명을 이끌고 대응하였다. 난전 중에 왕심은 전사하였다. 이것을 본 성안 장병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왕망군은 앞뒤 협공으로 패주하였다. 왕읍은 겨우 수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장안으로 달아났으며, 다른 병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 전투에서 압도적 열세인 유수군이 이긴 원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미 왕망 정권이 민심을 잃었기 때문이다. 병력은 40만이지만 대부분 억지로 끌려 나온 이들로 전의가 부족했다. 또 하나는 왕망군 사령관인 왕읍과 왕심 등이 작전이 서툴렀다. 스스로 우위를 과신하여 적을 업신여기고, 적절한 계책을 채택하려 하지 않았다. 여기에 이 싸움이 승패의 갈림길이라고 판단하고 버티며 싸워야 한다는 유수의 결단#과 #13기를 거느리고 성을 탈출해 구원군을 부르러 간 임기응변의 기략이 더해졌다. 이런 지도자의 모습은 경시제군으로 하여금 한 덩어리가 되어 필사적으로 싸우게 만들었다. 더 나아가 유수는 단순히 얌전한 인물이 아니라, 일단 유사시에는 단호하게 결단을 내리고, 훌륭한 기략을 짜내고, 용맹하게 싸울 줄 아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천하 사람들에게 심어주었다.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를 이긴 이 곤양대전은 유수의 명성을 높여 주었을 뿐 아니라 왕망 정권 붕괴에 결정적 신호탄이 되었다.

    28장의 보좌로 자립의 길로
    유수가 곤양에서 대승을 거두고 유연이 완을 점령하는 등 두 형제의 명성이 하늘을 치솟는 것을 두려워한 경시제는 두 사람에 대한 견제에 나섰다. 곤양대전은 왕망 패망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며 이로 인해 유수는 일약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한다. 하지만 유연의 존재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던 경시제는 불안해졌다. 유연도 껄끄러운데 그의 동생 유수까지 상상도 못할 역사적인 대승리를 쟁취했다. 경시제의 두려움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범용하고 용렬한 이의 두려움은 엉뚱한 결과를 가져온다. 경시제는 유연의 휘하 장수인 유직劉稷이 벼슬을 사양하자 이를 꼬투리 삼아 반역으로 몰아 죽이려 했다. 이에 유연은 사방팔방으로 손을 써서 유직을 석방시키려고 했지만, 오히려 자신도 붙잡혀 유직과 함께 살해당하고 말았다. 유연의 처단은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경시제의 두려움이 얼마나 컸는지 반증하는 것이다.

    이때 유수의 선택은 두 가지였다. 경시제를 쳐서 형의 복수를 할 것이냐, 아니면 지금은 머리를 숙이고 은인자중하여 훗날을 도모할 것이냐. 유수의 선택은 후자였다. 그는 완성에 도착하여 경시제에게 사죄하였다. 그때 그는 곤양의 공을 자랑하지도, 형을 위해 상복을 입지도 않는 등 평상시처럼 행동했다. 물론 혼자 있을 때는 술과 고기를 가까이하지 않고 남몰래 울었다. 그렇지만 내색을 하지 않고 근신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되자 경시제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쑥스럽고 거북해졌다. 이후 유수에게 실권이 없는 관직인 파로대장군破虜大將軍과 무신후武信候에 봉하면서 그의 동향을 살폈다. 계속해서 유수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는 않았다.

    경시제군은 북상을 개시하여 23년 장안과 낙양을 점령하였고, 왕망은 혼란 중에서 두오杜吳에게 살해당했다. 그의 수급은 경시제가 있던 성으로 보내졌으며, 몸은 공을 세우려는 사람들이 달려들어 마구 찢어지고 흩어졌다고 한다. 24년 2월 장안으로 천도한 경시제 정권은 부하들의 약탈 행위로 민심을 급격하게 상실하고 있었다. 그 이전에 유수는 허베이河北로 파견되어 그 지역을 평정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는 경시제의 결정적 패착이었고, 유수에게는 큰 기회였다.

    비록 왕망 정권이 붕괴되었다 해도 지방은 아직 여러 군벌들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고, 관리들은 어느 쪽에 붙어야 할지 거취를 정하지 못하는 혼란의 시기였다. 특히 허베이河北 지역은 가장 혼란하였다. 경시 원년(23년) 겨울, 유수는 허베이로 향했다. 당시 한단邯鄲에서는 왕랑王郞이 황제를 자칭하고 독립 왕국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를 그대로 두면 경시제 배후에 큰 후환을 두는 격이기 때문에 반드시 토벌을 해야 했다. 경시제와 측근은 유수를 파견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미 군사적 능력이 실증되었고, 그 겸손한 태도에 민심을 얻게 되면 이는 호랑이를 산에 놓아주는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임자가 없었기 때문에 마지못해 보내긴 했지만 변변한 군사를 주지는 않았다.

    유수는 허베이 지역을 2년간 전전하게 된다. 이 시간은 그에게 시련의 시간이었다. 맹추위까지 겹쳐 풍이가 가까스로 땔감을 모으고 등우가 가져다 불을 지펴 콩죽이나 보리밥으로 추위와 굶주림을 견딜 정도였다고 한다.

    왕랑의 세력은 강대했고 대부분의 지역이 그에게 복속되어 있었다. 유수의 목에는 10만 호의 현상금까지 붙였다. 토벌은 고사하고 도망을 다녀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고생을 하면서 차차 유능한 인재들을 영입하였고, 왕랑에게 항복하기를 꺼리는 몇몇 지방 관리들을 포섭해 나갔다. 이 무렵 그 유명한 28장將의 수장인 등우鄧禹를 비롯하여 왕패王覇, 풍이馮異, 경감耿弇, 오한吳漢 등이 수하로 들어왔다. 이들은 가장 어려운 시기의 유수를 돕기 위해 휘하에 모여들었다. 등우는 28수 중 각수角宿를 맡은 인물로 유수보다 6년 연하였지만, 장안에서 같은 시기 공부를 한 인연이 있었다. 등우는 유수에게 당시 상황과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진언하였고, 이 시기부터 유수가 중원 평정을 완성하기까지 최측근에서 그를 보좌했다.

    한고조 유방을 닮아서인지 유수 역시 인간적인 매력이 있었다. 소탈함과 상대를 믿고 거리를 두지 않는 모습, 겸손한 태도 등이 허베이 지역의 영웅호걸들을 불러모으게 하였다. 이들의 가세로 허베이에서 유수의 세력은 급속하게 확대되었고 24년 5월 갑진일 마침내 한단성을 함락하고 왕랑을 주살하여 확고한 기반을 쌓는 데 성공하였다. 항복한 장병들을 진심으로 대하며 덕을 베풀어 세력은 계속해서 확대되었다.

    이런 유수를 두려워한 경시제는 유수를 소왕蕭王으로 봉하고 귀환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유수는 그것을 무시하고 자립의 길을 택했다. 거록 지역에서 동마적銅馬賊 세력을 흡수하였고, 항복한 무리들을 믿음으로 복속시켰다. 이에 장안에서는 그를 동마제銅馬帝라 부르며 두려워하였다.

    마침내 25년 6월 기미일, 유수는 장수들의 추대로 제위에 올라 한제국의 부흥을 선포했다. 형과 거병한 지 불과 2년 남짓, 30세에 후한後漢(동한東漢)을 세운 것이다. 연호는 건무建武라 하였고, 4개월 후인 10월에 낙양洛陽에 입성하고 도읍으로 정하였다. 이때 유수는 낙양 지명 중 ‘낙’의 한자를 ‘洛’에서 ‘雒’으로 바꾸었다. 한나라가 화덕火德으로 건국한 거라 여겼기에, ‘낙洛’에 들어간 삼수(물수水)변을 싫어해서 ‘雒’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한실 漢室 부흥復興
    비록 제위에 오르긴 했지만, 광무제의 후한은 여느 유력 반란 집단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못한 상황이었다. 광무제는 왕망의 실정으로 촉발된 대혼란을 수습해야 했고, 여러 반란 세력을 제압해야 했다.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이 과정에서 28장은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제위에 올랐을 때 최대 대항 세력이어야 할 장안의 경시제는 이미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대신 떠오른 세력이 적미군이었다. 이들은 산둥성 지역을 근거지로 하여 왕망군을 무찌르며 세력을 확대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생계를 위해 도적질을 했을 뿐이지, 천하를 어떻게 해 보겠다는 명확한 목적의식은 없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혼란이 진정되자 본래 농민이었던 이들이라 집안의 농사일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에 적미군 간부들은 이탈하는 농민을 저지하기 위해 장안으로 진격하기로 하였다. 그 과정에서 제비뽑기로 유분자劉盆子라는 양치기 소년을 황제로 선출했다.

    적미군은 장안을 함락시켰고, 경시제는 옥새를 바치고 항복하였지만, 살해되었다. 하지만 이때 이미 낙양에 도읍을 정한 후한군이 후방을 압박하고 있었다. 30만을 헤아리는 적미군은 좁은 장안성에 갇히는 형태가 되었다. 또한 이들은 본래 통제가 잘 되지 않아 약탈과 갖은 행패를 다 부렸으며, 식량이 떨어지자 산둥으로의 귀환을 꾀하였다. 27년 건무 3년 광무제는 대사도 등우와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풍이로 하여금 적미군을 공격하게 하였다. 처음에는 패배했던 풍이가 군사를 정비해 적미군을 격파하였다. 서쪽의 퇴로를 끊고, 동쪽 의양宜陽에서 기다리는 지구전을 펼친 후한군은 기진맥진한 이들을 전투 없이 항복시켰다. 억지로 제위에 오른 유분자는 조왕趙王의 시종으로 등용하여 평생 생활을 보장해 주었다.

    녹림군이나 적미군은 초기에는 무서울 정도로 에너지를 폭발시켰지만, 원대한 포부나 목적이 없었기 때문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갔다. 적미군을 평정한 이후 광무제는 전국 평정에 착수하여 36년 촉나라 공손술公孫述의 항복을 받아내면서, 한실 부흥을 이루어냈다.

    창업에서 수성으로
    전국을 평정한 광무제는 모든 면에서 무리하지 않고 우선 민생 회복에 주력하였다. 따라서 치세는 전체적으로 수수하여 화려한 맛은 없었다. 아마 전한의 문제文帝(BCE 179∼BCE 157)를 롤모델로 삼았던 것 같다. 문제는 한무제의 조부로 진 멸망과 초한 쟁패의 전란으로 피폐한 민생을 회복하여 아들인 경제景帝와 함께 문경지치文景之治라는 태평성세를 연 황제이다. 광무제 자신도 경제의 후손이었다.

    광무제의 이런 정치 자세는 매우 시기에 적합했다. 당시 격심한 전란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궁핍의 극에 달해 있었다. 광무제 자신의 성격도 억지로 밀고 나가지 않는 유연한 성격의 소유자였기에, 그런 시대의 국정 담당자로서는 확실히 적임이라고 할 수 있다. 전한에서 신, 후한으로 넘어가는 시기, 중원의 인구는 약 6천만 명에서 2천만 명으로 감소해 있었다고 한다. 이에 광무제는 노비 해방과 대사면령을 자주 내려 농사를 짓는 자유민을 늘렸다. 이는 농촌 생산력 향상과 함께 민심을 확보하게 되었다. 징병제를 폐지하고, 평시에는 농업과 같은 생산 활동에 힘쓰다가 유사시에는 군사로 동원하는 둔전병屯田兵을 운영하였다. 또한 천지의 본성은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天地之性 人爲貴)라는 조서를 내려 노비를 죽이는 자는 죄를 줄여 주지 말라며 노비와 양민의 형법상 평등과 인간 존중을 선포하였다.

    천하의 전란이 끝난 39년(건무 15년)에는 경지 면적과 호적에 대한 전국적인 조사로 통치의 기초를 다지고 국가 재정을 확립하려 하였다. 이에 앞서 30년(건무 6년)에는 수확량의 10분의 1을 내던 조세 제도를 전한 경제 때와 같이 30분의 1로 줄여 부담을 완화시켰다. 이는 둔전 시행으로 군량비를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화폐 제도도 정비하였다.

    정치 체제도 개편했다. 기존의 대사도, 대사공, 대사마 등 삼공 협의체를 두었지만 황제의 직속인 상서들에게 실권을 주었다. 불필요한 관직을 없애고 인구가 작은 마을은 서로 통합해 관리의 수도 줄였다.

    그 자신이 전쟁을 오랫동안 겪은 터라 싸움을 좋아하지 않았다. 전쟁을 피하고 천하태평에 힘쓰며 군대도 황제와 황실, 낙양을 지키는 금위군과 국경 지역 상비군, 중요 지역 주둔군을 제외하고 모두 해산했다. 이로써 많은 관리, 군대, 관청을 유지하는 데 들어가던 비용을 절감했다. 또한 유교를 널리 교육했다. 한고조 유방은 저속하였고, 한무제는 패기가 있었다. 광무제는 그 자신이 유교를 비롯한 문화적 소양이 풍부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교육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낙양에 태학을 설치하고, 각지에도 학교를 설치하였다. 광무제가 유학자를 중시하고 격려했기 때문에 후한 시대 군신들은 유학자다운 기상을 지니고 있었다.

    후한 200년은 그다지 화려하지 않지만, 매우 안정적이었다. 이런 안정성을 바탕으로 중국 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정치 사회 시스템이 후대에 계승 발전 되었다.

    광무중흥光武中興
    광무제는 건국 공신들을 핵심 요직에서 제외하였다. 대신에 실권이 없는 명예직에 임명하여 이들을 달랬고, 후대까지 부귀영화를 누리고 작위를 보전케 하였다. 이는 한고조 유방의 공신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숙청된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은 것이다.

    그는 민생을 돌보는 데 여생을 바치며 헌신적인 노력으로 광무중흥光武中興을 이끌었다. 그는 매일 아침 조회를 열어 민생을 살피고, 신하들과 경학과 이치를 이야기하며 토론하였다고 한다.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르는 아들 명제明帝가 황태자 시절 광무제의 건강을 염려하여 즐겁게 지내고 스스로 편안해지기를 간하자, 광무제는 “나는 스스로 이러한 것을 즐기니 피곤하지 않다.”고 답하였다.

    인재를 보는 안목과 활용에 능했던 광무제는 한나라 왕실의 부흥을 이루고 안정시키는 데 힘을 쏟은 후, 57년 정사년에 풍습과 현기증으로 2월 낙양 남궁전전南宮前殿에서 62세로 생애를 마감하였다. 3월에 원릉原陵에 안정되었다.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광무光武였다. 광光은 전대의 왕업을 능히 이어받았다, 다시 부활하였다는 의미이고, 무武는 화란을 평정하여 전란을 중지시켰다(止戈)는 의미이다. 후한은 광무제 자신을 포함하여 13대 196년을 지속하였고, 황건적의 난으로 시작하는 후한 말엽의 역사가 그 유명한 위魏·촉蜀·오吳의 삼국 시대 이야기이다.

    모진 고난 앞에 처절한 사투로 사명을 완수한 중흥中興 28장將


    광무제의 인사스타일로 본 28장
    28장은 후한의 창업군주 광무제 유수의 공신들로 중흥中興 28장將으로 불리던 인물들이다. 이들의 면면을 보면 광무제의 인사가 얼마나 광범위하고 세밀하면서도 일정한 방향성으로 짜여 있는지 엿볼 수 있다. 그래서 여기서는 28장에 대한 나열적인 기술보다는 광무제의 인사 스타일 중심으로 가볍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광무제의 인사 스타일은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할 수 있다. 힘 있는 자는 작게 쓰고, 지혜 있는 자는 크게 쓰며, 덕 있는 자는 귀하게 쓴다. 즉 그 사람의 기국에 맞게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한 것이다.

    경감耿弇은 유수의 야망에 불을 지른 인물이다. 경시제는 유수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군권을 회수하려 했다. 유수가 허베이를 평정하자 경시제는 그를 수도로 소환했다. 소환되면 병권을 잃게 되고 대권은 물거품이 되는 상황이다. 이때 경감은 군사를 더 모으자고 권유하였다. 경시제가 그릇이 안 되기 때문에 자립할 것을 권하였다. 유수는 이 말을 듣고 바야흐로 독자 노선을 걷기 시작하였다. 경감은 웅략을 갖추고 있으면서 강건한 기상을 지닌 인물로 우리가 자주 쓰는 격언인 유지자사경성有志者事竟成(뜻이 있으면 일은 마침내 이루어진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오한吳漢은 28장 중 최고의 선봉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성격이 강하여 불리한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원래 현의 말단 관리인 정장이어서 배움은 없고 행동이 투박하지만 담력이 크고, 작전 수행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광무제의 신임을 끝까지 받았다.

    마무馬武는 원래 녹림군에 있다 광무제에게 투항하였다. 도량이 크며 말을 숨기지 않고 거침없이 하였다. 또한 충성심이 대단하였다.

    위의 세 명은 전쟁을 잘 이끈 인물들이다. 그들에게 자리를 주고 그들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였다.

    이런 전투형 인재 외에 광무제는 관리자형 인재들도 중용하였다. 바로 유학자의 기풍이 있는 장수들이었다. 바로 체준祭遵, 주우朱祐, 경순耿純, 이충李忠, 요기銚期가 그런 인물들이다. 체준은 군대의 법령을 집행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상으로 받은 재물은 모두 부하들에게 주었고, 유학을 중시하여 전쟁터에서도 항상 제사를 지냈다.

    주우는 전형적인 유학자였다. 성을 공략해도 노략질을 하지 않았기에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얻었다. 유수가 제위에 오르자 사치하지 말고 군주의 일을 매일 근심하라고 죽음으로 간언하였다. 요기는 효성이 지극하고 신의를 중시한 인물로 항복을 받은 지역에서 한 번도 노략질을 하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였으며 마음속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게 있으면 임금을 화나게 할지라도 반드시 간언을 올렸다. 이충은 강단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순하여 호구를 늘리는 데 소질이 있었다. 유가 경전을 아는 인재들을 등용하여 지역을 안정시켰다. 경순 역시 장수였지만 정치가의 재질이 있었다. 한때 동군 태수로 있을 때 죄 지은 사람을 체포하려다 그 사람이 자결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일로 경순이 파직되자, 백성들이 울고불고 야단이었다. 이에 광무제가 크게 감탄하여 경순을 치하하였다.

    광무제가 가장 크게 중용한 이는 28장 중 수위首位인 등우鄧禹이다. 그의 공로는 천하 쟁패의 관건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경감은 군사적인 일에서 등우보다 나았지만 성품이 잔인하였다. 등우는 경감과 같이 정세를 분석하여, 광무제에게 흥함이란 기반의 크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덕의 크기에 달려 있다고 권하였고, 광무제는 분발하여 차근차근 기반을 넓혀 갔다. 허베이 경략의 기본적인 정책은 등우가 짰고, 광무제 아래 인재들이 모인 것도 등우의 공이었다. 광무제는 어떤 싸움에서도 먼저 명분의 우위를 강조했다. 그래서 유수는 가장 관대하며 인재를 아낀다는 소문이 나자 많은 지역들이 그에게 투항했다. 적미군에게서 큰 싸움 없이 항복을 받아낸 것도 지구전을 펴자는 전략을 낸 등우의 공이었다. 물론 등우도 여러 차례 작전 실패를 하여 자신의 몸만 빠져나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등우가 최고의 공신이 된 것은 그가 천거한 인물들 때문이다. 그가 천거한 인물들은 하나같이 일을 잘 완수하였는데, 이를 보면 그는 지인지감知人知鑑을 가진 재상의 풍모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효성으로 이름이 높았고, 인재를 중시한 그는 권세로부터 일부러 멀어지려 했지만, 광무제는 태산에 봉선할 때 그를 데려갈 만큼 특별하게 대하였다.

    운대雲臺 이십팔장
    후한 광무제 뒤를 이은 이는 음황후와 사이에 낳은 넷째 아들 명제 유장劉莊(28년∼75년, 재위 57년∼75년)이다. 명제가 60년 영평永平 3년에 광무제를 보좌하여 후한을 건국한 스물여덟 명의 무장을 추모하여 유명한 화가에게 명해 수도인 낙양에 위치한 남궁南宮의 운대雲臺에 초상화를 그렸기 때문에 ‘운대 이십팔장’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공신도功臣圖는 당시 회화 양식에 따라 벽화로 그려졌다.

    운대는 원래 구름 위로 높이 솟구친 대각臺閣이란 의미이다. 운대는 광무제 때 대신들을 소집해서 정사를 논의하는 곳으로 사용되면서 나중에는 조정이란 뜻으로 차용되기도 하였다. 명제가 이곳에 이십팔장의 초상화를 그린 후에는 공신과 명장을 기리는 장소를 통칭해서 운대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십팔장이 광무제를 따르게 된 경로를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어떤 이는 어린 시절부터 유수와 관계를 맺고 따르게 되었고, 어떤 이는 유수의 명성을 듣고 스스로 추종하였으며, 어떤 이는 추천에 의해 따르기도 하고, 원래는 적이었다가 광무제의 인물됨에 감복하여 따르기도 하는 등 다양한 인연으로 광무제를 보좌하여 대업을 이룬 것이다.

    만약 이십팔장들이 자신의 주군인 광무제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은 분기점이 바로 광무제 유수와의 만남이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아주 재미있는 물음이 될 수 있다. 당시 그들도 이게 궁금했던지 이 문제로 한담을 나눈 적이 있다. 광무제가 뒷날 공신, 제후들과 함께 잔치를 하다 조용하고 화기애애하게 이 문제를 물었다. 그러자 등우는 글공부를 한 적이 있으니, 군郡에서 문학박사文學博士 정도 하지 않을까라고 하였다. 차례대로 대답하다 마무의 차례가 되자, 마무는 용감하고 힘이 세니 군의 도위都尉가 되어 도적을 단속할 거라 하자, 광무제는 정장亭長이 되면 될 거라고 한 일화가 있다. 누구를 주군으로 모시느냐에 따라 인생의 결실이 달라질 수 있다는 단면을 엿보게 해 준다.



    28수宿
    [주2]
    이야기

    지구에 있는 생명체 중에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볼 수 있는 존재는 인간뿐이다. 사람은 봉긋하게 솟아오른 머리로 하늘과 가까워졌고, 그만큼 하늘을 닮아 갔다. 그런 인간의 눈에 비친 별자리는 신비 그 자체였으며, 그 별자리들을 통해 하늘의 질서를 이해하고 깨우쳐 갔던 것이다.

    하늘의 별자리는 시시각각 달라진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변함없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별이 있으니, 바로 북극성北極星이다. 천변만화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축이 있음을 알려 준다. 그와 함께 태양도 일정한 법칙으로 순환하면서 우리에게 동, 남, 서의 방위를 밝혀 주고 있다. 그래서 사막이나 대양 한 가운데서도 하늘을 올려다보면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더불어 하늘은 시간의 흐름에 대해 일러 주기도 한다. 무의미하게 하루를 사는 인간에게 시간이란 무차별한 날들의 연속처럼 느껴지지만, 하늘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분명한 질서를 보여 준다. 해와 달의 변화로 낮과 밤 그리고 계절이 생겨난다. 별자리 변화에 따라 일 년 주기가 있음도 전해 주고 있지 않은가. 시간은 결코 지나가 버리고 마는 게 아니었다. 흘러가는가 하면 회귀하는 순환의 시간이었다. 이 하늘을 인식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이 바로 3원 28수이고, 우주의 시곗바늘인 북두칠성이었다. 여기에서는 이 글의 주인공들인 28장과 서로 상응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28수와 그들이 모신 광무제와 연관될 수 있는 3원에 대해서 살펴본다. 이제 눈을 들어 하늘에 있는 별자리들을 바라보라. 그리고 이성과 감성을 모두 열고 상상해 보기 바란다.


    삼원三垣 이야기

    고대부터 동양에서 바라본 하늘은 세 개의 담과 28개의 영역으로 구분되어 왔다. 즉 황도黃道와 천구天球의 적도 주변에 위치한 28개의 별자리(宿)를 이십팔수二十八宿라고 규정하였다. 7일이라는 수는 북두칠성北斗七星의 수를 본뜬 것이다. 북두칠성은 음양오행의 질서를 주재하는 별로, 음양을 나누고, 사시四時를 세우고, 오행을 가지런히 한다. 28수의 별자리는 이 북두칠성의 다스림을 받아 우주의 질서와 조화에 동참하겠다는 의미다.

    삼원三垣은 자미원紫微垣, 태미원太微垣, 천시원天市垣이다. 원垣은 담장이라는 뜻으로 웅장한 담이 쳐진 궁궐을 의미한다. 삼원이 별의 명칭이 된 시기는 아주 이르지만 그 명칭이 확정된 것은 수隋의 단원자丹元子가 지은 『보천가步天歌』에 이르러서였다.

    태미원은 삼원 중 위에 있으며 자미원 서남쪽에 있는데, 성星, 장張, 익翼, 진軫의 네 별자리 이북의 천구天區이며, 30개의 별자리에 78개 별을 포괄한다. 태미는 천자가 정사를 펴는 조정, 정부라는 뜻이다. 태미원의 가운데 있는 태미오제는 오행 순환에 따른 왕조 교체를 주관한다. 북두칠성과 함께 인간의 복록과 수명을 주관하는 삼태성三台星이란 별도 있다.

    자미원은 삼원 중 가운데에 있으며, 제일 중요하다. 북쪽 하늘의 중앙에 위치하여 중궁中宮이라고 하며 황궁皇宮에 비견된다. 천자와 황비, 태자를 상징하는 별들이 그 안에 자리 잡고 있다. 북극성을 중심으로 한 37개 별자리에 183개 별을 포괄한다. 이곳은 제성帝星을 중심으로 한 황궁이기에 자미란 말은 인간 세상에서 황권의 상징이며 황제의 대명사가 된다.

    천시원은 삼원 중 아래에 있으며 자미원의 동남쪽에 있다. 방房, 심心, 미尾, 기箕, 두斗의 다섯 별자리 이북의 천구로 39개 별자리에 287개의 별을 포괄한다. 천시는 하늘의 시장 혹은 제후들의 도시라는 뜻이다. 천자가 제후를 거느리고 도시를 순행한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별자리 28수와 사신四神 이야기
    이십팔수는 사방신四方神으로 동북서남의 방위에 따라 각기 7개씩 별자리를 주관하고 있다. 옛 사람들은 해와 달이 하늘에서 운행하는 상황을 매우 중시하였으며, 그 운행 방위를 근거로 하여 계절을 확정하였다. 해와 달은 사람의 시각 운동 속에서 노선이 고정되어 있다. 그래서 그 운행의 구체적 위치를 설명하기 위해 항성恒星을 28개 군群으로 나누어, 관측의 표준으로 삼았다. 28이라는 수가 나오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달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대략 27일 반 동안 한 바퀴 운행한 뒤에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데, 천문학에서는 이 주기를 ‘항성월恒星月’이라고 한다. 달이 지나는 궤도를 28등분으로 나누어 달이 매일 한 등분을 지나며 28일 후에 원래 자리로 돌아오게 되기 때문에 이 숫자를 취해 달이 있는 위치를 기록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용, 봉, 호랑이, 거북과 뱀 등의 네 가지 신수神獸를 접목하여 28수의 이름을 삼았다. 밤하늘의 별자리를 바라보며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는 주작을 상상하기도 하고, 춤추듯 날면서 승천하는 거대한 용을 상상해 내고, 신령한 거북과 뱀이 서로 휘감는 모습, 위풍당당한 맹호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이 사신四神을 신령한 동물로 간주하고 사방을 주관하고 보호하는 천신으로 숭배하게 되었다. 주작朱雀, 청룡靑龍, 현무玄武, 백호白虎 등 네 동물이 각기 하늘의 남, 동, 북, 서 네 방향의 별자리 모양을 표시하게 되었다. 이십팔수는 1년 사계절 동안 끊임없이 연속해서 남쪽 하늘을 지나간다. 아득한 옛날에 사람들이 봄날 해 질 녘에 천상天象을 관측해 보니, 주작의 일곱 별자리가 남쪽 하늘에 나타나고, 동쪽에 청룡의 일곱 별자리, 서쪽에는 백호가, 저 멀리 반대편 북녘 하늘에는 현무의 일곱 별자리가 있었다. 청룡과 백호는 모두 남쪽이 머리, 북쪽이 꼬리에 해당하고, 주작과 현무는 서쪽이 머리, 동쪽이 꼬리에 해당하게 된다.

    이십팔수의 구체적 모습은 다음과 같다.

    동방 청룡 7수

    청룡은 생동하는 목木 기운을 주관한다. 봄철에 씨앗이 터지고 몸을 비틀며 싹이 터 오르듯이, 청룡은 몸을 비틀며 하늘로 솟아올라 소생의 시간이 왔음을 알리는 봄의 전령사이다. 동쪽 지평선 어둑한 밤하늘 위 용솟음치는 긴 별들의 무리가 동방 7수다. 동방 청룡의 일곱 별자리는 용의 뿔인 각角, 용의 목인 항亢, 용의 가슴인 저氐, 용의 배인 방房, 용의 심장인 심心, 용의 꼬리인 미尾와 기箕 등 30개 별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각수角宿는 2개의 별로 구성되어 동물의 뿔과 닮았다고 한다. 바로 용의 뿔에 해당하는데, 해 질 녘 각수가 동쪽에서 떠오르는 것은 봄기운이 대지를 돌아 초목이 싹을 내고 어린 짐승이 뿔이 돋아남을 의미한다. 어쨌든 봄에 각수가 제일 먼저 동쪽에서 떠오르기 때문에 예로부터 이십팔수의 우두머리로 여겨져 왔다.

    북방 현무 7수
    [주3]


    북방 현무의 일곱 별자리는 두斗, 우牛, 여女, 허虛, 위危, 실室, 벽壁으로 25개 별로 구성되어 있고, 거북과 뱀이 휘감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이 중 남쪽 밤하늘에 있는 두수는 탄생을 주관하는 별이다. 북두칠성은 죽은 이의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별이라 여겨져 왔다. 그래서 죽은 이를 매장하는 칠성판에 북두칠성을 그려서 ‘돌아가셨다’고 한다. 이 북두칠성의 자루 끝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 따라가 보면 또 다른 됫박이 나온다. 바로 남두육성南斗六星이다. 남쪽은 불이고 만물이 성장하는 여름이기에 두성은 생명의 기운을 주재하여, 민간에서는 이 두성이 탄생과 건강을 주재하는 별로 알려져 왔다. 밤하늘에 두 개의 국자(斗)가 있어, 죽음과 삶의 수레바퀴를 끝없이 굴러가게 하고 있으니 태어남과 죽음이 서로 다른 길이 아니다. 삶이란 생과 사가 동시에 함께하는 총체적인 흐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서방 백호 7수
    서방 백호의 일곱 별자리는 살기등등한 호랑이다. 호랑이 꼬리인 규奎, 호랑이 몸체인 누婁, 위胃, 묘昴, 필畢, 호랑이 머리와 수염인 자觜, 호랑이 앞발인 삼參으로 총 45개 별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규수奎宿은 16개나 되는 별들이 구불구불 연이은 모양새가 마치 하나의 글자 같다고 해서 문운文運을 상징한다. 임금이 직접 쓴 글인 어필御筆과 어제御製를 말한다. 조선 22대 정조 대왕의 도서관인 규장각奎章閣은 여기서 명칭을 가져왔다. 가을의 수렴 기운을 상징하기도 한다. 또한 묘수昴宿는 일반인에게도 많이 알려진 플레이아데스성단Pleiades(좀생이별)이다. 28장 중 만수萬修가 관장하는 자수觜宿는 가을의 숙살지기를 그대로 보여 준다.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며 포효하는 호랑이의 얼굴을 뜻하는 이 별자리는 상대로 하여금 뻣뻣하게 몸이 굳게 만드는 음기 작렬의 살벌함이고 그 포효함은 오금을 저리게 한다. ‘자觜’ 자는 털 뿔이라는 뜻으로 부엉이의 머리 위에 뿔처럼 난 털을 나타낸다. 여기서 뾰족한 끝이라는 뜻이 파생되어 이 별자리는 만물을 잠재우는 음기의 ‘뾰족한 끝’이라는 의미가 된다. 쌀쌀한 기운이 감도는 초겨울 녘의 쓸쓸함이 감돌게 한다. 또한 자수는 군사의 일을 예견하는 별이기도 하다. 이 별이 밝으면 장군이 세력을 얻고, 움직이면 도적 떼가 횡행하며, 이동하면 장군이 쫓겨나게 된다고 한다.

    남방 주작 7수

    남방 주작의 일곱 별자리는 주작, 즉 붉은 봉황이다. 주작의 머리인 정井, 눈에 해당하는 귀鬼, 부리인 유柳, 목인 성星, 모이주머니인 장張, 날개인 익翼, 꼬리인 진軫으로 총 59개 별로 구성되어 있다. 남방 주작의 마지막 별자리인 진수軫宿는 수레라는 뜻이다. 옛 사람들은 이 별자리가 천자가 타고 다니는 수레를 상징한다고 생각했다. 이 별자리의 두 모서리에는 수레의 바퀴처럼 양쪽의 축이 삐져나와 있는데, 이는 천자를 보필하는 제후를 의미한다. 각각 좌할左轄과 우할右轄이라 하는데 좌할은 임금의 친척인 제후, 우할은 임금과 성이 다른 제후를 말한다. 이들 바퀴 부분이 진수보다 밝으면 나라에 모반이 일어나고, 진수에서 멀어지면 제후가 천자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해 나라가 어지러워진다고 한다. 이래저래 보필의 중요성을 상징한다. 28수의 마지막에 수레의 별 진수가 자리한 것은 천지의 쉼 없는 운행을 말함이 아닐까. 청룡의 뿔 각수에서 시작하여 한 해 운행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주작의 꼬리가 자리한다. 아래로 내려가며 웅크려 드는 겨울의 수水 기운은 새로운 출발에 필요한 에너지를 강렬한 한 점으로 응축하는데, 그 힘을 진수라는 수레바퀴에 실어 보내는 건 아닐까?

    예로부터 광무제를 보좌했던 28장이 이 이십팔수의 정기를 받고 잠시 인간사를 하고 갔던 것으로 믿어 왔다. 고대 문헌에서는 이십팔수를 의미하는 사칠四七이라는 말로 운대 이십팔장을 지칭하기도 하였다. 천자는 위로 하늘의 이십팔수를 본받아 제후 자리를 설치하기 때문에 제후가 천자를 위해 사방을 지키는 것은 하늘에 이십팔수가 사방을 주관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으리라.



    <참고문헌>
    『후한서 본기』(범엽 지음, 장은수 옮김, 새물결, 2014)
    『광무제와 이십팔장』(이재석, 상생출판, 2010)
    『후한서』(범엽 지음, 유홍유 편저,이미영 옮김,팩컴북스, 2013)
    『조선상고사』(신채호 원저,박기봉 옮김, 비봉출판사, 2007)
    『재미있는 중국제왕 이야기』(서현봉, 박우사, 1993)
    『인물지』(박찬철,공원국 지음, 위즈덤하우스, 2009)
    『종횡무진 동양사』(남경태, 그린비, 2013)
    『변경』(렁청진 편저,김태성 역, 더난출판, 2003)
    『별자리 서당』(손영달, 북드라망, 2014)
    『통감절요 2』(강지 저, 김정화 역, 충북대학교 출판부, 2015)


    [주1]
    왕망의 치세에 있어 그런대로 긍정적인 부분도 있다. 하나는 왕망 자신이 정한 황제 즉위 의식은 이후 광무제를 포함하여 역대 황제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었고, 유학 교육 기관을 설치하여 유학 공부를 장려하였고, 이후 광무제 역시 유학 교육을 장려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민족사학의 태두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왕망이 토지를 분배하여 빈부의 계급을 없애려는 의견을 대담하게 실행하려고 하였으니, 이 사건은 동양 고대의 유일한 혁명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주2]
    ‘수宿’라는 글자는 묵다 또는 별자리라는 뜻을 가진다. 이 글자는 사람이 집안에 요를 깔고 눕다 또는 사람이 집안에 묵는다, 머무른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늘에 있는 별들이 고속도로 휴게소처럼 태양과 달 그리고 행성들이 쉬어가는 쉼터로 인식을 했다.

    [주3]
    북방 수기水氣를 담당하는 현무가 여름 하늘에 뜨다니? 겨울 하늘과 이름이 바뀐 게 아닌가 할 수 있다. 이는 고전 천문학 특유의 관측법에 따른 불가피한 결과다. 땅의 방위는 북쪽을 기준으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정해진다. 그러나 하늘의 방위는 북쪽을 기준으로 아래에서 위를 올라다본 시점으로 정해진다. 그 결과 북쪽과 남쪽의 방향이 서로 바뀌게 되었다. 대지는 더운 열기로 끓어오르고 있지만, 하늘의 별자리나마 겨울의 수호신들이라 반갑지 않은가? 내려다본 하늘과 올려다본 하늘의 상반되는 풍경은 결국 태극의 다른 표현이고, 서로가 서로를 내재하고 있는 음양의 조화 법칙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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