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인종 다문화의 모자이크 나라 콜롬비아 Colombia

[세계지역문화탐방]

편집부

태평양과 대서양을 동시에 접하고 있는 남미의 자원 부국 콜롬비아는 고대부터 북쪽의 마야 문명과 남쪽의 잉카문명을 잇는 문화의 교량 역할을 하면서 다양한 인디언 문화의 흔적을 남겼다. 16세기부터 스페인의 식민 지배를 받다가 19세기에 들어서야 독립을 쟁취하였지만, 이후 자유당과 보수당의 과도한 경쟁과 대립으로 내란이 발생하여 4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아픔을 겪었다. 또한 다인종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유럽계 백인이 독점적 지배 구조를 형성함으로써 이에 소외된 세력이 40여 년간 농촌과 정글 지역을 중심으로 게릴라 무장 투쟁을 벌였고 마약 밀매와 폭력, 납치 사건 등이 횡행하면서 나라 전체가 엄청난 고통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2010년 집권 이래 산토스 정부가 반군 세력과의 평화협정 추진 등 평화 정착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서 콜롬비아는 점차 안정을 찾아 가고 있다. 중남미의 대표적 다인종 다문화 국가인 콜롬비아는 이제 그 문화의 복합성과 풍요로움을 바탕으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1. 자연환경과 역사


영토와 자연환경
콜롬비아공화국Republic of Colombia(Republica de Colombia)은 남미 대륙의 북서부에 위치하고 총면적은 남한의 약 12배인 약 114만㎢에 이른다. 중남미에서 네 번째로 큰 나라로 유일하게 태평양과 카리브 해에 함께 면해 있으며, 북서쪽으로 파나마, 동쪽으로 베네수엘라, 남동쪽으로 브라질, 남쪽으로 페루, 남서쪽으로 에콰도르와 각각 국경이 맞닿아 있다.

콜롬비아라는 국명은 아메리카 대륙의 항로를 처음으로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이름을 따서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가 지은 것이며, 당시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지배하던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들을 일컫는 말로 쓰이던 명칭이었다. 이 명칭은 콜롬비아가 스페인 식민 통치로부터 벗어나 1819년 그란 콜롬비아Gran Colombia라는 독립국이 창설되면서 국명으로 채택되었다.

국토의 대부분이 적도를 중심으로 남위 4°에서 북위 12°사이의 열대권에 위치하고 있으나 지형적인 조건으로 기후는 4개로 구분된다. 해안 등 평야지대는 고온다습한 전형적 열대우림기후이고, 해발고도 1,000∼1,500m의 지역은 평균기온 20℃ 내외의 아열대성 기후, 2,000m를 넘으면 연중 평균기온 14∼15℃의 상춘常春 기후로 연강수량도 1,000mm 내외의 쾌적한 기후를 이룬다. 해발고도 3,000m의 고지는 일일 기온차가 큰 편이다. 높은 산맥으로 인한 수직적 기후 변화의 영향으로 다양한 식물이 분포하며, 해안지방과 저지대에는 적도우림 등이 무성하고 고도에 따라 활엽수림, 혼합림, 침엽수림이 차례로 분포한다. 하지만 해발고도 4,000m를 넘으면 나무가 잘 자라지 못하며, 4,500m에서는 설선雪線을 이룬다.

안데스 산맥을 끼고 있는 콜롬비아의 지형은 매우 복잡한 편이지만, 크게는 북서부 고지와 남동부 저지로 구분된다. 안데스 산계山系에 속하는 북서부 고지는 서해안 쪽으로 바우도Baudó 산맥, 서부의 옥시덴탈Occidental 산맥, 중앙의 센트랄Central 산맥, 동부의 오리엔탈Oriental 산맥 등 4개의 습곡산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평행하는 산맥들 사이에는 좁고 긴 구조곡構造谷(tectonic valley)이 발달하였으며, 그 사이를 아트라토Atrato 강, 카우카Cauca 강, 마그달레나Magdalena 강 등이 북쪽으로 흘러 카리브해Caribbean Sea로 흘러든다. 서부 산지의 대부분은 결정질 암석으로 덮여 있으나, 도처에 용암 대지가 분포한다. 서부 산지에서 가장 높은 센트랄Central 산맥은 해발 고도 5,000m 이상의 고산 지대로서 만년설萬年雪로 덮여 있는 곳이 많으며, 최고봉은 크리스토발 콜론Cristóbal Colón 산(5,775m)이다. 주요 하천은 마그달레나 강과 그 지류인 카우카 강으로 두 강의 길이는 2,700km에 이르며, 예로부터 국내의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되어 왔다. 동쪽 지역은 목축 지대인 야노스Llanos라는 평원이 펼쳐져 있고, 동남쪽은 열대우림 지역인 아마존 강 유역이다.

전체 국토의 반 이상이 삼림이며 약 4%만이 경작 가능한 땅인데 그 대부분이 마그달레나 강, 카우카 강 유역과 기름진 고지대 골짜기에 분포하여 있다. 국토의 약 30%는 영구목초지이다. 콜롬비아는 동물 분포도 다양하여, 1,500여 종의 조류를 비롯하여 원숭이, 개미핥기, 대형 쥐, 페카리, 사슴, 곰, 퓨마, 표범, 라쿤, 거북, 아나콘다, 악어, 전기뱀장어, 메기 등의 동물이 서식한다.

콜롬비아의 역사
인디언 문화 중심의 고대사 흔적
콜롬비아의 고대사는 그 전모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채 수수께끼로 묻혀 있는데, 이 지역에는 대략 BCE 2만~1만 년경 최초의 인류가 정착 및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콜롬비아는 콜롬부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전까지 지리적으로 북쪽의 마야 문명과 남쪽의 잉카문명을 잇는 문화의 교량 역할을 수행했으나, 이들과는 달리 단일 정치문화 집단을 형성하지 못하고 다양한 부족이 안데스 지역과 태평양, 대서양 연안 지역에 달하는 넓은 영토에 산재되어 있었다.

기원전부터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원주민 문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지역으로는 타이로나Tayrona, 시누Sinú, 무이스카Muisca, 킴바야Qui-mbaya, 티에라덴트로Tierradentro, 산 아구스틴San Agustin 등이 있다. 가장 오래된 문화는 BCE 500년경 산 아구스틴San Agustin 지역에서 태동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12세기 무렵 북부 시에라네바다Sierra Nevada 산맥 부근의 타이로나Taironas 문화와 현재 산타페데보고타 주변의 치브차Chibcha 문화를 비롯한 여러 인디언 종족의 지방 문화가 스페인 정복 전까지 존재하였다.

콜롬비아의 원주민 문화는 1968년 5월 보고타 시에 신축된 황금미술관에 소장된 1만여 점의 선사 시대 황금제품 등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많은 부족들이 남긴 직물과 토기, 장식품 등과 더불어 황금 마스크와 황금 목걸이 등 다양한 황금 세공품들이 전시되어 눈길을 끌고 있다.

스페인의 정복과 독립
1499년 로드리고 데 바스티다스Rodrigo de Bastidas가 이끄는 스페인 탐험가들이 카리브해 콜롬비아 연안을 처음으로 탐험한 이후, 16세기에 들어와 카리브 해에 진출한 스페인이 콜롬비아 지역을 본격적으로 정복하기 시작했다. 1525년 산타 마르타Santa Marta 시가 첫 스페인 정착지로 설립되었고, 1532년에는 에레디아Heredía가 카르타헤나Cartagena 시를 세웠다.

스페인 사람들이 처음으로 콜롬비아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치브차족族은 120만 명 정도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 원주민들은 처음에 스페인인들의 도착을 묵과했지만 그들을 노예로 삼으려 하고 땅을 몰수하려 하자 이에 맞서 저항을 시작했다. 이러한 충돌 속에서 히메니스 데 케사다Ji­menéz de Quesada가 1538년 룬디나마르카 고원 지대에 산타페데보고타Santa Fe de Bogotá 시를 건설하였으며, 이후 보고타는 1717년 뉴그라나다(누에바 그라나다Nueva Granada) 부왕령의 수도로 지정되었다. 1544년 콜롬비아는 페루의 총독 관할로 합쳐졌으며 1739년 뉴 그라나다(현재의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파나마로 구성된 영토)의 일부가 되기까지 그 상태를 유지했다.

스페인의 정복과 식민화가 시작된 이후, 스페인의 지배에 대항하는 여러 번의 무장 봉기가 있었으나, 대부분은 상황을 반전시키기에 미약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18세기 후반이 되자 라틴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에서는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콜롬비아에서도 스페인으로 부터의 해방을 요구하는 민중들의 독립 운동이 격화되었다.

중남미 지역에서 스페인에 맞서 일어난 독립 운동의 실질적인 계기는 경제적 특권을 계속 유지하려는 본국 스페인 상인과 식민지에 대한 정치적 지배력을 유지하려는 부왕 및 본국 세력, 그리고 자유 무역을 추구하며 정치적 지배력까지 확보하려는 크리올료Criollo(중남미로 이주한 스페인계 백인 후손, 즉 중남미 식민지에서 태어난 스페인계 주민을 의미) 사이의 심각한 대립 때문이었다.

당시 라틴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는 누에바 그라나다와 누에바 에스파냐(멕시코를 비롯한 중앙아메리카 일대), 페루, 라 플라타(아르헨티나) 부왕령副王領 등 4곳으로 분할 통치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808년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침략하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남미 식민지에 대한 스페인 본국의 통제력이 흔들리는 상황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1810년경부터 남미 독립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콜롬비아 지역에서도 그 기세가 불타올랐다.

드디어 1810년 7월 20일(콜롬비아 독립기념일), 보고타 시민들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선언을 행함과 동시에 부왕을 국외로 추방했으며 스페인의 권위에 도전하는 첫 대의기구를 구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스페인 정부는 다시 콜롬비아 지배를 계획했고, 이에 대항하여 독립군의 무장 투쟁이 수년간 이어졌다. 콜롬비아가 결정적으로 독립을 이루게 된 것은 베네수엘라 출신으로 스페인 맞서 남미 독립 운동을 이끈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Simon Bolivar가 등장하고 나서였다. 1819년 볼리바르는 2,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콜롬비아에 침입해서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산탄데르Francisco de Paula Santander가 인솔하는 누에바 그라나다군과 합류했다. 마침내 1819년 8월 7일 볼리바르 연합군은 보야카에서 스페인군을 격파하고 보고타에 입성함으로써 실질적인 독립을 쟁취했다.

1819년 12월 지금의 콜롬비아, 에콰도르, 베네수엘라, 파나마 등 뉴그라나다 부왕령의 모든 영토를 포괄하는 대콜롬비아(그란 콜롬비아Gran Colombia) 공화국이 탄생되었고, 볼리바르가 초대 대통령으로 산탄데르가 부통령으로 피선되어 취임했다. 그러나 1830년에 베네수엘라, 1831년에 에콰도르가 분리 독립을 하면서 대콜롬비아는 해체되고 누에바 그라나다 공화국(República de Nueva Granada)이 창설되었다. 누에바 그라나다 공화국은 1858년 그라나다 국가연합(Confederación Granadina), 1863년 콜롬비아 합중국(Estados Unidos de Colombia)’으로 개칭을 거쳐 1886년에는 지금의 국가 명칭인 콜롬비아 공화국(República de Colombia)으로 변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03년에는 파나마도 독립을 해서 콜롬비아와 분리되었다.

보수당과 자유당의 경쟁사
볼리바르와 산탄데르가 대콜롬비아의 첫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취임한 이후, 볼리바르 대통령 추종자와 산탄데르 부통령 추종자 간의 대립이 빚어지면서 이후 콜롬비아 정치를 지배할 두 개의 정당(보수당과 자유당)이 성립되는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지주 계층이 중심이 된 볼리바르 지지자들은 강력한 중앙정부, 로마 카톨릭 교회와의 연대 및 제한된 참정권을 주장하며 교회의 권위를 배경으로 보수당 세력을 형성한 반면, 신흥 기업가 계층이 중심이 된 산탄데르 지지자들은 지방분권 정부, 교육과 여타 민사 문제에 대한 국가의 통제, 보다 광범위한 참정권 등을 주장하며 자유당 세력을 구성하였다.

콜롬비아는 18세기와 19세기 초까지는 보수당과 자유당 양 정당이 대략 비슷한 기간 동안 집권하였으며, 민간 정부 전통과 정기적이고 자유로운 선거 제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보수당과 자유당 양 진영 사이에 심각한 경쟁과 대립이 격화되면서 점차 무력 분쟁으로 치닫게 되었다. 그 결과 ‘천일전쟁’(1899~1903)이라 불리는 내란이 발생하여 약 10만 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냈다. 이어진 ‘폭력의 시대’(La Violencia : 1946~1957)에는 약 30만 명이 피살되는 참상이 벌어졌다. 이러한 갈등과 혼란이 새로운 혁명으로 번질 우려가 분명해지는 상황이 되자 두 정치 세력은 권력을 유지하고, 농촌에 근거지를 두고 세력을 키워 가는 반란 세력을 제어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군부 쿠데타를 지원할 것을 결정했다. 그리하여 구스타보 로하스Gustavo Rojas 장군에 의해 1953년 일어난 쿠데타는 20세기에 들어 콜롬비아가 겪은 유일한 군부의 정치 개입이 되었다. 그러나 이 정권은 1957년까지 단명하였으며, 이후 보수당과 자유당은 폭력을 종식하기 위해 1957년 7월 국민전선(National Front)을 형성하고, 권력 분배(교대 집권)에 합의했다. 매 4년마다 정기 선거에 의해 대통령을 선출하되 양당이 모든 선거 및 임명 직책을 균등하게 점유하기로 하였다.

플랜 콜롬비아와 민주안보 전략
안드레스 파스트라나Andres Pastrana 보수당 대통령(재임 1998~2002)은 FARC와 ELN의 공격 증가, 마약 생산 확산, 민병대 그룹 팽창 등에 직면하여 1999년 마약 테러 대응, 경제 회복, 민주제도 강화, 인권 존중 등을 지향하는 포괄적인 프로그램 플랜 콜롬비아Plan Colombia를 발표하였다. 1998년 11월 파스트라나 대통령은 콜롬비아 남중부 지역에 스위스 크기의 영토를 평화 협상을 위한 중립 지역으로 설정하고 동 지역을 FARC측에 이양했다. 그러나 FARC는 협상 기간 중에도 무력 공격, 납치, 코카 생산 확대 등의 행위를 지속하였으며 2002년 2월에는 민간 항공기 및 상원의원을 납치하는 사건을 벌였다. 이에 파스트라나 대통령은 FARC에 대한 군사 공격을 명령하고, 중립 지역에 대한 통제를 회복했다. 정부군의 공세에 밀린 FARC는 정글 지역으로 후퇴하고 군과의 직접적인 대규모 전투를 피하면서 인프라에 대한 공격을 증대시키는 전략을 구사했다.

2002년 5월 알바로 우리베Álvaro Uribe 후보는 민주안보(Seguridad Democratica)를 통한 치안 회복을 기치로 내걸고 무소속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우리베는 장기적 안보 전략하에서 Plan Colombia 목표의 추진을 지속했으며, 2002년 가을에는 모든 불법 마약 테러 그룹을 약화시키기 위해 정치·경제 및 군사 수단을 이용하는 국가안보전략을 발표하였다. 우리베 정부는 불법 마약테러 그룹이 자발적인 정전 및 마약 거래, 납치 종식에 합의하는 조건으로 평화협상을 제의하였다. 2003년 12월 우익민병대그룹(AUC)과의 평화협상 결과 31,000명의 AUC 요원들이 집단 무장 해제되었고, 추가로 약 14,000명의 FARC, AUC, ELN 요원 등이 개별적으로 무장 해제되었다. 2005년 7월 우리베 대통령은 무장 해제된 자들에 대한 폭력 포기 및 불법 재산 반납 시 처벌 경감에 관한 정의와 평화의 법(Ley de Justicia y Paz)에 서명을 했다.

산토스 정부의 대연정 체제
2005년 콜롬비아 헌법 개정으로 대통령 1회 연임이 허용(연임에 의하지 않은 중임은 기허용)되었다. 이에 따라 우리베 대통령은 2006년 5월 선거에서 62%의 득표로 재선되었으며, 2006년 3월 총선에서는 우리베 대통령을 지지하는 정당(국가연합사회당, 보수당, 급진변화당 등)이 상·하 양원에서 모두 다수를 차지하였다. 2010년 3월 총선에서도 여당 연합은 상·하 양원 공히 과반수 이상의 의석을 확보하였다. 우리베 대통령은 3선을 시도하였으나 헌법재판소에서 연속 3선 불가 결정을 내림으로써 그 꿈은 무산되고 말았다. 2010년 5월 대통령 선거 1차 투표가 실시되었는데, 각각 1, 2위를 차지한 국가연합사회당 산토스Santos 후보와 녹색당 모쿠스Mockus 후보 간에 6월 20일 2차 결선투표가 치러졌다. 그 결과 후안 마누엘 산토스 칼데론Juan Manuel Santos Calderón 후보가 69.01%의 압도적 득표로 승리함으로써 2010년 8월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산토스Santos 대통령은 선거 시부터 국민대단합을 주창하면서 야당의 참여를 촉구하여 집권 초기에 자신이 소속된 국가연합사회당(U당) 이외에 자유당, 보수당, 급진변화당과 연정을 실시해 왔으며, 2011년 7월에는 대통령 선거에서 경쟁 상대였던 녹색당까지 연정에 참여시킴으로써 대연정 체제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대연정은 상원 및 하원 의석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게 됨으로써 사실상 여당을 견제할 만한 야당이 없는 상태를 구축하였다.

산토스 대통령은 제1기 정부(2010~2014) 중 안정적 경제성장은 물론 주택 및 교통 인프라, 교육, 치안 등 분야에서 개선을 달성하였고, 특히 2012년 11월 이래 최대 좌파 반군 집단인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과의 평화 협상을 진행시켜 왔고, 2014년 6월에는 제2좌파 반군 집단인 국민해방군(ELN)과도 평화 협상 개시에 원칙적으로 합의하였다. 산토스는 이를 토대로 2014년 6월 대통령 선거에서 결선 투표까지 치르는 경합 끝에 승리하고 제2기 정부(2014~2018)를 출범시켰다. 그런데 2014년 3월 개최된 총선에서 여당연합(국가연합사회당, 자유당, 급진개혁당)이 하원에서 과반수 확보에 성공하고도 상원에서 다수를 차지하지 못함에 따라, 보수당(과거 여당연합을 구성하였으나 2014년 총선을 계기로 탈퇴) 내지 여타 중소 정당과의 제휴 또는 정책적 타협을 추진하는 형태로 정국 변화가 이루어졌다. 총선에서 우리베 전 대통령이 이끄는 보수우파 민주중도당이 상원 20석, 하원 19석을 차지하여 신흥 정치 세력으로 부상하였고, 이에 따라 콜롬비아 정국은 산토스 제1기 정부에 비해 정부-국회 간의 공조가 다소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2. 정치 및 행정


헌법 및 정치 제도
콜롬비아는 대통령제 중심의 공화정으로 국정이 운영되는 국가이다. 3권 분립의 원칙에 입각하여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국이 33개 주로 되어 있으나 연방주의는 미도입 상태이다. 다만, 주지사, 시장, 주 및 시 의회 의원 등은 주민들의 직접 선거에 의해 선출되며 지방자치 제도가 비교적 발달된 상태에 있다.

콜롬비아는 1832년 누에바 그라나다Nueva Granada 헌법을 공포한 이래, 수차례의 헌법 개정을 거치면서 자유민주주의 발전을 기해 왔다. 특히, 1991년 신헌법 공포를 통해 검찰총장, 인권 옴부즈만, 헌법재판소, 최고법원평의회 등의 기관을 신설하고 부통령직을 재도입하였으며, 일반이혼, 이중국적, 구두재판절차, 개인의 기본권 보호 강화 제도(Tutela) 등을 도입하였다. 콜롬비아 국내법은 기본적으로 스페인 법 체제를 답습하였으나 최근 미국법 체제로 전환되는 추세로, 1992~1993년 미국 형사소송법 절차를 모델로 한 형법을 도입하고 당사자주의(adversary system)를 채택하였으며 행정부와 입법부의 제반 행위에 대한 사법심사제를 채택하였다. 또한 국제형사법원(ICC)의 관할권을 인정하였다.

행정부
콜롬비아는 대통령 중심제로 국가 행정이 운영되며, 대통령은 4년 임기로 직접선거로 선출되며 1회에 한해 연임이 가능하다. 이전에는 대통령이 단임제로 재선이 불가능하였으나 2005년 헌법 개정을 통해 1회에 한해 연임이 허용됨으로써 당시 우리베 대통령이 2006년에 재선될 수 있었다.

현재 콜롬비아는 후안 마누엘 산토스Juan Manuel Santos Calderón가 2014년 대통령 재선에 성공하여 집권 중이며, 정부 성향은 우경에 가깝다. 부통령은 대통령과 함께 직접선거로 선출되며 대통령 유고시 대통령직을 승계한다. 전국 행정 구역 구성은 총 32개의 주departamento와 1개의 수도주distrito capital 로 되어 있다.

입법부
의회는 상하 양원제로 운영되며, 상원과 하원 모두 직접투표로 선출된다. 상원은 102석, 하원은 166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원은 전국 단위로 선출되며, 상원의원 2명은 인디언 특별선거구에서 선출된다. 하원은 지역구 대표로 선출되는데 각 주 및 보고타를 지역구로 2명씩 선출되며 인구 25만 명당 1명을 추가로 선출한다. 상하원 모두 의원의 임기는 4년이다.

의회의 회기는 3월 16일~6월 20일과 7월 20일~12월 16일에 열리는 일반회기와 정부의 요청이 있을 시 소집이 가능한 특별회기가 있다. 다만 특별회기의 경우 정부가 요청한 안건만 처리해야 하며, 정부가 요청한 회기 초과는 불가하다.

콜롬비아의 정당은 1813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선언 이후 보수당과 자유당 양당이 전통적으로 정국을 주도하여 왔으나, 1991년 신헌법이 제정되면서 다당제가 형성되어 현재 10여 개 정당 또는 정치단체가 존재하고 있다. 2010년 8월 산토스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국민 대통합을 주창, 대연정을 시도한 결과 많은 정당이 연립여당에 참여했다. 2014년 3월 총선을 계기로 우리베 전 대통령이 이끄는 보수우파 신당인 민주중도당이 창당되었으며, 보수당은 연립여당 지지 또는 반대파로 양분되는 모습을 보이는 등 정치 지각 변동 요인이 발생하였다.

주요 정당으로는 중도우익 성향의 국가연합사회당(Partido Social de Unidad Nacional, U당), 중도 성향의 보수당(Partido Consevador), 좌익 성향의 자유당(Partido Liberal), 중도 성향의 급진변화당(Cambio Radical), 보수우파 계열의 민주중도당(Centro Democrático), 좌익 성향의 대안민주당(Polo Democrático Alternativo), 진보성향의 녹색연합(Alianza Verde), 기독교계 정당인 혁신당(Movimiento Independiente de Renovación Absoluta), 우익 성향의 시민선택당(Opción Ciudadania) 등이 있다.

사법부
사법부는 분야별로 권한이 다른 4개의 최고법원으로 구성된다. 형사·민사소송 분야 최고법원인 대법원(Corte Suprema), 행정소송 분야 최고 법원인 최고행정법원(Consejo de Estado), 법을 수호하며 국내법의 위헌 여부 및 국제법(조약 포함)에 대한 헌법 합치성을 판단하는 헌법재판소(Corte Constitucional), 사법 기관의 행정 및 예산과 사법공무원의 징계를 담당하는 최고법원평의회(Consejo Superior de la Judicatura)가 있고, 검찰총장(Fiscal General)은 사법부의 일부를 구성한다.

또한 감찰·감사기관으로는 선거직을 포함한 공무원 감찰기관으로 정직, 면직, 피선거권 박탈 등의 권한을 보유한(기소권, 재판권은 미보유) 공직감찰원(Ministerio de Pública; Procuraduria General), 국가 재정 및 자산의 운용과 감찰을 맡은 회계감찰원(Contraloria General), 그리고 회계감찰원 및 지방자치체 소속 감사국 업무를 감사하는 감사원(Auditoria General) 등이 있다.

최근 정치 동향
콜롬비아의 최근 정국은 민주안보와 인권을 초점으로 정국을 운영한 우리베 정부(2002~2010)와 민주번영 및 평화정착을 모토로 정국을 운영하고 있는 산토스 정부(2010~2018)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민주 안보와 인권(우리베 정부)
우리베 전前 대통령은 2002년 집권 이후 민주 안보 정책의 기치하에 군·경찰 병력을 강화시키고 FARC 등 불법 무장 단체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 정책을 취하는 한편,「정의와 평화의 법」(Ley de Justicia y Paz)을 통한 보상 조건으로 약 47,000명의 게릴라들을 무장 해제시켜 치안을 개선하였다. 특히 2008년 FARC의 제2인자 라울 레예스Raúl Reyes 사살, 잉그릿 베탕쿠르Ingrid Betancourt 전 대통령 후보 등 15명의 인질 구출(하케Jacque 작전), 많은 게릴라 투항 유도 등으로 FARC 세력이 약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콜롬비아군에 의한 무고한 민간인 사살 및 인권 침해 사례가 자주 발생하고 이에 따라 국제적 비난 여론이 일자, 우리베 대통령은 민간인 10명 살해 사건을 계기로 2008년 10월 육군참모총장의 사임을 수리하고 3명의 장성을 포함, 27명의 군 장교를 해임함으로써 군내 인권 개선 메카니즘을 구축했다.

민주 번영 및 평화 정착(산토스 정부)
산토스 대통령은 국민대통합의 기치 아래 자신의 소속 정당인 국가연합사회당(U당)은 물론 우리베 집권 시 연정에 참여했던 보수당 및 급진변화당 그리고 야당인 자유당의 지지까지 확보한 가운데 고용창출, 의료 및 교육 서비스 개선 등을 통한 민주 번영(Prosperidad Democrática)이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산토스 대통령은 우리베 대통령의 민주안보 정책으로 개선된 안보 및 경제여건을 바탕으로 게릴라 없는 하나의 콜롬비아 건설, 부정부패 척결을 통한 투명성 제고, 정치 및 사법 개혁, 인근국과의 관계 개선, 강제 이주민들에 대한 보상 및 토지 반환 등 국민통합 정책을 추진하였다.

2010년 11월 고용 창출, 빈곤 감축, 치안 안정을 골자로 한 4개년 국가개발계획을 발표하였는데, 전 국민의 참여하에 각 부처가 과제별로 목표를 설정하고 추진 상황(실적)을 정기적으로 분석, 검토하는 획기적인 국가 발전 계획을 수립, 시행하였다. 2012년 콜롬비아의 각종 범죄 건수는 10년 전과 대비하여 3분의 2 이상 대폭 감소하였으며 연간 피살자 수도 4년 전 대비 3천명이 감소되어 13,000명 수준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좌파 반군에서 무장 해제된 조직원이나 마약 거래범으로 구성된 신흥 범죄 집단(Bacrim)이 새로운 민생 치안 위협 요인으로 부상하였다. 한편, 불법 무장 세력들의 공갈·협박에 못 이겨 거주지를 떠난 강제 이주민(Desplazados)이 약 4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2014년 6월 대통령 선거 결선 투표에서 재선에 성공한 산토스 대통령은 좌파 반군과의 평화 합의를 최대 목표로 추진하면서도 제1기 정부에서 다소 미진하였거나 지속 개선이 요망되는 분야에도 중점을 두고 국정을 운영 중이며, 특히 권력 균형 분야에서는 대통령 연임제 폐지 및 5~6년 단임제화, 대통령 임기와 지방자치단체장 임기 동일화, 국회의원 선거 제도 개선, 사법부 및 감사·검찰기구 개혁 방안을 제시하는 등 전반적 정치 구조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절반의 성공을 거둔 평화 협상
1964년 이래 반세기 이상 지속된 콜롬비아 정부와 FARC 간의 내전은 60만 명 이상의 희생자와 400만 명 이상의 피난민을 발생시키는 등 심각한 정치 경제 사회적 불안정을 초래하였다. 산토스 정부는 이를 해결하고자 2012년부터 최대 반군 세력인 FARC측과의 평화 협상을 개시하여 4년간의 협상 끝에 2016년 11월 평화협정을 타결하였다. 협정에 따르면 FARC 대원 7천여 명은 26개 비무장 지역으로 집결해 2017년 5월 31일까지 유엔에 무기를 모두 반납해야 하며, 경미한 범죄를 저지른 대부분의 FARC 대원은 사면을 받고, FARC는 정치단체로 거듭나 사회로 복귀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일정상의 일부 조정이 있기는 했으나 협정의 이행이 순탄하게 이루어진 결과 FARC는 약속대로 제도권 내의 정치세력으로 새롭게 출발하게 되었다.

FARC와의 평화협정을 마무리 지은 산토스 정부는 2017년 2월부터 마지막 최후의 반군으로 불리는 ELN(국민해방군)과의 평화 협상에 나섰다. 양측은 네 차례의 협상 끝에 2017년 9월 교황의 콜롬비아 방문을 앞두고 101일간의 임시 정전에 사상 처음으로 합의했다. 그런데 2018년 1월 초 임시 정전 종료 후 ELN이 정유 시설을 파괴하고 군경을 상대로 공격을 재개하자 협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카라콜 TV 등 콜롬비아 현지 언론에 의하면 지난 2018년 1월 29일(현지 시간) 산토스 대통령은 쿤디나마르카 주에서 열린 한 행사장에서 ELN과의 평화 협상 중단을 밝혔다. 산토스 대통령은 “나와 국민의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했다”면서 “우리가 ELN의 언행일치를 확인하지 않는 한 며칠 내로 시작될 제5차 평화 협상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지난 1월 27∼28일 콜롬비아에서는 경찰서에 대한 3건의 폭탄 공격으로 경찰 7명이 사망하고 경찰과 민간인 등 40여 명이 다쳤다. 정부 측은 연쇄 폭탄 공격의 배후로 ELN을 지목하고 “ELN이 진정 평화를 원하는지 의문이 든다”고 비난했다.

베네수엘라와 접경 지대인 콜롬비아 동부와 북부 오지 지역을 거점으로 한 ELN은 옛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이 결성된 1964년 쿠바 사회주의 혁명에 자극받은 급진 가톨릭 신자를 중심으로 조직된 제2 반군 세력이다. 현재 1,500∼2,000명의 조직원이 남아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ELN은 최대 반군이었던 FARC가 2016년 11월 정부와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정치세력으로 거듭남에 따라 최후의 반군 조직이 됐다. 자치권이 보장된 지역 전투 조직의 연방 형태로 조직된 ELN은 운영 자금을 마련하고 정부와의 협상력을 높이려고 종종 납치하는 것은 물론 경찰서와 정유시설을 공격해 왔다.

산토스 대통령은 평화협상에 대해 재검토 의사를 밝혔고, 바란키야 공격의 용의자 1명을 체포했으며 ELN측 성명으로 반군의 공격이 확인됐다고 주장했다. ELN측은 새로운 정전 조치를 지지하지만, (실제적인) 정전 조치가 부재한 상태에서 콜롬비아 정부에 대한 무장 투쟁은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다.

3. 경제


경제 개관
콜롬비아는 1970년대∼1990년대 중반까지 견실한 경제정책을 효과적으로 집행하는 유일한 중남미 국가로 평가되어 왔으나, 1990년대 중반 이후 무절제한 재정·금융·외환정책을 도입하면서 재정적자 확대 등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2002년 우리베 대통령의 취임 이후 시행된 엄격한 재정 적자 축소 정책 등으로 콜롬비아 경제는 2005년 4.7%, 2006년 6.7%, 2007년 6.9%(최근 30년 중 최대성장), 2008년 3.5%의 성장을 기록했다. 미국발 세계 경제위기로 인해 2009년도에 1.7%의 성장에 그친 콜롬비아 경제는 2010년도에 전반적인 세계 경제 회복 추세와 함께 낮은 이자율에 기반한 경기부양책 실시로 4.0% 성장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는 페루, 아르헨티나 등 역내 여타 국가에 비하면 저조한 성장으로 특히 건설 및 농목축 부문에서의 침체, 역사상 최대의 홍수 피해 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콜롬비아는 2011년 들어 석유, 광물자원의 생산, 수출 급증, 외국인 직접투자 증대, 1차 상품 및 비1차 상품의 수출 증대 등에 힘입어 유럽 경제 위기, 라니냐 현상에 의한 홍수 피해에도 6.6%의 높은 경제성장을 시현하였다. 2012년 4.0%, 2013년 4.9%, 2014년 4.6% 등 안정적인 성장세를 지속 중이다. 산토스 정부는 적극적으로 세제 개혁, 자원 로열티 배분 개혁, 성장 동력 분야 투자 확대, 인프라 구축, 빈곤층 감소, 실업률 감소 등을 통해 국가경쟁력 강화에 기여할 것으로 전망된다.

경제 정책
콜롬비아는 국가 경제의 발전을 위한 경제·통상정책의 방향 정립에 많은 힘을 쏟고 있다. 먼저 콜롬비아의 경제안정 및 성장 촉진 정책의 추진에 주력하고 있고, 시장 친화적인 정책과 함께 적극적인 경제개발 노력 및 지역협력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각종 세제 개선과 인센티브 제공, 다양한 정부 프로젝트와 개발 자금 유입을 통한 고용창출 극대화 등을 통해 투자 유치 활성화를 유도하고 있다.

또한 12개의 신성장 동력 육성 산업(섬유, 자동차부품, 의료관광, 전력, 섬유·의류, 소프트웨어 등) 프로그램을 적극 추진하여 국내 기간 산업으로 육성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고, 북미, 중남미, 유럽, 아시아 등에 대한 지속적인 시장개방 정책도 시행 중이다. 경제공동체 가입 확대를 통한 교역대상 다변화도 추구하고 있는데, 종전 대서양 편향 정책에서 벗어나 대외 교역 대상지역을 아시아·태평양으로 넓히는 정책을 적극 추진 중이다.

주요 산업
콜롬비아는 농업·광업을 주로 하는 후진국형 경제체제를 가진 나라이다. 총 수출액의 상당 부분을 열대성 농산물이 차지하는데, 주요 농산물로 커피(세계 제2 생산·수출국)를 비롯하여 목화, 사탕수수, 바나나, 옥수수 등을 재배하며, 그밖에 쌀, 감자, 밀, 보리, 잎담배, 카카오, 코코넛 등 열대 및 아열대 농산물도 생산한다. 커피는 해발고도 1,300∼2,000m의 안데스 산간 지방에서 집중적으로 재배되며, 식부면적植付面積은 약 90만ha에 달하고 연산年産 약 51만 톤으로 국제 커피 시장에서 인기가 높다. 바나나는 주로 카리브해海 연안 지방에서 생산되며 국내 소비와 해외 수출이 반반이다. 사탕수수는 태평양 연안 지방이 주산지이며 최근 생산량이 증가하고 있다. 목축업 역시 콜롬비아의 주요 산업 가운데 하나이다. 소를 비롯하여 말·돼지·양 등을 사육하는데 오리노코 강 유역의 야노스 계곡, 카우카 계곡이 주요 목축 지대이다.

태평양과 대서양을 접하고 있어 다양하고 풍부한 어족이 잡히는 콜롬비아에서 수산업의 GDP 비중은 9.12%에 달하며, 2005년 총 어획량 80만 톤 중 69만 톤이 태평양 연안에서 어획되었다. 어획량 증가에 따라 관련 산업도 급성장하고 있으며, 특히 EU 지역의 GSP 대상 품목으로 수출 전망이 밝은 편이다. 또한 콜롬비아는 남아메리카 유수의 광업국으로 금·은·백금·철·수은·석탄·석유·보크사이트·니켈·몰리브덴·우라늄 등 지하 자원을 생산하고 있다. 주요 금광은 태평양 연안에 분포한다. 오리노코 강 상류 지방에서는 약간의 철과 석탄이 생산되어 국내용으로 소비된다. 백금은 잉카 시대에 이미 채굴·제련되었으며, 러시아와 함께 세계 굴지의 생산국으로 알려져 왔다. 1970년대 말에는 안티오키아 서부 지방에서 대규모 구리 광산이 발견되었다. 남아메리카에서 베네수엘라 다음의 제2 산유국이며, 주요 유전지대는 카리브해 연안 저지, 에콰도르 국경 지방 및 마그달레나 강 계곡이다.

콜롬비아는 풍부한 농·임·지하자원을 보유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제조업이 별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1970년 이후 섬유공업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으며, 담배제조, 시멘트, 고무, 피혁, 화학공업 등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최근 금속제련, 정유, 석유화학, 기계공업 등 중화학공업이 급성장하고 있다. 한때 섬유산업이 콜롬비아 전체 제조 산업을 대표하는 산업이라 할 수 있었으나 최근에는 중국산 제품에 밀려 잠식당하고 있다. 식료 부문은 전체 산업의 12%를 점유하고 있다. 특히 담배, 음료, 식품의 대외 수출은 매년 증가세를 보이고 있으며, 년 평균 성장률이 9%에 달하고 있다. 음료의 경우 세계 5위의 맥주 제조 회사 BAVARIA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주요 공업 도시는 카우카 계곡의 메데인, 마니살레스, 아르메니아, 칼리 등이다. 건설업은 1990년대 전반에 마약 자금이 대량 유입되면서 경제 거품 현상을 주도하였으나 최근 반反마약 정책으로 인해 건설 경기도 동시에 침체하였다.

대외무역은 원료를 수출하고 제품을 수입하는 후진국형 구조를 나타내고 있다. 주요 무역 대상국은 미국을 비롯하여 독일, 네덜란드, 에스파냐, 스웨덴, 페루,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영국, 일본 등이다. 이 나라 최대 공업 도시인 칼리의 섬유, 식품, 금속, 화학 공업은 거의 미국 자본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주요 수출품은 석유, 커피, 석탄, 바나나, 에메랄드, 금, 꽃꽃이용 꽃가지이고, 수입품은 기계, 통신기기, 화학제품, 종이제품, 연료, 전기, 식품이다.

향후 경제 전망
2018년 콜롬비아의 수출은 전년 대비 5.9% 증가한 390억 달러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석유수출국기구(OPEC)에 따르면, 국제 유가는 전년 대비 약 32% 대폭 상승한 배럴당 평균 70달러 내외를 유지할 것으로 보여 수출입 단가 상승을 견인할 전망이다. 이에 따라, 콜롬비아 주력 수출 품목인 광물성 연료 및 광물유 제품(총 수출액의 50% 차지)이 유가 급등에 힘입어 2018년 수출 증가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또한 FARC와의 평화협정 이행에 따라 콜롬비아 정부는 반군이 점령하던 지역을 시작으로 2020년까지 기술농업 지원 및 농업 인프라 구축 등 자국의 농업 발전을 위해 투자하고 있다. 이에 따라 농산물 재배량 증가도 기대되고 있으며 UN에서는 평화협정 이후 콜롬비아 농업 프로젝트 지원금으로 2017년 10월 1,150만 달러를 추가 지급하였다.

한편 2018년 콜롬비아의 수입은 전년 대비 8.5% 증가한 500억 달러가 될 것으로 전망되는데, 제조업 기반이 열악한 상황이기 때문에 2018년에도 완제품 및 2차 산품 중심의 수입은 꾸준할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콜롬비아 정부는 단·장기적 인프라(도로, 공항, 항만 등) 구축 투자 및 무장반군(FARC)과의 평화 협정 이행으로 내전 피해 지역 복구와 산업 개발 관련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으므로 건설 중장비 및 건설 자재 수요가 증가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2018년에 수출입이 증가될 것으로 기대되는 품목은, 수출에 있어서는 천연광석(진주, 금 등), 커피, 시멘트, 광물성 오일 등 1차 산품 중심으로 증가가 예상되고, 수입에 있어서는 주로 2차 산업 품목으로 편중돼 있는데 특히 석유화학제품과 기계류, 건설중장비, 휴대폰 등의 수입량이 증가할 전망이다.

콜롬비아의 2018년 수출이 유가 상승 및 국제원자재 가격 회복에 따른 수출 단가 상승과 수요 확대 등으로 1차 산품 중심으로 완만한 성장세를 보이고 2차 산업 품목은 전년과 비슷한 수준이 될 것으로 전망됨에 따라, 콜롬비아 정부는 2012년부터 시행해 온 2차 산업(제조업, 건설업 등) 성장을 위한 기술 및 생산력 강화에 투자를 더욱 집중하고 있다. 콜롬비아는 남미 13개 국가 중 제조업이 3위 규모이며 GDP의 12%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콜롬비아는 미국에 대한 교역 의존도가 높아 미국 경기 변화에 민감한데, 미국 등 선진국과 주요 신흥국의 경기 회복에 힘입어 성장세를 이어갈 것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4. 사회와 문화


사회문화적 특성
콜롬비아는 중남미의 대표적 다인종, 다문화사회다. 이 나라가 문화적 다양성을 지니게 된 것은 역사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 스페인의 정복과 식민지화와 함께 스페인의 유럽계 백인들이 콜롬비아에 유입되었고, 이들이 아프리카의 노예도 함께 데려오게 되면서 콜롬비아는 다인종 다문화 국가로 자리를 잡았다. 거기에 콜롬비아의 지형적 고립성과 콜롬비아 내의 지역 간의 낮은 접근성이 더해지면서 지역별로 다른 지역들과는 구분되는 자신들만의 고유한 문화적 특징을 보유한 문화권이 발달되었다.

유럽 선조들의 영향이 가장 강하게 정착되어 있는 안데스 문화 인디언들과 아프리카인들의 문화들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는 카리브 해 연안 문화와 태평양 문화 그리고 아마존과 오리노코 강 부근의 인디언 문화 등이 다양하게 혼재되어 있다. 이러한 문화의 복잡한 혼합은 전통 공예품 음식에서 뿐만 아니라 건축, 미술, 조각부터 문학, 영화, 사진, 음악, 춤, 연극까지 많은 부분에서 고유한 표현 방식을 보여주게 되면서 콜롬비아 문화의 풍요로움을 만들어 주었다. 콜롬비아에서는 Estrato(계층) 시스템을 통해 생활 수준 등에 따라 거주 지역을 1~6급으로 분류하고 있으며, 전 국민의 80%가 가톨릭으로 종교적인 사회 불안 요인은 없다.

콜롬비아 정부는 「비전 콜롬비아 2019(Visión Colombia 2019)」를 통해 시민들의 문화 정책 형성 과정에의 참여, 문화적 다양성에 입각한 문화 창조, 문화유산 보호 평가 및 인정 강화, 문화 콘텐츠 강화 등의 제반 문화정책을 강조하고 있다.

콜롬비아가 직면한 사회 문제는 도시의 높은 실업률, 극심한 빈부차 등이다. 특히 극소수의 부유층이 정치·경제·사회적 주도권을 잡고 있으며, 대부분의 국민은 저소득층에 속하여 있는 탓에 자원 부국인 콜롬비아는 계속되는 정치·사회적 불안을 겪고 있다. 콜롬비아는 중남미의 대표적 다인종·다문화 사회이지만, 20%에 불과한 유럽계 백인들이 정치 경제 및 사회 전반에서 실질적인 결정권을 장악하고 있어, 이에 반발한 게릴라 그룹들이 지난 40여 년간 농촌과 정글 지역을 기반으로 무장 투쟁을 전개했고 이와 함께 강력한 마약 밀매 그룹의 준동, 게릴라와 불법 폭력 조직에 의한 납치, 밀수, 위폐 제조 등이 범람하면서 사회 전반에 걸친 불신 풍조가 폭넓게 퍼져 있다. 이와 같은 사회 불안정 요인들을 해소하기 위해 현행 산토스 정부는 반군 게릴라 조직과의 평화 협상에 적극성을 보이고 있으며, 그 결과로 치안이 상당 부분 개선되는 등 진전을 이루고 있다.

인구와 민족 구성
콜롬비아는 한반도의 5배, 한국의 12배 정도인 약 114만㎢의 면적에 인구는 4,769만 명(2017년 7월 추정치)으로 세계 29위에 해당하는 규모이다. 이 영토에는 많은 인종들이 다양한 분포를 이루며 거주하고 있는데, 이러한 인종의 다양성은 아메리카 인디언, 스페인의 식민지 개척, 이주민인 아프리카계 후손, 그리고 이들 간 혼혈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또한 세기 말에는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유럽계 이민자들과 리비아와 시리아의 중동인, 아랍인 이민자들 그리고 미국, 일본, 쿠바, 중국으로부터 많은 이민자들이 콜롬비아 제1의 무역항 바랑키야Barranquilla에 들어오면서 인종 구성은 더욱 다양해졌다.

콜롬비아 인구의 대다수는 유럽계 백인과 인디언 혼혈인 메스티소mestizo 인종으로 전체 인구의 58%를 차지하며 두 번째 그룹은 20%의 백인종, 그 뒤는 아프리카계 흑인과 유럽계 백인의 혼혈인 물라토mulato가 14%, 그리고 나머지는 4% 의 아프리카 흑인 혈통과 3%의 삼보(아메리카 토착민과 아프리카 흑인 혼혈)가 차지하며, 87개 이상의 인디언 부족 마을을 이루고 살아가는 약 40여 종족의 순수 아메리카 토착민은 1%에 불과하다.

언어와 종교
콜롬비아의 공식 언어는 콜롬비아 헌법 제 10조항에 따라 스페인어로 규정되어 있다. 하지만 22개 언어군에 속하는 대략 65개의 토착 언어들이 존재하며 이러한 언어들 역시 그 해당 영토의 공식 언어로 인정하고 있다.

종교 분포는 근래 들어 2~5백만 명이 가톨릭을 떠나 성공회, 루터파, 몰몬교 등으로 개종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가톨릭이 지배적인 종교라 할 수 있다. 콜롬비아에서는 1994년 종교자유화법(Ley de Libertad de Cultos)이 제정되었으며 현재 약 850개 종교가 공식 등록된 상태이다.


교육과 언론
콜롬비아의 교육 제도는 중남미 지역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평판을 받아 왔다. 초등교육은 5년(6세~10세)으로 의무제이며 중등교육은 6년(11~16세), 고등교육(대학)은 4년이다. 중등교육 6년은 4년간의 일반교육과 2년간의 전문 직업교육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모두 1년 2학기제로 1학기는 1월 말, 2학기는 7월 말에 시작한다. 전통적으로 지배층 양성에 주력하면서 사립학교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나, 20세기 중반 이래 무장 게릴라의 확산으로 인해 인구의 도시 집중이 진행되면서, 공립학교의 비중이 확대되었다.

콜롬비아 내의 대학은 약 315개(2013년 기준)가 있는데 거의 모든 대학이 수도인 보고타에 집중되어 있다. 주요 대학으로는 국립 명문 대학인 콜롬비아국립대학교(1867)와 로마가톨릭계 사립 대학인 하베리아나Javeriana 대학이 있고 그밖에 로스안데스Los Andes 대학, 카르다스Caldas 대학 등이 있다. 최근 콜롬비아는 미주자유무역협정(FTAA) 및 미국과의 FTA가 체결되어 서비스시장이 개방될 경우에 대비하여 교육을 주요 수출 품목으로 육성하는 방안을 강구 중이다. 이를 위하여 2001년부터 보고타 소재 유명 대학 11개를 Bogotá Universitaria(BU)라는 협력대학 체제로 묶어 연구협력 및 외국인 학생 유치를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다.

콜롬비아의 주요 신문으로는 콜롬비아 최대 일간지인 엘 티엠포(El Tiempo, 1911년 창간), 엘 콜롬비아노(El Colombiano,1912년 창간), 엘 에스펙타도르(El Espectador, 1987년 창간, 2001년부터 일간지에서 주간지로 전환) 등이 있다. 주요 방송국으로는 콜롬비아 최대 TV·라디오 프로그램 제작회사이자 TV방송국 Canal A를 소유한 카라콜Caracol(1948년 창립)과, 민영라디오 방송국과 TV 방송국 Cadena Uno를 소유한 RCN, RTI 등을 들 수 있다. 모두 콜롬비아 전역에 스페인어로 24시간 방송한다.

문화 예술
콜롬비아는 다양한 민족들이 모자이크처럼 섞여 있으며, 이는 문화, 민속, 예술, 공예품 등에 잘 반영되고 있어 수도 산타페데보고타는 ‘라틴 아메리카의 아테네’라고 불려 왔다. 콜롬비아의 음악은 카리브해의 아프리카 리듬과 살사, 그리고 스페인의 영향을 많이 받은 안데스지방의 음악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학 분야에서는 남미를 대표하는 소설가로 추앙받고 있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Garća Márquez가 그의 대표작 『백년 동안의 고독』(1967)으로 198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신진 작가인 라파엘 움베르또 모레노 두란Rafael Humberto Moreno Durán은 1950대 이후 남미 최고의 소설가라는 명성을 보유하고 있다. 아울러 라몬 토레스 멘데스, 알레한드로 오브레곤 같은 화가, 에드가르 네그레트 같은 조각가, 기예르모 우리베 올긴 같은 음악가도 유명하다.

콜롬비아의 음식은 주로 닭, 돼지고기, 감자, 쌀, 콩, 수프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바, 닭과 감자로 만든 수프로 보고타의 별미 ‘아히아꼬’, 주로 튀긴 개미로 구성되는 산딴데르의 독특한 음식 ‘오르미가 꿀로나’, 어린 돼지를 꼬챙이에 구워 쌀로 채운 똘리마 지역의 별미 ‘레쵸나’ 등이 유명하다. 열대 과일 등 과일 종류가 매우 다양하고, 커피와 맥주는 최상급 수준이며, 특히 커피는 세계 3위 생산국으로, 아라비카종 mild coffee 생산량은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다.

보고타를 중심으로 콜롬비아의 주요 도시에서는 다양한 문화 행사가 개최되고 있으며, 대표적인 행사로 보고타 이베로아메리카 연극제(3~4월, 격년), 보고타 국제도서박람회(4~5월), 카르타헤나 국제영화축제(2월), 마니살레스 국제연극제(9월), 보고타 국제영화제(10월) 등이 유명하다.


5. 한국과 콜롬비아의 관계


정무관계
한국과 콜롬비아는 1962년 3월 10일 국교를 수립하였으며 1971년 5월 콜롬비아에 한국 상주공관을 설치하였고, 콜롬비아는 1978년 12월 우리나라에 상주공관을 설치하였다. 콜롬비아는 국교 수립 이전에도 6.25 한국전쟁 당시 참전 16개국의 하나이자 중남미에서 유일한 한국전 참전국으로서 우리나라와는 일찍부터 혈맹관계(Alianza de Sangre)를 유지했다. 1971년 한국은 한국전 참전 20주년 기념사업으로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에 참전기념탑을 건립하였다.

콜롬비아는 한국과의 혈맹관계를 강조하는 등 전통 우호관계를 바탕으로 실질 협력관계 강화를 추진하고 있으며, 유엔 등 국제무대에서 전통적으로 우리 입장을 지지하는 등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최근 대아시아 외교 강화 차원에서 한국을 주요 협력 파트너로 인식하고 있는 콜롬비아는 2016년 7월 15일 한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발효시켰다. 이로써 한국은 중남미 국가 중 칠레와 페루에 이어 세 번째로 콜롬비아와 FTA를 체결하게 됐다. 또한 콜롬비아는 아시아태평양 지역과의 관계 강화를 위해 APEC 가입을 강력히 희망하고 있으며, 한국은 수차에 걸쳐 지지 입장을 공식 표명한 바 있다.

양국은 1976년 7월에 문화협정, 1981년 6월에 경제협정 및 과학기술협력협정, 1981년 12월에 사증면제협정, 1986년 12월에 무역협정을 체결하였다. 1987년 9월 바르코Virgilio Barco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였고, 1996년 10월에는 삼페르Ernesto Samper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였다. 2011년 9월에는 산토스Juan Manuel Santos 대통령 내외의 국빈 방한을 계기로 양국이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Asociación Estratégica de Cooperación)로의 격상에 합의한 바 있다. 2012년 6월에 수교 이후 최초로 이명박 대통령이 콜롬비아를 방문했고, 2015년 4월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콜롬비아를 방문했다.

경제관계
한국과 콜롬비아 사이의 교역 구조는 우리가 공산품을 수출하고 원자재를 수입해 오는 전형적인 산업 간 무역 형태로, 한-칠레 및 한-페루 교역 구조와 유사하다. 2016년 현재 우리나라의 대對콜롬비아 수출액은 8.53억 달러로 주요 품목은 승용차, 자동차 부품, 합성수지, 타이어, 무기류, 기계류 등이며, 대對콜롬비아 수입액은 4.33억 달러로 주요 품목은 원유, 합금철, 커피류, 동괴 및 스크랩, 고철, 농약 등이다.

한국의 대콜롬비아 해외 직접 투자는 2005년까지는 연간 백만 달러 이하의 미미한 수준이었으나 2006년부터 증가하기 시작하여 최근 크게 증가하였다. 우리나라의 대콜롬비아 투자는 2015년 3월 기준 5.7억 달러(누계, 신고 기준)로 중남미에서 브라질, 페루, 멕시코에 이어 4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주요 투자 업종은 제조업, 광업, 도매 및 소매업 등이다.

1980년 현대종합상사가 최초로 콜롬비아에 진출한 이래, 삼성전자와 LG전자가 1990년대 후반 콜롬비아에 진출을 시작했고 2011년 이후 콜롬비아 치안 안정 등에 따라 우리 기업의 콜롬비아 진출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문화 관계
양국은 문화·학술·스포츠 교류 분야에서도 많은 활동을 벌이고 있다. 1965년 9월 한국외국어대와 America대학의 자매 결연을 시작으로 1997년 한국 전통 예술 공연단 콜롬비아 방문, 2000년 보야까 문화제 참가(한국전 50주년 사진전), 2005년 한국 영화 주간 행사(보고타, 메데진, 깔리: 엽기적인 그녀 등 6편), 2006년 무무 무용단 공연(보고타, 카르타헤나, 바랑키야), 2011년 예당컴퍼니 ‘점프’ 공연단 제33회 마니살레스 국제연극제 참가, 2011년 제5차 중남미 한국학 세미나 개최, 2012년 Popayan 음식축제 주빈국 참가, 2013년 한-콜롬비아 체육교류협력 MOU 체결, 2014년 비주얼코리아 한국영화제 개최, 2014년 K-Pop 페스티벌 콜롬비아 예선 개최(Canal 13 전국 생중계), 2014년 유니버설발레단 ‘심청’, ‘This is modern’ 공연 등등 그간 70여 건의 행사가 활발히 이어져 왔다.

콜롬비아 내의 재외국민
2015년 현재 콜롬비아에는 KOTRA를 비롯하여 LG, 삼성, 대우, 현대종합상사 등의 업체가 진출해 있고, 2017년 5월 기준으로 약 950명의 한국 교민이 거주하고 있다.

콜롬비아에는 1970년대 초 한국 유학생 및 태권도 사범이 진출하면서부터 동포 사회가 형성되었으며, 규모는 작으나 정착한 지 20년 이상 되는 세대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최근 콜롬비아의 치안 상황이 다소 호전되고 사업 환경이 점차 개선됨에 따라 한인들의 생업 활동이 점차 활성화되고 있다. 콜롬비아 전체 동포의 약 83% 이상은 수도 보고타에 거주하고 있는데, 주로 원단, 의류 수입 및 판매업에 종사하고 있으나 최근 인쇄, 조명, 정보통신 등 다양한 분야로 진출하고 있다. 동포 규모는 약 950명(2017년 5월 기준)이고, 대부분이 수도 보고타에 거주하고 있다. 주요 동포 단체로는 재콜롬비아 한인회(보고타 소재)가 있고, 1985년 개교한 한글학교는 매주 토요일 3시간씩 수업을 실시하고 있다.

콜롬비아와 북한의 관계
콜롬비아와 북한은 1988년 10월 24일 주UN 대표부 양측 대사 간에 외교관계 수립(비非상주 대사)에 합의했다. 콜롬비아는 보편주의 원칙에 따라 북한과 수교는 하였으나 상주 대사관 설치는 현재까지 허용하지 않고 있다. 현재, 콜롬비아는 주중국대사가, 북한은 주브라질대사가 각각 겸임하고 있다.
콜롬비아의 대북한 교역은 수출보다 수입이 많은 적자 구조를 이루고 있다. 2011년부터는 수출은 전무한 상태로 수입만 행해지고 있다. 연간 10만 달러 이상 수출을 기준으로 대북한 주요 수출품은 식료품류, 화학제품 등이고, 연간 100만 달러 이상 수입을 기준으로 한 대북한 주요 수입품은 산업용 화학제품, 기초 철강제품, 전기 기계류, 비전기 기계류, 기술 장비 등이다.




테러 및 마약과의 전쟁
콜롬비아는 독립 이후 보수당과 자유당의 정치 독점 과열과 20% 인구를 차지하는 유럽계 백인 계층의 정치 경제 사회적 지배 구조 장악, 그리고 극심한 빈부 격차 확대 등의 요인으로 다수를 차지하는 소외 계층들의 반발이 점증하여 위험 수위에 달했다. 결국 1970년대에 이르러 콜롬비아에서는 반정부 게릴라 활동이 증가했다. 그 중에서도 급진적인 성향을 띤 국민해방군ELN(National Liberation Army), 콜롬비아 혁명군FARC(Revolutionary Armed Forces of Colombia), 4월 19일 운동M-19(The April 19 Movement) 등 많은 좌익 게릴라들은 여러 테러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정부가 미국의 힘을 빌어서 단속하려 한 것에 반발해서, 게릴라 조직들은 용병에 의한 테러, 암살 사건으로 이에 대항하였다.

양대 정당 간의 국민전선이 1978년에 종식된 이후 콜롬비아 정부는 농촌 벽지에 번성하던 게릴라 조직과의 평화협상에 노력을 경주하게 되었다. 1984년 당시 벨리사리오 베탕쿠르Belisario Betancur Cuartas 대통령(재임 1982~1986)은 콜롬비아 좌익무장 혁명군(FARC) 및 민주연합(M-19)과 정전협상을 실시하였다. 또 다른 주요 게릴라 조직인 국민해방군(ELN)은 정전 제안을 거부하고 응하지 않았다.

이러한 평화협상은 오래 가지 않았다. M-19는 정전을 파기하고 1985년 투쟁을 재개하였고, 1985년 11월에 보고타 시에 소재한 대법원 청사를 점거하였다. 이에 대한 군의 진압 과정에서 11명의 대법원 판사를 포함한 115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정부와 M-19는 1989년 3월 협상을 재개하여 합의에 도달하였으며, 이에 따라 M-19는 사회 및 정계에 복귀하였다.

한편 FARC은 무장 해제 상태의 FARC 요원 약 2~3천 명이 살해되자 1990년 정전을 파기하였다. 이후 계속된 FARC의 테러 활동은 현행 산토스 정부에 의해 2012년 개시된 평화 협상에 의해 변화를 맞았고, 결국 2016년 11월 평화협정 체결에 최종 합의하면서 FARC도 사회 및 정계 복귀에 성공하게 되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ELN 조직과의 평화 협상도 진행 중이지만 아직 뚜렷한 접점을 찾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콜롬비아 정국을 뒤흔드는 또 다른 심각한 위협은 마약 조직의 테러이다. 마약 범죄 조직인 메데인 카르텔Medellín Cartel과 칼리 카르텔Cali Cartel은 정치적인 신조와는 무관하게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어떠한 단체나 개인에 대해서도 테러와 암살을 자행함으로써 국가적 차원의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콜롬비아를 ‘마약의 성지’, ‘카르텔의 본고장’이라는 악명으로 회자되게 한 장본인인 이들 마약 조직은 수천 명의 사병私兵을 거느린 군사 조직 형태여서 국가의 공권력에도 큰 위협으로 작용하고 있다.

콜롬비아 정부는 좌익게릴라의 테러, 1990년대 우익민병대의 등장, 마약 카르텔 등에 대응해야 했으며, 마약 테러로 인해 1990년에는 선거 유세 중 3명의 대통령 후보가 피살되기도 했다. 이에 더욱 강력한 사법권을 제공하는 새로운 신헌법이 제정되어 1991년부터 실행에 들어갔고 정부의 단속도 강화되었다. 이 해 6월 최대 세력인 메데인 코카인 카르텔의 우두머리이자 유혈 테러극의 배후 조정자로 알려진 파블로 에스코바르Pablo Escobar가 항복하였다. 일 년 뒤 그는 교도소에서 탈출하여 고향 메데인의 아지트에 은신하면서 무장 반군 조직을 결성해 민간인 학살을 저지르는 등 계속된 범죄 행각을 벌였다. 하지만 결국 1993년 12월 군·경찰 합동추적반에 의해 은신처가 발견되어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피살되면서, 30조 이상의 자산에 미국 대기업보다 매출이 많았던 메데인 카르텔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후 그의 조직과 연관된 무차별적인 폭력 행위는 감소했고, 카르텔은 다수의 소규모 마약 밀매 조직으로 와해되어 상호 경쟁하는 상황으로 변화되었다. 한편으로는 반정부 좌익 게릴라와 우익 민병대 그룹도 군사 작전을 위한 자금 확보 방안으로 마약 밀매에 관여하는 형태도 나타났다.

오늘날 콜롬비아의 마약 밀매는 활동적인 칼리 카르텔에 의해 여전히 증가하고 있으며 일 년에 50억 달러 정도를 거둬들이는 것으로 추정된다. 1995년 6월 칼리 카르텔의 우두머리인 길베르토 로드리게스 오레후엘라Giberto Rodriguez Orejuela를 체포한 것은 정부의 자랑거리가 되었지만 콜롬비아의 마약 매매 활동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는 거의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당시 대통령이던 자유당의 에르네스토 삼페르Ernesto Samper(재임 1994~1998)도 선거 기간 중 마약 관련 자금을 지원받았다는 주장에 시달리며 그의 임기 마지막 해를 보냈으며, 1998년 6월 대통령 선거에서는 1994년 삼페르와 칼리 카르텔간의 관계를 폭로한 보수당의 안드레스 파스트라나Andres Pastrana가 승리해 제57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서울시의 자매 도시 보고타Bogota
콜롬비아의 수도인 보고타Bogota 시는 서울시와 자매결연이 맺어져 있는 도시이다. 보고타 시는 전 세계 30여 개 도시와 자매결연 관계를 맺고 있으며, 서울시와는 1982년 자매결연을 체결하였으며, 지난 2012년에는 자매결연 30주년을 맞아 축하 행사를 갖기도 했다.

보고타는 콜롬비아 중심부, 동부산맥이 형성한 고원분지에 위치하고 있는 정치, 행정의 중심지이다. 해발 2,650m로 라파스, 키토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가장 높은 대도시이고, 콜롬비아 문화, 산업, 경제, 관광의 중심지로서 20개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삶의 질, 비즈니스 등 전반적 기준으로 볼 때 중남미 50개 도시 중 6위를 차지하는 도시이다. 전체 면적은 1,776km²(서울시 605km²)이며, 1938년 32만 명에 불과하던 인구가 급격한 도시화를 통해 2010년에는 약 800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인구 밀도는 평방킬로미터당 약 4,146명이고 전체 인구의 47.8%가 남성, 52.2%가 여성이며, 문맹률은 3.4%이다.

보고타 지역에는 보고타 시 설립 이전에 이미 고대 무이스카Muisca 문명이 존재하였다. 스페인 출신의 정복자 곤살로 히메네스 데 케사다Gonzalo Jimenez de Quesada는 이 지역을 식민지화한 이후 1538년 보고타 시를 설립하였으며, 그가 태어난 곳인 산타페의 명칭을 따서 산타페 데 보카다Santa Fe Bacata(또는 Santa Fe de Bacata)라고 명명하였다. 본래 ‘보고타’라는 도시 이름은 무이스카 문명의 지도자인 Zipa가 상주하는 수도였던 바카타Bacata에서 유래하였다. 바카타는 ‘농지가 끝나는 곳에 위치하는 영토’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보고타 시장은 임기 4년으로 직접선거를 통해 선출되며 대통령에 이어 두 번째로 영향력 있는 직책으로 간주되고 있다. 중도우파 성향의 엔리케 페날로사Enrique Penalosa 현 보고타 시장은 워싱턴에서 태어나고 듀크대에서 훈련을 받은 경제분석가 출신이다. 페날로사는 1998~2001년 시장 재임 시 러시아워 때 대중교통을 이용하게 하고 자전거 도로를 건설하는 등 ‘자동차와의 전쟁’을 선포했던 업적으로 800만 시민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 그가 건설한 약 300km의 자전거 도로는 지금도 유용한 도로망으로 애용되고 있지만 그는 이후 세 차례의 시장 도전에서 번번히 패배를 기록했다.

하지만 끈질기게 시장 도전에 나선 페날로사는 2015년 10월 실시된 선거에서 33%의 득표로 마침내 승리함으로써 12년간 좌파가 차지해 왔던 보고타 시장직에 복귀했다. 유권자들은 심화되는 교통난과 안전불감증에 시달리는 보고타 시내에 질서를 되찾아 줄 구원투수로 그를 다시 시장직에 복귀시킨 것으로 분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