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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인물탐구]

    명장열전 | 포용과 친화의 리더십으로 천하를 품은 고려 태조 왕건


    *덧없는 인생이란 예로부터 으레 이런 것이었다. 부생자고연의浮生自古然矣. -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유언
    *태조는 아랫사람에게 너그럽게 대하여 어질고 지혜 있는 사람이 힘을 다하였고, 사람들에게 성심으로 대접하여 모두가 그를 따랐으니 살리기를 좋아하는 인덕仁德은 천성에서 나왔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다. - 『고려사절요』 역사를 기록하는 신하의 평
    *충의는 천고에 빛나고 忠義明千古
    죽고 삶은 오직 한때라 死生唯一時

    - 고려 16대 예종이 1120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팔관회에서 대장군 신숭겸과 김낙을 추모하며 지은 도이장시悼二將詩 중에서


    ■왕건王建(877년~943년, 재위 918년 6월 ~ 943년 5월, 연호: 천수天授)
    877년 송악군(개성)에서 출생.
    896년 20세 아버지 용건(왕륭)과 함께 궁예에게 귀부歸附함.
    903년 27세 후백제 후방인 금성을 공략 점령 후 나주로 이름을 바꿈.
    909년 33세 덕진포(영암 북쪽 해안)에서 수군을 이끌고 후백제군 격파.
    918년 42세 6월 태봉왕 궁예를 몰아내고 즉위, 고려를 세움, 연호 천수.
    927년 51세 9월 견훤이 신라 경주 침입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움. 급히 구원하러 갔으나 매복에 걸려 공산에서 전멸. 이때 신숭겸, 김락 등 전사.
    930년 54세 1월 고창(현 경북 안동) 병산 전투에서 후백제군을 크게 이김.
    934년 58세 7월 대진국(발해) 세자 대광현 등 수만 명이 귀화함.
    935년 59세 견훤, 아들 신검의 정변으로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탈출하여 고려에 귀순. 12월 신라 경순왕 고려에 귀부함. 신라 멸망(BCE 57~935).
    936년 60세 일선군(선산) 일리천에서 백제군에 대승, 백제 멸망, 견훤 사망.
    943년 67세 승하 향년 67세, 시호 신성神聖, 묘호 태조, 능호 현릉顯陵.

    들어가는 글


    668년 고구려 평양성을 함락시키며 삼한의 통합을 이룬 신라는 9세기 중반 장보고의 난을 겪은 후 급속히 쇠퇴하였다. 국운이 서산에 걸린 저녁 해처럼 쓸쓸하게 기울어갔다. 흉년과 전염병이 계속적으로 일어나 백성들 생활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지배층의 사치와 향락은 국가 재정을 더 나쁘게 했다. 국가 재정을 타개하려고 농민들에 대해 더 가혹한 수탈이 이어졌다. 이에 생존이 어려워진 농민들은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 도적 무리가 되었다. 전국 각지에 도적 무리들이 생겼으며, 여기에 농민 반란이 일어나 일대 혼란이 이어졌다. 이들 중에는 국가 권력을 잡으려는 반란 세력도 등장했는데 그들은 새로운 세상을 지향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궁예弓裔(878~918)와 견훤甄萱(867~936)이다.

    궁예는 고구려 왕족의 후손이다. 『환단고기』 「고려국본기」에는 그 선조가 평양인으로, 본래 보덕왕報德王 고안승高安勝의 먼 후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아버지 강剛이 술가術家의 말을 듣고 어머니 성姓을 따르게 하여 궁씨弓氏가 되었다고 한다. 궁예는 북원北原(강원도 원주)에서 봉기한 양길梁吉의 부하로 활동하다가, 초적草賊(좀도둑) 무리와 사원寺院 세력 등을 기반으로 힘을 길러 독립하였다. 901년에 나라를 세우니 국호를 후고구려, 연호를 무태武泰로 정하고 철원 일대를 세력 기반으로 성장 발전하였다. 904년에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바꾸었고, 911년에는 다시 태봉泰封이라 하였다.

    견훤은 상주 농민 출신으로 군진 세력과 호족 세력을 규합하여 무진주武珍州(현 광주광역시)를 점령하고 완산주完山州(전주)를 수도로 900년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한반도 최대 곡창 지역을 지배 영역으로 삼은 후백제의 힘은 욱일승천하는 기세였다. 당시 신라는 그저 무력하게 무너져 내렸고, 궁예와 견훤의 성장을 두려운 눈으로 지켜보는 처지였다. 신라가 쇠약해지는 만큼 궁예와 견훤의 각축은 더 치열해졌고, 새로운 세상의 주인공은 당연히 이 두 사람 중 한 명일 거라 여겨졌다. 그러나 하늘은 시대의 진짜 주인공을 따로 예비하고 있었다.


    나주를 지켜라


    신라의 힘이 쇠약해지자, 궁예와 견훤은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주로 접경지였던 충청도와 경상도 북부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903년 궁예의 명을 받은 왕건王建이 수군을 끌고 백제 지배 영역인 전라남도 금성군錦城君을 공격 점령하고 주변 군현 10여 개를 빼앗은 다음 이름을 나주羅州로 바꾸었다.

    나주는 일본과 중국으로 연결되는 황해 해상 물류의 거점 지역으로, 황해의 제해권을 확보하는 전략 요충지였다. 또한 나주평야는 전라남도 최대의 곡창지대일 뿐만 아니라 염전에서는 풍부한 소금이 생산되었다. 이곳을 잃은 견훤은 내륙 진출은 물론 통일의 기회마저 날려 버릴 위기를 맞았다. 그래서 견훤은 어떻게 해서든 나주를 하루 빨리 수복하려고 절치부심했다. 지속적인 공략으로 어느 순간에는 나주와 개성 간 뱃길이 끊기기도 하였다.

    909년 왕건은 선제 공략으로 오월吳越로 보내는 후백제 사신을 잡아 철원으로 압송하는 등 견훤의 발목을 잡았다. 이에 910년 견훤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주를 포위해 버렸다. 긴급하게 구원해야 되는 상황. 왕건은 다른 장수들이 가기를 꺼려 하자 직접 출전하였다. 궁예는 왕건에게 해군대장군이란 직책을 부여했다. 왕건은 정주貞州(경기도 개풍군 풍덕)에 수군 기지를 두고 있었다. 당시 왕건이 거느린 해군은 후삼국 최강 수군이었다. 왕건은 알찬 종회宗希와 김언金言을 부장으로 삼고, 직접 건조한 길이가 30미터나 되는 큰 전함을 끌고서 배후인 진도珍島와 고이도皐夷島(신안 고이도高耳島)를 공격해 나주를 고립시켰다.

    하지만 견훤이 직접 지휘하는 후백제군 군세는 자못 강성하여 왕건의 군대를 압도하고 있었으므로 위세에 눌린 제장들이 은근히 물러나자고 청했다. 이에 해군대장군 왕건은 차분히 전세를 분석한 뒤에 “근심하지 마라. 싸움에 이기는 것은 화합하는 데 있지. 수가 많은 데 있지 않다”며 다독였다. 왕건은 후백제군이 수만 많을 뿐 대오도 허술하고, 전술도 엉성하여 그 사이를 무섭게 돌파하면 승산이 있으리라 보았다. 실제 빠른 배를 이용하여 적 대오를 무너뜨린 뒤, 바람을 이용한 화공을 구사하였다. 견훤은 이런 왕건의 전술을 효과적으로 차단하지 못한 채 수많은 전함과 군사를 잃고 물러나야 했다. 이어 견훤의 잔당으로 수전에 능하여 ‘수달’로 불린 능창能昌을 사로잡았다. 이 싸움을 정점으로 궁예는 영토와 병력 면에서 견훤을 압도해 나갔다. 왕건은 나주 전투 승리로 궁예의 신임을 얻어 일약 제2인자로 부상하였고 천하 대권의 꿈을 꾸게 되었다.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우다.


    이후 왕건은 913년 37세의 나이로 파진찬 관등에 백관의 우두머리인 광치나匡治奈에 임명되었다. 877년 정유 정월 생인 왕건은 송악 지역 호족인 왕륭(용건)의 장자로 태어나 20세 때 부친과 함께 궁예 휘하에 들어간 이후 뛰어난 장수이자 현명한 관료로 명성을 떨치며 성장하였다. 궁예 세력의 확충에 큰 공을 세우고 견훤을 여러 차례 격파하기도 하였다. 그에 따라 총애와 상급을 받으며 승승장구하였다가 나주 전투 승리로 만인지상 일인지하라는 재상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이는 무척 부담스런 자리가 되었다.

    당시 궁예는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개칭하면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호족 및 신하들과 잦은 충돌을 일으켰다. 많은 이들이 죽거나 유배를 당하면서, 역모설이 끊이지 않았다. 궁예는 점차 의심이 많아져 주변 신하들을 함부로 죽이기도 하고, 심지어 외척들과 갈등 끝에 부인과 두 아들조차 죽이는 사태에 이르렀다.

    여기에 스스로 미륵불을 자처하였고 이른바 사람의 마음을 읽는 관심법觀心法을 행한다면서 마치 신통력이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였다. 호족들과 신하들의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반발을 억누르기 위한 방편이라 할 수 있지만 결코 정상은 아니었다. 그러한 의심의 눈길은 왕건에게도 닿았다. 궁예는 왕건을 불러 역모를 꾸미지 않았냐고 몰아세웠다. 이때 장주掌奏(임금에게 말씀을 올리는 비서 역할을 하는 벼슬아치 이름) 최응崔凝의 도움으로 겨우 위기를 모면하고 목숨을 건졌지만, 불안감은 가중되었다.

    궁예의 행동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던 왕건에게 때마침 홍유, 배현경, 복지겸, 신숭겸이 찾아와 모반을 도모하자고 하였다. 망설이는 왕건을 부인 유柳씨(신혜왕후神惠王后)가 설득하였다. 이에 결심을 굳힌 그는 마침내 군사를 모아 왕성을 공격하였다. 왕건이 군사를 일으키자 궁예는 싸워 봤자 승산이 없다 판단하고 변복을 하고 왕성을 빠져나갔지만, 이내 피살당했다.

    때는 918년 무인 6월 병진일로 왕건은 드디어 제위에 등극하여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였다. 연호를 반포한 이유는 자신의 집권이 찬탈이 아닌 천명을 받은 혁명임을 내세운 것이다.

    고려 vs 후백제 공방전 1


    왕건의 고려 건국 이후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본래 태봉은 궁예를 구심점으로 이루어진 호족연합체 국가였다. 그런데 궁예가 사라지자, 자연 호족들 사이의 결집력은 약해졌다. 그래서 명주(강릉)의 김순식, 명지성(경기도 포천)의 성달, 문소(경북 의성)의 홍술 등이 왕건 휘하에 들기를 거부하였다. 공주와 그 일대 홍성, 서산 지역 성주들이 대거 견훤에 투항해 버렸다.

    이에 왕건은 내부적으로는 항상 호족들 눈치를 살펴야 했고, 외부적으로는 더욱 강성해진 후백제를 상대해야 했다. 다행히 왕건은 유화적이고 친화적인 성품을 앞세워 이런 문제를 능숙하게 해결해 나갔다. 호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각 지역 유력자들과 혼인 관계를 맺고, 사성賜姓(임금이 신하에게 성씨를 내려줌) 정책을 통해 인척 관계를 넓히거나, 그 지역의 지배권을 확고하게 인정해 주면서 충성심을 유도하고 국가의 정책 운영에 지지를 이끌어 내기도 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모든 나라들과 유화적인 태도를 견지하였다. 후백제와 친교를 맺고, 신라와도 우호 관계를 확립하였다. 신라는 고려에 은근하게 의지하려는 뜻을 내비쳤다. 이런 평화는 고려 건국 후 2년 동안 지속되었다. 하지만 920년 견훤이 신라를 침범하면서 고려와 후백제는 숙명의 전쟁을 시작하였다.

    대야성 전투(927년 7월, 고려군 승리)
    920년 후백제는 신라 대야성(지금의 합천 지역)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대야성은 신라 수도 서라벌을 지키는 목구멍 같은 곳이었다. 이곳은 동으로는 낙동강이 흐르고 남동쪽으로 진주 남강이 흐르며, 서북쪽은 험준한 산맥들이 막아서고 있었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거창을 거쳐 육십령을 넘으면 전주에 이르고, 북쪽은 낙동강을 거슬러 성주, 구미, 선산, 상주 등에 이른다. 남으로는 진주를 거쳐 하동에 이르러 섬진강 건너 구례 땅으로, 더 아래로는 남해까지 아우르는 교통 요충지였다.

    이런 대야성을 927년 왕건은 수륙 양동 작전으로 차지해 버렸다. 왕건은 공주를 공격하면서 견훤의 시선을 그곳에 묶어 놓았다. 그러면서 수군을 동원하여 남해를 돌아 진주에 잠입하였고, 김락에게 군대를 맡겨 육로를 통해 진주로 향하게 하였다. 허를 찌른 고려군은 진주를 함락시키고, 이어 대야성을 공격하였다. 우군을 잃고 수세에 몰린 후백제군은 수성전에 실패하고 장군 추허조를 비롯한 30여 명을 고려군에 내주고 달아났다. 견훤에게는 피눈물나는 패배일 수밖에 없었다. 왕건은 견훤을 비웃기라도 하듯 남강 강변을 따라 주변을 순시하였다.

    양국 전쟁의 분수령 공산 전투(927년 9월, 후백제군 승리)
    대야성 함락의 분통함을 이기지 못한 견훤은 보복전을 다짐하였다. 그는 환갑에 이른 노구를 이끌고 출정식을 거행했다. 927년 9월 근품성을 회복하고 신라 고울부(경북 영천)을 습격하며, 이내 북상하던 진로를 바꿔 서라벌로 군대를 몰았다. 신라 55대 경애왕景哀王은 다급하게 고려에 구원을 요청했으나, 때는 늦었다.

    서라벌을 침입한 견훤은 포석정 이궁離宮으로 피신한 왕과 왕비를 자결케 하고, 친고려파였던 국상 김웅렴을 잡아 죽이고, 경애왕의 외종제 김부金傅를 왕으로 세웠다. 그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이다(포석정의 변).

    고려군 일만이 구원하러 왔을 때, 이미 견훤은 빠져나간 뒤였다. 이에 왕건은 후백제군이 멀리 가지 못했으리라 판단하여 신숭겸과 김락金樂을 앞세우고 친히 기병 5천을 이끌고 대구 공산동수公山桐藪로 달려갔다.

    왕건은 견훤이 공산 길을 택해 돌아가리라 판단하고 길목을 지키다 급습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길목을 막고 있던 쪽은 후백제군이었다. 겹겹이 에워싼 후백제군 앞에 대야성을 함락시킨 공이 있던 선봉장 김락이 먼저 목숨을 잃었고, 포위망이 좁혀 오면서 고려군은 사면초가의 위기에 처했다. 왕건 삶에 있어 가장 큰 위험이었다. 왕건이 사색이 되어 탈출구를 모색할 때, 신숭겸申崇謙이 다가와 자신이 왕의 갑옷을 입고 어차에 올라 싸울 터이니, 그 사이 빠져나가라고 간했다. 눈물을 머금고 제의를 받아들인 왕건이 변복을 하고 단신으로 포위망을 빠져나가는 사이, 신숭겸은 어차를 타고 후백제군을 향해 돌진하여 장렬하게 전사했다.

    순간적인 판단 착오로 정예 병력과 가장 아끼던 장수를 잃은 왕건은 피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했다. 하지만 신숭겸을 위시한 5천 장졸의 값진 희생은 헛되지 않았다. 비록 백전노장 왕건의 40년 싸움꾼 인생에서 가장 치욕스럽고 커다란 패배를 안겨준 사건이긴 했지만, 공산 전투는 왕건이 삼한 통합 전쟁에서 최후 승자로 발돋움하게 된 전투였다.

    견훤은 이 전투 승리로 아직 향배를 결정하지 못한 여러 호족들이 무력을 앞세운 자신에게 귀부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여론은 경주를 침공해 경애왕을 살해하는 등 정통 왕조 신라에 대한 잔악한 행동을 한 견훤에게 등을 돌렸다. 반면 왕건은 덕성과 신의 있는 인물이라는 평을 받으며 민심을 얻었고, 신라를 정통 왕조로 존중한 태도에 호족들은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현실은 혹독했다. 치욕스런 공산 전투 후 고려는 여러 전쟁에서 잇따라 패배하였다. 928년 정월 진주를 구원하러 가던 원윤 김상이 후백제 장군 흥종에게 목숨을 잃었다. 8월에는 대야성을 빼앗기고, 죽령이 백제군에 의해 차단되었다. 929년 7월에는 견훤이 친정하여 주요 거점인 의성을 공격했고 이 싸움에서 성주 홍술이 전사했다. 홍술은 왕건이 고려를 세울 때 등을 돌렸다가, 왕건의 끈질긴 설득과 회유로 겨우 마음을 돌린 이였다. 고려의 남진 정책에서 교두보 역할을 했고 대신라 정책에서 교량 역할도 했던 이였다. 그가 전사했다는 소식에 왕건은 내가 좌우 손을 잃어 버렸다고 울부짖었다. 잇단 패배로 군사들 사기도 떨어졌을 뿐 아니라, 견훤군에 대한 두려움은 더 커져 갔다. 무언가 상황을 반전시킬 뾰족한 수가 필요하였다.

    고려 vs 후백제 공방전 2


    고창 병산전투(930년 1월, 고려군 승리)
    고려군이 무기력하게 무너져 내리자, 견훤은 기세를 올려 북진을 계속했다. 경상도 지역에서 고려의 마지막 보루라 할 수 있는 고창군을 공격했다. 고창군古昌郡(지금의 안동)은 영남 동북 지역의 요충지였다. 당시 영남 지역은 왕도王都 서라벌 일대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고려나 후백제의 지배나 영향을 받고 있었지만 오직 고창 지역만은 신라에 충성하고 있었다.

    그래서 왕건을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간 공산 전투 이후 승기를 잡은 견훤은 이 지역만 아우르면 일대가 평정되리라 여겼다. 더 나아가 신라 전체를 병탄하고, 고려와의 전쟁에서 더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으리라 보았다. 그래서 929년 12월 견훤은 고창군을 공략하기 위해 대군을 몰고 나왔다. 이런 전략적 상황을 잘 아는 왕건도 급하게 대군을 이끌고 구원에 나섰다. 죽령 길을 뚫고 경북 영주와 풍기 일대를 순시하며 공격에 대비하였지만, 날카로운 후백제군 기세에 밀려 이내 죽령을 넘어 퇴각하였다.

    견훤은 고창에 있는 고려군을 포위하였다. 왕건은 쉽사리 구원에 나설 수 없었다. 2년 전 공산 전투에서 참패해 후백제군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있던 고려군 수뇌부는 패할 때 퇴로가 여의치 않다고 보고 회군 대책을 의논하였다. 이때 장수 유금필은 강력하게 출전을 건의하였다. 그는 살고자 하기 보다는 죽자는 결심을 해야만 승리를 할 수 있고, 싸우기도 전에 패배를 염려하는 까닭이 무엇인지를 성토하며 출진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마침내 왕건은 결심하고 죽령을 넘었다. 마침 재암성(경북 진보)의 신라 장군 선필이 군대를 끌고 귀순하였다. 홍술 전사 이후 이곳 지리에 밝고 백성들의 지지를 얻는 장수가 없었는데,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인물이 선필이었다. 고려군은 천군만마를 얻은 듯 기세를 올리며 진군했다. 930년 정월 혹심한 추위 속에 후백제군과 고려군은 석산石山과 병산甁山 지역에 진을 쳤다. 양군 거리는 500보밖에 되지 않았고 두 진영은 한판 정면 승부인 회전會戰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변수가 발생했다. 당시 고창 성주 김선평金宣平(안동 김씨 시조), 존장尊丈 장길張吉(안동 장씨 시조, 정필貞弼), 신라 왕족 출신인 김행金幸(안동 권씨 시조로, 왕건은 ‘능히 기미幾微에 밝고 권도權道통달했다’라며 권씨로 성을 내렸다)등이 이끄는 신라군이 고려군에 가세하였다. 이들은 견훤이 서라벌을 급습해 포석정의 만행을 저지르자, 언젠가 반드시 원수를 갚으리라 결심하고 군사들을 모아 조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때 김행은 김선평과 장길을 설득하여 고려군에 합류한 것이다.

    이윽고 고려 선봉장 유금필의 위용에 눌린 후백제군은 패퇴를 거듭하였다. 하루 종일 걸린 전투의 결과는 견훤의 참담한 패배였다. 시랑侍郞 김악金渥이 포로로 잡히고 병력 8천을 잃는 대패를 당했으며, 일대 30여 고을이 고려의 영향력 아래 들어오게 되었다. 견훤은 피눈물을 낙동강에 뿌리며 퇴각했다. 대승을 거둔 왕건은 우선 유금필을 격려하고, 경순왕에게 승전보를 알렸다. 이에 강릉에서부터 울산에 이르는 신라 100여 성이 투항하였다. 왕건은 대목(경북 칠곡), 인동(경북 구미) 등을 순시하며 주변 호족들의 인심을 얻었다. 후백제 쪽으로 기울어가던 저울의 추가 다시 고려로 기울어졌다. 고려와 신라의 관계는 돈독해졌고, 그 관계를 이용해 왕건은 신라 호족을 포섭하였다.

    고창 전투 패전은 후백제에게는 결정적 악재였다. 신라계 호족뿐만 아니라 백제계 호족들도 동요하였다. 932년 6월 견훤의 복심腹心이었던 장군 공직龔直이 투항하였다. 7월에는 후백제군이 북진하기 위한 교두보인 일모산성(충북 청주 문의면)을 왕건이 친정하여 함락시켰다.

    운주 전투(934년 9월, 고려의 결정적 승리
    932년 9월 견훤은 이내 반격의 칼날을 드러냈다. 다시 나주 지역 일대를 손에 넣고 수군을 조련하여, 고려 수도 개성과 그 일대를 공격하였다. 전통적으로 수군이 강한 고려의 자존심에 상처를 남기긴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이미 대세는 고려에게 넘어가 있었다.

    934년 9월 왕건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운주(충남 홍성)로 내려갔다. 홍성은 본래 궁예 시대 때 태봉 영토였다. 왕건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이에 반발하여 공주와 함께 후백제로 투항한 땅이었다.

    왕건이 이곳을 점령하려는 궁극적 이유는 나주 탈환이었다. 홍성 일대 당진과 아산은 수군 기지가 되기에 충분한 지형이었다. 개성과 나주 사이에 해당하는 이곳을 장악하면 수군에 큰 힘이 될 것이고, 만약 이곳을 백제 수군에게 뺏긴다면 개성은 백제 수군의 공격에 계속 노출될 것이었다. 실제 이곳 근처 보령시 오천면 지역은 조선 시대에 충청 수영이 있던 곳이다.

    왕건이 운주로 오자 견훤 역시 직접 달려왔다. 견훤은 화친을 제의하였지만, 유금필은 선제공격을 간하였다. 이를 받아들인 왕건은 유금필을 앞세워 급습을 단행했다. 유금필의 기세와 용맹에 눌린 후백제군은 패퇴하였고 고려군은 견훤의 참모였던 술사 종훈宗訓, 의자醫者 훈겸訓謙, 용장勇將 상달尙達과 최필崔弼을 사로잡았다. 고려군이 운주를 장악하자, 공주 이북 30여 성이 항복해 왔다. 이어 왕건은 유금필을 앞세워 935년 나주 탈환에 성공하였다.

    후백제의 내분과 최후의 승전


    고창 전투와 운주 전투 대패 후 대세가 기운 것을 안 견훤은 심히 우울했다. 이미 일흔을 앞둔 나이. 이제 후계자를 정해야 했다. 그에겐 여러 아내에게서 얻은 10여 명의 아들이 있었다. 내심 넷째 아들인 금강金剛을 후계자로 세우고 싶었다. 하지만 큰아들인 신검神劍과 그를 지지하는 완산 지역 호족들의 반발이 두려워 망설였는데, 운주 전투 패배 후 이미 늙었음을 절감하고 금강을 태자로 지명했다. 이에 신검을 위시한 세력은 935년 3월 반란을 일으켜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미륵불 신앙의 본산지인 김제 금산사에 유폐시켰다. 형이 동생을 죽이고 아버지를 몰아내는 비정한 권력의 모습이 연출된 것이다.

    견훤은 그해 6월 금산사를 탈출, 나주를 통해 고려에 투항했다. 실질적인 후백제의 멸망이었다. 왕건은 그를 상부尙父(아버지와 같은 존재)라 부르며 극진히 대접했다. 후백제의 내분과 견훤의 고려 투항을 지켜본 신라 경순왕은 스스로 신하들을 이끌고 개성에 가서 왕건에게 투항했다. 936년 2월에 견훤의 사위 박영규朴英規가 고려에 귀순하자 6월에 견훤은 신검을 치기를 강력하게 요청했다.

    왕건은 내분으로 약화될 대로 약화된 후백제를 일거에 제압하기 위해 집중의 원칙을 따르기로 했다. 즉 최대 병력을 일시에 동원하는 회전을 통해 승패를 일찍 매듭짓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먼저 태자 무武(고려 제2대 왕 혜종惠宗)와 장군 박술희를 천안에 선발대로 보냈다. 천안은 공주를 거쳐 전주로 바로 공격할 수 있는 길목. 하지만 정작 왕건이 이끄는 고려군 본진은 추풍령을 넘어 일리천一利川으로 우회하였다. 일리천은 경북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 원촌 마을 앞을 흐르는 낙동강 지류다. 이미 항복한 신라군을 고려군에 편성해 병력을 보강하고, 낙동강 물길로 병력과 물자를 신속히 이동시켜 후백제 측면과 후방을 치려는 의도였다. 동시에 신검군이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낙동강을 통해 기습적으로 신라 지역을 점령하는 걸 막으려는 목적도 있었다.

    왕건이 동원한 군대는 고려군 4만 3천과 호족 연합세력과 대진국 유민으로 구성된 4만 4천, 도합 8만 7천 명을 헤아리는 대병력으로 가히 민족 연합군이라 할 수 있었다. 견훤은 직접 병력 1만을 이끌고 선봉에 섰다. 견훤을 본 후백제 좌장군 효봉, 덕술, 애술, 명길 등은 싸움을 포기하고 말 머리를 돌려 신검군 공격에 앞장섰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과 견훤의 귀순 등으로 사기가 크게 꺾인 신검군은 마치 팔다리가 묶인 채 싸움판에 끌려 나온 형국이었다. 예상대로 신검은 연합군에 대패하고 완산주로 퇴각하여 반격을 준비했으나, 후백제군이 견훤에 항복하고 있었고, 고려군이 황산黃山(논산)을 넘어오자 신검은 마침내 백기를 들고 항복하였다.

    고려 태조 신성대왕 왕건


    거인, 시대를 넘어가다
    견훤은 일리천 전투 며칠 뒤에 죽었다. 왕건은 견훤 무덤 근처에 940년 ‘태평성대를 열겠다’는 의지를 담아 개태사開泰寺(충남 논산시 연산면 소재)를 창건하여, 전쟁에 희생된 이들을 기렸다. 그가 달래려는 영혼 중에는 아비를 내쫓고 왕위를 찬탈한 아들의 패륜을 끝내 용서하지 않은 채 죽은 견훤의 한 맺힌 원혼도 담겨 있었다.

    견훤은 훌륭한 자질을 지닌 영웅으로 당시 아무도 꿈꾸지 못했던 삼한 통합이라는 희망의 깃발을 맨 먼저 세웠다. 그로 인해 궁예와 왕건은 새로운 꿈을 꿀 수 있었다. 궁예가 판세를 키워 삼한 통합의 꿈을 갖게 하였다면, 왕건은 마침내 삼한 통합의 꿈을 실현한 영웅 군주라 할 수 있다.

    왕건은 고려를 연 태조太祖였다. 삼한 통합이라는 큰 업적을 이룬 그는 943년 5월 신덕전神德殿에서 승하하였다. 제위 26년, 향년 67세. 고려는 이후 조선 태조 이성계에 의해 1392년 망할 때까지 34대 475년간 존속하였다. 고려사는 왕건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왕은 포부가 크고 원대하였으며 국사를 공정하게 처리하고 상벌을 공평히 하며 절약을 숭상하고 현명한 신하들을 등용하며 유교를 중히 여겼다.”

    태조왕건의 자질
    태조 왕건이 찢기고 갈라진 민족의 대통합을 이룬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가장 큰 요인은 개인적인 장점이다. 그는 초인적인 인내심과 자제력, 특유의 친화력과 승부사 근성을 발휘하여 치밀하고도 끈기 있게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나갔다. 그리고 자신을 항상 낮추는 겸손함과 끝없는 포용력을 갖췄다. 스무 살 이후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몸으로 승부사 기질을 익혔다. 무장 출신이라 단점으로 작용하기 쉬운 과감함은 온화한 천성과 친화적인 성품으로 상쇄시켰다. 휘하 호족은 물론 신라 잔존 세력, 백제의 견훤과 그 휘하 신하들까지 품는 부드러움이 있었다. 반면 위기에 몰리거나 곤란한 상황에서는 단호하고 신속한 행동으로 타개해 나갔다. 왕건은 이런 강온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다음으로는 지역 세력과 혼인을 통한 강한 연대 때문이다. 왕건은 각 지역 유력 세력과 혼인을 통해 동맹을 맺고 그들로부터 여러 지원을 받아 전쟁을 치러 나갔다. 그러다 보니 부인이 29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왕비의 서열을 정했다. 그중 1비에서 6비 사이에서 난 후손에게만 왕위 계승권을 주었다. 후에 왕위 계승으로 인한 다툼은 있었지만, 아들 대인 4대 광종과 손자 대인 6대 성종과 8대 현종 대에 이르러 북방 유목 민족인 거란의 침입을 극복하고 고려는 전성기를 맞이한다.

    태조 왕건의 숙명적 인연, 궁예와 견훤



    (1)고려 건국 토대를 마련한 일목대왕一目大王 궁예弓裔(878~918)

    승려 선종, 궁예 왕이 되다
    천년 제국 신라 말엽, 흉년과 전염병으로 인해 나라가 초유의 혼돈과 무질서에 직면해 있을 때, 궁예는 세달사世達寺(강원도 영월군 태화산에 있던 절)에서 선종善宗이라는 법명을 지닌 승려로 있었다. 도처에 도적들이 출몰하던 혼란의 시기에 그는 큰 뜻을 품고 891년 기훤箕萱의 부하가 되었으나 기훤이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자 이듬해 원주의 양길梁吉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궁예는 세력 기반을 승려 출신답게 사원 세력과 초적, 도적의 무리에 두었다. 하지만 다른 호족들처럼 확고한 세력 기반으로 작용하지는 못하였다. 그의 무조건적인 반신라적 성향은 신라의 낡은 체제를 파괴하는 촉매제 구실을 하였다. 양길 아래에서 영월, 강릉, 철원 그리고 예성강 유역의 황해도 일대까지 정복하여 중부 일대를 장악하면서 궁예는 세력이 더욱 커졌다. 책사 종간宗侃을 얻은 데 고무된 궁예는 양길을 몰아내고 송악(개성)을 수도로 하여 901년 후고구려를 세웠다. 이 시기에 왕건 부자가 궁예에게 귀부歸附하였다.

    궁예의 꿈과 몰락
    궁예는 무척 잘생겼고, 눈에는 항상 섬광이 번쩍였다고 한다. 그는 사심 없이, 그리고 한 가족처럼 사졸들과 혼연일체가 되었기에 응집력이 강한 군대를 만들 수 있었다. 또한 계율의 준수를 통해 하생한 미륵불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여 엄한 군율이 지배하는 군정적軍政的 결사체를 영위하였다. 왕건을 얻은 궁예는 해상 활동에 박차를 가하여 국세를 키워 나갔다. 육전에서 거듭된 승리를 거두며 한반도의 중부권을 제패하고 해로를 이용하여 나주를 경략하였으며 지금의 경상남도 남해안 일대까지 힘을 미치게 되었다. 궁예가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반신라 감정을 자극하여 옛 고구려 호족들의 호응을 얻어내고, 약탈한 물건을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어 환심을 얻어 냈기 때문이다. 여기에 석가불 이래 미래불인 미륵불이 출세하여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 용화 세계의 이상 낙원을 건설한다는 미륵신앙을 깊이 신봉하던 민중들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듭된 승리에 도취된 그는 교만함과 포악함을 드러냈다. 호족들과 힘겨루기 과정에서 많은 호족들이 죽음을 당하였고, 경륜이 부족해 백성에 대한 가혹한 수취를 개선하지 못하였으며, 엄청난 재정 탕진과 궁궐 축조 등에 힘을 쏟았다. 여기에 미륵신앙을 자신의 신정적神政的 전제정치에 이용하면서 전체 불교계의 반감을 사 백성과 신하들의 신망을 잃게 되었다.

    왕건이 후백제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인망이 커지자 더욱 초조감을 드러냈으며, 결국 918년 6월 그토록 믿고 신임했던 왕건에게 왕위를 뺏기고 권좌에서 물러났다. 산야를 전전하다가 강원도 평강에서 살해되면서 참담하고 서글픈 최후를 맞았다.

    애꾸눈 황제, 궁예란 인물
    궁예는 여러 행동에서 드러나듯 끊고 맺음이 분명하고, 과감하고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형세 판단이 너무 빠르고 모든 일을 빠르게 해내는 능력도 있었고, 한번 마음먹은 일은 반드시 해내는 질긴 면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성격은 때로 모나고 급한 행동으로 드러나 몰락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그래서 궁예는 신라로 대변되는 구체제를 파괴하여 다음 시대의 주인공인 왕건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준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2) 왕건 평생의 숙적, 후백제 왕 견훤甄萱(867~936)

    청년 장군 견훤, 후백제를 세우다
    견훤甄萱
    은 본래 이李씨로, 상주 가은현(현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아차마을 갈전2리)에서 867년 정해생으로 태어났다.

    견훤은 체격과 용모가 웅장하고 기이하며 생각과 기풍이 활달하고 비범하였다. 일찍이 군문에 들어가 남다른 용기와 능력으로 다른 군사들보다 앞장섰으며 출세도 빨랐다. 890년 무리 5천을 이끌고 광주에서 왕이 되었으며, 26세가 되던 892년에 전주에 도읍하여 후백제를 세우고 연호를 정개正開라 하였다. 전라도 지역 군사력과 호족 세력이 중심이 되어 성장하였다. 호남평야라는 최대 곡창 지역을 기반으로 경제력과 군사력에서 처음부터 앞서 나갔다. 남중국의 오월과 우호관계를 맺고, 후당이나 거란 등과 외교관계를 통해 국제적 지위를 높이려 하는 등 국제적 감각도 갖추고 있었다.

    최고의 순간에서 나락으로
    이후 세력을 더욱 북으로 확장하여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의 옛 백제 영토를 대부분 수복할 정도로 막강하였다. 견훤은 927년 친고려적인 성향을 지닌 경애왕을 포석정에서 죽이고 경순왕을 세웠다. 이때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고려 태조 왕건을 공산에서 대파하였다. 신라의 왕위를 마음대로 갈아 치우고, 왕건의 군사까지 꺾어 버린 이 사건은 압도적인 견훤의 힘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930년 1월 벌어진 고창 전투에서 왕건에게 치명적 일격을 당했고, 운주 전투 패배에 이어 나주를 다시 뺏긴 이후 후백제는 내분에 휩싸였다. 이미 69세가 된 견훤은 여러 부인들 사이에서 둔 10여 명의 아들 가운데 후계자를 맏아들이 아닌 넷째 아들 금강金剛으로 정했다. 이에 반발한 맏아들 신검이 참모 이찬 능환能奐과 동생 양검良劍, 용검龍劍 등과 함께 후백제판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왕위 계승 싸움에 휘말린 견훤은 935년 3월 김제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가까스로 6월에 탈출하여 고려에 귀순하였다. 왕건은 귀순한 견훤을 극진하게 대접하였다. 일련의 상황 변화를 지켜보던 신라는 저항을 포기하고 10월에 고려에 투항하였다. 투쟁의 시간이 대통합의 시간으로 바뀌게 되면서 936년 2월 견훤의 사위이자 신검의 매형인 서남해 해상 세력의 주역 박영규가 고려에 귀순하였다. 이에 왕건은 이해 9월 8만 7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신검을 응징하기 위해 나섰고 이 대열에 견훤도 합류하였다. 자신이 세운 나라를 자기 손으로 무너뜨려 왕건 품에 안겨 준 일은 그를 몹시 고통스럽게 했다. 며칠 뒤 등창으로 황산불사에서 천추의 한을 품고 생을 마감하였다(갑작스런 죽음에 대해 고려 측의 암살 가능성을 제기하는 이도 있다).

    세심하지 못한 용장의 몰락
    견훤은 스물을 갓 넘은 나이에 대군을 일으켜 나라를 세운 점으로 보아 꿈이 원대하고 용맹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중요한 전쟁은 자신이 직접 나섰으며, 항상 미래를 계획하는 성품으로 상황에 따라 잘 대처하는 임기응변에도 능했다. 정치적으로 과단성이 있고 주변 장악력도 강했다. 장수로서나 왕으로서는 흠잡을 데 없는 그였다. 하지만 지나치게 자신의 힘을 믿었던 것일까? 자식에 대한 사랑과 권력 관계를 구분하지 못해 몰락에 이르렀으니, 치밀하고 세심한 성격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왕건을 옹립한 개국 4공신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핵심적 역할을 한 이들은 홍유, 배현경, 복지겸, 신숭겸이다. 이 네 사람은 기장騎將 즉 기병대장들이다. 그들은 대개 일반 병사에서부터 궁예군 장수로 성장한 사람들이었다. 개국에서 통일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행적을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홍유洪惟(?~936)
    경상도 의성 사람이다. 초명은 술이다. 무장 출신이지만 언변과 논리가 뛰어나, 고려 건국 당시 왕건을 설득하여 왕으로 옹립한 공이 있다. 17년 동안 궁예를 왕으로 섬기며 장수로 활약하였다. 왕건을 왕으로 추대한 개국 1등 공신이 되었다. 고려 개국 직후 왕건의 왕권 찬탈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청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고, 이듬해 예산현으로 유민 5백여 호를 옮겨 안정시켰다. 이에 왕건은 그를 의성의 호족장으로 대우하는 차원에서 그의 딸을 26번째 부인(의성부원부인義城府院夫人)으로 맞이하였다. 훗날 대상大相이라는 요직을 차지하였고, 뒤에 태사삼중대광 太師三重大匡에 올랐다. 936년 왕건이 연합군을 형성하여 후백제 신검을 칠 때 출전하여 일리천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지만, 그해 천수를 다하였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배현경裵玄慶(?~936)
    경주사람으로 초명은 백옥삼이다. 담력이 뛰어나고 무예가 출중하여 전장에서 많은 공을 세워 병졸 출신으로 승진해 대광大匡에 임명되었다. 과감하고 강직한 성격으로 직언을 서슴지 않았으며, 왕건 역시 신뢰하였기 때문에 직언을 곧잘 수용하였다. 고려 개국 후 장수로, 때로는 중앙의 감찰 관리로 활동하였다. 936년 병이 위독하니 왕건이 그의 집으로 가서 손을 잡고 “아 천명이로구나! 그대의 자손이 있으니 내 어찌 그대를 잊으리!”라고 하였다. 왕건이 손을 놓고 문을 나설 때 운명하였다. 그가 숨을 거두자 국비로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시호는 무열武烈이었고, 아들은 은우이다.

    복지겸卜智謙(생몰년 미상)
    초명은 사괴砂瑰로 면천 복씨 시조이다. 당진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 개국 이후 주로 감찰 업무를 맡아보았다. 개국 초 왕건에 반대하며 반란을 꾀한 세력(환선길, 임춘길 등)을 일일이 색출하여 차단하는 역할을 했다. 죽은 후 시호는 무공武恭이고 묘는 경기도 광주에 있다. 994년 성종 13년에 태사에 추증되어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대사공신代死功臣 신숭겸申崇謙(?~927)
    신숭겸은 전장에서 주군을 대신해 죽음을 불사한 충신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신숭겸이 태어난 곳은 전남 곡성군 목사동현 구룡리로 인근에는 그가 물을 마셨다는 샘물이나 애마를 매어 두었다는 계마석 등 유적들이 많이 있다. 뒤에 춘천으로 옮겨 그곳에서 터전을 잡았다. 궁예가 나라를 세우자 그 휘하에 들어갔다. 체격이 장대하고 용맹이 남달라 전장에서 많은 공을 세워 마군 장군에 올랐다. 하지만 궁예가 학정을 지속하자 홍유, 배현경, 복지겸 등과 모의하여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여 개국 공신이 되었다. 다른 공신들과 함께 고려 국력 신장과 통일 사업에 몰두하였다.

    평산 신씨의 유래 그가 ‘평산 신씨’가 된 유래는 다음과 같다. 고려를 건국한 후 새 황제 왕건을 수행하여 황해도 남동쪽 지역인 평산으로 사냥을 하러 갔을 때, 마침 지나던 기러기 세 마리 중 세 번째 기러기 왼쪽 날개를 맞혀 내는 뛰어난 궁술을 선보였다. 이에 감탄한 왕건은 그에게 평산을 식읍으로 하사하고 관향으로 삼게 되니 평산 신씨의 유래가 되었다. 이때 시간이 신시申時(오후 3시~5시)였기 때문에 성을 신申으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운명의 공산 전투 태조 10년인 927년 9월 견훤은 경상도 북부를 공략하다 서라벌을 기습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새 임금으로 앉혀 버렸다.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왕건은 병력을 이끌고 친히 남하하여 지금 대구광역시 팔공산 동쪽 기슭 은해사 들머리에서 견훤군과 맞붙었다. 초기에는 매복하던 고려군이 우세하였지만 전세가 역전되어 고려군은 궤멸을 당했다. 후백제군은 왕건을 잡기 위해 그 주변을 그물처럼 겹겹이 에워쌌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신숭겸은 황제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로 결심했고, 왕건과 옷을 바꿔 입고서 어거御車를 몰고 적진으로 돌격했다. 후백제군은 신숭겸을 왕건으로 여겨 그 목을 베어 견훤에게 가져가 버렸고, 그사이에 왕건은 겨우 탈출에 성공하였다. 전투 후 고려군은 신숭겸의 시신을 찾으려 했으나 목이 없어 찾지 못하다가 마침 대장 유금필이 신숭겸의 신체 특징을 말하여 겨우 수습할 수 있었다. 뒷날 왕건은 공산 기슭에 순절단을 만들어 그 충성심을 기렸다. 비록 이 전투에서 참패를 당했지만 왕건은 결국 신라와 후백제로부터 항복을 받아 삼한을 통일하는 대업을 달성하였다. 태조 왕건은 머리 없는 신숭겸의 시신에 황금으로 본을 뜬 얼굴을 붙여 주었고 친히 제례를 행하였다. 왕건은 절대 충신 신숭겸에게 장절壯節이란 시호를 하사하였으며, 동생 능길能吉과 아들 보장甫藏을 등용하였다.

    당대 최고 지략가이자 명장인 유금(검)필庾黔弼


    최고의 명장 유금필
    고려 개국의 네 공신과는 다른 측면에서,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이를 언급한다면 단연 유금필庾黔弼을 들 수 있다. 왕건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여지없이 난관을 타개하였고, 어떤 상황에서도 승리를 이끌어 낸 전쟁의 신 같은 존재였다.

    평주(황해도 평산) 출신인 그가 언제부터 무장으로 활동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왕건이 고려를 개국할 당시 이미 명성을 얻고 있었다. 고려 개국 공신 대열에 포함되지 않았기에 왕건의 쿠데타를 비판한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마도 고려 건국 때 관직을 버리고 야인으로 살았을 가능성도 높다.

    당시 고려 북변 골암성(평안도 안변) 지역 여진족들을 진압하는 데 애를 먹은 왕건은 간곡한 부탁과 설득으로 유금필을 보내게 된다. 유금필은 골암진에 도착하여 지략으로 여진족 추장들을 회유하여 북방을 안정시켰다. 이후 정서대장군에 임명되어 925년 연산진(충북 청원 문의면) 전투에서 장수 길환을 죽였다. 이곳은 원래 태봉 땅이었다가 고려 건국 후 백제에 귀부하였다. 이후 임존군(충남 예산)을 공격하여 백제군을 격파하였다. 그해 10월 조물군(경북 안동 근처)에서 왕건과 견훤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한판 승패를 다투었다. 양쪽 군대가 팽팽한 접전을 벌였던 그때 임존성을 무너뜨린 유금필이 군대를 이끌고 가세하자 전세는 단번에 고려에 유리해졌다. 이때 견훤이 불리함을 인식하고 화친을 제의하자 유금필은 강력히 반대하였다. 하지만 왕건은 화친을 받아들였다.

    임전무퇴의 충신
    이후 928년 후백제군 김훤金萱 등이 청주를 침범하자 대파하였고, 930년 병산 전투에서 선봉장으로 나섰다. 이 싸움에서 여러 장수들이 패배할 때에는 퇴로를 잃을 수 있음을 염려하여 회군을 요청할 때, 유금필만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그는 장수로서 용맹과 기상을 중시하고, 싸움에 임하면 절대 물러서는 법이 없었는데 병산 전투는 이런 면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하지만 총신寵臣은 늘 시기와 질투를 받는 법. 931년 참소에 휘말려 곡도鵠島(백령도)로 유배되었다. 이는 고려에 큰 치명타를 안겨 주었다. 견훤은 해군 장군 상애와 상귀를 동원하여 고려의 수도 개성을 마음대로 유린하였다. 대우도(평북 용천 남쪽 80리에 소재)를 습격하고, 저산도 목장에서 키우던 군마를 대거 약탈해 갔다. 왕건은 대광 만세를 시켜 대응했지만 역부족이어서 낙담을 하고 있었다. 이때 유금필은 곡도와 포을도包乙島(대청도) 장정을 모아 군대를 편성하여 후백제군을 공략하였다.

    목숨 바쳐 명을 즉시 수행하다
    이듬해 유근필이 정남대장군에 임명되어 의성부를 지키고 있을 때, 후백제군이 경주를 완전 포위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염려가 된 왕건은 급히 유금필을 경주로 파견하고자 서찰을 보냈다. 명을 받은 유금필은 그날로 경주로 달려갔다. 시간을 다투는 위기상황에 많은 병력을 이끌고 가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기동력이 떨어진다고 판단하여 별동대 80명만 선발하였다. 결사대로 변한 80명을 이끌고 후백제 대군을 뚫고 달려가 경주에 도착한 유금필은 그곳에서 7일간 머물며 후백제군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고, 후백제 장군 금달과 환궁 등 7명을 생포하기까지 하였다. 이를 지나치게 칭찬하는 왕건에게 “국난을 당하여 자기 일신을 생각하지 않는 것과 위기에 직면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신하된 자의 직분입니다”라며 간언을 올렸다.

    어찌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934년 운주(홍성) 전투 때 고려군은 공주 이북 30여 성을 얻는 쾌거를 올렸다. 이후 후백제는 기세가 꺾여 내분에 휘말렸다. 이러한 혼란상을 틈타 고려는 935년 나주 재탈환 전쟁을 시도했다. 앞서 929년 후백제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나주를 거의 내어 준 고려는 이후 여러 차례 나주 회복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바 있었다. 나주를 다시 탈환하려는 이때 신하들이 유금필을 천거하자, 그는 “비록 늙었으나 국가대사에 어찌 있는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라며 참전하였다. 이후 유금필은 나주 공략에 성공하여 뱃길을 열었고 이 지역을 안정시켰다. 훗날 금산사를 탈출한 견훤은 이곳 나주를 통해 항복하였다.

    상승장군 충절공 유금필
    간략한 사적만 보아도 유금필은 일단 전투를 하면 승리를 일구어 내는 무적의 상승장군이고, 어떤 싸움에서도 물러난 적이 없었다. 그는 936년 태조를 따라 후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켰으며 941년에 죽었다. 시호는 충절忠節이다. 성종 13년 태사로 추증하고,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태조는 유언으로 유금필의 자손이 죄를 지어도 따지지 말고 중용하라고 할 정도로 믿고 의지하였다. 아들은 긍兢, 관官, 경慶이고, 태조의 제9비 동양원부인東陽院夫人 유씨가 딸이다.
    그는 장수로서 지략을 지녔으며, 병사들에게는 늘 신망을 얻었다. 출정할 때는 명령을 받으면 즉각 출발하여 집에 머물지 않을 정도로 멸사봉공滅私奉公하는 자세를 견지했다. 개선할 때면 태조는 반드시 마중을 나가 위로하여 시종일관 다른 장수들이 받지 못한 총애와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유금필은 1456년 조선에서 세운 무성묘武成廟에 배향된 신라, 고구려, 고려, 조선의 18명 장군 가운데 한 명이 됨으로써 고려를 대표하는 명장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정리-객원기자 이해영)


    <참고문헌>
    『역주 환단고기』(안경전, 상생출판, 2012)
    『신편 고려사 절요』(김종서 외 지음, 민족문화추진회 옮김, 신서원 ,2004)
    『삼국사기』(김부식, 이재호 옮김, 솔출판사, 2006)
    『삼국유사』(일연, 이민수 역, 을유문화사, 1998)
    『고려사로 고려를 읽다』(이한우, 21세기 북스, 2012)
    『고려사의 재발견』(박종기, 휴머니스트, 2015)
    『전쟁과 역사 삼국편』(임용한, 혜안, 2002)
    『다시찾는 우리역사』(한영우, 경세원, 2011)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박영규, 들녘, 1996)
    『궁예진훤왕건과 열정의 시대』(이도학, 김영사, 2000)
    『민족사를 바꾼 무인들』(황원갑, 인디북, 2004)
    『이야기 고려왕조실록 상』(한국인물사연구원 지음, 타오름, 2009)
    『답사여행의 길잡이5.전남』(한국문화유산답사회, 돌베개, 2002)



    태조 왕건 가계의 비밀
    왕건의 조상에 대해서는 3대 추존 묘호만 있을 뿐 정확한 사실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민담처럼 전해지는 고려 의종 때 인물 김관의金寬毅의 편년통록編年通錄 기록이 있는데, 그에 따르면 왕건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신라 성골장군聖骨將軍을 칭하던 호경虎景은 백두산에서 내려와 송악에 자리 잡고 사냥을 업으로 하였다. 호경은 아간阿干 강충康忠을 낳고 강충은 거사 보육寶育을 낳았다. 보육은 당나라에서 온 돈 많은 귀족을 사위로 삼아 아들을 낳으니 이가 작제건作帝建이다. 작제건은 #상인을 따라 중국에 왕래하면서 서해 용왕을 괴롭히는 늙은 여우를 활로 쏘아 죽이고 그의 딸 서해용녀西海龍女를 아내로 맞이하여# 용건龍建(왕륭)을 낳았다. 용건은 한씨 여인을 아내로 맞아 아들을 낳으니, 그가 왕건이다. 왕건의 조상은 모두 무예, 특히 활쏘기에 능했다. 이 이야기로 보면 왕건 집안은 송악 지방 호족 출신 무장들이다. 중국과 해상무역을 통해 막대한 재력을 축적한 무역 상인 집안으로 자본을 축적하고 인근 해상 세력과 긴밀한 네트워크를 이뤘다. 이런 힘은 후에 왕건이 나주를 점령하고 삼한 통합을 할 때 밑거름이 되어 주었다.

    춘천 장절공 신숭겸 묘소에 가다
    신숭겸의 묘는 박사 마을로 유명한 현재 춘천시 서면 방동리에 있다. 이곳에 사당인 장절사와 함께 소재하고 있다. 좌우에 울창한 소나무가 도열하고 있고, 추운 겨울에도 따뜻한 햇볕이 들어서 생기生氣와 함께 포근함을 느끼게 해 준다. 풍수를 모르는 이도 이곳이 명당자리임을 누구도 알 수 있을 정도다. 앞쪽으로는 북한강 의암호 푸른 강물이 흐르며 저 멀리 대룡산大龍山(889.2m)과 봉의산鳳儀山(300.4m) 등이 포근하게 감싸 안은 춘천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주변에는 임진왜란 당시 지세포 만호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함께 왜적과 싸우다 남해 미조항에서 전사한 충장공 한백록韓百祿(1555~1592)의 묘역이 있다. 주군에 대한 충신의 매운 얼을 느끼게 해 주기에 충분한 장소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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