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B다시보기 | 인간의 길 가효국충 27회_청빈한 대쪽 선비 미수 허목

[STB하이라이트]
강의자: 허찬무 알리스공공정책연구원장

미수 허목의 생애(1595. 12. 11 ~ 1682. 4. 27)


임진왜란 중인 1595년 한성 창선방에서 출생하였으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까지 두 호란을 모두 겪었던 미수 허목. 19세 때 이원익의 손녀와 결혼을 하였고 23세 때 퇴계 이황의 직계 제자인 한강 정구 선생을 만나 3년 동안 수학을 하였다. 한강 정구 선생은 예학의 대가였다. 허목은 정구 선생으로부터 예학의 기본을 배웠다. 32세에 정거의 징벌을 받게 된다. 정거의 징벌은 인조 임금이 아버지인 정원 대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는 것은 예에 어긋난다고 반대를 했던 허목이 몇 년간 과거 시험을 못 보도록 인조 임금으로부터 받은 징벌이다. 이때 허목은 일생의 진로를 바꾸게 된다. 과거 시험을 보지 않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학문하고 책을 쓰고 스승을 찾아다니는 재야의 길을 걷게 된다. 그렇게 24년이 지난 뒤 효종이 즉위를 하게 되고 능참봉이라는 종9품 관직의 천거를 받지만 한 달 만에 사직한다.

효종의 국상에 자의대비가 입을 상복을 두고 벌인 서인과 남인의 기해예송 당시 패한 징벌로 허목은 삼척부사로 좌천을 하게 되고 68세 때 해임이 되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다시 12년이 흘러 숙종이 즉위하게 되고 80세에 종2품 대사헌으로 다시 관직을 시작하여 우의정이 되고 84세에 우의정을 사직하고 고향 연천으로 다시 내려간다. 86세 경신환국으로 허목이 속했던 남인이 정권에서 서인으로부터 축출당하게 되고 삭탈관작이 된다. 2년 뒤 88세에 별세하게 된다.

허목의 성품


허목의 특징은 한마디로 청빈한 대쪽 선비라고 할 수 있다. 허목의 대쪽 같은 성품을 성호사설로 유명한 조선 후기 실학자인 성호 이익은 이렇게 표현했다.

“허목은 평소 권세에 아부하지 않고 올바름을 지켜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간사스럽고 잘못된 것 배척하기를 한 칼로 쳐 두 동강 내듯 하였다.” -이익-
퇴계 이황의 제자이며 허목의 스승이었던 여헌 장현광은 “미수공은 부귀를 뜬구름처럼 여기고 전원에서 만족하며 절개를 바꾸지 않았다.”고 하였다.
허목이 병자호란 피난길에 지은 시를 통해서도 그 성품을 알 수 있다.
세상에 윤리도덕 날로 달로 무너지니 (世道日交喪)
현명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귀히 하네. (賢者貴者珍)
나는야 노중련의 고결함을 사모하고 (魯連慕高潔)
신도갈 사모하여 숨어살기 생각했네. (申屠思遁身)


노중련 전국시대 제나라 사람으로 뛰어난 책략을 지녔으나 조정에 나가 벼슬을 살지 않고 고고한 절의만을 지키며 살았다

고전과 예악에 정통


허목은 원시유교의 경전인 육경을 비롯한 고전과 예악에 정통했다. 허목 스스로 일만 권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매번 관아가 파하고 일이 없으면 항상 책을 읽었는데, 싫증이 나면 거문고를 타면서 놀았다.” 허목, 『척주지』


청빈한 공직자


허목 선생이 지은 시를 통해 안빈낙도의 자세를 살펴볼 수 있다.

뭇사람 내 곤궁 가엽게 여기건만 (衆人悶我常窮)
얼굴을 태연히 좋게 하여 지낸다네 (居然猶有好容顔)
만사를 천명으로 돌리니 되레 기뻐 (萬事付命還可喜)
나는야 내 가난을 부귀와 안 바꾸리. (富貴不吾飢寒)


허목이 후손들의 교육을 위해 작성한 18훈訓의 첫 번째가 ‘재물과 이득을 좋아하지 말라’이다. 재물을 좇아가다 그릇된 판단을 할 수 있음을 후손들에게 가장 경계하게 한 것이다.

83세 때 낡고 허름한 집을 국비로 수리하는 것을 극구 사양했다. ”자신은 이미 나라의 공복이 아니며, 설령 관원이라 하더라도 사적인 일에 국가의 재정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86세에 허목은 은거당에서 퇴거하며 “자신은 이미 죄인이므로 임금이 하사하신 집에서 편히 지낼 수 없다.”고 하였다.


허목의 선비관


“거룩하고 훌륭한 선비는 높은 벼슬과 많은 녹봉에 끌리지 않고, 오직 임금이 정성스러운가 아닌가를 보아서 물러가고 나오는 것이오니, 임금으로서 인재를 얻는 것은 정성에 있고 녹봉에 있지 않습니다.”


백성을 사랑한 미수


북벌정책을 반대하며 효종에게 올린 옥궤명玉几銘
“백성을 보호하는 나라는 번성하고, 백성을 누르고 이기는 나라는 망할 것입니다.” (保民者昌 勝民者亡)


숙종에게 올린 차자 중에서
“임금의 도리는 덕을 닦는 것이 근본이요… 백성을 공경하는 것이 중하기 때문에, … 백성을 죽일 수는 있어도 이길 수는 없으며, 비록 무지한 어리석은 백성도 공정하지 않으면 복종하지 않습니다.”


허목의 문집인 기언의 기록을 보면

“군덕이 밝아지면 백관의 직분이 닦여져서 사방의 뭇 백성들이 기뻐하게 되고, … 백성들은 아프고 괴로운 것을 잊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허목은 집집마다 군포를 내는 세금제도인 호포제를 반대하며

“백성이 곤궁하면 누구와 더불어 부유하고, 백성이 유랑하면 누구와 더불어 나라를 다스릴 것입니까?”라 하였다. 또 앞으로 다가올 자연재해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유명한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를 건립했다. 이와 같이 백성을 사랑하는 근본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덕치를 강조한 미수


“천하의 일에 두 갈래가 있으니 옳은 것과 그른 것뿐입니다. 옳은 것은 공정한 데서 나오고 그른 것은 사욕에서 나오니, 나라의 치란과 흥망은 여기에 매여 있습니다.” 허목, 『기언』(記言)


“언로란 공론이 형성되는 길이라, 삼대의 제도는 임금의 잘못이 있으면 백관이 각기 그 직책으로서 간하고, … 서민들은 거리에서 비방했으며, 또 주나라는 ‘비방의 팻말’을 세웠는데, 진나라 때에 요언을 금하는 법령을 두었으므로 그 잘못을 얻어 듣지 못하고 망했습니다.” 허목, 『기언』(記言)


미수의 3수(守) 원칙


마음의 문제를 강조했던 허목은 심학도를 만들어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하나, 입을 지키는 것(守口). 입을 지키면 망령된 말이 없다.
둘, 몸을 지키는 것(守身). 몸을 지키면 망령된 행실이 없다.
셋, 마음을 지키는 것(守心). 마음을 지키면 망령된 뜻이 없다.


※척주동해비
미수의 전서체로 된 척주동해비는 총 192자의 글씨가 쓰여 있다.
허목이 삼척부사로 재임할 당시 심한 폭풍이 일어 바닷물이 삼척을 덮치면서 난리가 났는데, 그가 동해를 예찬하는 노래를 지어 비를 세우자 물난리가 가라앉았다. 그 뒤로는 아무리 거센 풍랑이 와도 그 비를 넘지 않았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척주동해비의 탁본을 구하기 위해 노력을 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