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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인물탐구]

    명장열전 | 조선의 태조 이성계


    *경석이 여쭈기를 “창업군주創業君主도 명장의 열에 들겠나이까?”하니 (상제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러하니라.” 하시니라.


    -증산도 도전 5편 339장 2절

    引手攀蘿上碧峯(인수반라상벽봉) 손을 뻗어 덩굴을 부여잡고 푸른 뫼에 오르니
    一庵高臥白雲中(일암고와백운중) 암자 하나 높다라니 흰 구름 속에 누워있네
    若將眼界爲吾土(약장안계위오토) 눈에 보이는 곳을 우리 땅으로 한다면
    楚越江南豈不容(초월강남기불용) 강남의 초나라 월나라인들 어찌 포용하지 못할까

    -이성계의 시, 서거정의 『동인시화 東人詩話』에서

    ■이성계 (초명: 이성계李成桂, 즉위 후 이단李旦 1335년~1408년)

    1335년 - 고려 동북면 화령군 영흥 흑석리에서 탄생, 본관은 전주全州
    1356년 21세 - 공민왕의 쌍성총관부 탈환에 협조 후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
    1380년 46세 - 지리산 근처 황산荒山에서 왜구들을 소탕함(황산대첩)
    1388년 54세 - 위화도에서 회군함
    1392년 58세 - 조선 건국, 태조太祖로 즉위함
    1394년 60세 - 수도를 한양으로 옮김
    1400년 67세 - 왕자의 난으로 양위하고 함흥으로 거처를 옮김(함흥차사)
    1402년 69세 - 한양으로 돌아와 태상왕으로 불교에 심취
    1408년 74세 -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승하, 능은 건원릉


    들어가는 글



    황혼의 제국, 몽골과 고려
    칭기즈칸 이후 영원할 것만 같던 원元 제국(몽골)은 급속도로 쇠약해졌다. 특유의 야성野性을 잃어버렸고, 황실은 라마교에 빠져 흥청거렸으며, 대신들은 권력 투쟁에 혈안이 되었다. 그 사이 중원대륙 남방에서 시작된 반란은 천하에 혼란을 가져왔고, 원 제국에 의해 유지된 동아시아의 절대적인 힘은 진공 상태로 말 그대로 천하대란, 혼돈의 시절이었다. 기나긴 대몽항쟁과 두 차례의 일본 원정을 겪은 고려는 글자 그대로 껍데기만 남았다. 천자국에서 제후국으로 강등되었고, 원의 내정 간섭을 받았다. 관리들은 원나라에 충성하기에 바빴고, 아예 고려를 원나라의 지배를 받는 성으로 편입하자는 주장을 펴기도 하였다(입성책동立省策動, 고려 후기 간신인 오잠吳潛과 류청신柳淸臣 등으로 이에 대해서는 환단고기를 참조할 것). 부원附元 권문세족은 고려의 정치, 경제력을 손아귀에 쥐고 민생을 살피지 않아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지기 시작했다.

    개혁의 실패
    이런 상황에서 고려의 새 임금이 된 이가 공민왕恭愍王이었다. 원 조정은 한족 반란군인 홍건적紅巾賊을 감당할 수 없자 고려에 원군을 청하였는데, 이때 최영 등 장수들이 원나라에 파견되었다. 반란을 진압한 후 귀환한 이들의 보고를 통해 정세를 파악한 공민왕은 반원 개혁정치를 실시하였다. 부원 세력인 기황후奇皇后의 일족으로 권문세족의 수장이 되어 권세를 누리던 기철과 그 일당을 숙청하고, 내정간섭 기구인 정동행성이문소를 혁파하고, 1356년 동북면 쌍성총관부를 탈환하였다. 이때 동북면 지역 유력자 중 1명으로 다루가치(達魯花赤) 관직에 있던 이자춘李子春이 아들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고려에 귀순하여, 고려군 공격에 내응하여 고토 회복의 공을 세웠다. 이성계가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자주권을 되찾고 내정을 개혁해 백성을 편안케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려는 공민왕에게 기득권 세력의 반발은 만만치 않았고, 홍건적들이 원의 토벌에 밀려 고려에 침입하여 한때 개경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여기에 1350년 경인년 봄, 고려 해안에 모습을 드러낸 왜구들은 끊임없이 고려를 침범하였다(이들의 침입은 조선 초기까지 대략 50년간 지속되어 약 4백 건 가까이 발생하였다. 1350년에만 5차례 침략이 있었다). 북로남왜北虜南倭! 국토는 전란에 휩싸이고 백성들은 거듭 피난 보따리를 싸야 했다. 공민왕의 개혁은 그 기회를 잃었다. 왕은 불운하였고, 그의 불운은 고려의 불행이 되었던 반면, 한 사내에게는 기회가 되어 주었다.

    제1장 조선을 개창하다


    고려의 바다를 지켜라


    1380년 우왕 6년 고려 남부 하삼도下三道(양광도-지금의 경기도와 충청, 강원 영서지역 일부-와 경상, 전라의 3도) 천 리 산야는 피로 물들었다. 산발적으로 해안 지대를 공격하던 왜적은 7월에 들어서자 오백여 척의 병선으로 진포鎭浦(충남 서천, 장항, 또는 전북 군산 인근 바다)에 상륙작전을 감행하였다. 당시 기록을 보면 “시체가 산과 들에 덮였고 배로 옮기다 땅에 떨어진 쌀만 한 자나 되었다”고 한다.

    고려는 판삼사사判三司事 최영을 해도도통사海道都統使를 겸하게 하여 대비하게 하였다. 최영은 최무선
    (※)
    을 통해 화약으로 화기를 만들게 하였다. 예성강가에서 출진한 고려 수군 100척은 나세羅世, 최무선崔茂宣 등을 지휘관으로 하여 왜적 격멸을 위해 진포 앞바다에 나타났다. 전함 수나 등선登船 단병접전短兵接戰에 능한 왜적에 전투력은 열세였으나 고려는 비장의 무기 화포가 있었다. 이 전투에는 세계 최초로 화약 무기가 사용되었다.

    진포에 정박해 두었던 왜선을 화포와 화통으로 모조리 불태워 버렸으나, 왜적은 공주, 옥주沃州(지금의 충북 옥천)까지 달아났고, 이산현과 영동현을 비롯해 내륙 깊숙이 돌며 더욱 잔혹하게 약탈을 일삼았다. 왜적은 고려군을 격파하면서 북쪽으로 진격해 개경을 공격하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이에 고려조정은 이성계를 양광, 전라, 경상도 순찰사를 삼아서 왜적 토벌을 명하였다.


    황산에서 왜적을 크게 이기다



    삼남 지방을 피로 물들인 왜구
    퇴로가 막힌 왜적은 사근내역沙斤乃驛(지금의 함양)에서 고려군을 격파, 박수경, 배언 두 원수가 전사하였다. 왜적은 서진하여 전라도 운봉을 불 지른 뒤 인월引月 근처 황산荒山에 주둔하였다. 열매 맺는 가을, 풍요로운 수확의 계절에 남도 천리의 고려 강산은 적에게 짓밟혀 황량한 폐허가 되었다. 백성들의 목숨은 폭풍 앞의 낙엽같이 무너졌다. 기록을 보면, 왜적은 두세 살 되는 여자아이를 사로잡아 머리를 깎고 배를 가른 후 깨끗이 씻어서 쌀, 술과 함께 하늘에 제사를 지내니 삼도의 연해 지방이 텅 비게 되었다고 참상을 전하고 있다.

    황산대첩과 이성계
    이미 황산 줄기가 동으로 뻗어 인풍과 인월의 두 벌판을 갈라놓은 돌출부에 집결한 왜적은 요해처를 점령하여 이성계의 선봉대를 패퇴시켰다. 이후 여러 번 어려움을 겪은 뒤에야, 이성계, 이지란이 이끄는 주력은 적진을 향해 진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이성계는 왼쪽 다리에 활을 맞기도 하고 뒤에서 달려드는 적장의 창에 크게 다칠 뻔했으나 이지란이 먼저 활을 쏴 겨우 무사할 수 있었다. 격렬한 전투였다. 이때 왜적은 아지발도(우리말 ‘아기’와 용맹한 자라는 몽골어 바토르의 한자 음차 표기인 ‘발도’를 합쳐 어린 영웅이란 뜻)라는 백마 탄 소년 장수가 나타나 이성계 군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이때 신궁 이성계의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이성계가 아지발도의 투구 꼭지를 맞혀 떨어뜨린 틈에 이지란이 쏘아 죽였다. 장수를 잃은 왜적은 갈팡질팡하다 대패하였다. 이때 죽임을 당하는 왜적의 곡성이 마치 1만 마리의 소의 울음소리 같았고, 냇물이 모두 그들의 피로 붉게 물들어 일주일 동안 물을 먹을 수 없었으며, 포획한 말이 1,600여 필이고 병기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했다. 이 전투를 황산대첩荒山大捷이라고 한다. 이 전투로 이성계의 무명武名은 전국적으로 떨치게 된다. 이전까지 이성계는 북방으로 쳐들어오는 홍건적, 나하추 등을 격퇴하는 동북면의 장수였을 뿐, 고려 남부 백성들과는 별다른 인연이 없었다. 이 승첩 이후 이성계는 전국구 무장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요동 정벌과 위화도 회군


    고려 말 조선 초 요동 정벌 상황
    고려 말 조선 초에는 요동遼東 지역 정벌이 여러 번 있었다. 첫 번째는 공민왕 시절로 1356년부터 1370년 경술까지 지속되었다. 그중 1369년 공민왕 18년 이성계를 동북면원수로 삼아 동녕부(遼陽)를 들이치게 했다. 고려군은 파죽지세로 요동을 지나 올랄산성兀剌山城(우라산성于羅山城 또는 오녀산성五女山城)에서 원 잔당들을 공격하였다. 이성계는 화살 70여 발을 연거푸 쏘아 날려 적병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고, 요동성을 공략 함락시켰다. 하지만 왜구들이 고려 땅 곳곳을 유린하였고, 보급 문제로 실질적 지배가 힘들자 철군하고 말았다. 두 번째는 그 유명한 위화도威化島 회군으로 좌절된 1388년의 요동 정벌이고 세 번째는 1397년 조선 태조 6년 정도전에 의해 진행된 요동 정벌 시도였다. 이는 태종 이방원의 1차 왕자의 난에 의해 좌절되었다.

    요동 정벌의 진실
    1388년 우왕 14년은 역사적인 해였다. 황산대첩 이후 이성계는 중앙 정계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냈다. 그런 시기 정몽주와 긴밀했던 조반趙胖이 당시 집권자 중 한 사람인 염흥방廉興邦과 갈등을 빚은 사건을 계기로 이성계는 당시 집권자들을 제거하고, 최영과 함께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였다(정월). 이 과정에서 집권자들에게 배척을 당해 두문불출하던 조준 등 신진 사대부들이 이성계 세력에 합류하였다. 이성계가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면서 정치적으로 부상하자, 그와 여러 면에서 견해를 달리하던 최영은 불안을 느꼈다.

    그런 상황에서 원의 잔존 세력을 평정하고 고려와 국경을 접하게 된 명明나라는 원에 속했던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회수하여 철령위鐵嶺衛(현재 만주 심양 부근에 있는 본계시本溪市 부근)를 설치하여 다스리겠다는 뜻을 고려에 통보하였다(2월). 고려 조정에서는 이에 대한 대책을 두고 논란을 벌였다. 즉 요동 공격을 하자는 주장과 외교를 통해 해결하자는 책략이 맞섰다.

    명의 철령위 설치는 원에 속했던 군민은 요동도사遼東都司가 이어받아 관할해야 마땅하다는 원칙을 표방한 것이다. 따라서 고려 땅에 철령위를 설치하면 유지하기 어렵다는 현지의 보고가 있자, 곧바로 요양 북쪽에 철령위를 설치하였다. 즉 고려 영토가 명에 의해 회수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런데도 우왕과 최영은 요동 공격군을 편성하여 출병을 강행하였다(4월). 무리하고 졸속적으로 서두르는 측면이 있었다.

    총병력은 3만 8천여 명으로 좌, 우군으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조민수의 좌군은 서경과 양광도, 경상도, 전라도, 계림, 안동 등 넓은 지역에서 병력을 차출한 반면 이성계의 우군은 안주도, 동북면, 강원도의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그러한 만큼 이성계는 많은 휘하 친병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요동 공격은 이성계 휘하의 강력한 사병을 합법적으로 제거하려는 최영의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이는 명과의 관계 회복에 노력한 정몽주, 정도전 등 문신 세력들에게 정치적 타격을 가할 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을 아는 이성계는 소국小國이 대국大國을 치는 것은 잘못이라는 등의 4가지 이유
    (※)
    를 들어 요동 공격의 부당성을 호소하였으나 우왕과 최영은 묵살하였다.

    5월, 선봉대가 압록강 어귀의 작은 섬 위화도威化島에 도착하였다. 최영은 압록강을 건너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성계는 이에 불복, 군대를 돌려 거꾸로 수도 개경으로 향했다. 당시 개경에 있던 정도전, 조준, 정몽주는 이성계에 대한 반감, 반대 여론을 무마시켰다(6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대해서 조선 개국이 결국 무인의 쿠데타라는 사실과 함께, 조선의 사대주의 외교의 시발로 보는 견해가 많다. 몽골과의 긴 항쟁 속에서도 굴하지 않았던 고려의 민족주의, 신흥 강국 명을 치고 고토를 회복하겠다는 진취적 발상 등을 높이 사는 시각에서 볼 때 이 사건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이 많은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당시 요동 정벌 자체가 최영을 위시한 친원 권문세족들이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였다는 점과 당시 고려 사회 내부의 사회, 경제적 취약성을 간과할 수 없다. 외적들의 침입도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서 요동 정벌 같은 큰 전쟁을 위해 백성들을 전쟁의 담보로 삼은 것은 결국 현실성 없는 이상주의적 측면이 많다는 평가도 있다.

    회군한 이성계는 개경을 점령하여 우왕을 폐위하고 9세의 창왕을 옹립하여 섭정을 전담하였으며 최영
    (※)
    을 제거하여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고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위화도 회군은 이성계가 혼자 일으킨 쿠데타가 아니라, 신진 사대부가 신흥 무인세력을 끌어들여 구세력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고 조선을 개창하는 단초가 된 사건이었다.

    전제 개혁을 하다


    당시 고려는 불교의 세속적 타락과 권문세족의 횡포로 인해 전제 개혁, 노비 변정, 사원 정리 등이 모두 상호 연관되는 핵심 사회 문제였고, 피할 수 없는 정치적 과제였다. 지배층은 이런 문제를 해결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묵은 세력이었을 뿐이다.

    위화도 회군 이후 정권을 잡은 이성계 일파가 제일 먼저 추진한 일은 조준 등을 내세운 전제田制 개혁이었다. 이는 개인이 함부로 토지를 사유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권문세족들이 보유한 토지를 몰수하고 새 정권을 창출하는 데 필요한 자금 확보는 물론, 백성들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도전은 모든 백성에게 농지를 나누어 주어 지주제를 없애고 자작농을 만드는 것이 목표인 ‘계구수전計口授田’을 주장하였으나, 권문세족들의 반대로 한 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스승인 이색과 친구인 정몽주
    (※)
    등과 의견을 달리하면서 서서히 멀리하는 관계가 되었다.

    조준, 정도전 등이 추진한 토지제도는 여러 현실적인 부분을 고려하여 수조권收組權(관료들에게 나라를 대신하여 조세租稅를 거두어 월급으로 사용하게 한 권리) 측면에서 개혁이 이루어졌다. 당시 지배층들의 토지는 산천을 경계로 할 정도였다고 한다. 권세로 농민들을 억압하여 하나의 토지에서 여러 명의 관료들이 수조권을 행사함으로써 정작 백성들은 농사를 지어도 손에 쥐는 게 없어 민생은 도탄에 빠지게 된 상황이었다. 그래서 관리들에게 수조권을 주되 그 대상을 대체로 현직 관료 중심으로 범위가 제한되었고, 농민의 경작권을 법적으로 보장하였다. 1391년 공양왕 3년 5월 이런 취지를 담은 새 토지제도인 과전법科田法이 반포되었다. 

    1392년 3월 초 이성계가 해주의 사냥터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자 이성계 세력을 제거하려는 정몽주에 의해 정도전, 조준 등이 죽음을 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하지만 4월 10일 이방원, 조영규 등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격살함으로써, 고려 왕조를 지지하는 세력은 구심점을 잃고 와해되었다.

    조선의 태조가 되다


    이성계는 정도전 등의 추대를 받아 1392년 8월 5일(음력 7월 17일)에 개성 수창궁壽昌宮에서 공양왕으로부터 선위禪位받는 형식으로 왕위에 올랐다. 고려는 태조 왕건 이래 474년 제34대로 멸망하였다. 왕조 교체기는 대부분 격동의 시간이다. 세상을 바꾸려는 야심에 찬 인재들 간에 죽고 죽이는 모략과 암투가 펼쳐진다. 대규모 전쟁으로 25개 왕조가 명멸한 중국에 비해 우리의 왕조 교체는 상당히 평온한 편이다. 이성계는 개국에 반대한 핵심 인물만 처단하였을 뿐 이외 인사들은 재등용하였다.

    태조는 민심의 혁신을 위하여 국호의 개정과 천도를 단행하였다. 먼저 국호는 단군조선의 계승자임을 밝히고자 하는 자부심과 사명감에서 조선朝鮮으로 정하였다. 1394년에는 개성 중심의 구질서를 탈피하면서 행정과 수로 교통의 요지이며 주변의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 방위에 매우 편리하고 그 전까지 삼국 분열 의식의 색채가 적었던 한양으로 천도하였다.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고 경복궁, 관아, 성곽, 4대문을 건설하였다. 태조는 정도전 등 소수의 재상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여 왕권의 행사가 강력하였다. 하지만 이는 많은 개국공신과 종친을 소외시켜 제1차 왕자의 난을 부르는 원인이 된다.

    왕자의 난과 최후


    태조는 둘째 부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를 총애했다. 강씨는 젊고 총명했으며 친정이 권문세가였기에 힘이 되어 주었다. 태조의 집권 때에도 직접 참여하여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여기에 정도전 등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급기야 신덕왕후는 자신의 아들을 왕세자로 책봉하기를 간절히 소망하였고 태조 역시 방석을 총애하여, 첫째 부인 한씨 소생의 장성한 왕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막내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방석의 세자 책봉에 가장 불만이 많았던 이는 정안군 이방원李芳遠이었다. 그는 고려조 과거에 급제할 정도로 학문적 소양도 있었고, 부친 이성계의 자랑이기도 했다.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격살해 조선 개국에 큰 공을 세웠고, 왕대비 안씨를 강압하여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이성계를 즉위시킨 주인공이었다. 그렇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왕후와 정도전에 의해 군권을 상실하고 개국공신 책록에서도 제외당했다. 태조는 이런 아들의 불만을 간과하였다.

    1398년 무인년 8월 25일 방원을 비롯한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 소생 왕자들이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을 불의에 습격하고 세자 방석과 동복형 방번을 죽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1차 왕자의 난, 무인정사戊寅靖社였다.

    조선 건국 후 지위가 급격히 올라가고 실권을 쥔 이가 정도전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한나라 장량에 비유하면서 한고조 유방이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를 이용했다면서 이성계보다 자신이 더 개국의 주역임을 내세우곤 했다. 그는 맹자의 역성혁명론을 주장하였고, 재상을 최고 실권자로 하여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합리적인 관료 지배체제를 이상적인 정치제도로 보았으나 이런 정치관은 왕조사회에서는 대단히 위협적인 내용이었다. 태조는 정도전을 너무 신뢰하였다. 일련의 골육상잔 과정을 지켜본 태조는 크게 상심하고 왕위를 둘째 아들 방과芳果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이어 일어난 2차 왕자의 난을 겪고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함경도로 들어간 채 돌아오지 않았다.

    이성계는 원나라에서 태어나 철들 무렵 고려인이 되었고, 전쟁 영웅으로 당시 상대할 수 있는 모든 세력과 싸워서 이겼고, 나라를 창업하였다. 하지만 자랑스러운 아들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나고, 사랑하는 이들을 잃어버린 채 말년에는 쉬이 죽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쓸쓸히 한탄하는 모습도 보였다. 1401년 한성부로 돌아와 태상왕으로 7년을 더 살며 먼저 간 이들을 위한 염불삼매로 조용한 나날을 보내다가, 태종 8년인 1408년 음력 5월 24일에 지병이던 중풍이 악화되어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아들 태종을 두 번 쳐다본 뒤 74세로 승하하였다. 승하하기 전 태조는 자신을 고향인 함흥에 묻어 달라고 했지만, 태종은 차마 왕조의 개창자이기도 한 아버지의 무덤을 함흥에 묻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한양 근교 현 구리시 건원릉建元陵에 모시고, 함흥의 흙과 억새풀을 가져다 무덤을 덮었다. 현재도 건원릉에는 다른 능과 달리 억새가 무성하다.

    제2장 조선 창업의 3요소


    하나, 인간 이성계


    이성계는 고려 충숙왕 복위 3년(1335년) 음력 10월 11일 함경도 영흥 흑석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역사상 ‘태조’들이 가진 미덕을 고루 갖췄다고 생각된다. 우선 그는 홍건적과 왜구 등 외세의 침입을 물리치면서 나라를 대표하는 명장으로 떠올랐다. 덕망과 인품도 훌륭해 자신을 찾아온 명민한 인재들을 너른 포용력으로 감쌌다. 정치적 야망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점진적 방법을 선호했다. 신기에 가까운 말타기 솜씨를 선보이는 격구 천재였고, 활쏘기는 신궁에 가까웠다는 여러 기록들을 볼 수 있다. 출사 이후 30여 년 동안 전장에 나아가 동아시아에 있던 모든 무력 세력과 일전을 겨뤘고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고 전해 온다.

    조선 초기 문신 이정형이 쓴 『동각잡기』에 따르면 이성계가 부하들을 예의로 대접해서 아무도 욕하는 자가 없었으며, 서로 이성계 부대에 소속되고 싶어 했다고 전한다. 또한 항상 겸손하게 행동했으며, 남의 위에 서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활을 쏠 때도 상대편의 실력을 봐서 비슷하게 맞히다가 권하는 이가 있으면 한 번쯤 더 맞히는 데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스스로 낮추는 처신으로 주위의 신망을 얻는 한편, 정도전의 계획에 따라 개국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이성계가 고려에 출사하였을 때 나이가 만 스물한 살이었다. 그전까지 이성계는 원나라 사람으로 살았다. 조상들로부터 뿌리가 고려 출신임을 교육받았겠지만, 원나라 땅에서 나고 자랐다. 이 나이면 이미 세계관이 다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런 이성계였기에 고려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이 점이 최영과 운명이 엇갈리게 된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둘, 가별초


    가별초의 연원
    대몽 항쟁시기였던 1250년대 전라도 전주에서는 이안사李安社라는 이가 관기官妓를 둘러싸고 산성별감과 마찰이 일자 무리를 이끌고 강원도 쪽으로 도망을 갔다. 이안사는 무인정권 초기 집권했던 이의방李義方(1121년~1175년)의 방계 후손으로 이들이 결국 흘러간 곳은 동북면으로 여진인들이 살던 곳이다. 이안사 일행은 이곳에서 원나라에 투항하였다. 이때 그를 따라간 170여 가구는 이후 이씨 집안과 200년 가까이 생사고락을 같이하다가 훗날 조선 왕조 창업에 기반이 되는 무장세력 가별초家別抄(가별치加別赤)가 되었다.

    이들의 인적 구성은 고려인, 여진족(대표적 인물로 이성계의 의형제 이지란
    (※)
    과 청태조 누르하치의 선조 오도리 족장 몽거테무르 등이 있다), 위구르인(대표적으로 외교를 담당한 설장수), 몽골족 등이었다. 동북면 지역은 고려인뿐 아니라 여러 민족들이 같은 마을에 살면서 혼인하기도 했다. 가히 동이족 연합부대라 할 수 있었다.

    가별초의 활약
    이성계 개인은 뛰어난 전투력을 가진 무장이었다. 하지만 고려 말 보여준 뛰어난 군공軍功 뒤에는 그를 뒷받침해 주는 무력 집단이 있었다. 바로 가별초로 휘하친병麾下親兵이라고 하며 이성계의 군공 기록에 1,500명에서 2,000명 단위로 나오는 군사 집단이다. 이들은 이성계의 선조 때부터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이성계 집안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이 되었다. 평상시에는 이성계에게 역을 바치는 농민이었고, 전시에는 이성계를 위해 칼을 드는 군병이었다. 녹도 충분히 주었고 힘든 점도 보살펴 주었다. 많은 전투에 참전하여 전투 경험이 풍부하였다. 이들을 운영하는 자금은 이성계 자신의 공신 책봉 포상금, 누대에 걸쳐 관리한 토지들에서 나오는 재원들이었다. 조선 초 함경도 토지의 3분의 1을 이성계가 소유했다고 하니 가별초를 훈련시킬 재산이 충분했을 것이다.

    무인정권과 대몽항쟁, 원 간섭기를 지나며 고려의 공병 제도인 2군二軍 6위六衛는 철저하게 무너졌다. 1362년 공민왕 11년 홍건적 침입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이성계는 고려의 실체를 똑똑히 보았다. 변방 무장 출신인 이성계가 500년 가까이 유지되던 왕실을 차지할 수 있겠다고 마음먹게 된 배경도 군사 제도가 붕괴된 것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권문세족들이 군인전軍人田(군인이 군역軍役에 복무하는 대가로 국가로부터 지급받던 토지)까지 모두 차지하여 중앙군이 사실상 해체되었고, 외적의 침입 때마다 농민들을 징발해서 임시방편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다른 무장들도 사병이 있었지만 이들은 장수의 개인적 용도로 활용되었다. 전시에는 시위패侍衛牌로 군대를 형성하였지만 복무 기간이 끝나면 다음 순번 농민들과 교대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전투력과 충성도가 낮은 편이었다.

    가별초는 이성계의 여러 전장에 참전하였고, 위화도 회군 당시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동북면의 인민과 여진인으로서 본디 종군從軍하지 않던 사람까지도, 태조가 군사를 돌이켰다는 소식을 듣고는 다투어 서로 모여 밤낮으로 달려서 이르게 된 사람이 천여 명이나 되었다”고 기록에서 전한다.

    가별초의 해체
    조선이 건국된 후 사병 혁파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국가 권력과 명 이외에 다른 곳에서 군령이 나오는 사병 집단의 존재는 그 수와 상관없이 큰 위협이었다. 정도전도 요동 정벌을 추진하면서 사병을 혁파하려 했고, 태종도 정권 최우선 과제로 해산시키려 했다. 결국 태종 11년에 가서야 가별초를 혁파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공고히 하였다.

    셋, 신진 사대부


    성리학은 고려 말 개혁과 조선 개국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였으나 이를 수용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신진 사대부 사이에 견해 차이가 발생하였다. 이색, 정몽주, 길재 등의 온건파는 기득권과 수적 우위, 신분적으로 우위에 있었고 성리학 원리를 중시하여 수신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고려 왕조 내에서 점진적 개혁을 추진하였고, 이들의 학맥에서 조선 후기 지배층이 되는 사림파가 형성되었다. 반면 정도전※, 조준, 권근의 급진혁명파는 수적 열세와 신분적으로 모계 혈통에 약점이 있어서 신흥 무인 세력과 연결이 되어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다. 이들은 고려 왕조 자체를 변혁하고자 하였고, 국가사회주의 성격이 강한 주례周禮 사상을 중시하여 사대부보다는 국가와 농민의 이해를 반영하는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런 조선 개국의 주도 세력들에 대해서 이익주 서울 시립대 교수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15세기 세계 다른 지역의 역사와 비교해 볼 때, 지배층이 위민爲民이라는 분명한 목표와 그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점, 또 그걸 실천할 수 있는 여러 제도적인 장치를 잘 만들었다는 점에서, 당시에 조선 말고는 그런 것들을 성취한 나라가 없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군사적으로 강력한 나라는 아니었지만 정말 백성들이 살기 좋은 나라, 15세기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였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저널 그날 1』, 73쪽


    (정리 / 이해영 객원기자)

    ※최무선(崔茂宣, 1325년~1395년)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에서 광흥창사廣興倉使 최동순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기술에 밝고 병법에 관심이 많았다. 또한 그는 어려서부터 화약 무기에 관심을 가져 각 분야의 책을 널리 상고하였고, 중국어에도 뛰어났다. 당시 한창 기승을 부리던 왜구의 노략질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화약과 총포만 한 것이 없다며 화약 제조에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화약 제조에서 유황, 숯과 함께 꼭 필요한 염초焰硝(질산칼륨KNO3)는 화약의 본고장인 중국에서 수입해 와야 했다. 하지만 당시 원나라는 화약 제조법을 비밀에 부쳤기 때문에 고려에는 아는 이가 없었다. 천신만고 끝에 원의 강남 지방에서 온 염초장 이원李元을 통해 화약 제조에 관한 몇 가지 비법을 전해 들었고, 화약을 만들었다. 몇 년에 걸쳐 끈질기게 건의한 끝에야 우왕 3년(1377년) 10월 화통도감火筒都監이 설치되어 화포, 화통 등의 총포류와 화전火箭 등의 화기를 제조하고, 화기를 다루는 전문부대로 보이는 화통방사군火筒放射軍을 편성하였다. 1380년 진포에 출현한 왜적 선단 5백 척이 침입하였을 때, 부원수로 참전, 처음으로 화통, 화포 등으로 왜 선단을 모두 불살라버렸다. 이후 왜적의 침입이 대폭 줄어들었을 정도로 화약 병기의 사용은 왜적 격퇴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성계의 4불가론

    최영과 우왕은 원명 교체기에 힘의 공백 지대로 남겨진 요동지방을 수복하여 민족의 숙원을 푼다는 목적과 혁명의 야심을 가진 이성계 세력을 대외 원정에 소모시킨다는 정략으로 요동 정벌을 단행하였다. 처음부터 요동 공격을 반대한 이성계는 이른바 4불가론을 제시한다.

    以小逆大(이소역대), 소국이 대국을 거역함은 불가하다
    夏月發兵(하월발병), 여름에 군사를 일으킴은 불가하다
    擧國遠征(거국원정) 倭乘其虛(왜승기허), 거국적으로 원정할 경우 왜구의 침입 우려가 있다
    時方署雨(시방서우) 弩弓解膠(노궁해익) 大軍疾疫(대군질역), 시기는 장마철이라 활이 녹고 대군이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있다

    이는 이성계를 지지한 신진 사대부의 주장이었을 가능성이 크며, 이성계는 선대가 원에 협력한 사실이 약점으로 작용했기에 명과의 우호적인 외교관계에 적극적일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한편 이 4대 불가론에 대한 반론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명明은 신생국이고 주변국 공격으로 혼란 상태라 요동에 쓸 여력이 없다. 이는 사대주의, 역모의 합리화일 뿐이다.

    둘째 이미 농번기 때 군량을 확보했으므로 초기의 우호적인 날씨와 상황을 십분 활용해 요동을 급습해야 한다.

    셋째 왜구의 후방 침입은 최영이 대비하고 있다.

    넷째 장수가 실제 발생할지 모르는 전염병을 이유로 철군을 주장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고려의 명장, 대장군 최영(崔瑩, 1316년~1388년)

    최영의 본관은 철원 최씨로 시조 최준옹崔俊邕은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를 개국한 삼한공신이다. 그 후로도 대대로 벼슬을 했던 명문거족이다. 고려가 위기에 빠졌을 때 이성계는 고려를 집어삼킬 생각을 한 반면, 최영은 목숨이라도 바쳐 나라를 되살릴 생각을 한 충의忠義의 상징이다.

    용모와 완력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다고 전해지는 것처럼 무공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검술에 능하였던 국제적인 무장이다. 공민왕 3년(1354)에 원나라 요청으로 정병 2천을 인솔하여 장사성의 반란군을 거의 전멸시켰다. 이성계의 무공은 나중에 조선 개국을 합리화하기 위해 부풀려진 측면이 있으나, 최영의 무공은 사실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군관으로 출사하여 우달치에 임명된 뒤 관직은 재상인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1374년에는 제주도에서 일어난 목호牧胡의 난을 진압했고, 1376년(우왕 2년)에는 논산군 연산의 개태사開泰寺로 올라오는 왜구를 홍산鴻山에서 크게 무찔러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에 봉작되었으며, 2차에 걸쳐 침입한 홍건적을 격퇴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권신 이인임 등을 멀리하였고 1388년 무진戊辰 이성계 등과 함께 이인임, 염흥방 세력을 제거하였다. 그러나 2월부터 철령 이북의 땅을 명나라가 차지하겠다는 이른바 철령위 문제를 계기로 요동 정벌을 주장,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결국 4월 요동 정벌군을 이끌었다. 이성계, 조민수를 부장으로 삼아 우왕과 함께 평양에까지 출진하였으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경기도 고봉高峰(지금의 고양)에 유배되었다가 참수당하였다. 평생 청렴결백하여 재물을 탐내지 않았던 그의 무덤에 풀이 자라지 않았다. 조선 세종 때의 명재상 맹사성이 그의 손녀사위이다.

    그에 대해서는 고려의 만고불변 충신이라는 평과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한 고집스런 권문세족이라는 평이 엇갈리지만,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은 누구보다도 크고 위대했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한편 그의 억울한 죽음을 위로하기 위해 무속에서는 최영이 수명장수, 태평의 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마지막 고려인, 정몽주鄭夢周(1337년~1392년)

    고려 말 충신으로 호는 포은圃隱,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초명은 몽란 또는 몽룡이다. 성인이 된 뒤에 몽주로 개칭하였다. 당시 대학자인 목은 이색李穡의 문하에 있던 신진 사대부 중 단연 출중한 인물로 1360년 과거에 장원급제하였다. 주자학에 대한 뛰어난 강설을 펼쳐 이색으로부터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라는 극찬을 받는다. 성격이 호방하며 매섭고, 충효로 일관하였다.

    정도전鄭道傳과는 돈독한 선후배를 떠나 뜻을 함께하는 동지로서 서로 믿고 아껴 온 사이였다. 위화도 회군과 공양왕 옹립 때까지는 이성계 일파와 행동을 같이하였지만, 개혁에 대한 인식 차이가 운명을 갈라놓았다. 정몽주는 명나라를 사대의 대상으로 높였다. 고려사 정몽주 열전에서는 “정몽주는 고려가 건국되자 그 조정에 적극 요청해서 가장 먼저 명나라에 귀부歸附(스스로 먼저 가서 복종하였다는 의미)했다”고 전한다. [수선귀부首先歸附, 고려사 정몽주 열전 권30 우왕 원년조 기사,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참조]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으로부터 직접 신임을 받는 인물이 정몽주였다. 그래서 명나라를 공격하는 요동 정벌에 반대하고 위화도 회군에는 찬성하였지만 거기까지였다. 고려라는 왕조의 국체를 바꿀 생각은 없었다. 고려라는 테두리 안에서 개혁을 하려는 정몽주와 왕조 자체를 바꾸려는 정도전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몽주는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하여 이성계 일파의 핵심 인물인 조준, 남은, 정도전 등을 제거할 기회를 엿보다, 황주에서 이성계가 낙마하는 사고를 기회로 이들을 탄핵하여 유배시켜 버렸다. 시간은 정몽주의 편이었다. 하지만 이방원이란 존재를 간과하였다. 정몽주는 이성계와 친밀한 관계였고, 황산대첩 때는 조전원수助戰元帥(고려 후기 전시에 주장主將을 돕던 장수)로 왜구 토벌에 함께하기도 하였다. 이성계 스스로 정몽주를 친구라고 부르곤 했기 때문에 이성계가 나서서 정몽주를 제거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표독스럽다는 평을 듣는 냉철한 이방원은 달랐다. 목적을 위해서는 어떤 악역도 마다하지 않을 그는 수하 조영규를 시켜 선죽교善竹橋에서 정몽주를 격살하였다. 고려의 충신 정몽주가 피살된 뒤, 조선 창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조선은 그의 충절을 숭앙하였다. 이방원은 그를 익양부원군으로 추중하고 시호를 내렸으며, 중종 때는 문묘文廟에 배향됐다.

    ※이성계의 의형제, 이지란(1331년~1402년)

    퉁두란佟豆蘭, 이두란李豆蘭, 첩목아帖木兒라고도 한다. 조선 개국 공신으로 본래 성은 동佟이다. 여진인으로 용모가 단정하고 아름다운 것이 마치 여인과 같았다고 한다. 이성계의 가별초 집단에서 여진족 부대가 있음을 보여 준다. 여진의 천호千戶 아라부카阿羅不花의 아들로 가업을 이어 천호가 되었고, 원나라 말기 세력을 끌고 1371년 고려에 투항하였다. 북청北靑(현 함경남도 동부에 있는 북청군)에 있다가 이성계 휘하에 들어가 이씨 성을 받고 이름을 지란之蘭으로 하였다. 이성계를 따라 여러 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독립군가 중 용진가 1절에 그 이름이 나온다. 청해 이씨의 시조이다.


    ※최초의 조선인, 정도전鄭道傳(1342년~1398년)

    본관은 봉화奉化이고 호는 삼봉三峯,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선향과 본가가 있는 경상북도 영주榮州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형부상서를 지낸 정운경이고, 어머니는 영주 출신 산원散員(고려시대 중앙군 정8품 무관직) 우연禹淵(혹은 禹延)의 딸이다.

    24세에 과거 급제 후 성균관 등에 있으면서 성리학을 강론하였다. 1375년 권신 이인임 등의 권문세족에 대항하여 명나라와의 외교론을 주장하다 전라도 나주 회진현 거평부곡(현 전남 나주시 다시면 운봉리 백동마을)으로 유배당했다. 이곳에서 권세나 땅을 가진 자들의 횡포가 얼마나 심하고 그로 인한 백성들의 삶은 또 얼마나 고달픈지를 알게 되었다.

    한때 전도유망한 엘리트였지만 권세가들에게 찍혀 8년간 정치 낭인으로 살던 정도전은 1383년 이성계를 만나 정사를 논하고 의기투합한다. 이후 위화도 회군 이후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추대했다가 1392년 조선 건국을 주도하였다. 역사상 유례없이 사상가로서 최고 권력도 함께 잡았던 그는 성리학적 이념에 바탕을 둔 왕도정치 실현을 위해 매진하였다. 조선의 법 제도와 직제 등의 모든 체제를 정비하였다.

    이후 요동을 정벌할 계획을 세워 명나라와 외교 마찰을 일으켰고, 공신과 왕자들이 사적으로 보유한 사병을 혁파하려다가 갈등을 빚는다. 그 뒤 신덕왕후 강씨 소생 방석을 세자로 추대하였지만, 정안군 이방원과 대립하던 중 1398년 8월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이방원의 군사들에게 피살당했다. 이후 그는 조선 역사에서 철저히 배격당한다. 태종은 그를 역적으로 만든 뒤 정몽주를 추앙하였다. 이후 모사가나 간신의 이미지가 강한 역적으로 매도되었으나 고종 때 복권되었고 최근에 재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안향, 백이정, 이제현의 학통을 계승한 목은 이색의 문하생이자 정몽주, 권근의 동문으로 나중에 정몽주, 길재의 제자들로 형성된 조선 사림파들에 의해 폄하당하게 된다. 성정이 과격하고 온후함이 없어, 빼어난 재주에 비해 덕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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