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홈 | 기사목록 | 되돌아가기

    [이 책만은 꼭]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普天敎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

    김철수 지음│상생출판│24,000원

    목차

    프롤로그
    Ⅰ. 일제 강점기 종교정책과 보천교
    Ⅱ. 보천교와 민족 독립운동
    Ⅲ. 식민권력의 형성과 보천교
    Ⅳ. 식민권력의 종교정책과 국가신도
    보천교 연도별 주요 사건
    참고문헌
    찾아보기
    【보천교 관련 주요 자료】

    후천 오만년 종통맥과 추수할 사람

    이에 말씀하시기를 “나도 경진생이라. 속담에 동갑 장사 이(利) 남는다 하나니 우리 두 사람이 동갑 장사 하자.” 하시고 다시 생일을 물으시니 경석이 “유월 초하루입니다.” 하고 대답하거늘 말씀하시기를 “내 생일은 삼월 스무엿새라. 나는 낙종(落種) 물을 맡으리니 그대는 이종(移種) 물을 맡으라. 추수(秋收)할 사람은 다시 있느니라.” 하시니라. (『도전』 11편 19장)



    신해(1911)년 9월 고판례 수부님께서는 인존 천주이신 증산 상제님의 성령에 감화되시어 대도통을 하신다. 그리고 앞으로 전개될 도운道運(상제님의 도가 전개되어 나가는 섭리)의 역사에 대해 낙종落種(파종播種), 이종移種, 추수秋收의 3단계 과정을 밟는다고 선언하셨다. 수부님께서 도문 개창의 씨를 뿌리시고(낙종), 차경석 성도가 세상 무대에 널리 크게 옮겨 심고(이종), 상제님과 수부님의 종통을 계승하신 제3의 인물이 나와 구원의 가을개벽기 인류 구원사업을 마무리 지으신다(추수). 상제님의 도의 낙종과 이종의 역사는 제 1변 도운에서 이루어진다.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를 통해 이종의 역사인 차경석과 보천교에 대해 알아보자.

    일제 식민 권력의 종교 정책


    신도神道 국교화 체계
    메이지 정부는 천황 중심의 국가주의와 더불어 ‘신도 국교화’ 체계를 구축하여 국민들을 통제하고 동원하였다. 1871년 5월 14일, ‘신사神社의 의儀는 국가의 종사宗祀로 일인일가一人一家의 사유私有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태정관太政官 포고 제 234호를 공포한다. ‘신사는 국가의 종사’라는 공적 성격이 정식으로 규정되어 신사를 종교에서 분리시켰고, 신사를 국가의 공공시설임을 강조하였다. 신사 제사는 부모를 섬기는 효의 연장이기 때문에 신사는 종교가 아니라 의례와 습관에 지나지 않는다는 논리였다. ‘신사 비종교화’로 대변되는 ‘국가신도’는 종교를 넘어선 종교, 곧 초종교로서의 지위를 갖게 되었고 메이지 정부는 이러한 국가신도와 더불어 모든 종교들을 정리하고 국가 목적에 따르도록 하는 종교 예속화 정책을 실현시켜 나갔다.

    1910년 한국을 강점한 식민권력은 메이지 시대에 이루어진 ‘신사 비종교화’조치에 따라 식민지에서도 국가신도를 통해 민중들을 조직화하려는 계획을 진행시켰다. 일본의 식민지 종교 정책은 ‘한국의 일본화’라는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되었고, 제도적 장치를 통한 통제와 일본의 종교적 민족주의의 이식(신사참배의 강요), 한국 종교들의 일본 종교에의 통합이라는 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일제 식민 권력의 종교 통제는 메이지 정부의 신사 정책과 종교 통제를 하는 방식과 같았고, 최종적으로는 일본의 신도를 식민지 한국에 이식시켜 동화 정책을 성공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종교’와 ‘유사종교’분리 정책
    일제는 1915년 8월 <신사사원규칙>과 <포교규칙>을 공포하였다. <포교규칙> 제 1조에 “본령에서 종교라 칭함은 신도, 불도 및 기독교를 말함”이라 하여 종교의 범위를 정하였다. 제 15조에 “조선 총독은 필요가 있는 경우 종교 유사한 단체와 인정한 것에 본령을 준용함도 가함”이라 하여 ‘종교’를 신도, 불교, 기독교라 정하고 그 외의 종교는 ‘종교유사단체’, ‘유사종교’라 하였다. 이러한 ‘종교’와 ‘유사종교’ 분리는 이후 계속하여 종교 정책에 적용되어 민족종교들이 유사종교로 통제를 받게 되었다.

    식민 권력은 천도교 등 70개 가까운 종교 단체를 종교라 인정하지 않고 종교 유사단체로 보았기 때문에, 1920년대에도 경무총감부령警務總監部令 ‘집회취체集會取締에 관한 건’을 적용해서 단속을 계속하였다. 총독부의 포교규칙에 의해 종교 유사단체로 분류된 단체는 식민 권력의 관리 감독에 대해 협력하지 않는 경우 규제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식민지 상황에서도 유사종교들로 분리된 민족종교들이 꾸준히 증가하여 1919년에는 강점 당시에 비해 1.4배 증가하였다. 식민 권력이 종교 정책을 전개하면서 가장 고심한 것 중의 하나가 민족 문제였다. 그 이유는 유사종교단체들은 추종자 대부분이 과거 지배층으로부터 소외되고 억압받던 사람들이었고 그 교리도 후천개벽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그때에는 억압받는 한민족이 세계의 중심 민족이 된다는 등 한민족의 자존감과 자주 의식을 고취하면서 민족 문제와 연결되기 쉬운 단체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유사종교는 이러한 시대적 전환기에 민족에 대한 사랑과 한민족 고유의 전통을 강조함으로써 민중들의 마음을 붙잡고 절망하던 사람들의 마음에 침투하여 희망을 주기에 충분했고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주장하며 민족 운동과 연관될 수 있는 여지가 많았기 때문이다.

    1919년에 발발한 3.1운동은 식민 권력으로 하여금 1910년대 시행해 온 유사종교에 대한 종교 정책을 재검토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3.1운동 주도 세력이 종교 단체였고, 특히 천도교 및 민족종교의 참여가 뚜렷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3·1운동 직후 조선 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는 1910년대 식민 지배 정책을 유지하면서 문화통치를 내세워 조선 민중을 분열시키고 반일 독립 운동의 발생을 막으려는 통치술을 구사한다. 문화통치의 주된 내용은 조선을 영구히 일본의 식민지로 종속시키기 위해 강점 직후부터 진행해 온 동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식민통치의 지지층을 확보하고 조선의 민족종교를 식민 지배 기구 안에 끌어들여 3·1운동과 같은 민족적이고 조직적인 독립 운동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사이토 총독은 이를 위해 조선 민족 운동에 대한 대책을 제시했다. 여기에 들어있는 종교에 대한 대책은 각종 종교 단체를 중앙집권화해서 그 최고지도자에 친일파를 앉히고 일본인 고문을 붙여 ‘어용화’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천도교를 비롯한 보천교 등 민족종교 단체들은 총독부의 방침과 권고를 따른다면 편의를 제공하고 그렇지 않으면 엄중히 단속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해산까지 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0년대 크게 성장한 보천교普天敎는 식민 권력의 주요 감시 대상 중 하나였다.

    교단 공개와 친일화 유도
    식민 권력은 <포교규칙>의 적용 기준을 완화하는 유화책을 내세우면서 실체 파악이 어려웠던 유사종교단체로 하여금 스스로 단체를 공개하도록 정책 방향을 수정한다. 그것은 ‘유사종교’에서 ‘종교’로 전환된 종교 단체에 대해서만 인정하고 보호해 주겠다는 ‘어용종교단체 만들기’ 정책이었다.

    이러한 종교 정책을 가지고 질적·양적으로 성장한 보천교의 차경석 교단에 대한 탄압을 지속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교단을 공개토록 회유하는 양면성을 띤 이중 정책을 구상하였다. 물리적인 탄압만으로 통제하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느낀 식민권력은 비밀스런 교단 조직을 세상에 공개토록 하는 회유 공작을 병행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차경석은 어떠한 인물이었는가



    차경석을 만나심
    정미丁未년(1907) 5월 17일에 상제님께서 형렬의 집을 떠나시며 말씀하시기를 “이 길이 길행(吉行)이라. 한 사람을 만나려 함이니 장차 네게 알리리라.” 하시고 용암리(龍岩里) 물방앗간에 머무르시다가 그 앞 주막에서 정읍 사람 차경석(車京石)을 만나시니 당년 28세로 구척장신에 용모가 준수한 젊은이라. (『도전』 3편 180장)


    차경석은 상제님 성수 37세 되시던 정미丁未(1907)년 5월 도문으로 들어오게 된다. 차경석은 1890년 1월부터 1901년 2월까지 정읍군 입암면 안경현이란 자 밑에서 한적漢籍을 배우고, 1904년부터 1908년 3월까지 일진회一進會 평의원을 지냈다. 원래 동학 신도로서 일찍이 일진회 전북 총대總代를 지냈으며, 상제님보다는 아홉 살 적은 28세로 구척장신에 용모가 준수하였다. 부친인 차치구는 동학혁명 당시 정읍 지역의 접주接主로 5천을 이끌고 참전했으나 혁명의 패망으로 죽임을 당했다.

    1920년대 차경석을 만났던 기록에 의하면
    (1)
    , 차경석은 “몸은 뚱뚱하고 큰 상투에 대갓을 쓰고 얼굴은 구릿빛으로 까만 수염이 보기 좋게 나 있었다. 그 풍채가 과연 만인의 장 같다”고 하였고, 1923년 4월 중순경 정읍에 가서 만났던 기록
    (2)
    에는 “비록 현시대의 지식은 결여했다 하더라도 구시대의 지식은 상당한 소양이 있다. 그 외 엄격한 태도와 정중한 언론은 능히 사람을 감복케 할 만하다. 그는 한갓 신가가 아니오, 상당한 식견이 있다. 그의 여러 가지 용사하는 것을 보면 제왕 될 야심이 만만한 것을 추측하겠다”고 했다.

    차경석이 상제님 도문으로 들어오기 전 1905년 11월 17일, 일제 식민 권력은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했다. 10여 일 전에는 일진회 명의로 한국이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일진회 선언서’가 발표되면서 12월 1일 천도교天道敎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그 무렵 차경석은 동학 3대 교주 손병희의 처사에 불만을 품고 일진회 활동을 그만두었고, 1년여 지난 1907년(음력 5월) 상제님 도문에 들어오게 된다.

    차경석은 본래 변통에 능하고, 천하를 손에 넣고자 하는 큰 포부와 영웅의 심법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러한 차경석에게 상제님께서는 그를 일본 제국주의와 맞서 싸우고 상제님 도운 역사상 가장 험난한 제1변 도운의 이종 도수를 여는 인물로 쓰셨다. 경석京石이라는 도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후천 조화선경을 건설하는 도운의 주춧돌’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새 시대에 대한 큰 포부와 열망을 지닌 차경석은 상제님 공사에 따라 이종 도운의 역사를 크게 열어 나간다.

    차경석, ‘갑종 요시찰인’ 편입
    『보천교일반普天敎一般』
    (3)
    에는 ‘교주 차경석車京石은 유명幼名을 관순寬淳, 관명冠名을 경식敬植이라 칭했고 교조 강증산의 뒤를 이어 교주가 되어 교도의 신망을 얻으면서 신인으로 숭배되었고, 은밀히 교세 확장의 수단으로 국권 회복을 표방하기에 이르러 1917년 4월 24일 갑종 요시찰인으로 편입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요시찰’要視察은 특정 인물이나 단체를 대상으로 일정 기간 동안 주기적으로 감시하는 제도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요시찰인의 수가 2천 명 정도 증가하였고 총독부의 요시찰인으로 확인되는 인물들은 사상 불온자와 총독 정치에 대한 불만자들로 정치, 사상, 민족 운동의 구분이 쉽지 않아 이를 모두 통합하여 명부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약 1천 명의 요시찰인이 있었다는 내용으로 미루어 그들 대부분은 조선을 지배하는 식민 권력, 곧 조선 총독부의 식민 통치의 안정화와 영속화에 대해 심각한 위협이 있다고 판단될 경우 치안 대책의 일환으로 여겨 시찰대상이 되었다.


    보천교의 포교활동과 조직


    보천교의 60방주方主제
    식민 권력은 공인 종교였던 불교나 기독교보다 민족 의식을 고취시켜 민중을 선동할 가능성이 높은 민족종교를 더 강력하게 통제하였다. 때문에 보천교는 교단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조선의 국권 회복과 관련된 혐의로 여러 차례 수난을 겪게 되었다. 1914년 5월 차경석은 ‘새 정부를 도모하고 있으며, 조선을 독립시켜 황제에 등극한다.’는 고변告變으로 헌병대에 체포되어 구금 심문을 받았다. 1915년 김송환이 전주헌병대에 ‘차경석이 불구에 조선을 독립시켜 자신이 황제에 등극한다고 농촌 우민을 유인하여 금전을 사취한다’고 고발하였다. 이후 차경석에 대한 사찰과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이런 가운데 차경석은 1916년 11월 내부 조직을 견고히 하기 위해 24방위의 임직을 두어 조직 체계를 정비하게 된다. 우선 교중敎中 강령자綱領者 12인을 택해 수, 화, 금, 목, 동, 서, 남, 북, 춘, 하, 추, 동에 배치하고 24방위의 방주方主를 임명하고 조직을 드러내지 않는 비밀포교의 방식을 택했다. 이러한 활동은 식민 권력의 주의를 더욱 끌어 1917년 4월 24일에는 ‘갑종 요시찰인’으로 편입되기에 이른다.

    이해 가을 차경석은 강원도와 경상도의 산간 지대에 숨어 지내면서 비밀포교를 계속하였고, 조선의 독립을 약속하고 앞으로 정전법井田法이 시행되어 모든 사람들에게 토지가 골고루 분배될 것임을 말하며 수많은 신도들을 모으게 되었고 이에 식민 권력은 차경석 체포령까지 내리게 된다. 1918년 무오戊午년 말 조선에 스페인 독감이 유행하여 7백만 명이 감염되어, 14만 명이 비참하게 죽어 갔다. 이때 태을주가 ‘만병 통치약’으로서 민중들 사이에 급속히 퍼져 나갔다. 1919년 기미己未년 9월 차경석 성도는 24방주方主 제도를 확대해 60방주제를 조직하고 경남 함양 황석산에서 고천제告天祭를 봉행한다. 그로부터 불과 5~6개월 사이 1920년 경신庚申년 간부 숫자만 55만 명에 이르는 교세로 확장시켜 나갔다.

    보천교의 내부 조직을 살펴보면 특히 방주제가 특징적이다. 1919년 차경석은 교도를 통할하는 포교 수단으로 60방위제를 창설하여 1920년 말에 이르러 조직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경성에 진정원眞正院을 두는 것을 시작으로 대구, 진주, 평양, 제주도, 전주 등 각지에 진정원을 설치하였다. 교주 바로 밑에 방주 60명을 두고, 방주 각 1인 밑에 6임任을 맡는 6인을 두고, 다시 육임 각 1인 밑에 12임을 맡는 12인을 두며, 12임 각 1인 밑에 8임을 맡은 8인을 두는 조직으로 하고, 또 8임에는 40인의 신도를 모집하는 자로 충당하고 또 40인의 신도 중 다시 15임에 해당하는 15인을 두어 교세 확장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교무기관으로 정읍의 본소와 사정방위를 두고 주요 도시에 진정원眞正院과 참정원參正院, 각 군에 정교부正敎部를 두었고 의결기관인 교의회敎議會를 두고 그 밑에 방주方主·정리正理·정령正領·선화사宣化師로 구성된 강선회綱宣會와 평사원評事員 136명으로 이루어진 보평회普評會를 두었다. 본소에는 총정원總正院과 총령원總領院을 두었고, 총령원 밑에 진정원과 참정원, 진정원 밑에 정교부를 두고 있었다.

    이러한 조직 구성은 남자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여자도 동일하였다. 소위 여女방주 제도였다. 1923년 12월 23일 동지 치성제에서 교주 부인(朴씨)은 주요 간부와 협의한 결과, 동서남북에 여방주 주요 간부를 두고, 그 밑에 각 6명의 방주를 두었으며, 그 외에 일반 남자 방주제에 준해(6임, 12임, 8임 등) 60방주제를 만들어 나갔다. 이렇듯 방주제라는 비밀 교단으로 운영하여 포교에 노력한 결과 신도 600만의 도세를 일으키게 된다.

    1921년 신유년 정월 전국 각 도에 ‘정리’와 ‘부정리’를 각 1명씩 두고, 360군에 ‘포장布長’과 ‘부포장副布長’을 각 1명씩 배속하였다. 9월 차경석은 경남 함양군 황석산에서 고천제를 올리고 교명을 ‘보화교普化敎’라 하고 국호를 ‘시국時國’이라 선포하였다.

    1919년 종교계의 주도적 활동으로 3·1운동이 발생하자, 식민 권력은 차경석의 비밀 결사에 강력한 탄압과 회유의 이중 정책을 구사한다. 이 무렵 핵심 간부 이상호가 일제 경찰에 검거되었다가 교단 공개를 권고 받고 석방되게 된다. 이에 이상호는 1922년 임술壬戌년 천자를 상징하는 ‘보화’라는 이름 대신 ‘보천교普天敎’라는 이름으로 조선총독부에 교단을 등록하게 된다. 이상호는 관의 의심을 받을까 두려워 고천제에 이름한 보화교의 보와 천주교, 천도교의 천을 따서 보천교로 한 것이다. 이렇게 세상에 보천교가 알려지게 되었지만, 교단 공개를 통해 일제 식민 권력의 감시와 통제 속에 더욱 탄압을 받게 된다.

    보천교의 교의
    보천교가 포교에 사용하는 교의는 다양하였다.

    「우주의 신명을 부르고 강산의 정령을 모아 후천의 이치를 정함을 목적으로 하고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신화, 일심, 상생, 거병해원, 후천의 선교 등의 교의를 일관되게 신앙하는데 있다」고 하여 보천교의 교의를 제시하였다.

    ①신화神化
    신화라 함은 신의 천위에 도달하는 것, 즉 해탈의 경계를 말하는 보천교 궁극의 목적이다. 본교는 교조 증산 천사를 일심으로 믿고 의지하면 보편타당성을 얻고 영육일치의 실재적인 신이 된다. 일심의 신앙 생활을 통해 개개인들은 교조를 더 닮을 수 있고 교조와 같은 모습을 회복할 수 있음을 말한다.

    ②일심一心
    의식통일상에서 진의眞儀를 발견하는 것을 말한다. 일심을 기초로서 ‘개안開眼’의 원리를 세우는 것이며 이로서 무념무상의 명경지수와 같은 대광명의 진공을 얻을 수 있다.

    ③상생相生
    보천교의 도덕으로 상호 부조의 뜻이다. 일찍이 ‘오행상극五行相克’ 또는 ‘생존경쟁’의 원리에 의해 인류 사회는 약육강식과 우승열패 상태에 빠져들어 교조는 ‘천하무상극지리天下無相克之理’를 주장하여 상생설을 말하였다. 상생은 도덕의 본체로 인애, 자비, 겸양 등의 덕목이 모두 상생의 의의에서 분파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④거병해원祛病解怨
    사회 일체의 죄악은 모두 병이고, 불평은 모두 원이다. 이 병을 제거하고 원을 푸는 것이 보천교의 사명이다.

    ⑤후천선경後天仙境
    보천교의 최고의 이상이다. 지금 숨 쉬고 있는 대지는 곧 미래의 선경으로, 세상의 모든 병과 원이 사라지고 사람들은 신화된 상태를 말한다. ‘증산의 탄강 이전을 선천이라 칭하고 이후를 후천이라 칭한다. 선천, 후천은 이러한 의미로 해석된다’고 하였다. 현재를 선천으로 볼 것인가, 후천으로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양하다.

    보천교의 민족주의적 성격
    보천교의 민족주의적 성격은 교단 조직 형성을 마친 1919년 3·1운동 이후의 활동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3·1 독립운동을 겪으면서 일제 식민 권력이 보천교와 관련해서 가장 주목한 것은 ‘보천교 간부와 재외 불령단不逞團과의 관계’였다.

    보천교는 직접적으로 국권 회복 활동에 참여하기보다 국내를 바탕으로 군자금을 지원하는 등 비밀리에 상해 임시정부와 해외 독립 운동 단체를 지원했다. 3.1운동 이후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만주 지역에는 여러 독립 운동 단체가 활동하면서 자금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로 요원을 파견하거나 국내와 국외를 연결하는 군자금 연결 루트를 만들려 노력했다.

    보천교는 독립 운동에 60방주제를 통해 치성금과 성미를 모아 비밀리에 상해 임시정부와 해외 독립 운동 단체에 조달했다. 특히 북만주 지역에 김좌진 등을 중심으로 세워진 신민부에 군자금을 제공하여 별동대를 구성하여 일제에 저항케 했는가 하면 남만주를 중심으로 세워진 정의부에도 군자금을 보냈다. 일제가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보천교는 192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북로군정서 총사령관이던 김좌진 장군에게 군자금 2만여 원을 지원했다는 내용이 있다.

    한편 문화운동으로는 민족대학 설립과 조선물산장려회가 추진한 토산품 애용, 물자 절약 운동인 물산장려운동을 지원하였다. 1923년 조선물산장려회의 이사 30명 중 임경호, 주익 등 4인이 보천교 간부였으며 주익은 3.1운동과 상해 임정에도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다. 1923년 2월 상해에서 열린 한민족 국민대표회의에 100명의 대표자 중 보천교 대표로 보천교 진정원 배홍길과 김종철, 보천교 청년당 강일 3인이 공식적으로 참가했다. 강일은 1923년 7월 김원봉의 의열단에 입단하여 김원봉의 지시로 상해의 전문학교 재학증명서를 얻어 부산으로 들어와 단원을 모집하여 상해로 보내거나 국내에 지부를 두어 군자금 모집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보천교의 군자금 지원이나 독립 운동의 지원을 알게 된 일본 식민 권력은 이후 감찰과 탄압을 더욱 강화하였고 언론을 통해 보천교를 사교로 매도해 집회와 헌금을 금지시키게 된다.

    보천교의 몰락


    보천교의 혁신운동
    보천교는 일제 식민 권력의 탄압과 회유를 통해 1922년 2월 서울에 교단 조직의 서울 사무소인 보천교 진정원을 세웠다. 이때를 전후하여 종지宗旨와 교리敎理 등도 만들어졌다. 이 무렵 정읍 본소에서는 새로운 성전이 건축되기 시작하여 5월 낙성식을 하였다. 그해 출판사를 만들어 <보광普光>이라는 잡지를 발행했고 11월 경 부인방위婦人方位가 조직되었다.

    1924년 갑자년 최남선이 발행한 〈동명東明〉이 <시대일보時大日報>로 바뀌면서 창간 2개월 만에 경영난에 부딪히자 보천교에서 <시대일보>를 인수했다. 하지만 일제 식민 권력은 민중의 대변지를 사교 단체에 넘길 수 없다는 여론을 조성하여 인수 과정에서 사회 언론의 비판을 받게 된다. <시대일보> 인수 사업을 추진하던 이상호, 이성영 형제는 독단적인 월권 행위로 보천교에서 출교黜敎되는데, 이후 ‘보천교 혁신운동’을 주도하며 차경석에게 반기를 들고 내분을 일으킨다. 이 무렵 보천교 내에는 보수와 혁신이라는 양자 구도가 형성되었다. 서울의 포교 책임자 이상호와 이성영은 임규, 고용환, 주익, 이종익 등 민족주의 우파로 분류되는 당시 이른바 계몽주의 신진 지식인 다수를 영입한다. 이들은 교단 조직의 공개와 함께 잡지 발간, 대학 설립, 각종 사회운동 참여와 언론사 인수 등 현실 사회 문제에도 개입하는 등 근대적 종교 운동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정읍 본소의 차경석과 핵심 간부들의 생각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기존의 교 질서를 유지하며 성전을 건축하는 등 기존의 비밀결사적인 조직 운동을 하고자 하였다. 이 때문에 보천교 내에서는 보수와 혁신이라는 갈등 구도가 더 심화되어 나간다. 이렇게 교단 내 내분이 격화되면서 조직의 결속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를 기다렸다는 듯, 당시 언론들도 공개된 보천교를 공인 종교로 인정하기보다는 비인륜적인 미신이나 사이비 종교로 거칠게 매도하면서 보천교 박멸에 합세하였다.

    1924년 시국대동단時局大同團(1924~1925)의 결성은 보천교를 반민족적인 집단으로 매도케 하여 민심이 등을 돌리도록 함으로써 보천교의 분열을 가속화시킨 사건이었다. 차경석은 ‘보천교 혁신운동’과 일제의 탄압으로 사면초가에 몰리게 된다. 차경석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핵심 간부인 문정삼과 임경호를 일본 동경으로 파견하여 보천교의 취지를 알리도록 조치하였다. 두 사람으로 하여금 보천교의 취지를 전하고 일본 정부의 이해를 촉구하게 한 것이었는데 그들이 돌아온 이후, 시모오카 총감으로부터 ‘시국광구단時局匡救團이라는 특별 기관을 만들어 일본인과 대동단화할 수 있는 실질적인 성의를 보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를 듣고 차경석은 동양 도덕상으로 보면 광구단보다는 ‘현재 대세가 대동大同이 아니면 평화할 수 없고 더구나 서양 세력이 정차 동양을 침범하니 이때를 당하여 동양 황인종은 상호 대동단결하여 세력을 공고히 하지 않으면 백인종의 화를 면키 어렵다’고 하며 시국대동단이라 개칭하여 그 취지를 알리기 위해 전국적인 강연회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시국대동단의 강연은 보천교의 취지와 달리, 친일 사상을 고취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연사들이 모두 친일 단체로 구성된 십일연맹의 인사들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당시 청년 지식인층은 보천교를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일부 청년들은 강연하는 곳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심지어 교당을 파괴하고 신도들을 구타하였다. 이어 각 언론과 사회 단체에서 보천교 박멸운동을 시작하였다. 이로써 보천교는 일제의 보호는커녕 보천교를 해체하려는 일제 식민 권력의 계략에 따라 지식인들과 민중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명예만 훼손하게 된다. 시국대동단의 활동이나 조선총독 등의 교본소敎本所(보천교 본소) 방문과 면담은 보천교의 교세를 활성화시켜 주기보다는 결과적으로 보천교에 대한 민심 이반으로 나타나게 된다. 궁여지책으로 활로를 찾고자 했던 보천교는 이후 식민 권력이 의도한 대로 급격히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1925년 을축년 십일전十一殿이 5년간의 공사 끝에 완공되었고, 1929년 기사년 3월 16일 낙성落成에 맞춰 천자 등극식을 거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본 황실에 대한 불경 행위라며 행사 자체를 금지시켰고, 보천교 관련 건물을 폐쇄하고 전국 교인들을 검거하여 고문하고 집회를 금지시켰다. 결국 일제의 집요한 음해 공작과 탄압으로 차경석은 조선 민중에 신망을 잃고 쇠락의 세월을 보내다 1936년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차경석의 사후 불과 3개월도 채 안 된 그해 6월에 ‘유사종교 취체강화책’이 발동되었고, 정읍경찰서에서 무장 경관을 대동해 대흥리 보천교 본소를 접수하고 보천교 해체 명령을 내렸으며, 재산의 전권을 빼앗아 십일전을 비롯한 건축물을 강제로 처분하였다. 뜯겨져 나간 건물은 서울 조계사 대웅전과 내장사 대웅전, 전주 역사 등을 짓는 데 쓰였다.

    이후 일제 식민 권력의 탄압으로 보천교는 해체되었고, 비밀 결사를 조직해 신앙 활동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신앙이 탄로 나거나 신도들이 검거되어 고문과 취조를 받으며 보천교는 민중의 기억 속에서 점차 잊혀져 가게 된다.

    차경석의 역할과 사명
    보천교는 일제 강점기에 신도 600만이라는 대부흥을 일으켰다가 일제 식민 권력의 집요한 공작으로 인해 급속히 쇠퇴한다. 수부님께서 선화하시고 6개월이 지난 1936년 병자년 윤 3월 10일, 당대의 천자를 자처하던 차경석 성도의 파란만장한 삶이 마침내 끝났다.

    상제님께서는 차경석에게 ‘천맥도수阡陌度數’를 붙이시고 “여기가 못자리니 이것이 천하파종天下播種 공사니라”(도전 6편 48장)라고 하셨다. 천맥은 논밭 사이에 사방으로 난 길을 뜻하며 대규모 조직을 통해 전후좌우 막힘없이 길을 내고 서로 연결시켜 주어 규모 있는 조직을 만들 수 있게 보신 공사이다. 상제님께서 차경석으로 하여금 대규모 조직을 이용해 이종 도수를 성사시킬 수 있도록 천맥 도수 공사를 보신 것이다.

    반면 일찍이 상제님께서는 차경석에 대해 경계하며 말씀하시기를 “숙살지기肅殺之氣가 온몸에서 뚝뚝 떨어지니 백성들이 많이 상하겠구나. 내 도가 험난하겠구나.”(도전 6편 91장)라고 경고하신 바 있다. 상제님의 말씀대로 차경석은 자신의 꿈인 천자를 도모하느라 신도들에게 희생과 고통을 안겨 주었고 결국에는 일제의 탄압과 계략에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하지만 차경석은 나라의 주권까지 빼앗긴 일제 치하의 상황에서 상제님의 이종 도수 사명에 따라 수부님께서 뿌리신 진리의 씨앗을 옮겨 심어 1변 도운 이종의 역사를 크게 부흥시켰다. ‘달의 골짜기’를 뜻하는 ‘월곡月谷’이라는 호에 담긴 의미처럼 종통 맥이 이어지도록 도맥의 연결 고리 역할을 한 것이다. 차경석은 상제님이 붙여 주신 ‘경석京石’이란 이름 그대로 후천 5만 년 새 세상의 주춧돌이 되는 인물이다. 600만이라는 대부흥의 역사를 쓴 보천교가 비록 일제 식민 권력의 계략에 의해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고 민중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갔지만, 상제님 도운이 열릴 수 있는 역사적, 문화적 토대를 닦았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 의미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정리 객원기자 한주희)




    1)
    선도회禪道會 초대 지도법사 이희익李喜益(1905~1990)이 만난 소회(박영재,『이른 아침 잠깐 앉은 힘으로 온 하루를 보내네』운주사, 2001,215~217 쪽

    2)
    비봉선인, 「정읍의 차천자를 방문하고」『개벽』10~38, 1923, 37~41쪽

    3)
    보천교일반(1926.6)은 당시 전라북도에서 비밀리에 조사 정리하여 식민지 종교 정책, 특히 보천교의 탄압에 이용된 정책 자료이다.


    월간개벽. All rights reserved.

    2017년 10월 홈 | 기사목록 | 되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