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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한국의 성씨 | 박씨朴氏

    우리나라에서는 김·이·박이라 하여 김씨, 이씨 다음으로 많은 성씨가 박씨다. 박씨들은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를 시조로 삼고 있다. 박씨는 2015년 우리나라 통계청 조사에서 4,192,074명으로 조사됐다. 우리 국민의 8.4%가 박씨인 셈이다. 박씨들은 본관이 달라도 서로 통혼하지 않는 풍습이 있다.


    박씨의 기원


    우리나라의 모든 박씨들은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유일 시조로 받들고 있다. 박혁거세에 관한 신화 또는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 『제왕운기帝王韻紀』에 실려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진한辰韓 땅에는 여섯 마을이 있었다. 기원전 69년 3월 초하룻날 여섯 마을의 족장들이 자식들을 데리고 알천 언덕에 모여 회의를 하였다. “우리에겐 백성을 다스릴 임금이 없소. 그래서 백성들은 제멋대로 행동하여 질서가 잡히지 않고 있소. 이제 우리에게도 임금님이 있어야겠소.” 이렇게 한창 논의를 하고 있을 때였다. 회의 장소인 알천 언덕에서 남쪽으로 그다지 멀지 않은 양산 기슭에 이상한 기운이 보였다. “앗! 저기 양산촌 나정 우물가에 신비한 오색 광채가 뻗치고 있소.” “흰말 한 마리가 거기에 대고 절을 하고 있어요.” 그들은 오색 광채가 뻗치고 있는 곳으로 몰려갔다. 흰말이 절하고 있는 곳으로 다가가 보니 자줏빛 알 하나가 놓여 있었다. 말은 몰려온 사람들을 보더니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사람들이 그 알을 깨어 보니 생김새가 단정하고 아름다운 사내아이가 나왔다. 사람들은 아기를 동천 냇물에 목욕시키고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고 지었다. 여섯 마을 사람들은 하늘이 임금님을 내려 주었다고 생각을 했다. 같은 날 사량리에 있는 알영 우물가에 한 마리 계룡鷄龍이 나타나 왼쪽 갈비에서 여자아이를 낳았다. 그 아기의 얼굴은 무척 아름다웠지만 입술이 마치 닭의 부리와 같이 생겨서 사람들이 곧 아기를 월성 북쪽에 있는 냇물로 데려가 목욕을 시켰더니 그 부리가 떨어졌다. 부리가 빠진 시냇물이라 해서 시내의 이름을 발천이라고 했다. 여섯 마을의 족장들은 남산 서쪽 기슭에 궁궐을 짓고 성스러운 두 아기를 받들어 길렀다. 사내아이가 태어난 알의 모양이 박과 같았기 때문에 성을 박씨라고 지었고, 여자아이는 그가 나온 우물 이름을 따서 알영이라 지었다. 13세가 되던 해 여섯 마을 족장들은 박혁거세를 왕으로 받들고 알영을 왕비로 삼아 나라를 세우니 기원전 57년 신라가 건국되었다. 혁거세 왕은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째 되던 어느 날 하늘로 올라간 뒤 7일 만에 죽은 몸이 땅으로 떨어졌다. 그 후 왕비도 왕을 따라 곧 세상을 떠났다. 이에 백성들은 땅에 흩어진 왕의 몸을 한자리에 모아 장사를 지내려 하였다. 그런데 큰 뱀이 나타나 쫓아다니며 왕의 몸을 한자리에 모으지 못하게 방해했다. 그래서 백성들은 혁거세 왕의 머리와 팔다리를 따로따로 묻어 다섯 개의 무덤을 만들고 그것을 사릉蛇陵(五陵)이라고 했다. 혁거세 왕의 뒤를 이어 태자 남해가 왕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이상이 박혁거세와 그의 부인 알영에 관한 신화의 내용이다. 여기서 박혁거세의 이름을 혁거세, 또는 불구내弗矩內(‘붉은 해’의 이두식 표현)로 표현하고 있다. 혁거세는 광명光明, 명철明哲, 현명賢明의 뜻인 ‘’과 세상의 뜻인 ‘누리’ 곧 ‘밝은 세상’을 뜻하는 존호다. 그리고 박씨가 된 이유로 박과 같은 알에서 나왔다거나 ‘밝다’는 의미에서 박씨라고 했다고 한다. 

    박혁거세는 이주민인가 토착민인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박혁거세의 탄생 배경과 관련된 기록이 있다. 김부식은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겪은 일을 『삼국사기』 「신라본기」 맨 마지막에 적고 있는데, ‘송나라 사람 왕보王黼가 한 사당에 걸린 선녀의 초상(女仙像)을 보여주는데, 이는 고려의 신(貴國之神)이라 하며, 옛날 어느 제왕가의 딸이 남편 없이 임신해 사람의 의심을 받게 되자, 곧 바다를 건너 진한에 도착해 아들을 낳았는데, 곧 해동의 첫 임금이다…(하략)’라는 설명을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선도산仙桃山 신모神母는 본디 중국 황실의 딸로 이름은 사소娑蘇였다. 어려서 신선의 술법을 익혀 동쪽 나라에 와서 살더니, 오래도록 돌아가지 않았다…(중략)…신모가 처음 진한辰韓에 왔을 때, 성스러운 아들을 낳아 동국東國의 첫 임금이 되게 하였으니, 혁거세와 알영 두 성인이 그렇게 나왔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혁거세는 중국 황실의 딸 사소의 아들이 되는 셈이다. 두 기록을 비교해 보면 김부식은 박혁거세의 모친을 ‘고려의 신’이라고 했고 일연은 ‘중국 황실의 딸’이라고 달리 표현했다. 박혁거세의 혈통과 신도산 신모의 정체에 대해 우리는 『환단고기』에서 그 실마리를 풀게 된다.

    오래된 역사는 신화의 형식으로 변형되면서 그 진실을 숨긴다. 하지만 신화 속에 감춰진 상징과 은유를 통해 우리는 진실의 일단을 만날 수 있다. 박혁거세의 신화 내용만으로 본다면, 남방계 농경민의 난생설화와 북방계 유목민의 천강설화가 결합되어 있다. 오색 구름과 말은 천강설화를 상징하는 것이고, 알은 난생설화를 뒷받침하고 있다. 따라서 박혁거세 신화는 한반도에 먼저 진출한 남방계 토착 농경민 사회에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장한 북방 이주민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이는 『삼국사기』에서 신라 6부족의 기원을 ‘고조선의 유민(先是朝鮮遺民)’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따라서 박씨는 우리나라 고유의 성씨이면서 그 시조인 박혁거세는 북쪽에서 한반도로 건너온 이주민 출신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한국의 박씨 현황


    박씨는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많은 인구를 갖고 있는 성씨이다. 그중 흔히 밀양을 본관으로 하는 밀성대군파密城大君派의 밀양박씨密陽朴氏가 전체 박씨 인구의 70∼80%를 차지하고 있다. 그 외에 반남潘南, 죽산竹山, 함양咸陽, 순천順天, 고령高靈, 무안務安, 충주忠州 박씨가 주류를 차지해 이를 ‘8박’이라고 부른다. 박씨의 본관은 「조선씨족통보」, 「증보문헌비고」, 「박씨선원대보」 등에 300본 이상이 기록되고 있으나 그중 시조가 분명하게 밝혀지고 후손이 현존하는 본관은 70여 본이다.

    신라는 박朴·석昔·김金에 의해 왕위가 교체되었는데, 그중 박씨 왕은 시조인 박혁거세를 비롯해 모두 10명이다. 박씨는 신라 초기에 7명이 왕위에 올랐으며, 신라 말기 신덕왕과 경명왕, 경애왕 등 3명이 왕위에 올랐다. 박씨는 혁거세의 증손인 파사왕婆娑王과 일성왕逸聖王 대代에서 갈라졌다. 파사왕계는 뒤에 영해寧海·면천沔川·강릉江陵 등으로 분적했고, 비안比安·우봉牛峰·이산尼山·해주海州 박씨 등도 파사왕의 후손이라 한다.

    그리고 일성왕계는 그의 25세손인 경명왕景明王, 경애왕景哀王 대에서 갈라졌다. 경명왕은 아들 8형제를 두었는데, 밀성대군파密城大君派(밀양 박씨), 고양대군파高陽大君派(고령 박씨), 속함대군파速咸大君派(함양, 삼척 박씨 등), 죽성대군파竹城大君派(죽산, 음성, 고성 박씨), 사벌대군파沙伐大君派(상주, 충주 박씨 등), 완산대군파完山大君派(전주, 무안 박씨 등), 강남대군파江南大君派(순천, 춘천 박씨 등), 월성대군파月城大君派(월성 박씨)의 8대군파로 분파되었다. 그 외 경애왕 후손은 금성대군金城大君 박교순을 시조로 하는 울산 박씨가 있다.

    박씨는 김씨나 이씨와 달리 단일 시조를 받들고 있다. 모든 박씨가 박혁거세를 유일한 시조로 받들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아직도 박씨끼리는 되도록 혼인하지 않으려는 관습이 있다. 또한 박씨는 김씨나 이씨와 달리 우리나라에만 있는 성씨이다. 김씨나 이씨는 중국이나 베트남 등에도 존재한다.

    밀양密陽 박씨


    시조 박언침朴彦沈은 박혁거세의 29세손인 경명왕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신라 말기에 박씨에서는 3명의 왕을 배출했다.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55대 경애왕이 그들이다. 경명왕과 경애왕은 모두 신덕왕의 아들이며, 경명왕의 아우가 경애왕이다. 경명왕에게는 8명의 아들이 있었다. 첫째가 밀성대군 박언침(밀양 박씨, 반남 박씨, 진원 박씨의 시조)이며, 둘째가 고양대군 박언성朴彦成(고령 박씨의 시조), 셋째가 속함대군 박언신朴彦信(함양 박씨, 삼척 박씨의 시조), 넷째가 죽성대군 박언립朴彦立(죽산 박씨, 음성 박씨, 고성 박씨의 시조), 다섯째가 사벌대군 박언창朴彦昌(상주 박씨, 충주 박씨의 시조), 여섯째가 완산대군 박언화朴彦華(전주 박씨, 무안 박씨의 시조), 일곱째가 강남대군 박언지朴彦智(순천 박씨, 춘천 박씨의 시조), 여덟째가 월성대군 박언의朴彦儀(경주박씨의 시조)이다. 그런데 금성대군 박교순에 대해서는 경명왕의 아들이라는 설과 경애왕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밀양 박씨는 2015년 인구조사에서 3,168,084명으로 나타났다. 이는 전체 박씨 중 77.8%를 차지하는 숫자이며, 본관별 성씨 인구 순위에서도 김해 김씨(445만 6천 명) 다음으로 두 번째를 차지하고 있다.

    분파
    밀양 박씨는 박언침의 8세손인 언부彦孚(고려 문종 때 문하시중)를 파조로 하는 문하시중공파門下侍中公派(박언부朴彦浮)가 있으며, 그 외에 도평의사공파都評議事公派(박언상朴彦祥), 좌복야공파左僕射公派(박언인朴彦仁), 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박양언朴良彦), 판도공파版圖公派(박천익朴天翊), 좌윤공파左尹公派(박을재朴乙材), 진사공파進士公派(박원朴元), 밀성군파密城君派(박척朴陟), 영동정공파令同正公派(박원광朴元光), 밀직부원군파密直府院君派(박중미朴中美), 정국군파靖國君派(박위朴威), 규정공파糾正公派(박현朴鉉) 등의 12파가 있다. 이 중에서 규정공파의 후손이 가장 번창하다. 또 규정공파에서 나누어진 파 중에서 특히 낙촌공파駱村公派(박충원朴忠元), 문도공파文度公派(박훈朴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즉, 밀양 박씨는 박혁거세를 도시조都始祖로 하고 30세손인 박언침을 중시조로 한다. 박언침의 8세손에서 6개 파로 나누어지고, 그 후손 중에서 다시 6개 파로 나뉘어 모두 12개 파가 형성되어 있다.

    그 외에도 밀양 박씨에서는 10세손 박환朴桓을 시조로 하는 영암 박씨靈巖 朴氏, 12세손 박원의朴元義를 시조로 하는 태안 박씨泰安 朴氏가 분적되었다. 또한 강진康津, 고성高城, 광주光州, 구산龜山, 나주羅州, 문의文義, 문주文州, 봉산鳳山, 선산善山, 언양彦陽, 여주驪州, 영암靈巖, 운봉雲峯, 은풍殷豐, 의창義昌, 의흥義興, 인제麟蹄, 장성長城, 정선旌善, 진주晉州, 창원昌原, 천안天安, 태안泰安, 태인泰仁 박씨 등이 분적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주요 인물
    밀양 박씨는 인구가 많은 만큼 인물도 많이 배출되었다. 조선 시대에서도 문과급제자 261명, 상신相臣 1명, 대제학大提學 2명, 청백리淸白吏 2명을 배출하였다. 그중 대표적 인물을 거론하면 규정공파에서 박강생朴剛生, 박심문朴審問, 박중손朴仲孫, 박건朴楗, 박훈朴薰, 박충원朴忠元, 박계현朴啓賢, 박승종朴承宗, 박영朴英, 박성원朴聖源 등이 있고, 사문진사공파에서 박의중朴宜中, 박거겸朴居謙, 박종남朴宗男과 박영신朴榮臣 부자, 박연朴堧, 박열朴說이 있으며, 밀성군파에서 박신규朴信圭, 박이서朴彛敍 등이 있다. 

    이 중 박충원은 명종 때 대제학을 지냈고, 박승종은 광해군 때 영의정을 지내고 인조반정 후 자결하였으며, 박열은 중종 때, 박신규는 숙종 때의 청백리이다. 이 밖에 밀양 박씨의 두드러진 인물로서 실학의 대가 박제가朴齊家가 있다.

    근현대에 들어와 밀양 박씨 문중에서는 더욱더 많은 인물이 나왔다. 정관계 인물로는 60년대 야당인 민중당을 이끈 거물 여성 정치인 박순천朴順天 여사가 있으며, 1980년 국무총리 서리와 대통령 권한대행을 역임한 박충훈 씨, 국방부장관을 역임한 박병권 씨, 내부부장관과 교통부장관을 역임한 박경원 씨가 있다. 재계 인물로는 두산그룹 초대회장인 박두병朴斗秉 씨가 있고, 해태그룹 창업주인 박병규 씨, 화신백화점 사장이었던 박흥식 씨, 대농그룹 박용학 회장 등이 있다. 또한 학계에서도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나왔다. 박대선(전 연세대 총장) 박철웅(전 조선대 총장) 박종홍(전 서울대 대학원장) 박술음(전 외국어대 총장) 박길진(전 원광대 총장) 박기혁(전 연세대 상경대학장) 씨 등이 있으며, 문화예술계에서는 박시춘(작곡가) 박용구(소설가) 박화성(여류작가) 박동진(국악인) 박종화(소설가) 등이 있다.

    반남潘南 박씨


    나주시 반남면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다. 시조는 박응주朴應珠로 알려져 있다. 그는 고려 고종 때 반남현의 호장戶長을 지낸 사람이다. 1세조 박응주의 선계는 밝혀지고 있지 않으며, 다만 신라 말기에 국왕을 지낸 경명왕의 후손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이에 대해 ‘반남박씨대종회’에서는 “신라의 국운이 쇠퇴해지자 정국 혼란으로 박씨들은 각 지방으로 흩어져 반남·고령·죽산·밀양 등지로 분산 거주하여 신라 경애왕으로부터 호장공戶長公까지 280여 년간의 사적史蹟을 알 수 없어 계통系統을 밝힐 수 없다”고 했다.

    반남 박씨로 본관을 정한 것은 문정공 박상충朴尙衷의 아들이었던 평도공 박은朴訔 때였다. 박은은 태종 이방원의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 좌명공신에 책록되고, 우의정과 좌의정에 올라 반남군潘南君과 금천 부원군에 봉해지고, 오랫동안 반남면에 세거했기 때문이다. 현재 반남 박씨에는 참판공규파參判公葵派, 세양공강파世襄公薑派, 부윤공훤파府尹公萱派, 지후공인파祗候公仁派, 교위공귀근파校尉公貴謹派, 학생공영창파學生公永昌派, 도사공진창파都事公震昌派, 정자공충파正字公?派, 감찰공현수파監察公玄修派, 학생공초생파學生公初生派, 직장공송생파直長公松生派 등이 있다. 반남 박씨는 조선 시대에 문과 급제자 215명, 상신 7명, 대제학 2명, 왕비 2명을 배출하여 조선 시대를 수놓았던 주요 명문가 중의 하나로 지목되고 있다. 2015년 통계청이 발표한 인구조사에서 16만 964명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는 박씨 인구 중에서 밀양 박씨 다음으로 많은 숫자로 전체 박씨의 3.6%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 반남 박씨가 밀양 박씨에서 갈라진 분적 성씨라는 주장에 대해 반남 박씨 측에서는 강하게 부정하고 있다. 반남 박씨 대종회에 따르면, “밀양 박씨와 반남 박씨가 종씨지간임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종친宗親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즉 현재 반남 박씨 대종회 측은 경명왕의 9아들(또는 8아들)에 대해 그 실체적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주요 인물
    대표적인 인물을 열거하면 박은朴訔, 박숭질朴崇質, 박세채朴世采, 박종악朴宗岳, 박종훈朴宗薰, 박회수朴晦壽 등의 상신이 있고 박태상朴泰尙, 박규수朴珪壽 등의 대제학, 박세당朴世堂, 박지원朴趾源 등의 뛰어난 학자가 있다. 박소朴紹, 박응남朴應男, 박응복朴應福, 박태보朴泰輔 등도 가문을 빛낸 인물들이다.

    반남 박씨는 고려 말 문정공 박상충朴尙衷으로부터 번영을 누리기 시작하였다. 문정공 박상충은 신진 유생으로서 친명파에 가담하여, 이인임李仁任 등 친원파에 대항하였다. 박상충은 경사·역학·문장 등에 능했던 고려 말의 석학이다. 그의 아들이 조선 태종조의 좌의정 박은朴訔이다. 박은은 반남 박씨의 중흥시조다. 그는 2차례의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운 공으로 반남군에 봉해지고 좌의정에까지 오른다. 그의 후손들이 조선조에서 반남 박씨 문중의 주축을 이루었다. 박규朴葵(예조참판), 박강朴薑(이조참의, 청백리), 박훤朴萱(경주부윤)등 3형제는 그의 아들들이다.

    연산군 때 좌의정 박숭질朴崇質은 슬기로운 처세로 후세에 이름을 남긴 명신이다. 그는 연산의 폭정이 날로 심해지자 어느 날 등청登廳길에 말에서 일부러 떨어져 부상을 입고 3개월 동안 등청하지 않자 자동 면직되었다. 이 같은 선견지명이 있었기에 그의 문중은 중종반정 후의 서릿발 같은 정치 보복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반남의 인물 중 누구보다도 후대에 큰 업적은 남긴 이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다. 그는 경제 정치 군사 문학을 공부하고 홍대용과 함께 자연과학에 열중, 지동설을 주장하였다. 1780년(정조 4) 박명원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들어가 중국의 학자와 지내면서 식견을 넓혔다. 귀국 후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저술하여 당시 사상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열하일기’는 조선 5백 년을 통틀어 중국 여행기 중 백미로 꼽힌다. 또 당시 양반 계급과 관리들의 무능, 부패를 날카롭게 풍자한 그의 한문 소설 ‘허생전許生傳’, ‘양반전兩班傳’, ‘호질虎叱’ 등은 우리 고전 문학의 보배로 전해 내려오는 명작들이다.

    조선 후기에 반남 박씨는 박종악朴宗岳(정조조, 우의정), 박종훈朴宗薰(순조조, 좌의정), 박회수朴晦壽(순종조, 좌의정), 박규수朴珪壽(고종조, 우의정) 등 4명의 정승을 냈다. 고종 10년 우의정을 지낸 박규수는 연암의 손자이다. 그는 고종 3년 평안사관찰사로 있을 때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에 들어와 행패를 부리자 군사를 동원, 배를 불살라 버린 장본인이다. 그는 고종 1년 대제학, 공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반남 박문은 박영효朴永曉(고종, 궁내부대신), 박정양朴定陽(고종, 총리대신) 등 인물들을 냈다. 박영효는 고종 10년 철종의 딸인 영혜옹주와 결혼하면서 출세의 기반을 다졌다. 22세 때 수신사로 임명되어 일본에 건너갔다. 그는 후에 김옥균 등과 함께 일본 세력을 등에 업고 갑신정변을 일으키게 된다. 하지만 이 정권은 3일 천하로 끝나게 되고 그는 일본으로 망명한다. 초대 주미공사를 지낸 박정양은 김홍집이 피살되자 총리대신 서리를 지냈다. 1887년에는 미국특파전권대사가 되어 미국에 주재하며 외교 활동도 하였다. 박찬익은 망국 후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940년 임시정부 법무부장이 되었다.

    해방 후에도 반남 박씨는 사회 각계에 많은 인재를 냈다. 학자로는 박광서(법학자, 중앙대학원장), 박동서(서울대 교수), 박찬기(고려대 교수), 박찬웅(의학박사, 서울대), 박찬무(의학박사, 을지병원장) 등이 있으며, 재계에서는 박태서(제일제당, 전주제지 사장), 박도언(삼성물산 사장), 박응서(전 국제종합금융 사장) 등이 있으며, 문학계의 거목 박완서 씨도 이 문중이다.

    함양咸陽 박씨


    시조는 박언신朴彦信이다. 함양 박씨는 경명왕의 아들이었던 8대군파 중에서 속함대군速咸大君의 후손이다. 중시조는 고려의 예부상서 박선朴善이다. 함양 박씨 종중에서는 “박혁거세의 29세손인 경명왕이 8대군을 분봉할 때, 셋째 아들 박언신을 속함(함양의 옛 이름)대군으로 봉함으로써” 본관을 얻었으나, “문헌이 유실되어 선계를 밝힐 수 없어 고려조 예부상서를 지내고 함양군咸陽君에 봉해진 박선을 시조로 모셨다.”고 밝히고 있다. 함양 박씨는 중시조 박선이 가문을 연 이후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는데, 그중 김경손과 함께 이연년李延年의 난을 평정하여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진 박신유朴臣蕤가 유명하다. 그리고 박신유는 여섯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 후손이 6개 지파로 갈라졌다.

    즉, 검교군기소감檢校軍器少監을 지낸 박지문朴之文의 후손이 군기소감공파를, 위위윤尉衛尹을 지낸 박지빈朴之彬의 후손이 문원공파를, 1∼2차에 걸쳐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할 때 고려군의 도독사 김방경金方慶의 휘하에서 지중군병마사知中軍兵馬使로 출전하여 일본 대마도와 규슈 지방을 공략한 박지량朴之亮 후손이 판삼사사공파判三司事公派,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낸 박지수朴之秀의 후손이 부사공파를,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지낸 박지온朴之溫의 후손이 감찰어사공파를, 금오위중랑장金吾衛中郞將을 역임한 박지영朴之穎의 후손이 중랑장공파를 이루고 있다. 그중 문원공파와 부사공파에서 가장 많은 후손과 인물을 배출하였다.

    함양 박씨에서는 고려조에서 8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고 조선조에서 문과 73명, 무과 59명을 배출했으며, 청백리 1명에 공신 3명이 나왔다. 현재 함양 박씨의 인구(2015년 통계청 발표)는 전국에 16만 3천 명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향오린鄕五鱗 경팔립京八立
    고려조의 중요 인물로는 박선의 8세손 박충좌朴忠佐가 있다. 박충좌는 백이정白頤正에게 수학, 익제 이제현과 함께 정주학의 기초를 확립한 인물이다. 충숙왕 14년 문과에 급제하고 전라안렴사全羅按廉使, 경상도 관찰사, 개성부윤을 지내고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는 왕에게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시강侍講했고, 역학의 대가로도 이름이 높았다. 스승 백이정이 남해로 유배를 갔을 때 유배지까지 따라가서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스승이 병들자 유배지 뒷산인 금산에 올라 약초를 캐어 탕약을 끓였다. 병약한 스승이 입맛이 없어 식사를 거를 때는 자신도 밥을 먹지 않았다. 이러한 스승과 제자의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남해 사람들은 이동면 난음리에 난곡사를 지어 향사를 지냈다.

    조선조 들어와서 한동안 가문의 세가 기울었으나, 조선조 중기에 박규朴規의 후손과 박세영·박세무·박세옹 3형제의 8아들에서 크게 번성하였다. 이를 함양 박씨 가문에서는 향오린鄕五鱗, 경팔립京八立이라고 한다.

    향오린은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낸 박규의 증손인 박눌朴訥이 상주의 향리로 있으면서 모정茅亭을 짓고 후학에 전념하여 문과에 급제시킨 다섯 아들을 말한다. 첫째 박거린朴巨鱗은 군수 장령을, 둘째 박형린朴亨鱗은 부사 참의를, 셋째 박홍린朴洪鱗은 대사헌을, 넷째 박붕린朴鵬鱗은 한림학사와 지평을, 다섯째 박종린從鱗은 이조정랑을 지냈다.

    경팔립은 ‘立’ 자 항렬의 여덟 종형제가 서울에 살면서 대소과에 급제, 벼슬길에 올랐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그 여덟은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을 지낸 박세영의 세 아들 박대립朴大立(좌찬성), 박사립朴思立(우승지), 박희립朴希立(목사)과 부사府使를 역임하고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저술한 박세무의 세 아들 박소립朴素立(이조판서, 우참찬), 박응립朴應立(군수), 박성립朴成立(巨儒), 그리고 이조참의를 역임한 박세옹의 두 아들 박연립朴挻立(목사), 박명립朴名立(통례원상례)의 8형제를 말한다. 이들은 거의 같은 시기에 현직에 있으며, 가문을 크게 빛냈다.

    함양 박씨는 근·현대에 들어와서도 독립운동에 힘을 쏟은 박기봉朴基鳳과 학자이자 의병장으로 유명했던 박기대朴基大, 봉천감옥에서 순직한 박찬희朴燦熙가 있으며, 무정부주의자로 일본 천황을 죽이려 했던 박열朴烈이 특히 유명하다. 현대에 와서는 통일교 한국문화재단의 박보희 총재, 법조계의 박일환(대법관), 박재승(전 대한변호사회 회장, 민주당 공천심사위원장), 박재순(한나라당 최고위원, 농어촌공사 사장) 등이 있다.


    순천順天 박씨


    순천 박씨는 신라 경명왕의 8왕자 중 7번째인 강남대군 박언지朴彦智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시조는 박영규朴英規인데, 그가 박언지의 아들이다. 하지만, 또 다른 일설에 의하면 박영규는 신라 유리왕의 후손이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설에 대해선 고증할 길이 없다. 박영규는 견훤의 사위였지만, 고려에 귀의하여 후백제 공략에 공을 세워 고려 삼한통합익찬공신高麗三韓統合翊贊功臣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이 되었다. 이후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이 박영규에게 좌승佐丞을 하사하고 전답과 역마, 그리고 노예를 주었으며, 두 아들에게도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그는 2남 3녀를 두었는데, 딸은 각각 왕건의 부인(동산원부인東山院夫人)과 고려 3대 정종의 비인 문공왕후文恭王后와 문성왕후文成王后가 되었다고 한다. 박영규 후손의 계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에 따라 순천 박씨에서는 박영규의 후손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크게 이름을 떨침으로써 평양平陽(순천의 옛 이름)부원군에 봉해진 박난봉朴蘭鳳을 득관조로 모시고 있다.

    그렇지만 박난봉의 후손들도 정확한 계대를 알 수가 없고, 충숙왕 때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낸 박숙정朴淑貞이 가문을 크게 열었기 때문에 순천 박씨 가문에서는 박숙정을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박숙정의 맏아들 박원룡朴元龍은 시랑侍郞을 역임했고, 막내 박원상朴元象은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여 가문이 공고해졌다.

    순천 박씨에는 문숙공파文肅公派, 군수공파郡守公派, 부정공파副正公派, 의주목사공파義州牧使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승지공파承旨公派, 경력공파經歷公派, 생원공파生員公派, 제주목사공파濟州牧使公派, 판관공파判官公派, 감사공파監司公派, 충정공파忠正公派, 교리공파校理公派, 수찬공파修撰公派, 박사공파博士公派, 검열공파檢閱公派, 전직공파殿直公派, 인의공파引儀公派, 부위공파副尉公派 등의 19파가 있다. 2015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10만 5천 2백여 명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주요 인물
    박천상朴天祥은 박숙정의 손자로 공민왕 때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에 오르고 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에 봉군되었다. 그는 고려 말 역성혁명을 도모한 세력에 의해 여러 번 고초를 겪은 후 경상도 가야산 죽백동에 은거하였다. 그는 세 아들을 두었다. 첫째가 가흥可興, 둘째가 가실可實, 셋째가 가권可權이다. 첫째 가흥은 밀직부사를 지냈으나, 역성혁명 세력에 의해 순천으로 귀양갔다. 이후 또다시 이성계 제거에 협력하다 발각되어 유배되었다. 하지만, 태종의 즉위 후 평양군平陽君에 봉군되고 검교의정부우찬성檢校議政府右贊成에 제수되었다. 후에 세종이 우의정을 제수하였으나, 고령을 이유로 고사하였다.

    박중림朴仲林은 사육신인 박팽년朴彭年의 아버지이며, 목사牧使였던 박안생朴安生의 아들이다. 그는 태종 때 문과에 장원을 하고 집현전수찬, 사간, 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단종 즉위 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대제학과 대사헌을 역임하였으며, 후에 공조·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하지만,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아들인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능지처사되었다. 또한 그의 아들 팽년彭年, 인년引年, 기년耆年, 대년大年도 모두 처형되었다. 그 후 영조 때 신원伸寃되어 관작이 회복되었다.

    박중선朴仲善은 부지돈녕부사 박거소朴去疎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영의정 심온의 딸로 세종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동생이다. 세종과는 동서지간이 되는 셈이다. 세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부사가 되었다. 그 후 병조참판이 되어 이시애가 난을 일으키자 이를 토벌하는 공을 세웠다. 단종 복위를 꾀했던 박중림·박팽년 일가와는 친척이었으나, 정반대의 길을 간 것이다. 그 후 그는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책록되고, 평양군平陽君에 봉해졌으며 병조판서에 승진되었다. 곧이어 호조판서에 임명되고 선성군宣城君에 봉해졌다. 조선 시대 순천 박씨에서 배출된 과거급제자는 모두 134명인데, 그중 문과에 34명, 무과에 13명, 사마시에 85명, 역과에 2명이 합격했다. 

    순천 박씨의 근·현대 인물로는 독립운동가로 박인환, 박노창, 박규명 등이 있으며, 정계에서는 국회의장을 3번 역임한 박준규 국회의원을 비롯하여 박재우(국회의원), 박종남(국회의원) 등이 있고, 학계에서는 박황(성균관고문, 도산서원장), 박만규(고려대 교수), 박창준(흥사단이사장, 서울대 교수) 등이 있다. 또한 재계와 법조계에서는 박노성(전 제일은행장)을 비롯하여 박종철(전 대구지검장) 등이 있다.


    무안務安 박씨


    전라남도 무안군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다. 무안 박씨의 시조 박진승朴進昇은 경명왕의 8대군 중 여섯째인 완산대군完山大君 박언화朴彦華의 5세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고려 시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국자제주國子祭酒를 지냈으며 공을 세워 무안을 식읍으로 하사받았는데,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받들어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무안 박씨에서는 12개 분파가 생겨났다. 개성파開城派, 장단파長湍派, 무안파務安派, 서울·노성파魯城派, 양근楊根·남해南海·완도莞島·진도珍島·적성파積城派, 음죽파陰竹派, 영해·양주파寧海楊州派, 공주파公州派, 홍산파鴻山派, 당진파唐津派, 연기파燕岐派, 그것이다. 2015년 통계청의 발표에 의하면 무안 박씨의 총 인구는 2만 4746가구에 9만 7백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는 전체 박씨의 2.0%를 차지한다.

    주요 인물
    무안 박씨의 시조 박진승의 아들 박섬朴暹은 고려 현종 거란의 2차 침공 때 호종공신으로 좌복야에 올랐다. 그의 증손으로 당대에 학문이 뛰어났던 박승중은 문과에 급제한 뒤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로서 상정관詳定官이 되어 예의禮儀를 정하였다. 인종이 즉위하자 보문각학사로 김부식과 더불어 ‘예종실록’의 편수관이 되었다. 이자겸이 국정을 맡게 되자, 그에게 아부하여 참지정사를 거쳐 수태위守太尉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승진하였다. 하지만 이자겸의 몰락으로 탄핵을 받고 울진에 유배되었으나, 공로가 참작되어 무안에 안거하였다. 박섬의 6세손 박문오는 정승에 올라 면성(지금의 무안)부원군에 봉해졌고, 그의 아우 박문정은 문과에 급제한 후 팔만대장경 창제에 기여하였다. 무안 박씨는 박문오와 박문정 두 형제 때 가세가 크게 흥했다. 무안 박씨의 각 분파 중에서 박문오의 다섯 아들과 아우인 문정으로부터 분파된 가문이 많다.

    10세 풍정공 박의룡은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영중추부사에 올랐으며, 14세 박임경은 성삼문의 사위로 성삼문이 거혈형에 처하자 시신 일부를 수습하여 노량진에 묻었다고 한다. 현감 박세렴의 아들 박의장은 임진왜란 때 경주부윤으로 50여 회 전투를 이끌었으며, 그의 아우 박홍장은 대구부사로 일본에 사신으로 가 죽기를 결심하고 뜻을 굽히지 않았다. 박인은 임진왜란 때 왕을 평양에 호종하여 의주 행재소行在所의 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을 지냈고, 숙종 때 시인으로 이름이 높았던 박창하는 많은 고율시古律詩를 남겼다.

    무안 박씨의 근·현대 인물로는 한글 점자의 창안자인 #박두성朴斗星#을 꼽을 수 있다. 1920년 한글 점자 연구에 착수하여 6년 만에 완성했다. 이 한글 점자는 ‘훈맹정음訓盲正音’이라고 불린다. 점자계의 세종인 셈이다.

    그 외 무안 박씨의 인물로는 재계의 박수웅(전 대일화학공업 대표이사), 박종득(전 대한방직 부회장), 박광섭(전 현대산업 사장), 박화복(목포화공 대표이사) 등이 있다. 국회의원으로 박승재(한양대 교수, 민주당 공천심사위원장), 박석무, 박종길 등이 있다. 학계에서는 박종문(동국대 교수), 박철재(이학박사, 인하공대 학장), 박한규(전북대 학장), 박창규(목포대 학장) 등이 있으며, 권투선수였던 박종팔 씨도 무안 박씨이다.

    죽산竹山 박씨


    죽산 박씨는 경명왕의 아들 8대군 가운데 넷째인 죽성대군竹城大君 박언립朴彦立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시조는 죽성대군의 아들 박기오朴奇悟이다. 박기오는 고려 초에 삼한벽상공신에 올라 죽산竹山(지금의 경기 용인군, 안성군 일대)을 식읍으로 하사받았다. 이후 그 후손들이 죽산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죽산 박씨는 박기오의 6세손 #박영후朴永侯의 장남 박정유朴挻㽔와 차남 박정혁朴挺奕에서 파가 갈라진다. 박정유는 충질공파忠質公派의 파조가 되는데 그 후손에서 철성백파鐵城伯派와 陰城 박씨, 고성高城 박씨, 철성鐵城 박씨로 분파된다. 이들 네 파는 모두 고려 고종조의 무신이자 박언립의 14세손 박서朴犀를 파조로 모시고 있다. 박정혁은 소경공파의 파조가 된다. 이후 소경공파는 문광공파, 태복경파, 총제공파로 갈라진다.

    죽산 박씨는 조선 시대에 39명의 문과 급제자와 2명의 상신을 배출하였으며, 2015년 국세조사에서 63,179명으로 조사되었다. 2015년 조사에서 음성 박씨는 모두 8,734명이 살고 있으며, 고성 박씨는 5,13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주요 인물
    박기오의 손자 박충숙朴忠淑은 고려 현종 때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고 참지정사參知政事와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다.  7세손인 박정유는 예종과 인종에 걸쳐 우부승선右副承宣을 거쳐 추밀원부사樞 密院副使 겸 태자좌빈객太子左賓客이 되었다. 박정유의 아들인 박육화朴育和는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인 박인석朴仁碩은 선종宣宗 때 초토판관招討判官으로 초적草賊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벼슬이 호부상서에 이르렀다. 전법판서典法判書 박휘朴暉의 아들인 박전지朴全之는 외교와 정치 이론에 밝았으며, 충선왕 때 연흥군延興君에 봉해지고, 충숙왕 때는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다. 벼슬은 수첨의 찬성사에 이르렀다. 박전지의 손자 박문수는 조선이 건국되자 두문동에 은거한 ‘두문동 72현’ 중의 하나였으며, 그의 아들 박포는 조선이 개국되자 대장군을 거쳐 황주목사가 되었으나, 왕자의 난 때 방원을 도와 정사1등공신이 되고 죽성군에 봉해졌다. 하지만,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다 죽주로 귀양을 가고, 다시 방간을 옹립하려 거병하였으나, 태종 이방원의 군사에 패하여 참수당했다.

    조선 중기에는 박문보朴文珤의 증손으로 박원형朴元亨이 유명하다. 그는 세종과 세조 때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외교의 일인자로 손꼽혔다. 그래서 중국 사신인 장영張寧은 그를 평하기를 ‘춘추시대의 숙향叔向과 자언子彦에 비교하였다.’고 한다. 그의 아들은 영중추부사에 오른 박안성朴安性이다. 또한 조선 말에는 박주현朴周鉉이 항일운동을 하다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순절하였으며, 박치조 박치의 박건채 등은 평북 선천에서 경찰서를 파괴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고령高靈 박씨


    고령 박씨는 신라 54대 경명왕의 8대군 중 둘째인 고양대군高陽大君 박언성朴彦成을 시조로 모시고 있다. 현재 고령 박씨에는 어사공파御史公派(박섬朴暹), 부창정공파副創正公派(박환朴還), 주부공파主簿公派(박연朴連), 사정공파司正公派, 참의공파參議公派, 소윤공파少尹公派, 감사공파 등의 분파가 있다. 그중 박섬의 어사공파와 박환의 부창정공파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고령 박씨에서는 조선 시대에 56명의 문과 급제자, 1명의 상신, 4명의 청백리가 배출되었다. 어사공파의 대표적 인물은 박은朴誾, 박장원朴長遠, 어사 박문수朴文秀, 박상신朴相臣, 박영원朴永元 등이고, 부창정공파의 대표적 인물은 박광순朴光純, 박광우朴光佑, 박우생朴雨生, 박임종朴林宗, 박만朴蔓, 박처륜朴處綸, 박영준朴永俊, 박난영朴蘭英, 박정번 등이 있다.

    현대에 들어와선 제3, 4공화국 대통령을 역임한 박정희朴正熙와 그의 딸인 박근혜朴槿惠 전 대통령이 있다. 박정희는 직강공 박숙동朴叔童의 후손이자 한말에 사과司果(조선 시대 정6품)를 지내고 동학 접주로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박성빈朴成彬의 아들로 경상북도 구미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수료, 국군 창설에 참여하였으며, 육사 2기생으로 졸업한 뒤 육군 소장으로 5·16군사쿠데타를 통해 집권하였다. 고령 박씨는 비록 수는 많지 않지만 밀양 박씨와 반남 박씨에 이어 세 번째의 명문가로 꼽힌다. 2015년 조사에 의하면 인구가 43,774명으로 나타났다.

    충주忠州 박씨


    시조 박영朴英은 신라 제54세 경명왕의 다섯째 아들인 사벌왕沙伐王 박언창朴彦昌의 11세손으로서 ‘충주박씨세보忠州朴氏世譜’에 의하면 고려 시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부정副正을 역임하였다고 한다. 충주 박씨가 충주를 관향으로 삼은 것에 대해서는 신라사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충주는 고구려 영토로 국원성國原城이었는데, 신라가 유리왕 때 그곳을 점령해서 진흥왕 때 소경小京으로 삼고 귀족인 박씨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 그래서 그 후손들이 동경東京(경주의 옛 이름)에서 옮겨와 대를 이어 살면서 상주 박씨에서 분관하여 충주를 본관으로 하였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신라사에 의한 추론일 뿐 그 외 자료는 없다. 현재 충주 박씨의 분파는 의정공파參議公派, 강릉공파江陵公派, 참판공파參判公派, 제주공파濟州公派, 집의공파執義公派, 판서공파判書公派, 함경도파咸鏡道派, 평안도파平安道派, 찬성공파贊成公派, 영동공파永同公派, 첨정공파僉正公派, 문간공파文簡公派, 의정공파議政公派 등이 있으며, 2015년 통계청 자료는 34,226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주요 인물
    박영朴英의 아들 2대 신臣이 고려 때 검교신호위대장군檢校神虎衛大將軍을 지냈으며, 이 때 충주에서 살던 가족들이 고려 개경으로 모두 옮겨 왔다. 그의 손자 원숭元崇이 삼사우사三司右使를 역임하면서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지낸 아들 득승得升과 함께 가세를 일으켰다. 그 후 고려 말에 와서 권신 임견미林堅味의 횡포를 탄핵했던 영의 8세손 광리光理가 개성소윤開城少尹을 지냈고 사복시司僕寺 정正(정3품)을 증직받았다. 9세손인 그의 아들 진蓁과 소蘇 형제가 여말선초 왕조 교체기에 각각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진해, 직산 감무監務와 은산군사殷山郡事를 역임 중이었는데 역성혁명의 소용돌이를 피해 200여 년간 살아왔던 개성을 떠났다. 남쪽으로 내려온 그들은 충청도 덕진현(현 대전광역시) 가장골에 은거해 이때부터 충주 박씨들은 대전 일대에 세거지를 이뤘다. 그들은 도동道洞(현 대전광역시 도마동)에 추원사追遠祠를 짓고 관조를 비롯 이하 7세의 위패를 안치했다.

    8세 개성소윤 광리光理의 묘소는 개성 동문 밖에 그대로 남아 있고, 조선조 개창기인 9세손 참의공 진蓁의 아들 사형제 효함孝諴, 충함忠諴, 제함悌諴, 신함信諴, 9세손 판서공 소蘇의 아들 오형제 인흥仁興, 의흥義興, 예흥禮興, 지흥智興, 신흥信興 때 대전 세거지에서 다시 벼슬길로 나갔다.

    후손들은 대전을 시작, 제천, 영동, 군산, 논산, 공주, 김천 등으로 퍼져 나갔는데 이들 중에서도 특히 단종 폐위 때 처가인 광주 송정리로 낙향한 판서공 소蘇의 넷째 지흥의 후손들이 특히 청렴하고 학문이 뛰어나 대제학, 영의정이 나왔다. 지흥의 세 아들 박정朴禎, 박상朴祥(청백리녹선), 박우朴祐는 도덕 문장가로 유명하다. 충주 박씨의 유일한 상신相臣이었던 박순朴淳은 박우의 아들이다. 그는 일찍이 서경덕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며, 시詩·문文·서書에 뛰어났다. 명종은 그를 두고 “박순은 송죽松竹 같은 지조가 있고 수월水月 같은 정신이 있다”고 했다. 그는 격심한 동서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14년 동안 정승 자리에 있으면서 이이와 성혼을 옹호하다가 탄핵을 받고 물러났다. 지흥의 후손들은 행주 기씨幸州 奇氏, 장흥 고씨長興 髙氏와 함께 호남 학맥의 중심으로 성장했다. 그 결과 조선 시대에 광주를 ‘기·고·박의 고장’이란 별명으로 불렀다 한다.

    현대 주요 인물로는 박우경(국회의원), 박흥규(국회의원), 박병배(국회의원), 박현주(미래에셋 금융지주 회장), 박찬호(전 메이저리거), 박세리(골프 선수), 박선규(문화체육관광부 차관, 청와대 대변인) 씨 등이 있다. (무순, 전 현직 구분 안 됨)


    〈참고자료〉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
    안경전, 『환단고기 역주본』, 상생출판사, 2012

    〈참고사이트〉
    성씨 정보(http://www.surname.info)
    뿌리를 찾아서(http://www.rootsinfo.co.kr)
    김성회의 성씨 이야기
    통계청 홈페이지
    밀양 박씨 홈페이지(http://www.milyang-park.com/)외 각 박씨 관련 사이트
    위키 백과




    『환단고기』가 전하는 박혁거세의 혈통
    斯盧始王(사로시왕)은 仙桃山聖母之子也(선도산성모지자야)라
    昔(석)에 有夫餘帝室之女婆蘇(유부여제실지녀파소)가 不夫而孕(불부이잉)하니
    爲人所疑(위인소야)하야 自嫩水(자눈수)로 逃至東沃沮(도지동옥저)하고 又泛舟而南下(우범주이남하)하야
    抵至辰韓奈乙村(저지진한나을촌)하니時(시)에 有蘇伐都利者(유소벌도리자)하야
    聞之(문지)하고 徃收養於家(왕수양어가)러니 而及年十三(이급년십삼)에 歧嶷夙成(기억숙성)하야
    有聖德(유성덕)이라 於是(어시)에 辰韓六部(진한육부)가 共尊(공존)하야 爲居世干(위거세간)하니
    立都徐羅伐(입도서라벌)하고 稱國辰韓(칭국진한)이오 亦曰斯盧(역왈사로)라.

    사로斯盧의 첫 임금은 선도산 성모의 아들이다. 옛적에 부여 황실의 딸 파소婆蘇가 지아비 없이 잉태하여 남의 의심을 사게 되었다. 이에 눈수에서 도망하여 동옥저에 이르렀다가 또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한의 나을촌에 이르렀다. 그때에 소벌도리라는 자가 이 소식을 듣고 가서 아이를 집에 데려다 길렀다. 나이 13세가 되자 뛰어나게 총명하고 숙성하며 성덕이 있었다. 이에 진한 6부가 함께 받들어 거세간이 되었다. 서라벌에 도읍을 세워 나라 이름을 진한辰韓이라 하였고, 사로라고도 하였다.(『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환단고기역주본 본문 617쪽)

    때는 바야흐로 #BCE 57년# 신라가 건국된 해이다. 그 시기 동북아에는 엄청난 격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단군조선을 계승한 북부여가 옛 진한 땅을 중심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가운데 서쪽 변한 땅의 위만 정권은 3대를 내려가 우거왕에 이르러 한나라 무제의 침입을 받고 망해 버렸다(#BCE 108년#). 이 여세를 몰아 한나라는 요동을 넘어 북부여까지 침공하였다. 이때 북부여 구국의 영웅인 동명왕東明王 고두막한이 분연히 의병을 일으켜 한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나라를 구하였다. 이때 졸본에서 나라를 열어(#BCE 108년#) 졸본부여라 하였다. 이후 동명왕은 크게 인권人權을 얻어 북부여의 5세 고두막단군으로 즉위하였다(#BCE 86년#). 당시 북부여의 4세 단군 고우루는 도읍을 옮겨 가라는 고두막한의 압력에 병을 얻어 붕어하고 그 아우 해부루가 즉위하여 나라를 가섭원으로 옮겼다. 이 나라를 가섭원부여 혹은 동부여라고 한다. 따라서 #파소가 박혁거세를 잉태하여 남쪽으로 피신한 BCE 70년 경에는 고두막한의 북부여와 동부여가 공존하고 있는 때였다.# 정권이 바뀌고 또 나라가 이사를 갈 정도의 격변기라면 지도층 안에서는 심각한 내분이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내분은 결국 권력 투쟁으로 비화한다.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누기가 힘든 법, 더욱이 왕권王權이라면 부득불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骨肉相爭으로 가는 경우가 다반사다.

    임신한 상태에서 수천 리 바닷길로 도망갈 정도라면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위중한 상황이 벌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 상황은 적어도 배 속의 아이 때문에 생긴, 또는 아이와 관련된 상황일 것이다. 이때 어미는 본능적으로 아이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곳을 피난처로 택하게 된다. 그곳이 바로 남쪽의 경주 땅이었다. 이곳에는 이미 고조선의 진한 유민들이 6부족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박혁거세의 어미 파소가 부여 황실의 딸인 점, 6부족이 13세의 박혁거세를 만장일치로 왕으로 받든 사실, 하늘의 광명을 상징하는 ‘박’을 성으로 삼았다는 사실 등을 통해 우리는 박혁거세 역시 부여 황실의 혈통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대구 묘골에 정착한 박팽년의 손자
    박팽년 가족이 멸문지화를 당할 때 박팽년의 둘째 며느리였던 성주 이씨 부인이 임신 중이었다. 곧 박팽년의 둘째 아들인 #박순朴珣#의 유복자가 잉태되어 있었던 것이다. 역적 집안의 여인들이 노비로 보내질 때 이씨 부인은 자신의 친정인 묘골의 관할 관청이었던 대구 관아의 관비로 보내졌다. 시간이 흘러 성주 이씨 부인이 친정집에서 해산을 하던 날, 이미 세조의 어명이 내려져 있었다. 그것은 ‘아들이면 죽이고, 딸이면 노비로 만들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늘의 보살핌이 있었던지 이씨 부인이 아들을 낳을 때 친정집 여종은 딸을 낳게 되었다. 서로 자식을 바꿈으로써 비로소 화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박팽년의 손자라는 신분을 감추고 여종의 아들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는 박씨 성을 지닌 천한 노비라는 뜻으로 #박비朴婢#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박비가 17세가 되었을 때(1472년, 성종3) 드디어 그에게 새로운 삶이 열리게 된다. 그의 이모부였던 이극균(광주 이씨)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것이다. 이극균은 당시 묘골에서 숨어 살고 있던 조카에게 더 이상 숨어 살지 말고 자수하기를 권유했다. 왜냐하면 당시는 성종 때로 이미 사육신을 충신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박비는 서울로 올라가 자수를 했다. 성종은 박비의 자수를 받아들였고, 사육신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귀한 혈육이라는 의미에서 #일산一珊#이라고 이름을 고쳐 주었다. 박일산이 24세 되던 해(1479년, 성종10), 자신을 20여 년 키워 준 외가에 후손이 끊기고 말았다. 그런데 외가에는 친손, 외손을 통틀어 후손으로는 박일산이 유일했다. 이러한 연유로 외가 재산을 모두 물려받게 된 그는 그 재산으로 외가 마을인 묘골에 99칸 종택을 지어 정착했다. 이것이 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묘골에 박팽년의 후손인 순천 박씨 충정공파忠正公派가 터를 잡게 된 내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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