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목한 가족이 연주하는 구도의 선율(태전대덕도장 박철수, 조선미 도생)

[가가도장]

한 가족이 동일한 신앙 문화를 공유하며 사는 삶은 일반적으로 복되고 바람직한 가풍으로 여겨진다. 세상 사람들이 저마다 크고 작은 가치와 목표를 가훈처럼 내걸고 살아가지만 기실 그것이 가족 구성원의 삶에 어느 정도의 감화와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가늠하기는 어렵다. 가까운 가족이라도 신념과 판단의 기준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대한의 가치와 문화의 공속 기준을 정하고 이에 동참하고 함께하는 일은 한 가족의 단합과 결속을 넘어 가문 전체의 시너지를 불러일으키는 거대한 동력이 되기도 한다. 신앙의 힘이란 그래서 아름답고 강한 것이다. 하물며 인존 천주님의 대도 진리를 따르는 증산도 신앙이 가족 문화의 중심에 있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 없는 축복이요 기회임은 불문가지다.



이번 호에 소개하는 도방은 우리가 신앙하는 상제님 진리를 가족 간에 공유하며 특유의 훈훈한 가풍 속에 온전히 신앙 문화를 구현하고 있는 본부도장 박철수(남, 42세, 종감), 태전대덕도장 조선미(여, 39세, 교무종감) 부부 도생의 가족 이야기다. 박 도생은 STB상생방송국에서 음향 담당으로 봉직하고 있으며, 조 도생은 태전대덕도장에서 어린이 계층 구역포감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는 건실한 도생들이다. 이들은 슬하에 2남 1녀를 두고 있는데, 아직 유년으로 어린이집에 다니는 막내 박민지(5세)를 제외하고 중학생인 장남 박주현(14세, 도감) 도생과 초등생인 차남 박자현(12세, 도감) 도생은 부모님과 함께 증산도 신앙을 하는 가정도장의 어엿한 일원이다.

지난 9월 둘째 주 금요일 오후 취재진은 대전시 중리동에 소재한 이 부부의 가정도장을 찾아갔다. 아파트 3층 도방에 들어서서 박철수, 조선미 도생 부부와 차남 박자현 도생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고, 장남 박주현 도생과 천진난만한 귀염둥이 막내 박민지 초립동은 아직 귀가 전이라 조금 더 기다렸다가 만날 수 있었다.

안쪽의 방에 조성된 도방은 넓은 편은 아니지만 밝은 햇살이 비치는 쪽에 상제님 어진과 태모님 진영, 그리고 태상종도사님 존영과 종도사님 성용이 좌우로 나란히 모셔져 있고, 오른편에는 조상선령신위가 놓여 있다. 중앙 위쪽에 세로로 걸린 태을주 족자도 눈에 들어온다.

전체적으로 아담하지만 오밀조밀한 가족들의 온기가 느껴지는 도방에서 기본 예를 갖춘 후, 취재진은 다섯 명의 가족과 안방에 마주 앉아 신앙의 시작부터 가족 신앙의 정착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과정을 하나씩 듣고 공감하는 시간을 가졌다. 방 안 곳곳에는 방송국에서 음향 관련 일을 하는 도방 주인의 취향과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어 작은 음악 감상실에 앉아 있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인터뷰 전에 잠시 모차르트의 가극 돈 지오반니Don Giovanni의 선율을 감상하는 시간을 가진 것도 조금은 이례적인 경험이 되었다. 이 가족, 이 부부가 살아가는 신앙의 일상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

신앙을 만나는 여정


풍파가 많았던 어린 시절
박철수 도생은 부산에서 2남 2녀 중 맏이로 출생했다. 어린 시절 개구쟁이로 성장기를 보낸 박 도생에게는 늘 사고나 질병이 따라다녔다. 왼팔에 있는 큰 화상 흉터는 겨울에 핫도그 기름을 퍼붓는 사고로 피부가 벗겨지며 생긴 것이다. 부주의로 인해 지나가는 차에 치이는 등 교통 사고도 두어 번 크게 났었고,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중학교 2학년 땐 1~2주 동안 알 수 없는 열병을 앓으면서 청력에 손상이 왔다. 그리고 자주 체하는 증상으로 고생을 많이 했는데, 그 여파로 밤에 수면을 제대로 취하지 못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학업 성과도 부진해지는 악순환을 낳기도 했다.

박 도생은 어린 시절 자신의 뜻이 아닌 채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고 한다. 자신의 위로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죽은 형이 있었다는데, 영적으로 그 형이 빙의된 듯한 느낌을 가질 때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박 도생이 중학생 시절 부모님은 작은 한식당 문을 열었고 이후 지금까지 27년 동안 꾸준히 가게를 운영해 오고 있다.

서울에서 1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난 조선미 도생도 집에서 식당을 경영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성장기를 무난하게 보낸 조 도생은 작은할아버지가 무속인이셨는데, 대학 졸업 후 조 도생의 결혼 과정이나 막내 민지의 출산 등에 영적으로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세 번의 진리 인연을 거치며
박 도생은 대학을 졸업한 후 직장 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어머니가 운영하시던 식당 일을 도우며 생활했는데, 쉬는 시간에 온라인 채팅을 통해 상제님 진리를 접하고 입도를 했다. 증산도에 입도하기까지 박 도생은 세 번에 걸쳐 상제님 진리를 접하는 과정을 겪었다고 한다. 처음 상제님에 대해 알게 된 건 고등학교 3학년 때 역사 시간 수업을 통해서였다. 당시 역사 선생님이 구한말 때 여러 가지 민란과 동학 농민 봉기 등의 과정을 설명하면서 그 시대의 여러 사건 중에 강증산과 후천개벽사상에 대해 전하신 적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강증산=대철인’이라는 인상적인 표현이 마치 공식과 같이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 기억은 입도하기 전에 박 도생으로 하여금 증산도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두 번째로는 열정적으로 몰입했던 독서 습관에서 비롯되었다. 박 도생은 20세부터 약 8년 동안 부모님이 경영하시는 작은 한식 식당에서 일을 도와드리면서 이리저리 남는 시간이 많아 여러 가지 공부를 다양하게 할 기회가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책을 항상 들고 다닐 정도로 무척 독서를 많이 했다고 하는데, 책방이나 시민도서관 같은 데서 고전과 여러 종류의 책을 많이 빌려 봤고 따로 독립해서 생활하기 전까지 시민도서관에 있는 책을 거의 다 봤을 정도였다. 또한 볼 게 없으면 유료 책방에서 여러 가지 책도 빌려서 읽었고, 만화책이나 신문, 주간지와 사회정치 서적 등등 자신의 사상과 일상생활에 밀접한 글들이라면 마치 복권을 긁듯이 읽어 젖히는 것을 즐겨했다.

그런데 1998년에 당시 군대를 막 제대한 친구의 집에 갔다가 단학 관련 책 세 권이 있는 것을 보았고 그 책을 빌려 보면서 증산상제님의 존재를 두 번째로 접했다고 한다. 그 책의 내용이 맘에 들었던 박 도생은 집 근처에 있던 단학 수행 단체에 수강료를 지블하고 약 6개월 정도 다닌 적도 있었다.

단학에 다닌 것은 자신의 건강 문제와 관련이 있었다. 박 도생은 그 무렵에 매우 심하거나 혹은 간간히 약하게 아픔이 지속되는 증세로 병원을 매우 자주 다녔던 시기였다. 22살 되던 1997년경에는 몇 달 동안 인과관계 없는 병이 생겨서 수개월간 매우 심한 통증을 느껴야 했다. 간담이 아주 서늘할 정도의 고통이 있었고, 마치 저승사자가 멀리서 다가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아팠던 기억이 있었다고 했다. 박 도생은 당시를 되돌아보며 그 원인은 당시 TV 등에서 유행을 타기 시작하던 웰빙wellbeing문화의 영향을 받아 몸에 좋다는 마늘을 지나치게 복용한 결과라고 추정하고 있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결국 병명을 제대로 파악해 낫기는 했지만 건강의 소중함을 깊이 자각하면서 인삼 명약보다 밥이 보약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느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크고 작은 병을 여러 번 앓았던 박 도생은 단지 건강하게 살고 싶다는 마음에 체질에도 맞지 않은 음식이나 약을 과다 복용하는 욕심을 부린 것이 그런 결과를 낳았으며, 이러한 체험을 통하여 “불사약은 밥이요, 불로초는 채소니라.”라는 도전 말씀을 몸으로 깨달았다는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의 진리 인연은 2000년에 새봄이 기지개를 켤 무렵 식당에 자주 오던 손님 중 한 분인 KT전화국 직원이 박 도생에게 하이텔 단말기를 선물해 주면서 시작되었다. 25세가 된 그 해에 온라인 단말기를 통해 진리의 밝은 빛을 발견한 박 도생은 그것이 커다란 행운이요 사건이었다고 말한다. 전화선으로 접속하는 하이텔 단말기를 만난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고, 그 매체를 통해 증산도의 진리 소식을 전해 줄 외부 사람들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이 결국 자신의 운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박 도생은 PC통신 하이텔로 인터넷에 들어가 채팅방에 접속했는데 그 가운데에서 채팅방 이름으로 사용된 “증산상제님은 옥황상제님이시다”라는 문구에 감화를 받아 그 채팅방에 들어가 자신을 도문에 인도해 준 진주상대도장 김상호 도생을 만난 것이다. 박 도생은 스스로 그 방문을 열고 들어가 증산상제님의 위격을 직접 느끼고 인정하고 세례를 받은 그런 느낌이었다고 했다. 그렇게 아버지 하나님의 거룩함을 가슴에 받아들이고 나서 이후 몇 차례 더 채팅을 나눈 후에는 인도자가 직접 부산에 와서 박 도생을 만나 『다이제스트개벽』 책을 전하고 여러 가지 진리 문답을 나누었다고 한다. 『도전道典』도 1회 정독을 했다. 마침내 진리에 대한 확신이 서자 박 도생은 진정한 삶을 위해서는 신앙을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당시 부산부민도장을 방문해서 진리 및 수행 공부를 한 후 진리를 만난 지 1개월 후인 2000년 5월 부산부민도장에서 입도를 했다.

천생연분을 만나다
조 도생은 대학 졸업 후 학원 교사를 하다가 스트레스로 인해 몸이 많이 안 좋아져서 잠시 쉬고 있을 무렵 인터넷 채팅(세이 클럽)을 통해 남편인 박 도생을 알게 되어 결혼에 이르렀다. 박 도생은 부산에서 직장을 다니면서 집에서 운영하는 식당 일도 도우며 부모와 함께 살다가, 직장의 파견 근무가 서울 지역으로 결정되면서 처음으로 분가 독립을 해서 생활하게 되었고, 그런 와중에 인터넷 채팅(세이 클럽)을 통해 친구로 지금의 아내 조 도생을 만난 것이다.

박 도생은 근무지인 서울과 가까운 경기도 안산의 여동생(조 도생의 큰시누이) 집에서 기거하고 있었는데, 조 도생도 같은 안산 지역에서 거주하였고 집도 가까웠기에 두 사람은 자주 만남을 가졌고, 만난 지 두 달 만에 결혼에 이르게 되었다. 조 도생은 두 사람의 결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조상님들께서 뭐가 그리 급하셨는지 만남이 그리 길지 않았는데도 금방 결혼을 했어요. 하지만 빠른 결혼으로 있을 법한 이질감이나 갈등 같은 것은 없었어요. 워낙 둘의 성향이 비슷하고 말이 잘 통하는 편이었거든요. 결혼 후 5년 동안 흔한 부부싸움 한 번 하지 않았어요.”

이쯤 되면 천생연분이라 할 수밖에 없다. 출생 및 성장의 환경을 달리 하며 살아 온 두 사람이 만나 좋은 감정으로 결혼한다고 해도 생활하는 과정에서 의견이나 삶의 방식 등이 달라 대립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한 다툼이 없이 5년이나 지속했다면 그 부부는 성격이나 뜻이 통해 죽이 아주 잘 맞거나 서로가 배려하고 마음을 쓰는 일에 익숙한 사이임을 의미한다. 이렇게 원만한 부부 간의 관계는 조 도생이 신앙으로 인도되고 신심을 유지하는 데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입도로 이어진 수행과 치유 체험
조 도생은 연애 시절 박 도생이 증산도를 신앙한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그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별 관심이 없었다. 결혼 이후에도 박 도생은 아내에게 증산도를 권유하거나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았으며, 조 도생 역시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가 있으니 당신은 알아서 잘 믿고 나한테 강요만 하지 말라”고 했다. 가끔 아무것도 모른 채 남편을 따라 본부 증산도대학교에도 가 보고 부산의 도장에도 가 보긴 했지만 아무 생각이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첫째 주현이를 낳으면서 몸이 너무 안 좋아졌다. 디스크가 생기면서 5분을 걷기가 힘들었고, 손가락 관절들이 아파서 비가 오는 날이면 잠을 못 자고 끙끙 앓곤 했다. 보다 못한 남편 박 도생이 어느 날 조 도생에게 “나를 믿고 딱 한 달만 도장 가서 수행을 하자. 만약 효과가 없으면 다시는 증산도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을게”라고 했다. 반신반의했지만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 소원 못 들어주겠냐며 함께 안산중앙도장을 방문했다.

포정님을 따라 성전으로 가서 사배심고를 하고 30분간 태을주만 읽기로 했다. 생소하기는 했지만 어릴 때부터 장독대에 청수를 모시고 기도하시던 할머니를 보고 자라서인지 크게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효과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주문 수행을 시작한 지 3일째 되던 날 손에 뜨거운 기운이 돌면서 손가락 관절들이 낫는 것을 느꼈고 수행한 지 일주일이 되니 허리의 통증이 줄어들고 디스크가 호전되었다. 그러자 주위의 도생들이 다들 입도를 해야 한다고 했고, 꼭 입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당시 분위기를 타면서 입도 시험 준비를 하고 정성수행을 하다 보니 자신이 어느새 2004년 8월에 입도가 되어 있었다.

입도 공부 과정 중 기억나는 에피소드 하나가 있는데, 포정님이 “하느님이 네 분이시다”라고 했을 때 생소한 의심보다는 자연스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사람도 각자 맡은 역할이 다르듯이 하느님도 각자 맡은 역할이 있으시니 네 분이시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조 도생은 지금 생각해 보면 왜 아무 의심 없이 쉽게 받아들인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고 한다. 결국 그것이 조상님의 음덕 덕분이라 생각하며 감사함을 잊지 않고는 있지만, 한편으로는 약간의 아쉬움이 있기 때문이다. 즉 너무나 쉽게 입도를 하고 진리를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다 보니 포교 시 의심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공감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얘기다.

신앙에 안착하는 구도의 기록들


본부 봉직을 하게 된 계기
조 도생이 결혼 후 입도를 하고 1년 후쯤 첫째 아이를 낳아 키우던 때, 박 도생은 신앙에 좀 더 집중해 보고 싶다는 뜻을 조 도생에게 밝혔다. 조 도생은 함께 신앙을 하는 입장에서 반대할 수가 없었고, 박 도생은 곧바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안산중앙도장에서 무천록 상근포감으로 봉직을 시작했다. 이후 두 부부와 아들 주현이까지 세 식구는 매일 도장으로 출근하여 상가 홍보활동과 지하철역 앞에서 패널활동 등을 하였다. 그렇게 9개월 정도 지나자 생활 자금도 거의 바닥이 났고 박 도생은 다시 직장에 다닐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본부에서 상생방송국을 개국하며 방송국 봉직 지원자를 모집하고 있었는데 포정님께서 방송국 봉직을 추천하셨다. 박 도생은 오랜 세월 오디오 관련 분야에 취미를 갖고 있었고 직장도 수입 오디오 회사에서 근무했기에 오디오 관련 기술이 수준급이었다. 이러한 배경과 특기를 바탕으로 방송국에 지원을 하였고, 다행히 합격을 하여 상생방송국 기술팀 오디오 파트에서 봉직을 하게 되었다.

박 도생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약 11년 전 태전 방송국으로 발령을 받고 내려와 지금에 이르도록 항상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고 회고했다. 그 사이에 자녀 두 명을 더 낳았고 지금은 가족 모두가 신앙으로 뭉쳐 가가도장을 이루고 있으니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며 순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표정을 보고 있노라니 왠지 모를 공감의 전율이 몸속을 향해 파고들어 온다. 이 느낌은 뭘까 하고 잠시 생각하는 사이에 귀염둥이 막내딸 민지가 인터뷰 중인 아빠의 등 뒤를 스쳐 가며 빙긋이 웃음을 보낸다. 부전여전인지, 아빠와 딸은 해맑은 미소 하나까지 어쩌면 그렇게 닮았는지 모르겠다. 이 가정도방이 화목하고 훈훈한 이유가 미처 표현 못할 그런 분위기 때문임을 그제서야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수행과 천도식으로 협심증을 치유하다
입도 전에 건강 문제에 관련된 여러 체험을 했던 박 도생은 입도 후에도 지금까지 두어 차례 건강 위기를 겪었다. 2010년 가을 무렵 약 1주일간 속이 더부룩한 느낌이 들어 단순한 소화 불량으로 생각하고 일반내과에 다녀왔던 박 도생은 어느 날 교육관 태을궁 수행 당직 근무를 하던 중 서서히 맹장(충수염)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5시간 정도 경과하면서부터 증세가 급속하게 진행되어 앰뷸런스에 실려 갔다. 또 한 번은 2년 전에 밤낮으로 과로를 해서 휴식을 못 지킨 탓에 협심증 초기 증세가 발병했다. 약이 없는 병이라 해서 수행을 통해 증세를 누그러뜨렸는데 작년 11월부터 국정 농단으로 탄핵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날 즈음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심장을 찌르는 고통이 또다시 불거졌다. 그래서 금년 초부터 약 100일을 넘게 매일 새벽 3~4시에 일어나서 아침 조깅과 태을궁 수행 2시간을 했고 저녁 수행도 병행했으며 지난 6월 말에는 태전대덕도장에서 조상보은해원천도식까지 봉행했다. 이렇게 정성수행 공부를 하면서 천도식까지 올리고 나니 지금은 협심증 증세가 말끔하게 사라져서 이제는 힘들었던 차량 운전도 괜찮아졌다고 한다. 최근에는 방송 중계차량 운전도 겸직하게 되면서 요 근래에는 대형운전면허를 취득하기 위해 학원에 다니기도 했다. 수행을 통해 협심증을 치유한 박 도생은 건강의 소중함을 더욱 느끼면서 또 어떤 질병이 언제 어떻게 나타날지 모르니 병마를 막기 위해 항상 주문을 읽고 다니고 있다.

태을주는 나 자신의 보호막
박 도생은 태을주 수행 등 주문 수행을 하면 몸 전체를 감싸 주는 듯한 에너지를 느낀다고 한다. 자신의 키보다 좀 더 커다란, 마치 옅은 자색 내지 보라색에 가까운 오라가 아주 좋은 에너지 파장으로 몸 전체를 보호막처럼 감싸고 있는 느낌이라고 설명을 했다. 그래서 운전할 때도 걸을 때도 자전거를 타더라도 항상 사부님이 말씀하신 바대로 주문 MP3를 틀고 다니고, 도생이 아닌 일반 사람들과 만남을 가질 때도 아주 약한 음량으로 MP3를 틀어 놓고 있다. 일반인들이 이게 뭐냐고 물으면 ‘자신의 보호막’이라는 얘기를 곧잘 한다고 한다.

신앙을 배우던 시절
한편 입도를 한 이후 조 도생은 거의 매일 도장에 출근하다시피 했다. 5개월 된 아들을 데리고 도장에 가서 공부를 하고 수행을 했다. 당시 도장에 어린 아기가 주현이밖에 없었기에 여러 도생분들이 정말 예뻐하고 잘 돌봐 주셔서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특히나 포정님께서 바쁜 와중에도 적극적으로 아이를 봐 주시곤 했는데, 그 감사함에 보답하고자 더 열심히 했다고 한다. 도장 도생들은 오래간만에 20대 중반의 젊은 사람이 입도를 했다고 다들 좋아하시며 정말 열심히들 가르쳐 주셨다. 진리뿐 아니라 신앙의 자세나 마음가짐에 대한 교육들이 지금까지 신앙을 하는 데 너무나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남편의 봉직과 대전 이주
남편인 박 도생이 신앙에 전념할 것을 결심하고 도장 상근포감으로 봉직을 하다가 본부 상생방송국으로 발령을 받아 태전에 내려갈 당시 조 도생은 함께 이동할 수 없었다. 당시 안산중앙도장 청포(청소년포교회) 구역을 맡고 있었고 도장에 젊은 일꾼도 없었기에 남편을 따라 대전으로 가지 않고 계속해서 안산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둘째의 임신을 알게 되면서 많은 우여곡절 끝에 두 달 만에 남편이 있는 대전으로 거주를 옮겼다. 조 도생은 남편이 타지에서 힘든 봉직 생활을 홀로 하면 버티지 못할까 봐 함께 의지하라며 보내신 조상님의 뜻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난관을 이기고 신앙의 중심을 잡다
두 도생은 대전에서 월세로 작은 원룸을 얻어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안산에서는 친정어머니와 함께 살았기 때문에 이 부부가 가져온 짐은 옷가지와 화장대 정도였다. 그래서 가전제품들을 중고로 마련했고 가구는 5단 서랍장 2개가 전부였다. 하지만 조 도생은 초기 적응 문제로 크게 힘든 시간을 겪었다고 한다. 입덧으로 힘든 몸과 첫째 아이의 육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타지라는 거주 여건과 열악한 생활 환경, 낯선 도장 분위기와 처음으로 겪는 통장 잔고 부족의 충격 등이 순식간에 신앙에 소홀해지게 만들었다. 그렇게 세 달 가까이 방황 아닌 방황을 겪고 나니 ‘이렇게 무너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예전처럼 매일 도장에는 못 가더라도 치성만이라도 꾸준히 참석해 보자라는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치성에 자주 참석하고 아는 분들이 생기고 하다 보니 다시 신앙의 활력을 조금씩 찾게 되었다. 그러다 둘째 자현이가 태어나면서 한동안 육아로 정신이 없다가 세 살 때 어린이집에 다니게 되면서 조금 여유가 생겨 다시 포교활동을 시작했다. 주로 패널활동을 하였는데 아쉽게도 큰 성과는 없었다.

어린이 계층 포감으로 불태운 신앙 열정
2011년 큰아들 주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대덕도장엔 어포(어린이포교회)와 유아들이 10여 명 이상 있었는데, 관리가 안 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어느 날 포정님과 구역포감님이 집에 찾아와 조 도생에게 어포들을 맡아 달라며 부탁을 했다. 평소 도장에서 아이들 군기 반장 역할을 했었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했던지 “아이들을 조용히만 시켜 주시면 됩니다.”라고 했고 조 도생은 부담이 되었지만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이 계속 방치되는 것이 안타까웠는데, 막상 어포 구역을 맡고 나니 조 도생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많은 고민을 했다. 당시엔 아직 어포에 대한 개념도 없었고 전반적인 인식이 ‘부모 따라 도장에 왔다 갔다 하는 아이들’ 정도였다. 아이들도 당연히 재미없는 도장을 억지로 부모님 손에 끌려다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엔 그 인식을 바꿔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도장 오는 것을 재밌게 느끼도록 만들자’가 처음 목표였다. 아이들과 게임을 하며 놀기 시작했다. 놀기만 하면 안 되니 시작 전에 간단하게 주문을 읽고 놀기로 했고, 그런 뒤에는 차근차근 도장예법, 신앙예법, 각 주문 등을 간단하게 공부한 뒤 노는 방식을 적용했다. 도장은 답답하고 조용히 앉아만 있어야 하는 곳에서 간단한 공부를 마치면 다 같이 흥겹게 놀 수 있다는 생각에 아이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도장에 오기 시작했다. 나중엔 아이들끼리 게임을 하라고 했더니 시키지도 않았는데 게임의 벌칙을 태을주 몇 독 읽기, 운장주 몇 독 읽기 이런 식으로 정해서 했다. 지겹고 싫어하던 수행에 대한 인식도 변화되는 것이 보였다.

요즘은 아이들과 소통을 하면서 스스로 신앙 관리의 주체가 되고 자율성을 기를 수 있게 유도를 하고 아이들도 그 흐름에 호응하면서 한 단계 더 발전하는 수준으로 나아갔는데, 도훈 노트를 스스로 쓰고 다가와 확인을 받게 하거나 5분 성구 외우기 등을 통과하게 되면 자유 시간을 주는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아이들이 조금씩 변해 가면서 조 도생의 신앙도 다시 열정을 찾기 시작했다. 당시엔 어포들의 다수가 입도를 하지 않은 상태여서 어포들을 입도시키기로 했는데, 그 출발은 큰아들 주현이로 시작했다. 입도 공부를 시키며 아이들의 진리 공부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으며 더불어 조 도생 또한 진리 공부를 다시 하게 되었다. 또한 아이들의 수준에 맞게 설명해 주려니 최대한 쉽게 설명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했다고 한다.

아이들을 어느 정도 입도시키고 도장에 적응을 시켰는데, 이번에는 셋째를 임신하게 되었다. 아이들을 오래 방치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마지막 달까지 어포 관리를 하고 셋째를 출산한 뒤 다시 한 달 만에 도장에 복귀했다.

어린이 수행문화를 열다
조 도생은 복귀 후 어포들을 관리하면서 이제는 한 단계 발전을 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다가 정성수행을 시작하기로 했다. 여태껏 어포들이 정성수행을 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던 일이었기에 초반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아이들보다도 부모님들이 오히려 반신반의하는 상황이었다.

한 달에 7일씩 정성수행을 하기로 했다. 아이들이 열심히 나오고 기대할 수 있도록 간식을 다양하고 많이 준비했다. 부모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간식비도 요구하지 않았고 수행이 끝나면 모두 차에 태워 귀가시켰다. 포정님의 적극적인 지지와 매달 간식비로 10만원씩 지원해 주시던 고마운 도생님이 계셔서 꾸준한 정성수행이 이루어질 수 있었고 지금까지 4년째 계속 이어 오고 있다. 처음 7~8명이던 정성 수행의 인원은 현재 어포, 부모, 유아들까지 25명 내외로 늘었다.

정성수행을 시작하면서 아이들은 수행, 도장 참여를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고 도장의 다양한 활동에 어포가 주축이 되어 봉사를 하게 되었다. 천도식이 끝나고 그릇의 물기를 닦고 정리하는 일이나 도장 대청소 등에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게 어포가 되었고 어포에 대한 인식도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조 도생은 항상 이 아이들이 한 명도 낙오되지 않고 증산도의 큰 일꾼으로 자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곤 한다. 더불어 자신이 초립동 아이들을 일꾼으로 길러낼 수 있는 역량을 갖출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도 잊지 않는다고 했다.

가정신앙의 중요성과 깨달음


박 도생의 가족은 금년 6월 17일 직선조해원 보은천도식을 기해서 정성 공부 수행에 집중을 했다. 박 도생은 100일 정성 수행을 태을궁과 지역도장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지속을 했으며, 가족들은 약 50일간의 정성수행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자녀들은 어포 포감인 조 도생과 함께 매월 약 1주 이상 도장과 집에서 정성수행 배례를 하고 있으며, 박 도생은 이를 지원하는 입장에서 어포 수행 기간 동안 같이 수행을 하고 귀갓길에는 어포용 통근 차량을 운행하는 운전기사 및 사진촬영 기사도 겸하고 있다.

조 도생은 어포 포감의 보직 수행을 하면서 가가도장과 가족신앙의 의미가 더욱 크게 다가왔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조 도생의 말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제가 어포 포감이 된 것은 저의 신앙 역사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어포들을 가르치고 커 가는 모습들을 보면서 가족신앙도 변화했습니다. 당장 내 자식들이 어포이고, 어포 포감의 자식들이기에 남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근본신앙에 더 신경을 쓰게 되고 도정 참여도 더 열심히 시키게 되었지요. 가정도장 도방에서 봉청수 수행을 하고 기도와 도공을 하는 기본적인 신앙 훈련이 왜 중요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가가도장의 역할과 중요성을 깊이 깨닫게 되었고 가족신앙이 제대로 자리를 잡게 된 것 같습니다.”

도문에 헌신하는 신앙을 향해


박 도생은 인터뷰 말미에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며 그 과정을 차근차근 다시 정리했다.

“제가 스물 다섯이라는 나이에 증산도에 입도하고, 입도 후에 3년의 시간을 인생 진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한 후에 부모님 가게에서 스스로 홀로서기를 하기로 결심하면서 독립을 했습니다. 빚이 많은 부모님에게 손을 안 벌리고 홀로 빈손으로 독립을 하면서 서울에 가서 직장을 구했고, 그러는 중에 반려자인 아내 조 도생을 만나 결혼 1년 후에 입도를 시켰고, 세 자녀를 낳아서 작게 출발한 가정이 지금은 하나의 가가도장이라고 할 정도로 성장을 했습니다. 어려운 시기에는 봉직하는 삶이 어려운데, 그냥 무조건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다 보니 이 자리 이 순간까지 달려왔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더 열심히 신앙하고 살아야지요. 안 아프기 위해서 태을주를 읽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향후 구체적인 신앙 계획에 대해서 이렇게 덧붙였다.

“앞으로의 신앙 계획은 첫째로 자녀들이 훌륭한 어포 청포 대포로 성장해서 저보다 더 나은 사상 신앙인이 되도록 만드는 것을 최우선 순위로 두고 교육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제 자녀들이 후에 상생방송이나 증산도 본부에서 봉직을 해서 증산도의 존엄과 품격을 높이는 데 헌신하는 신앙인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대내적으로는 방송 중계차량 겸직을 맡은 만큼 봉직을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해 수행하라는 명으로 알고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자기계발을 할 것입니다. 저는 제 아내와 도반이 되어 제 자녀가 잘 성장해서 육임을 몇 번이라도 성공할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또한 저 역시도 매주 만나는 지인들과 친척들을 성심을 다해 잘 수렴하고, 새로 만나는 좋은 대상자들을 잘 가리고 선택 수렴을 해서 입도시키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신앙하겠습니다.”

조 도생은 “앞으로도 어포들이 진정한 소초동 도수의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길잡이가 되고 싶습니다. 더불어 어포들이 진리를 지식으로서가 아닌 감성으로 가슴 깊이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컨텐츠를 개발하는 데 노력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조 도생이 말하는 ‘컨텐츠’는 아이들이 진리를 지식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감동과 감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을 의미하는데, 최근에는 그 일환으로 도전의 진리 내용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미있게 구현하는 ‘그림자 인형극’을 연구 중이라고 한다.

한편 이날 인터뷰에는 박 도생의 두 아들 박주현, 박자현 도생도 함께 참여해 몇 가지 문답을 나누었다. 각각 중학교, 초등학교에 재학 중인 두 도생은 모태신앙인으로서 부모님과 함께 신앙 문화를 배우고 익히며 도문의 미래로 성장하고 있다. 이들은 가족신앙을 하면서 얻는 이점으로 부모님으로부터 신앙의 기본을 배우고 꾸준히 치성이나 활동에 참여하는 등 신앙 관리에 있어서도 많은 도움을 받는다는 점을 들었는데, 도장 참여는 물론이고 가정도방에서도 매일 천신단의 청수를 모시고 49배를 올리는 신앙 문화를 지속하고 있다.

중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인 박주현 도생은 특히 도방에서 많은 배례를 달성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중학교 입학 전에 1만 배의 배례를 목표로 삼고 도전해 매일 300배 정도를 꾸준히 반복해 한 달 만에 1만 배를 채웠고, 입학 후에도 2만 배를 더 달성했다. 배례를 꾸준히 했더니 얼굴에 난 여드름이 많이 완화되었고 일상 생활도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어 화를 잘 내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박주현 도생은 최근 ‘나는 법사다’ 경연대회에 나가서 좋은 체험도 했다. 파워포인트 자료를 준비하는 데 집중하면서 동학과 관련된 수운 대신사와 상제님 얘기를 발표했는데, 처음이라 어수선한 가운데 끝나서 아쉽기는 하지만 앞으로는 팔관법 진리를 좀 더 확실하게 파고들며 공부해서 완벽한 발표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소감을 말했다.

동생 박자현 도생은 작년 어포 수련회 때 도공 수행을 하면서 신기한 영적 체험을 했다고 한다. 하늘에서 내려온 6개의 여의주를 문질렀더니 각기 주문들이 새겨졌고 위로 던지니 용이 받아 물고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그 6마리의 용이 뭉쳐지며 하나의 큰 공이 되었는데 그 공에 한문으로 ‘천지조화天地造化 태을주太乙呪’라 쓰여 있는 것을 보고 나서 수행이 끝났다고 한다.

두 도생은 앞으로의 신앙 계획이나 꿈을 밝히기도 했는데, 박주현 도생은 앞으로 기회가 되면 재정적으로 도문에 기여하는 삶이 되기를 바라며 반드시 훌륭한 증산도 진리 법사로 인정을 받고 싶다고 했고, 박자현 도생은 아버지의 일을 이어서 상생방송 음향 감독이 되고 싶고, 더불어 유명한 사람이 되어서 증산도를 많이 알리고 싶은 마음도 있다고 했다. 이날 인터뷰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니, 신앙에 대한 정성과 의지를 가진 부모님처럼 이들도 신앙 문화를 잘 다지고 성장해서 장차 증산도의 큰 동량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가짐을 깨닫게 한 도공수행 체험
초발심의 힘으로 몰입한 수행
조 도생은 입도 직후 꾸준히 수행을 하다가 포정원 수행을 가기 전에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입도한 해인 2004년 9월에 21일 정성수행을 시작했으며 이때 정말 많은 체험들이 있었다고 했다. 돌이켜 보면 초발심의 힘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하는데, 매일 몇 시간씩 도전을 읽고, 2시간 이상 자시子時 수행을 했었다고 한다.

정성수행 중 포정원 수행에 두 번 참여하게 되었다. 정성수행을 시작한 지 일주일 정도 되었을 때 가게 된 포정원 수행에서는 별로 느낀 게 없어서 ‘내가 너무 부족해서 그렇구나’라는 반성을 하며 더욱 진리 공부와 수행에 매진했다. 또한 수행을 하면서 하는 기도도 너무 자신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되어 좀 더 천하창생들을 많이 살릴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로 바꾸게 되었다.

도공수행도 시작했는데 잘 되지 않았고 감도 못 잡고 있어서 답답해하고 있던 중 두 번째 포정원 수행을 가게 되었다. 정성수행을 한 지 18일째 되던 날이고 첫 번째 포정원 수행을 다녀온 지 10일 만이었다. 포정원 수행 중 고관절이 너무나 아팠지만 참는 것도 수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집중을 하고 있었다. 더 이상 고관절의 통증을 못 참을 것 같았던 그때 손끝이 답답하게 느껴지면서 손을 쫙 펴고 흔들기 시작했다. 그 떨림이 팔로, 팔에서 배 속 깊숙한 곳으로 옮겨 가더니 허리가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허리에서 다리로, 다리에서 다시 위로 올라가 가슴으로, 가슴에서 다시 손으로 옮겨지면서 전신이 들썩거렸다. 천천히 시작했다가 빨라졌다가, 허리가 떨렸다가, 다리가 떨렸다가 팔을 마구 휘저으며 그렇게 한참을 털고 나니 속이 시원해졌다. 그때 ‘어깨가 아프다’는 생각을 하니 어깨가 들썩이다가 뒤로 확 당겨져 세우는 느낌이 들더니 등이 곧게 펴졌다. 마치 누군가 뒤에서 당겨 주는 느낌이었다.

도공을 하며 깨달은 마음의 문제
그렇게 도공을 하다가 어느 순간 숨이 하단전까지 쭉 내려가는 느낌이 들면서 숨 쉬는 것이 너무나 편해졌고 그 기쁨에 웃음이 다 나왔다. 그 후로 4시간의 자발도공이 이루어졌다. 팔이며 몸을 계속 흔드는데 ‘흔드는 게 힘드네’라는 생각이 들면 잠시 멈췄다가 금방 다시 시작되는 것이 반복되었고 ‘어디가 아프다’라는 생각을 하면 자연스럽게 손이 그쪽으로 가서 두드렸다. 나중엔 힘이 들어서 눈을 뜨고 주문 외우기를 멈췄는데도 도공은 멈추지를 않았다. 포정원 수행이 끝나고 속이 따뜻해지고 시원하며 꽉 찬 느낌이 들었는데, 이것은 말이나 글로는 미처 표현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이었다. 처음 해 보는 자발도공, 너무나 오래 지속되는 도공에 두려움도 느꼈다. 뭔가 잘못된 건 아닐까, 혹시 허령이 든 건 아닐까, 자기 최면은 아닐까라는 의심도 했었지만 수행이 끝난 후 그 느낌과 상쾌함은 그런 걱정이 기우였단 걸 알게 해 주었다.

하지만 조 도생이 이 체험에서 느꼈던 것은 도공보다도 마음가짐에 대한 것이었다. 태을주를 외울 때 정말 일심으로 사람들을 살려 달라는 생각으로 외웠고 도공이 시작되었어도 그 흔들림에 연연하지 않고 더욱 집중하여 주문을 외웠다. 내가 지금 수행을 하는 것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마음을 닦기 위해서라는 걸 한시도 잊지 않고 생각하고 다짐하며 수행에 임했다. 당시 그런 도공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신명들께서 그 정성을 갸륵하게 여겨 좋은 체험을 할 수 있도록 기운을 주셨다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이때의 체험으로 조 도생은 수행을 더욱 좋아하고 열심히 하게 되었다.

혈도를 뚫은 주송의 위력
그리고 몇 달 후 또 한 번의 엄청난 체험을 했다. 일요치성 때 수행을 하는데 자꾸 몸이 뒤로 넘어갔다고 한다. 교정님께 말씀을 드리니 아무래도 척신이 뒤에서 당기는 것 같다며 도장의 모든 성도님들이 조 도생을 둘러싸고 운장주를 읽어 주었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나왔다. 운장주 신유가 끝나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몸이 뒤로 넘어가는 게 누군가 당기는 느낌이 아니라 단전에서부터 기운이 치솟아 올라오면서 그것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가는 것이었다. 이 부분을 다시 말씀드리니 그것은 기가 올라와서 그런 것이라 하셨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날은 하루 종일 도장에서 수행을 했다. 하단전에서 치솟아 올라오는 기운을 이기지 못해 결국 성전에서 누운 상태로 수행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배 속에 마치 몸통만한 공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기분이었다. 기가 둥글게 뭉쳐져서 만들어진 공 같은 것이 오르내리며 막힌 혈도들을 뚫는데 막힌 곳에 기의 공이 부딪히면 그 부분이 뚫릴 때까지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명치 부분이 뚫리고 목 부분이 뚫릴 때는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소리가 나왔다. 그것도 평소에는 절대 낼 수 없는 엄청난 고음이 혈도가 뚫릴 때까지 계속 나왔다. 당시 도장이 7층에 있었는데 그 소리를 듣고 여자 비명 소리가 난다며 1층의 경비 아저씨가 올라오는 일도 있었다.

그렇게 전신의 혈도들이 차례차례 뚫리고 머리 쪽으로 올라왔다. 눈과 머리가 터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문득 ‘머리 부분의 혈도가 뚫리면 신명이 보이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고 나니 머리 부분의 혈도가 뚫리지는 않았다. 밤새 온몸의 혈도를 뚫고 아침이 밝았지만 머리 부분은 못 뚫었다. 기氣는 의지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조 도생은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큰 만족과 감사를 느꼈다. 부족한 자신에게 그런 은혜를 내려 주신 것에 대해 정말 감사드렸고 평생 증산도에 몸담고 은혜에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체험 후 몸이 너무나 가볍고 깨끗한 느낌이 들었고 매일 밤 잠을 자려고 누우면 자동으로 팔다리가 떨리면서 탁기를 털어 냈다. 또한 자신의 몸뿐 아니라 타인의 아픈 곳에 자동으로 손이 가는 일도 있었다고 하는데, 타인과 접촉을 하면 탁기가 빨려 들어와서 일상생활을 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수행 체험은 지금의 나를 만든 원동력
다소 요란스럽고 민망하기도 했던 도공 체험 과정을 겪으면서 조 도생은 자신이 느낀 감회를 이렇게 표현했다.
“지금이야 도공 체험을 많이 공유하고 다양한 체험 사례들이 많아서 이런 체험도 쉽게 얘기하지만, 당시엔 어디 물어볼 곳도 없고, 그게 정상인 건지 아닌 건지도 알 수 없어서 참 답답하고 걱정도 되고 그랬습니다. 하지만 진리의 성소인 도장에서 크고 바른 기운을 받았기에 잘 감당할 수 있었고, 그때 깨달은 마음가짐에 대한 거나 도장 도생분들의 진심어린 도움 등을 떠올려 보면 이러한 체험들이 지금의 저를 있게 해 준 원동력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항상 감사한 마음입니다.”




이번 호 가가도장은 스스로의 신앙 체험과 구도의 열정을 바탕으로 상제님 진리를 만나 진득하고 꾸준한 마음 자세로 신앙을 이어 오고 있는 박철수, 조선미 부부 도생의 도방 이야기를 만나 보았다.

이들이 꾸려가는 가정도방은 부부 도생의 꾸준한 신앙 열정과 노력들이 수수한 여백에 그려진 수채화처럼 짙게 배어 있는 곳이다. 이들은 신앙을 위해 그저 열심히 살아왔다고 말하지만, 그 속에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각성하며 끊임없이 새로워지려고 애쓰는 의지와 자취가 반영되어 있다.

그간 신앙을 해 오면서 겪은 어려움들을 각기 진리와 수행 체험을 바탕으로 극복하면서 그 과정 자체를 신앙의 축복이요 은혜로 여기는 부부의 의식도 그렇고, 어려운 난관에 직면했을 때 격려와 배려의 손길을 내민 도생분들에 대한 감사함을 깊이 간직하고 있는 그 마음을 우리는 ‘심법’이라는 이름으로 확인해 볼 수 있다.

이 도방은 특히 가족신앙의 틀이 잘 형성되어 있으며 청소년과 어린이 계층인 두 아들의 신앙이 굳건히 설 수 있도록 두 부부가 음양으로 지원하고 관리하고 있는 점은 가정도방의 바람직한 사례로 공유되어도 좋을 내용이다.
이 가정도방이 형식적이거나 고식적이지 않은 효율적 신앙관리가 되고 있다는 점은 초립동 두 아들의 신앙 활동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인터뷰 말미에 박주현, 박자현 도생이 언급한 도방 신앙의 일상과 신앙을 바라보는 생각들은 결코 우연히 형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불어 조선미 도생이 도장 어포 구역을 맡아 신앙문화를 크게 개선 발전시킨 점도 반드시 공유하고 배워야 할 도정 운영의 노하우라는 점을 이 기회를 빌어 강조하고자 한다.

또한 소탈하고 정성스러운 부모의 신앙 형태가 자식의 신앙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쳐 똑같이 전이되고 닮아 간다는 점도 취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는데, 도문에서 가족 단위의 신앙을 하고 있는 여러 도방에서도 가정신앙의 형식과 내용 모두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이제 이 도방 가족이 소망하는 바와 같이 보다 나은 신앙인으로 성숙을 거듭해 증산도의 존엄과 품격을 높이는 데 헌신하는 도생들이 될 수 있기를 성원하며, 지금처럼 한결같은 정성과 의지로 전진하여 신앙의 결실을 거둘 수 있기를 상제님과 태모님, 그리고 조상선령신과 천지성신께 삼가 기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