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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산책]

    서양철학사상 | 오늘날의 철학 2_20세기에 대두한 서양철학

    문계석 / 상생문화연구소 (서양철학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19세기와는 다른 철학적 사유가 등장한다. 그것은 정신적인 영역이나 철학적 분야에서 예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의 사유가 부가되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것은 당시 유럽의 지성인들을 사로잡은 인간성 상실과 삶의 위기의식이었다.

    인간성 상실의 직접적인 요인은 기술문명의 발달과 산업화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시의 지성인들은 인간이 거대한 기계문명의 조직 속에서 마치 개성이 없는 기계의 부품과 같이 되어 비인간화로 전락되어 가고, 또한 자기상실의 소외현상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즉 당시 인간의 존재는 조직 속의 일원으로서 기능하는 한낱 단위에 불과했으며, 누구나 같은 시간에 같은 방송을 들으며 같은 신문을 읽는 평준화로 전락했던 것이다.

    삶에 대한 위기의식의 주요 요인은 과학기술 문명으로 인한 생명파괴의 잔악성을 꼽을 수 있다. 유럽인들은 과학기술 문명의 발전이 인류에게 지복한 세상을 제공하리라고 기대했지만, 유럽을 중심으로 일어난 제1차 대전(1914~1918)과 세계적으로 일어난 제2차 대전(1939~1945)의 참사를 겪으면서 낙관적인 기대가 무참하게 무너졌음을 실감하게 됐다. 이러한 위기의식은 인간의 존속마저도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는 시대의식으로 유럽의 지성인들을 몰아갔던 것이다.

    당시 지성인들은 인간의 자기성찰을 중심으로 사유의 방향을 잡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전통으로 내려온 철학적 사유와 전적으로 단절되어 있다는 것은 아니다. 19세기 철학의 연장선상에 있는 사유도 있고, 오래된 철학적 전통의 사유를 기저에 깔고서 좀 더 진보한 사상으로 탈바꿈하여 등장한 철학도 있다.

    20세기는 위대한 철학자들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철학적 사유가 다양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사조의 특징을 꼽아본다면, 삶의 철학, 실존철학, 현상학, 변종존재론, 분석철학, 사회철학, 관념실재론적 형이상학 등을 거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존철학은 19세기에 태동하여 좀 더 새롭게 다듬어진 것이고, 삶의 철학과 분석철학은 새롭게 등장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현상학, 변종존재론, 사회철학, 관념실재론적 형이상학은 전통적인 학설의 연장선이거나 이를 바탕으로 하여 새롭게 다듬어진 철학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 삶의 철학(Life Philosophy)


    19세기부터 20세기 초엽까지만 해도 유럽철학의 사조는 특권층만이 향유하는 귀족적인 철학, 대학에서만 통용되는 강단철학이 지배하고 있었다. 강단철학은 주로 철학자들의 사유 안에서만 숨 쉬고 있었지 대중들의 사유 속으로 파고들어 그들의 정신을 일깨우지를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중엽으로 접어들면서 현실을 살아가는 대중들은 삶[生]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쏟기 시작했고, 이에 부응하여 삶의 철학이 대중매체를 통해 유럽 전역으로 퍼져 크게 유행하기에 이른다.

    삶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분명 인간의 삶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대중들 각자의 삶이 다르듯이 삶의 방식은 수많은 형태로 존재한다. 그러하기에 삶에 대해 사유하는 글은 출원되면 될수록 철학자의 관심에 따라 다양해지고 방만해지기 마련이다. 이 시대가 그랬다. 따라서 당시에 부흥한 삶의 철학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삶의 철학에 대해 윤곽을 그릴 수 있는 대안이 있다. 그것은 전통적인 사조와 대비해 보는 것이다. 전통적인 철학적 사유는 대체로 수학적이고 합리성을 주로 하는 이성적인 사고가 주류를 이루었고, 전체적으로 도식화되어 있는 사고를 하였으며, 표면적이고 정적인 존재에 대한 탐구였고, 기계론적인 세계관을 중심으로 사유했다. 반면에 새롭게 등장한 삶의 철학은 개별적이고 비합리적인 사유가 주류를 이루었고, 일회적이고 체험적인 사고를 하였으며, 내면적이고 영혼적인 존재에 대한 탐구였고, 역동적이고 돌발적인 사고가 그 중심을 이룬다.

    삶의 철학에 대한 공통적인 특징을 요약해 보면 몇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삶의 철학은 현실주의 입장을 표방하고 있다. 운동, 생성, 발전이란 어떤 규칙적이고 고정화된 원리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보지 않는다는 얘기다. 둘째, 현실을 유기적인 존재로 보고 있기 때문에, 대체로 살아 있는 생명체에서 문제의 실마리를 찾는다. 셋째, 철학적 사유가 비합리적이어서 고정화된 개념이나 논리적 법칙 혹은 선천적 형식을 불변의 진리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이와는 반대적인 의미에서 사물에 대한 직관과 감성적 통찰, 관조와 이해, 직접척인 체험 등을 중요하게 여긴다. 넷째, 삶의 철학자는 대부분 다원적인 입장이다. 즉 하나의 근본원리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대치大峙되는 여러 원리들을 받아들이거나 그 이상의 원리들을 가정하는 입장이다.

    삶의 철학자로는 생의 약동을 주장한 프랑스 출신의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1859~1941)과 우주적인 삶으로 파악한 모리스 블롱델Maurice Blondel(1861~1949), 해석학의 선구자라 불리는 독일 출신의 빌헬름 딜타이Wilhelm Dilthey(1833~1911), 서구의 몰락을 예견한 오스발트 슈펭글러Oswald Spengler(1880~1936)를 대표적으로 거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베르그송은 프랑스 출신의 위대한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사유는 현상적인 물질에 근거하는 유물론적인 사유나 기계론적이며 결정론적인 사유를 반대하는 삶의 철학이다. 그는 존재를 “삶의 약동(élan vital)”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철학적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는 먼저 실증주의나 현상주의 철학을 비판한다. 오직 텅 빈 공간과 물질적인 연장을 바탕으로 해서 드러나는 외부적인 것, 즉 사물의 표면적인 현상만을 탐구하게 된다면, 인간의 생명과 내면에서 비롯되는 의식생활, 자유와 자발성 등이 본래의 빛을 찾지 못하고 어둠 속으로 사장되어 버린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전통적인 철학의 의미에서 볼 때 공간은 한결같이 동질적이다. 동질적인 무한한 공간 안에서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존재는 정적이고, 비연속성이며, 전체적으로 도식적이 된다. 마치 원자들의 인과적 운동과 기계적인 필연성만이 되풀이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시간을 통해서 주어지는 개별적인 삶의 내적인 존재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다. 즉 삶에는 내면적인 의식의 흐름에 따른 시간이 있고, 의식의 흐름은 절대로 되풀이될 수 없기 때문에 내면적인 시간 또한 언제나 이질적으로 지속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살아 있는 것들에게서의 시간은 자유를 내포하고 있고,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창의적인 발전이 있을 뿐이다.

    『의식에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에 대한 시론(Essai sur les données immédiates de la conscience)』이라는 유명한 저서에서 베르그송은 ‘진정한 시간이란 인간의 시간이고, 인간의 시간이란 지속(durée)’이라고 하여 삶의 철학을 전개한다.

    ‘지속’이란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가? 베르그송에 의하면, 시간의 흐름 속에 있는 모든 존재는 되풀이될 수 없는 일회적인 것, 상대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삶 또한 계속적인 흐름 속에 있고, 흐름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란 이미 있는 것과 함께 규정되어 새롭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일회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기체는 살아 움직이면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말하는 ‘지속’이다.

    우리의 이성은 도식적이며 언제나 개념화하여 고착화시킨다. 그러나 현실적인 삶은 사건의 시간적인 흐름 속에 감정이 이입移入되어 유동적으로 지속한다. 이렇게 되면 현실적인 삶은 고착화된 보편적인 개념의 옷을 입지 않고 오직 유동적인 실재에 대한 직관(intuition)으로만 드러나게 마련이다. 직관이란 관조적인 입장에서 인식행위에만 주력하는 지적인 것이다. 이것이 체험體驗이고, 체험을 통해 우리는 삶의 지속을 올바르게 파악하게 된다. 철학은 삶에 이러한 직관을 부여하기 때문에, 도식화된 표면을 꿰뚫고 나아가 내적이고 일회적인 삶의 지속으로 다가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보편적인 인과의 사슬을 벗어던지고 일회성과 자유를 되찾으려한다. 왜냐하면 직관으로서의 의식은 곧 자유요 창의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는 “모든 존재는 의식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의식은 이성적인 것으로 이해된 것이 아니라 바로 삶과 체험, 충동, 지속, 자유, 창의적인 에너지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의 근원을 이루는 것은 생성과 행위와 행동이고, 우리는 세계를 채우고 있는 물질과 삶의 모든 것 안에서 창조하는 힘들을 느끼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삶의 약동(élan vital)”이라는 것이다. 삶의 약동이야말로 존재의 핵이요 삶의 정수精髓이다.

    삶의 약동은 자유롭게 흘러간다. 삶의 약동은 기계론적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으로 흘러가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또한 삶은 비약飛躍이고 언제나 새로운 것을 낳는다. 따라서 삶이 창조적으로 발전하는 곳에서는 삶이 만들어 내는 자유와 활동과 약동躍動(Elan)만이 있을 뿐이다. 반면에 삶이 창조적으로 발전하지 못하는 곳에는 언제나 퇴락만이 있을 뿐이다. 미래의 보다 높은 발전을 위한 시작과 근원 또한 기계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약동에서 나오는 것이다.

    세계 전체를 조망해 보자면, 삶은 하나의 중심으로부터 뻗어나가는 파도처럼 생각되는 전진이다. 삶은 충동이요, 그 충동은 자유롭게 흘러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베르그송은 삶의 의식이 인간에게서만 그 운동을 계속하여 전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식물의 경우는 모호한 의식과 물질의 세계를 겸하고 있어서 경직성이 있고, 동물의 경우는 많은 움직임과 의식이 있으나 종種과 환경의 습성에 얽매여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삶의 의식은 자유롭고 무한히 자발적이고, 인간의 입지를 드높이게 마련이다. 이러한 의식은 인간에게 무한한 지평이 열려 있는 것을 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를 바탕으로 해서 베르그송은 다윈Charles Darwin(1809~1882)의 진화론을 뒤집고 바로 #“창조적 진화”#의 문제로 나아간다.


    “하나는 시작이나 무에서 비롯된 하나요(一始無始一), 하나가 삼극으로 나뉜다 하더라도 근본은 다함이 없느니라(析三極無盡本) … 하나가 오묘하게 뻗어 나가 우주만유가 오고 가고(一玅衍 萬徃萬來), 작용이 부동의 근본으로 변화하나니라(用變不動本). 그 근본은 밝고 밝은 태양에 바탕을 둔 마음이니(本心本太陽昻明), 사람이 천지 가운데 태일이 된 하나(人中天地一)이니라. 하나는 끝이로되 무에서 마무리 된 하나이다(一終無終一)”

    -「天符經」

    블롱델은 베르그송이 말한 ‘순수지속’과 ‘창조적 진화’에 반대하고, 삶의 근원을 밝히는 쪽으로 사유하기에 이른다. 그의 삶의 철학은 우선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그러한 ‘행위’는 급진적인 삶의 철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충동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행위’는 맹목적인 것도 아니고, 순수한 의지도 아니고, 이성에 대해 항거하는 그런 것도 아니고, 단지 ‘정신적인 삶’이라 할 수 있다.

    블롱델에 의하면 인식은 행위의 한 부분이요, 사고의 진보는 행위의 진보를 제약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여기에서 행위는 보다 포괄적인 것이고, 합리적인 사고는 이것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규정된다. 문제는 그 행위의 진보를 제약하는 사고의 정체가 무엇인가이다. 사고는 근원의 존재도 아니다. 사고는 단순히 힘이며 정신적인 삶의 동력 안에서 무엇을 밀어내고 끌어들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서 블롱델은 사고의 근원이 바로 정신적인 삶의 전체요 모든 부분들에 앞서서 ‘밀고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삶의 철학은 사고의 근원을 탐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입장이다.

    사고의 근원이 되는 ‘밀고 나아간다’는 뜻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행위’ 속에 나타나는 그런躍動 밀고 나아감이다. 이 말은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중세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의도했던 의미와 유사할 것이다. 즉 플라톤의 철학에서 ‘모든 것이 이데아를 닮으려고 노력한다’고 했을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질료가 형상을 실현하기 위해 형상을 그리워한다.’고 했을 때, 아우구스티누스가 ‘최고의 진리요 모든 형상들 중의 형상인으로 신神에게로 나아가려는 본성적인 욕구’라고 했을 때, 그런 의미의 밀고 나아감이라고 보면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밀고 나감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그것은 근원이요 완성이라는 “하나”를 향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주세계는 하나다. 하나의 통일된 틀은 우주세계 전체를 한 덩어리로 묶어 놓고 있다. 이 틀은 결국 우주세계를 이루는 여러 형상들의 형상[神]에 뿌리내리고 있는 질서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우주세계는 고정적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되어 감에 따라 완성의 진리는 역사 안에서 점진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생각들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완성에 대한 동경이고, 완성은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을 부여한 신(神)의 사상이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의 주체는 우주적인 존재에 뿌리내리고 있다. 인간의 행위가 자연으로부터 벗어나 생명으로 나아가고, 생명으로부터 밀고 나가 정신으로, 정신으로부터 신(神)으로 밀고 나아가려고 노력한다. 즉 정신은 자기 밑에 있는 불분명하고 혼란된 여러 단계를 벗어나 광명의 빛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한다. 따라서 행위의 철학적 과제는 정신과 가치 질서의 원천을 자연 안에서 밝히는 것이고, 타당한 질서라 불리는 행위와 사고의 관계, 즉 행위에는 사고가, 사고에는 행위가 내재해 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딜타이는 베르그송처럼 “지속持續”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일회적인 삶의 문제를 다루거나 블롱델처럼 이를 우주적인 넓은 의미에까지 확장하여 파악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현실적인 삶에만 한정하여 그 자체로부터 이해하려고 한다. 딜타이는 삶이란 현실적인 삶 자체의 재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삶이란 무엇인가. 삶의 과정은 시간에 따른 순간순간의 흐름일 것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현실적인 모든 것은 반복되지 않고 일회적으로 지나가 버린다. 현실적인 삶은 그러한 끊임없는 운동과 변화로 이루어지게 마련인 셈이다. 이러한 일회적인 삶의 문제를 우리는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논리적인 지성에 의거해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일까?

    딜타이에 있어서 현실적인 삶은 전체와 부분이 서로 내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그런 것이다. 전체 없이 부분은 없고, 부분 없이 전체는 없다는 논리가 현실적인 삶에 적용이 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전체를 이루는 부분적인 삶은 일회적으로 주어진, 늘 새롭게 체험하게 되는 삶이다. 이러한 체험적인 삶의 바탕에는 실제로 무엇이 깔려 있는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해서 현실적인 삶에는 새로운 체험에 스며들어 개별적인 특징을 이루는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의식상태(Bewußtseinsstand)이다. 그래서 딜타이는 삶의 체험과 이해를 전개해감에 있어서 먼저 인간의 심리적 구조(Struktur)의 분석으로 눈을 돌린다.

    인간의 의식상태는 두 측면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의식의 횡적구조橫的構造인데, 내가 지금 이 순간에 어떤 생각의 내용을 체험하는가 하는 체험 내용을 받아들이는 의식상태이다. 다른 하나는 의식의 종적구조縱的構造인데, 내가 나의 미래를 어떻게 받아들여 체험하는가(나는 이를 바탕으로 해서 장차 행위하게 된다) 하는 총체적인 바탕으로서의 의식상태이다. 이 의식의 상태도 일정한 의지의 태도 또는 특별한 감정의 상태로서 체험된다. 이러한 의식의 구조를 통찰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삶을 심리적(영혼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한 심리적(영혼적)인 이해는 지성의 힘으로는 부족하고 심성心性이 송두리째 투입된 체험에서 체득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인간 삶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방법은 삶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역사적 현실에 대한 자기성찰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삶에 대한 이해는 바로 삶에서 삶에로의 운동이고, 삶의 과정은 곧 역사적 현실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삶은 자신 속에 있는 모든 심정적 힘의 협동과 그 연관에 의거해서 삶에서[정신과학의 역사] 삶에로의 운동이고, 이를 통해 이해된다는 얘기다. 우리는 이러한 이해 방식을 토대로 하여 통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된다. 딜타이의 해석학(Hermeneutik)은 바로 이러한 정신과학과 특히 인간의 자기성찰이 요구되는 역사의 영역에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고 본다.

    이러한 정신과학의 역사에서 심리적 구조에 적합한 것은 정신사적인 유형(Typus)이다. 유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삶 자체의 형식이다. 인간의 삶이란 이러한 형식(유형)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자연주의, 주관적 관념론, 객관적 관념론 등의 여러 유형이 있는데, 정신사의 여러 현상은 이러한 유형들에 적용하여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유형들은 개별적인 삶의 과정을 꿰뚫고 있고, 개별적인 정신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기 때문이다.

    딜타이는 정신의 역사를 통하여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간파하려고 했으나 결국 개별적인 유형들과 다양한 입장들만 발견해 내는 데에 그쳤다. 그는 이런 다양한 개별적인 유형들에서 정신적인 삶의 풍부함을 드러냈으나 포괄적이고 전체적인 뜻을 밝혀내지는 못했던 것이다. 요컨대 헤겔은 전체적이고 포괄적인 하나의 절대자를 드러냈으나 딜타이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상대주의적 입장만을 드러냈을 뿐이다.

    그러므로 딜타이는 ‘이해’와 ‘유형’에 관한 연구를 수행함으로써 정신과학적 방법이라는 큰 성과를 거둔 것으로 밝혀졌으나 상대주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전형적인 역사주의자로 머물고 말았다. 다시 말해서 존재하는 것은 삶이고, 삶이란 오직 시간에 따라서 흘러가는 일회적인 것이고, 언제나 새로운 개별적인 것을 창조해 낸다는 것이 딜타이의 입장이다. 이는 삶이란 보편적이고 구속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를 더해주는 그런 것을 만들어 내고 있음을 의미할 뿐이다.


    “나는 생장염장(生長斂藏) 사의(四義)를 쓰나니 이것이 곧 무위이화(無爲以化)니라. 해와 달이 나의 명(命)을 받들어 운행하나니 하늘이 이치(理致)를 벗어나면 아무것도 있을 수 없느니라. 천지개벽(天地開闢)도 음양이 사시(四時)로 순환하는 이치를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니 천지의 모든 이치가 역(易)에 들어 있느니라.”

    -『도전道典』2:20:1~5

    슈펭글러는 2차 세계대전 후에 지은 『서구의 몰락(Untergang des Abendlandes)』으로 유명세를 탔던 인물이다. 이 책에 의하면 역사는 삶의 현상이다. 삶의 현상은 다른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전형적인 형식을 갖고 있다. 그러한 전형적인 형식은 식물의 생장과정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요컨대 봄철에 씨앗을 심으면 싹이 터서 잎들과 가지들이 돋아나고, 여름철이 되면 무성하게 성장하고 꽃이 피며, 가을철이 되면 꽃이 지고 열매가 무르익으며 잎이 떨어지고, 겨울철이 되면 열매를 저장하고 휴식으로 들어가 다음 해를 준비한다. 식물의 경우에서 생명의 현상은 생장염장生長斂藏이라는 순환 과정으로 진행되고 있다.

    식물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도 그렇게 진행된다고 본 것이 슈펭글러의 입장이다. 요컨대 삶의 현상은 어떤 일정한 형식에 따라 진행될 것이고, 이 형식들은 서로 비교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같은 과정으로 진행되는 순환 법칙이 발견될 수 있다. 순환 법칙은 인간의 생명이 탄생하면[生] 유아기를 거쳐 청년으로 성장하고[長], 청년기의 정점에 이르면 최고의 상태를 유지하는 장년이 되고[斂], 그 이후에는 반드시 쇠퇴의 길로 접어 노년에 이른다[藏].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생명체는 이런 순환 형식에 따라 진행되기 때문에, 지나간 것을 바탕으로 해서 다가올 것에 대한 예언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슈펭글러의 입장인 셈이다.

    이런 생물학적인 태도는 삶의 역사 현상이나 문화 현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슈펭글러는 문화라는 것도 살아있는 유기체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집트 문화, 그리스의 문화, 로마의 문화, 이슬람 문화, 기독교의 문화 등이 그 예이다. 요컨대 맨 처음에 종교와 신화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화가 탄생하게 되면, 탄생한 문화에 대한 정신적 각성이 일어남으로써 개혁이 되고, 계몽주의 시대와 같은 문화의 성숙 단계에 이른 다음에는 정신적인 창조성 고갈의 단계에 이르러 쇠퇴하는 주기를 반드시 거친다는 것이다.

    슈펭글러는 새롭게 탄생하고 성장하여 전성기를 지나 몰락해 버린 문화에다 오늘날의 서구 문화를 적용함으로써 ‘서구의 몰락’을 예언한다. 그것은 그가 몰락한 문화에서 볼 수 있었던 몰락현상(Verfallserscheinung)이 서구 문화에 이미 나타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몰락현상으로 그는 합리주의와 기술의 우위를 들고 있다. 몰락한 문화에서 최후에 오는 것은 기술이기 때문이다. 그는 서구의 문화가 지금 반성과 물질적 안락의 단계에 접어들었고, 민주주의, 세계시민주의, 휴머니즘사상, 평화주의, 인권과 동포애 등이 새롭게 생겨남으로써 미래에 돌이킬 수 없는 서구의 몰락을 촉진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슈펭글러가 밝히는 삶의 철학은 오직 ‘흐르는 삶’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는 헤겔의 철학에서처럼 하나의 절대자 안에서 모두 지양되는 삶도 아니고, 마르크스의 철학에서처럼 모든 사회적 · 역사적인 삶이 오직 하나의 유물변증법에 예속되는 것도 아니다. 슈펭글러의 삶의 철학은 근본적으로 생물학적인 태도에 바탕을 두고서 역사의 과정을 추진해 나가는 원동력이다. 이러한 삶은 헤겔이 말한 절대적인 ‘이념’도 아니고, 베르그송이 말한 ‘삶의 약동’ 또한 아니고, 오직 생물학적인 생명력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삶의 역사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따지는 문제도 아니고, 영원한 진리의 발견도 아니라는 것이 슈펭글러의 생각이다. 왜냐하면 제3세계의 역사와 문화는 항상 보다 더 강하고, 보다 풍족하고, 보다 더 자신 있는 삶에게 권리를 부여해 왔기 때문이다. 이때의 권리는 생존의 권리이다. 제3세계의 역사와 문화는 생존을 위해 진리와 정의를 권력과 종족의 희생양으로 삼았던 것이다. 따라서 삶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원초적인 삶이며, 언제나 종족과 권력을 지향하는 의지의 개진凱陣뿐이다.

    2) 실존철학(Existential Philosophy)


    “실존(實存, Existence)”이란 말은 어원적으로 라틴어의 “existentia”에서 유래한다. 이는 원래 ‘밖이란 뜻’을 가진 ‘ex’와 ‘나타나다’란 뜻을 가진 ‘sistere’의 합성어로 ‘밖에 나와 있는 것’, ‘밖으로 나타나 있는 구체적인 현실적 존재’를 뜻한다. 이러한 구체적인 현실적 존재는 유한하며,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게 되는, 항상 변화의 도정에 있다. 이러한 현실적 존재와 대립하여 있는 말은 바로 “본질(essentia)” 개념이다. ‘본질’이란 개개의 구체적인 사물에 앞서서 영원히 존재함을 뜻한다. 왜냐하면 본질이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존철학은 인간의 존재성격만을 “실존”으로 규정하고, 인간의 실존을 중심으로 사상을 전개한 학문을 일컫는다. 이러한 실존철학은 전통적으로 사유를 지배해 온 합리주의(이성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출현하지만, 결국 불안과 허무에 허덕이는 인간을 위한 사상으로 귀착한다. 이러한 실존철학은 19세기에 “신 앞에 선 단독자”를 제창한 유신론적 실존철학자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무신론적 실존철학자 니체Nietzsche에 의해 형성이 되어 유럽의 지성들을 사로잡은 바 있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와 인간의 실존을 강조하는 철학이 새롭게 정리되어 다시 한 번 유럽의 지성사를 장식하게 된다. 실존철학은 왜 반복해서 또다시 등장하게 됐던 것일까? 그것은 당시 유럽인들이 처해 있던 상황이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불안한 상황은 인간성 상실과 삶의 위기 의식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성 상실과 위기 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유럽인들은 대중 속에 매몰되어 있는 자기 존재에 대한 눈을 뜨게 되고, 자기 존재의 존엄성에 대한 각성이 일어나면서 인간의 진정한 본질과 구조를 밝혀 보고자 출현하게 된 것이 실존철학인 것이다.

    실존철학은 몇 가지 공통적인 특성이 있다. 첫째, 실존이란 인간에게만 있는 특수한 존재 양식을 뜻한다는 의미에서 언제나 ‘인간의 실존’을 지칭한다. 여기에는 동양의 유가儒家에서 말하는 ‘인본주의人本主義’ 사상이 깔려 있다. 둘째, 실존은 개별적인 인간의 고유한 존재 양식이므로 ‘개인의 실존’을 말한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실존철학은 지극히 ‘주관주의’라 볼 수 있다. 셋째, 실존철학은 주관적이라 하더라도 개인 중심적이 아니라 ‘상호주관적相互主觀的’인 측면을 다룬다. 왜냐하면 인간은 구체적인 상황에서 언제나 타자他者와 함께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넷째, 실존철학은 사물을 기준으로 인간의 실존을 다루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물은 이미 확정된 성질로 고정되어 있지만, 인간의 존재는 자기 자신의 본성을 이룩하기 위해 그때그때마다 새롭게 부단히 노력을 기울이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실존철학은 역동적(力動的)이다. 왜냐하면 실존이란 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그 본질에 있어서 시간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섯째, 실존철학은 구체적인 ‘체험體驗’을 중시한다. 왜냐하면 실존철학자들은 ‘실존적 체험’을 자신의 철학적 동기로 삼기 때문이다. 실존적 체험으로 거론되는 것은 죽음, 고뇌, 투쟁, 한계상황, 혐오감 등이다.

    이러한 문제 의식에서 출범하는 20세기의 실존사상은 실존문학, 실존예술, 실존철학 등 여러 분야에서 전개된다. 실존철학의 분야에도 많은 인물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특징적으로 두 철학자를 꼽아 볼 수 있는데, 키에르케고르의 유신론적 실존철학의 연장선상에서 ‘영원한 현존’을 말한 칼 야스퍼스Karl Jaspers(1883~1969)와 니체의 무신론적 실존철학의 선상에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한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1905~1980)가 대표적이다.


    “중众은 선악善惡과 청탁淸濁과 후박厚薄이 상잡相雜하야 종경도임주從境途任走하야 타생장소병몰墮生長消病歿의 고苦하고 철哲은 지감止感하며 조식調息하며 금촉禁觸하야 일의화행一意化行하고 개망즉진改妄卽眞하야 발대신기發大神機하나니 성통공완性通功完이 시是니라.” -『桓檀古記』 「蘇塗經典本訓」


    독일의 철학자 야스퍼스는 1960년대 초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다. 방문 기간 중에 그는 교토에 있는 일본의 국보 제1호인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을 친견하고서 “이것은 지상의 모든 시간적인 것, 속박을 넘어 달관한 인간 존재의 가장 정화된, 가장 원만한, 가장 영원한 모습의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불상은 우리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마음의 영원한 평화와 이상을 실로 아낌없이 표현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라고 하여 최고의 찬사를 보낸 바 있다. 야스퍼스는 그 불상에서 무엇을 보았기에 극찬을 아끼지 않았을까? 그것은 불상이 바로 인간 실존(Existenz)의 최고 경지를 조금의 미혹도 없이 완벽하게 표현해 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33년에 독일의 나치Nazi 정권이 들어서기까지 독일에는 야스퍼스를 중심으로 하는 실존철학이 풍미를 이룬 바 있다. 야스퍼스의 실존철학이 인기가 있었던 까닭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가 말하는 인간의 진정한 실존은 현존재(Dasein)의 인간이 참다운 자아로 돌아가 일체一切의 존재 양식을 초월超越하여“포괄자(Das Umgreifende)”에 다다름으로 규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초월성이란 말은 비대상적非對象的으로 완전히 은폐되어 있어서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오직 실존자의 경지에 다다른 경우에만 상징적인 시사示唆를 통해서 그 의미가 드러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포괄자”란 무엇을 뜻하는가? 포괄자는 존재의 모든 대상을 안에 포괄하는 무한한 지평地坪 쯤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우리가 사유를 통해 그런 무한한 지평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해도 넘을 수 없는, 언제나 새삼스럽게 우리를 그 안에 가두어 놓고 우리 앞에 나타나는 절대적 존재가 포괄자의 의미란 얘기다. 불교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절대적 존재인 포괄자는 결국 매듭지어질 수 없는 무애无涯의 상태로 세계에 노정露呈시키고 있을 뿐이라고 말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영구히 완결된 전체로서의 그런 존재를 조망眺望할 수 있는 그런 위치에 올라설 수 있을까? 야스퍼스는 현존재現存在를 포함하여 세계의 모든 존재가 궁극의 절대적인 포괄자에 의해 감싸인 상태에서 그 참뜻이 밝혀질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이것이 본래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초월성이다. 결국 야스퍼스의 실존철학에서 포괄자는 실존적인 인간이 그 경계에 도달해야 할 궁극의 목적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현존재인 인간은 어떻게 하면 진정한 실존자가 될 수 있을까? 야스퍼스는 실존을 삶과 정신에 합쳐진 작용으로 보고 있다. 다시 말하면 포괄자의 모든 방식 안에서 현존재는 양극성을 갖고 있는데, 이성이 없는 실존(vernunftlose Existenz)과 실존이 없는 이성(existenzlose Vernunft)이 그것이다. 만일 이성이 없는 실존만을 고집하는 삶이라면 감정과 느낌, 본능과 충동에 충실하게 되지만 맹목적인 폭력이 될 수 있다. 반면에 실존이 없는 이성만을 고집하는 삶이라면 지성적인 보편자, 도식적인 체계를 세울 수 있을지언정 인격을 잃고 역사성을 잃을 수 있기 때문에 공허하고 자의적이 될 수 있다.

    이성과 실존은 분리될 수가 없다. 이성이 무너지면 실존이 상실되고, 실존이 없으면 이성이 무너진다. 이성은 기존의 것을 고집하여 관철하기 위해 실존을 보지 못해서도 안 되고, 실존은 스스로를 투명성으로 이끌기 위해 이성을 보지 못해서도 안 된다. 실존은 이성에 의해 밝혀지고, 이성은 실존에 의해 내용을 가져야 한다. 이와 같이 실존이란 한편으로 체험된 것, 삶으로부터 결단으로 받아들여진 것, 자유와 역사적인 일회성 속에서 개인적으로 얻어낸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논리적인 것, 정신적으로 일관되어 있는 것, 학문적인 의식으로 높여진 것을 모두 포함한다.

    그래서 야스퍼스는 “실존조명(Existenzerhellung)”의 길로 나아가는 방안을 제시한다. 그는 실존이란 대상화될 수 없는 것이므로 ‘실존인식’이라 하지 않고 ‘실존조명’이라 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실존을 조명한다는 뜻은 “실존이 자기 자신이 된다(sich selbst werden)”, “자기 자신을 의식한다(sich selbst bewußt werden)”는 뜻이다. 결국 실존이란 삶과 정신이 합쳐진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 자신을 밝혀감으로써 참된 자기 존재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기존의 완결된 체계 내에서 활용되는 개념만으로는 설명될 수가 없다. 오직 실존철학에 고유한 범주를 통해서 실존이 “조명”될 수 있을 뿐이다. 야스퍼스에게서 실존범주란 바로 ‘자유(Freiheit)’, ‘상호관계(Kommunikation)’, ‘역사성(Geschichtlichkeit)’으로 집약된다.

    실존은 고정된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되어가는 가능적 존재이다. 이는 실존적인 인간이 자기 상실과 자기 보존을 겪으면서 끊임없는 선택의 도정道程에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결단을 재촉받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실존은 자유로운 선택의 순간에 이루어지는 원천으로부터의 자기창조自己創造가 되는 셈이다. 이것이 자유에 의한 실존조명이다. 또한 실존적인 인간은 어떤 독단적인 진리나 개념, 체계 등을 고집하지 않고 타인에게 항상 마음을 열어 두어 배우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는 실존이 타자他者의 자아와 진솔한 유대 관계를 통해서 실현될 수 있음을 뜻한다. 이것이 상호관계에 의한 실존조명이다. 그리고 실존은 언제나 직면할 수밖에 없는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즉 역사성을 안고 있는 특수자로서의 자기존재를 의미한다. 역사성 안에 있다는 뜻은 단순히 시간성으로서의 역사성(필연적 계열을 의미함)만이 아니라 실존적 현존재가 자유의 가능성을 지닌 존재임을 의미한다. 역사성으로서의 실존적인 인간은 과거를 짊어지고 미래를 내다보는 현재의 순간에 대한 충실充實에, 즉 영원한 현재로 초월에 직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역사성에 의한 실존조명이다.

    그럼 이와 같은 실존은 어떻게 자각되고 실현될 수 있을까? 야스퍼스에 의하면 그것은 “한계상황限界狀況(Grenzsituation)” 에 대한 자각에서 출범한다. ‘한계상황’은 무엇을 말하는가? 현존재인 인간은 일정한 역사적 사회적 시대적 상황 속에 살고 있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므로 자신의 주체적인 노력으로 이러한 상황을 변경할 수도 회피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도 있다. 다름 아닌 죽음, 고뇌, 싸움, 죄와 같은 특수한 상황이다. 이것을 야스퍼스는 ‘한계상황’이라 부른다.

    ‘한계상황’ 속에 있는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有限性을 절실하게 깨달을 수밖에 없게 된다. 유한적임을 깨달은 인간은 자신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되는 동시에 포괄자가 주재하는 현실에 눈을 돌린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의 존재 의식을 변혁시켜 본래의 자기 존재에로 회생回生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계상황’은 인간의 실존을 각성하게 하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계기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이 ‘한계상황’에 직면하여 좌절할 때 모든 것은 초월자를 지시하는 암호暗號로 나타난다. 암호란 실존이 청취할 수 있는 초월자의 언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 종류는 무수하게 많다. 모든 현존재, 자연과 역사, 세계와 인간의 통일, 인간의 자유 등은 모두 초월자의 암호일 수 있다.

    초월자를 지시하는 이런 암호는 일반적인 해석으로 기술될 수도 없고, 논증될 수도 없고, 오직 실존의 참된 좌절에서 체험되는 것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암호 해독은 어디까지나 실존을 위한 것이고, 그것을 체험하는 실존에 따라 다양하면서도 독특하게 내려질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실존은 ‘한계상황’에서의 좌절을 통해 초월자의 암호를 해독함으로써 초월자의 절대적인 현실을 확인하게 되고, 본래적인 자기 존재로 회생回生하게 되는 것이다.


    독일의 실존철학은 1920년대부터 시작하여 1930년대까지 크게 유행하다가 1933년에 나치 정권이 들어서자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9월에 프랑스 출신의 사르트르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는 주제로 강연을 시작하자 이때부터 실존철학은 실존주의라는 이름으로 갑작스럽게 유럽 전역에서 유행하게 된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됐던 것일까? 그것은 그의 실존사상을 바탕으로 해서 출범하게 된다. 그의 실존사상은 1943년에 출간한 『존재와 무(L’Être et le Néant)』에서 구체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 책에서 사르트르는, 1940년 나치의 침공으로 패망한 프랑스인들이 적의 침략 앞에 어이없이 무릎을 꿇고 말았기 때문에, 프랑스 사회에 대해 불신과 울분과 회의에 젖게 됐음을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사르트르는 그들이 적을 물리치고야 말겠다는 항쟁심抗爭心에 불타 융합된 저항의 힘을 보여 주었다고 밝힌다. 이러한 상황은 새로운 철학이 부정적 사고를 적극적인 행동의 가능성과 융합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도록 한 것이다. 사르트르는 바로 이러한 새로운 철학을 창조하기에 이른 것이다.

    사르트르의 실존철학은 인간의 존엄성과 극단적으로 자유로움을 바탕으로 해서 전개된다. 이러한 주장을 올바르게 이해하기란 다소 난해한 면이 있다. 그래서 사르트르와 평생 동안 “계약결혼”을 시작하여 끝을 맺었고, 1945년에 그와 함께 『탕 모데른(Le Temps Modernes)』라는 월간지를 편집하였으며, 실존주의에 대한 주요 주제를 해설했던 시몬느 보봐르Simone de Beauvoir의 소설 『초대받은 여자(L’nvitée)』를 통독하면 실존주의를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우선 사르트르의 실존주의가 어떻게 출범하게 되는가에 대한 기본 토대를 잠깐 들여다보자. 그는 인간의 의식 밖에 자체로 존재하는 것과 대상에 관계하는 의식을 구분하고 있는데, 의식 밖에 자체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즉자卽自(en-soi)”라 하고, 대상에 관계하는 의식을 “대자對自(pour-soi)”라고 말한다.

    ‘즉자’는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 사르트르에게서 ‘즉자’는 플라톤의 이데아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세태潛勢態(dynamis), 신의 합목적성과 같은 어떤 존재 근거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냥 자체로 거기에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원인의 결과로 존재하거나 어떤 목적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창조되거나 다른 존재와 관계된 것도 아니고, 형이상학에서 말하는 진리, 신적인 것, 최고의 초월자 같은 것도 아니다. 그는 이러한 ‘즉자’를 무의미한 존재로 취급하고 있는데, 자신의 저서인 『구토(La Nausee)』에서 주인공을 통해 표현한 구토증으로 기술되고 있다.

    ‘대자’는 무엇인가? 그것은 의식의 특성을 지칭한다. 의식이란 항상 무엇에 대한 것으로 지향적 의식을 말한다. 이러한 의식은 원래 자기 자신을 벗어나 자기가 아닌 것을 향하기 때문에 탈자적인 초월적 특성을 갖는다. 따라서 의식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못되고 언제나 즉자와의 관계에서 그의 존재성을 가질 뿐이다. 이러한 의식의 성격을 사르트르는 ‘대자’라 했다.

    앞서 밝혔듯이 의식은 의식 밖에 있는 ‘즉자존재’에 관계해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항상 대상에 대한 의식이다. 우리가 만일 의식만을 떼어내서 생각해 본다면 의식은 자체로 ‘없는 것[無]’이 된다. 사르트르의 실존철학에서 ‘무無’는 중요한 의미를 점유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식작용은 자신이 간직한 ‘무’를 즉자 존재에 침투시켜 존재를 의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의식의 무화작용(의식작용)에 의해서 존재의 의미가 규정됨을 뜻한다. 이러한 의식은 그 자체로 분열되어 있다. 하나는 대상을 지각하는 의식과 다른 하나는 그 대상을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함으로써 자신을 향하는 의식이다.

    그러므로 ‘즉자’인 존재는 충실充實이지만, 분열된 의식은 존재의 충실을 결여하고 있다. 이는 ‘대자’인 의식이 무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존재의 결여이고, 그러한 결여(공허)를 메꾸기 위해 욕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완전한 ‘즉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고 ‘대자’로 있으면서 ‘즉자’로 되기를 원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즉자’로서의 충실성을 누리면서 의식적인 ‘대자’의 특권을 누리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바로 인간이 신적인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망의 소산이라고 보는 까닭이다.

    그러나 ‘즉자’이면서 ‘대자’인 신神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즉자-대자(en-soi-pour-soi)”는 자기 모순적인 개념으로 절대 실현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신이 ‘즉자’라면 신은 존재의 충만성을 소유하게 되겠지만 의식이 없으므로 선善의 실행이나 어떤 합목적적인 활동을 할 수 없다. 반대로 신이 ‘대자’라면 신은 의식을 갖고 있을 것이고 ‘무’가 침투하여 결여를 메꾸고자 활동할 것이다. 이러한 신은 완전성과 합목적적인 인격적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모순된 측면을 갖게 된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유지되어 왔던 완전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르트르는 창조주로서의 충만한 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신론적 입장에서 실존사상을 전개한다. 신이 없기 때문에 신이 설계한 세계도 없고, 신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결정하여 인간에게 부여한 고정된 본질도 없다. 그래서 인간의 본질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이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즉 “인간은 자기 자신이 만드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L’homme n’est rien d’autre que ce qu il se fait).” 따라서 ‘대자’로서의 인간은 실존이며, 실존은 본질에 앞서는 자유롭고 창조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인간은 세계를 초월해 가는 자각적 주체로서 언제나 자기를 초월하는 존재이다. 이는 인간이 끊임없이 자기 밖으로 자기를 내던져 미래를 향해 현재를 뛰어넘는 기획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스스로 미리 내던진 가능태를 향해서 자유롭게 선택하고 계획하여 자기를 실현해 가는 존재이다. 이러한 입장을 사르트르는 인간이란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는 표현을 쓴다. 인간의 의식은 ‘무’를 간직하고 있어서 빈 공허를 메꾸려는 욕구가 있고, 이러한 욕구는 곧 자유에서 나오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는 인간이 자유로이 선택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운명적으로 주어진 자유다.

    운명적으로 타고난 자유는 맹목적이거나 방종도 아니고, 맹목적으로 행동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서 사르트르는 오히려 행동의 책임을 강조한다. 이는 각자의 실존이 스스로가 선택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각자의 존재 방식에 책임지지 않을 수 없는 존재임을 뜻한다. 이러한 책임과 관련하여 실존자는 각자의 선택과 동시에 전 인류의 존재를 선택한다. 왜냐하면 선택은 선택되는 것에 대한 가치 평가를 전제하고, 이러한 가치 평가는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행위는 언제나 인류 전체의 선택이라는 귀결이 된다.

    3) 현상학(Phänomenologie)


    20세기 초에는 전통적인 의미의 인식론을 극복하려는 새로운 철학적 사유의 운동이 일어난다. 바로 객관과 본질에로의 전환을 문제 삼은 현상학現象學(Phänomenologie)이 그것이다. 현상학의 모토, 즉 “사태 그 자체에로 돌아가라(Zurück zu den Sachen selbst)!”는 구호는 이를 말해 주고 있다.

    현상학은 본래 탐구 방법일 뿐이다. 이는 현상들이 본래 갖고 있는 본질, 즉 현상의 내용을 논리적으로 기술하는 작업을 말한다. 그럼 현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의식에 나타나 있는 것, 한마디로 체험(Erlebnis)이다. 이렇듯 현상학은 의식에 나타나 있는 것을 철학적 탐구의 영역으로 삼고 있다. 다시 말하면 사태에 충실하게 감정을 이입하는 직관과 발견의 도움을 받아 사태 그 자체의 본질 내용을 기술하는 처방이 바로 현상학이라는 얘기다.

    이러한 의미의 현상학은 진리인식의 명증적인 지반을 찾고, 이 지반이 모든 인식의 최종적인 원천임을 철저하게 규명하는 작업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을 발전시키는 데에 결정적으로 원동력이 된 철학자는 독일 출신의 에드문트 후설Edmund Gustave Albrecht Husserl(1859~1938)이고, 그가 제시한 내재적인 의식 현상의 영역을 넘어서 가치, 인간, 세계, 신(하나님) 등의 커다란 주제에로까지 확대하여 현상학을 완성한 철학자는 막스 셸러Max Scheler(1874~1928)이다.

    철학자로서 후설의 고민은 우리가 의식 밖의 대상을 어떻게 하면 진정으로 알 수 있을까 하는 문제였다. 그가 제창한 철학적 사유의 중심은 무엇이 참된 지식의 근거를 제공하는가 하는 인식認識에 있었던 것이다. 이 문제는 결국 사실과 사실에 대한 우리의 사고를 어떻게 일치시킬 것인가 하는 것으로 집약된다.

    후설은 인식에 있어서 먼저 경험이 믿을 만한 가치가 있는 자료임을 받아들인다. 이는 영국의 경험주의 입장을 따른 것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 의해 경험되는 사물에 집중할 것을 권장한다. 왜냐하면 현상학적 방법은 경험적인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그는 “본질개념(Wesensbegriff)”에 대한 인식을 문제 삼는다. 여기에서의 본질은 전통적으로 형이상학에서 추구했던 그런 불변하는 실재, 즉 현상의 배후에 근원으로 실재하는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논리적이고 관념적인 성격을 띤 객관적인 의미 요소를 말한다. 이러한 의미 요소는 바로 현상의 사태(Sache)와 짝이 되는 본질을 이루는 것으로 판단된다.

    모든 본질은 현상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가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현상으로 드러난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여 기술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만일 의식에 아무것도 없다면 사태는 없을 것이고, 현상 또한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상학은 의식에 주어져 있는 사태를 직시하고 그것을 해명하면 되는 방법론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현상학의 목표는 사태 자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의식에 나타나는 현상을 정확히 파악하여 기술할 때 가능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식은 항상 대상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의식은 무엇에 대한 의식, 즉 우리가 무엇인가를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의식이다. 이것을 후설은 의식의 “지향성(Intentionalität)”이라고 했다. 그런데 의식의 대상은 우리의 의식과 독립하여 자체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의식에 없는 대상은 존재한다고 말하거나 사유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구성하는 원천인 의식의 내부로 돌아가야 한다.

    의식 내부로 돌아가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인식론에 있어서 대상 자체가 아니라 대상을 인식하는 의식주관으로 전환하는 선험적 태도를 필요로 한다. 여기에서 ‘선험적’이란 인식을 형성하는 궁극의 원천, 즉 주관으로 되물어 가려는 동기를 의미한다. 이러한 방법을 후설은 “현상학적 환원(Phänomenologische)”이라 부른다. 이 방법을 통해 우리는 의식 내부로 돌아가 사태 자체, 즉 사물의 본질을 밝힐 수 있다는 얘기다.

    여기에서 말하는 ‘환원’에는 두 가지가 있다. “형상적 환원(eidetishe Reduktion)”과 “선험적 환원(transzendental Reduktion)”이 그것이다. “형상적 환원”은 사물을 인식비판적으로 검토함이 없이 사물의 본질을 찾아내는 절차인데, 세 가지 태도로 구분된다. 자연적 태도, 인격주의적 태도, 자연과학적 태도가 그것이다. 자연적 태도는 대상을 자명한 존재로 확신하여 지각하지만, 지각의 주체인 인격을 아주 도외시하는 태도이고, 인격주의적 태도는 지각주체인 인격을 중심으로 사물을 지각하기 때문에 소박하게 확신하는 태도이고, 자연과학적 태도는 모든 대상을 일정한 방법이나 기구를 매개로 하여 정확하게 관찰하고 분석하여 성질이나 구조를 설명하는 태도이다. 이들 세 가지 태도는 경험적인 대상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자명한 사실로 확신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본질 인식에 중요한 것은 “선험적 환원”이다. 선험적 환원은 자연적 태도의 일반 정립을 비판하고, 모든 인식의 형성과 인식하는 자기 자신과 인식 생활에 관한 자기 반성의 최종 근거를 반문하는 태도를 말한다. 후설은 철학을 엄밀한 학문으로 정립하기 위해 앞의 세 가지 태도를 비판하고 선험적 태도로 돌아가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선험적 태도에서 결정적으로 필요한 것은 판단중지(Epoche)이다. 여기에서 판단중지는 고대 그리스의 회의주의자(피론Pyrrhon, 기원전 360~270년 경)가 말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피론의 회의론은 모든 사물에 대해 단지 속견俗見만을 가질 뿐 진리 인식이란 불가하기 때문에 단정적인 판단을 중지하고 진리 탐구를 체념함으로써 안심입명安心立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후설이 제안한 판단중지는 객관적인 인식의 가능성을 입증하기 위해서였다. 요컨대 멀리서 개가 짖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낯선 사람이 지나간다,’ ‘호랑이가 개에게 접근하고 있다’, ‘개가 배가 몹시 고프다’, ‘누군가 개를 괴롭히고 있다’는 모든 판단을 중지하고 의식 내부로 들어가 그 본질을 직시해 보라는 뜻이다.

    후설의 판단중지는 앞서 말한 “형상적 태도(자연적 태도, 인격주의적 태도, 자연과학적 태도)”가 취하는 세계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배제하고 괄호 침(주체와 대상의 ‘한데 묶기’)을 의미한다. 판단을 중지해야 일종의 사유 실험을 통한 자유로운 변경이 가능하며, 자유로운 변경을 통해 같은 성질을 가진 요소들을 분류하여 이것들을 체계적으로 서술하도록 정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에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현상학적 잔여(Residium)”라 부르는데, 이것이 바로 판단중지를 통해 얻어 낸 불변하는 본질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형상적 환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형상적 환원”은 판단중지, 자유로운 변경, 기술을 통해 사물의 본질을 찾아내는 절차이기 때문에 본질적 환원이라 불린다.

    “형상적 환원”을 통해 얻어낸 본질을 다시 의식내재로 환원하는 절차가 아직 남아 있다. 이것이 바로 “선험적 환원”이다. “선험적 환원”이란 무엇인가? “형상적 환원”은 사물의 본질을 찾아내는 것이기 때문에 경험적 현실성을 넘어서 초월적인 것이 되기 쉽다. 여기에서 후설은 초월적 존재를 순수의식으로 내재화하는 절차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이 과정을 “선험적 환원”이라 하는데, 이는 ‘현상학적 잔여’들을 순수의식으로 직관하여 사상 자체, 즉 순수의식의 보편적 본질을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렇다고 현상에 대한 참된 본질 인식이 산출된 것은 아니다. 순수의식은 각 개인의 주관적인 것이므로, 그 체험 내용의 객관성을 아직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설은 이런 문제점을 ‘상호주관성’과 ‘생활세계의 이론’으로 보완하고 있다. ‘상호주관성’이란 사회공동체적 의식을 말한다. 즉 우리의 인식 주체는 순수한 개인의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상호주관성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하고 그것이 진리라고 인정된다면, 이는 진리임이 개인으로서의 자신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는 공동체적 사회인식에 의해 결정됨을 말한다.

    후설은 인식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상호주관성’을 내세웠고, 그 기반이 되는 것을 ‘생활세계Lebenswelt’에서 찾고 있다. 생활세계란 어떤 세계인가? 우리의 판단의 근원적 토대는 개별적 대상이고, 개별적 대상이란 언제나 어떤 전체 속에 있는 개체인데, 개별적인 대상을 파악할 때는 그 대상이 이미 생활세계 속에 주어져 있다. 그러한 생활세계는 무질서하거나 막연하게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생활세계는 지평구조로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결국 개체는 생활세계 속에서 부각되어 개인에게 촉발되어 파악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경험은 이렇게 일정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생활세계 위에서 이루어지는데, 우리가 어떤 대상을 파악한다는 것은 이러한 생활세계 속의 동형으로서 파악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인식의 명증적 토대를 찾고자 하는 현상학자는 모든 개별적 경험의 보편적 기반으로서 우리 눈앞에 주어져 있는 ‘생활세계’로 귀환하여야 한다. 본질에 대한 진리 인식은 바로 그러한 기반 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삼신 하나님께서 참마음을 내려주셔서[一神降衷] 사람의 성품은 삼신 하나님의 대광명에 통해 있으니[性通光明] 삼신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깨우쳐서[在世理化]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라[弘益人間].”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


    후설의 현상학적 방법을 극대로 확대하여 현상학을 완성한 철학자는 막스 셸러Max Scheler이다. 왜냐하면 그는 후설이 의식 내부로 들어와 사태의 본질을 밝히는 내재적 철학을 가치, 인간, 세계, 절대자(신)의 영역에까지 넓혀 나갔기 때문이다.

    셸러가 수행한 철학적 주요 업적은 뭐니 뭐니 해도 가치의 영역을 발견하여 학문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점이다. 그에 의하면 원천적으로 낡은 가치도 새로운 가치도 없고, 그저 가치들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가치는 인간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오직 발견되는 것이다. 이는 문화와 역사의 진보에 따라 인간의 시야에 새롭게 들어오는 것이 가치라는 얘기다.

    그저 있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가치를 알기 위해서는 그것을 단순히 쳐다보는 수밖에 없다. 쳐다보더라도 가치를 볼 눈이 없는 사람은 가치를 알지 못한다. 요컨대 유물론적인 사고에 젖어 있는 사람은 가치를 보는 눈이 멀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어떤 형식에 얽매여 있어도 가치를 볼 수 없게 된다. 자신의 형식주의 때문에 윤리적인 선善의 가치 내용을 간파하지 못했다고 셜러가 칸트Kant를 비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셸러에 의하면 사물은 자체로 독자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고, 오로지 그 내용을 통해서 그 가치가 정당화된다. 요컨대 인간의 어떤 행위가 윤리적으로 가치 있게 되는 것은 그것이 보편타당한 법칙으로 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윤리적으로 가치 있는 행위이기 때문에 보편타당한 법칙으로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사회에서 봉사 활동을 하는 경우에나 부모님께 효도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여기로부터 후설이 말한 현상학적 본질직관은 셸러에게 있어서 가치직관으로 전환이 된다고 본다.

    그렇다면 인간은 가치에 대해 알 수 있는 능력이 구비되어 있을까? 셸러는 감각적인 사물이란 지각되는(wahrnehmen) 것이고, 그 개념이란 생각되는(denken) 것이고, 그 가치란 느껴진다(fühlen)고 말한다. 가치를 느끼는 것은 바로 가치들을 냄새 맡는 지향적인 작용 때문이다. 이것을 셸러는 가치감각이라고 한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누구나 가치를 느끼는 그러한 감각을 갖게 된다. 이는 심리학에서 즐거움[快]이나 즐겁지 않은[不快] 것을 느끼는 심리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동양의 유가儒家에서 “인의예지仁義禮智”와 같은 사단지심四端之心이 발현되는 상태에서 느껴지는 가치감각에 가깝다.

    가치감각을 바탕으로 하여 인간은 인간다움이 형성된다. 인간다움에서 인격人格이 나온다. 인간은 여러 사물들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인간에게는 인격이라는 것이 있어서 다른 사물들과 현격하게 구분이 된다. 그러한 인격은 타고날 때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되어가는 것’이다. 이는 인격이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처럼 인간의 본질적인 것으로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또한 인격은 심리적인 작용의 총화와 같은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심리적인 작용이란 인격이 이용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격은 가치감각이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 형성될 수 있고, 끊임없는 행위로 그 전모가 드러난다. 인격을 드러내는 행위는 다른 사물들처럼 인과적 결정이나 유전인자나 어떤 환경에 의해 지배를 받지 않는다. 인격은 자유로움 속에서 가치들을 실현해 감으로써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격적인 행위만이 마음의 내적인 질서와 부합하게 된다. 그러한 사람은 가치의 세계에 참여하는 존재가 되고, 결국 최고의 가치존재인 근원의 인격적 존재, 즉 절대적인 신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셸러가 제시한 인격주의는 우주 전체에 있어서 인간의 지위를 굳히는 학설이 되는데, 이는 인간이 가치감각과 본질에 대한 앎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정신(Geist)이 되고, 이 정신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구분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타의 동물은 비록 생각하고 목적을 헤아리는 성향을 가질지라도 진리와 가치세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인간만이 본질과 가치를 직관하는 정신을 통해서만 인격적인 인간으로 되어 가는 존재이다.

    결과적으로 볼 때, 정신은 세계의 과정 전체에 관여하고 있다. 헤겔이 말한 이념과 마찬가지로 정신은 세계에서 생겨나는 것을 순화하게 함으로써 세계화 과정이 완성된다. 그런 세계화 과정을 이루는 한 단체團體가 인간이다. 우주적인 삶이 세차게 발전해 가는 시간적인 지속 중에서 인간은 신적인 것 자체가 되어 가는 과정에 짜 넣어져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신적인 것이 아직도 진행 중인 한, 빛과 어둠의 극적인 투쟁 속에서 가치실현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신적인 것이 완성되는 날 모든 가치실현 또한 완성되는 것이다.

    ☞ 다음 호 목차 4) 변종 존재론 5) 분석철학(Analytic Philosophy) 6) 사회철학(Social Philoso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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